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238)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38익명의 참치 씨(7420cdcd)2026-05-24 (일) 13:17:50
#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손님》

## — 등불을 든 사람도 쉬어야 하는 밤 —

### 후일담 — 작은 등불과 식은 차

차는 다시 데워졌다. 레이튼은 어디서 작은 화로를 가져왔는지, 그레이의 방 바깥 복도 한쪽에 찻주전자를 올려두었다. 화로의 불은 크지 않았고, 물은 급하게 끓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번 주전자를 들여다보려다가, 레이튼이 “차는 재촉하면 떫어집니다”라고 말하자 얌전히 물러났다. 죠니는 접시를 들고 의자 하나를 끌어왔고, 하융은 열린 문가에 서서 방 안의 작은 등불을 바라보았다. 극장은 이미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낡은 천막, 소품 상자, 먼지 낀 의자, 바닥에 남은 오래된 못 자국. 그러나 그레이의 책상 위에는 여관거리에서 빌려온 작은 등불이 있었다. 그 등불은 극장 소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부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마지막 줄의 잉크는 완전히 말라 있었다. 그 사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래 두면 잉크는 마른다. 촛불을 줄여두어도, 방을 비워두어도, 누군가 잠시 다른 문을 지나 다녀와도, 마를 것은 마른다. 그레이는 표지를 한 번 손끝으로 만졌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하지만 손끝은 바로 책갈피를 찾지 않았다. 대신 장부 옆에 놓인 작은 등불의 손잡이를 살짝 돌렸다. 등불은 조용히 흔들렸다.

푸리나는 그레이 앞의 의자에 앉지 않고, 책상 옆에 기대어 섰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더니,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평소라면 극장주처럼 서서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앉는 편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어땠어?”

그레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찻잔이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을 보았고, 레이튼이 차를 따르기 전까지 기다려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조용했습니다.”

푸리나는 기대했던 대답과 조금 달랐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게 감상 전부야?”

“아직 정리 중입니다.”

“그럼 조용했다부터 시작하면 되겠네.”

죠니가 접시를 책상 가장자리 가까이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먼저 장부와 잉크에서 떨어진 자리를 확인했다. 접시 위에는 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말린 과일은 거의 없었다. 하융과 레이튼이 중간중간 가져간 탓이었고, 죠니는 그것을 꽤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정리할 때 먹으면서 해도 돼.”

그레이는 접시를 보았다.

“아까 먹었습니다.”

“알아. 그래서 이번에는 더 쉽게 먹을 수 있지.”

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의 식사 논리, 오늘 점점 강해지네.”

레이튼이 차를 따르며 말했다.

“반복된 성공이 이론을 강화한 듯합니다.”

죠니는 레이튼을 보았다.

“교수, 내가 빵 권하는 걸 학파로 만들지는 마.”

하융은 문가에서 낮게 말했다.

“빵 권유학이라. 민생에는 꽤 유익한 학문 같소.”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융까지 합류했어.”

하융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와 빵이 앞에 있으면 사람은 신중한 척하기 어려운 법이오.”

레이튼은 하융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 말은 상당히 실증적입니다.”

“나는 학문을 만들 생각은 없소.”

“이미 늦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죠니가 작게 말했다.

“교수는 방심하면 뭐든 학문으로 만들어.”

그레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찻잔을 받았다. 찻잔은 따뜻했다.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의 식은 찻잔과 달랐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에 남아 있던 작은 냉기가 천천히 풀렸다.

푸리나가 조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방에서 오래 있고 싶었어?”

그레이는 찻잔의 수면을 보았다. 차 위에는 작은 등불의 빛이 비쳤다. 흔들림이 작았다.

“오래는…… 아닙니다.”

“응.”

“하지만 바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그럼 좋은 방이었네.”

그레이는 대답 대신 찻잔을 조금 들어 올렸다. 차는 향이 약했다. 레이튼이 일부러 그렇게 우린 듯했다. 너무 강한 차는 늦은 밤의 방에 맞지 않았다.

죠니가 접시를 밀어주었다.

“빵.”

그레이는 이번에는 “나중에”라고 말하지 않았다. 작은 조각 하나를 집었다.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도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주전자 뚜껑을 닫았고, 하융은 시선을 살짝 내려 웃음을 감추었다.

그레이는 빵을 먹었다. 조각은 작았다. 금방 사라졌다. 그러나 씹는 동안 방 안의 시간이 조금 느려졌다. 장부는 열리지 않았고, 촛불은 줄어들지 않았고, 복도 밖의 극장도 잠시 조용했다.

레이튼이 물었다.

“돌려받은 것들 중 가장 낯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레이는 주머니를 떠올렸다. 빈칸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 그녀는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낼까 하다가, 꺼내지 않았다.

“빈칸이 있었습니다.”

푸리나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

“빈칸?”

“네. 제가 맡긴 것은 아니었는데, 손님 방에서 생겼다고 했습니다.”

죠니는 접시 위의 빵가루를 손끝으로 모았다.

“그거 좀 수상한데.”

