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4여관◆zAR16hM8he(046ff5c8)2026-05-08 (금) 14:05:21
좋아. 이전 장면이 두 대리인의 사상적 대담이었다면, 이번에는 훨씬 사적으로 가서
**“죽은 여왕과 살아 있는 여왕이, 잠들기 전 조용히 차를 마시는 장면”**처럼 잡아볼게.
---
엽편 — 황혼의 포도주와 식지 않은 차
타마르 여왕의 농원에는 밤이 오지 않았다.
늘 황혼이었다.
그래서 푸리나 헤툼은 처음 그곳에 머물렀을 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들 시간인 것 같은데,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 같고.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앉아 있어도 될 것 같고.
그 애매한 빛이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답군요.”
타마르가 말했다.
푸리나는 포도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낮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는 듯이 잔을 바라보고 있답니다.”
푸리나는 자기 앞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식으면 맛없잖아.”
“죽은 자는 그런 것에 조금 무뎌진답니다.”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녀 앞에는 차가 아니라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붉다기보다 황혼빛에 가까운 색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잔을 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푸리나는 한 모금 차를 마셨다.
“너는 안 마셔?”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건 거의 레이튼 같은 대답인데.”
“그 질문 많은 신하 말인가요?”
“응. 너랑 만나면 밤새 이야기할걸. 아니, 여긴 밤이 안 오니까…… 황혼새?”
타마르는 작게 웃었다.
“황혼새. 귀여운 말이군요.”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도나무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자들도 멀리 있었다.
시종도, 신하도, 호위도 없었다.
그레이가 있었다면 분명히 “군주님, 타국 군주와 단둘이 계시는 것은 외교적으로 위험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타국 왕궁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오래된 방 같았다.
조용하고, 묘하게 따뜻하고, 조금 슬픈 방.
푸리나는 문득 말했다.
“너는 외롭지 않아?”
타마르의 손가락이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대는 사적인 자리에서 참으로 곧장 묻는군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빙빙 돌려 말해야 하니까.”
“그대가요?”
“나도 할 때는 해.”
“그렇군요. 짐은 아직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나 놀린 거지?”
“조금요.”
타마르는 나른하게 웃었다.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결국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지나간 뒤, 타마르는 포도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푸리나는 조용해졌다.
“짐의 곁에는 늘 망자들이 있답니다. 이름을 잃은 자, 죄를 내려놓지 못한 자, 울음을 삼키지 못한 자,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는 자.”
타마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나가는 손님이지요. 농원은 그들을 붙잡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쉬게 하고, 덜어내고, 보내는 곳이지요.”
“그러니까…… 네 곁에 오래 남는 사람은 별로 없구나.”
“예.”
타마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음의 여관 주인은 손님을 오래 붙잡으면 안 된답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뭐라도 말했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든가.
“그럼 내가 자주 놀러올게!”라든가.
“좋아, 황혼 축제를 열자!”라든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타마르는 죽은 여왕이었다.
그녀의 외로움은 위로 몇 마디로 건드리기에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푸리나는 그냥 물었다.
“그럼 가끔은 누가 남아줬으면 좋겠어?”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처음으로 조금 놀란 듯했다.
“……그 질문은 조금 잔인하군요.”
푸리나는 움찔했다.
“미안.”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잔인하다는 것은 나쁘다는 뜻만은 아니지요. 잘 익은 포도도 처음에는 껍질이 터지는 법이랍니다.”
“그 비유,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어.”
“둘 다겠지요.”
타마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가끔은 남아줬으면 좋겠답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주 가끔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짐의 곁에 남는다는 것은, 그가 황혼을 넘지 못했다는 뜻일 때가 많지요. 그러니 짐은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답니다.”
타마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죽은 여왕의 욕심이란 대개 그런 모양이지요.”
푸리나는 타마르를 한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나는 가끔 올게.”
타마르가 눈을 깜빡였다.
“그대는 아직 산 자입니다.”
“알아.”
“산 자는 농원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답니다.”
“오래 안 머물게.”
“그대의 신하가 알면 화낼 텐데요.”
“그레이는 늘 화내.”
“좋은 신하군요.”
“응. 아주 좋은 신하야.”
푸리나는 찻잔을 들고, 조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여관좌의 휴식 대리인이잖아. 가끔 안식 대리인이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어.”
타마르는 잠시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나른하고, 부드럽고, 아주 조금 쓸쓸했다.
