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28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0 (일) 19:01:20
엽편 — 만인극: 마지막 여관으로 가는 길
그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에는 웃음이 없었다.
평소라면 객석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푸리나 헤툼이 직접 올리는 극이라면, 사람들은 으레 밝은 음악과 과장된 몸짓, 기상천외한 즉흥극과 마지막의 박수를 기대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극장 입구에는 꽃도, 리본도, 축제 깃발도 없었다.
대신 검은 천과 흰 등불이 걸려 있었다.
등불에는 이름이 없었다.
누구의 장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구의 장례이기도 했다.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성벽도, 왕좌도, 여관도, 전장도 없었다.
그저 검은 바닥 위로 길 하나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 끝에는 아주 작은 등불 하나가 걸려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낡은 간판이 있었다.
마지막 여관
관객들은 조용해졌다.
그레이는 객석 앞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평소처럼 장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장부는 펼쳐져 있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그는 빈손으로 앉아 있었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길의 시작이 아니라, 길의 끝에 닿아 있었다.
하융은 객석 뒤편, 그림자가 깊은 곳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무대 위에 없는 창문들이 비치고 있었다.
타마르 여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 길 끝의 등불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카식과 알토도 있었다.
라이자도, 아레도, 니케아의 사절들도 있었다.
그날 극장에는 왕과 가신, 사절과 성직자, 병사와 피난민이 함께 앉았다.
그리고 막이 올랐다.
아니.
막은 원래부터 없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깨달은 순간, 무대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극 중에서 그는 그저 만인이라 불렸다.
만인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왕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며, 성직자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어떤 이는 늙은 아버지를 보았고,
어떤 이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형제를 보았으며,
어떤 이는 어제까지 울던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만인은 길 위에서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극장 전체에 닿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밝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았다.
왕의 선언처럼 크지도 않았다.
그것은 연출가의 목소리였다.
“이곳은 길이다.”
만인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푸리나가 답했다.
“그대가 평생 걸어온 길이다.”
그 순간 무대 바닥에 작은 빛들이 켜졌다.
발자국이었다.
작은 발자국.
흙 묻은 발자국.
피 묻은 발자국.
물에 젖은 발자국.
춤추듯 흐트러진 발자국.
도망치듯 급한 발자국.
만인은 그 발자국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전부 나의 것인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길 끝의 등불이 조금 밝아졌다.
그때, 첫 번째 배우가 나타났다.
화려한 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그는 웃으며 만인에게 다가왔다.
“친구여!”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친구여! 잘 왔네. 나는 길을 가야 한다네. 나와 함께 가주겠는가?”
친구는 크게 웃었다.
“물론이지! 술잔이 있는 곳이라면, 노래가 있는 곳이라면, 축제가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였네!”
만인은 안도했다.
“그렇다면 같이 가세. 저 끝의 여관까지.”
친구의 웃음이 멈췄다.
“저 끝?”
그는 길 끝의 등불을 보았다.
작은 간판.
마지막 여관.
친구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곳까지는…… 어렵겠네.”
만인이 물었다.
“왜?”
친구는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그대의 웃음과 함께했네. 술과 노래, 축제와 봄날, 젊은 밤과 가벼운 약속에는 함께했지. 하지만 저 길은 너무 조용하네.”
만인이 손을 뻗었다.
“친구여.”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는 여기까지일세.”
친구는 사라졌다.
무대 위에는 만인만 남았다.
객석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웃음이 마지막 문턱까지 함께 가지는 못한다.”
죠니는 그 문장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웃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다.
지금 웃는 것이 진짜라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다음 나타난 것은 친족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 않았는가!”
만인은 그에게 매달렸다.
“나와 함께 가주시오. 나는 혼자 가기 두렵소.”
친족은 그의 손을 잡았다.
잠시.
정말 잠시였다.
그러나 길 끝의 등불을 본 순간, 그 손은 느슨해졌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그 길은 각자의 것.”
친족은 울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관 앞에서 울 수 있다.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대가 남긴 집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대 대신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수는 없다.”
만인은 손을 놓쳤다.
