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43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1 (월) 09:10:18
3막. 문 앞에서 멈추는 사람들
친구는 술잔을 들고 등장했다.
등장부터 요란했다.
그는 무대 뒤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척하더니, 발을 헛디뎌 탁자에 부딪히고, 그 바람에 만인의 빵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만인이 황급히 빵을 붙잡자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벌렸다.
“나를 불렀나, 벗이여!”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친구 역을 맡은 이는 항구의 악사였다. 평소에도 술집에서 손님들을 웃기던 사람이라, 그는 걸음 하나만으로도 객석을 흔들 줄 알았다. 머리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허리에는 반쯤 비어 보이는 술병을 매달고 있었다.
만인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두 손을 잡았다.
“친구야!”
“그래, 친구다! 빚을 갚으라고 찾아온 게 아니라면 나는 늘 친구다!”
아이들이 웃었다.
만인은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 초대장이 왔다.”
친구는 술잔을 들다 말고 멈췄다.
“초대장?”
“가장 끝의 여관에서.”
친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일부러 크게 웃었다.
“하하! 그거 참 고약한 여관이군! 나는 그런 곳은 모른다. 술맛은 어떤가?”
만인은 여관 주인을 돌아보았다.
무대 구석의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손님마다 다릅니다.”
친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면 나는 못 간다! 술맛이 보장되지 않은 여관은 위험하다!”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만인은 웃지 못했다.
“농담하지 마. 나와 같이 가줘.”
친구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
만인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너는 내 모든 일을 알잖아. 내가 처음 거짓말한 날도, 처음 사랑에 빠진 날도, 처음 도망친 날도. 네가 없으면 나는 길을 잃을 거야.”
친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객석도 조용해졌다.
친구는 천천히 만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문 앞까지는 가줄 수 있다.”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그래. 네가 무서워하면 웃겨줄 수 있고, 네가 울면 술병을 흔들어줄 수 있고, 네가 도망치려 하면 욕해줄 수 있다.”
그는 애써 웃었다.
“친구란 대체로 그런 것 아니겠나?”
만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까지—”
“하지만 문 너머는 아니다.”
만인의 손이 굳었다.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네 길이다.”
“친구잖아.”
“그래서 문 앞까지 가주는 거다.”
친구는 만인의 어깨를 잡았다.
“친구라고 해서 네 죽음까지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네 후회까지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네가 사랑한 것, 네가 미워한 것, 네가 하지 못한 말까지 내가 대신 정리해줄 수도 없다.”
그는 잠시 웃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 앞에서 네 손은 잡아줄 수 있다.”
객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옆의 빈자리를, 그는 공연이 시작된 뒤부터 한 번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친구는 만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 부르려면 불러라.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라.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있다.”
만인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그럼 문 앞까지만이라도.”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까지.”
그때 여관 주인이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잡은 손을 떼지도 않았다.
다만 두 사람 옆에 작은 등불 하나를 내려놓았다.
친구가 그를 보았다.
“이건 뭡니까?”
“문 앞까지 가시는 길은 어두울 수 있으니까요.”
친구는 농담처럼 웃었다.
“나도 손님 취급입니까?”
“문 앞까지 동행하시는 분도, 제 여관에서는 손님입니다.”
친구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웃었다.
“좋은 여관이군요.”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친구는 만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그가 퇴장할 때, 객석은 박수를 쳤다.
이번 박수는 가볍지 않았다.
누군가는 웃으며 쳤고, 누군가는 손바닥을 맞대다 말고 눈을 닦았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그 박수의 온도를 들었다.
좋아.
이 극은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너무 무거워지면 사람들은 닫힌다.
너무 가벼워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은 그 사이였다.
박수와 침묵 사이.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어 다음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가족이었다.
가족은 한 명으로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배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어머니.
배우자.
아이.
모두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장례복도 축제복도 아니었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다.
어머니는 천 조각을 들고 있었다.
배우자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나무 말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무대에 나오자, 객석의 공기가 달라졌다.
재산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명성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풍자를 보았다.
권력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위의 무게를 떠올렸다.
친구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문 앞까지의 동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이 나오자, 생각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군가는 품 안의 아이를 끌어안았다.
