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59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01:44:01
8막
비 오는 골짜기 — 고통은 길을 증명하지 않는다
막이 올랐다.
전언의 방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방의 속삭임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는 산 자를 찾아야 합니다.”
“보내지 않으면 도착하지 않습니다.”
그 말들은 비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가느다란 빗소리였다.
톡.
톡.
톡.
그다음에는 무대 위 돌길을 적셨고, 만인의 외투를 적셨고, 그가 지나온 시장의 흙과 광장의 먼지와 관청의 돌가루와 불탄 성문의 재를 한꺼번에 진흙으로 만들었다.
무대 위에는 골짜기가 있었다.
좁고 깊은 골짜기.
양옆의 절벽은 검고, 하늘은 낮았으며, 길은 미끄러웠다.
비는 세차지 않았지만 끈질겼다.
그것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비가 아니라, 오래 젖게 만드는 비였다.
만인은 골짜기 입구에 섰다.
그의 외투는 이미 젖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제야 알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젖어 있었다.
시장에서는 빵의 온기로 몰랐다.
광장에서는 소문의 열기로 몰랐다.
관청에서는 왕관의 무게로 몰랐다.
집 앞에서는 손을 놓는 아픔으로 몰랐다.
불탄 성문에서는 사르키스의 이름으로 몰랐다.
전언의 방에서는 아직 보내지 않은 말들로 몰랐다.
그러나 골짜기 앞에 서자, 만인은 자기 어깨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외투를 잡아당겼다.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 비는 언제부터 온 거요?”
여관 주인은 골짜기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번에는 찻주전자도, 문패를 닦던 손수건도 없었다.
대신 낡은 우산 하나가 있었다.
우산은 크지 않았다.
한 사람을 겨우 가릴 정도였다.
“손님께서 길을 걷기 전부터요.”
만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그럼 왜 이제야 보였소?”
“비를 모른 채 걷는 손님도 많습니다.”
“그게 가능하오?”
“예.”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장터의 소리, 광장의 박수, 관청의 명령, 집 앞의 기다림, 성문의 불길, 도착하지 못한 말들이 비를 가릴 때가 있습니다.”
만인은 골짜기 안쪽을 보았다.
“저기는 고통이오?”
“예.”
“그럼 돌아가도 되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만인은 그 말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정말?”
“예.”
“붙잡지 않으시오?”
“고통을 억지로 통과하게 하는 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만인은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곧 다시 골짜기를 보았다.
빗속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아파서, 아픔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만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가면?”
여관 주인은 말했다.
“비는 계속 오겠지요.”
“그럼 결국 가야 하는 것 아니오?”
“아닙니다.”
여관 주인은 우산을 조금 들어 올렸다.
“가야 해서 가는 것과, 비를 알고도 걷기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비가 조금 더 짙어졌다.
골짜기 안쪽에서 배우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그들은 왕도, 상인도, 가족도, 병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사람이 고통 앞에서 만들어내는 여러 얼굴들이었다.
첫 번째 배우는 젖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외투는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는 만인과 닮았지만, 만인은 아니었다.
그는 낮게 말했다.
“나는 아프다.”
만인은 그를 보았다.
젖은 외투의 배우는 다시 말했다.
“나는 아프다. 그러니 나를 보라.”
비가 그의 어깨 위로 계속 떨어졌다.
두 번째 배우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웃음은 너무 밝아서 오히려 불안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말했다.
“비는 오지 않는다. 나는 젖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러나 그의 발밑에는 물이 고이고 있었다.
세 번째 배우는 쇠로 된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가왔다.
“견뎌라.”
그는 만인을 향해 말했다.
“나도 견뎠다. 그러니 너도 견뎌라. 무너지지 마라. 울지 마라. 쉬지 마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는 말을 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네 번째 배우는 젖은 꽃을 들고 있었다.
그 꽃은 하얬다.
너무 하얘서, 오히려 빗물 속에서 눈에 거슬렸다.
그 배우는 꽃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통은 아름답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객석의 몇몇 사람이 불편하게 움직였다.
배우는 계속했다.
“아프기에 빛난다. 찢어졌기에 깊다. 무너졌기에 숭고하다. 그러니 더 아파라. 더 찢어져라. 더 깊어져라.”
만인의 얼굴이 굳었다.
다섯 번째 배우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가장 조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골짜기 전체에 가장 오래 남았다.
만인은 그 배우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은 누구요?”
여관 주인은 말했다.
“고통을 겪는 손님들이 자주 만나는 말들입니다.”
“사람이 아니오?”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기도 하고, 습관이기도 합니다.”
젖은 외투의 배우가 만인에게 다가왔다.
“나를 보라.”
그는 말했다.
“나는 아팠다. 그러니 내가 옳다.”
검은 천의 배우가 웃었다.
“나는 아프지 않다. 그러니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
쇠막대기의 배우가 소리쳤다.
“견뎌라. 견디지 못하면 약한 것이다.”
하얀 꽃의 배우가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며 속삭였다.
“고통은 아름답다. 더 아름다워져라.”
마지막 배우는 빗속에 서서 다시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귀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막지 않았다.
그 말들을 듣는 것도 이 길의 일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천천히 눈을 내렸다.
그녀는 무대 위 배우들을 보고 있었다.
