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7여관◆zAR16hM8he(03de9ab0)2026-05-10 (일) 09:39:25
엽편 — 기록된 박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외교 회의장으로 쓰기에는 조금 이상한 방이 하나 있었다.
천장은 높았고, 벽에는 오래된 성화와 전쟁 지도가 함께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항구와 산길이 보였고, 안쪽에는 왕좌보다 낮은 단상이 놓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붉은 막이 있었다.
회의장이라기보다는 극장에 가까웠다.
아니.
푸리나 헤툼이 쓰는 방이었으니, 당연히 극장이었다.
“좋아!”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오늘의 무대는 외교 협정! 등장인물은 폴란드 대공국의 사절, 기록교단의 대리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와 가신들! 장르는—”
“군사·정보·피난민 보호 협정입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녀는 단상 아래쪽의 긴 탁자에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잉크병의 위치, 봉랍의 위치, 예비 양피지의 수, 사본을 보관할 상자의 잠금 상태까지 이미 세 번 확인한 뒤였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레이, 장르명에 낭만이 없어.”
“낭만은 협정문 제4항에 넣을 수 없습니다.”
“왜?!”
“해석 분쟁이 생깁니다.”
푸리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되게 비틀거렸다.
“아아, 내 재상이 나의 시를 죽였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보류했습니다.”
레이튼이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보류된 시라.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처럼 남겨두면 되겠군요.”
그레이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칭찬이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다시 서류를 정리했다. 조금 전보다 손끝이 아주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폴란드 대공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온 것은 무장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검을 든 병사도, 금박으로 치장한 귀족 행렬도 아니었다.
검은 가죽으로 묶은 두꺼운 서책을 든 기록사들.
봉인된 문서함을 운반하는 수도사들.
말없이 양피지를 안은 젊은 서기관들.
그리고 그 중앙에, 알토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화려하지 않았다.
의복은 정중했으나 과장되지 않았고, 표정은 담담했다. 눈빛은 차갑다기보다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그의 뒤편에는 빈 양피지 한 장이 떠 있었다.
아무 글도 적히지 않은 종이.
하지만 방 안의 누구도 그것을 단순한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단상 위에서 한 걸음 내려왔다.
“환영해, 폴란드의 기록자여.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여관이 그대들에게 문을 열었어.”
알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푸리나 헤툼 폐하.”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단상, 막, 조명, 객석처럼 놓인 의자, 탁자 위에 정렬된 협정문.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토가 말했다.
“외교 회의장이라기보다는 공연장에 가깝군요.”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정확해!”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막 뒤에 있던 시종들이 작은 등불 몇 개를 밝혔다. 벽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회의장 전체가 희미한 무대처럼 변했다.
“협정도 결국 한 편의 극이야. 서로 다른 배우들이 같은 장면에 올라와서, 다음 막을 어떻게 이어갈지 정하는 거니까.”
알토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대본이라면 수정될 수 있습니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대본이어야지.”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배우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서명하는 극은 최악이니까.”
그 말에 알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는 평가가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인정도 있었다.
“동의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하겠습니다.”
---
협정문 초안은 길었다.
몽골과 일칸국의 동향에 대한 정보 공유.
기록교단과 여관교의 통신망 일부 연계.
피난민 명부의 상호 확인.
사망자와 실종자의 기록 보존.
전령 보호.
산길과 항구의 피난로 확보.
상호 방위 조항.
그리고 마지막에, 아카식의 기록 계약을 통한 책임 조항.
문장이 읽힐 때마다 방 안의 공기는 조금씩 무거워졌다.
이것은 축제가 아니었다.
극장처럼 꾸며진 회의장이었지만,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잘못 쓰면 누군가 죽고, 늦게 보내면 누군가 버려지고, 숨기면 누군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질 문서였다.
그레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협정문 제3항을 가리켰다.
“피난민 명부 양식은 통일해야 합니다.”
알토가 고개를 돌렸다.
“현재 초안에는 이름, 출신지, 가족 관계, 이동 경로, 수용 여관, 보호 책임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방 안의 모두가 들었다.
“사망 원인. 마지막으로 확인된 장소. 유족에게 전달할 물품. 미전달 서신. 그리고 가능하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서류 끝을 살짝 눌렀다.
“좋아하던 음식도요.”
몇몇 폴란드 서기관이 고개를 들었다.
알토도 잠시 침묵했다.
“좋아하던 음식까지 필요한가요?”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필요합니다.”
“이유를 기록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야 그 사람이 숫자가 아니게 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아주 잠깐 멈췄다.
그레이는 말을 이어갔다.
“사망자 1명. 실종자 3명. 피난민 42명. 그런 식으로 적으면 빠릅니다. 편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적으면 책임도 빨리 사라집니다.”
그녀는 협정문을 내려다보았다.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가고 싶어 한 곳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무엇을 무서워했는지,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고 싶어 했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을 수 있는 만큼은 적어야 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다시 같은 이유로 죽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알토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서기관에게 말했다.
“제3항 수정. 사망자 및 실종자 기록에 개인 식별 기억 항목을 추가한다.”
서기관이 곧바로 적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작게 눈을 깜빡였다.
알토가 덧붙였다.
“기록 목적은 행정 편의가 아니라 망각 방지로 명시한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타당한 수정입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웃고 있었지만, 장난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좋아. 이 장면은 좋네.”
그레이가 살짝 당황했다.
“폐하, 장면이 아니라 조항입니다.”
“좋은 조항은 좋은 장면이야.”
“그건… 문학적 표현입니다.”
“외교에는 문학이 필요해!”
“과하면 위험합니다.”
“그럼 조금만 넣자!”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다음 조항으로 눈을 옮겼다.
---
죠니 죠스타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다.
회의 내내 그는 크게 말하지 않았다. 서류의 문장보다는 방 안의 호흡을 듣고 있었고, 조항보다 지도 위의 산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5항, 전령 보호와 피난로 확보 조항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한 번.
딱.
“좋은 말이야.”
죠니가 말했다.
“기록도, 명부도, 전령도, 피난로도. 다 좋아.”
알토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지도 위의 붉은 선 하나를 가리켰다.
킬리키아의 산길.
좁고, 구불구불하고, 비가 오면 진흙이 되는 길.
“그런데 그 종이가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나?”
서기관 하나가 펜을 멈췄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항구에서 왕궁까지는 쉽지. 왕궁에서 큰 여관까지도 괜찮아. 하지만 마지막 수레는 항상 산길에 남아. 다친 말, 부러진 바퀴, 울고 있는 아이, 자기 집 열쇠를 놓지 못하는 노인.”