레이튼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수상하지만, 좋은 수상함일 수도 있습니다.”

“교수, 좋은 수상함이란 말은 좀 이상해.”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여백에는 대개 그런 인상이 있습니다.”

하융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비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있소. 너무 꽉 찬 방에는 손님이 앉을 곳이 없지 않겠소.”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오늘도 장사할 생각 없어?”

“폐점 후 발언이오.”

“그럼 외상으로 적어둘게.”

그레이는 그 말을 듣다가, 조용히 소매 안쪽 주머니를 눌렀다. 빈칸은 거기에 있었다. 접히지 않았다.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지금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중요한 것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소매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푸리나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이건 어디 둘 거야?”

그레이도 등불을 보았다. 책상 위, 장부 옆. 우연히 놓은 자리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촛불은 방 전체를 밝혔고, 작은 등불은 장부 가장자리만 비췄다. 둘의 빛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당분간은 여기 두겠습니다.”

“장부 옆?”

“네.”

죠니가 말했다.

“불 조심.”

그레이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등불 밑에는 작은 받침을 두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죠니가 한마디 하자마자 실무로 들어갔어.”

죠니는 만족스러운 듯 접시를 당겼다.

“좋은 반응이야. 불 조심은 실무가 맞아.”

레이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받침은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금속보다는 두꺼운 도자기가 좋겠군요.”

하융이 천천히 말했다.

“등불 하나에도 회의가 열리는구려.”

푸리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다운 귀환식이야.”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귀환식. 조금 전 그레이가 작다고 했던 말. 차와 빵, 등불 받침, 식은 찻잔, 아직 펼쳐지지 않은 장부. 거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 안에는 그 말이 놓일 정도의 자리가 있었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전하.”

“응.”

“오늘 극은…… 제가 무엇을 새로 배웠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응.”

그레이는 말을 천천히 골랐다. 길게 설명하려 하면, 방금 지나온 거리의 등불들이 종이 위에서 너무 빨리 굳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짧은 말들만 골랐다.

“이름을 맡겼고, 돌려받았습니다. 장부도 돌아왔습니다. 문패들은 그곳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빵을 먹었습니다.”

죠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하지.”

푸리나는 죠니를 한 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작은 등불을 보았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리고 조금 뒤,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응. 충분해.”

레이튼은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하융도 무언가 말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침묵했다. 죠니는 접시를 그레이 쪽으로 다시 밀지 않았다. 이미 그녀가 먹었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잠시 차 마시는 소리만 남았다.

그레이는 마침내 장부를 펼쳤다. 모두가 아주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그녀는 새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책갈피가 끼워진 마지막 줄을 확인했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고, 표시는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래에 바로 새 기록을 쓰지 않았다. 대신 빈칸을 꺼냈다. 여관에서 받은 작은 쪽지. 그것을 장부 맨 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장 사이에 끼웠다.

푸리나가 물었다.

“거기 넣어두는 거야?”

“네.”

“뭐라고 쓸지는 아직 안 정했고?”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요.”

죠니가 말했다.

“좋네. 빈칸다운 대우야.”

레이튼은 조용히 웃었다.

“동의합니다.”

하융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언젠가 글자가 앉을 자리도, 지금은 쉬어도 되겠지요.”

푸리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톡 건드렸다.

“오늘은 다들 여관에 물든 것 같네.”

“전하도 포함입니다.”

그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었다.

“맞아. 나도 포함.”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이번에는 다시 바로 펼치지 않았다. 작은 등불이 장부의 표지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에서 표지의 닳은 모서리가 조금 부드럽게 보였다.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 고리를 손가락에 걸었지만, 막을 내리는 동작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저 방 안을 둘러보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늘 극은 여기서 닫을게.”

죠니가 말했다.

“박수는?”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늘은 손뼉 말고, 찻잔.”

레이튼은 그 뜻을 이해한 듯 자기 찻잔을 살짝 들었다. 하융도 찻잔을 들었고, 죠니는 접시를 들었다가 푸리나에게 눈총을 받고 빈 찻잔을 대신 들었다. 그레이는 자기 찻잔을 들었다. 모두의 잔이 아주 작게 부딪혔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들렸다.

푸리나가 말했다.

“다녀온 손님에게.”

죠니가 덧붙였다.

“그리고 남은 빵에게.”

레이튼이 미소 지었다.

“아직 쓰이지 않은 빈칸에게.”

하융이 낮게 말했다.

“작은 등불에게.”

그레이는 잠시 찻잔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기다려준 방에게.”

잔들이 다시 조금 흔들렸다. 차는 식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마실 수 있었다. 방 밖의 극장은 조용했고, 장부는 닫혀 있었고, 작은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찻잔을 내려놓고, 장부 옆의 등불 받침을 어디에 둘지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 아침에는 우물 점검표를 다시 봐야 할 것이고, 배급 변경안도 확인해야 할 것이며, 편지 한 통의 주소를 다시 대조해야 할 것이다. 그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손을 뻗지는 않았다.

먼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작은 등불은 그 사이, 장부의 모서리와 빈 접시의 빵가루를 함께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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