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36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1 (월) 00:33:58
엽편 — 오즈의 마법사: 노란 길 위의 군주들

2편. 없는 것을 찾는 세 사람

노란 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푸리나 헤툼은 처음 그 길이 연극용 널빤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무대 위에 놓였을 때의 노란 길은 분명 금빛으로 칠한 나무판이었다. 그레이가 비용을 계산했고, 장인들이 칠했고, 아이들이 마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눌렀다가 혼났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 푸리나의 은구두 아래에서 노란 길은 진짜 벽돌처럼 느껴졌다.

딱딱하고, 따뜻하고, 이상하게 먼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왼쪽에는 킬리키아의 광장이 보였다. 등불, 관객석, 왕궁의 벽, 무대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시종들.
오른쪽에는 오즈의 들판이 펼쳐졌다. 반짝이는 꽃, 낮은 풀, 이름 모를 새, 그리고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연극처럼 보이는 하늘.

두 세계가 나란히 있었다.

푸리나는 그 사이를 걸었다.

“와.”

그녀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거 완전 대성공 아니야?”

옆에서 아카식이 리본을 흔들며 걸었다. 토토 역이었다. 누가 봐도 강아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은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연출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진 사례로는 상당히 흥미롭다.”

“토토는 그런 말 안 해.”

“멍.”

“방금 그건 좀 괜찮았어.”

아카식은 웃었다.

노란 길의 첫 구간은 평화로웠다. 길가에는 키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꽃잎은 지나가는 이에게 인사하듯 흔들렸다. 관객석 쪽에서는 아이들이 “도로시다!”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도로시라면 조금 더 겁먹은 척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푸리나는 길 잃은 소녀를 맡았음에도, 길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길이 열렸다는 사실에 더 설레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중앙까지 나아가다가 갑자기 멈췄다.

노란 길 옆에 허수아비 하나가 서 있었다.

낡은 모자. 헐렁한 옷. 팔에는 짚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기둥에 묶인 채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이상하게 품위 있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아니,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레이튼이었다.

푸리나는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튼.”

허수아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둥에 묶인 탓에 허리가 삐걱거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도로시 양.”

“왜 그렇게 자연스러워?”

“배역에 충실하려 하고 있습니다.”

“너무 충실해. 허수아비인데 귀족 가정교사 같아.”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 점은 저도 개선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허수아비가 반드시 무례해야 한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카식이 옆에서 말했다.

“기록상 품위 있는 허수아비도 가능하지.”

푸리나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허수아비 씨. 왜 여기 묶여 계신가요?”

레이튼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는 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

푸리나는 침묵했다.

허수아비 레이튼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뇌가 없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장대에서 내려올 방법을 알지 못하며, 그래서 지나가는 여행자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수아비가 묶인 장대의 밧줄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심지어 레이튼의 손가락이 닿는 위치에 매듭이 있었다. 발밑에는 누군가가 일부러 놓아둔 듯한 작은 돌도 있었다.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밟고 올라설 수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너 방금 내려오는 방법 세 가지 정도 생각했지.”

레이튼은 온화하게 대답했다.

“네 가지입니다.”

“뇌 없다며!”

“그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푸리나는 이마를 짚었다.

“레이튼, 네가 허수아비 역인 건 맞는데, 허수아비가 자기 설정의 모순을 분석하면 어떡해?”

“설정과 사실이 언제나 일치하는지는 질문해볼 문제지요.”

“그 질문 지금 꼭 해야 해?”

“도로시 양, 여행의 출발점에서는 늘 좋은 질문이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레이튼은 그 웃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린 뒤,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푸리나는 허수아비의 밧줄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너 이미 지혜롭잖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건 모두가 그래.”

“그렇기에 모두가 여행자겠지요.”

매듭이 풀렸다.

레이튼은 장대에서 내려왔다. 짚으로 채워진 팔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품위 있는 허수아비라는 말이 이상하게 설득력을 얻었다.

푸리나는 그를 위아래로 보았다.

“정말 오즈에게 뇌를 받으러 갈 거야?”

레이튼은 잠시 생각했다.

“뇌를 받는 것보다, 뇌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그게 그 말이야?”

“아마도 아닙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좋아. 같이 가자!”

레이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동행하겠습니다, 도로시 양.”

그렇게 도로시와 토토와 허수아비는 노란 길을 걸었다.

길은 조금씩 바뀌었다.

밝은 들판은 점점 낮은 숲으로 변했고, 나무 사이에는 금속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바람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푸리나는 그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다.