“그대는 참 이상한 어린양이군요.”
“어린양은 빼달라니까.”
“그럼 이상한 극장주.”
“그건 좋아.”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포도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서 어느 망자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황혼 너머로 걸어갔다. 타마르는 그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눈빛이 아주 부드러웠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며 물었다.
“보낼 때마다 슬퍼?”
“항상은 아니랍니다.”
“그럼?”
“어떤 이는 보내며 안도하고, 어떤 이는 보내며 분노하고, 어떤 이는 보내며 오래 침묵하게 되지요.”
타마르는 잔을 들었다.
“하지만 슬픔은 자주 찾아온답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익숙해진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건 다행이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다행?”
“응.”
푸리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네가 아무렇지 않다고 했으면, 조금 무서웠을 것 같아.”
타마르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대는 짐이 아직 슬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군요.”
“응.”
“그대는 죽은 자에게도 산 자의 흔적을 찾는군요.”
“나쁜가?”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눈을 감았다.
“조금 따뜻하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냥…… 나는 아직 네가 완전히 끝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짐은 죽은 사람인데요.”
“알아. 그런데 죽은 사람이면서도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내고, 슬퍼하고, 가끔 놀리고, 포도주도 안 마시면서 들고 있잖아.”
푸리나는 타마르를 똑바로 보았다.
“그럼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타마르의 미소가 희미해졌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순간, 푸리나는 이상하게도 황혼이 조금 더 조용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마침내 타마르가 말했다.
“그대는 위험한 말을 하는군요.”
푸리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런 뜻은—”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짐을 산 자처럼 여기지는 마세요. 그것은 짐에게도, 그대에게도 좋지 않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타마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짐을 단지 끝난 자로만 여기지 않은 것은, 고맙군요.”
푸리나는 조금 안심한 듯 웃었다.
“그럼 됐어.”
“그대는 늘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나요?”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래.”
“그레이라는 신하가 고생하겠군요.”
“엄청.”
두 사람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편한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과자를 집었다. 조지아식 꿀 과자였다. 그녀는 한 입 먹고 눈을 크게 떴다.
“맛있다.”
타마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지요?”
“응. 이거 그레이한테 가져가도 돼?”
“산 자의 여관에 선물로 가져가고 싶다면, 그러세요.”
“죠니는 한입에 먹을 것 같고, 레이튼은 맛의 구조를 질문할 것 같고, 하융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달았소’라고 할 것 같아.”
타마르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대의 사람들은 꽤 소란스럽군요.”
“응.”
푸리나는 과자를 하나 더 집었다.
“좋은 사람들이야.”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군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응.”
그 대답은 장엄하지 않았다.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짧고 솔직했다.
“응. 사랑해.”
타마르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왕이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나요?”
“사적인 자리잖아.”
“그렇군요.”
타마르는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마셨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드디어 마셨네.”
“그대가 너무 산 자처럼 굴어서, 짐도 조금 따라해보았답니다.”
“어때?”
타마르는 잠시 포도주 맛을 음미했다.
“아직도 황혼 맛이 나는군요.”
“맛있다는 뜻이야?”
“그런 뜻이랍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타마르.”
“예.”
“너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타마르의 눈빛이 조금 멀어졌다.
“있었답니다.”
“지금도?”
“죽음은 사랑을 없애지 못하지요.”
그녀는 포도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만 사랑의 형태를 바꿀 뿐이랍니다. 산 자의 사랑은 붙잡고 싶어 하고, 죽은 자의 사랑은 보내야 할 때를 배워야 하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나는 잘 못할 것 같아.”
“무엇을요?”
“보내는 거.”
“그대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니까요.”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산 자는 먼저 붙잡는 법을 배워야 한답니다. 손을 잡고, 이름을 부르고, 아직 가지 말라고 말하고, 차를 식기 전에 마시라고 재촉하고.”
푸리나는 웃었다.
“그거 완전 그레이인데.”
“좋은 사람이라 했지요?”
“응.”
“그렇다면 배워두세요. 그대에게는 아직 붙잡아야 할 손이 많답니다.”
푸리나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황혼빛이 비쳤다.
자기 얼굴도 비쳤다.
조금 낯설었다.
타마르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푸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언젠가 너무 늦게까지 붙잡게 될까 봐.”
타마르는 조용히 들었다.
“막이 닫혔는데도, 내가 계속 앙코르를 외치면 어떡하지?”
그 말은 작았다.