특히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배우를 오래 보았다.
레플리카는 낮게 말했다.
“저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가브리엘라가 그녀를 보았다.
레플리카는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아픈지 모르면, 사람은 모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면, 상처는 몸 전체가 됩니다.”
무대 위 젖은 외투의 배우가 다시 말했다.
“나는 아팠다. 그러니 내가 옳다.”
레플리카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픔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짓이라고만 해도 안 됩니다. 아픈 사람이 틀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프지 않은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가브리엘라가 조용히 덧붙였다.
“상처와 진실과 독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있을 때가 있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분리해야 합니다. 독은 덜어내고, 진실은 남기고, 상처는 싸매야 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싸맨다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상처를 빨리 덮으라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빗속의 쇠막대기 배우를 보고 있었다.
“견뎌라.”
그 배우는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나도 견뎠다. 그러니 너도 견뎌라. 쉬지 마라. 아픔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알렉산드리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틀렸습니다.”
그녀의 말은 짧았다.
쇠막대기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멈춘 듯 보였다.
알렉산드리나는 계속 말했다.
“아픔이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픔 속에서도 강해지려 애쓰고, 어떤 사람은 아픔 때문에 무너집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비 오는 골짜기 너머를 보았다.
“고난은 새벽의 증명이 아닙니다. 고통받았기 때문에 빛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빛은 보상이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조심스럽지는 않습니다. 고통 앞에서 새벽을 말하는 일은 늘 위험합니다.”
가브리엘라는 창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는 실제 창문이 하나 나타났다.
아주 작은 창문이었다.
골짜기 절벽 한가운데,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창문은 문이 아니었다.
나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다만 창틀 너머로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아직 새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벽도 아니었다.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말했다.
“밤을 빨리 끝내려 하면, 사람은 아직 울어야 할 시간을 빼앗깁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가브리엘라는 계속 말했다.
“그러나 밤이 영원하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그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옥을 줍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위 작은 창문에 머물렀다.
“그러니 창문이 필요합니다. 문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직 나갈 수 없어도 됩니다. 다만, 저 너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틈.”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전부가 아니게 하는 것.”
가브리엘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예.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얀 꽃을 든 배우가 다시 말했다.
“고통은 아름답다.”
그는 젖은 꽃잎을 만인의 발밑에 뿌렸다.
“아파라. 더 아파라. 찢어진 자만이 깊어진다. 부서진 자만이 진실하다.”
객석의 스토얀카 아센이 그 배우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조용하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고통에도 결이 있군요.”
레플리카가 바로 그녀를 불렀다.
“스토얀카.”
스토얀카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감상도 손이 될 수 있습니다.”
스토얀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무대 위 하얀 꽃을 든 배우를 보았다.
“저 배우는 틀렸습니다.”
레플리카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스토얀카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통은 아름다운 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자체로는요. 고통을 꽃이라 부르며 타인의 상처를 꺾어 모으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뽑는 일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레플리카는 그 손을 보았다.
스토얀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습관이라는 건 무섭군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오늘은 보겠습니다. 뽑지 않고.”
레플리카는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이 지켜지는지 보겠습니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훌륭합니다. 감시받는 것도 수행이 되겠지요.”
알렉산드리나는 스토얀카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통을 도로 삼는 것과, 고통을 재료로 삼는 것은 다릅니다.”
스토얀카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예. 오늘은 그 차이를 배우는 중입니다.”
무대 위 만인은 하얀 꽃 배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내 고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소.”
여관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까는 고통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지 않소?”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부정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말이 무대 위로 닿은 것처럼, 만인이 고개를 들었다.
여관 주인은 레플리카 쪽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만인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알렉산드리나도 덧붙였다.
“고난을 겪었다고 해서 고난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그 말은 무대 위로 스며들었다.
만인은 비를 맞은 채 멈춰 섰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했다.
“고난이 있기에 친구와 나누는 술잔이 더욱 각별해질 때가 있습니다. 여정이 있기에 비를 피할 여관을 세울 때가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길을 힘차게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가 조용히 내렸다.
“고통은 신전이 아닙니다. 제단도 아닙니다. 그것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것을 지나오며 남은 발자국을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만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러다 물었다.
“그러면 이 비는 무엇이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비입니다.”
만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그게 전부요?”
“지금은요.”
여관 주인은 우산을 내밀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도움이 됩니다.”
만인은 우산을 받았다.
그는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우산은 작았다.
어깨 한쪽만 겨우 가렸다.
“너무 작소.”
“예.”
“다 젖는데?”
“그럴 겁니다.”
“그럼 무슨 소용이오?”
여관 주인은 말했다.
“완전히 젖지 않도록은 할 수 있습니다.”
만인은 말문이 막혔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정도가 중요합니다.”
푸리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레플리카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통을 없애겠다는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 말은 종종 고통받는 사람의 기억까지 지우겠다는 말로 바뀝니다.”
그녀는 비 오는 골짜기 안쪽을 보았다.
“하지만 조금 덜 젖게 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게, 숨을 고를 수 있게, 자기 고통이 자기 전부라고 믿지 않게.”
무대 위 만인은 작은 우산을 들었다.
정말로 어깨 한쪽은 덜 젖었다.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없었을 때와는 달랐다.
