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5여관◆zAR16hM8he(03de9ab0)2026-05-09 (토) 17:18:14
아래는 이어지는 니케아 시점 엽편이야.
니케아 통합 설정, 슈샤니크 최신 설정, 레이튼의 직전 회의 구조를 반영해서 작성했어.
---
엽편 — 자주빛 궁정의 회의
니케아의 궁정에는 아침이 늦게 도착했다.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르마라의 물가 위로 새벽빛은 이미 번지고 있었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교대했으며, 궁정 바깥의 시장에서는 빵을 굽는 냄새가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의 회의실 안에는 아직 밤이 남아 있었다.
탁자 위의 등잔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록빛 봉인이 찍힌 문서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동방 변경에서 올라온 보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방어전 현황.
룸 술탄국의 병력 이동.
상인길에서 들려온 소문.
귀순 튀르크 기병대의 편제 가능성.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동원 명부.
그리고 킬리키아로 보낸 서신의 사본.
귀국은 최소 사흘, 가능하다면 닷새 이상 타우루스 관문을 유지하십시오.
이는 요청이 아니라, 조약 이행을 위한 필요 조건입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너무 딱딱한 문장이었다.
아니, 딱딱하게 만들었다.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되었다.
걱정이 보이면 안 되었다.
아르메니아라는 단어가 손끝에서 떨리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문장을 돌로 만들었다.
통보합니다.
검토 중입니다.
산정 중입니다.
유지하십시오.
필요 조건입니다.
한때 그녀는 여관의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길 위에서 다치면 문을 열고, 어린 것들이 삶의 여정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관은 닫혔다.
지금 그녀가 여는 것은 문이 아니라 장부였다.
지금 그녀가 내미는 것은 따뜻한 수프가 아니라 조건이었다.
지금 그녀가 사람을 살리는 방식은 기도가 아니라 보급선과 동원 명부와 조약 조항이었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문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슈샤니크는 서신 사본을 접었다.
“회의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니케아의 자주빛 궁정은 하나의 심장으로 뛰지 않았다.
그것은 부서진 제국의 여러 심장이 억지로 같은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한쪽에는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있었다.
자주빛 망토.
차갑게 정돈된 시선.
허리 뒤에 놓인 활집.
그녀가 회의실에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등을 폈다.
미하일라가 활을 들지 않아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황제칙령처럼 느껴졌다.
다른 한쪽에는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가 있었다.
나이는 어렸다.
그러나 그녀가 앉은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백색과 금빛이 섞인 의복, 아직 어린 손, 그러나 도망치지 않는 눈.
누군가는 그녀를 어린 이상주의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소산드라의 쿠데타가 남긴 장식적 황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과 병사들, 피난민과 장인들은 그녀의 말을 기억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어리석을 정도로 컸다.
그래서 정치가 되었다.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는 회의실 구석 창가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정해진 자리에 앉기보다, 지도와 창문 사이에 서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의 길은 탁자 위에만 놓여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게오르기아 아크로폴리티사는 조금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교실의 침묵.
질문이 오기 전의 침묵.
제국이 스스로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하는 순간의 침묵.
그 외에도 귀족, 장군, 성직자, 병참관, 원로원 출신 자문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슈샤니크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보고를 시작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첫 공세를 방어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평평했다.
“룸 술탄국은 정면 돌파보다 성내 혼란 유발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후송로, 피난민 구역, 기록소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기록소 방화 시도는 일부 성공했으나, 킬리키아는 명부를 복원 중입니다.”
한 귀족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르메니아인답군. 불타도 이름부터 찾는다니.”
슈샤니크의 눈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 귀족은 입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그녀는 다음 장을 넘겼다.
“킬리키아와 니케아 사이의 상호 군사 조항 제3항은 발동 조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룸 술탄국이 타우루스 관문을 완전히 확보할 경우, 니케아 동방 방어선의 외곽 완충이 상실됩니다. 아나톨리아 내 귀순 세력과 아르메니아계 네트워크도 연쇄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병참관이 물었다.
“지원군을 보낸다면 규모는?”
“정규군 전체가 아닙니다.”
슈샤니크는 즉답했다.
“그렇게 하면 늦습니다. 또한 후방이 비게 됩니다.”
장군 하나가 팔짱을 끼었다.
“그럼 보내지 않는 편이 낫겠군.”
그 말에 회의실 몇 곳에서 동의하는 기척이 일었다.
“룸 술탄국과 충돌을 확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킬리키아는 우리 영토가 아닙니다.”
“몽골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서방은 우리가 움직이는 순간 다른 계산을 할 겁니다.”
