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3여관◆zAR16hM8he(046ff5c8)2026-05-08 (금) 13:57:41
아래 장면은 푸리나 = 휴식의 대리인 / 타마르 = 안식의 대리인이라는 대비를 중심으로 잡았어.
무대는 조지아의 [지상명계 : 안식농원] 가장자리, 산 자도 죽은 자도 완전히 어느 쪽이라 부르기 어려운 황혼의 포도밭이야.
---
엽편 — 막이 닫힌 뒤의 포도농원
황혼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아의 산등성이 너머로 해는 기울어 있었으나, 완전히 지지는 않았다. 하늘은 붉고, 금빛이며, 어딘가 보랏빛이었다. 그 빛 아래 포도나무들은 끝없이 이어졌고, 가지들은 오래된 기도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그 포도나무들 사이로 망자들이 걸었다.
어떤 이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검을 내려놓지 못한 채였으며, 어떤 이는 아직도 피 묻은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비명보다 피로가 많았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무덤도 아니었다.
여관이었다.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황혼의 여관.
푸리나 헤툼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말했다.
“조용하네.”
그녀답지 않게 짧은 말이었다.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들은 대개, 마지막에는 조용해진답니다.”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포도나무 십자가 아래, 타마르 여왕이 앉아 있었다.
흰 옷자락은 황혼빛을 머금고 있었고, 손끝에는 포도송이 하나가 느슨하게 들려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졸린 듯했고, 다정한 듯했고,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타마르가 웃었다.
“어서 오세요, 킬리키아의 극장주. 짐의 농원은 살아 있는 손님에게도 차를 내어줄 줄 안답니다.”
푸리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초대 고마워, 조지아의 여왕.”
“여왕이라.”
타마르는 천천히 포도알 하나를 떼어냈다.
“그대는 짐을 여왕이라 부르는군요. 어떤 이는 시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성녀라 부르고, 어떤 이는 명계의 괴물이라 부른답니다.”
푸리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럼 너는 뭐라고 불리고 싶어?”
타마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미있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대는 처음부터 곧장 찌르는군요.”
“레이튼이라면 질문을 세 개쯤 깔고 들어갔겠지만, 나는 그쪽 전문은 아니라서.”
“후후.”
타마르는 작게 웃었다.
“짐은 그저, 길이 끝난 이들이 헤매지 않게 기다리는 주인일 뿐이랍니다. 이름은 많아도, 하는 일은 단순하지요.”
“망자를 쉬게 하는 것?”
“심판하고, 덜어내고, 쉬게 하고, 보내는 것.”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내려다보았다.
“포도는 익어야 술이 되고, 죄는 드러나야 가라앉고, 영혼은 자신이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알아야 놓을 수 있답니다.”
푸리나는 포도밭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어떤 노인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젊은 병사의 혼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타마르가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전장에 보냈지요. 명예를 위해서라 믿었고, 가문을 위해서라 말했답니다. 이제야 묻고 있군요. 그것이 정말 아들을 위한 일이었는지.”
“잔인하네.”
“예.”
타마르는 부드럽게 인정했다.
“안식은 언제나 부드럽지만은 않답니다. 어린양은 잠들기 전에, 자신이 어디서 피를 흘렸는지 보아야 할 때도 있지요.”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산 자들에게 말해.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고. 선택하라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라고.”
“알고 있답니다.”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짐은 죽은 자들에게 말하지요. 막은 닫혔다고.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도 된다고. 박수도, 야유도, 후회도, 더는 붙잡지 않아도 된다고.”
두 여왕 사이에 황혼빛이 흘렀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타마르. 너는 내 극장을 어떻게 봐?”
“찬란하답니다.”
타마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의 극장은 산 자들에게 필요한 빛이지요. 사람은 자신이 왜 걷는지 모르면, 살아 있어도 길 위에서 죽은 것처럼 되니까요.”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타마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극장은 조금 눈부시답니다.”
“눈부시다?”
“예. 너무 밝은 무대에서는, 관객도 배우도 자신이 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리곤 하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대는 산 자에게 말합니다. ‘그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좋은 말이지요. 참으로 따뜻한 말입니다. 그러나 푸리나 헤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황혼이 조금 짙어졌다.
“정말 막이 닫힌 자에게도, 그대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푸리나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레이튼의 질문처럼 우아하게 우회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경고처럼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죠니의 말처럼 짧게 찌르고 끝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죽은 여왕의 질문이었다.
닫힌 막을 아는 자의 질문.
푸리나는 포도밭을 보았다.