친족은 무대 뒤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장부를 쥐었다.
그녀는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유족은 남는다.
이름을 부른다.
편지를 받는다.
보상을 신청한다.
무덤 앞에서 운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은 결국 한 사람의 것이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장부 표지를 아주 조금 세게 눌렀다.
세 번째로 재물이 나타났다.
그는 금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마다 동전 소리가 울렸다.
만인은 그를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내가 너를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알지 않는가. 너는 내 수고의 증거다. 나와 함께 가자.”
재물은 웃었다.
“나는 그대와 오래 함께했지.”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그대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뒤에 남는 것일세.”
재물은 손바닥 위에 동전 하나를 올렸다.
“나는 다음 손으로 옮겨간다. 때로는 자식에게, 때로는 도둑에게, 때로는 왕에게, 때로는 세금으로, 때로는 장례 비용으로.”
그는 만인을 보았다.
“그대가 나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나?”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챙.
그 소리가 극장 전체에 울렸다.
재물은 사라졌다.
슈샤니크는 그 장면을 무표정하게 보았다.
장부와 세금, 토지와 병량, 국고와 부역.
사람은 그것들을 붙들고 살아간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남는다.
사람만 간다.
그 사실은 너무 행정적이어서 잔혹했다.
네 번째로 지식이 나타났다.
레이튼이 그 순간 고개를 들었다.
지식은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온화했고, 침착했다.
만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너라면 알겠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가주게.”
“길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 여관의 문턱에 이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그대가 왜 두려워하는지도 말할 수 있다.”
“그럼 같이—”
“하지만 나는 문 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한다.”
만인은 얼어붙었다.
지식은 조용히 말했다.
“앎은 문 앞까지 데려다준다.
그러나 문을 넘는 것은 앎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다.”
레이튼은 눈을 감았다.
그는 그 말을 사랑했다.
동시에 두려워했다.
질문은 사람을 문 앞까지 데려간다.
하지만 모든 질문의 마지막에는, 답을 대신해줄 수 없는 침묵이 있다.
그 침묵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걸어온 삶을 들고 서야 한다.
다섯 번째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그는 찬란했다.
만인은 그를 보며 웃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지. 젊은 날의 얼굴, 찬사를 받던 순간, 거울 앞의 나, 사람들이 돌아보던 나.”
아름다움은 슬프게 미소 지었다.
“그랬지.”
“그럼 같이 가자.”
아름다움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빛이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길 중간에서 먼저 떠난다. 그대가 나를 붙잡고 싶어 할수록, 나는 더 빠르게 멀어진다.”
만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아름다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사라졌다.
여섯 번째로 힘이 나타났다.
그는 강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들고, 걸음만으로도 바닥을 울렸다.
죠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미하일라도 조용히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팔짱을 풀었다.
만인은 힘을 보고 거의 매달렸다.
“너라면 가능하다. 나를 지켜다오. 나는 너와 함께 많은 것을 버텼다. 병을 이겨냈고, 적을 물리쳤고, 무거운 것을 들었고, 먼 길을 걸었다.”
힘은 만인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오래 버틸 수 있다.”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하지만 끝까지는 아니다.”
힘의 손이 떨렸다.
그는 검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손은 떨리고, 무릎은 꺾이며, 숨은 짧아진다. 내가 그대를 지탱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
힘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나는 강했으나, 영원하지 않았다.”
힘은 사라졌다.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과 사 사이의 찰나를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은 진짜다.
그러나 모든 움직임은 언젠가 멈춘다.
그래서 지금 달리는 것이 더 빛난다.
일곱 번째로 가능성이 나타났다.
그 순간 하융은 숨을 멈췄다.
무대 위에 수많은 창문이 떠올랐다.
창마다 다른 만인이 있었다.
어떤 만인은 부자가 되었다.
어떤 만인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어떤 만인은 전쟁에 나갔다.
어떤 만인은 사랑을 놓쳤다.
어떤 만인은 용서했다.
어떤 만인은 끝내 사과하지 못했다.
어떤 만인은 아이를 살렸다.
어떤 만인은 도망쳤다.