그는 알토를 똑바로 보았다.
“협정문이 그 사람들까지 따라올 수 있나?”
알토는 바로 답했다.
“따라오게 만들기 위해 절차를 만듭니다.”
“절차가 늦으면?”
“전령망을 이중화합니다.”
“전령이 죽으면?”
“보조 기록자를 붙입니다.”
“둘 다 죽으면?”
알토가 잠시 침묵했다.
죠니는 웃지 않았다.
푸리나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 질문은 무례가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너무 늦은 완벽함보다, 조금 거칠어도 제때 도착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렸다.
알토가 답했다.
“그 경우, 지역 여관지기에게 임시 권한을 부여합니다. 현장 기록이 사후 본 기록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죠니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 산길을 다시 두드렸다.
“여관지기가 포위되면?”
그때 그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레 단위로 분산 기록을 맡기면 됩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조금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한 명이 전부 들고 있으면 잃어버립니다. 피난민 행렬의 각 수레마다 최소 기록 단위를 나누면, 일부가 사라져도 전체가 남습니다. 아이들이 외우는 노래에 이름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종이가 젖어도 노래는 남으니까요.”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
“네.”
“천재야?”
“아닙니다. 피난민 수용 방식입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네. 종이가 못 오면 노래가 온다.”
알토는 서기관에게 지시했다.
“제5항 수정. 분산 기록 체계와 구전 보조 기록을 추가한다.”
죠니는 만족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럼 됐어.”
그는 지도 위 산길을 바라보았다.
“문서가 산길까지 오지 못하면, 내가 데려가지.”
푸리나가 작게 박수를 쳤다.
“좋아! 기사단장의 장면도 통과!”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장면은 말발굽 소리가 있어야 더 좋은데.”
“다음 낭독식 때 넣어줄게.”
“진짜?”
“즉흥극!”
그레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말을 회의장 안에 들이는 건 반대입니다.”
푸리나가 즉시 말했다.
“작은 말은?”
“반대입니다.”
“목마는?”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안전성이 확인되면 검토하겠습니다.”
죠니가 웃었다.
레이튼도 웃었다.
알토는 웃지 않았다.
다만 서기관이 적은 문장 아래에, 아주 작게 눈길을 두었다.
구전 보조 기록.
노래.
그것은 기록이었다.
종이가 아닌 기록.
그는 그 가능성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
하융은 회의 내내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양피지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보고 있지 않았다.
창밖에는 킬리키아의 햇빛이 있었다. 항구 쪽에서 흰 돛들이 흔들렸고, 먼 산길에는 먼지가 얇게 떠 있었다.
그러나 하융의 눈에는 다른 창들이 겹쳐 있었다.
회색빛 창호.
그 너머의 방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이 비치는 수많은 창.
하나의 창에서는 폴란드의 전령이 사흘 늦게 도착했다.
그가 들고 온 정보는 정확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는 늦게 도착하면 조문이 된다. 킬리키아의 산길 아래에는 불탄 수레가 있었고, 기록함은 검게 그을려 열리지 않았다.
다른 창에서는 협정 조항이 지나치게 엄격했다.
지방 영주 하나가 책임을 두려워해 피난민을 성문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정식 명부가 없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성문 밖의 사람들은 이미 화살비 아래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기록이 군사 기밀로 묶였다.
사망자 명부는 정확했다. 그러나 유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장부는 살아남았지만, 이름은 돌아가지 못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 조약은 살릴 수 있소.”
회의장의 소리가 멈췄다.
알토가 하융을 보았다.
“그 말은,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다는 뜻입니까?”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다기보다는, 이미 죽은 가능성이 창가에 앉아 있었소.”
그는 천천히 협정문 쪽으로 걸어왔다.
“하나의 창에서는 약속이 너무 늦게 도착했소. 또 하나의 창에서는 약속이 너무 곧아서 부러졌소. 다른 창에서는 기록이 너무 단단히 잠겨, 살아 있는 이들에게 돌아가지 못했소.”
알토가 물었다.
“예언입니까?”
“아니오.”
하융은 짧게 답했다.
“죽은 가능성의 잔향이오. 확정된 앞날이 아니라, 잘못 걸으면 이미 죽어 있는 길.”
그는 손끝으로 협정문의 빈 여백을 가리켰다.
“그러니 여백이 필요하오.”
레이튼이 눈을 들었다.
“흥미롭군요.”
하융은 말을 이었다.
“불가항력 조항만으로는 부족하오. 현장 판단권이 있어야 하오. 단, 그 판단은 나중에 기록되어야 하오. 기록되지 않은 자비는 다음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소. 하지만 기록만 기다리는 자비는, 너무 늦게 도착하오.”
그 말은 이상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회의장 안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작게 적었다.
“현장 임시 보호권. 사후 기록 의무.”
알토가 말했다.
“제안으로 채택합니다.”
하융은 알토를 보았다.
“불쾌하지 않소?”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들의 계약이 사람을 죽이는 가능성을 말했다는 점 말이오.”
알토는 담담히 답했다.
“실패 가능성은 기록해야 합니다. 숨기면 반복됩니다.”
하융은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좋소.”
그는 다시 창가로 물러났다.
“이번 창에서는, 조금 덜 죽을 수 있겠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대사도, 과장된 몸짓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협정문 위의 빈 여백을 보았다.
여백.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장면.
아직 닫히지 않은 막.
그것이 이 조약에 필요했다.
---
레이튼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그는 알토와 그레이가 조항을 고치고, 죠니가 산길을 지적하고,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말하는 동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협정문 대부분이 정리된 뒤,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가 남았군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왔구나, 레이튼의 수수께끼!”
알토는 그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레이튼은 협정문을 손으로 짚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조약.
“이 문서는 무엇입니까?”
서기관 하나가 답하려 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와 폴란드 대공국 사이의—”
레이튼이 부드럽게 손을 들었다.
“아니요. 그것은 분류입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름입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 조약은 군주들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까?”
침묵.
“두 국가의 군사적 이익을 위한 것입니까?”
그는 미소 지었다.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여기에 좋아하던 음식과 노래와 현장 자비권이 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천장 위의 등불이 흔들렸다.
레이튼의 주위로, 아주 희미하게 서재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책장 냄새. 오래된 종이의 냄새. 아직 끝나지 않은 문답들이 떠다니는 고요한 방.
