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6여관◆zAR16hM8he(03de9ab0)2026-05-09 (토) 22:40:51
좋아. 그럼 이제 바로 쓸게.
엽편 — 스러져간 별을 위한 세레나데
해가 기울자, 성벽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그림자는 서쪽 방패선 아래로 스며들었고, 방패를 든 손들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버틴 손이었다. 가죽끈은 땀과 피에 젖었고, 방패 안쪽의 나무결에는 손톱 자국이 남았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제대로 펴지 못했고, 누군가는 창을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교대는 오지 않았다.
서쪽 방패선은 이미 두 번의 파상공세를 버텼다. 첫 번째는 화살이었다. 두 번째는 도보병의 낮은 창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언덕 아래에서 아직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룸 술탄국의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느려서 오히려 무서웠다. 말들은 지친 기색이 있었지만, 기수들은 그 피로를 감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적의 선두는 일부러 달리지 않았다. 킬리키아의 방패병들이 더 오래 그 모습을 보게 하려는 것처럼, 말발굽 하나하나로 저녁의 돌길을 두드렸다.
뒤쪽 골목에서는 후송 수레가 멈춰 있었다.
부상자를 싣고 내려가야 할 길과, 서쪽 방패선으로 올라가야 할 증원병의 길이 같은 곳에서 엉켜 있었다. 누군가 비켜 달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피 묻은 천을 움켜쥔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들것 하나가 골목 벽에 부딪혔다. 그 충격에 들것 위의 병사가 입술을 물었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비명을 지를 힘도 아끼고 있었다.
고개 아래에는 마지막 피난민 수레가 남아 있었다.
수레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노인도 있었다. 약재 상자도 있었다. 젖은 천으로 덮은 작은 상자들도 있었다. 어떤 상자에는 빵이 있었고, 어떤 상자에는 붕대가 있었고, 어떤 상자에는 이름이 있었다.
피난민의 이름.
부상자의 이름.
죽은 자의 이름.
그보다 더 뒤쪽, 임시 기록소의 지붕 끝에서 얇은 연기가 올랐다.
처음에는 석양의 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기록소 쪽에 불!”
그 외침과 동시에 성벽 아래에서 다른 목소리가 올라왔다.
“니케아는 늦었다!”
룸 술탄국의 선전병들이었다.
“로마는 오지 않는다!”
“성문을 열면 아이들은 산다!”
방패병 하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성문을 열 생각이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수레를 보았다.
연기를 보았다.
교대가 오지 않는 방패선을 보았다.
그리고 언덕 아래에서 천천히 정렬되는 기병들을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끝났어.”
작은 말이었다.
방패 뒤에서 새어 나온 말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말한 사람조차, 어쩌면 자신이 말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화살보다 빨랐다.
끝났다.
그 이름이 전장 위에 내려앉으려 했다.
그때 전령 하나가 그레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쪽 방패선 사망자 스물셋!”
그레이는 장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한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물셋.
사람이 숫자가 되는 데에는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스물셋이 아닙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너무 작아서, 전장의 소음에 묻힐 것 같았다.
그러나 묻히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를 펼쳤다.
그 순간, 성벽 위의 피와 먼지 아래로 다른 길이 겹쳐졌다.
요란한 거리는 아니었다.
비가 그친 뒤의 돌길.
낮은 처마.
작은 문들.
문마다 걸린 희미한 등불.
그리고 손으로 여러 번 닦은 듯한 문패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곳은 망자를 가두는 거리가 아니었다.
울부짖는 원혼이 떠도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이름이 잊히지 않기 위해 잠시 머무는 거리였다.
그레이는 첫 번째 문패 앞에 섰다.
아람.
그녀는 손끝으로 그 이름을 더듬었다.
“아람.”
한 줄이 장부 위에 떠올랐다.
“서쪽 방패선. 교대가 늦었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보고가 아니었다.
사과에 가까웠다.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잔류. 사망.”
그녀는 다음 문패를 보았다.
세루브.
“세루브. 후송로 담당. 후송로와 증원로가…… 겹쳤습니다.”
또 한 줄.
“부상자 이탈 지원 중 사망.”
세 번째 문패.
바한.
“바한. 병참 담당. 방패 보급 지연.”
그레이의 손이 장부 모서리를 붙잡았다.
“빈 간격을 메우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성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방패도 아직 서 있었다.
창도 아직 적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지탱하는 순서가 늦어지고 있었다.
교대가 늦었다.
후송이 늦었다.
보급이 늦었다.
이름이 늦었다.
“이분들은 같은 이유로 죽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작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같은 이유로 다시 죽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녀의 장부 뒤편으로 거리의 등불들이 흔들렸다.
아람의 문 앞 등불.
세루브의 문 앞 등불.
바한의 문 앞 등불.
각각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등불의 흔들림은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레이는 지도를 펼쳤다.
“서쪽 방패선. 2열 교대로 바꿔주세요.”
병사가 멈칫했다.
그레이는 바로 고쳐 말했다.
“……아니요. 지금입니다. 늦으면 또 죽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골목을 짚었다.
“후송로는 안쪽 회랑으로. 증원로는 남쪽 골목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그쪽은 좁습니다!”
“좁아도 막히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막히면, 사람은 죽습니다.”
다음 손가락은 보급품 더미를 향했다.
“방패와 화살은 한꺼번에 보내지 마십시오. 세 묶음으로 나눕니다. 한 묶음이 막히면, 다음 묶음은 다른 길로.”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용기가 아닙니다.”
전장의 소음이 그녀의 말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끝까지 말했다.
“늦지 않는 순서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의 등불 너머로 빛이 들고 있었다.
회색빛이었다.
비가 그친 뒤, 먼 동방의 오래된 방 안에서 종이 창호를 지나 들어오는 듯한 빛.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빛. 다만 모든 것을 한 박자 비껴 보이게 만드는 빛.
빛은 먼저 방패 위에 내려앉았다.
방패의 피 묻은 나무판 위에 창살의 그림자가 생겼다.
돌바닥 위에는 얇은 격자가 드리웠다.
고개 아래 수레바퀴가 걸린 진흙 옆에, 있을 리 없는 창문빛이 사각형으로 놓였다.
[여관:비껴간 창].
방 전체가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먼저 온 것은 빛이었다.
하융은 그 빛 안에서 보았다.
아람이 다시 죽었다.
교대가 늦은 세계에서, 아람은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버텼다. 팔은 이미 제 것이 아니었고, 방패는 아주 조금 늦게 올라갔다. 그 조금 늦은 각도로 창이 들어왔다.
다른 빛 안에서는 아람이 살았다.
그는 한 박자 빨리 뒤로 물러났고, 다음 방패병이 그의 방패를 받아들었다. 방패는 더 높이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조금 왼쪽으로 낮아졌을 뿐이었다.
하융은 다음 창을 보았다.
세루브가 길목에서 죽었다. 후송로와 증원로가 같은 골목에서 엉킨 세계였다. 부상자는 빠져나가지 못했고, 증원병도 올라가지 못했다. 두 길이 서로를 막았다.
또 다른 창에서는 세루브가 죽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었다.
이쪽은 후송.
저쪽은 증원.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융은 세 번째 빛을 보았다.