“아르메니아를 위해 로마가 피를 흘려야 합니까?”
마지막 말이 떨어졌을 때, 슈샤니크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회의실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니케아 제국은 동맹국의 관문이 무너지는 것을 관측했고, 계산 끝에 침묵했다고.”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그 장군이 얼굴을 굳혔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내 말은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더 정확히 말씀하십시오.”
슈샤니크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 회의는 감정의 장소가 아닙니다. 문장은 기록됩니다. 기록되는 문장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장군은 입을 다물었다.
요안나가 조용히 슈샤니크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킬리키아가 무너지면, 다음 장부에는 니케아의 이름이 적힙니다.”
그 말은 협박도,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장부에 적힐 미래의 첫 줄처럼 들렸다.
---
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침묵은 전략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실의 공기를 한 번에 정렬시켰다.
“룸 술탄국이 킬리키아를 삼키면, 다음 화살은 니케아를 향한다. 그들이 타우루스 관문을 넘어 안정된 보급선을 얻는 순간, 우리는 선택권을 잃는다.”
한 원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그러나 지금 출병하면 전쟁 확대를 피할 수 없습니다.”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전쟁은 이미 확대되고 있다.”
그녀는 손끝으로 지도를 짚었다.
타우루스 산맥.
킬리키아.
룸 술탄국의 진영.
니케아의 동방 방어선.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말을 이었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그 말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미하일라가 평화를 말할 때, 그것은 꽃이나 노래의 말이 아니었다. 활시위에 걸린 문장이었다.
“그러므로 저 전쟁을 남의 전쟁이라 부를 수 없다.”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병력 파견안.”
슈샤니크는 준비된 장을 넘겼다.
“정규군 전면 출병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제한 증원은 가능합니다.”
그녀는 항목을 읽었다.
“첫째. 팔레올로기나 직속 기동대 일부.
둘째.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 선발대.
셋째. 귀순 튀르크 경기병 일부.
넷째. 분산 보급대.
다섯째.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의 도로·우편·상인망을 이용한 우회 통과.”
장군 하나가 바로 반발했다.
“귀순 튀르크 기병을 킬리키아 방면에 투입한다고요? 그곳은 룸 술탄국과의 전장입니다. 배신 가능성은?”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배신 가능성은 언제나 있죠.”
장군이 그녀를 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귀순한 자라서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배신할 이유가 있으면 배신하는 거죠. 이유를 없애고, 감시를 붙이고, 돌아갈 길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이득이 되게 만들면 됩니다.”
“그걸 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일입니다.”
아스테리아가 지도로 걸어왔다.
그녀는 붉은 실과 검은 돌, 작은 은화 몇 개를 꺼내 지도 위에 올렸다.
“정규로는 늦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주 도로로 가면 룸 술탄국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급대가 길어지고, 산길에서 잘리겠죠. 그 길은 죽습니다.”
그녀는 붉은 실 하나를 끊었다.
“남쪽 우회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물이 부족합니다. 말이 먼저 죽고, 사람이 그다음입니다. 이 길도 대체로 죽습니다.”
두 번째 실도 끊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화 세 개를 지도 위에 흩뿌렸다.
“하지만 상인길, 여관망, 귀순 튀르크 기병의 현지 안내,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친족 연락선, 그리고 우리가 어제 일부러 흘린 가짜 소문을 겹치면……”
그녀는 얇은 푸른 실을 지도 위에 비스듬히 놓았다.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빙 돌아갔다.
몇 번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지도 위에서는 지저분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하나 열립니다.”
아스테리아가 말했다.
“세 갈래 중 둘은 죽습니다. 하나는 도착합니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확률은?”
“충분히 낮습니다.”
회의실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스테리아는 태연했다.
“하지만 다른 길은 더 낮습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살 수 있나요?”
아스테리아는 어린 황제를 보았다.
잠시 동안 그녀의 장난기가 가라앉았다.
“전부는 아닙니다.”
요안나는 입술을 살짝 눌렀다.
아스테리아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으면, 킬리키아 쪽 사람들은 더 많이 죽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그럼 가야 해요.”
한 원로가 말했다.
“폐하, 감상으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감상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회의실 뒤쪽까지 닿았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어요.”
원로는 한숨을 삼켰다.
“그건 모든 전쟁터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요.”
요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이 국경 앞에서 멈추면 안 돼요.”
회의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요안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킬리키아 사람들이 우리를 로마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우리 시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이고, 우리는 니케아니까.”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나서도 로마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계속 말했다.
