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38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1 (월) 01:33:20
엽편 — 오즈의 마법사: 노란 길 위의 군주들

4편. 서쪽 마녀와 검은 실

2차 개정판

검은 성은 멀리서 볼 때보다 조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오즈의 서쪽 마녀가 사는 성이라면, 푸리나 헤툼은 적어도 번개나 비명, 솥에서 끓는 수상한 약물, 또는 “깔깔깔” 하고 웃는 마녀의 목소리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적어도 무대 효과 담당이 초록색 연기를 좀 많이 뿜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성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성벽은 검었고, 창문마다 초록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성문 앞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지만, 그들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갑옷도, 창도, 깃발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군대라기보다는 정리된 장부의 행처럼 보였다.

한 줄.

또 한 줄.

또 한 줄.

도로시와 허수아비와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와 비껴간 창의 유리장수와 말하는 토토는 노란 길 끝에서 멈춰 섰다.

푸리나는 성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죠니 죠스타가 사자 갈기를 만지며 말했다.

“그래서 더 별로야.”

레이튼은 허수아비 모자 아래로 성벽의 구조를 살폈다.

“소리 없는 성은 대개 두 가지 경우입니다. 비어 있거나, 너무 잘 통제되어 있거나.”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낮게 말했다.

“비어 있지는 않습니다. 창마다 인원 배치가 있습니다. 동선도 정리되어 있고, 경비 교대도 있는 것 같습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 너 지금 마녀 성 보고 행정 평가 중이야?”

“죄송합니다.”

“아니, 잘했어. 무섭게 잘했어.”

아카식은 토토 리본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 성은 나쁜 의미로 기록하기 쉽겠군.”

하융은 성의 창문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 희미한 회색 창호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창이 닫혀 있소.”

푸리나가 물었다.

“성문 말하는 거야?”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가능성의 창이오. 저 성 안은 길이 많아 보이나, 실제로는 한쪽으로만 흐르고 있소.”

레이튼이 조용히 받았다.

“결론이 이미 정해진 공간이라는 뜻이군요.”

하융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어간 자는 이름을 잃고, 역할만 남소.”

죠니가 한숨을 쉬었다.

“오즈 가족극 맞아?”

푸리나는 성을 올려다보다가, 일부러 밝게 웃었다.

“좋아. 가족극이 조금 어두워졌을 뿐이야.”

“그걸 가족극이라고 계속 우기네.”

“우기면 장르가 바뀔 수도 있어!”

레이튼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것은 꽤 푸리나 폐하다운 극작론입니다.”

성문 위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장르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성벽 전체가 그 목소리를 받아 적는 것 같았다.

“장르를 바꾸려면 먼저 무대의 소유권, 대본의 권한, 배우의 귀속, 비용의 출처를 확인해야 합니다.”

푸리나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성문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초록빛 망토.

검은 드레스.

긴 소매.

마녀의 모자.

누가 봐도 서쪽 마녀의 의상이었다. 그러나 그 의상은 우스꽝스럽지도, 과장되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 주름 하나까지 계산된 듯했다. 초록빛 천은 독처럼 번지지 않고 서류철의 표지처럼 단정했고, 검은 드레스는 장례복과 궁정복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슈샤니크 호르프시메 바흐람 아즈나부르 파흘라부니.

니케아 제국의 메가스 로고스테스.

그리고 지금은, 서쪽 마녀였다.

그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도로시.”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응. 도로시야.”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푸리나는 조금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슈샤니크는 웃지 않았다.

“참으로 편리한 소원이군요.”

공기가 차가워졌다.

“돌아갈 집이 아직 남아 있는 사람만이 그런 말을 합니다.”

그 말은 마녀의 대사였다.

동시에 슈샤니크의 말이었다.

푸리나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

“……마녀답게 엄청 세게 나오네.”

슈샤니크는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성문 안쪽에서 수십 권의 장부가 동시에 펼쳐졌다.

낡은 종이.

세금표.

배급 명단.

노역 편성표.

전사자 처리 목록.

피난민 흡수 기록.

성문 앞 병사들의 발밑에서 초록빛 선들이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실이 아니었다. 글자였다. 사람의 발목과 손목과 목에 감긴 행정문서의 문장들이었다.

식량 배급 조정 대상.

노동력 재분류.

방어 인원 전환.

피난민 흡수.

무명 사망 처리.

성벽 위의 초록빛이 격자처럼 갈라졌다.

성문, 창고, 배급소, 병상, 경비대, 피난민 대기열, 처벌 기록, 임시 거주구역.

모든 것이 하나의 관청처럼 정렬되었다.

《메가스 로고스테스 대서기관》.

검은 성은 마녀의 소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숨 쉬는 행정망이었다.