만인은 낮게 말했다.
“작은 충분함이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또 그 말이오?”
“길 위에서는 자주 필요합니다.”
골짜기 안쪽에서 다시 목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아팠으니, 내가 옳다.”
“나는 견뎠으니, 너도 견뎌라.”
“나는 무너졌으니, 세상도 무너져야 한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아프다. 그러니 나를 봐라.”
“나는 아프다.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마라.”
만인은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말 같았지만, 어떤 것은 자기 안에서도 들려왔다.
그는 우산을 꽉 잡았다.
“저 말들은 다 틀렸소?”
여관 주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대 위 배우들을 하나씩 보았다.
젖은 외투.
검은 천.
쇠막대기.
하얀 꽃.
아무것도 모르는 고통.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전부 틀렸다고 하면, 너무 쉽겠지요.”
만인은 그를 보았다.
“그럼 맞소?”
“전부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제일 곤란하오.”
“예.”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대체로 곤란합니다.”
객석에서 아주 작게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불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무겁게 굳어버린 공기를 조금 풀어주는 웃음이었다.
만인은 비 오는 골짜기로 한 걸음 들어갔다.
발이 진흙에 빠졌다.
그는 몸을 휘청거렸다.
권력이 손을 내밀려 했다.
재물이 짤랑거리려 했다.
명성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러나 셋 모두 멈췄다.
이 골짜기에서는 재물도, 명성도, 권력도 유용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재물은 약을 살 수 있다.
명성은 도움을 부를 수 있다.
권력은 병원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 옆에 앉는 일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만인은 한 걸음 더 걸었다.
골짜기 벽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시장 아이가 빵을 나누던 손.
광장의 틀린 포스터.
관청의 성문.
집 앞에서 놓은 손.
사르키스의 문패.
아람의 나무 말.
전언의 방의 빈 편지.
모든 장면이 빗물에 번져 있었다.
만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길을 지나면 고통이 끝나오?”
여관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골짜기 안쪽에 있던 마지막 배우가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배우는 만인을 보았다.
“그래서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그 말에 멈췄다.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어떤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은 줄어듭니다. 어떤 고통은 이름이 바뀝니다. 어떤 고통은 자리를 옮깁니다. 어떤 고통은 오래 뒤에도, 비 오는 날이면 다시 아픕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대본 여백에 적으려다 멈췄다.
그 말은 너무 쉽게 적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인은 비 속에서 물었다.
“그럼 왜 걸어야 하오?”
여관 주인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의 목소리가 객석에서 흘러나왔다.
“고통이 끝나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만인은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무대를 보고 있었다.
“고통만이 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가브리엘라는 작은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날에는, 창문 하나라도 열어두기 위해서입니다.”
스토얀카가 조용히 말했다.
“혹은 고통에 자신의 중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레플리카는 이번에는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만인은 빗속에서 멈췄다.
“나는 지금 이 비가 싫소.”
여관 주인이 말했다.
“싫어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부정하면 안 된다면서?”
“싫어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인은 숨을 삼켰다.
비는 계속 내렸다.
그는 우산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고통에서 뭘 배워야 하오?”
여관 주인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은 멈췄다.
“뭐요?”
“고통이 항상 교훈을 주지는 않습니다.”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어떤 고통은 그저 고통입니다. 손님께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하셨다고 해서, 그 길이 실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더 아파졌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를 지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
이 골짜기를 지나면, 고통에 의미가 생기겠지.
아팠던 만큼, 무언가를 얻겠지.
여관 주인은 그 기대를 부드럽게 내려놓게 했다.
고통은 거래가 아니다.
만인은 낮게 물었다.
“그럼 이 비는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소?”
“예.”
여관 주인은 말했다.
“그러니 아픈 사람에게 너무 빨리 의미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은 비와 달랐다.
사람을 밀어내는 차가움이 아니라, 뜨겁게 부풀어 오른 상처 위에 잠시 얹는 젖은 천 같았다.
객석의 알토는 이 대목에서 무대 위 비를 보았다.
그는 기록장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아카식이 물었다.
“안 적어?”
알토는 말했다.
“고통은 즉시 기록하기 어렵습니다.”
“왜?”
“사건은 적을 수 있습니다. 부상, 사망, 피해 규모, 원인, 책임. 그런 것은 적어야 합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는, 너무 빨리 정리하면 안 됩니다.”
아카식은 그를 보았다.
알토는 무대 위 여관 주인을 보았다.
“기록은 잊지 않기 위한 것이지, 타인의 고통에 결론을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카식은 조용히 웃었다.
“오늘 진짜 좋은 관객이네.”
“그렇게 기록하지 마십시오.”
“또?”
“예.”
아카식은 웃었지만, 이번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는 빗속의 만인을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통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
화살.
칙령.
성문.
돌아오지 않는 병사.
남겨진 아이.
왕관을 쓴 자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고통이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면…… 왕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하일라는 조금 뒤에 대답했다.
“의미를 내려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요?”
“먼저 줄여야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짧고 전술적이었다.
“굶주림이면 식량. 병이면 약. 전쟁이면 종전. 피난이면 길. 유족이면 이름과 보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자기 의미를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이 없으면, 회복도 명령이 되어버립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루나리아는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오늘도 폐하께 휴식을 명령해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좋은 말을 했는데, 그 결론인가.”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폐하, 고통에 의미를 붙이지 말라면서요. 피로에도 의미 붙이지 말고 쉬시죠.”
