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55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00:27:04
5막
집 앞 — 문 안까지는 못 가도, 문 앞까지는 함께 간다
막이 오르자, 관청의 차가운 돌빛은 사라졌다.
무대 위에는 작은 마을길이 놓여 있었다.
높은 문도 없었다.
왕관도 없었다.
명령서도, 칼도, 저울도 없었다.
대신 낮은 담장이 있었다.
창가에는 누군가 말려둔 천이 걸려 있었고, 문 앞에는 오래 신은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아주 조금 올라왔다.
멀리서 아이가 웃는 소리.
어머니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친구들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문 뒤에서 오래 기다린 사람이 숨을 삼키는 소리.
만인은 길 위에서 멈췄다.
그의 손에는 관청에서 받은 작은 열쇠가 있었다.
허리에는 재물이 있었고, 어깨 근처에는 명성이 따라붙어 있었고, 품에는 빵을 싸던 천 조각이 있었다.
그는 집 앞을 보았다.
“여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재물이 조심스럽게 짤랑거렸다.
“여기서는 제가 쓸모가 있긴 합니다. 집세, 식탁, 난방, 수리비, 선물.”
명성은 평소보다 작게 말했다.
“저도 쓸모가 있긴 합니다. 좋은 소문은 혼담에 도움이 되지요.”
권력은 열쇠 쪽을 보았다.
“문을 열 수 있다.”
만인은 손에 든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문도 내가 열 수 있소?”
그때 집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만인이 열지 않았다.
문은 누군가가 안에서 열어준 것이었다.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극중에서 따로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인은 그녀를 아는 듯했다.
“늦었어요.”
만인은 바로 대답했다.
“일이 있었소.”
여인이 팔짱을 꼈다.
“늘 있었죠.”
객석에서 작게 웃음이 일었다.
만인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소. 시장에서 빵을 사고, 광장에서 이름이 만두가 되고, 관청에서는 왕관을—”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또 길을 잘못 들었군요.”
“아니, 이번에는 내가 찾고 있는 게 있어서.”
“무엇을요?”
만인은 당당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멈췄다.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
여인은 잠시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문을 조금 더 열었다.
“그럼 들어와요. 저녁이 식기 전에.”
만인은 눈을 깜빡였다.
“들어가도 되오?”
“집인데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만인을 더 당황하게 했다.
그는 집 안을 보았다.
낮은 식탁.
그릇 셋.
나무 말 하나.
수선하다 만 옷.
벽에 걸린 낡은 외투.
누군가 오래 기다린 흔적.
그 모든 것은 시장보다 작고, 광장보다 조용하고, 관청보다 약했다.
그런데 만인은 그 앞에서 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문 안쪽에서 아이가 뛰어나왔다.
“왔어요?”
만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왔지.”
아이는 만인의 등 뒤 항아리를 보았다.
“그거 아직도 들고 다녀요?”
만인은 항아리를 감싸 안았다.
“언젠가 쓸 것이오.”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그 질문은 오래전부터 답이 없었단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소피아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쓸 수도 있는데.”
벨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항아리 말이냐?”
“네.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요.”
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대 위, 집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늙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안쪽 어둠 속에서 만인을 불렀다.
만인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주 잠깐 어려진 얼굴이 되었다.
“예. 왔습니다.”
“밥은 먹었느냐.”
“아직입니다.”
“늘 그렇지.”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부드러웠다.
문 앞에는 이제 네 사람이 있었다.
여인.
아이.
문 안쪽의 어머니.
그리고 조금 늦게 골목에서 다가온 친구 하나.
친구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이야, 드디어 왔군.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만인은 기겁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살아 있는 줄 알았다.”
“그건 너무 당연하잖소!”
“당연한 말도 가끔은 해줘야지. 그래야 사람이 안심한다.”
친구는 술병을 흔들었다.
“한 잔 하겠나?”
만인은 여관 주인을 떠올렸다.
“오늘은 차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소.”
친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더더욱 술을 마셔야지. 균형이 필요하다.”
객석에서 민다우가스가 호방하게 웃었다.
“좋은 친구군!”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각하께서는 술잔의 철학을 좋아하시지요.”
“친구와 나누는 술잔은 왕관보다 가볍고, 때로 왕관보다 오래 간다.”
민다우가스는 말하고 나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스스로의 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꽤 괜찮은 말이군.”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하면 술맛이 줄어든다.”
알토가 멀리서 들었는지 아주 작게 말했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알토, 저건 기록하자는 뜻이야.”
“압니다.”
알토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술맛도 보존 가능한 방식으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민다우가스가 그 말을 들은 듯 크게 웃었다.
무대 위 만인은 집 앞에서 가족과 친구를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짐을 내려놓았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등의 항아리는 여전히 묶여 있었고, 돈주머니도 허리에 있었다.
하지만 냄비 몇 개와 낡은 컵, “언젠가 정리할 문서”라고 적힌 묶음 하나를 문 옆에 내려놓았다.
여인이 그것을 보았다.
“오늘은 오래 있을 건가요?”
만인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게…… 나는 아직 길을 가야 해서.”
아이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또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사람은 길을 가야 할 때가 있다.”
여인은 문기둥에 기대어 조용히 말했다.
“알아요. 다만 매번 돌아온다고 말하고, 매번 늦는 것도 사람의 일이죠.”
만인은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하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했네요.”