걸어가는 망자들.
기억을 내려놓는 영혼들.
아직 울고 있는 이들.
더 이상 울 힘조차 없는 이들.
“아니.”
그녀는 말했다.
“그럴 수 없어.”
타마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주먹을 쥐었다.
“정말 끝난 사람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그건 희망이 아니라 폭력이겠지.”
타마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막이 닫히기 전까지는, 끝났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타마르를 보았다.
“사람은 자주 너무 빨리 자기 삶에 끝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는 패배했어. 나는 버려졌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나는 말하고 싶어. 아니라고. 아직 한 장면 남았다고. 아직 네가 선택할 수 있다고. 아직 너는 네 삶의 주인공이라고.”
타마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막이 닫히기 전의 여왕이군요.”
“그리고 너는?”
“짐은 막이 닫힌 뒤의 여왕이랍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푸리나는 문득 웃었다.
“우린 같은 여관좌를 섬기는데, 정말 정반대네.”
“정반대라기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겠지요.”
타마르는 포도나무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문 앞에서 산 자의 등을 밀어줍니다. ‘아직 돌아가지 말고 걸어가라’고.”
푸리나가 말했다.
“너는 문 안쪽에서 죽은 자를 맞이하는 거야?”
“예.”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말하지요. ‘오래 걸었군요. 이제 짐을 내려놓아도 된답니다.’”
잠시 뒤, 푸리나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무엇이 말인가요?”
“그 역할.”
타마르는 웃었다.
“죽은 여왕에게 죽음이 무섭냐 묻는군요.”
“죽음 말고.”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정말 끝났다고 말하는 일.”
그 말에 타마르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나른한 미소 뒤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황혼처럼 깊어졌다.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이 내리는 판결 하나가 어떤 영혼에게는 마지막 문이 됩니다. 어떤 이는 용서받고, 어떤 이는 머물고, 어떤 이는 황혼을 넘지 못하지요. 짐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안식에 들고, 누군가는 더 오래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 한답니다.”
그녀는 손에 든 포도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짐은 가볍게 판결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안식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순간, 포도밭 저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망자였다.
그러나 다른 망자들과 달랐다.
그 영혼은 포도나무 가지들을 밀치며 걸었다. 어깨에는 아직도 전장의 불길이 붙어 있었고, 손에는 부러진 칼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 희미한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끌려왔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타마르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른함이 사라졌다.
포도밭의 황혼이 멈췄다.
망자는 타마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외쳤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마을을 태우라 한 것은 내가 아니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전쟁 탓이다!”
타마르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에 온기가 없었다.
“이름.”
망자가 움찔했다.
“나는—”
“이름.”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망자는 이를 갈았다.
“기오르기.”
타마르의 뒤에서 명계문이 희미하게 열렸다.
포도나무의 그림자가 십자가처럼 길게 뻗었다.
타마르가 말했다.
“기오르기. 그대의 칼은 명령을 핑계로 어린양의 목을 베었다.”
망자가 떨었다.
“전쟁이었다!”
“전쟁은 죄의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
타마르의 목소리는 판결문처럼 떨어졌다.
“판결한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 순간 타마르는 더 이상 나른한 여왕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혼의 포도농원 그 자체였다.
“그대의 죄는 황혼을 넘지 못한다. 그대의 이름, 업, 피, 맹세를 이 농원에 묻는다. 안식을 허가하지 않는다.”
망자의 검은 불길이 꺼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포도나무 뿌리 아래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흙이 그의 손을 덮었고, 포도나무 가지들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타마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죄는 익을 때까지 머물 것이다.”
명계문이 닫혔다.
황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타마르는 다시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방금 전의 절대적인 목소리가 꿈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포도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군요. 손님 앞에서 재판을 열어버렸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
그녀는 망자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필요한 장면이었어.”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싫어하는 말투네. ‘필요한 장면’이라니. 그레이가 들었으면 나를 봤을 거야. 죠니라면 ‘전부 이야기로 만들 필요는 없어’라고 했겠지.”
“그대는 그래도 장면으로 이해하는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게밖에 못 보나 봐. 하지만 방금 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타마르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다행이군요.”
“다행?”
“그대가 모든 죽음을 아름답게만 보았다면, 짐은 그대와 오래 이야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너, 은근히 무섭게 말한다.”
“죽음이란 원래 은근히 다가오는 법이랍니다.”
“그 농담, 웃어야 해?”
“그대가 원한다면요.”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황혼의 포도밭에서, 살아 있는 극장주와 죽은 시왕이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불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관의 불씨처럼 작고 따뜻했다.