바한이 방패를 들었다.
병참병이었던 그는 빈 간격을 보았고, 빈 간격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창에서 바한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큰 보급 묶음 하나를 셋으로 나누었다.
방패는 방패대로.
화살은 화살대로.
끈과 못은 따로.
보급은 길을 막지 않고 흘렀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창이 너무 많았다.
마리암이 마지막 수레를 밀다가 쓰러지는 창.
토로스가 명부 상자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는 창.
죠니의 기병대가 너무 일찍 원을 닫아 황금의 바람이 흩어지는 창.
죠니가 세 번째 회전까지 기다려, 적의 공세가 닿기 직전 반 박자를 비트는 창.
그리고 그 모든 창 바깥에, 지금 이 현실이 있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사로死路가 보이오.”
그는 회색 창빛 아래에서 한 발을 옮겼다.
“허나 생문生門은 아직 닫히지 않았소.”
곁에 있던 병사가 그를 보았다.
하융은 병사에게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확정된 길을 보지 않았다.
정답을 보지 않았다.
그저 창밖의 죽은 장면과, 아직 닫히지 않은 빛을 보았다.
“창밖의 세계는 답이 아니오.”
그가 말했다.
“다만, 지금의 우리가 밟지 말아야 할 그림자요.”
그러고는 죠니 쪽을 보았다.
죠니 조스타는 말 위에 있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가장 많이 움직이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말발굽.
창끝.
후속 기병과 선두 기병의 거리.
방패선이 숨을 삼키는 순간.
하융이 말했다.
“죠니 경.”
죠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말해.”
“두 번째 원은 죽었소.”
죠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 번째?”
하융은 회색 창빛 너머를 보았다.
두 번째 원에서 돌격한 죠니는 늦었다.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황금의 바람은 쌓이지 않았고, 원은 나선이 되지 못했다.
세 번째 원에서 그는 닿았다.
아니, 적에게 닿은 것이 아니었다.
적의 공세가 도착하는 순간에 닿았다.
“세 번째 원까지 기다리시오.”
죠니가 물었다.
“확실해?”
“확실한 것은 없소.”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다만 두 번째 원의 그대는, 이미 거울 안에 있소.”
죠니는 그 말에 웃었다.
짧고, 작게.
“그럼 거울 밖으로 돌면 되겠네.”
그때 성벽 위에서 누군가 다시 말했다.
“패배입니다.”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
말한 사람은 지친 장교였다. 그의 투구는 찌그러져 있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계산한 것이다. 서쪽 방패선, 마지막 수레, 기록소의 연기, 적 기병의 거리, 지연된 교대.
계산 결과가 그랬다.
패배.
그 이름이 두 번째로 전장 위에 내려앉으려 했다.
레이튼은 그 말을 들었다.
그는 피 묻은 성벽을 보았다.
찢어진 깃발을 보았다.
고개 아래 멈춘 수레를 보았다.
장부를 끌어안은 그레이를 보았고, 회색 창빛 아래 서 있는 하융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패배라.”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이 들었다.
“흥미로운 이름입니다.”
레이튼은 지팡이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이 너무 많군요.”
전장 위로 서재가 열렸다.
천장은 없었다.
그러나 별들이 있었다.
별들은 있었지만, 별자리는 없었다.
빛은 있었지만, 아직 어떤 결론으로도 묶이지 않았다.
[여관:문답의 서재].
피 묻은 방패도 질문이 되었다.
찢어진 깃발도 질문이 되었다.
마지막 수레도, 연기 오르는 기록소도, 그레이의 장부도, 하융의 창빛도, 죠니의 아직 닫히지 않은 원도 질문이 되었다.
레이튼은 방패병들을 향해 물었다.
“만약 이것이 패배가 아니라면.”
그는 잠시 숨을 두었다.
“당신은, 우리는, 아르메니아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누구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만약 이 성벽이 무덤이 아니라 관문이라면, 방패는 무엇을 가려야 합니까?”
한 방패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뒤로 향했다.
마지막 수레.
레이튼은 기다렸다.
질문은 명령보다 느렸다.
그러나 그 느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저 수레가 짐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누가 그 바퀴를 밀어야 합니까?”
피난민 하나가 수레의 난간을 붙잡았다.
또 하나가 바퀴 옆으로 갔다.
아이를 안은 여인이 아이를 다른 노인에게 맡기고 두 손을 비웠다.
레이튼은 이번에는 의무병들을 보았다.
“만약 후퇴가 도망이 아니라, 아직 퇴장하지 않은 배우를 다음 장면으로 데려가는 일이라면.”
그는 지팡이 끝으로 엉킨 골목을 가리켰다.
“당신들은 누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까?”
의무병 하나가 부상자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만약 니케아가 늦은 것이 실패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이라면.”
레이튼은 찢어진 깃발을 보았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두어야 합니까?”
전령 하나가 무너진 깃대를 다시 세웠다.
레이튼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성벽 아래를 보았다.
룸 술탄국의 선두 기병들은 이미 승리를 보았다.
흔들리는 방패.
멈춘 수레.
연기 오르는 기록소.
찢어진 깃발.
그들의 말발굽에는 승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레이튼은 그 이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정말 이겼습니까?”
목소리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은 닿았다.
방패와 말발굽과 화살 소리 사이로, 마치 각자의 마음속 빈 여백에 적히는 글자처럼 닿았다.
술탄국의 선두 기병 하나가 눈을 찡그렸다.
그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득,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의 이름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무너진 방패선.
아니, 아직 마지막 길을 가리고 있는 방패선.
도망치는 피난민.
아니, 아직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
끝난 전투.
아니,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레이튼이 다시 물었다.
“저 깃발이 찢어진 것은 패배의 증거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적진의 지휘 깃발 아래에도 닿았다.
“아니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까?”
술탄국의 지휘관이 반 박자 늦게 손을 들었다.
추격 명령이 늦었다.
선두 기병 몇이 이미 창을 낮췄고, 후속 궁기병은 방패선이 무너졌다고 판단해 사격각을 바꾸었다.
그 반 박자를, 하융이 보았다.
적진 위로 회색 창호빛이 비껴들었다.
첫 번째 창에서 술탄국의 지휘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돌격은 완성되었고, 방패선은 부서졌다.
두 번째 창에서 그는 아주 짧게 망설였다.
너무 짧아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흔들림이었다.
세 번째 창에서 선두 기병 하나가 창끝을 너무 일찍 낮췄고, 후속대가 그 흐름에 엉켰다.
하융은 세 번째 창을 보았다.
만곡된 직선.
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승리를 향해 곧게 달려오는 적의 돌격은, 사실 아주 미세하게 휘어 있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그 직선에 보이지 않는 만곡을 만들었다.
하융은 그 만곡을 현실에 비췄다.
“레이튼 경.”
그가 말했다.
“그 질문에 답을 잘못한 세계가 있었소.”
그는 손을 들었다.
“얇게 겹치겠소.”
회색 창빛이 적의 선두 위에 내려앉았다.
조종이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다만 적이 이미 품은 승리 확신, 레이튼의 질문으로 생긴 미세한 균열, 그리고 그 균열이 실제 실수로 이어졌던 가능성의 빛이 현실 위에 비친 것이다.