슈샤니크가 손가락을 한 번 움직이자, 성문 앞의 흙길이 측량선으로 나뉘었다. 누가 어디서 왔는지, 어느 손이 일할 수 있는지, 어느 아이가 보호 대상인지, 어느 노인이 이동 불능인지가 초록빛 격자 위에 떠올랐다.

《아슈카르하길》.

길 잃은 자들은 구제받았다.

동시에 분류되었다.

푸리나는 그 광경을 보며 숨을 삼켰다.

무서웠다.

하지만 단순히 잔혹해서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저 시스템은 실제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

피난민에게 배급권을 주고, 병자에게 병상을 배정하고, 떠돌이에게 임시 주소를 주고, 무명자를 명부 안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사람은 이름보다 먼저 항목이 되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장부 밖의 자유는 굶주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장부 안의 귀속은 적어도 내일의 빵을 보장하지요.”

초록 문장들이 병사들의 팔목과 목, 날개 밑을 감았다.

원작의 날개 달린 원숭이들.

그러나 이 무대에서 그들은 우스꽝스러운 원숭이가 아니었다. 날개가 붙은 병사들, 명령에 맞춰 날고, 명령에 맞춰 내려앉고, 명령에 맞춰 사람을 붙잡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굶주리지는 않았다.

상처는 치료되어 있었다.

대열은 정돈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건 좋지 않은데.”

그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명령 계통이 보입니다. 하지만 정상 지휘가 아닙니다. 장부와 배치표가 사람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습니다.”

레이튼이 말했다.

“지휘라기보다 귀속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먼저 적혀 있군요.”

하융은 창 하나를 열었다.

창 안에서 병사 하나가 무릎 꿇어 이름을 말하려다, 입에서 번호만 나오는 장면이 비쳤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성 안의 사람들은 이름으로 걷지 못하오.”

그때 푸리나 일행의 뒤쪽, 노란 길과 검은 성 사이의 그늘에서 가느다란 실이 하나 내려왔다.

검은 실.

그 실은 초록 문장과 달랐다.

명령하지 않았다.

묶지 않았다.

그저 끊어지지 않게 붙들었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이번 막의 배역 의상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무대복. 손목에는 인형사의 실타래. 하지만 그녀가 들어 올린 실들은 꼭두각시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실들은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 완전히 무대 아래로 가라앉지 않게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푸리나가 작게 말했다.

“아레.”

아레는 성을 보았다.

“좋지 않은 성이구나.”

슈샤니크가 성벽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실의 인형사.”

아레는 고개를 들었다.

“서쪽 마녀.”

두 사람은 짧게 서로를 보았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있었다.

죽은 자.

명령.

전쟁.

돌아갈 집.

돌아가지 못한 자.

아레가 먼저 말했다.

“저 아이들은 마녀의 병사가 아니란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아레의 검은 실이 그들의 발치로 내려갔다.

“너무 오래 명령에 묶여, 자기 이름을 잊은 배우들이지.”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배우라는 표현은 부정확합니다. 병력입니다. 방어 인원입니다. 성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배치 자원입니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 위에서 굳었다.

아레는 성문 앞의 초록 문장들을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병사의 팔목에 묶인 명령이 아니었다.

성의 식량표, 교대 장부, 처벌 기록, 도망자 명단, 방어선의 공포, 그리고 “나는 이름이 아니라 역할이다”라는 체념까지 이어진 그물이었다.

《천저의 그물추》.

아레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실의 끝이 어디에 가라앉는지.

그 실을 끊으면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한 명의 이름이 돌아왔을 때 성 전체의 침묵이 어디서 흔들리는지.

어느 장부를 찢으면 한 사람이 풀리는지.

어느 장부를 찢으면 백 명이 굶는지.

어느 명령을 끊으면 병사가 자유로워지는지.

어느 명령을 끊으면 그 병사가 서 있던 성벽이 무너져 다른 아이를 깔아버리는지.

아레는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실을 베지 않았다.

먼저 받쳤다.

“그래.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면 편하단다.”

아레의 목소리는 낮았다.

“사람을 번호로 부르고, 배치를 역할로 부르고, 피로를 효율로 부르고, 죽음을 소모로 부르면. 견딜 수 있게 되지.”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레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 가라앉는 곳까지 내려가 본 적 있니?”

슈샤니크의 얼굴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보았다.

마녀의 초록 망토 아래, 손가락이 한 번 접히는 것을.

슈샤니크가 손을 내렸다.

“포획.”

그 한 단어만으로 충분했다.

날개 달린 병사들이 노란 길 위로 쏟아졌다.

죠니가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도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말이 없어도 회전은 있었다.

“푸리나, 뒤로.”

“너도 너무 앞으로 나가지 마!”

“내가 앞에 안 나가면 누가 막아?”

아레가 검은 실을 펼쳤다.

“죠니 경, 죽이지 말거라.”

죠니는 낮게 웃었다.