공적인 자리의 푸리나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늘 사람들에게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막이 닫혔을 때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타마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짐이 말해주겠지요.”
“뭐라고?”
타마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린 극장주. 그 사람은 충분히 공연했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화낼지도 몰라.”
“그럴 수 있겠지요.”
“울지도 몰라.”
“그것도 괜찮답니다.”
“너한테 막 따질 수도 있어. 왜 데려가냐고.”
“짐은 익숙하답니다.”
타마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산 자들은 늘 죽음에게 화를 내지요. 짐은 그 화를 미워하지 않는답니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이상하게 다정해.”
“죽음이 언제나 차가워야 한다고 누가 정했을까요?”
“레이튼이 좋아할 질문이네.”
“그대도 좋아하는 듯한데요.”
“조금.”
푸리나는 다시 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이미 조금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타마르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겠지요.”
“응.”
“그렇다면 그들이 죽는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사랑해야 한답니다.”
푸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어려운데.”
“예.”
타마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 어렵답니다. 짐도 오래 걸렸지요.”
“성공했어?”
“완전히는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는 포도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짐도 여전히 어떤 영혼은 조금 더 붙잡고 싶답니다. 어떤 이름은 황혼 너머로 보내기 싫고, 어떤 목소리는 포도잎 사이에 더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지요.”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손님의 발목을 잡으면, 그곳은 더 이상 여관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보내는구나.”
“예.”
“사랑해서?”
“예.”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는 살게 하는 사랑을 맡았고, 짐은 쉬게 하는 사랑을 맡았답니다.”
푸리나는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럼 우린 둘 다 사랑이네.”
타마르는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말은 조금 낯간지럽군요.”
푸리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겼다.”
“무엇을요?”
“죽은 여왕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그대는 참 무례한 어린양이군요.”
“어린양 빼.”
“무례한 극장주.”
“그건 인정.”
둘은 다시 웃었다.
황혼의 포도밭에서, 웃음소리는 오래 퍼지지 않았다.
포도잎 사이로 스며들어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뒤 타마르가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지요.”
푸리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황혼인데?”
“그대의 나라에는 밤이 올 테니까요.”
“그레이가 걱정하겠네.”
“그레이라는 이는 늘 걱정할 듯하군요.”
“맞아.”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마르는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안에는 꿀 과자가 들어 있었다.
“그대의 사람들에게 가져가세요.”
푸리나는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그리고 그대도 먹으세요. 산 자는 단 것을 먹어야 한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는 맛을 기억하지요.”
푸리나는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타마르.”
“예.”
“다음에 또 와도 돼?”
타마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요.”
“응. 오래는 안 있을게.”
“그리고 올 때마다 살아 있는 냄새를 잔뜩 묻히고 오세요.”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살아 있는 냄새?”
“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고 투덜대고, 선물을 너무 많이 들고 오고, 신하들이 걱정할 만한 일을 조금 하고, 아직 막이 닫히지 않은 사람처럼 걸어오라는 뜻이랍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건 자신 있어.”
“그럴 것 같군요.”
타마르는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가세요, 킬리키아의 극장주. 그대의 무대는 아직 소란스러울 테니까요.”
푸리나는 돌아서다가, 다시 한 번 타마르를 보았다.
이번에는 장엄한 인사도, 여왕다운 예법도 없었다.
그냥 손을 흔들었다.
“또 올게, 타마르.”
타마르는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맞이하겠답니다.”
“그거면 충분해.”
푸리나는 황혼의 문을 지나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포도농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타마르는 한동안 빈 찻잔과 포도주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는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 온기를 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죽은 여왕은 그 작은 온기를 오래 기억했다.
“참으로……”
타마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란스러운 손님이군요.”
포도나무가 황혼 속에서 흔들렸다.
멀리서 망자 하나가 조용히 길을 건넜다.
타마르는 다시 자신의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마셨다.
황혼의 맛이 났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식지 않은 차의 향도 섞여 있는 듯했다.
**“죽은 여왕과 살아 있는 여왕이, 잠들기 전 조용히 차를 마시는 장면”**처럼 잡아볼게.
---
엽편 — 황혼의 포도주와 식지 않은 차
타마르 여왕의 농원에는 밤이 오지 않았다.
늘 황혼이었다.
그래서 푸리나 헤툼은 처음 그곳에 머물렀을 때,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들 시간인 것 같은데,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 같고.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앉아 있어도 될 것 같고.
그 애매한 빛이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답군요.”