창끝 하나가 너무 빨리 내려갔다.
말 한 필이 옆으로 반 보 밀렸다.
지휘 깃발 하나가 늦게 흔들렸다.
작은 실수였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작은 실수가 문이 된다.
하융은 그 문 앞에서 말했다.
“사계死界는 보았소.”
그의 발밑에 회색 격자빛이 놓였다.
“미계未界도 보았소.”
그는 지금의 전장을 보았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고 있었다.
레이튼이 질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죠니가 아직 창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아직 무대 위에 오르지 않았다.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허나 내가 설 곳은 현계現界요.”
그리고 아주 낮게 선언했다.
“나는 이 세계를 선택하오.”
《이 세계를 선택한 자》.
전장의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공포가 사람들을 완전히 삼키기 직전,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 창밖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죽는 길도 있었고, 사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발밑의 현실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때 죠니가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기사대!”
함성이 말발굽 위로 터졌다.
기병들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원으로 돌아!”
젊은 기사가 외쳤다.
“적을 향해 돌격하지 않습니까!”
죠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적 보지 마!”
그의 창끝이 방패선 앞, 적의 돌격이 닿으려는 좁은 지점을 가리켰다.
“궤도를 봐!”
첫 번째 원.
말발굽이 흙을 갈랐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처음엔 그것이 후퇴인 줄 알았다. 기병들이 정면을 비우고, 옆으로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도 죽이지 마!”
죠니의 구령이 전장 위를 찢었다.
두 번째 원.
금빛 먼지가 말갈기 사이로 피어났다.
처음에는 석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말발굽 뒤에 아주 가는 금빛 선이 남았다. 선은 먼지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다음 말발굽의 궤도에 이어졌다. 망토 끝에 금빛이 스쳤고, 창끝 주변에는 작은 와류가 생겼다.
“창끝 맞춰!”
세 번째 원.
기병대 전체가 하나의 나선으로 엮였다.
회전이 회전을 불렀다.
반복이 오차를 깎았다.
오차가 줄어들자, 전장 위에 찰나가 선명해졌다.
죠니의 눈은 적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적의 공세가 완성되는 순간.
말발굽과 창끝과 함성과 후속대의 압력이 하나가 되어 방패선을 부수려는 바로 그 지점.
“지금 찌를 건 적이 아니다!”
황금의 바람이 기사들의 망토 끝을 감았다.
“저 돌격이 도착하는 순간이다!”
황금의 바람은 광풍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교했다.
가늘고 찬란했다.
수없이 반복된 길 끝에서 단 하나의 정답만 남긴 듯한 나선이었다.
하융의 회색 창살 그림자가 그 나선 바깥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공중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가 고친 순서가 땅 위에 길을 만들었다.
죠니는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이미 회전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다.
“돌려!”
《윤회진: 영원할 찰나》.
그 순간, 죠니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이미 돌아갔다.”
황금의 바람이 적의 선두를 스쳤다.
룸 술탄국의 돌격은 방패선에 닿았다.
아니, 닿으려 했다.
말발굽은 도착했으나 충격은 반 박자 늦었다.
창끝은 내려왔으나 방패는 이미 그 각도에 있었다.
후속 기병은 밀어붙이려 했으나 앞줄의 박자가 어긋나 서로의 길을 좁혔다.
돌격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 찰나만큼, 서쪽 방패선은 살아 있었다.
그 찰나만큼, 마지막 수레는 아직 밀 수 있었다.
그 찰나만큼, 기록소의 문은 아직 닫힐 수 있었다.
푸리나는 박수를 듣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수칠 손들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수레를 밀고 있었다.
부상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불붙은 기록소의 문 앞에서 젖은 천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푸리나는 알았다.
이곳은 무대였다.
그리고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그녀는 장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옷자락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끝에는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녀는 푸리나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군주님.”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응.”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말려도…… 소용없겠지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아마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열었다.
“그러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숫자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레이는 첫 번째 이름을 보았다.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두 번째 이름.
“그리고 끝나면…… 보내주십시오.”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낮아졌다.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을게.”
성벽 아래에서 적의 함성이 밀려왔다.
황금의 바람은 아직 적의 공세를 붙잡고 있었다.
회색 창빛은 아직 닫히지 않은 가능성을 비추고 있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다시 말했다.
“다시 싸우라고도 하지 않을게.”
그리고 그레이를 보았다.
“한 장면만 빌리고, 반드시 보내줄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숨이었다.
“그럼…… 제가 이름을 읽겠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아람.”
첫 번째 이름이 성벽 위에 놓였다.
“서쪽 방패선. 교대 지연.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잔류. 사망.”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람.”
“세루브.”
두 번째 이름.
“후송로 담당. 후송로와 증원로 중복. 부상자 이탈 지원 중 사망.”
“세루브.”
“바한.”
세 번째 이름.
“병참 담당. 방패 보급 지연. 빈 간격 보충 중 사망.”
“바한.”
그레이의 손이 한순간 멈췄다.
“마리암.”
전장의 소음이 아주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피난민 수레 셋째 줄. 마지막 수레 보조. 아이들을 고개 위로 밀어 올리던 중 사망.”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마리암.”
마지막 이름.
“토로스.”
그레이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임시 기록소 서기. 명부 보관함 이송 중 방화조 습격. 기록 상자 보호 후 사망.”
푸리나는 그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토로스.”
그리고 손을 펼쳤다.
그녀의 [여관:극장]이 열렸다.
부서진 성벽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되었다.
방패선은 막이 되었다.
고개 아래 마지막 수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이 되었다.
기록소의 닫히지 않은 문은, 무대 뒤편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출입구가 되었다.
푸리나는 군주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극장주였다.
죽은 자를 무대 위로 끌어내려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이미 퇴장한 배우들이 남긴 마지막 박자가, 산 자의 발밑에 닿을 수 있도록 조명을 맞추는 극장주였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대들의 막을 다시 열겠다고 말하지 않겠다.”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전장은 들었다.
“그대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거짓말하지 않겠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읽은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아람. 세루브. 바한. 마리암. 토로스.”
다섯 이름이 무대 위의 별처럼 떠올랐다.
“그대들은 퇴장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 사실을 지우지 않겠다.”
성벽 아래에서 적의 함성이 다시 가까워졌다.
죠니의 황금의 바람이 한 번 더 휘돌았다.
하융의 회색 창빛이 수레바퀴 옆에 비껴들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적진의 승리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그레이의 장부 위에서 등불들이 흔들렸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다만, 그대들이 남긴 마지막 박자 하나를 빌리겠다.”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슬픔을 부정하는 밝음이 아니었다.
슬픔이 있기에 조명을 꺼서는 안 된다는 밝음이었다.
“아직 고개를 넘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마지막 수레에서 아이 하나가 울음을 멈췄다.
“아직 장부에 도착하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아직 약속이 지나갈 자리가 남아 있다.”
레이튼은 별자리를 긋지 않은 하늘을 보았다.
“스러진 별들이여.”
푸리나는 무대 위에서, 죽은 이들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장면만.”
그녀가 손을 펼쳤다.
“산 자의 다음 막을 위해.”
《재연극: 스러져간 별을 위한 세레나데》.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방패를 들고 싸우는 광경은 없었다.