[여관:문답의 서재].
별들은 천장에 있었으나,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레이튼이 말했다.
“이 조약은 두 나라 사이의 약속입니까, 아니면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내일을 위한 약속입니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협정문 위에 붙어 있던 이름들이 잠시 흐려졌다.
군사 협정.
정보 공유 조약.
상호 방위 계약.
그런 이름들이 잠시 사라졌다.
그 아래에 더 오래된 질문이 남았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
누가 이 약속을 필요로 하는가.
누가 이 문서가 늦으면 죽는가.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역시 레이튼이야.”
알토는 협정문을 내려다보았다.
“질문은 이해했습니다.”
“답은 제가 드리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말했다.
“답은 서명하는 분들이 붙이셔야지요.”
알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칭을 수정하겠습니다.”
서기관들이 고개를 들었다.
알토가 말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와 폴란드 대공국 간 군사·정보 협정.”
그는 잠시 멈추었다.
“부제.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좋아!”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 제목, 아주 마음에 들어!”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수수께끼가 좋은 답을 얻었군요.”
그레이는 이미 새 제목을 적고 있었다.
죠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제목이 좀 길긴 한데.”
푸리나가 즉시 말했다.
“좋은 극은 제목이 길어도 돼!”
“관객이 외우기 힘들어.”
“그럼 줄임말을 만들자!”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약칭은 별도 합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레이는 오늘도 강해…”
그때였다.
탁자 위의 빈 양피지 구석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무도 펜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잉크는 스스로 번졌다.
가느다란 글씨가 생겨났다.
「이 장면, 꽤 괜찮네. 계속해.」
회의장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폴란드의 서기관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알토는 눈썹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아카식.”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장 웃었다.
“오! 관객 난입이야?”
양피지 위에 두 번째 문장이 적혔다.
「관객이라니. 나는 기록자야. 그리고 가끔은 편집자지.」
알토가 낮게 말했다.
“편집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알아. 그래서 낙서만 하는 중.」
죠니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는 당황해서 양피지와 알토를 번갈아 보았다.
“이 경우에도 공식 기록으로 편입해야 하나요?”
알토는 아주 짧게 침묵했다.
“부록 처리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나도 부록에 대사 넣을래!”
“폐하의 발언은 이미 본문 회의록에 포함됩니다.”
“불공평해!”
양피지 위의 글씨가 다시 움직였다.
「계약은 이야기를 가두려고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문장은 장난스럽게 시작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나중에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거지.」
잉크가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해피엔딩은 보장할 수 없어. 그런 건 인간이 직접 만드는 거니까.」
잠시 뒤, 마지막 문장이 적혔다.
「하지만 누가 그 엔딩을 위해 손을 뻗었는지는, 지우지 못하게 해줄 수 있어.」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알토도.
그레이도.
하융은 창밖의 가능성 하나가 조용히 닫히는 것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그리고 사람들은 증명하지 못했다.
그 창이 사라졌다.
아직 모든 비극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죽은 가능성은 닫혔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훌륭한 답입니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성좌께서 직접 쓰셨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건 신의 대사야?”
양피지 위에 작은 글씨가 생겼다.
「좋은 대사는 배우가 완성하는 법이야.」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마음에 들어.”
---
서명은 회의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푸리나의 결정이었다.
협정문이 완성되고, 봉랍이 준비되고, 양국의 문장과 기록교단의 인장이 놓였을 때 알토는 절차를 진행하려 했다.
그때 푸리나가 말했다.
“잠깐.”
알토가 고개를 들었다.
“추가 수정입니까?”
“아니.”
푸리나는 협정문을 두 손으로 들었다.
“낭독하자.”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외교문서 낭독은 절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말고.”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왕궁 아래의 광장.
거기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문은 빠르다.
폴란드의 기록자들이 왔다는 소식. 몽골에 맞설 새로운 약속이 맺어진다는 소식. 피난민 명부가 다시 정리된다는 소식.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는 소식.
사람들은 알고 싶어 했다.
왕과 사절들이 어떤 문장을 쓰는지보다, 그 문장이 자신들에게 도착하는지.
푸리나가 말했다.
“백성들 앞에서.”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공개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입니까?”
“응.”
“조항 중 일부는 군사 기밀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빼고.”
“공개본과 비공개본을 나누어야 합니다.”
“좋아.”
“공개본의 효력 범위를 명시해야 합니다.”
“그것도 좋아.”
“낭독 중 즉흥 발언은 조약 본문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
그레이가 먼저 말했다.
“제가 옆에서 제지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레이?!”
“필요합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너 지금 나를 제물로 협정을 통과시킨 거야?”
“아닙니다. 안전장치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죠니가 웃었다.
레이튼은 차분히 말했다.
“훌륭한 외교적 타협입니다.”
하융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창은 밝군.”
그렇게 협정은 왕궁 아래 광장에서 낭독되었다.
---
광장에는 무대가 세워졌다.
급히 만든 무대였다. 목재는 완벽하지 않았고, 천막은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그래도 푸리나는 만족했다.
“무대는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녀가 말했다.
“사람이 올라오면 무대가 되는 거니까.”
광장에는 킬리키아의 백성들이 모였다.
상인, 장인, 여관지기, 병사, 피난민, 사제, 아이들, 수레꾼, 항구 노동자, 슬럼가에서 올라온 사람들, 귀족의 수행원, 상처 입은 전령.
폴란드의 기록사들도 함께 섰다.
그들은 처음에는 낯설어 보였다. 하지만 곧 양피지를 펼치고, 광장의 소리와 사람들의 표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오늘 그녀는 평소처럼 과장되게 등장하지 않았다.
왕관은 쓰고 있었지만, 손에는 지휘봉 대신 협정문이 있었다.
알토는 그녀의 오른편에 섰다.
그레이는 왼편에서 공개본과 비공개본을 구분한 사본을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조금 뒤쪽에, 하융은 무대 가장자리 창문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에, 죠니는 계단 아래 기사단과 함께 서 있었다.
푸리나가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얼굴.
수많은 이야기.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백성들이여!”
목소리가 광장 위로 퍼졌다.
“오늘 우리는 폴란드 대공국과 하나의 약속을 맺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협정문을 들어 올렸다.
“이 약속은 왕궁 안에서만 숨 쉬는 문서가 아니다. 탁자 위에서만 빛나는 잉크도 아니다. 이 약속은 산길을 지나고, 여관을 지나고, 전령의 말발굽을 지나고, 피난민의 수레바퀴를 지나, 그대들의 이름에 닿아야 한다.”