미하일라는 라플리를 보았다.
“너까지?”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왼손의 긴장도 증가했습니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니케아에는 자비가 없군.”
요안나가 작게 웃었다.
무대 위에서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진흙이 옷에 묻었다.
그는 더 걷기 싫었다.
“쉬고 싶소.”
여관 주인은 곁에 섰다.
“예.”
“여기서 쉬어도 되오?”
“비는 옵니다.”
“알고 있소.”
“진흙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그럼 앉으셔도 됩니다.”
만인은 빗속에 앉았다.
여관 주인은 그 옆에 작은 의자를 놓았다.
언제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의자는 낡았고, 젖어 있었지만, 앉을 수는 있었다.
만인은 의자를 보았다.
“이런 곳에도 의자가 있소?”
여관 주인은 답했다.
“여관 주인은 대체로 의자를 챙깁니다.”
만인은 어이없어 웃었다.
“비 오는 골짜기에?”
“비 오는 골짜기일수록요.”
만인은 의자에 앉았다.
작은 우산이 그의 어깨 위에 걸렸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러나 그는 서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 차이는 작았지만, 엄청났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말했다.
“쉴 수 있으면, 사람은 조금 덜 무너집니다.”
가브리엘라는 무대 위 작은 창문을 보았다.
“창문을 볼 힘도, 앉아야 생길 때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비 너머를 보았다.
“새벽을 향해 걸으라고 말하기 전에, 앉을 곳을 주어야겠군요.”
스토얀카는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척추를 곧게 세우는 도구라.”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손을 들었다.
“이번엔 정말 평범한 감상입니다.”
“믿기 어렵군요.”
“그 점은 인정합니다.”
만인은 의자에 앉아 한참 비를 맞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러면 조금 낫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다행입니다.”
“비는 그대로인데.”
“예.”
“골짜기도 그대로고.”
“예.”
“내가 강해진 것도 아닌데.”
“예.”
만인은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조금 낫소.”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정도면, 지금은 충분할 수 있습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비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저 차가웠던 소리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의자가 있었다.
우산이 있었다.
창문이 있었다.
등불이 있었다.
옆에 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은 묻지 않았다.
“이 고통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는 그저 물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만인은 눈을 떴다.
“있소?”
“예.”
“비 오는 골짜기에도?”
“예.”
“정말 여관 주인은 이상한 직업이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작은 찻잔을 내밀었다.
차는 따뜻했다.
만인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 온기는 시장에서 빵을 건넨 손의 온기와 닮았고, 집 앞에서 놓은 손의 온기와도 닮았고, 사르키스가 아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말의 온기와도 닮았다.
그는 차를 마셨다.
비는 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조금 덜 떨렸다.
객석의 타마르 여왕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찻잔이군요.”
그녀는 자신의 잔을 들었다.
“짐의 포도밭에도 비가 옵니다. 비가 너무 적으면 포도가 마르고, 너무 많으면 썩지요. 고통도 비와 같답니다. 삶의 깊이를 더할 때도 있지만, 넘치면 뿌리를 질식시킵니다.”
그녀는 만인을 보았다.
“그러니 농부는 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배수로를 파고, 포도나무를 돌보지요.”
그 말에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좋은 비유입니다.”
타마르는 웃었다.
“농원 주인다운 말이지요.”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대본 여백에 적었다.
> 고통은 거래가 아니다.
고통은 신전이 아니다.
그러나 비를 맞은 길도 궤적이다.
필요한 것은 의미 강요가 아니라, 의자와 우산과 차와 창문.
그리고 함께 앉아줄 사람.
레이튼은 그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극이 답을 강요하지 않고 있군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도 이제 그런 극을 조금은 알 것 같아.”
무대 위 만인은 차를 마신 뒤 다시 일어났다.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외투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발은 진흙에 묻어 있었다.
골짜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걸을 수 있었다.
젖은 외투의 배우가 만인을 보았다.
“나를 봐달라.”
만인은 그에게 말했다.
“보았소.”
검은 천의 배우가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만인은 말했다.
“비는 왔소.”
쇠막대기의 배우가 외쳤다.
“견뎌라.”
만인은 말했다.
“쉬고 나서 걷겠소.”
하얀 꽃의 배우가 속삭였다.
“고통은 아름답다.”
만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지 않아도 내 길에 남을 수 있소.”
마지막 배우가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한참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모르는 채로도, 의자에는 앉을 수 있소.”
그 배우는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여관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골짜기 끝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비는 점점 옅어졌다.
완전히 멎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멀리, 골짜기 끝에 언덕이 보였다.
언덕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만인은 그것을 보았다.
“별이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비 오는 밤에도 별이 보이오?”
“가끔은요.”
“저 별까지 가는 것이오?”
여관 주인은 답했다.
“아닙니다.”
만인은 실망했다.
“또 그런 대답이오?”
“별은 대체로 닿기 어렵습니다.”
“그럼 왜 보이는 거요?”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걷는 방향을 잃지 않도록.”
만인은 별을 보았다.
이룰 수 없는 꿈.
닿을 수 없는 빛.