칼을 휘두르는 망자도 없었다.
전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병력도 없었다.
그들은 잔향이었다.
아람의 그림자는 방패선 앞에 섰다.
그는 적을 밀쳐내지 않았다.
다만 방패를 들어 올렸다.
더 높이도 아니고, 더 세게도 아니었다.
조금 왼쪽으로 낮게.
살아 있는 방패병들은 그제야 알았다. 방패는 용기만으로 드는 것이 아니었다. 방패에는 각도가 있었다. 뒤의 수레를 가리고, 옆의 병사를 살리고, 적의 창끝을 흘리는 작은 각도.
방패들이 움직였다.
세루브의 그림자는 골목 입구에 섰다.
그는 부상자를 업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었다.
이쪽은 후송.
저쪽은 증원.
살아 있는 의무병들이 그 손짓을 보았다.
후송 수레가 안쪽 회랑으로 빠졌다.
증원병들이 남쪽 골목으로 올라갔다.
길이 갈라졌다.
바한의 그림자는 방패를 들지 않았다.
그는 끈을 풀었다.
큰 보급 묶음 하나를 셋으로 나누었다.
방패.
화살.
끈과 못.
산 자들이 그 동작을 따라 하자, 보급은 더 이상 골목을 막지 않고 흐르기 시작했다.
마리암의 그림자는 마지막 수레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산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바퀴를 잡았다.
하나.
그 박자에 피난민 하나가 손을 얹었다.
둘.
노인이 어깨를 밀었다.
셋.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수레 뒤를 받쳤다.
수레바퀴가 진흙턱 위로 움직였다.
토로스의 그림자는 기록소 문 앞에 섰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불길 앞에서 검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상자를 밀었다.
첫 번째 상자는 안쪽으로.
두 번째 장부는 젖은 천 아래로.
세 번째 문은, 안에서 닫는다.
살아 있는 서기들이 그 순서를 따라 했다.
시종들이 물을 부었다.
한 병사가 자기 망토를 찢어 문틈에 눌렀다.
기록소의 불길이 꺾였다.
이름들은 타지 않았다.
그 순간, 푸리나는 가신들을 보았다.
그레이가 이름을 세웠다.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했다.
레이튼이 패배와 승리의 이름을 질문으로 되돌렸다.
죠니가 한 찰나를 돌려냈다.
스러진 별들이 마지막 박자를 남겼다.
산 자들이, 그 박자를 이어받았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배우들은 선택했다.
서사는 이미 충분히 쌓였다.
그러니 이제 막이 올라야 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등 뒤로 [여관:극장]의 조명이 올랐다.
황금의 바람은 무대 앞을 감쌌고, 회색 창빛은 무대 바닥에 비껴들었으며, 문답의 서재의 별들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 떠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은 하나씩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외쳤다.
“그레이가 이름을 세웠다!”
방패선이 다시 올라갔다.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했다!”
회색 창빛 아래, 병사들이 죽을 위치에서 반 발 비껴섰다.
“레이튼이 패배라는 이름을 지웠다!”
성벽 위의 누구도 더 이상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죠니가 한 찰나를 돌려냈다!”
황금의 바람이 마지막으로 적의 공세를 감아 돌았다.
“스러진 별들이 마지막 박자를 남겼다!”
그림자들이 조용히 산 자들의 손끝에 박자를 건넸다.
“그리고 산 자들이, 그 박자를 이어받았다!”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렸다.
“그대여, 박수를!”
성벽이 떨렸다.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그대여, 박수를!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기적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룸 술탄국의 군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적을 태운 것도 아니었다.
성벽이 갑자기 새로 솟아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 장면의 소망이 현재에 닿았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었다.
서쪽 방패선은 한 장면 더 버텼다.
기록소의 이름들은 불타지 않았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이 지나갈 자리가 남았다.
룸 술탄국의 세 번째 파상공세는 완성되지 못했다.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그 차이가 전장을 갈랐다.
방패병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수레를 놓지 않았다.
의무병들은 부상자를 버리지 않았다.
서기들은 장부를 안쪽으로 옮겼다.
기병대의 말발굽은 황금의 바람이 잦아든 뒤에도 한 박자 더 돌았다.
그리고 세레나데는 끝났다.
그림자들이 멈췄다.
아람은 방패를 내렸다.
세루브는 손을 내렸다.
바한은 끈을 놓았다.
마리암은 바퀴에서 손을 뗐다.
토로스는 닫힌 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들을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전장을 울리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였다.
“다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을게.”
그레이는 장부를 안고 눈을 내렸다.
“다시 싸우라고 부르지 않을게.”
하융은 창 하나가 조용히 닫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쉬어줘.”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흔들림을 멈췄다.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등불은 더 이상 불안하게 떨지 않았다.
그것은 이름이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다.
레이튼은 하늘의 별들을 보았다.
그는 별자리를 긋지 않았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빛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죠니는 창을 내렸다.
황금의 바람은 말갈기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빛나고 사라졌다.
그는 성벽 너머, 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수레를 보았다.
“넘겼네.”
그 말뿐이었다.
하융은 조용히 답했다.
“그렇소.”
그리고 잠시 뒤 덧붙였다.
“저 창은 닫혔소.”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나쁜 뜻이야?”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회색빛이 그의 눈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살아남은 길은 창밖에 있을 필요가 없소.”
그 길은 이제 현실에 있었다.
그날 밤, 성벽 위에는 박수가 없었다.
박수칠 손들은 방패를 들고 있었고, 살아남은 입술들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말을 잃었고, 누군가는 방금 넘긴 수레를 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록소 안에서는 젖은 장부가 하나씩 펼쳐졌다.
그레이는 이름을 다시 적었다.
아람.
세루브.
바한.
마리암.
토로스.
그리고 그 아래에 조용히 덧붙였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도록.
푸리나는 성벽 위에 서서 고개 아래를 보았다.
마지막 수레는 고개를 넘었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기록소의 이름들은 불타지 않았다.
아직 니케아의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먼 남쪽 길 끝에서, 석양과 먼지가 섞여 아주 희미한 빛이 일었다.
깃발인지, 바람인지,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인지, 아직 아무도 이름 붙이지 못했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좋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뭐가?”
레이튼은 지팡이를 짚었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박수는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알았다.
박수는 반드시 소리일 필요가 없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고,
장부의 이름이 불타지 않고,
성문이 한 번 더 닫혀 있는 것.
그것이 오늘 킬리키아가 올린 박수였다.
엽편 — 스러져간 별을 위한 세레나데
해가 기울자, 성벽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그림자는 서쪽 방패선 아래로 스며들었고, 방패를 든 손들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버틴 손이었다. 가죽끈은 땀과 피에 젖었고, 방패 안쪽의 나무결에는 손톱 자국이 남았다. 누군가는 손가락을 제대로 펴지 못했고, 누군가는 창을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그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 교대는 오지 않았다.
서쪽 방패선은 이미 두 번의 파상공세를 버텼다. 첫 번째는 화살이었다. 두 번째는 도보병의 낮은 창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언덕 아래에서 아직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룸 술탄국의 기병들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느려서 오히려 무서웠다. 말들은 지친 기색이 있었지만, 기수들은 그 피로를 감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적의 선두는 일부러 달리지 않았다. 킬리키아의 방패병들이 더 오래 그 모습을 보게 하려는 것처럼, 말발굽 하나하나로 저녁의 돌길을 두드렸다.