“로마는 성벽만이 아니라고 배웠어요. 로마는 법이고, 길이고, 시민이고, 평화고, 서로 손을 맞잡는 마음이라고 배웠어요.”
그녀의 시선이 게오르기아에게 잠시 닿았다.
게오르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는 다시 회의실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녀의 어린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아직 우리 손을 잡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해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복잡한 것이 있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눈.
자신이 활로 끝내려는 전쟁 뒤에, 누군가 저런 말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아는 눈.
슈샤니크는 요안나의 말을 적지 않았다.
이미 기억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회의는 이상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병참관이 서류를 들었다.
“보급 문제입니다. 제한 병력이라 해도 산악 통과 중 식량과 화살, 약재를 모두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킬리키아 내부 사정도 불확실합니다.”
슈샤니크가 바로 답했다.
“킬리키아는 사흘 기준 배급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거는?”
“그레이 경이 있으니까요.”
병참관은 잠시 멈췄다.
“그레이 경?”
“킬리키아의 내정 담당자입니다. 기록소가 불탔음에도 명부를 재작성했고, 후송로를 유지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식량표를 감정으로 쓰지 않습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슈샤니크 경이 타인을 칭찬하다니, 기록해둘까요?”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이미 기록 중입니다.”
아스테리아는 더 웃었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보급은 셋으로 나눕니다. 정규 보급대, 여관망 보급, 상인 위장 보급. 한 줄이 잘려도 전체가 멈추지 않게 합니다.”
“상인 위장 보급은 위험합니다.”
“전쟁은 위험합니다.”
“비용은?”
“제가 산정했습니다.”
“과도합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넘겼다.
“킬리키아가 무너진 뒤 동방 방어선 재정비에 드는 비용보다는 낮습니다.”
병참관은 입을 다물었다.
한 귀족이 날카롭게 물었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이 모든 안은 지나치게 준비되어 있군요. 혹시 이미 출병을 전제로 계산한 것입니까?”
슈샤니크는 그를 보았다.
그 질문은 정당했다.
그녀는 킬리키아가 무너지기 전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룸 술탄국의 동부 압박.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동요.
니케아 내부의 반대파.
슈샤니크 자신의 편지.
푸리나 헤툼이 버틸 시간.
그리고 사라진 아르메니아.
그녀는 그것을 모두 장부에 올렸다.
“예.”
슈샤니크가 답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그녀는 담담했다.
“전쟁은 발생한 뒤 계산하면 늦습니다.”
귀족이 비웃듯 말했다.
“아르메니아라서입니까?”
공기가 다시 얼었다.
아스테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안나가 숨을 멈췄다.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슈샤니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 질문을 예상했다.
그런데도 안쪽 어딘가가 조용히 갈라졌다.
아르메니아라서입니까?
예.
그 답은 너무 쉬웠다.
아르메니아라서.
자신이 지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기 때문에.
닫은 여관이 아직도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푸리나의 킬리키아가 자신이 잃어버린 꿈을 지나치게 시끄럽고 눈부신 형태로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서류를 정리했다.
“아르메니아라서만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조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완충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룸 술탄국의 확장을 저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의 충성 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순 튀르크 세력에게 로마가 약속을 지키는 국가임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방 방어선의 다음 장부가 우리 이름으로 시작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귀족을 보았다.
“감상이 아닙니다.”
잠시 멈춤.
“조약입니다.”
그 말은 완벽하게 행정적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처럼 들렸다.
혹은 너무 많은 진실을 숨기는 말처럼.
미하일라는 그것을 보았다.
요안나도 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웃지 않았다.
게오르기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긴 논쟁 끝에, 회의는 하나의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정규군 일부 출병.
미하일라의 황제칙령으로 군권 정당화.
요안나의 명의로 피난민 보호와 동맹 이행의 대의 발표.
슈샤니크의 장부로 보급과 병단 편제 통합.
아스테리아의 도로·우편·상인망으로 우회로 개척.
게오르기아의 제자들 중 일부를 행정장교로 파견하여 현장 시민권·보급·피난민 등록을 보조.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 선발.
귀순 튀르크 경기병 투입.
상인 위장 보급대 분산.
이것은 하나의 군대라기보다, 니케아라는 나라가 가진 여러 조각을 억지로 묶은 행렬이었다.
자주빛 황제의 화살.
마지막 라스카리스의 평화.
청록빛 까마귀의 장부.
북방 외교관의 길.
철학자들의 교실에서 나온 행정관.
아르메니아인의 기억.
튀르크 귀순병의 말발굽.
옛 로마군은 아니었다.