누군가는 곁에 앉은 노모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는 아무도 없는 옆자리를 아주 잠깐 보았다.
만인은 가족을 보자마자 달려갔다.
“너희라면 같이 가주겠지?”
어머니는 천 조각을 손에 쥔 채 만인의 얼굴을 만졌다.
“어디를 가려 하느냐.”
“가장 끝의 여관.”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배우자는 편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아이는 나무 말을 품에 안고 만인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멀어?”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객석이 아파했다.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겠다.”
아이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아저씨, 멀어요?”
여관 주인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조금 몸을 낮췄다.
“손님마다 다릅니다.”
“무서워요?”
“그럴 때도 있습니다.”
아이는 나무 말을 꼭 쥐었다.
“그럼 같이 가면 안 무서워요?”
여관 주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아이를 불쌍하게 내려다보지 않았다.
설교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가 묻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
“문 앞까지는 덜 무서울 수 있습니다.”
“문 안쪽은요?”
“그 안쪽은, 각자의 방이 다릅니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못 간다.”
만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천 조각을 쥔 손이 떨렸다.
“내가 너를 낳았지만, 네 끝까지 낳을 수는 없다.”
그 말에 객석의 여인 몇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처음 걸을 때 나는 손을 잡아주었다. 넘어졌을 때 안아주었다. 열이 났을 때 밤새 물수건을 갈았다. 하지만 마지막 길은…… 내가 대신 걸을 수 없다.”
만인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나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어머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는 천 조각을 펼쳤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감싸던 낡은 포대기였다.
“이건 가져가라.”
만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건 너무 낡았습니다.”
“그래. 낡았다.”
어머니는 웃었다.
“하지만 네가 처음 울던 날의 온기가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같이 가지 못해도, 네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따라갈 수 있겠지.”
만인은 포대기를 가슴에 안았다.
배우자가 앞으로 나왔다.
“나도 못 가.”
만인은 거의 화를 내듯 말했다.
“너까지?”
배우자는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네 옆에서 살았다. 네 못난 점도 알았고, 네 좋은 점도 알았다. 네가 침묵으로 도망칠 때도 봤고, 너를 용서하지 못한 밤도 있었다.”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하지만 나는 네 삶의 증인일 뿐, 네 삶 자체는 아니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그건 뭐지?”
“네가 끝내 읽지 않은 편지.”
만인의 얼굴이 굳었다.
배우자는 낮게 말했다.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가야 할지는 네가 정해. 하지만 적어도 문 앞까지는 들고 가. 읽지 않은 말은, 생각보다 오래 발목을 잡으니까.”
여관 주인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좋은 조언입니다.”
배우자는 그를 보았다.
“여관에서는 읽지 않은 편지도 받습니까?”
“예.”
“그럼 찢어진 편지도?”
“예.”
“보내지 못한 편지도?”
“그런 편지가 가장 많습니다.”
배우자는 눈을 감았다.
“그렇군요.”
그녀는 편지를 만인에게 건넸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다가왔다.
“나는 같이 갈래.”
만인의 얼굴이 무너졌다.
“안 된다.”
아이는 입술을 내밀었다.
“왜?”
만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는 나무 말을 내밀었다.
“그럼 이거 가져가.”
만인은 천천히 나무 말을 받았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응.”
“그런데 왜?”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무서우면 잡아.”
객석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는 막 뒤에서 눈을 감았다.
이 장면은 위험했다.
조금만 틀리면 감정을 짜내는 장면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슬픔을 장식처럼 쓰는 장면이 된다.
푸리나는 그런 것을 싫어했다.
삶의 극은 눈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울고 싶은 사람에게 방을 내어줄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문을 열어젖히면 안 된다.
그녀가 손을 내리려는 순간, 여관 주인이 무대 중앙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문 앞까지 배웅하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까지는 허락됩니까?”
“허락이라기보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뒤에는요?”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답했다.
“그 뒤에는 손님께서 쉬실 방을 찾으셔야지요.”
배우자가 물었다.
“남은 사람들은요?”
“남은 분들은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이가 물었다.
“왜요?”
여관 주인은 아이를 보았다.