뒤쪽 골목에서는 후송 수레가 멈춰 있었다.
부상자를 싣고 내려가야 할 길과, 서쪽 방패선으로 올라가야 할 증원병의 길이 같은 곳에서 엉켜 있었다. 누군가 비켜 달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피 묻은 천을 움켜쥔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들것 하나가 골목 벽에 부딪혔다. 그 충격에 들것 위의 병사가 입술을 물었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비명을 지를 힘도 아끼고 있었다.
고개 아래에는 마지막 피난민 수레가 남아 있었다.
수레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노인도 있었다. 약재 상자도 있었다. 젖은 천으로 덮은 작은 상자들도 있었다. 어떤 상자에는 빵이 있었고, 어떤 상자에는 붕대가 있었고, 어떤 상자에는 이름이 있었다.
피난민의 이름.
부상자의 이름.
죽은 자의 이름.
그보다 더 뒤쪽, 임시 기록소의 지붕 끝에서 얇은 연기가 올랐다.
처음에는 석양의 빛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기록소 쪽에 불!”
그 외침과 동시에 성벽 아래에서 다른 목소리가 올라왔다.
“니케아는 늦었다!”
룸 술탄국의 선전병들이었다.
“로마는 오지 않는다!”
“성문을 열면 아이들은 산다!”
방패병 하나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성문을 열 생각이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수레를 보았다.
연기를 보았다.
교대가 오지 않는 방패선을 보았다.
그리고 언덕 아래에서 천천히 정렬되는 기병들을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끝났어.”
작은 말이었다.
방패 뒤에서 새어 나온 말이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말한 사람조차, 어쩌면 자신이 말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화살보다 빨랐다.
끝났다.
그 이름이 전장 위에 내려앉으려 했다.
그때 전령 하나가 그레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쪽 방패선 사망자 스물셋!”
그레이는 장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한순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물셋.
사람이 숫자가 되는 데에는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스물셋이 아닙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너무 작아서, 전장의 소음에 묻힐 것 같았다.
그러나 묻히지 않았다.
그녀는 장부를 펼쳤다.
그 순간, 성벽 위의 피와 먼지 아래로 다른 길이 겹쳐졌다.
요란한 거리는 아니었다.
비가 그친 뒤의 돌길.
낮은 처마.
작은 문들.
문마다 걸린 희미한 등불.
그리고 손으로 여러 번 닦은 듯한 문패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곳은 망자를 가두는 거리가 아니었다.
울부짖는 원혼이 떠도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이름이 잊히지 않기 위해 잠시 머무는 거리였다.
그레이는 첫 번째 문패 앞에 섰다.
아람.
그녀는 손끝으로 그 이름을 더듬었다.
“아람.”
한 줄이 장부 위에 떠올랐다.
“서쪽 방패선. 교대가 늦었습니다.”
그레이는 잠시 말을 멈췄다.
보고가 아니었다.
사과에 가까웠다.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잔류. 사망.”
그녀는 다음 문패를 보았다.
세루브.
“세루브. 후송로 담당. 후송로와 증원로가…… 겹쳤습니다.”
또 한 줄.
“부상자 이탈 지원 중 사망.”
세 번째 문패.
바한.
“바한. 병참 담당. 방패 보급 지연.”
그레이의 손이 장부 모서리를 붙잡았다.
“빈 간격을 메우다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성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방패도 아직 서 있었다.
창도 아직 적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지탱하는 순서가 늦어지고 있었다.
교대가 늦었다.
후송이 늦었다.
보급이 늦었다.
이름이 늦었다.
“이분들은 같은 이유로 죽었습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작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같은 이유로 다시 죽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녀의 장부 뒤편으로 거리의 등불들이 흔들렸다.
아람의 문 앞 등불.
세루브의 문 앞 등불.
바한의 문 앞 등불.
각각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등불의 흔들림은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레이는 지도를 펼쳤다.
“서쪽 방패선. 2열 교대로 바꿔주세요.”
병사가 멈칫했다.
그레이는 바로 고쳐 말했다.
“……아니요. 지금입니다. 늦으면 또 죽습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골목을 짚었다.
“후송로는 안쪽 회랑으로. 증원로는 남쪽 골목으로 나눕니다.”
“하지만 그쪽은 좁습니다!”
“좁아도 막히지는 않습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막히면, 사람은 죽습니다.”
다음 손가락은 보급품 더미를 향했다.
“방패와 화살은 한꺼번에 보내지 마십시오. 세 묶음으로 나눕니다. 한 묶음이 막히면, 다음 묶음은 다른 길로.”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용기가 아닙니다.”
전장의 소음이 그녀의 말을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끝까지 말했다.
“늦지 않는 순서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의 등불 너머로 빛이 들고 있었다.
회색빛이었다.
비가 그친 뒤, 먼 동방의 오래된 방 안에서 종이 창호를 지나 들어오는 듯한 빛.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빛. 다만 모든 것을 한 박자 비껴 보이게 만드는 빛.
빛은 먼저 방패 위에 내려앉았다.
방패의 피 묻은 나무판 위에 창살의 그림자가 생겼다.
돌바닥 위에는 얇은 격자가 드리웠다.
고개 아래 수레바퀴가 걸린 진흙 옆에, 있을 리 없는 창문빛이 사각형으로 놓였다.
[여관:비껴간 창].
방 전체가 내려온 것은 아니었다.
먼저 온 것은 빛이었다.
하융은 그 빛 안에서 보았다.
아람이 다시 죽었다.
교대가 늦은 세계에서, 아람은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버텼다. 팔은 이미 제 것이 아니었고, 방패는 아주 조금 늦게 올라갔다. 그 조금 늦은 각도로 창이 들어왔다.
다른 빛 안에서는 아람이 살았다.
그는 한 박자 빨리 뒤로 물러났고, 다음 방패병이 그의 방패를 받아들었다. 방패는 더 높이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조금 왼쪽으로 낮아졌을 뿐이었다.
하융은 다음 창을 보았다.
세루브가 길목에서 죽었다. 후송로와 증원로가 같은 골목에서 엉킨 세계였다. 부상자는 빠져나가지 못했고, 증원병도 올라가지 못했다. 두 길이 서로를 막았다.
또 다른 창에서는 세루브가 죽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었다.
이쪽은 후송.
저쪽은 증원.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융은 세 번째 빛을 보았다.
바한이 방패를 들었다.
병참병이었던 그는 빈 간격을 보았고, 빈 간격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다른 창에서 바한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큰 보급 묶음 하나를 셋으로 나누었다.
방패는 방패대로.
화살은 화살대로.
끈과 못은 따로.
보급은 길을 막지 않고 흘렀다.
하융은 눈을 감지 않았다.
창이 너무 많았다.
마리암이 마지막 수레를 밀다가 쓰러지는 창.
토로스가 명부 상자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는 창.
죠니의 기병대가 너무 일찍 원을 닫아 황금의 바람이 흩어지는 창.
죠니가 세 번째 회전까지 기다려, 적의 공세가 닿기 직전 반 박자를 비트는 창.
