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6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3:08:03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7막 — 문패를 고르는 밤

그레이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문밖의 복도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까지 낮은 목소리와 찻잔 소리가 머물던 자리에는 길게 이어진 나무 바닥이 놓여 있었고, 그 끝에는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정원이라고 부르기에는 흙이 적고,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는 등불이 많았다. 바닥에는 둥근 돌들이 박혀 있었고, 돌 사이에는 짧은 풀들이 자라 있었다. 풀잎 끝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고 작은 불빛을 품고 있었다. 문밖에 붙어 있던 푸리나의 삐뚤어진 별 표식은 아직 그대로였다. 한쪽 끝이 조금 접힌 채로, 아주 당당하게 문을 지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 별 표식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커튼 고리가 아니라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융은 복도 끝의 정원을 보고 있었는데, 표정이 조금 묘했다. 창문도 아닌데 창밖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푸리나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

“나왔네.”

그레이는 문가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다리는 장면도 극이니까 괜찮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이 극은 점점 연출자한테 편리한 규칙이 늘어나는 것 같은데.”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편리한 규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남용되면 질문이 필요해지지요.”

푸리나는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 지금 나한테 질문 예고한 거야?”

“아직은 예고에 그치겠습니다.”

하융이 낮게 웃었다.

“예고편이 본편보다 길어지지 않기를 바라오.”

푸리나는 작게 손뼉을 치려다, 밤의 여관거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손끝만 맞댔다.

“좋아. 오늘은 모두가 적당히 참아주고 있어. 아주 훌륭한 관객들이야.”

죠니가 말했다.

“관객이라기엔 다들 너무 많이 걷고 있는데.”

“걸어 다니는 관객도 있을 수 있어.”

“그럼 발값도 받아야겠네.”

하융은 잠시 자기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몇 막째 관람료를 낸 셈이오.”

그레이는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웃었다. 방 안에서 쉬고 나온 뒤라서인지, 그 웃음은 전보다 조금 쉽게 나왔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고도 과장되게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눈만 살짝 휘어졌다.

복도 끝의 정원에서는 등불지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이번에도 자기 등불을 들고 있었지만, 불빛이 전보다 낮았다. 낮아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이제 가까이 있는 것들만 비추려는 듯했다. 등불지기는 그레이가 다가오자 정원 안쪽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고르면 돼요.”

그레이는 멈췄다.

“무엇을 말입니까?”

“가지고 나갈 것.”

정원 한가운데에는 낮은 탁자가 있었다. 탁자는 돌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여러 문패가 놓여 있었다. 빵 조각, 물동이, 편지 봉투, 젖은 신발, 깨진 숟가락, 등불 심지, 붉은 끈, 빈 접시. 그 외에도 몇 개가 더 있었다. 금 간 찻잔, 작은 종이배, 녹슨 못, 접힌 손수건, 낡은 빗, 물에 젖은 나무패. 문패들은 모두 작았고, 각각의 표면에는 아주 약한 빛이 고여 있었다.

그레이는 탁자 앞에 섰다. 문패들은 조용했다. 그녀가 이름을 묻지 않아도, 문패들은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놓여 있었다. 오래 놓여 있었던 물건처럼, 그리고 누군가 방금 내려놓은 물건처럼.

푸리나는 그레이보다 조금 뒤에 섰다. 죠니는 접시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고,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탁자에 올려놓지 않았다. 하융은 정원 입구의 돌 하나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정원 안쪽에서 여관의 성좌가 걸어왔다. 그는 처음 접수대에서 보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정한 앞치마, 흔들리지 않는 열쇠 꾸러미, 낮고 정중한 목소리. 다만 이번에는 접수대가 없었다. 그는 문패들이 놓인 탁자 곁에 서서 그레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쉬셨습니까, 손님.”

그레이는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조금 앉아 있었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대답입니다.”

“좋은 대답입니까?”

“여관에서는 때로 ‘조금 앉아 있었다’는 말이 긴 여행기보다 정확합니다.”

푸리나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여관 주인답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말은 좀 인정.”

레이튼은 미소만 지었다. 하융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의 성좌는 탁자 위의 문패들을 가리켰다.

“돌아가기 전에 하나를 고르셔야 합니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하나만입니까?”