어떤 만인은 왕이 되었다.
어떤 만인은 이름 없이 묻혔다.
만인은 그 창들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나였을 수 있는가?”
가능성은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잘못 살아온 것인가?”
가능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은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선택하지 못한 길을 보는 것은, 선택한 길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능성은 만인에게 다가가 창 하나를 닫았다.
“그런 삶도 있었다.”
또 하나를 닫았다.
“그런 결말도 있었다.”
또 하나.
“그런 구원도, 그런 실패도, 그런 웃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창이 닫혔다.
가능성은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여관에 도착하는 것은, 지금 이 길을 걸어온 그대다.”
하융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세계도 있었구나.”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자.”
무대 위의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그 질문이 극장에 내려앉았다.
친구도 떠났다.
친족도 떠났다.
재물도 남았다.
지식도 문 앞에 머물렀다.
아름다움도 사라졌다.
힘도 꺾였다.
가능성도 닫혔다.
만인은 떨며 물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때 무대 위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졌다.
아주 작았다.
처음에는 관객 대부분이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등불을 들고 나타난 것은 한 어린 배우였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만인은 그를 보았다.
“너는 누구인가?”
어린 배우는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한 일이다.”
만인이 눈을 찡그렸다.
“내가 한 일?”
“그대가 건넨 빵.
그대가 외면한 손.
그대가 지킨 약속.
그대가 어긴 약속.
그대가 쓴 편지.
그대가 찢은 편지.
그대가 살린 사람.
그대가 죽게 둔 사람.
그대가 용서한 이름.
그대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어린 배우는 등불을 들었다.
“나는 선행만이 아니다.
나는 죄만도 아니다.
나는 그대가 살아오며 남긴 흔적이다.”
객석의 아카식이 처음으로 장난기 없는 얼굴이 되었다.
기록.
삶이 남긴 모든 흔적.
그것이 무대 위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있었다.
알토는 조용히 그 장면을 보았다.
책임은 남는다.
선택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인은 떨며 물었다.
“너는 나와 함께 가겠는가?”
작은 등불은 흔들렸다.
“나는 이미 함께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무대 바닥의 발자국들이 하나씩 빛났다.
웃음의 발자국.
도망의 발자국.
배신의 발자국.
헌신의 발자국.
후회의 발자국.
사랑의 발자국.
비겁함의 발자국.
다시 일어난 발자국.
만인은 그것들을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너무 많이 잘못했다.”
작은 등불은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너무 적게 사랑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가?”
작은 등불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길 끝의 마지막 여관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푸리나가 나타났다.
관객들이 숨을 멈췄다.
그녀는 화려한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무대 의상도 아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배우처럼 보이지도, 군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관지기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만인을 바라보았다.
“자격을 묻는가.”
만인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모든 여행자는 길 위에서 무언가를 잃는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습니다.”
“모든 배우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놓친다.”
“나는 내 삶을 아름답게 끝내지 못했습니다.”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왔다.
“누가 그대에게 삶이 반드시 아름답게 끝나야 한다고 말했는가?”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그의 앞에 섰다.
“그대의 극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대는 비겁했고, 때로는 잔인했으며, 때로는 다정했고, 때로는 용감했다.
그대는 사랑했고, 외면했고, 후회했고, 다시 걸었다.
그대는 주인공이었으나, 항상 훌륭한 주인공은 아니었다.”
만인은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대는 걸었다.”
무대 뒤편의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친구가 떠난 뒤에도.
친족이 문턱에서 멈춘 뒤에도.
재물이 남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힘이 꺾인 뒤에도.
모든 가능성이 닫힌 뒤에도.”
푸리나는 말했다.
“그대는 그대가 남긴 흔적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만인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등불을 받았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만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삶을 쉽게 용서하는 극은 거짓이다.
모든 후회를 아름답다고 부르는 극도 거짓이다.
상처 입힌 사람에게 그대의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극은, 가장 잔인한 거짓이다.”
그레이는 숨을 멈췄다.
타마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모든 후회 때문에 마지막 여관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리는 것도, 여관의 방식은 아니다.”