새 로마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게오르기아가 그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군대는 보낼 수 있겠지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탁자 위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그 군대가 도착한 뒤, 그 길 위에 무엇을 세울 생각입니까?”
미하일라는 말했다.
“룸 술탄국의 공세를 꺾는다.”
“그다음은요?”
요안나가 답했다.
“피난민을 보호하고, 평화를—”
“어떤 평화입니까?”
요안나는 멈췄다.
게오르기아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보급로는 길입니다. 군대도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로마가 한 번 길을 열면, 그 길로 법과 세금과 시민권과 기억도 따라갑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들었다.
“킬리키아를 돕는다는 것은 단지 전투 하나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의 질서를 묻는 일입니다.”
아스테리아가 작게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길보다 길 끝을 더 좋아하시는군요.”
게오르기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길 끝을 모르면 길도 위험합니다.”
그녀는 두 황제를 보았다.
“폐하들. 킬리키아를 구한다면,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 것입니까? 동맹으로 존중할 것입니까? 미래의 로마인으로 부를 것입니까, 아니면 로마와 함께 서는 아르메니아인으로 둘 것입니까?”
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 질문은 전쟁보다 오래 남을 질문이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말했다.
“전쟁 중에는 답을 미룰 수 있다.”
게오르기아가 물었다.
“정말입니까?”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중에 미룬 답은, 전쟁 뒤에 피를 요구하곤 합니다.”
요안나는 조용히 말했다.
“동맹으로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손을 꼭 쥐었다.
“저는 그들을 로마로 삼기 위해 돕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평화에 닿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다면, 그 길 위에서 우리와 손을 잡을 수는 있겠죠.”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킬리키아는 관문이다. 관문을 점령하면 길이 막힌다. 관문과 약속하면 길이 열린다.”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푸리나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같은 질문이 서로 다른 궁정에 던져졌고, 비슷한 답이 태어나고 있었다.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이면, 지금은 충분합니다.”
---
회의는 끝났다.
명령서가 작성되었다.
미하일라의 이름으로 군권이 움직였다.
요안나의 이름으로 보호와 평화의 명분이 붙었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병력과 보급을 묶었다.
아스테리아의 전령들이 밤보다 빠르게 흩어졌다.
게오르기아의 제자들은 이동 서고와 시민권 등록 장비를 챙겼다.
궁정 바깥에서는 말들이 준비되었다.
자주빛 깃발이 펴졌다.
백색과 금빛의 라스카리스 문장이 그 옆에 올랐다.
청록빛 까마귀 문장이 찍힌 보급 상자가 수레에 실렸다.
아르메니아계 병사들은 말없이 십자를 쥐었다.
귀순 튀르크 기병들은 서로의 안장을 점검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행정관들은 검보다 무거운 장부를 가방에 넣었다.
이상한 군대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군대였다.
슈샤니크는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었다.
장부들이 있었다.
서신들이 있었다.
지도들이 있었다.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는 킬리키아로 보낸 편지의 사본을 다시 펼쳤다.
이는 요청이 아니라, 조약 이행을 위한 필요 조건입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눌렀다.
“필요 조건이라.”
자신이 썼지만, 참으로 비정한 문장이었다.
슈샤니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버티십시오, 푸리나 헤툼.”
그 말이 회의실 안에 떨어졌다.
너무 사적인 문장이었다.
슈샤니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서신을 접었다.
“버티십시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그 편이 더 나았다.
더 공식적이고, 더 안전하고, 덜 아팠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편지 위에 남아 있었다.
닫은 여관의 주인은 장부로 사람을 살린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문을 여는 대신, 길을 계산하는 것.
수프를 내미는 대신, 보급대를 보내는 것.
울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
슈샤니크는 장부를 닫았다.
밖에서 말들이 울었다.
명령이 내려졌다.
니케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속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케아에서는, 약속이 처음으로 말에 안장을 얹기 시작했다.
니케아 통합 설정, 슈샤니크 최신 설정, 레이튼의 직전 회의 구조를 반영해서 작성했어.
---
엽편 — 자주빛 궁정의 회의
니케아의 궁정에는 아침이 늦게 도착했다.
해가 뜨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르마라의 물가 위로 새벽빛은 이미 번지고 있었고, 성벽 위의 병사들은 교대했으며, 궁정 바깥의 시장에서는 빵을 굽는 냄새가 천천히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의 회의실 안에는 아직 밤이 남아 있었다.
탁자 위의 등잔이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록빛 봉인이 찍힌 문서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동방 변경에서 올라온 보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방어전 현황.