“오늘 밤 손님으로 가져갈 것은 하나입니다.”

그레이의 시선이 빵 조각 문패에 닿았다. 식탁의 방에 있던 반쯤 먹은 빵이 떠올랐다. 죠니가 내민 빵도, 손님 방에서 끝까지 먹은 작은 조각도 함께 떠올랐다. 다음으로 물동이를 보았다. 대기실에서 흐려졌던 물동이 손잡이, 물의 방에서 따뜻하게 흔들리던 욕조의 물, 대야의 물. 편지 봉투는 아직 봉하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고, 젖은 신발은 돌 하나를 빼낸 뒤 조금 방향을 바꾸어 놓인 채였다.

그녀는 손을 뻗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가 물었다.

“고르기 어렵습니까?”

“네.”

“전부 가져가고 싶으십니까?”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전부 가져간다는 말은 이상했다. 손에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져간 뒤 어디에 둘 것인가. 장부에 끼울 것인가, 책상 위에 둘 것인가, 방 안에 걸 것인가. 문패들은 여기에 놓여 있을 때 더 조용해 보였다. 탁자 위에서 서로의 빛을 침범하지 않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기다렸다.

그레이는 다시 문패들을 보았다. 녹슨 못 옆에 놓인 작은 종이배가 조금 젖어 있었다. 붉은 끈은 스스로 엉키지 않도록 느슨하게 말려 있었다. 빈 접시는 가장자리만 낡았고, 가운데는 깨끗했다. 등불 심지는 물의 방에서 보았던 젖은 심지와 달리 마른 상태였다.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심지였다.

그레이는 그 심지를 오래 보았다.

푸리나가 아주 낮게 말했다.

“고르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는 없나?”

여관의 성좌는 푸리나를 보았다.

“극장주께서 그렇게 묻는군요.”

푸리나는 조금 머쓱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내가 고르는 건 아니지만.”

“맞습니다. 그러나 좋은 동행자는 종종 손님보다 먼저 불편함을 알아차립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칭찬인지 지적인지 애매했지만, 이번에는 받아들이기로 한 듯했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 반드시 하나의 물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죠니가 레이튼을 보았다.

“또 시작이네.”

“아직 질문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 자체가 시작 같은데.”

하융은 정원의 물방울을 보며 말했다.

“때로는 손에 쥐는 것보다, 두고 나가는 법을 고르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소.”

그 말에 그레이는 하융을 보았다. 하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가 말한 뒤에도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풀잎 끝에 매달린 등불빛만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레이는 탁자 위에 손을 올리지 않은 채, 여관의 성좌에게 물었다.

“문패들은 이곳에 남아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남으면…… 잠듭니까?”

“준비가 된 것은 잠듭니다.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은 더 머뭅니다. 어느 쪽이든, 급히 치우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그 대답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탁자 위의 문패들을 하나씩 보았다. 이번에는 고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사하기 위해 보는 것 같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녀는 눈으로만 지나가지 않았다. 아주 짧게, 그러나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천천히 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그녀가 집은 것은 문패가 아니었다. 탁자 가장자리에 놓여 있던 작은 등불이었다. 등불은 장식처럼 보였고,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문패들 사이의 빛을 보태는 도구 정도로만 보였다. 안쪽에는 불이 없었다. 기름도 거의 없었다. 다만 손잡이가 있었다. 들고 걸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여관의 성좌가 그 등불을 보았다.

“그것을 고르시겠습니까?”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문패들은 두고 가겠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져가십니까?”

그레이는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잡았다. 매우 가벼웠다. 그러나 비어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것을…… 빌려가겠습니다.”

정원은 잠시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숨을 참았고, 죠니는 접시를 조금 낮췄다. 레이튼은 찻주전자의 손잡이에 닿은 손가락을 멈췄고, 하융은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여관의 성좌는 그레이를 보았다. 부드러운 눈이었다. 그러나 규칙을 확인하는 사람의 눈이기도 했다.

“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빌려간다고 하십니까?”

그레이는 등불을 보았다.

“돌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입니까?”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언제. 그 질문은 날짜를 묻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등불을 더 이상 들지 않아도 될 때인지, 누군가 다른 손님에게 필요해질 때인지, 혹은 자신이 다시 이 거리의 문을 지나올 때인지 알 수 없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대신해 말하려다 멈췄다. 죠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질문을 보태지 않았고, 하융은 기다렸다.