하지만 비 오는 골짜기 끝에서 그 별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객석의 알렉산드리나가 그 별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렸다.
“새벽은 아직 아닙니다.”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하지만 별은 있군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말했다.
“고통이 전부가 아니게 하는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스토얀카는 별을 보며 중얼거렸다.
“꺾을 수 없는 꽃이라.”
레플리카가 다시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엔 꽃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습니까? 손대지 않을 테니까요.”
레플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만인은 여관 주인과 함께 골짜기 끝으로 걸었다.
막이 내려오기 직전, 여관 주인은 비 오는 골짜기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앉아 있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우산을 받았다.
어떤 이는 의자에 앉았다.
어떤 이는 창문을 보았다.
어떤 이는 아직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 소리 사이로 그 말이 내려앉았다.
“비가 멎지 않아도, 잠깐 쉬어 가시죠.”
그리고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8막이 끝났다.
비 오는 골짜기 — 고통은 길을 증명하지 않는다
막이 올랐다.
전언의 방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방의 속삭임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나는 산 자를 찾아야 합니다.”
“보내지 않으면 도착하지 않습니다.”
그 말들은 비가 되었다.
처음에는 아주 가느다란 빗소리였다.
톡.
톡.
톡.
그다음에는 무대 위 돌길을 적셨고, 만인의 외투를 적셨고, 그가 지나온 시장의 흙과 광장의 먼지와 관청의 돌가루와 불탄 성문의 재를 한꺼번에 진흙으로 만들었다.
무대 위에는 골짜기가 있었다.
좁고 깊은 골짜기.
양옆의 절벽은 검고, 하늘은 낮았으며, 길은 미끄러웠다.
비는 세차지 않았지만 끈질겼다.
그것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비가 아니라, 오래 젖게 만드는 비였다.
만인은 골짜기 입구에 섰다.
그의 외투는 이미 젖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제야 알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젖어 있었다.
시장에서는 빵의 온기로 몰랐다.
광장에서는 소문의 열기로 몰랐다.
관청에서는 왕관의 무게로 몰랐다.
집 앞에서는 손을 놓는 아픔으로 몰랐다.
불탄 성문에서는 사르키스의 이름으로 몰랐다.
전언의 방에서는 아직 보내지 않은 말들로 몰랐다.
그러나 골짜기 앞에 서자, 만인은 자기 어깨가 너무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외투를 잡아당겼다.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 비는 언제부터 온 거요?”
여관 주인은 골짜기 입구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번에는 찻주전자도, 문패를 닦던 손수건도 없었다.
대신 낡은 우산 하나가 있었다.
우산은 크지 않았다.
한 사람을 겨우 가릴 정도였다.
“손님께서 길을 걷기 전부터요.”
만인은 그 말을 듣고 눈을 찌푸렸다.
“그럼 왜 이제야 보였소?”
“비를 모른 채 걷는 손님도 많습니다.”
“그게 가능하오?”
“예.”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장터의 소리, 광장의 박수, 관청의 명령, 집 앞의 기다림, 성문의 불길, 도착하지 못한 말들이 비를 가릴 때가 있습니다.”
만인은 골짜기 안쪽을 보았다.
“저기는 고통이오?”
“예.”
“그럼 돌아가도 되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돌아가셔도 됩니다.”
만인은 그 말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정말?”
“예.”
“붙잡지 않으시오?”
“고통을 억지로 통과하게 하는 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만인은 잠시 안도했다.
그러나 곧 다시 골짜기를 보았다.
빗속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울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너무 오래 아파서, 아픔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만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가면?”
여관 주인은 말했다.
“비는 계속 오겠지요.”
“그럼 결국 가야 하는 것 아니오?”
“아닙니다.”
여관 주인은 우산을 조금 들어 올렸다.
“가야 해서 가는 것과, 비를 알고도 걷기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비가 조금 더 짙어졌다.
골짜기 안쪽에서 배우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그들은 왕도, 상인도, 가족도, 병사도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사람이 고통 앞에서 만들어내는 여러 얼굴들이었다.
첫 번째 배우는 젖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외투는 너무 무거워 보였다.
그는 만인과 닮았지만, 만인은 아니었다.
그는 낮게 말했다.
“나는 아프다.”
만인은 그를 보았다.
젖은 외투의 배우는 다시 말했다.
“나는 아프다. 그러니 나를 보라.”
비가 그의 어깨 위로 계속 떨어졌다.
두 번째 배우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웃음은 너무 밝아서 오히려 불안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말했다.
“비는 오지 않는다. 나는 젖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
그러나 그의 발밑에는 물이 고이고 있었다.
세 번째 배우는 쇠로 된 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팡이처럼 짚고 다가왔다.
“견뎌라.”
그는 만인을 향해 말했다.
“나도 견뎠다. 그러니 너도 견뎌라. 무너지지 마라. 울지 마라. 쉬지 마라. 고통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는 말을 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네 번째 배우는 젖은 꽃을 들고 있었다.
그 꽃은 하얬다.
너무 하얘서, 오히려 빗물 속에서 눈에 거슬렸다.
그 배우는 꽃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통은 아름답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객석의 몇몇 사람이 불편하게 움직였다.
배우는 계속했다.