그녀는 만인의 등불을 가리켰다.
“그대가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보아라.”
만인은 등불을 보았다.
그 안에는 선행만 있지 않았다.
죄도 있었다.
후회도 있었다.
망설임도 있었다.
그러나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마지막 여관은 승자만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완벽한 배우만 쉬는 곳도 아니다.
그곳은 길을 끝까지 걸어온 자가, 자신이 남긴 것을 마주하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만인은 울었다.
“나는 들어가도 됩니까?”
푸리나는 길 끝의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
“다만 그 등불은 두고 오지 마라.
그것이 그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니.”
만인은 일어섰다.
그는 마지막 여관을 향해 걸었다.
걸음은 느렸다.
화려하지 않았다.
승리자의 행진도, 성자의 승천도 아니었다.
그저 지친 사람이 긴 길 끝에서 문을 향해 걷는 것 같았다.
그가 문 앞에 섰을 때, 푸리나는 관객석을 보았다.
처음으로.
극 중 여관지기가 아니라, 연출가 푸리나 헤툼으로.
그녀는 관객 모두를 바라보았다.
왕도.
가신도.
성좌도.
병사도.
피난민도.
아이도.
망자도.
모두를.
그리고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마지막 막에 설 것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아직 그대의 막은 닫히지 않았으므로.”
그 순간 만인이 마지막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길 끝의 등불만 남았다.
극은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손을 들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박수가 금지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누구도 그 침묵을 먼저 깨고 싶지 않았다.
푸리나는 무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박수!”라고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게.
관객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방금 무대를 지나간 이름 없는 만인을 향해서.
그때 타마르 여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들 듯 빈손을 들어, 길 끝의 등불을 향해 아주 조용히 예를 표했다.
“쉬어도 좋겠지요.”
그 말이 첫 번째 박수보다 깊게 극장에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장부를 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빈 페이지 맨 위에 한 줄만 썼다.
만인. 이름 있음.
그리고 펜을 멈췄다.
레이튼은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죠니는 객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가는 건 어렵네.”
하융은 닫힌 무대를 보며 말했다.
“다른 가능성의 그들도, 언젠가 저 문 앞에 섰겠지.”
아카식은 기록하지 않았다.
알토가 옆에서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가끔은, 바로 적지 않아도 되는 기록이 있어.”
알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좋은 판단입니다.”
무대 위의 푸리나는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올린 극은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
죽음을 없애지도 않는다.
후회를 씻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극을 올렸다.
사람들이 자기 삶을 너무 늦게, 마지막 여관 앞에서야 처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직 막이 닫히지 않았을 때.
아직 누군가에게 사과할 수 있을 때.
아직 빵을 나눌 수 있을 때.
아직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때.
아직 손을 잡을 수 있을 때.
아직 자기 등불에 무엇을 담을지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때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객석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한 아이가 아주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어른들이 그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두 번째 박수가 이어졌다.
짝.
세 번째.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수가 극장을 채웠다.
그 박수는 축제의 박수가 아니었다.
승리의 박수도 아니었다.
무대 위의 배우를 칭송하는 박수라기보다, 각자가 자기 삶의 길 위에 아직 서 있음을 확인하는 박수였다.
푸리나는 그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웃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의 극은 여기서 끝.”
그녀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그대들의 극은, 아직 계속된다.”
그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극장에는 웃음이 없었다.
평소라면 객석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푸리나 헤툼이 직접 올리는 극이라면, 사람들은 으레 밝은 음악과 과장된 몸짓, 기상천외한 즉흥극과 마지막의 박수를 기대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극장 입구에는 꽃도, 리본도, 축제 깃발도 없었다.
대신 검은 천과 흰 등불이 걸려 있었다.
등불에는 이름이 없었다.
누구의 장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누구의 장례이기도 했다.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성벽도, 왕좌도, 여관도, 전장도 없었다.
그저 검은 바닥 위로 길 하나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길 끝에는 아주 작은 등불 하나가 걸려 있었다.
등불 아래에는 낡은 간판이 있었다.
마지막 여관
관객들은 조용해졌다.
