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45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1 (월) 09:15:43
5막. 선행이라는 작은 짐

기다림은 이상한 무대 장치였다.

그것은 천막도 아니고 조명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야전 여관의 마당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되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

아이가 울음을 다 울 때까지.
어머니가 아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릴 때까지.
그레이가 장부의 한 줄을 다시 적고, 그 옆에 작게 표시를 남길 때까지.
여관 주인이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문패 아래에 손을 얹고, 잠시 눈을 감을 때까지.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녀는 이 침묵을 오래 두지 않았을 것이다.
관객의 감정이 너무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전에 웃음 하나를 던지고, 조명을 바꾸고, 노래를 넣고, 다음 장면으로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런 일을 잘했다.

사람이 너무 오래 슬픔 속에 앉아 있으면, 다시 일어나는 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의 침묵은 사람을 삼키는 늪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이었다.

누군가가 오래 걸어와 신발을 벗고, 젖은 외투를 벗고,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을 수 있는 방.

푸리나는 그 방의 문을 닫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마침내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아이는 담요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가 조용히 물었다.

“계속 보실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한 번 더 확인하듯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더 묻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제야 손을 들었다.

악사가 아주 낮은 음으로 현을 튕겼다.

띵.

그 소리는 누군가의 방문 앞에서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노크 같았다.

푸리나는 관객을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좋아.”

그 한마디에 아이 몇몇이 아주 작게 웃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우리는 방금, 한 손님이 잠깐 다녀가는 것을 보았어.”

마당은 조용했다.

“그건 부활이 아니야. 전쟁터로 다시 끌어낸 것도 아니야. 박수를 받기 위한 재등장도 아니야.”

그녀는 무대 뒤의 문패를 보았다.

“그건 아주 짧은 나들이였어. 하지 못한 말을 놓고, 다시 돌아가기 위한.”

여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푸리나는 다시 관객을 보았다.

“그러니 이제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해.”

그녀는 손을 뻗었다.

무대 한가운데, 만인 역의 배우가 다시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 전 가족들과 함께 문에서 돌아온 뒤,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가는 붉었지만 자세는 곧았다. 그의 품에는 포대기, 편지, 나무 말,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초대장이 있었다.

만인은 관객 앞에 섰다.

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나는 돌아왔다.”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돌아왔다는 말은 기쁜 말이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여관의 문 앞까지 갔다 온 사람에게, 돌아왔다는 말은 단순히 살아남았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질문이기도 했다.

만인은 탁자 위의 물건들을 보았다.

동전.
찢어진 포스터.
왕관.
손수건.
포대기.
읽지 않은 편지.
나무 말.
찻잔.

그는 낮게 물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그때 무대 왼쪽에서 작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화려하지 않았다.

아름답지도 않았다.

금빛 옷도, 왕관도, 악사의 현란한 등장음도 없었다.

그 사람은 낡은 앞치마를 입고 있었고, 양손에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빵 조각, 붕대, 바늘과 실, 작은 물병, 접은 편지, 그리고 아주 작은 나무 못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만인은 그를 보았다.

“너는 누구지?”

그 사람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선행입니다.”

객석에서 누군가 작게 웃었다.

선행 역을 맡은 사람은 여관의 어린 시종이었다. 그는 원래 대사 외우는 것을 무서워해서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했지만, 푸리나가 “너는 그냥 네가 매일 하는 일을 하면 돼!”라고 설득해 끌어올린 아이였다.

실제로 그는 매일 이런 일을 했다.

손님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찢어진 침구를 꿰매고, 부상병에게 붕대를 전하고, 길 잃은 아이를 어른에게 데려다주고, 장작이 떨어진 방에 나무를 넣었다.

그는 선행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평소처럼 서 있었다.

만인은 어리둥절했다.

“네가 나와 함께 마지막 여관까지 가줄 수 있나?”

선행은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조금은요.”

“조금?”

“저는 작아서요.”

객석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났다.

선행은 당황한 듯 귀를 붉혔다.

“큰일은 잘 못합니다. 왕국을 구하거나, 전쟁을 끝내거나, 하늘에서 별을 떨어뜨리거나 그런 건 못합니다.”

푸리나는 막 뒤에서 속삭였다.

“귀여워.”

죠니가 낮게 말했다.

“너 지금 극 전체 톤 잊은 거 아니지?”

“안 잊었어. 하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야.”

선행은 계속 말했다.

“대신 물 한 잔은 드릴 수 있습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수도 있고, 찢어진 옷은 조금 꿰맬 수 있고, 못 전한 편지는 대신 전해볼 수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반으로 나눠줄 수도 있고요.”

만인은 실망한 듯 말했다.

“그게 전부인가?”

선행은 고개를 숙였다.

“예.”

그 대답은 너무 작았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대부분의 길은 그런 것들로 이어집니다.”