그녀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멀리까지 닿았다.
“폴란드 대공국과 기록교단은 본 협정을 공개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협정문 첫 장을 읽었다.
“첫째. 양국은 몽골 및 일칸국 관련 군사·민간 피해 정보를 상호 공유한다. 정보는 승전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보존한다.”
폴란드 기록사들이 동시에 적었다.
그레이가 다음 장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광장을 보았다.
사람이 많았다.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그녀는 읽었다.
“둘째. 피난민, 사망자, 실종자의 명부는 숫자만으로 작성하지 않는다. 이름, 출신지, 가족, 마지막 확인 장소, 전달해야 할 말과 물품,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돌아가고 싶어 한 곳까지 기록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광장은 조용했다.
“죽은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지 않도록 한다.”
무대 아래의 한 여인이 입을 막았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 말은 협정문에 없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알토도 제지하지 않았다.
서기관은 그것을 부록 발언으로 기록했다.
죠니가 다음으로 올라왔다.
그는 협정문을 들고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이런 건 내 방식은 아닌데.”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배우는 무대에 오르면 해내는 거야.”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읽었다.
“셋째. 피난로와 산길, 항구, 여관 사이의 전령망을 보호한다. 문서가 닿지 않는 곳에는 사람이 가고,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는 노래와 표식을 남긴다.”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광장 아래 기사들을 보았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을 때까지, 호위는 끝나지 않는다.”
기사단의 말들이 낮게 울었다.
광장 어딘가에서 아이 하나가 그 말을 따라 했다.
“마지막 수레까지.”
그 말이 사람들 사이로 작게 번졌다.
하융이 다음 장을 받았다.
그는 협정문을 보지 않고, 잠시 하늘을 보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창이 없었다.
다만 킬리키아의 하늘이 있었다.
그는 읽었다.
“넷째. 현장의 여관지기와 지휘관은 급박한 상황에서 임시 보호권을 가진다. 기록을 기다리다 사람을 죽게 하지 않는다. 다만 그 판단은 사후에 기록하여,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 앞에서 헤매지 않도록 한다.”
그는 문장을 끝낸 뒤, 아주 작게 말했다.
“늦게 도착한 약속은 조문이 되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 더 일찍 가야 하오.”
광장에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가 알았다.
늦어서는 안 된다는 것.
레이튼이 마지막 장을 들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다섯째.”
그가 말했다.
“이 조약은 두 군주의 안전만을 위한 문서가 아니다. 두 국가의 이익만을 위한 계산서도 아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이 조약은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이다.”
광장의 사람들은 그 문장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이들은 조용히 울었다.
어떤 이들은 옆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
그 말은 이상했다.
그러나 따뜻했다.
마지막으로 푸리나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협정문을 닫았다.
그리고 알토를 보았다.
“이제?”
알토는 품에서 펜을 꺼냈다.
검은 잉크가 펜촉에 맺혔다.
푸리나도 펜을 들었다.
그 순간, 광장의 바람이 멈춘 듯했다.
두 사람은 협정문에 서명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 푸리나 헤툼.
폴란드 기록교단의 대리자, 알토.
그리고 그 아래, 빈 여백에 잉크가 스스로 번졌다.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기록할 가치가 있는 약속.」
알토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눈썹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협정문을 닫고, 광장을 향해 말했다.
“기록 개시.”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난 순간, 폴란드 기록사들의 펜이 일제히 움직였다.
여관지기들이 이름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사제들이 실종자 명단을 펼쳤다.
그레이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한 아이가 다가오자 멈췄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적을 수 있어요?”
그레이는 무릎을 굽혔다.
“이름을 알고 있나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럼 적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식도요?”
그레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네. 그것도요.”
죠니는 기사단에게 손짓했다.
“산길 순찰 늘린다. 마지막 수레까지 간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융은 광장 가장자리에서 닫히는 창 하나를 보았다.
그 창 안에서는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아이는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세계도 있었구나.”
그는 현재의 광장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자.”
레이튼은 무대 위에 남아 협정문 제목을 다시 읽었다.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답입니다.”
푸리나는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광장을 보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손들이 바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름을 적고 있었다.
누군가는 잃어버린 사람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수레의 바퀴를 고치러 달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령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박수칠 손들이, 각자의 다음 막을 붙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왕이 관객에게 인사하듯.
배우가 무대에 감사하듯.
극장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공연을 향해 예를 표하듯.
그녀는 말했다.
“조명 올려.”
그 목소리는 광장 전체에 들릴 만큼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알토는 들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으니까.”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답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광장에는 큰 환호가 없었다.
승리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말발굽은 여전히 먼 곳에서 세계를 흔들고 있었고, 일칸국의 그림자는 산맥 너머에서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하나의 약속이 기록되었다.
누군가가 나중에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의 이름이 숫자 아래 묻히지 않도록.
누군가의 마지막 수레가 산길에 남겨지지 않도록.
그리고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이, 너무 늦게 도착한 조문이 되지 않도록.
그것은 박수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되었다.
기록된 박수는, 오래 남았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외교 회의장으로 쓰기에는 조금 이상한 방이 하나 있었다.
천장은 높았고, 벽에는 오래된 성화와 전쟁 지도가 함께 걸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항구와 산길이 보였고, 안쪽에는 왕좌보다 낮은 단상이 놓여 있었다. 단상 위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몇 개, 그리고 붉은 막이 있었다.
회의장이라기보다는 극장에 가까웠다.
아니.
푸리나 헤툼이 쓰는 방이었으니, 당연히 극장이었다.
“좋아!”
푸리나는 양팔을 펼쳤다.
“오늘의 무대는 외교 협정! 등장인물은 폴란드 대공국의 사절, 기록교단의 대리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와 가신들! 장르는—”
“군사·정보·피난민 보호 협정입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녀는 단상 아래쪽의 긴 탁자에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잉크병의 위치, 봉랍의 위치, 예비 양피지의 수, 사본을 보관할 상자의 잠금 상태까지 이미 세 번 확인한 뒤였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레이, 장르명에 낭만이 없어.”
“낭만은 협정문 제4항에 넣을 수 없습니다.”
“왜?!”
“해석 분쟁이 생깁니다.”
푸리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되게 비틀거렸다.
“아아, 내 재상이 나의 시를 죽였어.”