“아프기에 빛난다. 찢어졌기에 깊다. 무너졌기에 숭고하다. 그러니 더 아파라. 더 찢어져라. 더 깊어져라.”
만인의 얼굴이 굳었다.
다섯 번째 배우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비를 맞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가장 조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골짜기 전체에 가장 오래 남았다.
만인은 그 배우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은 누구요?”
여관 주인은 말했다.
“고통을 겪는 손님들이 자주 만나는 말들입니다.”
“사람이 아니오?”
“사람이기도 하고, 말이기도 하고, 습관이기도 합니다.”
젖은 외투의 배우가 만인에게 다가왔다.
“나를 보라.”
그는 말했다.
“나는 아팠다. 그러니 내가 옳다.”
검은 천의 배우가 웃었다.
“나는 아프지 않다. 그러니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
쇠막대기의 배우가 소리쳤다.
“견뎌라. 견디지 못하면 약한 것이다.”
하얀 꽃의 배우가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며 속삭였다.
“고통은 아름답다. 더 아름다워져라.”
마지막 배우는 빗속에 서서 다시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귀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막지 않았다.
그 말들을 듣는 것도 이 길의 일부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천천히 눈을 내렸다.
그녀는 무대 위 배우들을 보고 있었다.
특히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고 말한 배우를 오래 보았다.
레플리카는 낮게 말했다.
“저 말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가브리엘라가 그녀를 보았다.
레플리카는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아픈지 모르면, 사람은 모든 것을 미워하게 됩니다. 어디서 다쳤는지 모르면, 상처는 몸 전체가 됩니다.”
무대 위 젖은 외투의 배우가 다시 말했다.
“나는 아팠다. 그러니 내가 옳다.”
레플리카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픔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은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짓이라고만 해도 안 됩니다. 아픈 사람이 틀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아프지 않은 것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가브리엘라가 조용히 덧붙였다.
“상처와 진실과 독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있을 때가 있지요.”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분리해야 합니다. 독은 덜어내고, 진실은 남기고, 상처는 싸매야 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싸맨다는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상처를 빨리 덮으라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빗속의 쇠막대기 배우를 보고 있었다.
“견뎌라.”
그 배우는 여전히 외치고 있었다.
“나도 견뎠다. 그러니 너도 견뎌라. 쉬지 마라. 아픔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알렉산드리나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틀렸습니다.”
그녀의 말은 짧았다.
쇠막대기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멈춘 듯 보였다.
알렉산드리나는 계속 말했다.
“아픔이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아픔 속에서도 강해지려 애쓰고, 어떤 사람은 아픔 때문에 무너집니다.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가볍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비 오는 골짜기 너머를 보았다.
“고난은 새벽의 증명이 아닙니다. 고통받았기 때문에 빛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
“빛은 보상이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충분히 조심스럽지는 않습니다. 고통 앞에서 새벽을 말하는 일은 늘 위험합니다.”
가브리엘라는 창가를 보는 듯한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는 실제 창문이 하나 나타났다.
아주 작은 창문이었다.
골짜기 절벽 한가운데, 말도 안 되는 위치에.
창문은 문이 아니었다.
나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다만 창틀 너머로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아직 새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벽도 아니었다.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말했다.
“밤을 빨리 끝내려 하면, 사람은 아직 울어야 할 시간을 빼앗깁니다.”
알렉산드리나가 그녀를 보았다.
가브리엘라는 계속 말했다.
“그러나 밤이 영원하다고 말해도 안 됩니다. 그 말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옥을 줍니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 위 작은 창문에 머물렀다.
“그러니 창문이 필요합니다. 문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직 나갈 수 없어도 됩니다. 다만, 저 너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틈.”
레플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전부가 아니게 하는 것.”
가브리엘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예.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얀 꽃을 든 배우가 다시 말했다.
“고통은 아름답다.”
그는 젖은 꽃잎을 만인의 발밑에 뿌렸다.
“아파라. 더 아파라. 찢어진 자만이 깊어진다. 부서진 자만이 진실하다.”
객석의 스토얀카 아센이 그 배우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조용하기 때문에 더 위험했다.
“고통에도 결이 있군요.”
레플리카가 바로 그녀를 불렀다.
“스토얀카.”
스토얀카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감상도 손이 될 수 있습니다.”
스토얀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무대 위 하얀 꽃을 든 배우를 보았다.
“저 배우는 틀렸습니다.”
레플리카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스토얀카는 부드럽게 말했다.
“고통은 아름다운 꽃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자체로는요. 고통을 꽃이라 부르며 타인의 상처를 꺾어 모으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뽑는 일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레플리카는 그 손을 보았다.
스토얀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습관이라는 건 무섭군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오늘은 보겠습니다. 뽑지 않고.”
레플리카는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
“그 말이 지켜지는지 보겠습니다.”
스토얀카는 웃었다.
“훌륭합니다. 감시받는 것도 수행이 되겠지요.”
알렉산드리나는 스토얀카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통을 도로 삼는 것과, 고통을 재료로 삼는 것은 다릅니다.”
스토얀카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예. 오늘은 그 차이를 배우는 중입니다.”
무대 위 만인은 하얀 꽃 배우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내 고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소.”
여관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셔도 됩니다.”