“무엇을?”
“미룬 사과.”
만인은 품속의 목록을 떠올렸다.
넷째, 미룬 사과를 한다.
다섯째, 미룬 사과 중 일부는 계속 미룬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줄었군.”
여인은 웃었다.
“그런 식으로 세는군요.”
“세지 않으면 너무 많아서.”
그 말에 객석 몇 곳에서 웃음이 났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만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발이 문턱 앞에서 멈췄다.
문 안쪽은 따뜻했다.
너무 따뜻했다.
그 온기는 시장의 빵보다, 관청의 왕관보다, 광장의 노래보다 더 위험했다.
왜냐하면 머물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길이 있었다.
그 길 너머, 아직 보이지 않는 마지막 여관이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올 수 있소?”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술병을 내려놓은 채 한숨을 쉬었다.
문 안쪽의 어머니만이 조용히 말했다.
“어디까지냐.”
만인은 말했다.
“마지막 여관까지.”
그 순간 집 안의 온기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만인의 손을 잡았다.
친구는 아무 농담도 하지 않았다.
만인은 그 침묵이 싫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소?”
그때 여관 주인이 집 앞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는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집 주인이 아닌 곳에서는 주인처럼 굴지 않았다.
그저 문밖에, 길 쪽에 서 있었다.
만인이 그를 보았다.
“말해주시오. 이 사람들도 같이 갈 수 있소?”
여관 주인은 조용히 답했다.
“문 앞까지는 함께 오실 수 있습니다.”
만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문 안쪽은?”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 방은 손님마다 따로 준비됩니다.”
아이는 만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싫어요.”
만인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손은 작았다.
시장 아이에게 빵을 건넸을 때 남았던 온기와는 달랐다.
이 손은 만인에게 무엇을 남기기보다, 만인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붙잡음이 아팠다.
여인이 말했다.
“그럼 사랑도 두고 가야 하나요?”
그 질문은 만인이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향했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사랑하는 이를 들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인의 눈이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잔인한 말이군요.”
“예.”
여관 주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해야 합니까?”
“손님들이 문 앞에서 서로를 찢지 않도록, 때로는 말해야 합니다.”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며 걸어온 길은 손님께 묻어 있습니다. 손을 잡고 온 시간, 기다린 저녁, 미룬 사과가 겨우 도착한 순간, 문 앞에서 울지 않으려 애쓴 얼굴까지.”
그는 아이를 보았다.
“그런 것은 문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인은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오?”
“예.”
“하지만 이 아이는 함께 못 들어오는데.”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혼자 들어가야 하는데.”
“예.”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관 주인은 낮게 말했다.
“손님. 함께 걸은 길이 사라지지 않기에, 문 앞에서 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집 앞의 모두가 조금씩 달라진 얼굴로 그 말을 들었다.
객석의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천천히 모았다.
그의 눈에는 무대 위 집이 아니라, 다른 밤의 길이 보이는 듯했다.
별이 낮게 뜬 길.
누군가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더는 따라가지 못하는 길.
창밖으로 사라진 가능성.
그래도 남은 별빛.
민다우가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아스테르다스는 미소 지었다.
“문 안까지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해서, 동행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군.”
“당연한 말일수록, 사람은 문 앞에서 자주 잊습니다.”
민다우가스는 팔걸이를 두드렸다.
“문 앞에서 우는 사람에게 당연한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별빛이 필요하지요.”
“또 별인가.”
“예. 문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문 앞까지는 비출 수 있으니까요.”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크게 웃었다.
“하하. 오늘은 그대의 별이 제법 실용적이군.”
아스테르다스는 부드럽게 답했다.
“실용적인 별이라니, 그건 꽤 드문 칭찬이네요.”
“칭찬이다. 아껴둬라.”
니케아 쪽의 요안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루나리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요안나는 손수건을 받으며 말했다.
“마지막 여관에 같이 못 들어간다는 게 너무 슬퍼요.”
루나리아는 부드럽게 답했다.
“그래서 산 자의 길에 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안나는 눈물을 닦다 멈췄다.
“집이요?”
“예. 마지막 방까지는 함께 가지 못하더라도, 그 전까지 함께 앉을 식탁은 필요하니까요.”
요안나는 무대 위 식탁을 보았다.
그릇 셋.
나무 말.
식어가는 저녁.
“그러면 평화는…… 마지막 여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전까지 같이 앉기 위해 필요한 거네요.”
미하일라가 그 말을 들었다.
“좋은 해석이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그래.”
미하일라는 무대 위 문턱을 보았다.
“왕관은 마지막 문 안까지 못 간다. 하지만 집 앞까지의 길을 지킬 수는 있다.”
요안나는 프로그램을 품에 안았다.
“그럼 저는 집을 많이 짓고 싶어요.”
슈샤니크가 낮게 말했다.
“집은 감정으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슈샤니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토지, 목재, 석재, 인력, 도로, 배수, 식량, 치안, 소유권, 상속권, 분쟁 조정.”
그녀는 무대 위 집을 보았다.
“그리고 집을 집답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내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 신뢰를 만들 수 있다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허공의 말만은 아닐 겁니다.”
요안나는 잠시 슈샤니크를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같이 해주세요.”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미 이전 막에서 그 침묵의 뜻을 조금 배웠다.
검토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지금은 충분했다.