“죽이지 않았습니다. 보류했습니다.”
레이튼이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보류된 시라. 훌륭한 표현입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처럼 남겨두면 되겠군요.”
그레이는 잠시 레이튼을 보았다.
“칭찬이신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그레이는 다시 서류를 정리했다. 조금 전보다 손끝이 아주 약간 느슨해져 있었다.
그때 문밖에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폴란드 대공국의 사절단이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먼저 들어온 것은 무장한 기사들이 아니었다. 검을 든 병사도, 금박으로 치장한 귀족 행렬도 아니었다.
검은 가죽으로 묶은 두꺼운 서책을 든 기록사들.
봉인된 문서함을 운반하는 수도사들.
말없이 양피지를 안은 젊은 서기관들.
그리고 그 중앙에, 알토가 걸어 들어왔다.
그는 화려하지 않았다.
의복은 정중했으나 과장되지 않았고, 표정은 담담했다. 눈빛은 차갑다기보다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읽은 사람처럼 고요했다.
그의 뒤편에는 빈 양피지 한 장이 떠 있었다.
아무 글도 적히지 않은 종이.
하지만 방 안의 누구도 그것을 단순한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단상 위에서 한 걸음 내려왔다.
“환영해, 폴란드의 기록자여.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여관이 그대들에게 문을 열었어.”
알토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푸리나 헤툼 폐하.”
그는 방을 둘러보았다.
단상, 막, 조명, 객석처럼 놓인 의자, 탁자 위에 정렬된 협정문.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토가 말했다.
“외교 회의장이라기보다는 공연장에 가깝군요.”
푸리나가 활짝 웃었다.
“정확해!”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막 뒤에 있던 시종들이 작은 등불 몇 개를 밝혔다. 벽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회의장 전체가 희미한 무대처럼 변했다.
“협정도 결국 한 편의 극이야. 서로 다른 배우들이 같은 장면에 올라와서, 다음 막을 어떻게 이어갈지 정하는 거니까.”
알토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대본이라면 수정될 수 있습니다. 계약은 이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대본이어야지.”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배우들이 죽는 줄도 모르고 서명하는 극은 최악이니까.”
그 말에 알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시선에는 평가가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인정도 있었다.
“동의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므로 기록하겠습니다.”
---
협정문 초안은 길었다.
몽골과 일칸국의 동향에 대한 정보 공유.
기록교단과 여관교의 통신망 일부 연계.
피난민 명부의 상호 확인.
사망자와 실종자의 기록 보존.
전령 보호.
산길과 항구의 피난로 확보.
상호 방위 조항.
그리고 마지막에, 아카식의 기록 계약을 통한 책임 조항.
문장이 읽힐 때마다 방 안의 공기는 조금씩 무거워졌다.
이것은 축제가 아니었다.
극장처럼 꾸며진 회의장이었지만, 탁자 위에 놓인 것은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잘못 쓰면 누군가 죽고, 늦게 보내면 누군가 버려지고, 숨기면 누군가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질 문서였다.
그레이가 먼저 손을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푸리나가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협정문 제3항을 가리켰다.
“피난민 명부 양식은 통일해야 합니다.”
알토가 고개를 돌렸다.
“현재 초안에는 이름, 출신지, 가족 관계, 이동 경로, 수용 여관, 보호 책임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방 안의 모두가 들었다.
“사망 원인. 마지막으로 확인된 장소. 유족에게 전달할 물품. 미전달 서신. 그리고 가능하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손가락이 서류 끝을 살짝 눌렀다.
“좋아하던 음식도요.”
몇몇 폴란드 서기관이 고개를 들었다.
알토도 잠시 침묵했다.
“좋아하던 음식까지 필요한가요?”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필요합니다.”
“이유를 기록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야 그 사람이 숫자가 아니게 됩니다.”
방 안의 공기가 아주 잠깐 멈췄다.
그레이는 말을 이어갔다.
“사망자 1명. 실종자 3명. 피난민 42명. 그런 식으로 적으면 빠릅니다. 편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적으면 책임도 빨리 사라집니다.”
그녀는 협정문을 내려다보았다.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돌아가고 싶어 한 곳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무엇을 무서워했는지,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고 싶어 했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을 수 있는 만큼은 적어야 합니다.”
그레이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다시 같은 이유로 죽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알토는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서기관에게 말했다.
“제3항 수정. 사망자 및 실종자 기록에 개인 식별 기억 항목을 추가한다.”
서기관이 곧바로 적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작게 눈을 깜빡였다.
알토가 덧붙였다.
“기록 목적은 행정 편의가 아니라 망각 방지로 명시한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알토는 담담하게 답했다.
“타당한 수정입니다.”
푸리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웃고 있었지만, 장난치는 얼굴은 아니었다.
“좋아. 이 장면은 좋네.”
그레이가 살짝 당황했다.
“폐하, 장면이 아니라 조항입니다.”
“좋은 조항은 좋은 장면이야.”
“그건… 문학적 표현입니다.”
“외교에는 문학이 필요해!”
“과하면 위험합니다.”
“그럼 조금만 넣자!”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다음 조항으로 눈을 옮겼다.
---
죠니 죠스타는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아 있었다.
회의 내내 그는 크게 말하지 않았다. 서류의 문장보다는 방 안의 호흡을 듣고 있었고, 조항보다 지도 위의 산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제5항, 전령 보호와 피난로 확보 조항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한 번.
딱.
“좋은 말이야.”
죠니가 말했다.
“기록도, 명부도, 전령도, 피난로도. 다 좋아.”
알토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지도 위의 붉은 선 하나를 가리켰다.
킬리키아의 산길.
좁고, 구불구불하고, 비가 오면 진흙이 되는 길.
“그런데 그 종이가 여기까지 따라올 수 있나?”
서기관 하나가 펜을 멈췄다.
죠니는 계속 말했다.
“항구에서 왕궁까지는 쉽지. 왕궁에서 큰 여관까지도 괜찮아. 하지만 마지막 수레는 항상 산길에 남아. 다친 말, 부러진 바퀴, 울고 있는 아이, 자기 집 열쇠를 놓지 못하는 노인.”
그는 알토를 똑바로 보았다.
“협정문이 그 사람들까지 따라올 수 있나?”
알토는 바로 답했다.
“따라오게 만들기 위해 절차를 만듭니다.”
“절차가 늦으면?”
“전령망을 이중화합니다.”
“전령이 죽으면?”
“보조 기록자를 붙입니다.”