타마르가 말했다.
푸리나는 포도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낮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는 듯이 잔을 바라보고 있답니다.”
푸리나는 자기 앞의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식으면 맛없잖아.”
“죽은 자는 그런 것에 조금 무뎌진답니다.”
타마르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녀 앞에는 차가 아니라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붉다기보다 황혼빛에 가까운 색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잔을 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푸리나는 한 모금 차를 마셨다.
“너는 안 마셔?”
“마실 수도 있고, 마시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건 거의 레이튼 같은 대답인데.”
“그 질문 많은 신하 말인가요?”
“응. 너랑 만나면 밤새 이야기할걸. 아니, 여긴 밤이 안 오니까…… 황혼새?”
타마르는 작게 웃었다.
“황혼새. 귀여운 말이군요.”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도나무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망자들도 멀리 있었다.
시종도, 신하도, 호위도 없었다.
그레이가 있었다면 분명히 “군주님, 타국 군주와 단둘이 계시는 것은 외교적으로 위험합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타국 왕궁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오래된 방 같았다.
조용하고, 묘하게 따뜻하고, 조금 슬픈 방.
푸리나는 문득 말했다.
“너는 외롭지 않아?”
타마르의 손가락이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대는 사적인 자리에서 참으로 곧장 묻는군요.”
“공적인 자리에서는 빙빙 돌려 말해야 하니까.”
“그대가요?”
“나도 할 때는 해.”
“그렇군요. 짐은 아직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나 놀린 거지?”
“조금요.”
타마르는 나른하게 웃었다.
푸리나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결국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지나간 뒤, 타마르는 포도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외롭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요.”
푸리나는 조용해졌다.
“짐의 곁에는 늘 망자들이 있답니다. 이름을 잃은 자, 죄를 내려놓지 못한 자, 울음을 삼키지 못한 자,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는 자.”
타마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지나가는 손님이지요. 농원은 그들을 붙잡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랍니다. 쉬게 하고, 덜어내고, 보내는 곳이지요.”
“그러니까…… 네 곁에 오래 남는 사람은 별로 없구나.”
“예.”
타마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음의 여관 주인은 손님을 오래 붙잡으면 안 된답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뭐라도 말했을 것이다.
“그래도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든가.
“그럼 내가 자주 놀러올게!”라든가.
“좋아, 황혼 축제를 열자!”라든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들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타마르는 죽은 여왕이었다.
그녀의 외로움은 위로 몇 마디로 건드리기에는 너무 오래되었다.
그래서 푸리나는 그냥 물었다.
“그럼 가끔은 누가 남아줬으면 좋겠어?”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처음으로 조금 놀란 듯했다.
“……그 질문은 조금 잔인하군요.”
푸리나는 움찔했다.
“미안.”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잔인하다는 것은 나쁘다는 뜻만은 아니지요. 잘 익은 포도도 처음에는 껍질이 터지는 법이랍니다.”
“그 비유, 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 모르겠어.”
“둘 다겠지요.”
타마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가끔은 남아줬으면 좋겠답니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주 가끔은요.”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짐의 곁에 남는다는 것은, 그가 황혼을 넘지 못했다는 뜻일 때가 많지요. 그러니 짐은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답니다.”
타마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죽은 여왕의 욕심이란 대개 그런 모양이지요.”
푸리나는 타마르를 한참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나는 가끔 올게.”
타마르가 눈을 깜빡였다.
“그대는 아직 산 자입니다.”
“알아.”
“산 자는 농원에 오래 머물면 안 된답니다.”
“오래 안 머물게.”
“그대의 신하가 알면 화낼 텐데요.”
“그레이는 늘 화내.”
“좋은 신하군요.”
“응. 아주 좋은 신하야.”
푸리나는 찻잔을 들고, 조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여관좌의 휴식 대리인이잖아. 가끔 안식 대리인이 제대로 쉬고 있는지 확인할 의무가 있어.”
타마르는 잠시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은 나른하고, 부드럽고, 아주 조금 쓸쓸했다.
“그대는 참 이상한 어린양이군요.”
“어린양은 빼달라니까.”
“그럼 이상한 극장주.”
“그건 좋아.”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포도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멀리서 어느 망자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황혼 너머로 걸어갔다. 타마르는 그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눈빛이 아주 부드러웠다.
푸리나는 그 표정을 보며 물었다.
“보낼 때마다 슬퍼?”
“항상은 아니랍니다.”
