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47여관◆zAR16hM8he(7ce028f3)2026-05-11 (월) 09:19:47
7막. 모든 여관의 가장 깊은 복도
무대 위의 편지들은 각자의 길을 얻었다.
산 자에게 가야 할 편지는 그레이의 장부 옆에 묶였다.
죽은 자의 문패에 맡길 편지는 여관 주인이 작은 상자에 담아 문 앞에 내려두었다.
아직 수신자를 확인해야 할 편지는 레이튼의 질문들과 함께 정리되었다.
보내는 사람이 먼저 읽어야 할 편지는 조용한 의자 위에 놓였다.
그리고 만인은 다시 무대 중앙에 섰다.
그의 품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초대장.
포대기.
읽은 편지.
나무 말.
빈 바구니.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 한 통.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는 양손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동전 몇 닢과 술잔 하나와 내일도 별일 없으리라는 믿음만 들고 있던 사람.
그러나 이제 그는 많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보다 조금 더 가벼워 보였다.
만인은 관객을 보았다.
“나는 돌아왔다.”
그 말은 5막에서도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때의 돌아옴은 마지막 여관의 문 앞에서 물러난 자의 말이었다.
이번의 돌아옴은, 편지와 이름과 선행과 기억을 지나 다시 자기 자리로 온 사람의 말이었다.
만인은 품속의 초대장을 꺼냈다.
아직 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그 안에 적힌 날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만인은 여관 주인을 보았다.
“나는 아직 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여관 주인은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죽은 자에게 갈 편지 상자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아직 따뜻한 찻잔이 있었다.
“예.”
“그런데도 저는 언젠가 그 여관으로 가겠지요.”
“예.”
“그럼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여관 주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는 만인의 품에 안긴 것들을 하나씩 보았다.
포대기.
편지.
나무 말.
빈 바구니.
초대장.
그리고 말했다.
“손님께서 들고 계신 것들을 살펴보셔야겠지요.”
만인은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이 마지막 여관까지 따라옵니까?”
“어떤 것은 문 앞까지 옵니다. 어떤 것은 방 안까지 옵니다. 어떤 것은 중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어떤 것은 손님께서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셔도, 이미 다른 사람의 길에 남아 있을 겁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는 먼저 동전을 보았다.
재산이 남긴 동전.
그것은 이제 탁자 위의 접시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건 두고 가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 제가 이것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남겠지요.”
만인은 다음으로 찢어진 포스터를 보았다.
명성이 맡긴 이름.
빈 문패 옆에 놓인 그것은 이제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박수 아래 묻힌 이름이었다.
만인은 말했다.
“이것도 제가 들고 갈 수는 없겠지요.”
“명성은 대체로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름은요?”
여관 주인은 빈 문패를 보았다.
“이름은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그 말은 그녀에게도 닿았다.
만인은 왕관을 보았다.
권력이 남긴 왕관.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으로 한 번 닦고,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무겁습니다.”
여관 주인은 말했다.
“왕관은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두고 가겠습니다.”
“예.”
“하지만 명령의 결과는 남겠지요.”
“그렇습니다.”
만인은 포대기를 품에 안았다.
“이건…… 가져가도 됩니까?”
여관 주인은 잠시 포대기를 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이 사랑받았다는 기억이라면, 아마 오래 함께할 겁니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읽은 편지.
“이건요?”
“읽은 말은, 이미 손님 안에 들어갔습니다.”
나무 말.
“이건 아이가 준 겁니다.”
“무서우실 때 잡으라고 했지요.”
“예.”
“그렇다면 필요할 때까지는 들고 계셔도 됩니다.”
빈 바구니.
“이건 비었습니다.”
“가볍겠군요.”
“하지만 이상하게, 이게 제일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좋은 빈 그릇은 다음 것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만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를 보았다.
그 편지는 아직 봉해져 있었다.
그는 물었다.
“이 편지는 언제 읽어야 합니까?”
여관 주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푸리나가 무대 옆에서 말했다.
“그건 네가 정해야 해.”
만인이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관객석과 무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군가 대신 읽어줄 수는 있어. 누군가 대신 보관해줄 수도 있고, 누군가 대신 주소를 적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를 언제 열지는, 결국 네가 정해야 해.”
여관 주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만인은 편지를 품에 넣었다.
“그럼 아직 열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비겁한 겁니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차가 너무 뜨거울 때도 있습니다.”
만인은 웃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여관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객석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은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
“자.”
그녀의 목소리가 마당 위로 퍼졌다.
“만인은 많은 것을 두고 가야 해. 재산도, 명성도, 권력도, 어쩌면 젊음도, 아름다움도, 익숙한 집도.”
그녀는 만인의 옆에 섰다.
“친구와 가족은 문 앞까지 함께해줄 수 있어. 선행은 작은 짐이 되어 같이 걸을 수 있고, 편지는 길을 찾을 수 있어. 이름은 문패가 되고, 기억은 방이 될 수 있어.”
푸리나는 객석을 보았다.
“그럼 질문은 이것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무엇을 들고 마지막 여관에 갈 수 있을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무대 뒤의 문이 열렸다.