딱.
딱.
딱.

마치 누군가가 멈춘 손가락으로 장부 모서리를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죠니가 객석 쪽에서 중얼거렸다.

“그레이네.”

아직 그는 길 위에 오르지 않았다. 사자 갈기를 손에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숲 한가운데, 양철 나무꾼이 서 있었다.

은빛 앞치마와 팔 보호대, 금속으로 만든 듯한 모자, 어깨와 팔에 칠해진 회색빛. 도끼 대신 장부를 들고 있는 것이 원작과 달랐다. 그리고 그 장부는, 누가 봐도 그레이가 실제로 쓰는 장부였다.

그레이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폐하.”

푸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양철 나무꾼 씨.”

그레이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정정했다.

“……도로시 양.”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좋아. 왜 여기 서 있어?”

그레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녹이 슬어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레이튼이랑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레이튼은 옆에서 미소 지었다.

“훌륭한 배역 적응입니다.”

푸리나는 그레이 주변을 살폈다. 양철 나무꾼답게 기름통이 근처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기름통 옆에는 작은 종이도 붙어 있었다.

기름 사용량 기록 필요.

푸리나는 그 종이를 떼어냈다.

“그레이.”

“예.”

“무대 소품에 사용량 기록 붙이지 마.”

“하지만 누가 얼마나 썼는지 알아야 다음 공연 때 예산을—”

“오늘은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이잖아!”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서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푸리나는 멈칫했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심장이 없으면 편합니다. 울지 않고 이름을 적을 수 있으니까요.”

순간, 숲의 소리가 가라앉았다.

객석의 웃음도 잠시 멈췄다.

푸리나는 그레이를 보았다.

은빛으로 칠한 옷.
녹슨 관절.
손에 들린 장부.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그레이는 대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사는 배역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푸리나는 기름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레이의 팔꿈치 관절에 기름을 부었다.

“거짓말.”

그레이가 작게 눈을 들었다.

“폐하, 대본에는 그런 대사가 없습니다.”

“즉흥극.”

푸리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심장이 없으면 그런 말 못 해.”

그레이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푸리나는 계속 기름을 부었다.

“이름을 적는 사람은 심장이 없는 게 아니야. 심장이 너무 무거워서, 손으로 버티는 거지.”

그레이의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장부를 쥔 손가락이 풀렸다가 다시 잡혔다.

레이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질문보다 침묵이 더 맞는 순간이었다.

아카식은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기록하고 있었다.

그레이는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저는…… 심장을 얻으러 오즈에게 가야 합니다.”

푸리나는 일부러 밝게 웃었다.

“좋아! 그럼 같이 가자. 뇌 없는 허수아비와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과 말하는 토토와 길 잃은 도로시!”

아카식이 말했다.

“토토가 말하는 부분을 계속 강조하는구나.”

“중요하니까!”

그레이는 아주 작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

“응?”

“제가 심장을 얻으면, 장부 확인은 누가 합니까?”

푸리나는 잠시 생각했다.

“……심장을 얻은 뒤에도 네가 하면 안 돼?”

그레이는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면 가겠습니다.”

죠니가 멀리서 말했다.

“그게 안도할 일이야?”

푸리나는 그제야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아, 다음은 너야!”

죠니는 아주 싫은 얼굴로 사자 갈기를 들어 올렸다.

“안 하면 안 되나?”

“안 돼!”

“난 용기 필요 없는데.”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적합한 배역일 수 있습니다.”

죠니가 그를 보았다.

“너는 질문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 사람을 귀찮게도 하는군.”

“그 둘은 종종 같은 일입니다.”

푸리나가 손뼉을 쳤다.

“자, 사자 등장!”

무대 위 숲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무 사이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아이들이 기대에 차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북소리가 작게 깔렸다. 푸리나와 레이튼과 그레이는 노란 길 위에서 일부러 긴장한 척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타난 사자는, 갈기를 반쯤만 쓴 죠니였다.

갈기가 한쪽으로 삐뚤어져 있었다.

푸리나는 입을 막았다.

레이튼은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는 예의상 웃지 않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웃으면 물어버린다.”

푸리나는 터졌다.

“죠니, 너무 귀여워!”

“그 말이 제일 기분 나빠.”

“사자잖아!”

“사자가 귀엽다는 말 듣고 좋아할 것 같아?”

아카식은 객석 쪽에서 손뼉을 쳤다.