“하지만 아까는 고통을 부정하지 말라고 했지 않소?”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부정하지 않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 말이 무대 위로 닿은 것처럼, 만인이 고개를 들었다.
여관 주인은 레플리카 쪽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만인에게 말했다.
“맞습니다.”
알렉산드리나도 덧붙였다.
“고난을 겪었다고 해서 고난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그 말은 무대 위로 스며들었다.
만인은 비를 맞은 채 멈춰 섰다.
여관 주인은 천천히 말했다.
“고난이 있기에 친구와 나누는 술잔이 더욱 각별해질 때가 있습니다. 여정이 있기에 비를 피할 여관을 세울 때가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의 길을 힘차게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가 조용히 내렸다.
“고통은 신전이 아닙니다. 제단도 아닙니다. 그것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것을 지나오며 남은 발자국을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만인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러다 물었다.
“그러면 이 비는 무엇이오?”
여관 주인은 대답했다.
“비입니다.”
만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그게 전부요?”
“지금은요.”
여관 주인은 우산을 내밀었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이 도움이 됩니다.”
만인은 우산을 받았다.
그는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우산은 작았다.
어깨 한쪽만 겨우 가렸다.
“너무 작소.”
“예.”
“다 젖는데?”
“그럴 겁니다.”
“그럼 무슨 소용이오?”
여관 주인은 말했다.
“완전히 젖지 않도록은 할 수 있습니다.”
만인은 말문이 막혔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조용히 말했다.
“그 정도가 중요합니다.”
푸리나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레플리카는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통을 없애겠다는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 말은 종종 고통받는 사람의 기억까지 지우겠다는 말로 바뀝니다.”
그녀는 비 오는 골짜기 안쪽을 보았다.
“하지만 조금 덜 젖게 할 수는 있습니다. 오늘 밤을 넘길 수 있게, 숨을 고를 수 있게, 자기 고통이 자기 전부라고 믿지 않게.”
무대 위 만인은 작은 우산을 들었다.
정말로 어깨 한쪽은 덜 젖었다.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없었을 때와는 달랐다.
만인은 낮게 말했다.
“작은 충분함이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또 그 말이오?”
“길 위에서는 자주 필요합니다.”
골짜기 안쪽에서 다시 목소리들이 들렸다.
“나는 아팠으니, 내가 옳다.”
“나는 견뎠으니, 너도 견뎌라.”
“나는 무너졌으니, 세상도 무너져야 한다.”
“나는 아프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아프다. 그러니 나를 봐라.”
“나는 아프다.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마라.”
만인은 귀를 기울였다.
그 목소리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말 같았지만, 어떤 것은 자기 안에서도 들려왔다.
그는 우산을 꽉 잡았다.
“저 말들은 다 틀렸소?”
여관 주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대 위 배우들을 하나씩 보았다.
젖은 외투.
검은 천.
쇠막대기.
하얀 꽃.
아무것도 모르는 고통.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전부 틀렸다고 하면, 너무 쉽겠지요.”
만인은 그를 보았다.
“그럼 맞소?”
“전부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제일 곤란하오.”
“예.”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은 대체로 곤란합니다.”
객석에서 아주 작게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은 불경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무겁게 굳어버린 공기를 조금 풀어주는 웃음이었다.
만인은 비 오는 골짜기로 한 걸음 들어갔다.
발이 진흙에 빠졌다.
그는 몸을 휘청거렸다.
권력이 손을 내밀려 했다.
재물이 짤랑거리려 했다.
명성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 했다.
그러나 셋 모두 멈췄다.
이 골짜기에서는 재물도, 명성도, 권력도 유용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재물은 약을 살 수 있다.
명성은 도움을 부를 수 있다.
권력은 병원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 옆에 앉는 일은 다른 종류의 일이었다.
만인은 한 걸음 더 걸었다.
골짜기 벽에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시장 아이가 빵을 나누던 손.
광장의 틀린 포스터.
관청의 성문.
집 앞에서 놓은 손.
사르키스의 문패.
아람의 나무 말.
전언의 방의 빈 편지.
모든 장면이 빗물에 번져 있었다.
만인은 이를 악물었다.
“이 길을 지나면 고통이 끝나오?”
여관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골짜기 안쪽에 있던 마지막 배우가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배우는 만인을 보았다.
“그래서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그 말에 멈췄다.
레플리카가 객석에서 낮게 말했다.
“어떤 고통은 끝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은 줄어듭니다. 어떤 고통은 이름이 바뀝니다. 어떤 고통은 자리를 옮깁니다. 어떤 고통은 오래 뒤에도, 비 오는 날이면 다시 아픕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대본 여백에 적으려다 멈췄다.
그 말은 너무 쉽게 적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인은 비 속에서 물었다.
“그럼 왜 걸어야 하오?”
여관 주인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의 목소리가 객석에서 흘러나왔다.
“고통이 끝나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닙니다.”
만인은 고개를 돌렸다.
알렉산드리나는 무대를 보고 있었다.
“고통만이 길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걷는 것입니다.”
가브리엘라는 작은 창문을 보았다.
“그리고 걷지 못하는 날에는, 창문 하나라도 열어두기 위해서입니다.”
스토얀카가 조용히 말했다.
“혹은 고통에 자신의 중심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레플리카는 이번에는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만인은 빗속에서 멈췄다.