만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여관 주인은 찻잔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큰 짐은 오래 들기 어렵습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의외로 작은 짐일 때가 많지요.”

만인은 선행의 바구니를 보았다.

“이런 것들이?”

“예.”

선행이 조심스럽게 빵 조각 하나를 꺼냈다.

“이건 어제 부상병에게 드린 빵입니다.”

그는 붕대를 꺼냈다.

“이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팔을 묶어준 붕대입니다.”

편지를 꺼냈다.

“이건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가족에게 남긴 말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나무 못을 꺼냈다.

“이건 무너진 문을 다시 세우는 데 쓸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물병을 들었다.

“이건 그냥 물입니다.”

객석에서 누군가 작게 웃었다.

선행은 진지했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에게는, 그냥 물이 제일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레이가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장부에는 수많은 항목이 있었다.

대단한 정책.
성벽 보수.
피난민 재배치.
예산 조정.
장례 절차.

하지만 그 모든 장부는 결국 이런 것들로 내려왔다.

오늘 물을 받은 사람.
오늘 빵을 먹은 아이.
오늘 붕대가 늦지 않게 닿은 병사.
오늘 이름을 되찾은 죽은 자.
오늘 울어도 된다고 허락받은 사람.

그레이는 낮게 말했다.

“작은 일이 아닙니다.”

푸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눈을 피했다.

“그냥…… 그렇습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 오늘 자꾸 좋은 말 하네.”

“기록하지 마십시오.”

“레이튼?”

레이튼은 이미 수첩을 꺼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요약만 하겠습니다.”

그레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대 위의 만인은 선행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마지막 여관까지 같이 갈 수 있나?”

선행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저도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왜?”

“저는 너무 작으니까요.”

그는 바구니를 양손으로 들었다.

“사람이 저를 잊으면 저는 금방 사라집니다. 오늘 빵을 나누고 내일 누군가를 짓밟으면, 저는 길을 잃습니다. 오늘 편지를 전하고 내일 이름을 지우면, 저는 약해집니다.”

만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너도 믿을 수 없다는 말이냐?”

선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를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객석을 보았다.

“혼자 한 번 착한 일을 하는 건 작은 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조금씩 나누면, 길이 됩니다.”

그 말에 무대 뒤의 푸리나가 손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객석 사이에서 몇 명의 배우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처음부터 관객인 척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물통을 들었다.
한 사람은 빵 바구니를 들었다.
한 사람은 목재 조각을 들었다.
한 사람은 작은 등불을 들었다.
한 사람은 편지 묶음을 들었다.

그들은 객석 사이를 지나 무대 위로 올라왔다.

선행이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이 아주 조용히 펼쳐졌다.

이번에는 화려한 선언이 없었다.
“세상은 무대요!”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자기 자리를 떠나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연출이지만, 동시에 질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들고 올라갈 수 있는가.

물 한 잔인가.
빵 한 조각인가.
이름 하나인가.
편지 한 통인가.
용서 하나인가.
아직 읽지 못한 말인가.

만인은 그들을 보며 물었다.

“이렇게 하면 길이 되는가?”

선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마지막 여관까지?”

선행은 여관 주인을 보았다.

여관 주인은 대답을 대신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따랐다.

선행은 스스로 답했다.

“문 앞까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문 너머는…… 제가 잘 모릅니다.”

여관 주인이 말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좋은 선행입니다.”

레이튼이 무대 뒤에서 눈을 빛냈다.

“아, 저 문장은 매우 좋군요.”

죠니가 건조하게 말했다.

“너 오늘 수확 많아서 좋겠다.”

“수수께끼가 많은 밤은 좋은 밤이지요.”

“난 좀 피곤한데.”

“피곤하실 때는 쉬는 것이 좋습니다.”

죠니는 여관 주인을 힐끗 보았다.

“그 말, 오늘 너무 많이 듣는 것 같은데.”

무대 위에서 선행은 만인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걸 다 들고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지금 쓸 수 있습니다.”

만인은 물건들을 보았다.

“지금?”

“예. 마지막 여관에 가져갈 것을 고르는 일은, 죽기 직전에만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 말에 관객들이 조용해졌다.

선행은 물병을 들어 만인에게 주었다.

“목마른 사람에게 주세요.”

만인은 객석을 보았다.

한 부상병이 있었다.

그는 공연 내내 웃고 울었지만, 물을 가지러 일어나지는 못했다. 다리에 부목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인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관객들이 길을 열었다.

그는 부상병에게 물병을 건넸다.

부상병은 당황했다.

“나한테?”

만인은 대본대로 말했다.

“목마르십니까?”

부상병은 잠시 멈췄다가 웃었다.

“조금.”

“그럼 드십시오.”

부상병은 물을 마셨다.

그것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물이었다.