“그럼?”
“어떤 이는 보내며 안도하고, 어떤 이는 보내며 분노하고, 어떤 이는 보내며 오래 침묵하게 되지요.”
타마르는 잔을 들었다.
“하지만 슬픔은 자주 찾아온답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이 익숙해진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그건 다행이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다행?”
“응.”
푸리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네가 아무렇지 않다고 했으면, 조금 무서웠을 것 같아.”
타마르는 잠시 조용히 있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대는 짐이 아직 슬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는군요.”
“응.”
“그대는 죽은 자에게도 산 자의 흔적을 찾는군요.”
“나쁜가?”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눈을 감았다.
“조금 따뜻하군요.”
그 말에 푸리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냥…… 나는 아직 네가 완전히 끝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짐은 죽은 사람인데요.”
“알아. 그런데 죽은 사람이면서도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보내고, 슬퍼하고, 가끔 놀리고, 포도주도 안 마시면서 들고 있잖아.”
푸리나는 타마르를 똑바로 보았다.
“그럼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타마르의 미소가 희미해졌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황혼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순간, 푸리나는 이상하게도 황혼이 조금 더 조용해진 것 같다고 느꼈다.
마침내 타마르가 말했다.
“그대는 위험한 말을 하는군요.”
푸리나는 살짝 긴장했다.
“그런 뜻은—”
“아니랍니다.”
타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짐을 산 자처럼 여기지는 마세요. 그것은 짐에게도, 그대에게도 좋지 않답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타마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짐을 단지 끝난 자로만 여기지 않은 것은, 고맙군요.”
푸리나는 조금 안심한 듯 웃었다.
“그럼 됐어.”
“그대는 늘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나요?”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래.”
“그레이라는 신하가 고생하겠군요.”
“엄청.”
두 사람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편한 웃음이었다.
푸리나는 탁자 위에 놓인 작은 과자를 집었다. 조지아식 꿀 과자였다. 그녀는 한 입 먹고 눈을 크게 떴다.
“맛있다.”
타마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지요?”
“응. 이거 그레이한테 가져가도 돼?”
“산 자의 여관에 선물로 가져가고 싶다면, 그러세요.”
“죠니는 한입에 먹을 것 같고, 레이튼은 맛의 구조를 질문할 것 같고, 하융은 ‘다른 가능성에서는 더 달았소’라고 할 것 같아.”
타마르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대의 사람들은 꽤 소란스럽군요.”
“응.”
푸리나는 과자를 하나 더 집었다.
“좋은 사람들이야.”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군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응.”
그 대답은 장엄하지 않았다.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짧고 솔직했다.
“응. 사랑해.”
타마르는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왕이 그렇게 쉽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나요?”
“사적인 자리잖아.”
“그렇군요.”
타마르는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 마셨다.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드디어 마셨네.”
“그대가 너무 산 자처럼 굴어서, 짐도 조금 따라해보았답니다.”
“어때?”
타마르는 잠시 포도주 맛을 음미했다.
“아직도 황혼 맛이 나는군요.”
“맛있다는 뜻이야?”
“그런 뜻이랍니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타마르.”
“예.”
“너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타마르의 눈빛이 조금 멀어졌다.
“있었답니다.”
“지금도?”
“죽음은 사랑을 없애지 못하지요.”
그녀는 포도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만 사랑의 형태를 바꿀 뿐이랍니다. 산 자의 사랑은 붙잡고 싶어 하고, 죽은 자의 사랑은 보내야 할 때를 배워야 하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나는 잘 못할 것 같아.”
“무엇을요?”
“보내는 거.”
“그대는 아직 그럴 때가 아니니까요.”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산 자는 먼저 붙잡는 법을 배워야 한답니다. 손을 잡고, 이름을 부르고, 아직 가지 말라고 말하고, 차를 식기 전에 마시라고 재촉하고.”
푸리나는 웃었다.
“그거 완전 그레이인데.”
“좋은 사람이라 했지요?”
“응.”
“그렇다면 배워두세요. 그대에게는 아직 붙잡아야 할 손이 많답니다.”
푸리나는 말없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황혼빛이 비쳤다.
자기 얼굴도 비쳤다.
조금 낯설었다.
타마르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요?”
푸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언젠가 너무 늦게까지 붙잡게 될까 봐.”
타마르는 조용히 들었다.
“막이 닫혔는데도, 내가 계속 앙코르를 외치면 어떡하지?”