원래라면 배우 대기실로 이어져야 할 문이었다.
그 안에는 소품 창고가 있어야 했다.
망토와 가짜 왕관, 여분의 촛대, 목수의 망치, 빈 물병, 아직 쓰지 않은 편지지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 안쪽에는 복도가 있었다.
길고, 오래되고, 따뜻한 복도.
아무도 그 문을 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먼 길을 걸은 뒤 여관 문을 열었을 때 맞는, 나무와 차와 오래된 천의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푸리나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장치를 알고 있었다.
무대 뒤 문은 원래 이렇게 깊지 않았다.
그녀가 지시한 복도는 고작 세 걸음짜리 가짜 복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있었다.
양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이 있었다.
어떤 문은 극장의 분장실처럼 보였다.
낡은 거울과 흰 분가루 냄새가 났다.
어떤 문은 전쟁터의 천막 같았다.
젖은 가죽과 피 묻은 붕대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어떤 문은 아이가 태어난 방 같았다.
따뜻한 물과 갓 빨아 널어둔 천 냄새가 났다.
어떤 문은 장례식 뒤 비워둔 침실 같았다.
향 냄새와 오래 접어둔 옷 냄새가 났다.
어떤 문에는 왕관 모양 손잡이가 있었다.
어떤 문에는 병사의 방패 조각이 걸려 있었다.
어떤 문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그저 작은 나무 문패 하나만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문은, 같은 여관의 복도에 있었다.
객석의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누군가는 자기 어릴 적 집의 문을 보았다.
누군가는 전사한 남편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보았다.
누군가는 아직 열면 안 되는 문을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는 언젠가 자신이 도착할 방을 보고,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했다.
아이 하나는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문패가 걸린 작은 방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문틈에서는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담요 끝을 잡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이름 옆에 아주 작은 표시가 생겨 있었다.
문패 모양의 표시.
그레이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적은 이름이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잉크가 빛난 것은 아니었다.
장부가 신성한 광채를 뿜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름이 길을 잃지 않았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레이튼은 복도 위쪽을 보았다.
천장에는 별들이 있었다.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빛들.
하지만 그것들은 하늘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복도 곳곳에 걸린 작은 등불처럼 보였다.
별들은 답이 아니었다.
방을 찾는 손님들을 위한 등불이었다.
레이튼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이, 이곳에서는 길잡이가 되는군요.”
하융은 복도 양쪽의 창들을 보았다.
어떤 문 사이에는 창이 있었다.
회색빛 창호.
비껴간 가능성이 비치는 창.
그 창마다 다른 밤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밤.
더 적은 사람이 죽은 밤.
편지가 끝내 도착하지 않은 밤.
아이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밤.
푸리나가 공연을 열지 않은 밤.
그레이가 이름을 찾지 못한 밤.
죠니가 새벽 길을 포기한 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지 않은 밤.
그리고 그 모든 창들은 복도의 벽에 나 있었다.
하융은 처음으로 조금 이해했다.
가능성은 도망칠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방을 밝히기 위한 창이었다.
죠니는 복도 바닥을 보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자국이 있었다.
지팡이 자국.
아이의 작은 발자국.
피 묻은 장화 자국.
맨발 자국.
수레바퀴 자국.
그리고 말발굽 자국.
그중 어떤 자국은 나선처럼 빙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 돌아온 길이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진짜 다들 여기까지 오긴 오는군.”
여관 주인은 복도 앞에 서 있었다.
방금까지 마당에서 찻잔을 정리하던 남자.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조금씩 다르게 그를 보았다.
누군가에게 그는 낡은 주막의 주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집의 문을 열어주던 아버지였다.
누군가에게는 장례식 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전쟁터에서 물 한 그릇을 내밀던 이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에게 그는 오래된 극장의 지배인처럼 보였다.
무대 뒤의 모든 문과 조명과 객석의 숨소리를 알고 있는 사람.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지막 의자를 정리하고, 배우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그레이에게 그는 문패와 숙박부를 관리하는 조용한 주인처럼 보였다.
레이튼에게는 책갈피가 꽂힌 숙박부를 넘기는 서재 주인처럼 보였다.
하융에게는 수많은 창문이 있는 복도 끝의 사람처럼 보였다.
죠니에게는 먼 길 끝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손님이 많군요.”
여관 주인은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 여관의 방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 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야전 여관의 마당 전체가 조용히 숙였다.
성좌.
그 말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느꼈다.
저 이는 왕도, 사제도, 배우도, 단순한 여관 주인도 아니었다.
그는 길 끝에서 기다리는 자였다.
모든 여관의 가장 깊은 복도에 서 있는 자였다.
산 자에게 돌아갈 문을, 죽은 자에게 쉬어갈 방을 내어주는 자였다.
푸리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푸리나라면 이런 순간에 더 화려한 말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주연이 모습을 드러냈군!”이라든가, “이 극의 숨은 후원자여!”라든가, “내 무대에 몰래 출연하다니, 출연료는 각오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예, 손님.”
푸리나는 그 한마디에 눈을 깜빡였다.
“나도 손님이야?”