그레이는 그 장면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식수 동선은 괜찮군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작게 웃었다.

선행은 이번에는 편지를 들었다.

“읽지 않은 편지는요?”

만인은 품속의 편지를 꺼냈다.

배우자가 남긴 편지.

그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봉인을 뜯었다.

무대 위에는 아무 음악도 흐르지 않았다.

편지 내용은 길지 않았다.

만인은 낮게 읽었다.

“당신은 늘 내게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몸만 돌아오고 말은 돌아오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객석의 몇몇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신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다리지 않은 날은 없었습니다.”

만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만약 언젠가 당신이 정말 먼 길을 가게 된다면, 그 전에 한 번은 제대로 앉아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무서웠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

그는 편지를 내렸다.

배우자 역의 배우는 무대 옆에 서 있었다.

만인은 그녀를 보았다.

“너는 왜 이 편지를 주지 않았지?”

배우자는 대답했다.

“당신이 늘 바빴으니까.”

만인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선행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대 위의 만인에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마당 전체가 들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

이 말은 때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다정한 말이었다.

아직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니까.

만인은 배우자 앞에 앉았다.

무대 한가운데도 아니고, 높은 자리도 아니었다.
그냥 의자 두 개를 마주 놓고 앉았다.

그는 말했다.

“무서웠다.”

배우자는 가만히 들었다.

“나는 늘 내가 괜찮은 척했다. 내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런데 사실은, 집에 들어오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 말에 객석의 한 병사가 눈을 감았다.

어떤 말은 자기 것이 아니어도, 너무 자기 것처럼 들릴 때가 있다.

만인은 계속 말했다.

“미안하다.”

배우자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나도 미안하다.”

둘은 끌어안지 않았다.

화해가 항상 포옹으로 끝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마주 앉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날도 있었다.

선행은 이번에는 나무 못을 들었다.

“무너진 문은요?”

만인은 주변을 보았다.

무대 옆에는 일부러 삐뚤게 세워둔 작은 문이 있었다. 극 초반부터 배경처럼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문은 집의 문이기도 했고, 성문이기도 했고, 마음의 문이기도 했다.

선행은 못과 망치를 건넸다.

만인은 문 앞으로 갔다.

그는 못을 박기 시작했다.

탁.

소리가 울렸다.

탁.

객석의 인부 하나가 무심코 손을 움찔했다.

탁.

성벽을 보수하던 사람들이 그 박자를 알았다.

탁.

그레이의 장부 속에서 “수리 필요”로 남아 있던 항목들이 떠올랐다.

탁.

푸리나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박수와는 다른 소리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박수였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손의 박수.

만인이 못을 박는 동안, 객석의 인부 몇 명이 낮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박으면 다시 빠지는데.”

“각도가 틀렸어.”

“망치 잡는 법도 모르네.”

죠니가 피식 웃었다.

“현실적인 관객평이네.”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

“뭘 또 좋아해?”

“올라오게 하자.”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진심이냐?”

“응.”

“극 진행 중인데?”

“그러니까.”

푸리나는 무대 앞으로 나섰다.

“혹시 저 문을 제대로 고칠 줄 아는 사람?”

객석이 웅성거렸다.

그레이가 즉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즉흥 연출은 사전에—”

“지금 통보했어!”

“그건 사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부 하나가 손을 들고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좋아! 무대 위로!”

인부는 당황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등을 떠밀었다. 그는 무대 위로 올라가 만인의 손에서 망치를 받아 들었다.

“이건 이렇게 잡는 게 아닙니다.”

만인이 멍하니 말했다.

“그렇소?”

“예. 못도 비스듬히 들어갔습니다. 이러면 금방 빠집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인부는 문틀을 바로잡고, 못을 뽑아 다시 박았다.

탁.

이번 소리는 달랐다.

더 깊고, 더 단단했다.

인부는 두 번째 못을 박았다.

탁.

세 번째.

탁.

마당의 소리가 변했다.

이제 그것은 연극의 소리이면서 동시에 실제 수리의 소리였다.

무너진 문이 조금 바로 섰다.

선행은 조용히 웃었다.

“이렇게요.”

만인은 인부를 보았다.

“당신도 선행이오?”

인부는 당황했다.

“저는 그냥 목수입니다.”

여관 주인이 말했다.

“대체로 그런 분들이 길을 고칩니다.”

인부는 얼굴을 붉혔다.

객석에서 박수가 나왔다.

이번 박수는 참지 않아도 되는 박수였다.

작고 따뜻한 박수.

푸리나는 그 박수를 받으며 눈을 빛냈다.

이것이 그녀가 원한 것이었다.

관객이 관객으로만 남지 않는 순간.
자기 삶의 자리에서 무대 위로 한 발 올라오는 순간.
거창한 영웅이 아니어도, 자기 손에 익은 일로 누군가의 문을 고치는 순간.