“오늘 다들 나한테 그것만 부탁하네.”

날개 달린 병사 셋이 동시에 내려왔다.

한 명은 위에서, 한 명은 왼쪽에서, 한 명은 낮게 발목을 노렸다. 리투아니아 숲의 사냥과 달랐다. 이들은 숲이 아니라 명령으로 움직였다. 살아 있는 전술이라기보다 잘 정리된 절차처럼 움직였다.

죠니는 이를 악물었다.

“절차가 사람을 때리러 오면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그의 발밑에서 [여관:찰나]가 짧게 열렸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날개.

왼쪽에서 들어오는 창.

발목을 감는 초록 문장.

그 모든 것이 완성되기 전의 한순간.

《윤회보: 흐름의 보법》.

죠니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격 사이의 찰나를 밟고 앞으로 기울었다. 장대 끝이 위에서 내려오는 병사의 날개 관절을 두드렸다. 부러뜨리지 않았다. 접히게 했다. 왼쪽의 창은 장대의 회전으로 옆으로 밀었다. 낮게 들어온 병사의 손목은 발끝으로 밀어 궤도를 틀었다.

세 병사가 동시에 넘어졌다.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초록 문장은 끊어지지 않았다.

쓰러진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들의 눈은 비어 있었다.

아레가 손을 들었다.

검은 실이 그들의 그림자에 닿았다.

초록 문장은 명령을 당겼고, 검은 실은 이름이 있던 자리를 붙잡았다.

아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대는 누구였니?”

병사 하나의 몸이 멈췄다.

아주 짧게.

입술이 움직였다.

그러나 나온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서쪽 성 방어 인원 제삼열.”

그 순간, 성문 안쪽의 장부 하나가 저절로 펼쳐졌다.

청록빛 까마귀의 그림자가 그 병사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아레의 눈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아니란다.”

초록 문장이 다시 병사를 잡아당겼다.

병사는 고통스럽게 몸을 떨다가 다시 일어서려 했다.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잠시만요.”

그녀는 장부를 열었다.

언제 적었는지 모를 이름들이 빼곡했다. 아니, 그것은 푸리나의 무대에 들어온 뒤 새로 만들어진 장부였다. 검은 성 앞에서 쓰러진 자, 성문 앞에 서 있는 자, 초록 문장에 묶인 자들의 흔적이 페이지 위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레이의 장부는 슈샤니크의 장부와 달랐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사람을 기능으로 복원한다면, 그레이의 장부는 기능 아래 묻힌 사람을 다시 책임으로 불러냈다.

그레이의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가 아주 희미하게 열렸다.

검은 성의 돌바닥 위에, 비가 그친 뒤의 조용한 골목이 겹쳤다. 문마다 작은 등불이 켜져 있었고, 문패에는 희미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이름들은 원한으로 울부짖지 않았다. 그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조용히 빛났다.

그레이의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읽었다.

《이름 없는 이는 없습니다》.

“방어 인원 제삼열이 아닙니다.”

병사의 몸이 멈췄다.

그레이는 페이지를 더듬었다.

“이름은…… 아람. 원래는 성 서쪽 마구간 담당. 말굽을 잘 고쳤고, 왼쪽 손목에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습니다.”

병사의 손이 움찔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

그레이는 계속 읽었다.

“좋아하던 음식은 말린 무화과.”

초록 문장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리고…… 동생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그레이의 손끝이 장부의 빈 페이지를 눌렀다.

잉크가 번지듯, 짧은 편지의 첫 줄이 떠올랐다.

아니야,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걱정하지 마라. 다음 보급 때 말린 무화과를 조금 보내마.

아람의 입술이 떨렸다.

방어 인원 제삼열은 편지를 쓰지 않는다.

그러나 아람은 썼다.

《마지막 편지는 도착해야 합니다》.

그레이는 그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끝까지 읽으면, 아람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말했다.

“편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아직 단순 방어 인원이 아닙니다. 도착해야 할 말이 남은 사람입니다.”

초록 문장이 흔들렸다.

슈샤니크가 성벽 위에서 말했다.

“그만.”

그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끊기지 않았다.

“그는 자원이 아닙니다.”

아레의 검은 실이 병사의 발목을 감았다.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쓰러지지 않게 하려고.

그레이가 말했다.

“그는 아람입니다.”

그 순간 병사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아람.”

초록 문장 하나가 끊어졌다.

성벽 위의 슈샤니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 전체가 아주 작게 흔들렸다.

곧바로 《까마귀의 연대기》가 반응했다.

성문 안쪽의 다른 장부가 펼쳐졌다. 그 위에 아람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가, 붉은 선으로 지워졌다. 옆에 새 문장이 적혔다.

방어 인원 제삼열. 복귀.

아람의 눈에서 막 돌아왔던 빛이 다시 흐려지려 했다.