“아직 드셔야 할 저녁이 있고, 자라야 할 키가 있고, 싸워야 할 형제가 있고, 웃어야 할 날이 있으니까요.”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웃어야 해요?”
“예.”
여관 주인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떠난 손님들이 꼭 남기고 가는 부탁 중 하나입니다.”
그 말에 객석의 울음이 조금 달라졌다.
슬픔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슬픔이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 방향에서, 누군가의 부탁을 붙잡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 돌아섰다.
하융은 그것을 보았다.
회색 창호 너머의 가능성 하나가 닫혔다.
아이들이 웃음을 죄책감으로 여기는 세계.
살아남은 자들이 밥을 먹는 것조차 미안해하는 세계.
그 세계가 아주 얇게 멀어졌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비껴갔소.”
죠니가 물었다.
“뭐가?”
“살아남은 자가 자기 숨을 부끄러워하는 길.”
죠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짧게 말했다.
“그건 비껴가야지.”
무대 위에서 가족들은 만인을 껴안았다.
그 포옹은 길지 않았다.
푸리나는 일부러 길게 끌지 않았다.
헤어짐은 때로 너무 길게 붙잡으면, 배웅이 아니라 구속이 된다.
어머니는 포대기를 남겼다.
배우자는 편지를 남겼다.
아이는 나무 말을 남겼다.
그리고 셋은 문 앞에서 멈추었다.
만인은 그들을 보았다.
“정말 여기까지인가?”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까지다.”
배우자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읽어야 할 것은 남겼다.”
아이가 말했다.
“말 꼭 잡아.”
만인은 웃다가 울었다.
그것은 배우의 연기였지만, 동시에 그 배우 자신의 울음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형을 전쟁에서 잃은 사람이었다. 리허설 때는 이 장면을 끝까지 하지 못했고, 푸리나는 그에게 쉬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무대에 올랐다.
“이 장면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만인 곁에 섰다.
“가시겠습니까?”
만인은 가족들을 보았다.
친구가 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재산의 동전이 탁자 위에 있었다.
명성이 맡긴 빈 문패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권력의 왕관과 손수건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만인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날짜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
“그럼 아직 끝은 아닌 겁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겁니까?”
여관 주인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천막이 흔들렸다.
등불이 작게 떨렸다.
객석의 아이가 담요 끝을 쥐었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했다.
“끝이 아니어도,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사람은 조금 아픕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질문은 대본에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대본과 달랐다.
푸리나가 본래 쓴 대답은 이랬다.
“그대의 삶을 극으로 삼아, 마지막 막까지 주인공으로 살아라.”
나쁜 대사는 아니었다.
푸리나다운 대사였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들었다.
“우선 식기 전에 드시지요.”
객석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났다.
만인도 멍하니 그를 보았다.
여관 주인은 말을 이었다.
“사는 법은 너무 큰 질문입니다. 큰 질문은 빈속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찻잔을 만인에게 건넸다.
“차를 드시고, 편지를 읽고, 오늘 돌아갈 집이 있다면 돌아가십시오. 사는 법은 그 다음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막 뒤에서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좋다.”
그레이가 그녀를 보았다.
“폐하?”
“좋아. 너무 좋아.”
푸리나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 항상 너무 멀리 있는 말을 하려고 해.”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폐하를 봅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덧붙였다.
“하지만 가끔은…… 차를 마시라는 말도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잠깐 말이 없다가, 활짝 웃었다.
“그레이, 방금 엄청 좋은 말 했어.”
“기록하지 마십시오.”
“왜?!”
“부끄럽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이미 레이튼이 적고 있는데.”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튼은 정말로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레이튼 경.”
레이튼은 온화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장 그대로는 아닙니다. 조금 더 우아하게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게 더 문제입니다.”
무대 위에서 만인은 차를 받았다.
그는 천천히 마셨다.
한 모금.
아주 작은 행위였다.
하지만 그 한 모금으로 마당 전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포대기를 보았다.
나무 말을 보았다.
동전을 보았다.
왕관을 보았다.
빈 문패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보았다.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예.”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오겠지요.”
“예.”