“오늘은 그러신 듯합니다.”
“나는 극장주인데?”
“극장주도 오래 서 계셨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이려다가,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녀는 계속 서 있었다.
무대를 열고, 관객을 보고, 울음을 기다리고, 편지를 길 위에 올리고, 웃음이 다시 돌아오도록 조명을 조정했다.
누군가를 쉬게 하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복도 옆 작은 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 문에는 새 문패가 걸려 있었다.
「주인장 휴식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거 뭐야?!”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필요해 보여서 마련해두었습니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좋네. 네가 제일 필요한 방이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왜. 틀린 말 아니잖아.”
그레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가 그걸 보고 배신당한 얼굴을 했다.
“그레이까지?”
그레이는 시선을 피했다.
“필요해 보였습니다.”
레이튼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만장일치에 가깝군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방이 없는 가능성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소.”
푸리나는 한동안 모두를 보았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정말이지…… 내 가신들은 너무 잔인해.”
죠니가 말했다.
“이 정도면 다정한 거야.”
여관 주인은 찻잔 하나를 푸리나에게 내밀었다.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푸리나는 찻잔을 보았다.
관객이 보고 있었다.
가신들이 보고 있었다.
무대가 보고 있었다.
여관의 깊은 복도가 열려 있었다.
푸리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찻잔을 받았다.
“아직 막은 안 끝났어.”
“예.”
“그러니까 아주 잠깐만이야.”
“여관은 대체로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그녀는 무대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마당의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
푸리나가 앉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이상하게 안심했다.
계속 웃게 해주던 사람도, 계속 조명을 올리던 사람도, 계속 무대를 붙잡던 사람도 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언젠가 앉아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푸리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여관 주인을 보았다.
“내 극장은 오늘 정말 여관이 되었어?”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예. 좋은 여관이었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찻잔을 감쌌다.
“정말?”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기에는 충분했지요.”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질문처럼 들렸다.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다.
숨을 고르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이 오늘 그녀의 극장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나는 더 큰 극장을 만들고 싶어.”
여관 주인은 조용히 들었다.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잃지 않게 하고 싶어. 더 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하고 싶어. 죽은 사람의 이름도, 산 사람의 울음도, 길 잃은 편지도, 모두 자리를 찾게 하고 싶어.”
그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리려다, 그들의 슬픔까지 장식으로 써버리면 어떡하지?”
마당은 조용했다.
그것은 푸리나가 처음으로 꺼낸, 극장주의 질문이었다.
여관 주인은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장식으로 쓰고 있는지, 방을 내어드리고 있는지는 손님께서 계속 물으셔야 합니다.”
“계속?”
“예.”
여관 주인은 복도 너머의 수많은 문을 보았다.
“극장은 박수를 향합니다. 여관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두 가지를 모두 하시려면, 박수 뒤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으셔야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지금 당장 모두 알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 식기 전까지는, 답을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드네.”
그레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장부를 안고 있었다.
복도에 열린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골목문이 그녀 뒤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비가 그친 돌길, 문패, 등불, 조용히 잠든 이름들.
그레이는 낮게 물었다.
“제가 이름을 적으면…… 정말 그분들이 길을 찾습니까?”
여관 주인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놓지 못해서 장부에 붙들어두는 것은 아닙니까?”
여관 주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붙잡기 위해 적는 이름과,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적는 이름은 다릅니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 이름이 문패입니까, 아니면 자물쇠입니까?”
그레이는 숨을 삼켰다.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레이 님. 손님이 방을 찾으셨다면, 문패는 사라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문을 잠그는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기억하겠습니다.”
“이미 잘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그레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아직 놓친 이름이 많습니다.”
“그러니 계속 적으시면 됩니다.”
여관 주인은 말했다.
“다만 손님께서도 가끔 손을 쉬셔야 합니다. 잉크가 마르지 않으려면, 쓰는 손도 떨리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 [여관:문답의 서재]의 문이 열렸다. 끝없는 서가, 아직 결말이 쓰이지 않은 책들, 이름 붙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 있는 미완의 질문들.
레이튼은 모자를 벗고 정중히 물었다.
“질문은 닫힌 답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손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 환대는 아니겠지요.”
그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언제 질문을 멈추어야 합니까?”
여관 주인은 즉시 답했다.
“손님께서 차를 드실 때입니다.”
레이튼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렇군요. 이토록 명쾌한 답을 듣는 것은 오랜만입니다.”
“질문은 문을 여는 좋은 손잡이입니다.”
여관 주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온 손님에게도 계속 손잡이를 쥐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훌륭합니다. 오늘 밤 가장 좋은 수수께끼였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답까지 들었는데 수수께끼냐?”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답은 다음 질문의 문이지요.”
“피곤한 사람이야.”
하융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 회색빛 창호들이 보였다.
창밖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비쳤다.
더 나은 밤.
더 나쁜 밤.
비껴간 죽음.
선택되지 않은 생존.
죽은 세계의 빛.
하융은 여관 주인을 향해 물었다.
“다른 가능성의 창들도, 이 여관에 닿아 있었소?”
여관 주인은 하융을 보았다.