무대 위, 만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무대가 길이 아니라 방이 되었다.
낮은 식탁.
앉은 사람들.
뜨거운 국.
나누어지는 빵.
술잔.
아이의 나무 말.
만인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왕관을 썼을 때보다 더 어색해 보였다.
친구가 술잔을 채워주었다.
“한 잔.”
만인은 받았다.
“길 위에서 술을 마시면 느려지지 않소?”
친구는 웃었다.
“가끔은 느려져야 다시 간다.”
여관 주인은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잔을 들었다.
“돌아온 사람에게.”
여인이 잔을 들었다.
“늦었지만 돌아온 사람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밥 먹는 사람에게.”
아이는 나무 말을 들어 올렸다.
“또 갈 사람에게.”
만인은 멈췄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만인이 말했다.
“아직 가지 않았소.”
아이는 말했다.
“하지만 갈 거잖아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객석의 라이자가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아이가 든 나무 말을 보고 있었다.
조잡한 나무 말.
다리는 조금 비뚤었고, 목은 짧았고, 바퀴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라이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얹었다.
성은.
은인.
만들어진 사람.
만들어진 것과 태어난 것의 경계.
누군가가 “가족”이라고 불러주기 전까지, 물건과 사람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녀는 낮게 말했다.
“쥐고 있는 방식이 중요하네요.”
소피아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라이자는 무대 위 나무 말을 가리켰다.
“저건 잘 만든 물건은 아니에요.”
소피아는 즉시 반응했다.
“아니,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바퀴를 조금만 고치면—”
라이자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까요. 잘 만들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돌아온 사람의 흔적이 될 수 있군요.”
소피아는 나무 말을 다시 보았다.
“물건의 완성도만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그렇겠죠.”
소피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만들어진 사람도, 태어난 사람도. 중요한 건 누가 그 손을 잡고, 어떤 길을 함께 걸었는지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 안에는 은빛 심장이 조금 떨리는 듯한 긴장이 있었다.
“좋은 포옹은, 영원히 붙잡는 게 아니겠죠.”
소피아가 물었다.
“그럼요?”
라이자는 무대 위 아이와 만인을 보았다.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도 돌아올 수 있었다고 믿게 해주는 것.”
소피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렵네요.”
라이자는 웃었다.
“네. 어려워요.”
그녀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그래서 여관에는 문이 있나 봐요. 벽만 있으면 포옹이 아니라 감옥이니까.”
무대 위 만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이 나무 말, 내가 만든 거였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솜씨가 엉망이군.”
“알아요.”
“그런데 왜 아직 가지고 있소?”
아이는 나무 말을 품에 안았다.
“아저씨가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요.”
만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인은 그를 보았다.
“말은 물건에 붙습니다.”
친구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물건은 사람을 붙잡지. 가끔은 너무 오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좋은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만인은 자기 품속을 더듬었다.
아직 쓰지 않은 편지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편지의 모서리에 닿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좋아.”
레이튼이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다음 막의 씨앗.”
그레이가 말했다.
“전언의 방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문 앞이야. 하지만 하지 못한 말은 이미 품에 있어야 해.”
죠니는 창밖을 보았다.
“그 편지 결국 누가 들고 가는 거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왜 나를 보는 것 같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럴 때가 제일 수상해.”
무대 위 만인은 저녁을 먹었다.
우스운 장면도 있었다.
그가 국을 먹다 수염에 묻혔고, 아이가 웃었고, 친구가 일부러 더 크게 웃었고, 여인이 수건을 던져주었다.
만인은 변명했다.
“길이 험해서 손이 떨린 것이오.”
여인이 말했다.
“숟가락이 험한 길을 걸었군요.”
객석이 웃었다.
하지만 웃음 속에서도 만인은 자꾸 문밖을 보았다.
길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가 아무리 늦게 밥을 먹어도,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여인은 예상했다는 듯 눈을 내렸다.
친구는 술병을 막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만인은 말했다.
“가야 하오.”
아이는 물었다.
“왜요?”
만인은 대답을 찾았다.
돈 때문에.
이름 때문에.
왕관 때문에.
꿈 때문에.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그런데 그 어떤 말도 아이 앞에서는 너무 우스워 보였다.
“모르겠소.”
만인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야 할 것 같소.”
아이는 울지 않으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아팠다.
여인은 문 앞까지 나왔다.
친구도 따라 나왔다.
어머니는 문 안쪽에서 말했다.
“밥은 먹었으니 됐다.”
그 말이 작별이었다.
만인은 문턱에 섰다.
그는 집 안을 보았다.
식탁.
그릇.
수건.
나무 말.
미처 마시지 못한 술잔.
방금 한 사과.
아직 하지 못한 말.
“당신들은 정말 여기까지만인가?”
여인이 말했다.
“오늘은요.”
친구가 말했다.
“다음 골목까지는 가줄 수 있다.”
아이가 말했다.
“저도 문 앞까지.”
만인은 웃으려 했다.
잘 되지 않았다.
“문 앞까지라.”
여관 주인은 길 쪽에서 조용히 말했다.
“문 앞까지 함께 오는 일도, 길의 일부입니다.”
만인은 물었다.
“그 다음은?”
여관 주인은 답했다.
“그 다음 길은 손님께서 걸으셔야 합니다.”
아이가 만인의 손을 놓았다.
천천히.
억지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손을 펼쳐 놓는 것처럼.