“좋은 장면이다. 기록 가치가 높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 기록에서 내 부분 지워줘.”

알토가 객석에서 답했다.

“기록 조작은 불가합니다.”

“젠장.”

푸리나는 웃음을 겨우 멈추고 대사를 이어갔다.

“무서운 사자님! 저희를 잡아먹으실 건가요?”

죠니는 갈기를 바로잡으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래. 어흥.”

침묵.

푸리나가 속삭였다.

“좀 더 성의 있게.”

죠니가 눈을 감았다.

“어흥.”

레이튼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다소 개선되었습니다.”

죠니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이 극 빨리 끝내자.”

하지만 무대는 죠니를 그냥 웃기는 배역으로 두지 않았다.

그 순간, 숲의 어둠 안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심장 박동에 가까웠다.

쿵.
쿵.
쿵.

푸리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 그레이도 들었다. 레이튼은 미소를 거두었다. 하융은 아직 무대 뒤에 있었지만, 그의 창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죠니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사자 갈기를 쓴 채, 노란 길 앞을 막아섰다. 웃기게 보이던 갈기가 등불 아래에서 갑자기 다른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소품이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뒤집어쓴 가면처럼 보였다.

푸리나가 대사를 말했다.

“왜 우리를 겁주려고 했어요?”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겁나니까.”

그 말은 건조했다.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죠니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먼저 겁주면, 내가 겁먹은 걸 들키지 않을 것 같거든.”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낮게 이어 말했다.

“겁이 안 나는 건 용기가 아니야. 그건 그냥 멍청한 거지.”

그의 손이 갈기 끝을 붙잡았다.

“죽는 게 무섭고, 실패하는 게 무섭고, 내가 달린 길이 아무 의미 없을까 봐 무섭고, 사람들 앞에서 웃긴 꼴을 하는 것도 무섭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마지막 건 조금 다른 문제 같은데.”

“아니, 중요해.”

그 말에 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죠니는 그 웃음을 그대로 지나가게 두었다.

“그래도 가야 하면 가는 거야. 무섭다고 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래서 나도 오즈에게 가야겠네. 용기 같은 걸 준다며.”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이미 있는 것 같은데?”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확인하러 가는 거지.”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지혜도, 마음도, 용기도, 어쩌면 확인의 문제일 수 있겠군요.”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확인에는 문서가 필요할까요?”

죠니가 바로 답했다.

“제발 아니라고 해.”

푸리나는 손을 높이 들었다.

“좋아! 이제 다 모였어!”

그녀는 한 명씩 가리켰다.

“뇌 없는 허수아비!”

레이튼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

그레이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용기 없는 사자!”

죠니가 말했다.

“그렇게 부르지 마.”

“그리고 말하는 토토!”

아카식이 말했다.

“멍.”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해!”

죠니가 중얼거렸다.

“어디가.”

네 사람과 토토는 노란 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은 점점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들판이었다. 다음에는 숲이었다. 이제는 길 양옆에 창문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창문은 벽에 붙어 있지 않았다. 공중에 서 있었다. 어떤 것은 동방식 창호였고, 어떤 것은 유리창이었고, 어떤 것은 깨진 거울처럼 보였다.

그 창문들 안에는 다른 풍경이 비쳤다.

푸리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한 창에는 레이튼이 보였다.

허수아비 장대에 묶인 채,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계속 그곳에 남아 있는 레이튼. 바람에 짚이 빠지고, 질문이 점점 자기 안에서만 맴도는 모습.

다른 창에는 그레이가 보였다.

녹슨 채 서 있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장부는 산처럼 쌓였고, 이름들은 점점 숫자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지만, 얼굴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희미했다.

또 다른 창에는 죠니가 있었다.

사자 갈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말 위에 있었고,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불러도 멈추지 않았다. 살아남았지만, 함께 달리던 사람들의 이름을 잃은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하융.”

창문들 사이에서 하융이 나타났다.

그는 유리장수처럼 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작고 얇은 창들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회색빛 창호가 그의 뒤로 낮게 펼쳐졌다.

그는 푸리나 일행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길 위의 배우들이여.”

푸리나는 조금 웃으려 했다.

“하융, 배역 엄청 잘 어울려.”

“배역이오. 그러나 창은 배역만을 비추지 않소.”

그는 손을 들어 가까운 창 하나를 가리켰다.

그 안에는 푸리나가 있었다.

도로시가 아닌 푸리나 헤툼.

그녀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조명은 너무 밝았고, 관객석은 어두웠다.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지만,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장면은 화려했지만, 이상하게 외로웠다.