룸 술탄국의 병력 이동.
상인길에서 들려온 소문.
귀순 튀르크 기병대의 편제 가능성.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동원 명부.
그리고 킬리키아로 보낸 서신의 사본.
귀국은 최소 사흘, 가능하다면 닷새 이상 타우루스 관문을 유지하십시오.
이는 요청이 아니라, 조약 이행을 위한 필요 조건입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너무 딱딱한 문장이었다.
아니, 딱딱하게 만들었다.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되었다.
걱정이 보이면 안 되었다.
아르메니아라는 단어가 손끝에서 떨리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문장을 돌로 만들었다.
통보합니다.
검토 중입니다.
산정 중입니다.
유지하십시오.
필요 조건입니다.
한때 그녀는 여관의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길 위에서 다치면 문을 열고, 어린 것들이 삶의 여정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여관은 닫혔다.
지금 그녀가 여는 것은 문이 아니라 장부였다.
지금 그녀가 내미는 것은 따뜻한 수프가 아니라 조건이었다.
지금 그녀가 사람을 살리는 방식은 기도가 아니라 보급선과 동원 명부와 조약 조항이었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문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슈샤니크는 서신 사본을 접었다.
“회의를 시작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니케아의 자주빛 궁정은 하나의 심장으로 뛰지 않았다.
그것은 부서진 제국의 여러 심장이 억지로 같은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에 가까웠다.
한쪽에는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있었다.
자주빛 망토.
차갑게 정돈된 시선.
허리 뒤에 놓인 활집.
그녀가 회의실에 들어오는 순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등을 폈다.
미하일라가 활을 들지 않아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황제칙령처럼 느껴졌다.
다른 한쪽에는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가 있었다.
나이는 어렸다.
그러나 그녀가 앉은 자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백색과 금빛이 섞인 의복, 아직 어린 손, 그러나 도망치지 않는 눈.
누군가는 그녀를 어린 이상주의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소산드라의 쿠데타가 남긴 장식적 황제라고 보았다.
그러나 거리의 사람들과 병사들, 피난민과 장인들은 그녀의 말을 기억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문장은 어리석을 정도로 컸다.
그래서 정치가 되었다.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는 회의실 구석 창가에 기대 있었다.
그녀는 정해진 자리에 앉기보다, 지도와 창문 사이에 서 있는 것을 좋아했다. 세상의 길은 탁자 위에만 놓여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게오르기아 아크로폴리티사는 조금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았다.
교실의 침묵.
질문이 오기 전의 침묵.
제국이 스스로 무엇인지 다시 배워야 하는 순간의 침묵.
그 외에도 귀족, 장군, 성직자, 병참관, 원로원 출신 자문관들이 줄지어 있었다.
슈샤니크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보고를 시작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는 첫 공세를 방어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평평했다.
“룸 술탄국은 정면 돌파보다 성내 혼란 유발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후송로, 피난민 구역, 기록소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기록소 방화 시도는 일부 성공했으나, 킬리키아는 명부를 복원 중입니다.”
한 귀족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르메니아인답군. 불타도 이름부터 찾는다니.”
슈샤니크의 눈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 귀족은 입을 다물었다.
슈샤니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그녀는 다음 장을 넘겼다.
“킬리키아와 니케아 사이의 상호 군사 조항 제3항은 발동 조건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룸 술탄국이 타우루스 관문을 완전히 확보할 경우, 니케아 동방 방어선의 외곽 완충이 상실됩니다. 아나톨리아 내 귀순 세력과 아르메니아계 네트워크도 연쇄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병참관이 물었다.
“지원군을 보낸다면 규모는?”
“정규군 전체가 아닙니다.”
슈샤니크는 즉답했다.
“그렇게 하면 늦습니다. 또한 후방이 비게 됩니다.”
장군 하나가 팔짱을 끼었다.
“그럼 보내지 않는 편이 낫겠군.”
그 말에 회의실 몇 곳에서 동의하는 기척이 일었다.
“룸 술탄국과 충돌을 확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킬리키아는 우리 영토가 아닙니다.”
“몽골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서방은 우리가 움직이는 순간 다른 계산을 할 겁니다.”
“아르메니아를 위해 로마가 피를 흘려야 합니까?”
마지막 말이 떨어졌을 때, 슈샤니크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회의실의 등불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니케아 제국은 동맹국의 관문이 무너지는 것을 관측했고, 계산 끝에 침묵했다고.”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그 장군이 얼굴을 굳혔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내 말은 그런 뜻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면, 더 정확히 말씀하십시오.”