만인은 그 작은 손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오래 느꼈다.
그 감각이 손바닥에 남았다.
시장 아이에게 빵을 건넨 온기와는 다른 온기.
붙잡았다가 놓아준 온기.
그는 아이에게 물었다.
“나무 말은 계속 가지고 있을 거요?”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돌아오겠다는 말이 붙어 있으니까요.”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늦으면?”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혼낼 거예요.”
객석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만인은 겨우 웃었다.
“좋은 벌이군.”
여인은 만인의 외투를 바로잡아주었다.
“이번에는 너무 늦지 말아요.”
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소.”
친구가 말했다.
“이런 말은 대체로 늦겠다는 뜻인데.”
“그대는 꼭 지금 말해야 했소?”
“친구니까.”
만인은 친구를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친구는 당황했다.
“술 냄새 난다.”
“당신 술이오.”
“그럼 괜찮군.”
여인은 한숨을 쉬었고, 아이는 웃었고, 어머니는 안쪽에서 기침했다.
만인은 문 앞을 떠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무대 위 집의 불빛이 뒤에서 조금 낮아졌다.
꺼지지는 않았다.
다만 멀어졌다.
만인은 뒤돌아보았다.
가족과 친구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닫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객석의 루나리아는 눈을 감았다.
“상처 입은 길도 순례입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순례요?”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성스러운 길만 순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러 가는 길, 돌아오겠다는 말을 지키려 걷는 길, 그리고 문 앞에서 손을 놓는 길도 순례가 됩니다.”
요안나는 무대 위 아이를 보았다.
“그럼 저 아이도 순례 중인가요?”
“어쩌면요. 기다리는 사람의 길도 길입니다.”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듣고 짧게 말했다.
“그러니 길을 지켜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요.”
“그래.”
“식탁도요.”
미하일라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 식탁도.”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눈을 내렸다.
식탁.
그 단어는 장부보다 약했다.
그러나 때로 장부가 지켜야 하는 것은 결국 식탁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무릎 위 천을 아주 조금 눌렀다.
말하지 않았다.
다만 무대 위 문을 보았다.
닫히지 않은 문.
그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더는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문 앞까지.”
게오르기아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무대 위 만인은 길을 걸었다.
재물은 조용했다.
명성도 평소보다 덜 시끄러웠다.
권력은 열쇠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인은 품속의 편지를 만졌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여관 주인이 그의 곁에 다가왔다.
“손님.”
“예.”
“많이 두고 오신 것처럼 보이십니다.”
만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고 온 거요?”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아이의 손을 놓은 감각이 아직 있었다.
“오히려 손이 더 무거운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길에 묻는 흔적입니다.”
만인은 물었다.
“이 흔적은 마지막 여관까지 갑니까?”
“예.”
“사람은 못 가는데?”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갑니다.”
“그럼 사랑은?”
여관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은 짐처럼 들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손님께서 어떻게 걸으셨는지에 가장 깊게 묻어 있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인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럼 문 앞에서 헤어지는 일도 사랑이오?”
“때로는요.”
“붙잡는 것도 사랑이고?”
“그럴 수 있습니다.”
“놓는 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인은 한숨을 쉬었다.
“사랑은 까다로운 손님이군.”
여관 주인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많은 방이 필요합니다.”
만인은 처음으로 여관 주인의 말에 웃었다.
작게.
아주 작게.
그 웃음은 시장의 웃음이나 광장의 웃음과 달랐다.
조금 젖어 있었다.
길 앞에는 이제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성문은 불타 있었다.
담장은 무너졌고, 문짝은 그을렸고, 성벽 위에는 오래전의 연기가 아직 검은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만인은 멈췄다.
“저곳은…… 집이 아니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관청도 아니고.”
“예.”
“그럼 무엇이오?”
여관 주인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문을 지키다 이름을 잃은 분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만인은 품속의 편지를 더 세게 쥐었다.
불탄 성문 앞에는 문패들이 걸려 있었다.
아직 멀어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 전체의 공기가 달라졌다.
객석에서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레플리카의 시선이 낮아졌다.
카를로타는 무대 위 성문의 손잡이를 보았다.
타마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다음은 조심해야 해.”
레이튼이 말했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 막이군요.”
그레이가 아주 작게 답했다.
“예.”
그녀의 펜 끝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이번에는 틀리면 안 됩니다.”
무대 위 만인은 불탄 성문을 향해 걸었다.
뒤의 집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문 앞까지의 동행으로 남고, 만인은 그 너머를 향해야 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이 끝났다.
집 앞 — 문 안까지는 못 가도, 문 앞까지는 함께 간다
막이 오르자, 관청의 차가운 돌빛은 사라졌다.
무대 위에는 작은 마을길이 놓여 있었다.
높은 문도 없었다.
왕관도 없었다.
명령서도, 칼도, 저울도 없었다.
대신 낮은 담장이 있었다.
창가에는 누군가 말려둔 천이 걸려 있었고, 문 앞에는 오래 신은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굴뚝에서는 연기가 아주 조금 올라왔다.
멀리서 아이가 웃는 소리.
어머니가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친구들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
문 뒤에서 오래 기다린 사람이 숨을 삼키는 소리.
만인은 길 위에서 멈췄다.
그의 손에는 관청에서 받은 작은 열쇠가 있었다.