푸리나가 말했다.
“타마르.”
“말하세요, 킬리키아의 어린 극장주.”
“어린은 빼줄래?”
“짐에게는 대부분 어린양이랍니다.”
“너무해.”
타마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푸리나는 포도밭 너머를 보았다.
“언젠가 내 막도 닫히겠지.”
“예.”
타마르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때 네 농원에 오게 될까?”
타마르는 잠시 생각했다.
“그대가 조지아의 황혼으로 길을 잃는다면, 짐은 그대를 맞이하겠지요.”
“어떻게?”
“차를 내어줄까요. 아니면 포도주가 좋을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포도주.”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겠지. ‘아직 앙코르가 남았어!’”
타마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짐은 말할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푸리나 헤툼. 그대는 충분히 공연했답니다. 이제 박수 소리는 두고 와도 좋겠지요.”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멈췄다.
황혼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 말은……”
그녀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
“조금 무섭네.”
“안식은 산 자에게는 늘 조금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세요. 그대의 극장은 아직 낮에 있지요. 짐의 농원은 너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은.”
“예. 아직은.”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을 배워야 하지만, 죽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아직 무대 위의 여왕이지, 포도나무 아래의 손님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
“예.”
“나는 산 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살아가게 할게.”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그럼 짐은, 그 이야기가 끝난 이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겠답니다.”
두 여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쪽은 막이 오르기 전의 빛.
한쪽은 막이 닫힌 뒤의 황혼.
같은 여관의 다른 문.
푸리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여, 박수를.”
타마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어린양, 황혼에는 박수보다 침묵이 어울린답니다.”
“그럼 침묵을.”
푸리나는 이번에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대에게.”
타마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포도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서 망자 하나가 마지막 짐을 내려놓고, 황혼 너머로 걸어갔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으므로.
무대는 조지아의 [지상명계 : 안식농원] 가장자리, 산 자도 죽은 자도 완전히 어느 쪽이라 부르기 어려운 황혼의 포도밭이야.
---
엽편 — 막이 닫힌 뒤의 포도농원
황혼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아의 산등성이 너머로 해는 기울어 있었으나, 완전히 지지는 않았다. 하늘은 붉고, 금빛이며, 어딘가 보랏빛이었다. 그 빛 아래 포도나무들은 끝없이 이어졌고, 가지들은 오래된 기도처럼 서로 얽혀 있었다.
그 포도나무들 사이로 망자들이 걸었다.
어떤 이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검을 내려놓지 못한 채였으며, 어떤 이는 아직도 피 묻은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비명보다 피로가 많았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무덤도 아니었다.
여관이었다.
죽은 자가 마지막으로 쉬어가는 황혼의 여관.
푸리나 헤툼은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말했다.
“조용하네.”
그녀답지 않게 짧은 말이었다.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죽은 자들은 대개, 마지막에는 조용해진답니다.”
푸리나는 돌아보았다.
포도나무 십자가 아래, 타마르 여왕이 앉아 있었다.
흰 옷자락은 황혼빛을 머금고 있었고, 손끝에는 포도송이 하나가 느슨하게 들려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졸린 듯했고, 다정한 듯했고, 이미 너무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타마르가 웃었다.
“어서 오세요, 킬리키아의 극장주. 짐의 농원은 살아 있는 손님에게도 차를 내어줄 줄 안답니다.”
푸리나는 한 걸음 다가갔다.
“초대 고마워, 조지아의 여왕.”
“여왕이라.”
타마르는 천천히 포도알 하나를 떼어냈다.
“그대는 짐을 여왕이라 부르는군요. 어떤 이는 시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성녀라 부르고, 어떤 이는 명계의 괴물이라 부른답니다.”
푸리나는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그럼 너는 뭐라고 불리고 싶어?”
타마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미있다는 듯한 눈이었다.
“그대는 처음부터 곧장 찌르는군요.”
“레이튼이라면 질문을 세 개쯤 깔고 들어갔겠지만, 나는 그쪽 전문은 아니라서.”
“후후.”
타마르는 작게 웃었다.
“짐은 그저, 길이 끝난 이들이 헤매지 않게 기다리는 주인일 뿐이랍니다. 이름은 많아도, 하는 일은 단순하지요.”
“망자를 쉬게 하는 것?”
“심판하고, 덜어내고, 쉬게 하고, 보내는 것.”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내려다보았다.