“많은 창은 방의 벽에 나 있습니다.”
하융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른 창에는, 더 나은 밤도 있었소. 덜 죽고, 덜 울고, 더 많은 편지가 제때 도착한 밤도 있었소. 그런데도 이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죽은 가능성들을 버리는 일이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창밖을 보는 일과, 창밖으로 떠나는 일은 다릅니다.”
하융의 눈이 흔들렸다.
“보셨다면, 그것은 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손님께서 주무실 방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여관 주인은 회색빛 창호를 보았다.
“다른 창의 빛은, 이 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 쓰시면 됩니다.”
하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수많은 창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창이 아니라 방을 보았다.
지금 이 현실.
이 마당.
이 극장.
이 사람들.
이 선택.
하융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소.”
죠니가 마지막으로 다가왔다.
그는 복도 바닥의 말발굽 자국을 보고 있었다.
멀리 돌아간 자국들.
돌고 돌아 결국 여관 문 앞에 닿는 자국들.
죠니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멀리 돌아가는 길도 결국 여기로 오나?”
여관 주인은 말했다.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별로 위로는 안 되는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차분히 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있다는 것과, 지금 당장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요.”
죠니는 복도 바깥, 마구간 쪽을 보았다.
새벽에 달릴 말들이 있었다.
배달해야 할 편지가 있었다.
확인해야 할 길이 있었다.
“그럼 됐어.”
그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달리면 되겠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말에게 안장을 얹으실 시간이니까요.”
죠니는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푸리나는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군상극.
그녀 혼자 만든 극이 아니었다.
그녀 혼자 받을 수 있는 손님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능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여관 주인을 보았다.
“당신은…… 또 올 거야?”
여관 주인은 잠시 생각했다.
“손님이 정말로 쉬어야 할 때에는, 대체로 여관이 보이는 법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평소에는 안 온다는 뜻이네?”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평소에는 손님께서 좋은 여관들을 많이 세워두셨으니까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건…… 칭찬으로 들어둘게.”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여관 주인은 복도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복도의 수많은 문들이 아주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닫힌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문패는 여전히 따뜻한 빛을 품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갈 편지 상자는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산 자에게 갈 편지 묶음은 죠니의 손에 있었다.
그레이의 장부에는 이름이 남았다.
레이튼의 수첩에는 질문이 남았다.
하융의 창에는 등불이 남았다.
푸리나의 극장에는 주인장 휴식실의 문이 남았다.
여관 주인은 마지막으로 빈 객석과 무대, 그리고 아직 길 위에 있는 모든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여러분의 여정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마침내 평안에 닿으시기를.”
그는 열린 복도 안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패와 등불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저는 차를 따뜻하게 데워두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이 폭발하지 않았다.
찬송이 울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계시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여관 주인이 안쪽 일을 보러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 열린 틈으로 따뜻한 차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죠니가 한참 뒤에 말했다.
“그래서…… 우리 방금 신이랑 얘기한 거 맞지?”
레이튼이 수첩을 덮으며 답했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군요. 신과 이야기한 것인지, 여관 주인과 이야기한 것인지.”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둘 다였던 것 같습니다.”
하융은 열린 문틈을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길은 닫히지 않았소.”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여관 주인이 남기고 간 차는 아직 식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
“좋아.”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또 뭐가 좋아.”
푸리나는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다음 공연에는 차 예산을 더 넣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안 됩니다.”
“왜?!”
“이번 공연 예산도 아직 정산되지 않았습니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방금 신이 차 줬는데도 예산은 못 이기네.”
레이튼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예산은 대체로 신보다 오래 남는 질문입니다.”
푸리나는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너희들, 방금 엄청 신비로운 장면 끝난 거 잊었어?!”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그래서 더 정산해야 합니다.”
하융은 낮게 웃었다.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빈 객석을 지나,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흘러갔다.
그날 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야전 여관 마당에는 찻잔 하나가 남았다.
식지 않은 찻잔.
그리고 무대 뒤의 문은, 아주 조금 열린 채로 남아 있었다.
무대 위의 편지들은 각자의 길을 얻었다.
산 자에게 가야 할 편지는 그레이의 장부 옆에 묶였다.
죽은 자의 문패에 맡길 편지는 여관 주인이 작은 상자에 담아 문 앞에 내려두었다.
아직 수신자를 확인해야 할 편지는 레이튼의 질문들과 함께 정리되었다.
보내는 사람이 먼저 읽어야 할 편지는 조용한 의자 위에 놓였다.
그리고 만인은 다시 무대 중앙에 섰다.
그의 품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초대장.
포대기.
읽은 편지.
나무 말.
빈 바구니.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 한 통.
처음 등장했을 때의 그는 양손이 가벼운 사람이었다.
동전 몇 닢과 술잔 하나와 내일도 별일 없으리라는 믿음만 들고 있던 사람.
그러나 이제 그는 많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보다 조금 더 가벼워 보였다.
만인은 관객을 보았다.
“나는 돌아왔다.”
그 말은 5막에서도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그때의 돌아옴은 마지막 여관의 문 앞에서 물러난 자의 말이었다.