그 말은 작았다.
공적인 자리의 푸리나라면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늘 사람들에게 아직 막은 닫히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막이 닫혔을 때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타마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짐이 말해주겠지요.”
“뭐라고?”
타마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어린 극장주. 그 사람은 충분히 공연했답니다.”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화낼지도 몰라.”
“그럴 수 있겠지요.”
“울지도 몰라.”
“그것도 괜찮답니다.”
“너한테 막 따질 수도 있어. 왜 데려가냐고.”
“짐은 익숙하답니다.”
타마르는 아주 작게 웃었다.
“산 자들은 늘 죽음에게 화를 내지요. 짐은 그 화를 미워하지 않는답니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이상하게 다정해.”
“죽음이 언제나 차가워야 한다고 누가 정했을까요?”
“레이튼이 좋아할 질문이네.”
“그대도 좋아하는 듯한데요.”
“조금.”
푸리나는 다시 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이미 조금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맛있었다.
타마르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겠지요.”
“응.”
“그렇다면 그들이 죽는다는 사실도 언젠가는 사랑해야 한답니다.”
푸리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어려운데.”
“예.”
타마르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 어렵답니다. 짐도 오래 걸렸지요.”
“성공했어?”
“완전히는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타마르를 보았다.
타마르는 포도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짐도 여전히 어떤 영혼은 조금 더 붙잡고 싶답니다. 어떤 이름은 황혼 너머로 보내기 싫고, 어떤 목소리는 포도잎 사이에 더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지요.”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손님의 발목을 잡으면, 그곳은 더 이상 여관이 아니랍니다.”
푸리나는 조용히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보내는구나.”
“예.”
“사랑해서?”
“예.”
타마르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대는 살게 하는 사랑을 맡았고, 짐은 쉬게 하는 사랑을 맡았답니다.”
푸리나는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그럼 우린 둘 다 사랑이네.”
타마르는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말은 조금 낯간지럽군요.”
푸리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이겼다.”
“무엇을요?”
“죽은 여왕을 부끄럽게 만들었어.”
“그대는 참 무례한 어린양이군요.”
“어린양 빼.”
“무례한 극장주.”
“그건 인정.”
둘은 다시 웃었다.
황혼의 포도밭에서, 웃음소리는 오래 퍼지지 않았다.
포도잎 사이로 스며들어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뒤 타마르가 말했다.
“이제 돌아가야겠지요.”
푸리나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황혼인데?”
“그대의 나라에는 밤이 올 테니까요.”
“그레이가 걱정하겠네.”
“그레이라는 이는 늘 걱정할 듯하군요.”
“맞아.”
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마르는 작은 꾸러미를 내밀었다. 안에는 꿀 과자가 들어 있었다.
“그대의 사람들에게 가져가세요.”
푸리나는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그리고 그대도 먹으세요. 산 자는 단 것을 먹어야 한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는 맛을 기억하지요.”
푸리나는 꾸러미를 품에 안았다.
“타마르.”
“예.”
“다음에 또 와도 돼?”
타마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요.”
“응. 오래는 안 있을게.”
“그리고 올 때마다 살아 있는 냄새를 잔뜩 묻히고 오세요.”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살아 있는 냄새?”
“차가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고 투덜대고, 선물을 너무 많이 들고 오고, 신하들이 걱정할 만한 일을 조금 하고, 아직 막이 닫히지 않은 사람처럼 걸어오라는 뜻이랍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건 자신 있어.”
“그럴 것 같군요.”
타마르는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가세요, 킬리키아의 극장주. 그대의 무대는 아직 소란스러울 테니까요.”
푸리나는 돌아서다가, 다시 한 번 타마르를 보았다.
이번에는 장엄한 인사도, 여왕다운 예법도 없었다.
그냥 손을 흔들었다.
“또 올게, 타마르.”
타마르는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고는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맞이하겠답니다.”
“그거면 충분해.”
푸리나는 황혼의 문을 지나 걸어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포도농원은 다시 조용해졌다.
타마르는 한동안 빈 찻잔과 포도주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는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 온기를 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죽은 여왕은 그 작은 온기를 오래 기억했다.
“참으로……”
타마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란스러운 손님이군요.”
포도나무가 황혼 속에서 흔들렸다.
멀리서 망자 하나가 조용히 길을 건넜다.
타마르는 다시 자신의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마셨다.
황혼의 맛이 났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식지 않은 차의 향도 섞여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