[여관:극장]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깊어짐은 푸리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의 장부가 있었다.
하융의 창이 있었다.
레이튼의 질문이 있었다.
죠니의 낮은 현실감이 있었다.
목수의 망치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 부름이 있었다.
여관 주인의 차가 있었다.

푸리나는 문득, 아주 짧게 현기증을 느꼈다.

많다.

너무 많다.

이 많은 손님들이, 이 많은 이야기들이, 이 많은 슬픔과 웃음과 편지와 문패들이 한꺼번에 자기 극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웃고 있었지만, 안쪽 어딘가가 조금 흔들렸다.

내가 다 받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무대 구석에서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빈 찻잔 하나를 들어 보였다.

쉬어가시겠습니까?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렸다.

푸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아직.

아직은 막이 닫히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더 권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도 여관의 방식이었다.

무대 위에서 선행은 마지막으로 빈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보세요.”

만인은 바구니를 보았다.

“비었군.”

“예.”

“그럼 이제 아무것도 없나?”

선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가벼워졌습니다.”

만인은 이해하지 못했다.

선행은 웃었다.

“나눠준 것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길이 됩니다. 물은 누군가의 숨으로 남고, 편지는 대화로 남고, 못은 문으로 남고, 빵은 내일 아침으로 남습니다.”

그는 빈 바구니를 만인에게 건넸다.

“마지막 여관에 들고 갈 짐은, 가벼운 편이 좋다면서요?”

만인은 빈 바구니를 받았다.

그는 처음으로 조금 편안하게 웃었다.

“그렇군.”

여관 주인이 말했다.

“짐을 비우는 법을 배우셨군요.”

“그게 좋은 일입니까?”

“대체로 그렇습니다.”

“항상은 아니고?”

“비워서는 안 되는 것까지 버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관 주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무대 뒤의 문패로 향했다.

이름.
기억.
책임.
읽어야 할 편지.
고쳐야 할 문.

그것들은 비워서는 안 되는 짐이었다.

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구분해야겠군.”

레이튼이 무대 뒤에서 부드럽게 말했다.

“좋은 질문에 도달하셨습니다.”

죠니가 그를 보았다.

“너 지금 무대에 대고 말한 거야?”

“아주 작게만요.”

“관객 다 들었어.”

“그렇다면 더 좋군요.”

푸리나는 웃었다.

이제 다음 장면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 객석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배우가 아니었다.

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 손에 낡은 편지 묶음을 들고 있었다.

그레이가 바로 알아보았다.

피난민 명단에 있던 사람.
북쪽 마을에서 온 여인.
아들 둘을 전쟁에서 잃고, 아직 한 명의 사망 확인을 받지 못한 사람.

여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여인은 당황해 고개를 숙였다.

“공연을 방해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방해가 아닙니다.”

여인은 편지 묶음을 가슴에 안았다.

“그러면…… 이것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전쟁 중 주소를 잃은 편지.
받을 사람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편지.
누구에게 전해야 할지 몰라 품에만 남은 말들.

그레이의 눈이 흔들렸다.

푸리나는 무대 위에서 그 편지들을 보았다.

선행의 바구니는 비었지만, 객석에는 아직 너무 많은 짐이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이 극은 다시 방향을 바꾸려 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선행.

그 다음은, 도착하지 못한 말들.

푸리나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여관 주인은 편지 묶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편지는 대체로 길을 찾고 싶어 합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조금 지친 웃음이었다.

하지만 눈은 빛나고 있었다.

“좋아.”

그녀는 관객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다음 장면은 우체국이야!”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여관극이라더니 점점 행정극이 되는데.”

그레이는 편지 묶음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필요한 장면입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극장이 여관이 되고, 여관이 우체국이 되는군요. 훌륭합니다. 모든 좋은 장소는 결국 길을 잃은 말을 받아야 하지요.”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도착하지 못한 편지들이 불타 사라진 세계.
받지 못한 말 때문에 산 자들이 평생 문 앞에서 서성이는 세계.
그 세계들이 아직 닫히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낮게 말했다.

“서둘러야 하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다시 손을 들었다.

무대 뒤의 시종들이 긴 탁자를 가져왔다.
그 위에 작은 등불과 잉크, 빈 봉투, 이름표들이 놓였다.

여관 주인은 찻잔을 치우고 그 탁자 곁에 섰다.

그레이는 장부를 들고 올라왔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서 선언했다.

“이번 장면은 아주 간단해.”

그녀의 목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퍼졌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 사람은, 이 무대 위에 올려놓아도 좋아.”

마당이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오늘 다 도착하지 못해도 괜찮아. 하지만 길을 잃은 말에게 첫 번째 주소는 줄 수 있겠지.”

그리고 가장 먼저, 늙은 여인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편지 묶음은 작았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어떤 왕관보다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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