그레이는 객석 앞쪽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평소처럼 장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 장부는 펼쳐져 있지 않았다.
레이튼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그는 빈손으로 앉아 있었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무대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길의 시작이 아니라, 길의 끝에 닿아 있었다.
하융은 객석 뒤편, 그림자가 깊은 곳에 앉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무대 위에 없는 창문들이 비치고 있었다.
타마르 여왕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그 길 끝의 등불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느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카식과 알토도 있었다.
라이자도, 아레도, 니케아의 사절들도 있었다.
그날 극장에는 왕과 가신, 사절과 성직자, 병사와 피난민이 함께 앉았다.
그리고 막이 올랐다.
아니.
막은 원래부터 없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깨달은 순간, 무대 한가운데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극 중에서 그는 그저 만인이라 불렸다.
만인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왕도 아니고 기사도 아니며, 성직자도 아니고 거지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그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어떤 이는 늙은 아버지를 보았고,
어떤 이는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형제를 보았으며,
어떤 이는 어제까지 울던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보았다.
만인은 길 위에서 두리번거렸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극장 전체에 닿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처럼 밝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았다.
왕의 선언처럼 크지도 않았다.
그것은 연출가의 목소리였다.
“이곳은 길이다.”
만인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인가?”
푸리나가 답했다.
“그대가 평생 걸어온 길이다.”
그 순간 무대 바닥에 작은 빛들이 켜졌다.
발자국이었다.
작은 발자국.
흙 묻은 발자국.
피 묻은 발자국.
물에 젖은 발자국.
춤추듯 흐트러진 발자국.
도망치듯 급한 발자국.
만인은 그 발자국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전부 나의 것인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길 끝의 등불이 조금 밝아졌다.
그때, 첫 번째 배우가 나타났다.
화려한 옷을 입은 인물이었다.
그는 웃으며 만인에게 다가왔다.
“친구여!”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친구여! 잘 왔네. 나는 길을 가야 한다네. 나와 함께 가주겠는가?”
친구는 크게 웃었다.
“물론이지! 술잔이 있는 곳이라면, 노래가 있는 곳이라면, 축제가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언제나 그대와 함께였네!”
만인은 안도했다.
“그렇다면 같이 가세. 저 끝의 여관까지.”
친구의 웃음이 멈췄다.
“저 끝?”
그는 길 끝의 등불을 보았다.
작은 간판.
마지막 여관.
친구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곳까지는…… 어렵겠네.”
만인이 물었다.
“왜?”
친구는 난처하게 웃었다.
“나는 그대의 웃음과 함께했네. 술과 노래, 축제와 봄날, 젊은 밤과 가벼운 약속에는 함께했지. 하지만 저 길은 너무 조용하네.”
만인이 손을 뻗었다.
“친구여.”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나는 여기까지일세.”
친구는 사라졌다.
무대 위에는 만인만 남았다.
객석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모든 웃음이 마지막 문턱까지 함께 가지는 못한다.”
죠니는 그 문장을 듣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웃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았다.
지금 웃는 것이 진짜라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다음 나타난 것은 친족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하지 않았는가!”
만인은 그에게 매달렸다.
“나와 함께 가주시오. 나는 혼자 가기 두렵소.”
친족은 그의 손을 잡았다.
잠시.
정말 잠시였다.
그러나 길 끝의 등불을 본 순간, 그 손은 느슨해졌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그러나 그 길은 각자의 것.”
친족은 울고 있었다.
“나는 그대의 관 앞에서 울 수 있다. 그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그대가 남긴 집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그대 대신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수는 없다.”
만인은 손을 놓쳤다.
친족은 무대 뒤 어둠으로 사라졌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장부를 쥐었다.
그녀는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유족은 남는다.
이름을 부른다.
편지를 받는다.
보상을 신청한다.
무덤 앞에서 운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은 결국 한 사람의 것이다.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이 장부 표지를 아주 조금 세게 눌렀다.
세 번째로 재물이 나타났다.
그는 금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마다 동전 소리가 울렸다.