만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도 당신이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대체로 저는 문 근처에 있습니다.”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만인은 천천히 봉투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더 이상 처음의 만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떠올리고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
그는 낮게 말했다.
“오늘은 돌아가겠다.”
친구가 문 앞에서 웃었다.
“그럼 술값은 네가 내라.”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족들이 울면서 웃었다.
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내가 내겠다.”
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대 뒤에서 손을 들자, 악사가 밝은 선율을 튕겼다.
너무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앞으로 걸어가는 곡이었다.
만인은 가족들과 친구를 따라 문에서 멀어졌다.
여관 주인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문가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만인이 돌아보았다.
“다녀오라는 말입니까?”
“예.”
여관 주인은 말했다.
“언젠가 다시 오시겠지만, 오늘은 아직 저쪽 길이 남아 있으니까요.”
만인은 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이번 박수는 앞선 막들보다 컸다.
사람들은 울면서 박수쳤고, 웃으면서 박수쳤다.
부상병은 한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아이들은 담요를 흔들었다.
노인은 발판 위에서 천천히 손뼉을 쳤다.
하지만 박수가 커질수록, 무대 구석의 빈 문패는 더 조용히 흔들렸다.
그 문패를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레이는 보았다.
하융도 보았다.
레이튼은 그것을 질문으로 남겼다.
죠니는 한 번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다음 막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살아 있는 만인은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직 객석 뒤에 서 있었다.
무대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박수소리 아래의 침묵 속에서.
여관 주인은 조용히 빈 문패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온 이름이 있으신 분은, 천천히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 말은 극 속 대사처럼 들렸다.
그러나 객석 뒤쪽에서, 한 아이가 숨을 멈췄다.
그 아이는 담요 끝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막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친구는 술잔을 들고 등장했다.
등장부터 요란했다.
그는 무대 뒤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척하더니, 발을 헛디뎌 탁자에 부딪히고, 그 바람에 만인의 빵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다. 만인이 황급히 빵을 붙잡자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을 벌렸다.
“나를 불렀나, 벗이여!”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친구 역을 맡은 이는 항구의 악사였다. 평소에도 술집에서 손님들을 웃기던 사람이라, 그는 걸음 하나만으로도 객석을 흔들 줄 알았다. 머리에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허리에는 반쯤 비어 보이는 술병을 매달고 있었다.
만인은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 두 손을 잡았다.
“친구야!”
“그래, 친구다! 빚을 갚으라고 찾아온 게 아니라면 나는 늘 친구다!”
아이들이 웃었다.
만인은 절박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 초대장이 왔다.”
친구는 술잔을 들다 말고 멈췄다.
“초대장?”
“가장 끝의 여관에서.”
친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일부러 크게 웃었다.
“하하! 그거 참 고약한 여관이군! 나는 그런 곳은 모른다. 술맛은 어떤가?”
만인은 여관 주인을 돌아보았다.
무대 구석의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손님마다 다릅니다.”
친구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면 나는 못 간다! 술맛이 보장되지 않은 여관은 위험하다!”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만인은 웃지 못했다.
“농담하지 마. 나와 같이 가줘.”
친구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
만인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너는 내 모든 일을 알잖아. 내가 처음 거짓말한 날도, 처음 사랑에 빠진 날도, 처음 도망친 날도. 네가 없으면 나는 길을 잃을 거야.”
친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객석도 조용해졌다.
친구는 천천히 만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문 앞까지는 가줄 수 있다.”
만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
“그래. 네가 무서워하면 웃겨줄 수 있고, 네가 울면 술병을 흔들어줄 수 있고, 네가 도망치려 하면 욕해줄 수 있다.”
그는 애써 웃었다.
“친구란 대체로 그런 것 아니겠나?”
만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까지—”
“하지만 문 너머는 아니다.”
만인의 손이 굳었다.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네 길이다.”
“친구잖아.”
“그래서 문 앞까지 가주는 거다.”
친구는 만인의 어깨를 잡았다.
“친구라고 해서 네 죽음까지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네 후회까지 대신 짊어질 수도 없다. 네가 사랑한 것, 네가 미워한 것, 네가 하지 못한 말까지 내가 대신 정리해줄 수도 없다.”