허리에는 재물이 있었고, 어깨 근처에는 명성이 따라붙어 있었고, 품에는 빵을 싸던 천 조각이 있었다.
그는 집 앞을 보았다.
“여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재물이 조심스럽게 짤랑거렸다.
“여기서는 제가 쓸모가 있긴 합니다. 집세, 식탁, 난방, 수리비, 선물.”
명성은 평소보다 작게 말했다.
“저도 쓸모가 있긴 합니다. 좋은 소문은 혼담에 도움이 되지요.”
권력은 열쇠 쪽을 보았다.
“문을 열 수 있다.”
만인은 손에 든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 문도 내가 열 수 있소?”
그때 집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만인이 열지 않았다.
문은 누군가가 안에서 열어준 것이었다.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극중에서 따로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인은 그녀를 아는 듯했다.
“늦었어요.”
만인은 바로 대답했다.
“일이 있었소.”
여인이 팔짱을 꼈다.
“늘 있었죠.”
객석에서 작게 웃음이 일었다.
만인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일이었소. 시장에서 빵을 사고, 광장에서 이름이 만두가 되고, 관청에서는 왕관을—”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또 길을 잘못 들었군요.”
“아니, 이번에는 내가 찾고 있는 게 있어서.”
“무엇을요?”
만인은 당당하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멈췄다.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
여인은 잠시 그를 보았다.
그러더니 문을 조금 더 열었다.
“그럼 들어와요. 저녁이 식기 전에.”
만인은 눈을 깜빡였다.
“들어가도 되오?”
“집인데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만인을 더 당황하게 했다.
그는 집 안을 보았다.
낮은 식탁.
그릇 셋.
나무 말 하나.
수선하다 만 옷.
벽에 걸린 낡은 외투.
누군가 오래 기다린 흔적.
그 모든 것은 시장보다 작고, 광장보다 조용하고, 관청보다 약했다.
그런데 만인은 그 앞에서 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문 안쪽에서 아이가 뛰어나왔다.
“왔어요?”
만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왔지.”
아이는 만인의 등 뒤 항아리를 보았다.
“그거 아직도 들고 다녀요?”
만인은 항아리를 감싸 안았다.
“언젠가 쓸 것이오.”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그 질문은 오래전부터 답이 없었단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소피아가 작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쓸 수도 있는데.”
벨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항아리 말이냐?”
“네. 아직 모르는 일이잖아요.”
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정하지도 않았다.
무대 위, 집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왔느냐.”
늙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안쪽 어둠 속에서 만인을 불렀다.
만인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아주 잠깐 어려진 얼굴이 되었다.
“예. 왔습니다.”
“밥은 먹었느냐.”
“아직입니다.”
“늘 그렇지.”
객석에서 다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부드러웠다.
문 앞에는 이제 네 사람이 있었다.
여인.
아이.
문 안쪽의 어머니.
그리고 조금 늦게 골목에서 다가온 친구 하나.
친구는 술병을 들고 있었다.
“이야, 드디어 왔군. 네가 죽은 줄 알았다.”
만인은 기겁했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살아 있는 줄 알았다.”
“그건 너무 당연하잖소!”
“당연한 말도 가끔은 해줘야지. 그래야 사람이 안심한다.”
친구는 술병을 흔들었다.
“한 잔 하겠나?”
만인은 여관 주인을 떠올렸다.
“오늘은 차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소.”
친구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더더욱 술을 마셔야지. 균형이 필요하다.”
객석에서 민다우가스가 호방하게 웃었다.
“좋은 친구군!”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각하께서는 술잔의 철학을 좋아하시지요.”
“친구와 나누는 술잔은 왕관보다 가볍고, 때로 왕관보다 오래 간다.”
민다우가스는 말하고 나서 잠시 멈췄다.
그리고 스스로의 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꽤 괜찮은 말이군.”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기록해둘까요?”
“기록하면 술맛이 줄어든다.”
알토가 멀리서 들었는지 아주 작게 말했다.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아카식이 웃었다.
“알토, 저건 기록하자는 뜻이야.”
“압니다.”
알토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다만 술맛도 보존 가능한 방식으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민다우가스가 그 말을 들은 듯 크게 웃었다.
무대 위 만인은 집 앞에서 가족과 친구를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짐을 내려놓았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등의 항아리는 여전히 묶여 있었고, 돈주머니도 허리에 있었다.
하지만 냄비 몇 개와 낡은 컵, “언젠가 정리할 문서”라고 적힌 묶음 하나를 문 옆에 내려놓았다.
여인이 그것을 보았다.
“오늘은 오래 있을 건가요?”
만인은 조금 당황했다.
“아니, 그게…… 나는 아직 길을 가야 해서.”
아이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또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가 술병을 내려놓았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사람은 길을 가야 할 때가 있다.”
여인은 문기둥에 기대어 조용히 말했다.
“알아요. 다만 매번 돌아온다고 말하고, 매번 늦는 것도 사람의 일이죠.”
만인은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하오.”
여인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했네요.”
“무엇을?”
“미룬 사과.”
만인은 품속의 목록을 떠올렸다.
넷째, 미룬 사과를 한다.
다섯째, 미룬 사과 중 일부는 계속 미룬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 줄었군.”
여인은 웃었다.
“그런 식으로 세는군요.”
“세지 않으면 너무 많아서.”