슈샤니크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 회의는 감정의 장소가 아닙니다. 문장은 기록됩니다. 기록되는 문장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장군은 입을 다물었다.
요안나가 조용히 슈샤니크를 보았다.
슈샤니크는 다시 서류를 펼쳤다.
“킬리키아가 무너지면, 다음 장부에는 니케아의 이름이 적힙니다.”
그 말은 협박도,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장부에 적힐 미래의 첫 줄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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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라가 입을 열었다.
“침묵은 전략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회의실의 공기를 한 번에 정렬시켰다.
“룸 술탄국이 킬리키아를 삼키면, 다음 화살은 니케아를 향한다. 그들이 타우루스 관문을 넘어 안정된 보급선을 얻는 순간, 우리는 선택권을 잃는다.”
한 원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그러나 지금 출병하면 전쟁 확대를 피할 수 없습니다.”
미하일라는 그를 보았다.
“전쟁은 이미 확대되고 있다.”
그녀는 손끝으로 지도를 짚었다.
타우루스 산맥.
킬리키아.
룸 술탄국의 진영.
니케아의 동방 방어선.
“우리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회의실은 조용해졌다.
미하일라는 말을 이었다.
“나는 평화를 원한다.”
그 말에 누구도 웃지 않았다.
미하일라가 평화를 말할 때, 그것은 꽃이나 노래의 말이 아니었다. 활시위에 걸린 문장이었다.
“그러므로 저 전쟁을 남의 전쟁이라 부를 수 없다.”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병력 파견안.”
슈샤니크는 준비된 장을 넘겼다.
“정규군 전면 출병은 불가합니다. 그러나 제한 증원은 가능합니다.”
그녀는 항목을 읽었다.
“첫째. 팔레올로기나 직속 기동대 일부.
둘째.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 선발대.
셋째. 귀순 튀르크 경기병 일부.
넷째. 분산 보급대.
다섯째.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의 도로·우편·상인망을 이용한 우회 통과.”
장군 하나가 바로 반발했다.
“귀순 튀르크 기병을 킬리키아 방면에 투입한다고요? 그곳은 룸 술탄국과의 전장입니다. 배신 가능성은?”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배신 가능성은 언제나 있죠.”
장군이 그녀를 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귀순한 자라서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배신할 이유가 있으면 배신하는 거죠. 이유를 없애고, 감시를 붙이고, 돌아갈 길보다 앞으로 갈 길이 더 이득이 되게 만들면 됩니다.”
“그걸 말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일입니다.”
아스테리아가 지도로 걸어왔다.
그녀는 붉은 실과 검은 돌, 작은 은화 몇 개를 꺼내 지도 위에 올렸다.
“정규로는 늦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주 도로로 가면 룸 술탄국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급대가 길어지고, 산길에서 잘리겠죠. 그 길은 죽습니다.”
그녀는 붉은 실 하나를 끊었다.
“남쪽 우회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물이 부족합니다. 말이 먼저 죽고, 사람이 그다음입니다. 이 길도 대체로 죽습니다.”
두 번째 실도 끊었다.
그리고 그녀는 은화 세 개를 지도 위에 흩뿌렸다.
“하지만 상인길, 여관망, 귀순 튀르크 기병의 현지 안내,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친족 연락선, 그리고 우리가 어제 일부러 흘린 가짜 소문을 겹치면……”
그녀는 얇은 푸른 실을 지도 위에 비스듬히 놓았다.
그 길은 직선이 아니었다.
빙 돌아갔다.
몇 번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졌다.
지도 위에서는 지저분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하나 열립니다.”
아스테리아가 말했다.
“세 갈래 중 둘은 죽습니다. 하나는 도착합니다.”
미하일라가 물었다.
“확률은?”
“충분히 낮습니다.”
회의실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스테리아는 태연했다.
“하지만 다른 길은 더 낮습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은 살 수 있나요?”
아스테리아는 어린 황제를 보았다.
잠시 동안 그녀의 장난기가 가라앉았다.
“전부는 아닙니다.”
요안나는 입술을 살짝 눌렀다.
아스테리아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으면, 킬리키아 쪽 사람들은 더 많이 죽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그럼 가야 해요.”
한 원로가 말했다.
“폐하, 감상으로 정할 일이 아닙니다.”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감상이 아니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회의실 뒤쪽까지 닿았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어요.”
원로는 한숨을 삼켰다.
“그건 모든 전쟁터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요.”
요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이 국경 앞에서 멈추면 안 돼요.”
회의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요안나는 긴장하고 있었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나지 않았다.