그레이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덮고 있습니다.”

레이튼이 눈을 들었다.

“그러면 이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의 발밑에 낡은 서가의 그림자가 아주 얇게 펼쳐졌다.

[여관:문답의 서재].

이번에는 성 전체가 아니라, 슈샤니크의 장부와 그레이의 장부 사이. 그 작은 틈에 펼쳐진 서재였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잠시 떠올랐다. 방어 인원. 제삼열. 복귀. 자원. 기능. 배치.

레이튼이 말했다.

“그 이름이 덮인 이유를 질문해야 합니다.”

성문 앞 종이 조각 위에 물음표가 생겼다.

누가 아람을 방어 인원 제삼열이라 불렀는가?

그 이름은 무엇을 살리기 위해 붙었는가?

그리고 무엇을 지우기 위해 유지되는가?

문장이 흔들렸다.

그 틈을 아레가 보았다.

《천저의 그물추》는 다시 깊이를 쟀다.

아람이라는 이름이 돌아오면, 그가 맡고 있던 경계 구역의 빈자리가 생긴다. 그 빈자리를 성은 공포로 메우려 한다. 공포가 다른 병사 셋에게 옮겨가고, 그 셋이 무너지면 성문 오른쪽 방어선이 내려앉는다. 그러면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이 도망치다가 서로를 짓밟는다.

아레는 그 추락 지점을 보았다.

그래서 검은 실을 엮었다.

《끊기지 않는 실타래》.

아람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른 병사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대신 이름을 되찾은 이들이 서로 기대어 서도록 만들었다. 방어선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는 줄. 명령이 아니라, 서로를 놓지 않는 감각.

아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다시 이름이 나왔다.

“아람.”

이번에는 장부가 그 이름을 다시 덮지 못했다.

레이튼이 말했다.

“이름이 답이 되려면, 그 이름이 놓일 자리도 필요합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적겠습니다.”

그녀는 자기 장부에 새 줄을 썼다.

아람. 성 서쪽 마구간 담당. 임시 보호. 가족 확인 필요. 미전달 편지 수색. 배급 누락 가능성 확인. 같은 사유 반복 방지.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도록》.

그 문장이 적히자, 그레이의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안에서 작은 문패 하나가 켜졌다.

아람은 방어 인원이 아니라, 돌아갈 주소가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성문 앞의 공기가 변했다.

슈샤니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흥미롭군요.”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성 안쪽의 장부들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까마귀의 연대기》가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청록빛 까마귀들이 성벽을 따라 내려앉았다. 까마귀들은 병사들의 어깨 위에 앉고, 종이 조각 위에 발톱을 박고, 지워진 이름 위에 다시 기능명을 찍었다.

노동력 재분류.

보급 운반.

피난민 흡수.

성벽 보수.

전사자 처리.

무명 사망.

슈샤니크는 말했다.

“이름을 되찾아도 성은 기능을 요구합니다. 그들이 빠져나가면 누가 성벽을 고칩니까? 누가 식량을 나릅니까? 누가 병자를 옮깁니까? 누가 다음 공격을 막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마녀의 저주처럼 들리지 않았다.

재상의 보고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아팠다.

“돌아갈 집을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집을 다시 세우려면 누군가가 비용을 적어야 합니다.”

그때 슈샤니크의 눈에 초록빛이 깊어졌다.

아니, 청록빛이었다.

《청록빛 까마귀》.

슈샤니크의 시야에 성문 앞의 장면만이 아니라, 과거에 무너진 여러 행정도시의 폐허가 겹쳤다.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이 보급 명단에서 빠져 굶어 죽었던 기록.

해방된 피난민들이 보호 주소 없이 흩어졌던 기록.

선의가 절차를 이기고, 다음 날 절차가 사라져 더 많은 사람이 죽었던 기록.

귀족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고 떠난 뒤, 장부가 비어 남은 아이들이 다시 팔려가던 기록.

[사체의 지혜].

슈샤니크는 그레이의 선의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 선의가 실패했던 폐허의 결말을 먼저 읽었다.

“그 방식은 이미 실패했습니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초록빛 까마귀들이 그레이의 장부 위로 날아들었다. 그레이가 적은 임시 보호, 가족 확인, 미전달 편지 수색, 배급 누락 확인 항목들이 하나씩 흔들렸다.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레이튼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그 실패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슈샤니크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물러서지 않았다.

“선의의 실패입니까? 절차의 부재입니까? 보급망의 단절입니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들이 서로의 주소가 될 수 없게 만든 정치의 실패입니까?”

[여관:문답의 서재]의 책장들이 열렸다.

레이튼은 답을 주지 않았다.

폐허의 이름을 하나로 고정하지 못하게 했다.

“실패라는 이름이 너무 빠르면, 배움은 죽습니다.”