이번의 돌아옴은, 편지와 이름과 선행과 기억을 지나 다시 자기 자리로 온 사람의 말이었다.
만인은 품속의 초대장을 꺼냈다.
아직 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그 안에 적힌 날짜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만인은 여관 주인을 보았다.
“나는 아직 가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여관 주인은 문가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죽은 자에게 갈 편지 상자가 있었고, 다른 손에는 아직 따뜻한 찻잔이 있었다.
“예.”
“그런데도 저는 언젠가 그 여관으로 가겠지요.”
“예.”
“그럼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여관 주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는 만인의 품에 안긴 것들을 하나씩 보았다.
포대기.
편지.
나무 말.
빈 바구니.
초대장.
그리고 말했다.
“손님께서 들고 계신 것들을 살펴보셔야겠지요.”
만인은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이 마지막 여관까지 따라옵니까?”
“어떤 것은 문 앞까지 옵니다. 어떤 것은 방 안까지 옵니다. 어떤 것은 중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또 어떤 것은 손님께서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셔도, 이미 다른 사람의 길에 남아 있을 겁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는 먼저 동전을 보았다.
재산이 남긴 동전.
그것은 이제 탁자 위의 접시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건 두고 가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신 제가 이것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남겠지요.”
만인은 다음으로 찢어진 포스터를 보았다.
명성이 맡긴 이름.
빈 문패 옆에 놓인 그것은 이제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박수 아래 묻힌 이름이었다.
만인은 말했다.
“이것도 제가 들고 갈 수는 없겠지요.”
“명성은 대체로 문턱을 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름은요?”
여관 주인은 빈 문패를 보았다.
“이름은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그 말은 그녀에게도 닿았다.
만인은 왕관을 보았다.
권력이 남긴 왕관.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그저 손수건으로 한 번 닦고,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건 무겁습니다.”
여관 주인은 말했다.
“왕관은 대체로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두고 가겠습니다.”
“예.”
“하지만 명령의 결과는 남겠지요.”
“그렇습니다.”
만인은 포대기를 품에 안았다.
“이건…… 가져가도 됩니까?”
여관 주인은 잠시 포대기를 보았다.
“그 안에 든 것이 사랑받았다는 기억이라면, 아마 오래 함께할 겁니다.”
만인은 편지를 보았다.
읽은 편지.
“이건요?”
“읽은 말은, 이미 손님 안에 들어갔습니다.”
나무 말.
“이건 아이가 준 겁니다.”
“무서우실 때 잡으라고 했지요.”
“예.”
“그렇다면 필요할 때까지는 들고 계셔도 됩니다.”
빈 바구니.
“이건 비었습니다.”
“가볍겠군요.”
“하지만 이상하게, 이게 제일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좋은 빈 그릇은 다음 것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만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를 보았다.
그 편지는 아직 봉해져 있었다.
그는 물었다.
“이 편지는 언제 읽어야 합니까?”
여관 주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푸리나가 무대 옆에서 말했다.
“그건 네가 정해야 해.”
만인이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관객석과 무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누군가 대신 읽어줄 수는 있어. 누군가 대신 보관해줄 수도 있고, 누군가 대신 주소를 적어줄 수도 있어.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를 언제 열지는, 결국 네가 정해야 해.”
여관 주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만인은 편지를 품에 넣었다.
“그럼 아직 열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비겁한 겁니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차가 너무 뜨거울 때도 있습니다.”
만인은 웃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여관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객석에서 아주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 웃음은 다시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 웃음을 듣고, 무대 중앙으로 나섰다.
“자.”
그녀의 목소리가 마당 위로 퍼졌다.
“만인은 많은 것을 두고 가야 해. 재산도, 명성도, 권력도, 어쩌면 젊음도, 아름다움도, 익숙한 집도.”
그녀는 만인의 옆에 섰다.
“친구와 가족은 문 앞까지 함께해줄 수 있어. 선행은 작은 짐이 되어 같이 걸을 수 있고, 편지는 길을 찾을 수 있어. 이름은 문패가 되고, 기억은 방이 될 수 있어.”
푸리나는 객석을 보았다.
“그럼 질문은 이것이야.”
마당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무엇을 들고 마지막 여관에 갈 수 있을까?”
그 말이 떨어진 순간, 무대 뒤의 문이 열렸다.
원래라면 배우 대기실로 이어져야 할 문이었다.
그 안에는 소품 창고가 있어야 했다.
망토와 가짜 왕관, 여분의 촛대, 목수의 망치, 빈 물병, 아직 쓰지 않은 편지지들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 안쪽에는 복도가 있었다.
길고, 오래되고, 따뜻한 복도.
아무도 그 문을 연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차갑지 않았다.
먼 길을 걸은 뒤 여관 문을 열었을 때 맞는, 나무와 차와 오래된 천의 냄새가 섞인 바람이었다.
푸리나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장치를 알고 있었다.
무대 뒤 문은 원래 이렇게 깊지 않았다.
그녀가 지시한 복도는 고작 세 걸음짜리 가짜 복도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있었다.
양쪽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이 있었다.
어떤 문은 극장의 분장실처럼 보였다.