“둘 다 죽으면?”
알토가 잠시 침묵했다.
죠니는 웃지 않았다.
푸리나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 질문은 무례가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너무 늦은 완벽함보다, 조금 거칠어도 제때 도착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렸다.
알토가 답했다.
“그 경우, 지역 여관지기에게 임시 권한을 부여합니다. 현장 기록이 사후 본 기록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죠니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 산길을 다시 두드렸다.
“여관지기가 포위되면?”
그때 그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레 단위로 분산 기록을 맡기면 됩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조금 움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한 명이 전부 들고 있으면 잃어버립니다. 피난민 행렬의 각 수레마다 최소 기록 단위를 나누면, 일부가 사라져도 전체가 남습니다. 아이들이 외우는 노래에 이름을 넣을 수도 있습니다. 종이가 젖어도 노래는 남으니까요.”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
“네.”
“천재야?”
“아닙니다. 피난민 수용 방식입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좋네. 종이가 못 오면 노래가 온다.”
알토는 서기관에게 지시했다.
“제5항 수정. 분산 기록 체계와 구전 보조 기록을 추가한다.”
죠니는 만족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그럼 됐어.”
그는 지도 위 산길을 바라보았다.
“문서가 산길까지 오지 못하면, 내가 데려가지.”
푸리나가 작게 박수를 쳤다.
“좋아! 기사단장의 장면도 통과!”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장면은 말발굽 소리가 있어야 더 좋은데.”
“다음 낭독식 때 넣어줄게.”
“진짜?”
“즉흥극!”
그레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말을 회의장 안에 들이는 건 반대입니다.”
푸리나가 즉시 말했다.
“작은 말은?”
“반대입니다.”
“목마는?”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안전성이 확인되면 검토하겠습니다.”
죠니가 웃었다.
레이튼도 웃었다.
알토는 웃지 않았다.
다만 서기관이 적은 문장 아래에, 아주 작게 눈길을 두었다.
구전 보조 기록.
노래.
그것은 기록이었다.
종이가 아닌 기록.
그는 그 가능성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
하융은 회의 내내 창가에 서 있었다.
그는 양피지를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보고 있지 않았다.
창밖에는 킬리키아의 햇빛이 있었다. 항구 쪽에서 흰 돛들이 흔들렸고, 먼 산길에는 먼지가 얇게 떠 있었다.
그러나 하융의 눈에는 다른 창들이 겹쳐 있었다.
회색빛 창호.
그 너머의 방들.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이 비치는 수많은 창.
하나의 창에서는 폴란드의 전령이 사흘 늦게 도착했다.
그가 들고 온 정보는 정확했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는 늦게 도착하면 조문이 된다. 킬리키아의 산길 아래에는 불탄 수레가 있었고, 기록함은 검게 그을려 열리지 않았다.
다른 창에서는 협정 조항이 지나치게 엄격했다.
지방 영주 하나가 책임을 두려워해 피난민을 성문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정식 명부가 없다.” 그 말이 끝났을 때, 성문 밖의 사람들은 이미 화살비 아래 있었다.
또 다른 창에서는 기록이 군사 기밀로 묶였다.
사망자 명부는 정확했다. 그러나 유족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장부는 살아남았지만, 이름은 돌아가지 못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 조약은 살릴 수 있소.”
회의장의 소리가 멈췄다.
알토가 하융을 보았다.
“그 말은, 살리지 못하는 경우도 보았다는 뜻입니까?”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았다기보다는, 이미 죽은 가능성이 창가에 앉아 있었소.”
그는 천천히 협정문 쪽으로 걸어왔다.
“하나의 창에서는 약속이 너무 늦게 도착했소. 또 하나의 창에서는 약속이 너무 곧아서 부러졌소. 다른 창에서는 기록이 너무 단단히 잠겨, 살아 있는 이들에게 돌아가지 못했소.”
알토가 물었다.
“예언입니까?”
“아니오.”
하융은 짧게 답했다.
“죽은 가능성의 잔향이오. 확정된 앞날이 아니라, 잘못 걸으면 이미 죽어 있는 길.”
그는 손끝으로 협정문의 빈 여백을 가리켰다.
“그러니 여백이 필요하오.”
레이튼이 눈을 들었다.
“흥미롭군요.”
하융은 말을 이었다.
“불가항력 조항만으로는 부족하오. 현장 판단권이 있어야 하오. 단, 그 판단은 나중에 기록되어야 하오. 기록되지 않은 자비는 다음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소. 하지만 기록만 기다리는 자비는, 너무 늦게 도착하오.”
그 말은 이상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회의장 안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작게 적었다.
“현장 임시 보호권. 사후 기록 의무.”
알토가 말했다.
“제안으로 채택합니다.”
하융은 알토를 보았다.
“불쾌하지 않소?”
“무엇이 말입니까?”
“그대들의 계약이 사람을 죽이는 가능성을 말했다는 점 말이오.”
알토는 담담히 답했다.
“실패 가능성은 기록해야 합니다. 숨기면 반복됩니다.”
하융은 잠시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좋소.”
그는 다시 창가로 물러났다.
“이번 창에서는, 조금 덜 죽을 수 있겠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대사도, 과장된 몸짓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협정문 위의 빈 여백을 보았다.
여백.
아직 정해지지 않은 장면.
아직 닫히지 않은 막.
그것이 이 조약에 필요했다.
---
레이튼은 마지막까지 기다렸다.
그는 알토와 그레이가 조항을 고치고, 죠니가 산길을 지적하고, 하융이 죽은 가능성을 말하는 동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협정문 대부분이 정리된 뒤,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렇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가 남았군요.”
푸리나가 눈을 반짝였다.
“왔구나, 레이튼의 수수께끼!”
알토는 그를 보았다.
“말씀하십시오.”
레이튼은 협정문을 손으로 짚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놓인 빈 양피지를 보았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조약.
“이 문서는 무엇입니까?”
서기관 하나가 답하려 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와 폴란드 대공국 사이의—”
레이튼이 부드럽게 손을 들었다.
“아니요. 그것은 분류입니다. 제가 묻는 것은 이름입니다.”
그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 조약은 군주들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까?”
침묵.
“두 국가의 군사적 이익을 위한 것입니까?”
그는 미소 지었다.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여기에 좋아하던 음식과 노래와 현장 자비권이 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천장 위의 등불이 흔들렸다.