그는 잠시 웃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 앞에서 네 손은 잡아줄 수 있다.”
객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 옆의 빈자리를, 그는 공연이 시작된 뒤부터 한 번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무대 위의 친구는 만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 부르려면 불러라.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라.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있다.”
만인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그럼 문 앞까지만이라도.”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까지.”
그때 여관 주인이 다가왔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잡은 손을 떼지도 않았다.
다만 두 사람 옆에 작은 등불 하나를 내려놓았다.
친구가 그를 보았다.
“이건 뭡니까?”
“문 앞까지 가시는 길은 어두울 수 있으니까요.”
친구는 농담처럼 웃었다.
“나도 손님 취급입니까?”
“문 앞까지 동행하시는 분도, 제 여관에서는 손님입니다.”
친구는 한동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조금 다르게 웃었다.
“좋은 여관이군요.”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다행입니다.”
친구는 만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물러났다.
그가 퇴장할 때, 객석은 박수를 쳤다.
이번 박수는 가볍지 않았다.
누군가는 웃으며 쳤고, 누군가는 손바닥을 맞대다 말고 눈을 닦았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그 박수의 온도를 들었다.
좋아.
이 극은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너무 무거워지면 사람들은 닫힌다.
너무 가벼워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금은 그 사이였다.
박수와 침묵 사이.
푸리나는 손가락을 들어 다음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가족이었다.
가족은 한 명으로 나오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 배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어머니.
배우자.
아이.
모두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장례복도 축제복도 아니었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입는 옷이었다.
어머니는 천 조각을 들고 있었다.
배우자는 편지를 들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나무 말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무대에 나오자, 객석의 공기가 달라졌다.
재산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명성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풍자를 보았다.
권력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위의 무게를 떠올렸다.
친구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문 앞까지의 동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가족이 나오자, 생각이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누군가는 품 안의 아이를 끌어안았다.
누군가는 곁에 앉은 노모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는 아무도 없는 옆자리를 아주 잠깐 보았다.
만인은 가족을 보자마자 달려갔다.
“너희라면 같이 가주겠지?”
어머니는 천 조각을 손에 쥔 채 만인의 얼굴을 만졌다.
“어디를 가려 하느냐.”
“가장 끝의 여관.”
어머니의 손이 멈췄다.
배우자는 편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아이는 나무 말을 품에 안고 만인을 올려다보았다.
“거기 멀어?”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객석이 아파했다.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겠다.”
아이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아저씨, 멀어요?”
여관 주인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조금 몸을 낮췄다.
“손님마다 다릅니다.”
“무서워요?”
“그럴 때도 있습니다.”
아이는 나무 말을 꼭 쥐었다.
“그럼 같이 가면 안 무서워요?”
여관 주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아이를 불쌍하게 내려다보지 않았다.
설교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가 묻는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
“문 앞까지는 덜 무서울 수 있습니다.”
“문 안쪽은요?”
“그 안쪽은, 각자의 방이 다릅니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못 간다.”
만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천 조각을 쥔 손이 떨렸다.
“내가 너를 낳았지만, 네 끝까지 낳을 수는 없다.”
그 말에 객석의 여인 몇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처음 걸을 때 나는 손을 잡아주었다. 넘어졌을 때 안아주었다. 열이 났을 때 밤새 물수건을 갈았다. 하지만 마지막 길은…… 내가 대신 걸을 수 없다.”
만인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나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어머니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는 천 조각을 펼쳤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감싸던 낡은 포대기였다.
“이건 가져가라.”
만인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이건 너무 낡았습니다.”
“그래. 낡았다.”
어머니는 웃었다.
“하지만 네가 처음 울던 날의 온기가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같이 가지 못해도, 네가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따라갈 수 있겠지.”
만인은 포대기를 가슴에 안았다.
배우자가 앞으로 나왔다.
“나도 못 가.”
만인은 거의 화를 내듯 말했다.
“너까지?”
배우자는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네 옆에서 살았다. 네 못난 점도 알았고, 네 좋은 점도 알았다. 네가 침묵으로 도망칠 때도 봤고, 너를 용서하지 못한 밤도 있었다.”