“포도는 익어야 술이 되고, 죄는 드러나야 가라앉고, 영혼은 자신이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 알아야 놓을 수 있답니다.”
푸리나는 포도밭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어떤 노인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젊은 병사의 혼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타마르가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전장에 보냈지요. 명예를 위해서라 믿었고, 가문을 위해서라 말했답니다. 이제야 묻고 있군요. 그것이 정말 아들을 위한 일이었는지.”
“잔인하네.”
“예.”
타마르는 부드럽게 인정했다.
“안식은 언제나 부드럽지만은 않답니다. 어린양은 잠들기 전에, 자신이 어디서 피를 흘렸는지 보아야 할 때도 있지요.”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산 자들에게 말해.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고. 선택하라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라고.”
“알고 있답니다.”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짐은 죽은 자들에게 말하지요. 막은 닫혔다고.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도 된다고. 박수도, 야유도, 후회도, 더는 붙잡지 않아도 된다고.”
두 여왕 사이에 황혼빛이 흘렀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타마르. 너는 내 극장을 어떻게 봐?”
“찬란하답니다.”
타마르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대의 극장은 산 자들에게 필요한 빛이지요. 사람은 자신이 왜 걷는지 모르면, 살아 있어도 길 위에서 죽은 것처럼 되니까요.”
푸리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타마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대의 극장은 조금 눈부시답니다.”
“눈부시다?”
“예. 너무 밝은 무대에서는, 관객도 배우도 자신이 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리곤 하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천천히 돌렸다.
“그대는 산 자에게 말합니다. ‘그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좋은 말이지요. 참으로 따뜻한 말입니다. 그러나 푸리나 헤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황혼이 조금 짙어졌다.
“정말 막이 닫힌 자에게도, 그대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푸리나의 손끝이 조금 굳었다.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레이튼의 질문처럼 우아하게 우회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경고처럼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죠니의 말처럼 짧게 찌르고 끝나지도 않았다.
그것은 죽은 여왕의 질문이었다.
닫힌 막을 아는 자의 질문.
푸리나는 포도밭을 보았다.
걸어가는 망자들.
기억을 내려놓는 영혼들.
아직 울고 있는 이들.
더 이상 울 힘조차 없는 이들.
“아니.”
그녀는 말했다.
“그럴 수 없어.”
타마르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주먹을 쥐었다.
“정말 끝난 사람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그건 희망이 아니라 폭력이겠지.”
타마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깊어졌다.
푸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막이 닫히기 전까지는, 끝났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타마르를 보았다.
“사람은 자주 너무 빨리 자기 삶에 끝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는 패배했어. 나는 버려졌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나는 말하고 싶어. 아니라고. 아직 한 장면 남았다고. 아직 네가 선택할 수 있다고. 아직 너는 네 삶의 주인공이라고.”
타마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막이 닫히기 전의 여왕이군요.”
“그리고 너는?”
“짐은 막이 닫힌 뒤의 여왕이랍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푸리나는 문득 웃었다.
“우린 같은 여관좌를 섬기는데, 정말 정반대네.”
“정반대라기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겠지요.”
타마르는 포도나무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문 앞에서 산 자의 등을 밀어줍니다. ‘아직 돌아가지 말고 걸어가라’고.”
푸리나가 말했다.
“너는 문 안쪽에서 죽은 자를 맞이하는 거야?”
“예.”
타마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말하지요. ‘오래 걸었군요. 이제 짐을 내려놓아도 된답니다.’”
잠시 뒤, 푸리나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무엇이 말인가요?”
“그 역할.”
타마르는 웃었다.
“죽은 여왕에게 죽음이 무섭냐 묻는군요.”
“죽음 말고.”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 정말 끝났다고 말하는 일.”
그 말에 타마르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나른한 미소 뒤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황혼처럼 깊어졌다.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짐이 내리는 판결 하나가 어떤 영혼에게는 마지막 문이 됩니다. 어떤 이는 용서받고, 어떤 이는 머물고, 어떤 이는 황혼을 넘지 못하지요. 짐의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안식에 들고, 누군가는 더 오래 자신의 죄와 마주해야 한답니다.”
그녀는 손에 든 포도알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짐은 가볍게 판결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안식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순간, 포도밭 저편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망자였다.
그러나 다른 망자들과 달랐다.
그 영혼은 포도나무 가지들을 밀치며 걸었다. 어깨에는 아직도 전장의 불길이 붙어 있었고, 손에는 부러진 칼이 들려 있었다. 그 뒤로 희미한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끌려왔다.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타마르는 천천히 일어났다.