레이튼의 주위로, 아주 희미하게 서재의 공기가 내려앉았다. 책장 냄새. 오래된 종이의 냄새. 아직 끝나지 않은 문답들이 떠다니는 고요한 방.
[여관:문답의 서재].
별들은 천장에 있었으나,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레이튼이 말했다.
“이 조약은 두 나라 사이의 약속입니까, 아니면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의 내일을 위한 약속입니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협정문 위에 붙어 있던 이름들이 잠시 흐려졌다.
군사 협정.
정보 공유 조약.
상호 방위 계약.
그런 이름들이 잠시 사라졌다.
그 아래에 더 오래된 질문이 남았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
누가 이 약속을 필요로 하는가.
누가 이 문서가 늦으면 죽는가.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역시 레이튼이야.”
알토는 협정문을 내려다보았다.
“질문은 이해했습니다.”
“답은 제가 드리지 않습니다.”
레이튼은 말했다.
“답은 서명하는 분들이 붙이셔야지요.”
알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렇다면 명칭을 수정하겠습니다.”
서기관들이 고개를 들었다.
알토가 말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와 폴란드 대공국 간 군사·정보 협정.”
그는 잠시 멈추었다.
“부제.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좋아!”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 제목, 아주 마음에 들어!”
레이튼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수수께끼가 좋은 답을 얻었군요.”
그레이는 이미 새 제목을 적고 있었다.
죠니는 작게 중얼거렸다.
“제목이 좀 길긴 한데.”
푸리나가 즉시 말했다.
“좋은 극은 제목이 길어도 돼!”
“관객이 외우기 힘들어.”
“그럼 줄임말을 만들자!”
그레이가 말했다.
“공식 약칭은 별도 합의가 필요합니다.”
푸리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레이는 오늘도 강해…”
그때였다.
탁자 위의 빈 양피지 구석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무도 펜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잉크는 스스로 번졌다.
가느다란 글씨가 생겨났다.
「이 장면, 꽤 괜찮네. 계속해.」
회의장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폴란드의 서기관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알토는 눈썹을 아주 조금 찌푸렸다.
“아카식.”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장 웃었다.
“오! 관객 난입이야?”
양피지 위에 두 번째 문장이 적혔다.
「관객이라니. 나는 기록자야. 그리고 가끔은 편집자지.」
알토가 낮게 말했다.
“편집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알아. 그래서 낙서만 하는 중.」
죠니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레이는 당황해서 양피지와 알토를 번갈아 보았다.
“이 경우에도 공식 기록으로 편입해야 하나요?”
알토는 아주 짧게 침묵했다.
“부록 처리합니다.”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나도 부록에 대사 넣을래!”
“폐하의 발언은 이미 본문 회의록에 포함됩니다.”
“불공평해!”
양피지 위의 글씨가 다시 움직였다.
「계약은 이야기를 가두려고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 문장은 장난스럽게 시작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나중에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있는 거지.」
잉크가 천천히 마르기 시작했다.
「해피엔딩은 보장할 수 없어. 그런 건 인간이 직접 만드는 거니까.」
잠시 뒤, 마지막 문장이 적혔다.
「하지만 누가 그 엔딩을 위해 손을 뻗었는지는, 지우지 못하게 해줄 수 있어.」
푸리나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알토도.
그레이도.
하융은 창밖의 가능성 하나가 조용히 닫히는 것을 보았다. 그 창에서는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그리고 사람들은 증명하지 못했다.
그 창이 사라졌다.
아직 모든 비극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의 죽은 가능성은 닫혔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훌륭한 답입니다.”
알토는 짧게 답했다.
“성좌께서 직접 쓰셨습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이건 신의 대사야?”
양피지 위에 작은 글씨가 생겼다.
「좋은 대사는 배우가 완성하는 법이야.」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마음에 들어.”
---
서명은 회의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푸리나의 결정이었다.
협정문이 완성되고, 봉랍이 준비되고, 양국의 문장과 기록교단의 인장이 놓였을 때 알토는 절차를 진행하려 했다.
그때 푸리나가 말했다.
“잠깐.”
알토가 고개를 들었다.
“추가 수정입니까?”
“아니.”
푸리나는 협정문을 두 손으로 들었다.
“낭독하자.”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외교문서 낭독은 절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말고.”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왕궁 아래의 광장.
거기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소문은 빠르다.
폴란드의 기록자들이 왔다는 소식. 몽골에 맞설 새로운 약속이 맺어진다는 소식. 피난민 명부가 다시 정리된다는 소식. 누군가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는 소식.
사람들은 알고 싶어 했다.
왕과 사절들이 어떤 문장을 쓰는지보다, 그 문장이 자신들에게 도착하는지.
푸리나가 말했다.
“백성들 앞에서.”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공개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입니까?”
“응.”
“조항 중 일부는 군사 기밀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은 빼고.”
“공개본과 비공개본을 나누어야 합니다.”
“좋아.”
“공개본의 효력 범위를 명시해야 합니다.”
“그것도 좋아.”
“낭독 중 즉흥 발언은 조약 본문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입을 열었다.
그레이가 먼저 말했다.
“제가 옆에서 제지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레이?!”
“필요합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가능합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너 지금 나를 제물로 협정을 통과시킨 거야?”
“아닙니다. 안전장치입니다.”
“그게 그거잖아!”
죠니가 웃었다.
레이튼은 차분히 말했다.
“훌륭한 외교적 타협입니다.”
하융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창은 밝군.”
그렇게 협정은 왕궁 아래 광장에서 낭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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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는 무대가 세워졌다.
급히 만든 무대였다. 목재는 완벽하지 않았고, 천막은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그래도 푸리나는 만족했다.
“무대는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녀가 말했다.
“사람이 올라오면 무대가 되는 거니까.”
광장에는 킬리키아의 백성들이 모였다.
상인, 장인, 여관지기, 병사, 피난민, 사제, 아이들, 수레꾼, 항구 노동자, 슬럼가에서 올라온 사람들, 귀족의 수행원, 상처 입은 전령.
폴란드의 기록사들도 함께 섰다.
그들은 처음에는 낯설어 보였다. 하지만 곧 양피지를 펼치고, 광장의 소리와 사람들의 표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오늘 그녀는 평소처럼 과장되게 등장하지 않았다.
왕관은 쓰고 있었지만, 손에는 지휘봉 대신 협정문이 있었다.
알토는 그녀의 오른편에 섰다.
그레이는 왼편에서 공개본과 비공개본을 구분한 사본을 들고 있었다.