만인은 그를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내가 너를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썼는지 알지 않는가. 너는 내 수고의 증거다. 나와 함께 가자.”
재물은 웃었다.
“나는 그대와 오래 함께했지.”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그대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대 뒤에 남는 것일세.”
재물은 손바닥 위에 동전 하나를 올렸다.
“나는 다음 손으로 옮겨간다. 때로는 자식에게, 때로는 도둑에게, 때로는 왕에게, 때로는 세금으로, 때로는 장례 비용으로.”
그는 만인을 보았다.
“그대가 나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나?”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챙.
그 소리가 극장 전체에 울렸다.
재물은 사라졌다.
슈샤니크는 그 장면을 무표정하게 보았다.
장부와 세금, 토지와 병량, 국고와 부역.
사람은 그것들을 붙들고 살아간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것이 남는다.
사람만 간다.
그 사실은 너무 행정적이어서 잔혹했다.
네 번째로 지식이 나타났다.
레이튼이 그 순간 고개를 들었다.
지식은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온화했고, 침착했다.
만인은 그에게 다가갔다.
“너라면 알겠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지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가주게.”
“길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 여관의 문턱에 이르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그대가 왜 두려워하는지도 말할 수 있다.”
“그럼 같이—”
“하지만 나는 문 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한다.”
만인은 얼어붙었다.
지식은 조용히 말했다.
“앎은 문 앞까지 데려다준다.
그러나 문을 넘는 것은 앎이 아니라, 그대 자신이다.”
레이튼은 눈을 감았다.
그는 그 말을 사랑했다.
동시에 두려워했다.
질문은 사람을 문 앞까지 데려간다.
하지만 모든 질문의 마지막에는, 답을 대신해줄 수 없는 침묵이 있다.
그 침묵 앞에서 사람은 자신이 걸어온 삶을 들고 서야 한다.
다섯 번째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그는 찬란했다.
만인은 그를 보며 웃었다.
“너는 나와 함께 있었지. 젊은 날의 얼굴, 찬사를 받던 순간, 거울 앞의 나, 사람들이 돌아보던 나.”
아름다움은 슬프게 미소 지었다.
“그랬지.”
“그럼 같이 가자.”
아름다움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빛이 조금씩 사라졌다.
“나는 길 중간에서 먼저 떠난다. 그대가 나를 붙잡고 싶어 할수록, 나는 더 빠르게 멀어진다.”
만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아름다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사라졌다.
여섯 번째로 힘이 나타났다.
그는 강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들고, 걸음만으로도 바닥을 울렸다.
죠니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미하일라도 조용히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팔짱을 풀었다.
만인은 힘을 보고 거의 매달렸다.
“너라면 가능하다. 나를 지켜다오. 나는 너와 함께 많은 것을 버텼다. 병을 이겨냈고, 적을 물리쳤고, 무거운 것을 들었고, 먼 길을 걸었다.”
힘은 만인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오래 버틸 수 있다.”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하지만 끝까지는 아니다.”
힘의 손이 떨렸다.
그는 검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손은 떨리고, 무릎은 꺾이며, 숨은 짧아진다. 내가 그대를 지탱하지 못하는 날이 온다.”
힘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나는 강했으나, 영원하지 않았다.”
힘은 사라졌다.
죠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과 사 사이의 찰나를 긍정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알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은 진짜다.
그러나 모든 움직임은 언젠가 멈춘다.
그래서 지금 달리는 것이 더 빛난다.
일곱 번째로 가능성이 나타났다.
그 순간 하융은 숨을 멈췄다.
무대 위에 수많은 창문이 떠올랐다.
창마다 다른 만인이 있었다.
어떤 만인은 부자가 되었다.
어떤 만인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
어떤 만인은 전쟁에 나갔다.
어떤 만인은 사랑을 놓쳤다.
어떤 만인은 용서했다.
어떤 만인은 끝내 사과하지 못했다.
어떤 만인은 아이를 살렸다.
어떤 만인은 도망쳤다.
어떤 만인은 왕이 되었다.
어떤 만인은 이름 없이 묻혔다.
만인은 그 창들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나였을 수 있는가?”