낡은 거울과 흰 분가루 냄새가 났다.
어떤 문은 전쟁터의 천막 같았다.
젖은 가죽과 피 묻은 붕대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어떤 문은 아이가 태어난 방 같았다.
따뜻한 물과 갓 빨아 널어둔 천 냄새가 났다.
어떤 문은 장례식 뒤 비워둔 침실 같았다.
향 냄새와 오래 접어둔 옷 냄새가 났다.
어떤 문에는 왕관 모양 손잡이가 있었다.
어떤 문에는 병사의 방패 조각이 걸려 있었다.
어떤 문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그저 작은 나무 문패 하나만 달려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문은, 같은 여관의 복도에 있었다.
객석의 사람들이 숨을 멈췄다.
누군가는 자기 어릴 적 집의 문을 보았다.
누군가는 전사한 남편의 이름이 적힌 문패를 보았다.
누군가는 아직 열면 안 되는 문을 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는 언젠가 자신이 도착할 방을 보고,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했다.
아이 하나는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문패가 걸린 작은 방을 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문틈에서는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저 담요 끝을 잡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내려다보았다.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이름 옆에 아주 작은 표시가 생겨 있었다.
문패 모양의 표시.
그레이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적은 이름이 어디론가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잉크가 빛난 것은 아니었다.
장부가 신성한 광채를 뿜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름이 길을 잃지 않았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레이튼은 복도 위쪽을 보았다.
천장에는 별들이 있었다.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은 별들.
이름 붙여지지 않은 빛들.
하지만 그것들은 하늘에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복도 곳곳에 걸린 작은 등불처럼 보였다.
별들은 답이 아니었다.
방을 찾는 손님들을 위한 등불이었다.
레이튼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이, 이곳에서는 길잡이가 되는군요.”
하융은 복도 양쪽의 창들을 보았다.
어떤 문 사이에는 창이 있었다.
회색빛 창호.
비껴간 가능성이 비치는 창.
그 창마다 다른 밤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밤.
더 적은 사람이 죽은 밤.
편지가 끝내 도착하지 않은 밤.
아이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밤.
푸리나가 공연을 열지 않은 밤.
그레이가 이름을 찾지 못한 밤.
죠니가 새벽 길을 포기한 밤.
레이튼이 질문을 던지지 않은 밤.
그리고 그 모든 창들은 복도의 벽에 나 있었다.
하융은 처음으로 조금 이해했다.
가능성은 도망칠 세계가 아니었다.
지금 방을 밝히기 위한 창이었다.
죠니는 복도 바닥을 보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자국이 있었다.
지팡이 자국.
아이의 작은 발자국.
피 묻은 장화 자국.
맨발 자국.
수레바퀴 자국.
그리고 말발굽 자국.
그중 어떤 자국은 나선처럼 빙 돌아가고 있었다.
멀리 돌아온 길이었다.
죠니는 낮게 말했다.
“……진짜 다들 여기까지 오긴 오는군.”
여관 주인은 복도 앞에 서 있었다.
방금까지 마당에서 찻잔을 정리하던 남자.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조금씩 다르게 그를 보았다.
누군가에게 그는 낡은 주막의 주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어릴 적 집의 문을 열어주던 아버지였다.
누군가에게는 장례식 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제였다.
누군가에게는 전쟁터에서 물 한 그릇을 내밀던 이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에게 그는 오래된 극장의 지배인처럼 보였다.
무대 뒤의 모든 문과 조명과 객석의 숨소리를 알고 있는 사람.
공연이 끝난 뒤에도 마지막 의자를 정리하고, 배우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그레이에게 그는 문패와 숙박부를 관리하는 조용한 주인처럼 보였다.
레이튼에게는 책갈피가 꽂힌 숙박부를 넘기는 서재 주인처럼 보였다.
하융에게는 수많은 창문이 있는 복도 끝의 사람처럼 보였다.
죠니에게는 먼 길 끝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여관 주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손님이 많군요.”
여관 주인은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 여관의 방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 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야전 여관의 마당 전체가 조용히 숙였다.
성좌.
그 말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느꼈다.
저 이는 왕도, 사제도, 배우도, 단순한 여관 주인도 아니었다.
그는 길 끝에서 기다리는 자였다.
모든 여관의 가장 깊은 복도에 서 있는 자였다.
산 자에게 돌아갈 문을, 죽은 자에게 쉬어갈 방을 내어주는 자였다.
푸리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의 푸리나라면 이런 순간에 더 화려한 말을 찾았을 것이다.
“마침내 주연이 모습을 드러냈군!”이라든가, “이 극의 숨은 후원자여!”라든가, “내 무대에 몰래 출연하다니, 출연료는 각오해!”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푸리나를 보았다.
“예, 손님.”
푸리나는 그 한마디에 눈을 깜빡였다.
“나도 손님이야?”
“오늘은 그러신 듯합니다.”
“나는 극장주인데?”
“극장주도 오래 서 계셨습니다.”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이려다가,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이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녀는 계속 서 있었다.
무대를 열고, 관객을 보고, 울음을 기다리고, 편지를 길 위에 올리고, 웃음이 다시 돌아오도록 조명을 조정했다.