까마귀들의 발톱이 잠시 멈췄다.

그 찰나, 하융이 창을 열었다.

[여관:비껴간 창].

한 창에서는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이 배급 명단에서 빠져 굶었다.
다른 창에서는 자유를 얻은 피난민들이 보호 주소 없이 흩어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그레이가 이름을 적었지만, 장부가 불타 모든 책임이 사라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아레가 너무 오래 붙들어, 해방된 사람들이 다시 다른 실에 매였다.

하융은 그 모든 실패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창 하나를 찾았다.

이름을 되찾은 자들이 서로의 주소가 되어주는 가능성.

성의 기능표가 무너지는 대신, 임시 보호 명부로 바뀌는 가능성.

하융은 말했다.

《선택되지 않은 행군》.

“그레이 양. 이름만 적지 마시오. 서로를 확인할 줄을 만드시오.”

그레이는 눈을 들었다.

하융은 이어 말했다.

“아레 님의 실이 그 줄을 받치고 있소. 죠니 경이 시간을 벌고 있소. 레이튼 경이 이름을 열어두고 있소. 지금이라면 기능표를 보호 명부로 바꿀 수 있소.”

그레이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장부에 새 항목을 만들었다.

임시 보호 명부.

상호 확인자.

배급 연결.

가족 수색.

사망 사유 재조사.

같은 이유로 다시 죽지 않도록.

슈샤니크의 까마귀들이 다시 날아들었다.

그때 아레의 실끝에 작은 형상이 맺혔다.

병사가 아니었다.

병사가 되기 전의 한 장면이었다.

말굽을 고치던 손.

동생에게 편지를 접어주던 저녁.

마구간 뒤편에서 몰래 말린 무화과를 먹던 소년.

마가트로이드가의 소환술은 죽은 자를 되살리지 않았다.

살아 있는 자를 과거에 가두지도 않았다.

다만 사라진 형상과 역할의 잔향을, 이름이 돌아올 만큼만 불러왔다.

아레가 말했다.

“보렴. 그대는 이것이었단다. 병력표보다 먼저.”

아람이 그 장면을 보았다.

그는 자기 손을 보았다.

손목의 화상 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옆의 병사를 붙잡았다.

“마리암.”

그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아람이 말했다.

“내가 확인한다.”

그레이의 장부에 줄이 생겼다.

마리암 — 상호 확인자: 아람.

아레는 조용히 웃었다.

“그래. 그렇게 서로를 붙들렴.”

그러나 그녀의 실이 너무 깊이 감기려는 순간,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아레 님.”

아레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너무 오래 붙들면, 그분들은 다시 다른 이름으로 묶입니다.”

아레는 눈을 감았다.

“알고 있단다.”

그녀는 실을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그래서 놓아주는 순간까지 기억하려는 거야.”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여관:극장]의 조명이 성문 앞에 켜졌다.

완전한 전개는 아니었다. 서쪽 마녀의 성은 너무 닫혀 있었고, 초록 문장의 명령은 너무 촘촘했다. 그러나 성문 앞, 노란 길의 끝, 이름을 잃은 배우들이 쓰러지는 그 작은 공간만큼은 무대가 되었다.

푸리나는 선언했다.

“이곳은 처형장이 아니야.”

노란 길이 무대 바닥처럼 울렸다.

“이곳은 행정표의 끝도 아니고, 마녀의 감옥도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어졌다.

“이곳은 이름을 잃은 배우가, 자기 이름으로 다시 인사하는 장면이야.”

《세상은 무대요, 모든 이는 주인공일지니!》

성문 앞의 공간이 바뀌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단순 포획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퇴장 직전의 배우였다.

아직 자기 이름을 말하지 못한 배우.

아직 인사하지 못한 배우.

아직 무대 아래로 떨어지면 안 되는 배우.

죠니가 웃었다.

“좋아. 그런 장면이면 좀 뛸 만하지.”

하지만 슈샤니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성벽 위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마녀의 초록 망토 아래에서, 다른 위엄이 드러났다.

그것은 니케아의 관료복도, 노예 관료의 생존술도 아니었다.

더 오래된 것.

아르메니아의 왕통과 귀족 질서, 파흘라부니의 피, 아르샤쿠니의 그림자.

《아르샤쿠니의 위엄》.

슈샤니크가 푸리나를 내려다보았다.

“헤툼의 가지에서 핀 꽃이여.”

푸리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슈샤니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날카로웠다.

“그대가 집이라 부르는 아르메니아의 뿌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말 잊으셨습니까?”

그 말은 칼이었다.

마녀의 저주가 아니라, 족보와 정통성과 혈통의 칼.

헤툼의 왕관을 푸리나의 머리에서 벗기고, 오래된 파흘라부니의 가지 아래로 끌어내리려는 말.