그 말에 객석 몇 곳에서 웃음이 났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만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발이 문턱 앞에서 멈췄다.
문 안쪽은 따뜻했다.
너무 따뜻했다.
그 온기는 시장의 빵보다, 관청의 왕관보다, 광장의 노래보다 더 위험했다.
왜냐하면 머물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길이 있었다.
그 길 너머, 아직 보이지 않는 마지막 여관이 있었다.
그는 여인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나와 함께 올 수 있소?”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는 술병을 내려놓은 채 한숨을 쉬었다.
문 안쪽의 어머니만이 조용히 말했다.
“어디까지냐.”
만인은 말했다.
“마지막 여관까지.”
그 순간 집 안의 온기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여인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만인의 손을 잡았다.
친구는 아무 농담도 하지 않았다.
만인은 그 침묵이 싫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소?”
그때 여관 주인이 집 앞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그는 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집 주인이 아닌 곳에서는 주인처럼 굴지 않았다.
그저 문밖에, 길 쪽에 서 있었다.
만인이 그를 보았다.
“말해주시오. 이 사람들도 같이 갈 수 있소?”
여관 주인은 조용히 답했다.
“문 앞까지는 함께 오실 수 있습니다.”
만인의 표정이 흔들렸다.
“문 안쪽은?”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 방은 손님마다 따로 준비됩니다.”
아이는 만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싫어요.”
만인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손은 작았다.
시장 아이에게 빵을 건넸을 때 남았던 온기와는 달랐다.
이 손은 만인에게 무엇을 남기기보다, 만인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붙잡음이 아팠다.
여인이 말했다.
“그럼 사랑도 두고 가야 하나요?”
그 질문은 만인이 아니라, 여관 주인에게 향했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사랑하는 이를 들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인의 눈이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잔인한 말이군요.”
“예.”
여관 주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해야 합니까?”
“손님들이 문 앞에서 서로를 찢지 않도록, 때로는 말해야 합니다.”
여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며 걸어온 길은 손님께 묻어 있습니다. 손을 잡고 온 시간, 기다린 저녁, 미룬 사과가 겨우 도착한 순간, 문 앞에서 울지 않으려 애쓴 얼굴까지.”
그는 아이를 보았다.
“그런 것은 문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인은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오?”
“예.”
“하지만 이 아이는 함께 못 들어오는데.”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혼자 들어가야 하는데.”
“예.”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관 주인은 낮게 말했다.
“손님. 함께 걸은 길이 사라지지 않기에, 문 앞에서 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집 앞의 모두가 조금씩 달라진 얼굴로 그 말을 들었다.
객석의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천천히 모았다.
그의 눈에는 무대 위 집이 아니라, 다른 밤의 길이 보이는 듯했다.
별이 낮게 뜬 길.
누군가를 문 앞까지 배웅하고, 더는 따라가지 못하는 길.
창밖으로 사라진 가능성.
그래도 남은 별빛.
민다우가스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아스테르다스는 미소 지었다.
“문 안까지 함께 가지 못한다고 해서, 동행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군.”
“당연한 말일수록, 사람은 문 앞에서 자주 잊습니다.”
민다우가스는 팔걸이를 두드렸다.
“문 앞에서 우는 사람에게 당연한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별빛이 필요하지요.”
“또 별인가.”
“예. 문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문 앞까지는 비출 수 있으니까요.”
민다우가스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크게 웃었다.
“하하. 오늘은 그대의 별이 제법 실용적이군.”
아스테르다스는 부드럽게 답했다.
“실용적인 별이라니, 그건 꽤 드문 칭찬이네요.”
“칭찬이다. 아껴둬라.”
니케아 쪽의 요안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루나리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요안나는 손수건을 받으며 말했다.
“마지막 여관에 같이 못 들어간다는 게 너무 슬퍼요.”
루나리아는 부드럽게 답했다.
“그래서 산 자의 길에 집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안나는 눈물을 닦다 멈췄다.
“집이요?”
“예. 마지막 방까지는 함께 가지 못하더라도, 그 전까지 함께 앉을 식탁은 필요하니까요.”
요안나는 무대 위 식탁을 보았다.
그릇 셋.
나무 말.
식어가는 저녁.
“그러면 평화는…… 마지막 여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전까지 같이 앉기 위해 필요한 거네요.”
미하일라가 그 말을 들었다.
“좋은 해석이다.”
요안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그래.”
미하일라는 무대 위 문턱을 보았다.
“왕관은 마지막 문 안까지 못 간다. 하지만 집 앞까지의 길을 지킬 수는 있다.”
요안나는 프로그램을 품에 안았다.
“그럼 저는 집을 많이 짓고 싶어요.”
슈샤니크가 낮게 말했다.
“집은 감정으로 지어지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슈샤니크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토지, 목재, 석재, 인력, 도로, 배수, 식량, 치안, 소유권, 상속권, 분쟁 조정.”
그녀는 무대 위 집을 보았다.
“그리고 집을 집답게 만드는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내일도 돌아올 수 있다는 신뢰입니다.”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슈샤니크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 신뢰를 만들 수 있다면, 폐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허공의 말만은 아닐 겁니다.”
요안나는 잠시 슈샤니크를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같이 해주세요.”
슈샤니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미 이전 막에서 그 침묵의 뜻을 조금 배웠다.
검토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지금은 충분했다.