그리고 그 모든 창 바깥에, 지금 이 현실이 있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사로死路가 보이오.”
그는 회색 창빛 아래에서 한 발을 옮겼다.
“허나 생문生門은 아직 닫히지 않았소.”
곁에 있던 병사가 그를 보았다.
하융은 병사에게 미래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확정된 길을 보지 않았다.
정답을 보지 않았다.
그저 창밖의 죽은 장면과, 아직 닫히지 않은 빛을 보았다.
“창밖의 세계는 답이 아니오.”
그가 말했다.
“다만, 지금의 우리가 밟지 말아야 할 그림자요.”
그러고는 죠니 쪽을 보았다.
죠니 조스타는 말 위에 있었다.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가장 많이 움직이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말발굽.
창끝.
후속 기병과 선두 기병의 거리.
방패선이 숨을 삼키는 순간.
하융이 말했다.
“죠니 경.”
죠니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말해.”
“두 번째 원은 죽었소.”
죠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 번째?”
하융은 회색 창빛 너머를 보았다.
두 번째 원에서 돌격한 죠니는 늦었다.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황금의 바람은 쌓이지 않았고, 원은 나선이 되지 못했다.
세 번째 원에서 그는 닿았다.
아니, 적에게 닿은 것이 아니었다.
적의 공세가 도착하는 순간에 닿았다.
“세 번째 원까지 기다리시오.”
죠니가 물었다.
“확실해?”
“확실한 것은 없소.”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다만 두 번째 원의 그대는, 이미 거울 안에 있소.”
죠니는 그 말에 웃었다.
짧고, 작게.
“그럼 거울 밖으로 돌면 되겠네.”
그때 성벽 위에서 누군가 다시 말했다.
“패배입니다.”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
말한 사람은 지친 장교였다. 그의 투구는 찌그러져 있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그는 도망치고 싶어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계산한 것이다. 서쪽 방패선, 마지막 수레, 기록소의 연기, 적 기병의 거리, 지연된 교대.
계산 결과가 그랬다.
패배.
그 이름이 두 번째로 전장 위에 내려앉으려 했다.
레이튼은 그 말을 들었다.
그는 피 묻은 성벽을 보았다.
찢어진 깃발을 보았다.
고개 아래 멈춘 수레를 보았다.
장부를 끌어안은 그레이를 보았고, 회색 창빛 아래 서 있는 하융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패배라.”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이 들었다.
“흥미로운 이름입니다.”
레이튼은 지팡이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붙이기에는, 아직 묻지 않은 질문이 너무 많군요.”
전장 위로 서재가 열렸다.
천장은 없었다.
그러나 별들이 있었다.
별들은 있었지만, 별자리는 없었다.
빛은 있었지만, 아직 어떤 결론으로도 묶이지 않았다.
[여관:문답의 서재].
피 묻은 방패도 질문이 되었다.
찢어진 깃발도 질문이 되었다.
마지막 수레도, 연기 오르는 기록소도, 그레이의 장부도, 하융의 창빛도, 죠니의 아직 닫히지 않은 원도 질문이 되었다.
레이튼은 방패병들을 향해 물었다.
“만약 이것이 패배가 아니라면.”
그는 잠시 숨을 두었다.
“당신은, 우리는, 아르메니아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합니까?”
누구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이튼은 다시 물었다.
“만약 이 성벽이 무덤이 아니라 관문이라면, 방패는 무엇을 가려야 합니까?”
한 방패병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뒤로 향했다.
마지막 수레.
레이튼은 기다렸다.
질문은 명령보다 느렸다.
그러나 그 느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저 수레가 짐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면, 누가 그 바퀴를 밀어야 합니까?”
피난민 하나가 수레의 난간을 붙잡았다.
또 하나가 바퀴 옆으로 갔다.
아이를 안은 여인이 아이를 다른 노인에게 맡기고 두 손을 비웠다.
레이튼은 이번에는 의무병들을 보았다.
“만약 후퇴가 도망이 아니라, 아직 퇴장하지 않은 배우를 다음 장면으로 데려가는 일이라면.”
그는 지팡이 끝으로 엉킨 골목을 가리켰다.
“당신들은 누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까?”
의무병 하나가 부상자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만약 니케아가 늦은 것이 실패가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이라면.”
레이튼은 찢어진 깃발을 보았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두어야 합니까?”
전령 하나가 무너진 깃대를 다시 세웠다.
레이튼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성벽 아래를 보았다.
룸 술탄국의 선두 기병들은 이미 승리를 보았다.
흔들리는 방패.
멈춘 수레.
연기 오르는 기록소.
찢어진 깃발.
그들의 말발굽에는 승리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레이튼은 그 이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정말 이겼습니까?”
목소리가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은 닿았다.
방패와 말발굽과 화살 소리 사이로, 마치 각자의 마음속 빈 여백에 적히는 글자처럼 닿았다.
술탄국의 선두 기병 하나가 눈을 찡그렸다.
그는 말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문득, 자신이 보고 있는 장면의 이름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무너진 방패선.
아니, 아직 마지막 길을 가리고 있는 방패선.
도망치는 피난민.
아니, 아직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
끝난 전투.
아니, 아직 닫히지 않은 문.
레이튼이 다시 물었다.
“저 깃발이 찢어진 것은 패배의 증거입니까?”
그의 목소리는 적진의 지휘 깃발 아래에도 닿았다.
“아니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까?”
술탄국의 지휘관이 반 박자 늦게 손을 들었다.
추격 명령이 늦었다.
선두 기병 몇이 이미 창을 낮췄고, 후속 궁기병은 방패선이 무너졌다고 판단해 사격각을 바꾸었다.
그 반 박자를, 하융이 보았다.
적진 위로 회색 창호빛이 비껴들었다.
첫 번째 창에서 술탄국의 지휘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돌격은 완성되었고, 방패선은 부서졌다.
두 번째 창에서 그는 아주 짧게 망설였다.
너무 짧아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흔들림이었다.
세 번째 창에서 선두 기병 하나가 창끝을 너무 일찍 낮췄고, 후속대가 그 흐름에 엉켰다.
하융은 세 번째 창을 보았다.
만곡된 직선.
그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승리를 향해 곧게 달려오는 적의 돌격은, 사실 아주 미세하게 휘어 있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그 직선에 보이지 않는 만곡을 만들었다.
하융은 그 만곡을 현실에 비췄다.
“레이튼 경.”
그가 말했다.
“그 질문에 답을 잘못한 세계가 있었소.”
그는 손을 들었다.
“얇게 겹치겠소.”
회색 창빛이 적의 선두 위에 내려앉았다.
조종이 아니었다.
명령도 아니었다.
다만 적이 이미 품은 승리 확신, 레이튼의 질문으로 생긴 미세한 균열, 그리고 그 균열이 실제 실수로 이어졌던 가능성의 빛이 현실 위에 비친 것이다.
창끝 하나가 너무 빨리 내려갔다.
말 한 필이 옆으로 반 보 밀렸다.
지휘 깃발 하나가 늦게 흔들렸다.
작은 실수였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작은 실수가 문이 된다.
하융은 그 문 앞에서 말했다.