푸리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레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레이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슈샤니크의 질문 구조를 살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 말, 기분 나쁜데.”

푸리나는 천천히 웃었다.

“가지라.”

그녀는 자기 은구두를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슈샤니크를 보았다.

“맞아. 나는 어딘가에서 뻗은 가지일지도 몰라.”

슈샤니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푸리나는 말했다.

“하지만 가지가 꽃을 피우면, 그 꽃 아래에서 쉬는 사람들도 생겨.”

그녀의 목소리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뿌리를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꽃이 핀 자리를 없던 것으로 만들 생각도 없어.”

그 말에 성벽 위 초록빛이 흔들렸다.

슈샤니크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사이로 날개 달린 병사들이 다시 내려왔다.

이번에는 초록 문장이 더 깊게 박혀 있었다. 단순 병사가 아니었다. 성의 중심 명령에 묶인 자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끊기지 않는 실이었다.

아레가 낮게 말했다.

“저 실은 깊구나.”

죠니가 장대를 잡았다.

“그럼 끊어야지.”

아레가 그를 막았다.

“아니. 먼저 떨어질 자리를 보아야 한단다.”

죠니가 입을 다물었다.

아레의 눈이 검은 성 전체를 훑었다.

《천저의 그물추》.

초록 문장 하나를 끊으면, 성문 위의 보급표가 흔들린다.

보급표가 흔들리면, 성 안쪽 피난민 식량 배분이 깨진다.

식량 배분이 깨지면, 이름을 되찾은 사람들이 자유를 얻는 대신 굶는다.

초록 문장 둘을 끊으면, 날개 달린 병사 다섯이 추락한다.

그들을 받치지 않으면, 이름을 되찾은 순간 다시 “사망 처리”가 된다.

초록 문장 셋을 끊으면, 슈샤니크의 《까마귀의 연대기》가 자동 복원한다.

그 자동 복원을 막으려면, 레이튼이 기능명을 질문으로 되돌리고, 그레이가 이름과 책임을 새로 적어야 한다.

아레는 그 모든 무게를 보았다.

비극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리라.

그녀는 손을 폈다.

“죠니 경. 자르는 것은 그대가 해주렴. 다만 내가 말하는 순서대로.”

죠니는 장대를 고쳐 잡았다.

“좋아. 그런 건 익숙해.”

하융이 창을 열었다.

창 안에서 죠니가 너무 빨리 뛰어들어 날개 달린 병사들에게 둘러싸이는 장면이 보였다. 다른 창에서는 그레이가 이름을 읽기 전에 종이가 불탔다. 또 다른 창에서는 푸리나가 슈샤니크에게 손을 뻗었다가 초록 문장에 발목을 잡혔다.

하융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면은 안 되오.”

죠니가 말했다.

“그럼?”

하융은 눈을 좁혔다.

“한 번 실패한 장면을 밟고 가야 하오. 그러나 죽은 장면을 끌어오면 안 되오. 박자만 가져와야 하오.”

레이튼이 말했다.

“기능이라는 이름을 잠시 열어두겠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그 사이 이름과 보호 항목을 적겠습니다.”

아레가 검은 실을 펼쳤다.

“나는 떨어지는 아이들을 받으마.”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대가 무너지지 않게 할게.”

슈샤니크의 장부들이 다시 명령을 뱉어내려 했다.

그 순간 아레의 검은 실 끝에 깊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정지.

침묵.

쇠퇴.

경계.

《암영과의 계약》.

아레는 슈샤니크의 장부를 찢지 않았다.

다만 그 장부가 다음 명령을 뱉어내려는 순간, 문장과 문장 사이에 침묵을 끼워 넣었다.

“너무 오래 말했구나.”

아레가 속삭였다.

“이제 잠시 쉬렴.”

초록 문장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명령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부는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 줄은 한 박자 늙었다.

죠니가 달렸다.

《윤회진: 나선행군》.

죠니의 발걸음이 노란 길 위에서 원을 그렸다. 이번에는 리투아니아 숲에서처럼 포위를 비트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는 떨어지는 날개 달린 병사들의 낙하 궤도를 끌어당기듯 돌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장대가 무기를 밀어내고, 날개를 접고, 초록 문장이 당기는 방향을 바꾸었다.

슈샤니크의 행정은 반복이었다.

이름을 되찾는다.

기능으로 복원된다.

다시 이름을 잃는다.

그러나 죠니의 반복은 달랐다.

같은 장면이 반복되더라도, 나선은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죠니는 그 반복을 조금씩 옆으로 밀었다.

아직 《영원할 찰나》에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직전의 박자였다.

초록 문장이 병사의 이름 위에 다시 내려앉으려는 순간, 죠니의 회전이 그 찰나를 붙잡았다.

“그레이, 지금.”

그레이는 망설이지 않았다.

“사하크.”

초록 문장 하나가 흔들렸다.