푸리나는 말없이 그 창을 보았다.

하융이 말했다.

“그런 길도 있었소.”

그는 다른 창을 가리켰다.

이번에는 다른 푸리나였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왕좌에 앉아 있었고, 모든 것을 명령과 장부와 병력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나라는 조금 더 조용했고, 조금 더 안전해 보였다. 그러나 축제는 없었다.

“그런 길도 있었소.”

세 번째 창.

푸리나는 도로시 복장을 입은 채 노란 길을 걷지 않았다. 은구두를 신자마자 세 번 두드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무사했다. 길 위에서 레이튼도, 그레이도, 죠니도 만나지 않았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그런 길도 있었소.”

푸리나는 긴 침묵 끝에 물었다.

“저 중에 정답이 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정답은 모르오.”

“그럼 왜 보여주는 거야?”

“걷지 않은 길도,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오.”

하융은 창 하나를 닫았다.

“다만, 모든 창을 열어두면 사람은 걷지 못하오.”

또 하나를 닫았다.

“수많은 가능성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발목을 붙드는 물이 되오.”

또 하나.

“그러니 가끔은 보아야 하오. 그리고 닫아야 하오.”

마지막으로 그는 노란 길을 가리켰다.

“그런 세계도 있었소. 허나 지금은, 이 길이오.”

푸리나는 은구두를 내려다보았다.

노란 벽돌 위에서 은빛이 작게 흔들렸다.

레이튼은 창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흥미롭군요. 가능성은 답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레이는 자기 창을 오래 보다가, 장부를 조금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숫자로 바꾸지 않겠습니다.”

죠니는 자신의 창을 보고 낮게 말했다.

“도망치지 않은 척하면서 도망치는 길도 있군.”

하융은 그를 보았다.

죠니는 갈기를 벗으려다 말고, 다시 고쳐 썼다.

“그래. 알았어. 오늘은 이 웃긴 갈기 쓰고 끝까지 가보자.”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좋아!”

그리고 그녀는 하융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도 같이 가.”

하융은 잠시 그 손을 보았다.

“나는 창을 여는 자요.”

“그러니까 같이 가. 길 위에도 창문이 필요하니까.”

“가능성이 많으면 길이 흐려질 수 있소.”

“괜찮아.”

푸리나는 웃었다.

“흐려지면 레이튼이 질문하고, 그레이가 확인하고, 죠니가 그냥 앞으로 가고, 토토가 기록하면 돼.”

아카식이 말했다.

“토토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군.”

“좋잖아.”

하융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푸리나의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노란 길 옆으로 한 걸음 나란히 섰다.

그 정도가 하융에게는 충분한 합류였다.

길 위에 다섯 명과 한 토토가 섰다.

도로시.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비껴간 창의 유리장수.
그리고 말하는 토토.

관객석에서는 아이들이 손뼉을 쳤다. 피난민들도 웃었다. 각국의 군주와 가신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민다우가스는 창문들이 닫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슈샤니크는 푸리나가 보았던 “돌아가지 않은 길”을 보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죠니의 말을 기억했다. 무섭다는 것을 알고도 가는 것.
요안나는 그레이가 장부를 껴안는 방식을 보았다.
아레는 무대 아래에서, 아직 박수를 치지 못하는 손들을 듣고 있었다.
알토는 아무 말 없이 기록했다.
아카식은 이미 그 모든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노란 길은 앞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들판도, 숲도, 창문도 아니었다.

길 끝에 어두운 숲이 보였다.

그 숲은 오즈의 숲이 아니었다.

달빛이 낮게 깔리고, 나무 사이로 늪의 냄새가 났다. 보이지 않는 사냥꾼들이 숨을 죽인 것 같은 숲. 한 번 들어가면 길이 자신을 삼킬 것 같은 숲.

푸리나는 걸음을 멈췄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번엔 진짜 위험해 보이네.”

레이튼이 숲의 입구를 보며 말했다.

“숲이라기보다 질문에 가깝군요.”

그레이는 작게 물었다.

“무슨 질문입니까?”

하융은 창 하나를 열었다가, 곧 닫았다.

그 안에서 불타는 집이 보였기 때문이다.

숲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나.”

민다우가스의 목소리였다.

노란 길 위의 모두가 숲을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답해라.”

달빛 아래, 어두운 숲이 천천히 길을 열었다.

“집이 불탔다면, 그래도 돌아갈 것인가?”

2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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