누군가를 쉬게 하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한 번도 앉지 않았다.
여관 주인은 복도 옆 작은 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 문에는 새 문패가 걸려 있었다.
「주인장 휴식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거 뭐야?!”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필요해 보여서 마련해두었습니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좋네. 네가 제일 필요한 방이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죠니!”
“왜. 틀린 말 아니잖아.”
그레이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가 그걸 보고 배신당한 얼굴을 했다.
“그레이까지?”
그레이는 시선을 피했다.
“필요해 보였습니다.”
레이튼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만장일치에 가깝군요.”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그 방이 없는 가능성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소.”
푸리나는 한동안 모두를 보았다.
그러다 작게 웃었다.
“정말이지…… 내 가신들은 너무 잔인해.”
죠니가 말했다.
“이 정도면 다정한 거야.”
여관 주인은 찻잔 하나를 푸리나에게 내밀었다.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푸리나는 찻잔을 보았다.
관객이 보고 있었다.
가신들이 보고 있었다.
무대가 보고 있었다.
여관의 깊은 복도가 열려 있었다.
푸리나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찻잔을 받았다.
“아직 막은 안 끝났어.”
“예.”
“그러니까 아주 잠깐만이야.”
“여관은 대체로 잠깐 머무는 곳입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그녀는 무대 중앙의 의자에 앉았다.
그 순간, 마당의 공기가 아주 조금 풀렸다.
푸리나가 앉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이상하게 안심했다.
계속 웃게 해주던 사람도, 계속 조명을 올리던 사람도, 계속 무대를 붙잡던 사람도 앉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언젠가 앉아도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푸리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다행입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여관 주인을 보았다.
“내 극장은 오늘 정말 여관이 되었어?”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예. 좋은 여관이었습니다.”
푸리나의 손이 찻잔을 감쌌다.
“정말?”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기에는 충분했지요.”
푸리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질문처럼 들렸다.
오래 머무를 곳은 아니었다.
숨을 고르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이 오늘 그녀의 극장이었다.
푸리나는 낮게 물었다.
“나는 더 큰 극장을 만들고 싶어.”
여관 주인은 조용히 들었다.
“더 많은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잃지 않게 하고 싶어. 더 많은 사람이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하고 싶어. 죽은 사람의 이름도, 산 사람의 울음도, 길 잃은 편지도, 모두 자리를 찾게 하고 싶어.”
그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리려다, 그들의 슬픔까지 장식으로 써버리면 어떡하지?”
마당은 조용했다.
그것은 푸리나가 처음으로 꺼낸, 극장주의 질문이었다.
여관 주인은 잠시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장식으로 쓰고 있는지, 방을 내어드리고 있는지는 손님께서 계속 물으셔야 합니다.”
“계속?”
“예.”
여관 주인은 복도 너머의 수많은 문을 보았다.
“극장은 박수를 향합니다. 여관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두 가지를 모두 하시려면, 박수 뒤의 숨소리를 놓치지 않으셔야겠지요.”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지금 당장 모두 알 필요는 없습니다. 차가 식기 전까지는, 답을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조금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드네.”
그레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장부를 안고 있었다.
복도에 열린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골목문이 그녀 뒤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비가 그친 돌길, 문패, 등불, 조용히 잠든 이름들.
그레이는 낮게 물었다.
“제가 이름을 적으면…… 정말 그분들이 길을 찾습니까?”
여관 주인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놓지 못해서 장부에 붙들어두는 것은 아닙니까?”
여관 주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붙잡기 위해 적는 이름과, 길을 잃지 않게 하려고 적는 이름은 다릅니다.”
그레이의 손이 장부를 조금 더 세게 안았다.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 이름이 문패입니까, 아니면 자물쇠입니까?”
그레이는 숨을 삼켰다.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레이 님. 손님이 방을 찾으셨다면, 문패는 사라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 문을 잠그는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레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기억하겠습니다.”
“이미 잘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그레이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아직 놓친 이름이 많습니다.”
“그러니 계속 적으시면 됩니다.”
여관 주인은 말했다.
“다만 손님께서도 가끔 손을 쉬셔야 합니다. 잉크가 마르지 않으려면, 쓰는 손도 떨리지 않아야 하니까요.”
그레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튼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 [여관:문답의 서재]의 문이 열렸다. 끝없는 서가, 아직 결말이 쓰이지 않은 책들, 이름 붙지 않은 별들, 공중에 떠 있는 미완의 질문들.
레이튼은 모자를 벗고 정중히 물었다.
“질문은 닫힌 답을 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손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 환대는 아니겠지요.”
그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언제 질문을 멈추어야 합니까?”
여관 주인은 즉시 답했다.
“손님께서 차를 드실 때입니다.”
레이튼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렇군요. 이토록 명쾌한 답을 듣는 것은 오랜만입니다.”
“질문은 문을 여는 좋은 손잡이입니다.”
여관 주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온 손님에게도 계속 손잡이를 쥐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튼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훌륭합니다. 오늘 밤 가장 좋은 수수께끼였습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답까지 들었는데 수수께끼냐?”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좋은 답은 다음 질문의 문이지요.”