가능성은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잘못 살아온 것인가?”
가능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은 너무 늦지도, 너무 이르지도 않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선택하지 못한 길을 보는 것은, 선택한 길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융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푸리나가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가능성은 만인에게 다가가 창 하나를 닫았다.
“그런 삶도 있었다.”
또 하나를 닫았다.
“그런 결말도 있었다.”
또 하나.
“그런 구원도, 그런 실패도, 그런 웃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든 창이 닫혔다.
가능성은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 여관에 도착하는 것은, 지금 이 길을 걸어온 그대다.”
하융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세계도 있었구나.”
그리고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살아가자.”
무대 위의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그럼 무엇이 남는가?”
그 질문이 극장에 내려앉았다.
친구도 떠났다.
친족도 떠났다.
재물도 남았다.
지식도 문 앞에 머물렀다.
아름다움도 사라졌다.
힘도 꺾였다.
가능성도 닫혔다.
만인은 떨며 물었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때 무대 위에 작은 등불 하나가 켜졌다.
아주 작았다.
처음에는 관객 대부분이 그것을 보지 못했다.
그 등불을 들고 나타난 것은 한 어린 배우였다.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만인은 그를 보았다.
“너는 누구인가?”
어린 배우는 대답했다.
“나는 그대가 한 일이다.”
만인이 눈을 찡그렸다.
“내가 한 일?”
“그대가 건넨 빵.
그대가 외면한 손.
그대가 지킨 약속.
그대가 어긴 약속.
그대가 쓴 편지.
그대가 찢은 편지.
그대가 살린 사람.
그대가 죽게 둔 사람.
그대가 용서한 이름.
그대가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어린 배우는 등불을 들었다.
“나는 선행만이 아니다.
나는 죄만도 아니다.
나는 그대가 살아오며 남긴 흔적이다.”
객석의 아카식이 처음으로 장난기 없는 얼굴이 되었다.
기록.
삶이 남긴 모든 흔적.
그것이 무대 위에서 작은 등불이 되어 있었다.
알토는 조용히 그 장면을 보았다.
책임은 남는다.
선택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인은 떨며 물었다.
“너는 나와 함께 가겠는가?”
작은 등불은 흔들렸다.
“나는 이미 함께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무대 바닥의 발자국들이 하나씩 빛났다.
웃음의 발자국.
도망의 발자국.
배신의 발자국.
헌신의 발자국.
후회의 발자국.
사랑의 발자국.
비겁함의 발자국.
다시 일어난 발자국.
만인은 그것들을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너무 많이 잘못했다.”
작은 등불은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너무 적게 사랑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마지막 여관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가?”
작은 등불은 잠시 침묵했다.
그때 길 끝의 마지막 여관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푸리나가 나타났다.
관객들이 숨을 멈췄다.
그녀는 화려한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무대 의상도 아니었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배우처럼 보이지도, 군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여관지기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만인을 바라보았다.
“자격을 묻는가.”
만인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모든 여행자는 길 위에서 무언가를 잃는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습니다.”
“모든 배우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놓친다.”
“나는 내 삶을 아름답게 끝내지 못했습니다.”
푸리나는 아주 천천히 무대 앞으로 걸어왔다.
“누가 그대에게 삶이 반드시 아름답게 끝나야 한다고 말했는가?”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푸리나는 그의 앞에 섰다.
“그대의 극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말은 부드러웠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그대는 비겁했고, 때로는 잔인했으며, 때로는 다정했고, 때로는 용감했다.
그대는 사랑했고, 외면했고, 후회했고, 다시 걸었다.
그대는 주인공이었으나, 항상 훌륭한 주인공은 아니었다.”
만인은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대는 걸었다.”
무대 뒤편의 등불들이 하나씩 켜졌다.
“친구가 떠난 뒤에도.
친족이 문턱에서 멈춘 뒤에도.
재물이 남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힘이 꺾인 뒤에도.
모든 가능성이 닫힌 뒤에도.”
푸리나는 말했다.
“그대는 그대가 남긴 흔적과 함께 여기까지 왔다.”