아레의 검은 실이 받쳤다.

“루신.”

또 하나.

“아니.”

그레이가 멈췄다.

그녀는 장부를 다시 보았다.

“이 이름은 잘못 적혔습니다.”

레이튼이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합니다. 누가 잘못 적었습니까?”

성문 앞 종이 조각 하나가 뒤집혔다.

그 아래에 다른 이름이 있었다.

그레이가 읽었다.

“아나히트.”

날개 달린 병사 하나가 비명을 삼켰다.

그것은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오래 닫혀 있던 목이 자기 이름을 처음 다시 통과시키는 소리였다.

아레의 실이 그녀를 받았다.

“어서 오렴, 아나히트.”

초록 문장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슈샤니크가 성벽 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슈샤니크!”

서쪽 마녀가 그녀를 보았다.

“당신은 마녀가 아니야.”

슈샤니크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배역을 당신이 정합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배역에 숨어 있다는 건 보여.”

침묵.

성문 앞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죠니는 계속 병사들을 밀어내고 있었고, 하융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능성의 창을 닫고 열었다. 그레이는 이름을 읽고, 레이튼은 장부 위의 잘못된 이름들을 질문으로 되돌리고, 아레는 쓰러지는 이들을 받쳤다.

그 모든 소리 위로 푸리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당신은 돌아가고 싶었지.”

슈샤니크의 손이 멈췄다.

“아르메니아로.”

초록빛이 흔들렸다.

“폐한 여관으로.”

성벽 위의 마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근데 돌아갈 집이 없어졌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미웠던 거야?”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푸리나, 좀 세다.”

그레이가 작게 말했다.

“폐하…….”

하지만 슈샤니크는 웃었다.

아주 희미하게.

“아니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미운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성벽 아래를 보았다.

이름을 되찾는 병사들.

그레이의 장부.

아레의 검은 실.

푸리나의 은구두.

“부러운 것입니다.”

그 말이 내려왔다.

“그리고 우스운 것입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곳 어딘가에서 아주 오래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 새 불을 피우겠다는 말. 이름을 되찾겠다는 말. 모두 좋은 말입니다.”

그녀는 초록 망토를 붙잡았다.

“하지만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성 위의 초록빛이 다시 번졌다.

“기도해도 죽었습니다. 항복해도 죽었습니다. 세금을 바쳐도 죽었습니다. 아이들을 숨겨도 죽었습니다. 여관을 열어도 죽었습니다.”

푸리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슈샤니크의 목소리는 조금도 커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깊게 들어왔다.

“그래서 저는 닫았습니다.”

아레가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여관을?”

슈샤니크는 대답했다.

“저 자신을.”

초록빛이 성벽을 타고 흘렀다.

“그 뒤에는 장부만 남았습니다. 장부는 울지 않습니다. 장부는 미안해하지 않습니다. 장부는 죽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의 손이 떨렸다.

슈샤니크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니 조심하십시오, 양철 나무꾼. 심장이 있는 장부는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그레이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이름은 적겠습니다.”

슈샤니크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때 푸리나가 성문 쪽으로 걸었다.

초록 문장들이 그녀의 발목을 향해 움직였다.

아레가 말했다.

“푸리나.”

죠니가 외쳤다.

“너무 가까워!”

하융이 창을 열었다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길은—”

푸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은구두가 초록 문장 위에 닿았다.

성은 그녀를 포획하려 했다.

그러나 푸리나는 이번에는 뛰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슈샤니크.”

마녀는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왜 손을 내밉니까?”

푸리나는 대답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내려오려면, 누가 손을 잡아줘야 할 때도 있으니까.”

슈샤니크는 차갑게 말했다.

“저는 내려갈 생각이 없습니다.”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그럼 지금은 그냥, 손이 여기 있다는 것만 기록해둬.”

아카식이 작게 웃었다.

“좋은 말이네.”

성벽 위의 슈샤니크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푸리나를 향해 들어 올렸던 손도, 더 이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한순간.

아레가 모든 검은 실을 펼쳤다.

“지금이구나.”

검은 실은 초록 문장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름을 되찾은 자들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받쳤다.
무릎 꿇는 자를 받쳤고, 울음을 참지 못하는 자를 받쳤고, 자기 이름을 다시 말하다 목이 막힌 자를 받쳤다.

아레는 병사들을 자신의 아이로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귀속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주 잠깐, 그녀는 그들을 마가트로이드의 그물 가장자리에 앉혔다.

“내 아이는 아니어도 좋단다.”

검은 실이 조용히 떨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대들이 잊히는 것은 내가 허락하지 않으마.”

검은 실은 혈통이 아니라 기억을 이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이름들을 읽었다.

레이튼은 잘못 붙은 이름들을 질문으로 되돌렸다.