그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하지만 나는 네 삶의 증인일 뿐, 네 삶 자체는 아니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그건 뭐지?”
“네가 끝내 읽지 않은 편지.”
만인의 얼굴이 굳었다.
배우자는 낮게 말했다.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가야 할지는 네가 정해. 하지만 적어도 문 앞까지는 들고 가. 읽지 않은 말은, 생각보다 오래 발목을 잡으니까.”
여관 주인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좋은 조언입니다.”
배우자는 그를 보았다.
“여관에서는 읽지 않은 편지도 받습니까?”
“예.”
“그럼 찢어진 편지도?”
“예.”
“보내지 못한 편지도?”
“그런 편지가 가장 많습니다.”
배우자는 눈을 감았다.
“그렇군요.”
그녀는 편지를 만인에게 건넸다.
아이는 마지막으로 다가왔다.
“나는 같이 갈래.”
만인의 얼굴이 무너졌다.
“안 된다.”
아이는 입술을 내밀었다.
“왜?”
만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는 나무 말을 내밀었다.
“그럼 이거 가져가.”
만인은 천천히 나무 말을 받았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거잖아.”
“응.”
“그런데 왜?”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무서우면 잡아.”
객석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푸리나는 막 뒤에서 눈을 감았다.
이 장면은 위험했다.
조금만 틀리면 감정을 짜내는 장면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슬픔을 장식처럼 쓰는 장면이 된다.
푸리나는 그런 것을 싫어했다.
삶의 극은 눈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울고 싶은 사람에게 방을 내어줄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문을 열어젖히면 안 된다.
그녀가 손을 내리려는 순간, 여관 주인이 무대 중앙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문 앞까지 배웅하실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거기까지는 허락됩니까?”
“허락이라기보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 뒤에는요?”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답했다.
“그 뒤에는 손님께서 쉬실 방을 찾으셔야지요.”
배우자가 물었다.
“남은 사람들은요?”
“남은 분들은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이가 물었다.
“왜요?”
여관 주인은 아이를 보았다.
“아직 드셔야 할 저녁이 있고, 자라야 할 키가 있고, 싸워야 할 형제가 있고, 웃어야 할 날이 있으니까요.”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웃어야 해요?”
“예.”
여관 주인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떠난 손님들이 꼭 남기고 가는 부탁 중 하나입니다.”
그 말에 객석의 울음이 조금 달라졌다.
슬픔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슬픔이 자기 자신을 물어뜯는 방향에서, 누군가의 부탁을 붙잡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 돌아섰다.
하융은 그것을 보았다.
회색 창호 너머의 가능성 하나가 닫혔다.
아이들이 웃음을 죄책감으로 여기는 세계.
살아남은 자들이 밥을 먹는 것조차 미안해하는 세계.
그 세계가 아주 얇게 멀어졌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비껴갔소.”
죠니가 물었다.
“뭐가?”
“살아남은 자가 자기 숨을 부끄러워하는 길.”
죠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짧게 말했다.
“그건 비껴가야지.”
무대 위에서 가족들은 만인을 껴안았다.
그 포옹은 길지 않았다.
푸리나는 일부러 길게 끌지 않았다.
헤어짐은 때로 너무 길게 붙잡으면, 배웅이 아니라 구속이 된다.
어머니는 포대기를 남겼다.
배우자는 편지를 남겼다.
아이는 나무 말을 남겼다.
그리고 셋은 문 앞에서 멈추었다.
만인은 그들을 보았다.
“정말 여기까지인가?”
어머니가 말했다.
“여기까지다.”
배우자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읽어야 할 것은 남겼다.”
아이가 말했다.
“말 꼭 잡아.”
만인은 웃다가 울었다.
그것은 배우의 연기였지만, 동시에 그 배우 자신의 울음이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형을 전쟁에서 잃은 사람이었다. 리허설 때는 이 장면을 끝까지 하지 못했고, 푸리나는 그에게 쉬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무대에 올랐다.
“이 장면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만인 곁에 섰다.
“가시겠습니까?”
만인은 가족들을 보았다.
친구가 문 가까이에 서 있었다.
재산의 동전이 탁자 위에 있었다.