“피곤한 사람이야.”
하융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 회색빛 창호들이 보였다.
창밖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비쳤다.
더 나은 밤.
더 나쁜 밤.
비껴간 죽음.
선택되지 않은 생존.
죽은 세계의 빛.
하융은 여관 주인을 향해 물었다.
“다른 가능성의 창들도, 이 여관에 닿아 있었소?”
여관 주인은 하융을 보았다.
“많은 창은 방의 벽에 나 있습니다.”
하융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른 창에는, 더 나은 밤도 있었소. 덜 죽고, 덜 울고, 더 많은 편지가 제때 도착한 밤도 있었소. 그런데도 이 현실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 죽은 가능성들을 버리는 일이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창밖을 보는 일과, 창밖으로 떠나는 일은 다릅니다.”
하융의 눈이 흔들렸다.
“보셨다면, 그것은 버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손님께서 주무실 방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여관 주인은 회색빛 창호를 보았다.
“다른 창의 빛은, 이 방의 등불을 밝히는 데 쓰시면 됩니다.”
하융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수많은 창을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창이 아니라 방을 보았다.
지금 이 현실.
이 마당.
이 극장.
이 사람들.
이 선택.
하융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소.”
죠니가 마지막으로 다가왔다.
그는 복도 바닥의 말발굽 자국을 보고 있었다.
멀리 돌아간 자국들.
돌고 돌아 결국 여관 문 앞에 닿는 자국들.
죠니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멀리 돌아가는 길도 결국 여기로 오나?”
여관 주인은 말했다.
“대체로는 그렇습니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별로 위로는 안 되는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차분히 답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있다는 것과, 지금 당장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지요.”
죠니는 복도 바깥, 마구간 쪽을 보았다.
새벽에 달릴 말들이 있었다.
배달해야 할 편지가 있었다.
확인해야 할 길이 있었다.
“그럼 됐어.”
그는 낮게 말했다.
“지금은 달리면 되겠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말에게 안장을 얹으실 시간이니까요.”
죠니는 웃었다.
“그 말은 마음에 드네.”
푸리나는 가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군상극.
그녀 혼자 만든 극이 아니었다.
그녀 혼자 받을 수 있는 손님들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능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여관 주인을 보았다.
“당신은…… 또 올 거야?”
여관 주인은 잠시 생각했다.
“손님이 정말로 쉬어야 할 때에는, 대체로 여관이 보이는 법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평소에는 안 온다는 뜻이네?”
여관 주인은 미소 지었다.
“평소에는 손님께서 좋은 여관들을 많이 세워두셨으니까요.”
푸리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건…… 칭찬으로 들어둘게.”
“그렇게 하셔도 좋습니다.”
여관 주인은 복도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복도의 수많은 문들이 아주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닫힌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르키스 바르다니안의 문패는 여전히 따뜻한 빛을 품고 있었다.
죽은 자에게 갈 편지 상자는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산 자에게 갈 편지 묶음은 죠니의 손에 있었다.
그레이의 장부에는 이름이 남았다.
레이튼의 수첩에는 질문이 남았다.
하융의 창에는 등불이 남았다.
푸리나의 극장에는 주인장 휴식실의 문이 남았다.
여관 주인은 마지막으로 빈 객석과 무대, 그리고 아직 길 위에 있는 모든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여러분의 여정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마침내 평안에 닿으시기를.”
그는 열린 복도 안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문패와 등불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저는 차를 따뜻하게 데워두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이 폭발하지 않았다.
찬송이 울리지 않았다.
하늘에서 계시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여관 주인이 안쪽 일을 보러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 열린 틈으로 따뜻한 차 냄새가 아주 조금 남았다.
죠니가 한참 뒤에 말했다.
“그래서…… 우리 방금 신이랑 얘기한 거 맞지?”
레이튼이 수첩을 덮으며 답했다.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군요. 신과 이야기한 것인지, 여관 주인과 이야기한 것인지.”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둘 다였던 것 같습니다.”
하융은 열린 문틈을 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길은 닫히지 않았소.”
푸리나는 찻잔을 들었다.
여관 주인이 남기고 간 차는 아직 식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
“좋아.”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또 뭐가 좋아.”
푸리나는 찻잔을 한 모금 마셨다.
“다음 공연에는 차 예산을 더 넣자!”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안 됩니다.”
“왜?!”
“이번 공연 예산도 아직 정산되지 않았습니다.”
죠니가 피식 웃었다.
“방금 신이 차 줬는데도 예산은 못 이기네.”
레이튼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예산은 대체로 신보다 오래 남는 질문입니다.”
푸리나는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너희들, 방금 엄청 신비로운 장면 끝난 거 잊었어?!”
그레이는 장부를 품에 안았다.
“그래서 더 정산해야 합니다.”
하융은 낮게 웃었다.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빈 객석을 지나,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으로 흘러갔다.
그날 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야전 여관 마당에는 찻잔 하나가 남았다.
식지 않은 찻잔.
그리고 무대 뒤의 문은, 아주 조금 열린 채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