무대 위, 만인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으로 무대가 길이 아니라 방이 되었다.
낮은 식탁.
앉은 사람들.
뜨거운 국.
나누어지는 빵.
술잔.
아이의 나무 말.
만인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는 왕관을 썼을 때보다 더 어색해 보였다.
친구가 술잔을 채워주었다.
“한 잔.”
만인은 받았다.
“길 위에서 술을 마시면 느려지지 않소?”
친구는 웃었다.
“가끔은 느려져야 다시 간다.”
여관 주인은 문밖에서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잔을 들었다.
“돌아온 사람에게.”
여인이 잔을 들었다.
“늦었지만 돌아온 사람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렸다.
“밥 먹는 사람에게.”
아이는 나무 말을 들어 올렸다.
“또 갈 사람에게.”
만인은 멈췄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만인이 말했다.
“아직 가지 않았소.”
아이는 말했다.
“하지만 갈 거잖아요.”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객석의 라이자가 숨을 멈추었다.
그녀는 아이가 든 나무 말을 보고 있었다.
조잡한 나무 말.
다리는 조금 비뚤었고, 목은 짧았고, 바퀴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라이자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얹었다.
성은.
은인.
만들어진 사람.
만들어진 것과 태어난 것의 경계.
누군가가 “가족”이라고 불러주기 전까지, 물건과 사람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녀는 낮게 말했다.
“쥐고 있는 방식이 중요하네요.”
소피아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요?”
라이자는 무대 위 나무 말을 가리켰다.
“저건 잘 만든 물건은 아니에요.”
소피아는 즉시 반응했다.
“아니,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바퀴를 조금만 고치면—”
라이자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까요. 잘 만들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돌아온 사람의 흔적이 될 수 있군요.”
소피아는 나무 말을 다시 보았다.
“물건의 완성도만으로 가치가 정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그렇겠죠.”
소피아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라이자는 이어 말했다.
“만들어진 사람도, 태어난 사람도. 중요한 건 누가 그 손을 잡고, 어떤 길을 함께 걸었는지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 안에는 은빛 심장이 조금 떨리는 듯한 긴장이 있었다.
“좋은 포옹은, 영원히 붙잡는 게 아니겠죠.”
소피아가 물었다.
“그럼요?”
라이자는 무대 위 아이와 만인을 보았다.
“떠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도 돌아올 수 있었다고 믿게 해주는 것.”
소피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렵네요.”
라이자는 웃었다.
“네. 어려워요.”
그녀는 여관 주인을 보았다.
“그래서 여관에는 문이 있나 봐요. 벽만 있으면 포옹이 아니라 감옥이니까.”
무대 위 만인은 아이에게 말했다.
“이 나무 말, 내가 만든 거였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솜씨가 엉망이군.”
“알아요.”
“그런데 왜 아직 가지고 있소?”
아이는 나무 말을 품에 안았다.
“아저씨가 돌아오겠다고 했으니까요.”
만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인은 그를 보았다.
“말은 물건에 붙습니다.”
친구는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물건은 사람을 붙잡지. 가끔은 너무 오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좋은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만인은 자기 품속을 더듬었다.
아직 쓰지 않은 편지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손끝은 편지의 모서리에 닿았다.
무대 뒤에서 푸리나는 그 움직임을 보았다.
“좋아.”
레이튼이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다음 막의 씨앗.”
그레이가 말했다.
“전언의 방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문 앞이야. 하지만 하지 못한 말은 이미 품에 있어야 해.”
죠니는 창밖을 보았다.
“그 편지 결국 누가 들고 가는 거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왜 나를 보는 것 같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럴 때가 제일 수상해.”
무대 위 만인은 저녁을 먹었다.
우스운 장면도 있었다.
그가 국을 먹다 수염에 묻혔고, 아이가 웃었고, 친구가 일부러 더 크게 웃었고, 여인이 수건을 던져주었다.
만인은 변명했다.
“길이 험해서 손이 떨린 것이오.”
여인이 말했다.
“숟가락이 험한 길을 걸었군요.”
객석이 웃었다.
하지만 웃음 속에서도 만인은 자꾸 문밖을 보았다.
길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가 아무리 늦게 밥을 먹어도,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여인은 예상했다는 듯 눈을 내렸다.
친구는 술병을 막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만인은 말했다.
“가야 하오.”
아이는 물었다.
“왜요?”
만인은 대답을 찾았다.
돈 때문에.
이름 때문에.
왕관 때문에.
꿈 때문에.
마지막 여관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그런데 그 어떤 말도 아이 앞에서는 너무 우스워 보였다.
“모르겠소.”
만인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가야 할 것 같소.”
아이는 울지 않으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아팠다.
여인은 문 앞까지 나왔다.
친구도 따라 나왔다.
어머니는 문 안쪽에서 말했다.
“밥은 먹었으니 됐다.”
그 말이 작별이었다.
만인은 문턱에 섰다.
그는 집 안을 보았다.
식탁.
그릇.
수건.
나무 말.
미처 마시지 못한 술잔.
방금 한 사과.
아직 하지 못한 말.
“당신들은 정말 여기까지만인가?”
여인이 말했다.
“오늘은요.”
친구가 말했다.
“다음 골목까지는 가줄 수 있다.”
아이가 말했다.
“저도 문 앞까지.”
만인은 웃으려 했다.
잘 되지 않았다.