“킬리키아 사람들이 우리를 로마라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우리 시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이고, 우리는 니케아니까.”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나서도 로마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계속 말했다.
“로마는 성벽만이 아니라고 배웠어요. 로마는 법이고, 길이고, 시민이고, 평화고, 서로 손을 맞잡는 마음이라고 배웠어요.”
그녀의 시선이 게오르기아에게 잠시 닿았다.
게오르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는 다시 회의실을 보았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녀의 어린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아직 우리 손을 잡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해요.”
미하일라는 요안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복잡한 것이 있었다.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눈.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눈.
자신이 활로 끝내려는 전쟁 뒤에, 누군가 저런 말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아는 눈.
슈샤니크는 요안나의 말을 적지 않았다.
이미 기억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회의는 이상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 병참관이 서류를 들었다.
“보급 문제입니다. 제한 병력이라 해도 산악 통과 중 식량과 화살, 약재를 모두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킬리키아 내부 사정도 불확실합니다.”
슈샤니크가 바로 답했다.
“킬리키아는 사흘 기준 배급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거는?”
“그레이 경이 있으니까요.”
병참관은 잠시 멈췄다.
“그레이 경?”
“킬리키아의 내정 담당자입니다. 기록소가 불탔음에도 명부를 재작성했고, 후송로를 유지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식량표를 감정으로 쓰지 않습니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슈샤니크 경이 타인을 칭찬하다니, 기록해둘까요?”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이미 기록 중입니다.”
아스테리아는 더 웃었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보급은 셋으로 나눕니다. 정규 보급대, 여관망 보급, 상인 위장 보급. 한 줄이 잘려도 전체가 멈추지 않게 합니다.”
“상인 위장 보급은 위험합니다.”
“전쟁은 위험합니다.”
“비용은?”
“제가 산정했습니다.”
“과도합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넘겼다.
“킬리키아가 무너진 뒤 동방 방어선 재정비에 드는 비용보다는 낮습니다.”
병참관은 입을 다물었다.
한 귀족이 날카롭게 물었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이 모든 안은 지나치게 준비되어 있군요. 혹시 이미 출병을 전제로 계산한 것입니까?”
슈샤니크는 그를 보았다.
그 질문은 정당했다.
그녀는 킬리키아가 무너지기 전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룸 술탄국의 동부 압박.
아르메니아계 병단의 동요.
니케아 내부의 반대파.
슈샤니크 자신의 편지.
푸리나 헤툼이 버틸 시간.
그리고 사라진 아르메니아.
그녀는 그것을 모두 장부에 올렸다.
“예.”
슈샤니크가 답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그녀는 담담했다.
“전쟁은 발생한 뒤 계산하면 늦습니다.”
귀족이 비웃듯 말했다.
“아르메니아라서입니까?”
공기가 다시 얼었다.
아스테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안나가 숨을 멈췄다.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슈샤니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 질문을 예상했다.
그런데도 안쪽 어딘가가 조용히 갈라졌다.
아르메니아라서입니까?
예.
그 답은 너무 쉬웠다.
아르메니아라서.
자신이 지키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기 때문에.
닫은 여관이 아직도 안쪽에서 문을 두드리기 때문에.
푸리나의 킬리키아가 자신이 잃어버린 꿈을 지나치게 시끄럽고 눈부신 형태로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슈샤니크는 서류를 정리했다.
“아르메니아라서만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조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적 완충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룸 술탄국의 확장을 저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의 충성 기반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순 튀르크 세력에게 로마가 약속을 지키는 국가임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방 방어선의 다음 장부가 우리 이름으로 시작되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귀족을 보았다.
“감상이 아닙니다.”
잠시 멈춤.
“조약입니다.”
그 말은 완벽하게 행정적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처럼 들렸다.
혹은 너무 많은 진실을 숨기는 말처럼.
미하일라는 그것을 보았다.
요안나도 보았다.
아스테리아는 웃지 않았다.
게오르기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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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논쟁 끝에, 회의는 하나의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정규군 일부 출병.
미하일라의 황제칙령으로 군권 정당화.
요안나의 명의로 피난민 보호와 동맹 이행의 대의 발표.
슈샤니크의 장부로 보급과 병단 편제 통합.
아스테리아의 도로·우편·상인망으로 우회로 개척.
게오르기아의 제자들 중 일부를 행정장교로 파견하여 현장 시민권·보급·피난민 등록을 보조.
아르메니아계 니케아 병단 선발.
귀순 튀르크 경기병 투입.
상인 위장 보급대 분산.