명성이 맡긴 빈 문패가 무대 뒤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권력의 왕관과 손수건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만인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날짜가 보이지 않습니다.”
“예.”
“그럼 아직 끝은 아닌 겁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겁니까?”
여관 주인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마당 너머로 바람이 불었다.
천막이 흔들렸다.
등불이 작게 떨렸다.
객석의 아이가 담요 끝을 쥐었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했다.
“끝이 아니어도,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사람은 조금 아픕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질문은 대본에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대본과 달랐다.
푸리나가 본래 쓴 대답은 이랬다.
“그대의 삶을 극으로 삼아, 마지막 막까지 주인공으로 살아라.”
나쁜 대사는 아니었다.
푸리나다운 대사였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들었다.
“우선 식기 전에 드시지요.”
객석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났다.
만인도 멍하니 그를 보았다.
여관 주인은 말을 이었다.
“사는 법은 너무 큰 질문입니다. 큰 질문은 빈속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찻잔을 만인에게 건넸다.
“차를 드시고, 편지를 읽고, 오늘 돌아갈 집이 있다면 돌아가십시오. 사는 법은 그 다음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푸리나는 막 뒤에서 입을 살짝 벌렸다.
그리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좋다.”
그레이가 그녀를 보았다.
“폐하?”
“좋아. 너무 좋아.”
푸리나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 항상 너무 멀리 있는 말을 하려고 해.”
그레이는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폐하를 봅니다.”
푸리나가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덧붙였다.
“하지만 가끔은…… 차를 마시라는 말도 필요합니다.”
푸리나는 잠깐 말이 없다가, 활짝 웃었다.
“그레이, 방금 엄청 좋은 말 했어.”
“기록하지 마십시오.”
“왜?!”
“부끄럽습니다.”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이미 레이튼이 적고 있는데.”
그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레이튼은 정말로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레이튼 경.”
레이튼은 온화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장 그대로는 아닙니다. 조금 더 우아하게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게 더 문제입니다.”
무대 위에서 만인은 차를 받았다.
그는 천천히 마셨다.
한 모금.
아주 작은 행위였다.
하지만 그 한 모금으로 마당 전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포대기를 보았다.
나무 말을 보았다.
동전을 보았다.
왕관을 보았다.
빈 문패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보았다.
“나는 아직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예.”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오겠지요.”
“예.”
만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도 당신이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대체로 저는 문 근처에 있습니다.”
그 말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만인은 천천히 봉투를 품에 넣었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더 이상 처음의 만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죽음을 떠올리고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
그는 낮게 말했다.
“오늘은 돌아가겠다.”
친구가 문 앞에서 웃었다.
“그럼 술값은 네가 내라.”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가족들이 울면서 웃었다.
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내가 내겠다.”
푸리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무대 뒤에서 손을 들자, 악사가 밝은 선율을 튕겼다.
너무 밝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앞으로 걸어가는 곡이었다.
만인은 가족들과 친구를 따라 문에서 멀어졌다.
여관 주인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문가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만인이 돌아보았다.
“다녀오라는 말입니까?”
“예.”
여관 주인은 말했다.
“언젠가 다시 오시겠지만, 오늘은 아직 저쪽 길이 남아 있으니까요.”
만인은 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객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이번 박수는 앞선 막들보다 컸다.
사람들은 울면서 박수쳤고, 웃으면서 박수쳤다.
부상병은 한 손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아이들은 담요를 흔들었다.
노인은 발판 위에서 천천히 손뼉을 쳤다.
하지만 박수가 커질수록, 무대 구석의 빈 문패는 더 조용히 흔들렸다.
그 문패를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레이는 보았다.
하융도 보았다.
레이튼은 그것을 질문으로 남겼다.
죠니는 한 번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알았다.
다음 막은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살아 있는 만인은 돌아갔다.
하지만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직 객석 뒤에 서 있었다.
무대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박수소리 아래의 침묵 속에서.
여관 주인은 조용히 빈 문패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고 온 이름이 있으신 분은, 천천히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 말은 극 속 대사처럼 들렸다.
그러나 객석 뒤쪽에서, 한 아이가 숨을 멈췄다.
그 아이는 담요 끝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막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