“사계死界는 보았소.”
그의 발밑에 회색 격자빛이 놓였다.
“미계未界도 보았소.”
그는 지금의 전장을 보았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고 있었다.
레이튼이 질문을 남겨두고 있었다.
죠니가 아직 창을 들고 있었다.
푸리나가 아직 무대 위에 오르지 않았다.
하융은 고개를 들었다.
“허나 내가 설 곳은 현계現界요.”
그리고 아주 낮게 선언했다.
“나는 이 세계를 선택하오.”
《이 세계를 선택한 자》.
전장의 공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공포가 사람들을 완전히 삼키기 직전,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 창밖에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죽는 길도 있었고, 사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발밑의 현실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때 죠니가 창을 번쩍 들어 올렸다.
“기사대!”
함성이 말발굽 위로 터졌다.
기병들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원으로 돌아!”
젊은 기사가 외쳤다.
“적을 향해 돌격하지 않습니까!”
죠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외쳤다.
“적 보지 마!”
그의 창끝이 방패선 앞, 적의 돌격이 닿으려는 좁은 지점을 가리켰다.
“궤도를 봐!”
첫 번째 원.
말발굽이 흙을 갈랐다.
성벽 위의 사람들은 처음엔 그것이 후퇴인 줄 알았다. 기병들이 정면을 비우고, 옆으로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도 죽이지 마!”
죠니의 구령이 전장 위를 찢었다.
두 번째 원.
금빛 먼지가 말갈기 사이로 피어났다.
처음에는 석양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말발굽 뒤에 아주 가는 금빛 선이 남았다. 선은 먼지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다음 말발굽의 궤도에 이어졌다. 망토 끝에 금빛이 스쳤고, 창끝 주변에는 작은 와류가 생겼다.
“창끝 맞춰!”
세 번째 원.
기병대 전체가 하나의 나선으로 엮였다.
회전이 회전을 불렀다.
반복이 오차를 깎았다.
오차가 줄어들자, 전장 위에 찰나가 선명해졌다.
죠니의 눈은 적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순간을 보고 있었다.
적의 공세가 완성되는 순간.
말발굽과 창끝과 함성과 후속대의 압력이 하나가 되어 방패선을 부수려는 바로 그 지점.
“지금 찌를 건 적이 아니다!”
황금의 바람이 기사들의 망토 끝을 감았다.
“저 돌격이 도착하는 순간이다!”
황금의 바람은 광풍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교했다.
가늘고 찬란했다.
수없이 반복된 길 끝에서 단 하나의 정답만 남긴 듯한 나선이었다.
하융의 회색 창살 그림자가 그 나선 바깥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공중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가 고친 순서가 땅 위에 길을 만들었다.
죠니는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이미 회전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느꼈다.
“돌려!”
《윤회진: 영원할 찰나》.
그 순간, 죠니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이미 돌아갔다.”
황금의 바람이 적의 선두를 스쳤다.
룸 술탄국의 돌격은 방패선에 닿았다.
아니, 닿으려 했다.
말발굽은 도착했으나 충격은 반 박자 늦었다.
창끝은 내려왔으나 방패는 이미 그 각도에 있었다.
후속 기병은 밀어붙이려 했으나 앞줄의 박자가 어긋나 서로의 길을 좁혔다.
돌격은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완성되지도 못했다.
그 찰나만큼, 서쪽 방패선은 살아 있었다.
그 찰나만큼, 마지막 수레는 아직 밀 수 있었다.
그 찰나만큼, 기록소의 문은 아직 닫힐 수 있었다.
푸리나는 박수를 듣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수칠 손들은 방패를 들고 있었다.
수레를 밀고 있었다.
부상자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불붙은 기록소의 문 앞에서 젖은 천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푸리나는 알았다.
이곳은 무대였다.
그리고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가왔다.
그녀는 장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옷자락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고, 손끝에는 잉크가 번져 있었다. 그녀는 푸리나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군주님.”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응.”
그레이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말려도…… 소용없겠지요.”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아마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열었다.
“그러면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숫자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레이는 첫 번째 이름을 보았다.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두 번째 이름.
“그리고 끝나면…… 보내주십시오.”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낮아졌다.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을게.”
성벽 아래에서 적의 함성이 밀려왔다.
황금의 바람은 아직 적의 공세를 붙잡고 있었다.
회색 창빛은 아직 닫히지 않은 가능성을 비추고 있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다시 말했다.
“다시 싸우라고도 하지 않을게.”
그리고 그레이를 보았다.
“한 장면만 빌리고, 반드시 보내줄게.”
그레이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숨이었다.
“그럼…… 제가 이름을 읽겠습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아람.”
첫 번째 이름이 성벽 위에 놓였다.
“서쪽 방패선. 교대 지연. 세 번째 파상공세까지 잔류. 사망.”
푸리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람.”
“세루브.”
두 번째 이름.
“후송로 담당. 후송로와 증원로 중복. 부상자 이탈 지원 중 사망.”
“세루브.”
“바한.”
세 번째 이름.
“병참 담당. 방패 보급 지연. 빈 간격 보충 중 사망.”
“바한.”
그레이의 손이 한순간 멈췄다.
“마리암.”
전장의 소음이 아주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피난민 수레 셋째 줄. 마지막 수레 보조. 아이들을 고개 위로 밀어 올리던 중 사망.”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마리암.”
마지막 이름.
“토로스.”
그레이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임시 기록소 서기. 명부 보관함 이송 중 방화조 습격. 기록 상자 보호 후 사망.”
푸리나는 그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토로스.”
그리고 손을 펼쳤다.
그녀의 [여관:극장]이 열렸다.
부서진 성벽은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되었다.
방패선은 막이 되었다.
고개 아래 마지막 수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장면이 되었다.
기록소의 닫히지 않은 문은, 무대 뒤편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출입구가 되었다.
푸리나는 군주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는 극장주였다.
죽은 자를 무대 위로 끌어내려는 극장주가 아니었다.
이미 퇴장한 배우들이 남긴 마지막 박자가, 산 자의 발밑에 닿을 수 있도록 조명을 맞추는 극장주였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대들의 막을 다시 열겠다고 말하지 않겠다.”
처음에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전장은 들었다.
“그대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거짓말하지 않겠다.”
푸리나는 그레이가 읽은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아람. 세루브. 바한. 마리암. 토로스.”
다섯 이름이 무대 위의 별처럼 떠올랐다.
“그대들은 퇴장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 사실을 지우지 않겠다.”
성벽 아래에서 적의 함성이 다시 가까워졌다.
죠니의 황금의 바람이 한 번 더 휘돌았다.
하융의 회색 창빛이 수레바퀴 옆에 비껴들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아직 적진의 승리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그레이의 장부 위에서 등불들이 흔들렸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다만, 그대들이 남긴 마지막 박자 하나를 빌리겠다.”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슬픔을 부정하는 밝음이 아니었다.
슬픔이 있기에 조명을 꺼서는 안 된다는 밝음이었다.
“아직 고개를 넘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마지막 수레에서 아이 하나가 울음을 멈췄다.
“아직 장부에 도착하지 못한 이름들이 있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아직 약속이 지나갈 자리가 남아 있다.”
레이튼은 별자리를 긋지 않은 하늘을 보았다.