“문 앞까지라.”
여관 주인은 길 쪽에서 조용히 말했다.
“문 앞까지 함께 오는 일도, 길의 일부입니다.”
만인은 물었다.
“그 다음은?”
여관 주인은 답했다.
“그 다음 길은 손님께서 걸으셔야 합니다.”
아이가 만인의 손을 놓았다.
천천히.
억지로 떼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손을 펼쳐 놓는 것처럼.
만인은 그 작은 손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오래 느꼈다.
그 감각이 손바닥에 남았다.
시장 아이에게 빵을 건넨 온기와는 다른 온기.
붙잡았다가 놓아준 온기.
그는 아이에게 물었다.
“나무 말은 계속 가지고 있을 거요?”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왜?”
“돌아오겠다는 말이 붙어 있으니까요.”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이 늦으면?”
아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럼 나중에 혼낼 거예요.”
객석에서 작게 웃음이 났다.
만인은 겨우 웃었다.
“좋은 벌이군.”
여인은 만인의 외투를 바로잡아주었다.
“이번에는 너무 늦지 말아요.”
만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소.”
친구가 말했다.
“이런 말은 대체로 늦겠다는 뜻인데.”
“그대는 꼭 지금 말해야 했소?”
“친구니까.”
만인은 친구를 보다가, 갑자기 웃었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친구는 당황했다.
“술 냄새 난다.”
“당신 술이오.”
“그럼 괜찮군.”
여인은 한숨을 쉬었고, 아이는 웃었고, 어머니는 안쪽에서 기침했다.
만인은 문 앞을 떠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무대 위 집의 불빛이 뒤에서 조금 낮아졌다.
꺼지지는 않았다.
다만 멀어졌다.
만인은 뒤돌아보았다.
가족과 친구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더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닫지 않았다.
그 장면을 본 객석의 루나리아는 눈을 감았다.
“상처 입은 길도 순례입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순례요?”
루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성스러운 길만 순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러 가는 길, 돌아오겠다는 말을 지키려 걷는 길, 그리고 문 앞에서 손을 놓는 길도 순례가 됩니다.”
요안나는 무대 위 아이를 보았다.
“그럼 저 아이도 순례 중인가요?”
“어쩌면요. 기다리는 사람의 길도 길입니다.”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듣고 짧게 말했다.
“그러니 길을 지켜야 한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집도요.”
“그래.”
“식탁도요.”
미하일라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래. 식탁도.”
슈샤니크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눈을 내렸다.
식탁.
그 단어는 장부보다 약했다.
그러나 때로 장부가 지켜야 하는 것은 결국 식탁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무릎 위 천을 아주 조금 눌렀다.
말하지 않았다.
다만 무대 위 문을 보았다.
닫히지 않은 문.
그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더는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문 앞까지.”
게오르기아는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무대 위 만인은 길을 걸었다.
재물은 조용했다.
명성도 평소보다 덜 시끄러웠다.
권력은 열쇠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인은 품속의 편지를 만졌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여관 주인이 그의 곁에 다가왔다.
“손님.”
“예.”
“많이 두고 오신 것처럼 보이십니다.”
만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고 온 거요?”
그는 손바닥을 펼쳤다.
아이의 손을 놓은 감각이 아직 있었다.
“오히려 손이 더 무거운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길에 묻는 흔적입니다.”
만인은 물었다.
“이 흔적은 마지막 여관까지 갑니까?”
“예.”
“사람은 못 가는데?”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갑니다.”
“그럼 사랑은?”
여관 주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사랑은 짐처럼 들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손님께서 어떻게 걸으셨는지에 가장 깊게 묻어 있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인은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럼 문 앞에서 헤어지는 일도 사랑이오?”
“때로는요.”
“붙잡는 것도 사랑이고?”
“그럴 수 있습니다.”
“놓는 것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인은 한숨을 쉬었다.
“사랑은 까다로운 손님이군.”
여관 주인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서 많은 방이 필요합니다.”
만인은 처음으로 여관 주인의 말에 웃었다.
작게.
아주 작게.
그 웃음은 시장의 웃음이나 광장의 웃음과 달랐다.
조금 젖어 있었다.
길 앞에는 이제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성문은 불타 있었다.
담장은 무너졌고, 문짝은 그을렸고, 성벽 위에는 오래전의 연기가 아직 검은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만인은 멈췄다.
“저곳은…… 집이 아니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관청도 아니고.”
“예.”
“그럼 무엇이오?”
여관 주인은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문을 지키다 이름을 잃은 분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만인은 품속의 편지를 더 세게 쥐었다.
불탄 성문 앞에는 문패들이 걸려 있었다.
아직 멀어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대 전체의 공기가 달라졌다.
객석에서 그레이가 펜을 들었다.
아레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레플리카의 시선이 낮아졌다.
카를로타는 무대 위 성문의 손잡이를 보았다.
타마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푸리나는 무대 뒤에서 속삭였다.
“다음은 조심해야 해.”
레이튼이 말했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 막이군요.”
그레이가 아주 작게 답했다.
“예.”
그녀의 펜 끝이 장부 위에서 멈췄다.
“이번에는 틀리면 안 됩니다.”
무대 위 만인은 불탄 성문을 향해 걸었다.
뒤의 집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문 앞까지의 동행으로 남고, 만인은 그 너머를 향해야 했다.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5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