나른함이 사라졌다.
포도밭의 황혼이 멈췄다.
망자는 타마르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는 외쳤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마을을 태우라 한 것은 내가 아니다! 아이들이 죽은 것은 전쟁 탓이다!”
타마르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에 온기가 없었다.
“이름.”
망자가 움찔했다.
“나는—”
“이름.”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망자는 이를 갈았다.
“기오르기.”
타마르의 뒤에서 명계문이 희미하게 열렸다.
포도나무의 그림자가 십자가처럼 길게 뻗었다.
타마르가 말했다.
“기오르기. 그대의 칼은 명령을 핑계로 어린양의 목을 베었다.”
망자가 떨었다.
“전쟁이었다!”
“전쟁은 죄의 이름을 지우지 않는다.”
타마르의 목소리는 판결문처럼 떨어졌다.
“판결한다.”
푸리나는 숨을 멈췄다.
그 순간 타마르는 더 이상 나른한 여왕이 아니었다.
그녀는 황혼의 포도농원 그 자체였다.
“그대의 죄는 황혼을 넘지 못한다. 그대의 이름, 업, 피, 맹세를 이 농원에 묻는다. 안식을 허가하지 않는다.”
망자의 검은 불길이 꺼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포도나무 뿌리 아래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흙이 그의 손을 덮었고, 포도나무 가지들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타마르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죄는 익을 때까지 머물 것이다.”
명계문이 닫혔다.
황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타마르는 다시 나른하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방금 전의 절대적인 목소리가 꿈이었던 것처럼, 그녀는 포도나무 아래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군요. 손님 앞에서 재판을 열어버렸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
그녀는 망자가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필요한 장면이었어.”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싫어하는 말투네. ‘필요한 장면’이라니. 그레이가 들었으면 나를 봤을 거야. 죠니라면 ‘전부 이야기로 만들 필요는 없어’라고 했겠지.”
“그대는 그래도 장면으로 이해하는군요.”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렇게밖에 못 보나 봐. 하지만 방금 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타마르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다행이군요.”
“다행?”
“그대가 모든 죽음을 아름답게만 보았다면, 짐은 그대와 오래 이야기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너, 은근히 무섭게 말한다.”
“죽음이란 원래 은근히 다가오는 법이랍니다.”
“그 농담, 웃어야 해?”
“그대가 원한다면요.”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황혼의 포도밭에서, 살아 있는 극장주와 죽은 시왕이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불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관의 불씨처럼 작고 따뜻했다.
푸리나가 말했다.
“타마르.”
“말하세요, 킬리키아의 어린 극장주.”
“어린은 빼줄래?”
“짐에게는 대부분 어린양이랍니다.”
“너무해.”
타마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푸리나는 포도밭 너머를 보았다.
“언젠가 내 막도 닫히겠지.”
“예.”
타마르는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때 네 농원에 오게 될까?”
타마르는 잠시 생각했다.
“그대가 조지아의 황혼으로 길을 잃는다면, 짐은 그대를 맞이하겠지요.”
“어떻게?”
“차를 내어줄까요. 아니면 포도주가 좋을까요?”
푸리나는 웃었다.
“포도주.”
“그럴 줄 알았답니다.”
“그리고 내가 말하겠지. ‘아직 앙코르가 남았어!’”
타마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 짐은 말할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푸리나 헤툼. 그대는 충분히 공연했답니다. 이제 박수 소리는 두고 와도 좋겠지요.”
푸리나의 웃음이 조금 멈췄다.
황혼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그 말은……”
그녀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
“조금 무섭네.”
“안식은 산 자에게는 늘 조금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포도송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세요. 그대의 극장은 아직 낮에 있지요. 짐의 농원은 너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은.”
“예. 아직은.”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을 배워야 하지만, 죽음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대는 아직 무대 위의 여왕이지, 포도나무 아래의 손님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다 다시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
“예.”
“나는 산 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살아가게 할게.”
타마르는 미소 지었다.
“그럼 짐은, 그 이야기가 끝난 이들이 길을 잃지 않게 하겠답니다.”
두 여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쪽은 막이 오르기 전의 빛.
한쪽은 막이 닫힌 뒤의 황혼.
같은 여관의 다른 문.
푸리나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여, 박수를.”
타마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어린양, 황혼에는 박수보다 침묵이 어울린답니다.”
“그럼 침묵을.”
푸리나는 이번에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대에게.”
타마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포도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서 망자 하나가 마지막 짐을 내려놓고, 황혼 너머로 걸어갔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