이것은 하나의 군대라기보다, 니케아라는 나라가 가진 여러 조각을 억지로 묶은 행렬이었다.
자주빛 황제의 화살.
마지막 라스카리스의 평화.
청록빛 까마귀의 장부.
북방 외교관의 길.
철학자들의 교실에서 나온 행정관.
아르메니아인의 기억.
튀르크 귀순병의 말발굽.
옛 로마군은 아니었다.
새 로마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습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게오르기아가 그때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군대는 보낼 수 있겠지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탁자 위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묻겠습니다. 그 군대가 도착한 뒤, 그 길 위에 무엇을 세울 생각입니까?”
미하일라는 말했다.
“룸 술탄국의 공세를 꺾는다.”
“그다음은요?”
요안나가 답했다.
“피난민을 보호하고, 평화를—”
“어떤 평화입니까?”
요안나는 멈췄다.
게오르기아의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보급로는 길입니다. 군대도 길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로마가 한 번 길을 열면, 그 길로 법과 세금과 시민권과 기억도 따라갑니다.”
슈샤니크는 조용히 들었다.
“킬리키아를 돕는다는 것은 단지 전투 하나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 뒤의 질서를 묻는 일입니다.”
아스테리아가 작게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길보다 길 끝을 더 좋아하시는군요.”
게오르기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길 끝을 모르면 길도 위험합니다.”
그녀는 두 황제를 보았다.
“폐하들. 킬리키아를 구한다면,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 것입니까? 동맹으로 존중할 것입니까? 미래의 로마인으로 부를 것입니까, 아니면 로마와 함께 서는 아르메니아인으로 둘 것입니까?”
회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 질문은 전쟁보다 오래 남을 질문이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말했다.
“전쟁 중에는 답을 미룰 수 있다.”
게오르기아가 물었다.
“정말입니까?”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중에 미룬 답은, 전쟁 뒤에 피를 요구하곤 합니다.”
요안나는 조용히 말했다.
“동맹으로요.”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요안나는 손을 꼭 쥐었다.
“저는 그들을 로마로 삼기 위해 돕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우리와 함께 평화에 닿을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녀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다면, 그 길 위에서 우리와 손을 잡을 수는 있겠죠.”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킬리키아는 관문이다. 관문을 점령하면 길이 막힌다. 관문과 약속하면 길이 열린다.”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푸리나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같은 질문이 서로 다른 궁정에 던져졌고, 비슷한 답이 태어나고 있었다.
게오르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이면, 지금은 충분합니다.”
---
회의는 끝났다.
명령서가 작성되었다.
미하일라의 이름으로 군권이 움직였다.
요안나의 이름으로 보호와 평화의 명분이 붙었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병력과 보급을 묶었다.
아스테리아의 전령들이 밤보다 빠르게 흩어졌다.
게오르기아의 제자들은 이동 서고와 시민권 등록 장비를 챙겼다.
궁정 바깥에서는 말들이 준비되었다.
자주빛 깃발이 펴졌다.
백색과 금빛의 라스카리스 문장이 그 옆에 올랐다.
청록빛 까마귀 문장이 찍힌 보급 상자가 수레에 실렸다.
아르메니아계 병사들은 말없이 십자를 쥐었다.
귀순 튀르크 기병들은 서로의 안장을 점검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행정관들은 검보다 무거운 장부를 가방에 넣었다.
이상한 군대였다.
하지만 움직이는 군대였다.
슈샤니크는 회의실에 혼자 남았다.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었다.
장부들이 있었다.
서신들이 있었다.
지도들이 있었다.
기억들이 있었다.
그녀는 킬리키아로 보낸 편지의 사본을 다시 펼쳤다.
이는 요청이 아니라, 조약 이행을 위한 필요 조건입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손끝으로 눌렀다.
“필요 조건이라.”
자신이 썼지만, 참으로 비정한 문장이었다.
슈샤니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버티십시오, 푸리나 헤툼.”
그 말이 회의실 안에 떨어졌다.
너무 사적인 문장이었다.
슈샤니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서신을 접었다.
“버티십시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그 편이 더 나았다.
더 공식적이고, 더 안전하고, 덜 아팠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편지 위에 남아 있었다.
닫은 여관의 주인은 장부로 사람을 살린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문을 여는 대신, 길을 계산하는 것.
수프를 내미는 대신, 보급대를 보내는 것.
울고 있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그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움직이는 것.
슈샤니크는 장부를 닫았다.
밖에서 말들이 울었다.
명령이 내려졌다.
니케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속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케아에서는, 약속이 처음으로 말에 안장을 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