그레이는 천천히 말했다.

“다시 와야 할 때가 오면요.”

여관의 성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때까지 맡기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등불에 손끝을 대자, 불이 붙었다. 아주 작은 불이었다. 빛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모두 비추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레이의 손과, 손목의 등불패와, 발밑의 돌 하나를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푸리나는 그 빛을 보고 낮게 말했다.

“작네.”

여관의 성좌가 대답했다.

“작은 빛은 오래 보아야 합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건 좋아.”

죠니가 접시를 들고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그럼 하나 빌렸으니까, 하나는 먹어.”

그레이가 눈을 깜박였다.

“네?”

죠니는 접시 위의 마지막 말린 과일 조각을 보여주었다.

“정산. 빛만 들고 가면 너무 허전하잖아.”

푸리나가 작게 웃었다.

“죠니식 의례네.”

“아주 실용적인 의례지.”

그레이는 말린 과일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먹어도 돼. 이번 건 작으니까.”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죠니 경의 권유가 점점 세련되어지는군요.”

죠니가 말했다.

“교수, 그 말은 좀 불안한데.”

“칭찬입니다.”

“포장지 얇게 해줘서 고맙네.”

하융은 그레이가 든 등불을 보며 말했다.

“그 빛은 장대한 등불이 아니오. 허나 발밑 하나를 비추기엔 족하구려.”

푸리나는 하융을 보았다.

“그 말은 내가 사고 싶어.”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전하께는 비싸게 받아도 되오?”

“왜?”

“왕실 예산이 있을 테니.”

죠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하융, 그건 위험한 말이야.”

레이튼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재정 담당자가 부재한 자리에서 왕실 예산을 논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푸리나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막 쓰는 사람처럼 보여?”

죠니, 레이튼, 하융이 동시에 아주 짧게 침묵했다.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좋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자.”

그레이는 말린 과일 조각을 손에 든 채 웃었다. 이번에는 작게 숨이 새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입술 끝을 올렸다. 여관의 성좌도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은 듯했다.

등불지기가 탁자 위의 문패들을 바라보았다.

“두고 가도 괜찮아요?”

그 질문은 그레이에게 향해 있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작았다.

그레이는 문패들을 보았다. 빵, 물동이, 편지, 신발, 숟가락, 심지, 끈, 접시. 그중 몇 개는 아직 빛이 흔들리고 있었고, 몇 개는 이미 깊이 잠든 듯 고요했다.

“네.”

그녀는 조금 뒤에 덧붙였다.

“여기에 계시는 편이 좋아 보입니다.”

등불지기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요.”

정원 끝에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없었던 문이었다. 크지 않고, 낡지도 않았으며, 문고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었다. 그 종은 터널 끝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아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그 문을 가리켰다.

“이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그레이는 손목의 등불패와 손에 든 작은 등불을 번갈아 보았다. 등불패에는 진흙 자국과 인주 자국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손의 등불은 깨끗했다. 둘은 서로 달랐다. 하지만 나란히 있으니 어색하지 않았다.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갈까?”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등불지기가 앞장섰다. 아이는 정원 끝의 문까지 걸어가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여전히 젖은 신발이었지만, 이제 그 신발 끝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지 않았다. 그레이는 그것을 보았다. 아이가 알아차렸는지,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마른 건 아니에요.”

그레이는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덜 젖었어요.”

“다행입니다.”

등불지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말하려 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죠니도 접시를 조용히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찻주전자를 두 손으로 받쳤고, 하융은 문 위의 작은 종을 보았다.

여관의 성좌가 마지막으로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맡기신 이름과 짐은 접수대에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네.”

“다만 손님으로 머문 시간은 돌려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레이는 그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도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머물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등불을 든 채 고개를 숙였다.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처음의 접수대가 보였다. 세 개의 나무 접시와 작은 서랍, 그리고 거리에 들어올 때 맡겼던 것들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한 걸음 내디뎠다. 작은 등불의 빛이 발밑의 돌을 비추었다. 빛은 멀리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걸음이 놓일 자리만큼은 보였다.

그녀는 그 빛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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