레이튼은 조금 뒤쪽에, 하융은 무대 가장자리 창문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에, 죠니는 계단 아래 기사단과 함께 서 있었다.
푸리나가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얼굴.
수많은 이야기.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사람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백성들이여!”
목소리가 광장 위로 퍼졌다.
“오늘 우리는 폴란드 대공국과 하나의 약속을 맺는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협정문을 들어 올렸다.
“이 약속은 왕궁 안에서만 숨 쉬는 문서가 아니다. 탁자 위에서만 빛나는 잉크도 아니다. 이 약속은 산길을 지나고, 여관을 지나고, 전령의 말발굽을 지나고, 피난민의 수레바퀴를 지나, 그대들의 이름에 닿아야 한다.”
그녀는 알토를 보았다.
알토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멀리까지 닿았다.
“폴란드 대공국과 기록교단은 본 협정을 공개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협정문 첫 장을 읽었다.
“첫째. 양국은 몽골 및 일칸국 관련 군사·민간 피해 정보를 상호 공유한다. 정보는 승전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보존한다.”
폴란드 기록사들이 동시에 적었다.
그레이가 다음 장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광장을 보았다.
사람이 많았다.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그녀는 읽었다.
“둘째. 피난민, 사망자, 실종자의 명부는 숫자만으로 작성하지 않는다. 이름, 출신지, 가족, 마지막 확인 장소, 전달해야 할 말과 물품, 가능하다면 그 사람이 돌아가고 싶어 한 곳까지 기록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광장은 조용했다.
“죽은 사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지 않도록 한다.”
무대 아래의 한 여인이 입을 막았다.
그레이는 잠시 멈췄다가,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 말은 협정문에 없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알토도 제지하지 않았다.
서기관은 그것을 부록 발언으로 기록했다.
죠니가 다음으로 올라왔다.
그는 협정문을 들고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이런 건 내 방식은 아닌데.”
푸리나가 작게 속삭였다.
“배우는 무대에 오르면 해내는 거야.”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읽었다.
“셋째. 피난로와 산길, 항구, 여관 사이의 전령망을 보호한다. 문서가 닿지 않는 곳에는 사람이 가고, 사람이 닿지 않는 곳에는 노래와 표식을 남긴다.”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광장 아래 기사들을 보았다.
“마지막 수레가 고개를 넘을 때까지, 호위는 끝나지 않는다.”
기사단의 말들이 낮게 울었다.
광장 어딘가에서 아이 하나가 그 말을 따라 했다.
“마지막 수레까지.”
그 말이 사람들 사이로 작게 번졌다.
하융이 다음 장을 받았다.
그는 협정문을 보지 않고, 잠시 하늘을 보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창이 없었다.
다만 킬리키아의 하늘이 있었다.
그는 읽었다.
“넷째. 현장의 여관지기와 지휘관은 급박한 상황에서 임시 보호권을 가진다. 기록을 기다리다 사람을 죽게 하지 않는다. 다만 그 판단은 사후에 기록하여, 다음 사람이 같은 어둠 앞에서 헤매지 않도록 한다.”
그는 문장을 끝낸 뒤, 아주 작게 말했다.
“늦게 도착한 약속은 조문이 되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 더 일찍 가야 하오.”
광장에는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가 알았다.
늦어서는 안 된다는 것.
레이튼이 마지막 장을 들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다섯째.”
그가 말했다.
“이 조약은 두 군주의 안전만을 위한 문서가 아니다. 두 국가의 이익만을 위한 계산서도 아니다.”
그는 미소 지었다.
“이 조약은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이다.”
광장의 사람들은 그 문장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이들은 조용히 울었다.
어떤 이들은 옆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
그 말은 이상했다.
그러나 따뜻했다.
마지막으로 푸리나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협정문을 닫았다.
그리고 알토를 보았다.
“이제?”
알토는 품에서 펜을 꺼냈다.
검은 잉크가 펜촉에 맺혔다.
푸리나도 펜을 들었다.
그 순간, 광장의 바람이 멈춘 듯했다.
두 사람은 협정문에 서명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 푸리나 헤툼.
폴란드 기록교단의 대리자, 알토.
그리고 그 아래, 빈 여백에 잉크가 스스로 번졌다.
아주 작은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기록할 가치가 있는 약속.」
알토는 그것을 보았다.
이번에는 눈썹을 찌푸리지 않았다.
그는 협정문을 닫고, 광장을 향해 말했다.
“기록 개시.”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난 순간, 폴란드 기록사들의 펜이 일제히 움직였다.
여관지기들이 이름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사제들이 실종자 명단을 펼쳤다.
그레이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다가, 한 아이가 다가오자 멈췄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버지도 적을 수 있어요?”
그레이는 무릎을 굽혔다.
“이름을 알고 있나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럼 적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음식도요?”
그레이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웃었다.
“네. 그것도요.”
죠니는 기사단에게 손짓했다.
“산길 순찰 늘린다. 마지막 수레까지 간다.”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하융은 광장 가장자리에서 닫히는 창 하나를 보았다.
그 창 안에서는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아이는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세계도 있었구나.”
그는 현재의 광장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자.”
레이튼은 무대 위에 남아 협정문 제목을 다시 읽었다.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을 위한 공개 기록 계약.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답입니다.”
푸리나는 마지막까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광장을 보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손들이 바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름을 적고 있었다.
누군가는 잃어버린 사람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수레의 바퀴를 고치러 달려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령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박수칠 손들이, 각자의 다음 막을 붙들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왕이 관객에게 인사하듯.
배우가 무대에 감사하듯.
극장주가 아직 끝나지 않은 공연을 향해 예를 표하듯.
그녀는 말했다.
“조명 올려.”
그 목소리는 광장 전체에 들릴 만큼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알토는 들었다.
푸리나는 웃었다.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으니까.”
알토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짧게 답했다.
“기록하겠습니다.”
그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광장에는 큰 환호가 없었다.
승리도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몽골의 말발굽은 여전히 먼 곳에서 세계를 흔들고 있었고, 일칸국의 그림자는 산맥 너머에서 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하나의 약속이 기록되었다.
누군가가 나중에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누군가의 이름이 숫자 아래 묻히지 않도록.
누군가의 마지막 수레가 산길에 남겨지지 않도록.
그리고 아직 이름이 적히지 않은 이들의 내일이, 너무 늦게 도착한 조문이 되지 않도록.
그것은 박수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되었다.
기록된 박수는,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