“스러진 별들이여.”
푸리나는 무대 위에서, 죽은 이들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장면만.”
그녀가 손을 펼쳤다.
“산 자의 다음 막을 위해.”
《재연극: 스러져간 별을 위한 세레나데》.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방패를 들고 싸우는 광경은 없었다.
칼을 휘두르는 망자도 없었다.
전장의 빈자리를 채우는 병력도 없었다.
그들은 잔향이었다.
아람의 그림자는 방패선 앞에 섰다.
그는 적을 밀쳐내지 않았다.
다만 방패를 들어 올렸다.
더 높이도 아니고, 더 세게도 아니었다.
조금 왼쪽으로 낮게.
살아 있는 방패병들은 그제야 알았다. 방패는 용기만으로 드는 것이 아니었다. 방패에는 각도가 있었다. 뒤의 수레를 가리고, 옆의 병사를 살리고, 적의 창끝을 흘리는 작은 각도.
방패들이 움직였다.
세루브의 그림자는 골목 입구에 섰다.
그는 부상자를 업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었다.
이쪽은 후송.
저쪽은 증원.
살아 있는 의무병들이 그 손짓을 보았다.
후송 수레가 안쪽 회랑으로 빠졌다.
증원병들이 남쪽 골목으로 올라갔다.
길이 갈라졌다.
바한의 그림자는 방패를 들지 않았다.
그는 끈을 풀었다.
큰 보급 묶음 하나를 셋으로 나누었다.
방패.
화살.
끈과 못.
산 자들이 그 동작을 따라 하자, 보급은 더 이상 골목을 막지 않고 흐르기 시작했다.
마리암의 그림자는 마지막 수레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산 자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두 손으로 바퀴를 잡았다.
하나.
그 박자에 피난민 하나가 손을 얹었다.
둘.
노인이 어깨를 밀었다.
셋.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이 수레 뒤를 받쳤다.
수레바퀴가 진흙턱 위로 움직였다.
토로스의 그림자는 기록소 문 앞에 섰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불길 앞에서 검을 들지도 않았다.
그저 두 손으로 상자를 밀었다.
첫 번째 상자는 안쪽으로.
두 번째 장부는 젖은 천 아래로.
세 번째 문은, 안에서 닫는다.
살아 있는 서기들이 그 순서를 따라 했다.
시종들이 물을 부었다.
한 병사가 자기 망토를 찢어 문틈에 눌렀다.
기록소의 불길이 꺾였다.
이름들은 타지 않았다.
그 순간, 푸리나는 가신들을 보았다.
그레이가 이름을 세웠다.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했다.
레이튼이 패배와 승리의 이름을 질문으로 되돌렸다.
죠니가 한 찰나를 돌려냈다.
스러진 별들이 마지막 박자를 남겼다.
산 자들이, 그 박자를 이어받았다.
무대는 준비되었다.
배우들은 선택했다.
서사는 이미 충분히 쌓였다.
그러니 이제 막이 올라야 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등 뒤로 [여관:극장]의 조명이 올랐다.
황금의 바람은 무대 앞을 감쌌고, 회색 창빛은 무대 바닥에 비껴들었으며, 문답의 서재의 별들은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 떠 있었다.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은 하나씩 흔들리면서도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외쳤다.
“그레이가 이름을 세웠다!”
방패선이 다시 올라갔다.
“하융이 이 세계를 선택했다!”
회색 창빛 아래, 병사들이 죽을 위치에서 반 발 비껴섰다.
“레이튼이 패배라는 이름을 지웠다!”
성벽 위의 누구도 더 이상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죠니가 한 찰나를 돌려냈다!”
황금의 바람이 마지막으로 적의 공세를 감아 돌았다.
“스러진 별들이 마지막 박자를 남겼다!”
그림자들이 조용히 산 자들의 손끝에 박자를 건넸다.
“그리고 산 자들이, 그 박자를 이어받았다!”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렸다.
“그대여, 박수를!”
성벽이 떨렸다.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그대여, 박수를! 대단원의 막이 올랐으니!》
기적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룸 술탄국의 군대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적을 태운 것도 아니었다.
성벽이 갑자기 새로 솟아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번 장면의 소망이 현재에 닿았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었다.
서쪽 방패선은 한 장면 더 버텼다.
기록소의 이름들은 불타지 않았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그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이 지나갈 자리가 남았다.
룸 술탄국의 세 번째 파상공세는 완성되지 못했다.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그 차이가 전장을 갈랐다.
방패병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수레를 놓지 않았다.
의무병들은 부상자를 버리지 않았다.
서기들은 장부를 안쪽으로 옮겼다.
기병대의 말발굽은 황금의 바람이 잦아든 뒤에도 한 박자 더 돌았다.
그리고 세레나데는 끝났다.
그림자들이 멈췄다.
아람은 방패를 내렸다.
세루브는 손을 내렸다.
바한은 끈을 놓았다.
마리암은 바퀴에서 손을 뗐다.
토로스는 닫힌 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그들을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전장을 울리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였다.
“다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을게.”
그레이는 장부를 안고 눈을 내렸다.
“다시 싸우라고 부르지 않을게.”
하융은 창 하나가 조용히 닫히는 것을 보았다.
“이제 쉬어줘.”
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흔들림을 멈췄다.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등불은 더 이상 불안하게 떨지 않았다.
그것은 이름이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이었다.
레이튼은 하늘의 별들을 보았다.
그는 별자리를 긋지 않았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빛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죠니는 창을 내렸다.
황금의 바람은 말갈기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빛나고 사라졌다.
그는 성벽 너머, 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수레를 보았다.
“넘겼네.”
그 말뿐이었다.
하융은 조용히 답했다.
“그렇소.”
그리고 잠시 뒤 덧붙였다.
“저 창은 닫혔소.”
죠니는 하융을 보았다.
“나쁜 뜻이야?”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회색빛이 그의 눈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살아남은 길은 창밖에 있을 필요가 없소.”
그 길은 이제 현실에 있었다.
그날 밤, 성벽 위에는 박수가 없었다.
박수칠 손들은 방패를 들고 있었고, 살아남은 입술들은 아직 숨을 고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말을 잃었고, 누군가는 방금 넘긴 수레를 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록소 안에서는 젖은 장부가 하나씩 펼쳐졌다.
그레이는 이름을 다시 적었다.
아람.
세루브.
바한.
마리암.
토로스.
그리고 그 아래에 조용히 덧붙였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도록.
푸리나는 성벽 위에 서서 고개 아래를 보았다.
마지막 수레는 고개를 넘었다.
성문은 닫혀 있었다.
기록소의 이름들은 불타지 않았다.
아직 니케아의 깃발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먼 남쪽 길 끝에서, 석양과 먼지가 섞여 아주 희미한 빛이 일었다.
깃발인지, 바람인지,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인지, 아직 아무도 이름 붙이지 못했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좋군요.”
푸리나가 물었다.
“뭐가?”
레이튼은 지팡이를 짚었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박수는 없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알았다.
박수는 반드시 소리일 필요가 없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고,
장부의 이름이 불타지 않고,
성문이 한 번 더 닫혀 있는 것.
그것이 오늘 킬리키아가 올린 박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