만인은 떨리는 손으로 작은 등불을 받았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만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삶을 쉽게 용서하는 극은 거짓이다.
모든 후회를 아름답다고 부르는 극도 거짓이다.
상처 입힌 사람에게 그대의 마지막 장면이 감동적이었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극은, 가장 잔인한 거짓이다.”
그레이는 숨을 멈췄다.
타마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모든 후회 때문에 마지막 여관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리는 것도, 여관의 방식은 아니다.”
그녀는 만인의 등불을 가리켰다.
“그대가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보아라.”
만인은 등불을 보았다.
그 안에는 선행만 있지 않았다.
죄도 있었다.
후회도 있었다.
망설임도 있었다.
그러나 꺼지지 않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마지막 여관은 승자만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완벽한 배우만 쉬는 곳도 아니다.
그곳은 길을 끝까지 걸어온 자가, 자신이 남긴 것을 마주하고,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만인은 울었다.
“나는 들어가도 됩니까?”
푸리나는 길 끝의 문을 열었다.
“들어오라.”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아주 낮게 덧붙였다.
“다만 그 등불은 두고 오지 마라.
그것이 그대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니.”
만인은 일어섰다.
그는 마지막 여관을 향해 걸었다.
걸음은 느렸다.
화려하지 않았다.
승리자의 행진도, 성자의 승천도 아니었다.
그저 지친 사람이 긴 길 끝에서 문을 향해 걷는 것 같았다.
그가 문 앞에 섰을 때, 푸리나는 관객석을 보았다.
처음으로.
극 중 여관지기가 아니라, 연출가 푸리나 헤툼으로.
그녀는 관객 모두를 바라보았다.
왕도.
가신도.
성좌도.
병사도.
피난민도.
아이도.
망자도.
모두를.
그리고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가지고 마지막 막에 설 것인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아직 그대의 막은 닫히지 않았으므로.”
그 순간 만인이 마지막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무대는 어두워졌다.
길 끝의 등불만 남았다.
극은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손을 들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박수가 금지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누구도 그 침묵을 먼저 깨고 싶지 않았다.
푸리나는 무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박수!”라고 외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게.
관객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방금 무대를 지나간 이름 없는 만인을 향해서.
그때 타마르 여왕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을 들 듯 빈손을 들어, 길 끝의 등불을 향해 아주 조용히 예를 표했다.
“쉬어도 좋겠지요.”
그 말이 첫 번째 박수보다 깊게 극장에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무릎 위의 장부를 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빈 페이지 맨 위에 한 줄만 썼다.
만인. 이름 있음.
그리고 펜을 멈췄다.
레이튼은 낮게 말했다.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죠니는 객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가는 건 어렵네.”
하융은 닫힌 무대를 보며 말했다.
“다른 가능성의 그들도, 언젠가 저 문 앞에 섰겠지.”
아카식은 기록하지 않았다.
알토가 옆에서 놀란 듯 그를 보았다.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가끔은, 바로 적지 않아도 되는 기록이 있어.”
알토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좋은 판단입니다.”
무대 위의 푸리나는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자신이 올린 극은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
죽음을 없애지도 않는다.
후회를 씻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극을 올렸다.
사람들이 자기 삶을 너무 늦게, 마지막 여관 앞에서야 처음 바라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직 막이 닫히지 않았을 때.
아직 누군가에게 사과할 수 있을 때.
아직 빵을 나눌 수 있을 때.
아직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때.
아직 손을 잡을 수 있을 때.
아직 자기 등불에 무엇을 담을지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때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객석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 침묵 속에서, 한 아이가 아주 작게 손뼉을 쳤다.
짝.
어른들이 그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
두 번째 박수가 이어졌다.
짝.
세 번째.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수가 극장을 채웠다.
그 박수는 축제의 박수가 아니었다.
승리의 박수도 아니었다.
무대 위의 배우를 칭송하는 박수라기보다, 각자가 자기 삶의 길 위에 아직 서 있음을 확인하는 박수였다.
푸리나는 그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웃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의 극은 여기서 끝.”
그녀의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그대들의 극은, 아직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