하융은 실패한 가능성들을 닫고, 무너지지 않은 한 줄의 행군만 현재에 겹쳤다.

죠니는 장대를 돌려 성문 앞의 마지막 초록 문장 다발을 밀어냈다.

그리고 푸리나는 성문 앞에서, 조용히 선언했다.

“이 장면은 끝났어.”

[여관:극장]의 조명이 낮아졌다.

“퇴장할 배우는 퇴장하고.”

아레의 실이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을 노란 길 쪽으로 이끌었다.

“남을 배우는, 자기 이름으로 남아.”

초록 문장이 하나씩 끊어졌다.

성문이 열렸다.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열렸다.

슈샤니크는 성벽 위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서쪽 마녀의 초록 망토는 아직 그녀의 어깨에 있었다.

하지만 초록빛은 조금 흐려졌다.

분장 아래의 얼굴이 조금 드러난 것처럼.

푸리나는 성문 안쪽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 순간, 슈샤니크가 말했다.

“도로시.”

푸리나는 멈췄다.

슈샤니크는 은구두를 바라보았다.

“그 구두.”

“응.”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 줄 수 있습니까?”

푸리나는 잠시 자기 발을 보았다.

“아직은 모르겠어.”

“그렇습니까.”

슈샤니크는 천천히 말했다.

“돌아가십시오.”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

“돌아갈 곳이 남아 있을 때.”

그 말은 저주가 아니었다.

축복도 아니었다.

부러움과 경고와, 아주 희미한 기도가 섞인 말이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성문 안쪽의 초록빛이 그녀 뒤로 길게 드리웠다.

그녀는 아직 서쪽 마녀였다.

그러나 푸리나는 알았다.

마녀의 가면은 조금 젖었다.

아직 녹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완전히 단단하지도 않았다.

아레가 푸리나 곁으로 걸어왔다.

“그대답구나.”

“나?”

“응. 손을 내밀고, 기다리는 쪽.”

푸리나는 성벽 위를 보았다.

“잡아주진 않았어.”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도 손이 있다는 걸 보았겠지.”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럼 충분한 걸까?”

아레는 잠시 침묵했다.

“충분하진 않겠지.”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레는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을 향해 검은 실을 거두며 말했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란다.”

그레이가 조용히 장부를 닫았다.

닫힌 장부 안쪽에서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하나둘 낮아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잠드는 것이었다. 이름이 제자리를 얻을 때까지, 문패는 그곳에서 기다릴 것이다.

레이튼은 허수아비 모자를 바로잡았다.

죠니는 사자 갈기에서 초록 문장 조각을 떼어냈다.

“다음엔 좀 밝은 막이면 좋겠는데.”

하융은 성 안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길은 밝을 수도 있소.”

푸리나가 물었다.

“정말?”

하융은 창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빛나는 도시가 보였다.

에메랄드 성.

그러나 그 빛은 완전하지 않았다.

색유리.

렌즈.

비어 있는 보좌.

자주빛 문지기.

어린 공주.

책을 든 교사.

별을 읽는 역무원.

하융은 창을 닫았다.

“밝다고 해서 가볍다는 뜻은 아니오.”

아카식이 즐겁게 말했다.

“좋아. 다음 장면도 아주 기대되는군.”

푸리나는 노란 길을 보았다.

검은 성을 지나 길은 다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노란 길 위에는 이름을 되찾은 배우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성벽 위의 슈샤니크를 한 번 더 보았다.

서쪽 마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은구두를 보고 있었다.

아주 오래.

마치 그 빛이 자신이 닫아버린 여관의 문틈에서 새어 나오던 마지막 불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푸리나는 몸을 돌렸다.

“가자.”

죠니가 물었다.

“에메랄드 성으로?”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즈를 만나야지.”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질문해야겠군요. 위대한 마법사란 무엇인가.”

그레이가 장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 성의 시민 명부도 확인해야 합니다.”

죠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레이, 너는 어디 가도 장부구나.”

그레이는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됐네.”

아레는 검은 실을 거두며 뒤에 남았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아레는 같이 안 가?”

아레는 이름을 되찾은 병사들을 보았다.

“나는 이 아이들이 완전히 쓰러지지 않게 조금 더 있어야 한단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레는 푸리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가렴, 도로시.”

푸리나는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웃었다.

“응.”

노란 길은 다시 빛났다.

검은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서쪽 마녀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성문은 열렸고, 몇몇 배우는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그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마녀를 녹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든 마녀를 물로 녹일 수는 없다.

어떤 마녀는, 아주 오래전에 닫힌 문을 아직 손에 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때로 물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다.

손.

이름.

그리고 아직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부러워하는 사람 앞에서도, 그 말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

노란 길은 에메랄드 성을 향해 이어졌다.

그곳에서는 빛나는 도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빛나는 도시는, 어둠보다 쉬운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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