“나는 지금 이 비가 싫소.”
여관 주인이 말했다.
“싫어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부정하면 안 된다면서?”
“싫어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만인은 숨을 삼켰다.
비는 계속 내렸다.
그는 우산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 고통에서 뭘 배워야 하오?”
여관 주인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반드시 무언가를 배우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은 멈췄다.
“뭐요?”
“고통이 항상 교훈을 주지는 않습니다.”
여관 주인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어떤 고통은 그저 고통입니다. 손님께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하셨다고 해서, 그 길이 실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의 얼굴이 무너졌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이상하게 더 아파졌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비를 지나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
이 골짜기를 지나면, 고통에 의미가 생기겠지.
아팠던 만큼, 무언가를 얻겠지.
여관 주인은 그 기대를 부드럽게 내려놓게 했다.
고통은 거래가 아니다.
만인은 낮게 물었다.
“그럼 이 비는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소?”
“예.”
여관 주인은 말했다.
“그러니 아픈 사람에게 너무 빨리 의미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만인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차가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은 비와 달랐다.
사람을 밀어내는 차가움이 아니라, 뜨겁게 부풀어 오른 상처 위에 잠시 얹는 젖은 천 같았다.
객석의 알토는 이 대목에서 무대 위 비를 보았다.
그는 기록장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아카식이 물었다.
“안 적어?”
알토는 말했다.
“고통은 즉시 기록하기 어렵습니다.”
“왜?”
“사건은 적을 수 있습니다. 부상, 사망, 피해 규모, 원인, 책임. 그런 것은 적어야 합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 고통을 어떻게 살아냈는지는, 너무 빨리 정리하면 안 됩니다.”
아카식은 그를 보았다.
알토는 무대 위 여관 주인을 보았다.
“기록은 잊지 않기 위한 것이지, 타인의 고통에 결론을 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카식은 조용히 웃었다.
“오늘 진짜 좋은 관객이네.”
“그렇게 기록하지 마십시오.”
“또?”
“예.”
아카식은 웃었지만, 이번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는 빗속의 만인을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고통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전쟁.
화살.
칙령.
성문.
돌아오지 않는 병사.
남겨진 아이.
왕관을 쓴 자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고통이 아무 의미도 없을 수도 있다면…… 왕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미하일라는 조금 뒤에 대답했다.
“의미를 내려주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요?”
“먼저 줄여야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짧고 전술적이었다.
“굶주림이면 식량. 병이면 약. 전쟁이면 종전. 피난이면 길. 유족이면 이름과 보상. 그리고 나서, 그들이 자기 의미를 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이 없으면, 회복도 명령이 되어버립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루나리아는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오늘도 폐하께 휴식을 명령해야 합니다.”
미하일라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좋은 말을 했는데, 그 결론인가.”
라플리가 피식 웃었다.
“폐하, 고통에 의미를 붙이지 말라면서요. 피로에도 의미 붙이지 말고 쉬시죠.”
미하일라는 라플리를 보았다.
“너까지?”
카를로타가 조용히 말했다.
“왼손의 긴장도 증가했습니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니케아에는 자비가 없군.”
요안나가 작게 웃었다.
무대 위에서 만인은 무릎을 꿇었다.
진흙이 옷에 묻었다.
그는 더 걷기 싫었다.
“쉬고 싶소.”
여관 주인은 곁에 섰다.
“예.”
“여기서 쉬어도 되오?”
“비는 옵니다.”
“알고 있소.”
“진흙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소.”
“그럼 앉으셔도 됩니다.”
만인은 빗속에 앉았다.
여관 주인은 그 옆에 작은 의자를 놓았다.
언제 가져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의자는 낡았고, 젖어 있었지만, 앉을 수는 있었다.
만인은 의자를 보았다.
“이런 곳에도 의자가 있소?”
여관 주인은 답했다.
“여관 주인은 대체로 의자를 챙깁니다.”
만인은 어이없어 웃었다.
“비 오는 골짜기에?”
“비 오는 골짜기일수록요.”
만인은 의자에 앉았다.
작은 우산이 그의 어깨 위에 걸렸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그러나 그는 서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 차이는 작았지만, 엄청났다.
객석의 레플리카가 말했다.
“쉴 수 있으면, 사람은 조금 덜 무너집니다.”
가브리엘라는 무대 위 작은 창문을 보았다.
“창문을 볼 힘도, 앉아야 생길 때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비 너머를 보았다.
“새벽을 향해 걸으라고 말하기 전에, 앉을 곳을 주어야겠군요.”
스토얀카는 의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척추를 곧게 세우는 도구라.”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손을 들었다.
“이번엔 정말 평범한 감상입니다.”
“믿기 어렵군요.”
“그 점은 인정합니다.”
만인은 의자에 앉아 한참 비를 맞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러면 조금 낫소.”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다행입니다.”
“비는 그대로인데.”
“예.”
“골짜기도 그대로고.”
“예.”
“내가 강해진 것도 아닌데.”
“예.”
만인은 의자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조금 낫소.”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정도면, 지금은 충분할 수 있습니다.”
만인은 눈을 감았다.
비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저 차가웠던 소리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의자가 있었다.
우산이 있었다.
창문이 있었다.
등불이 있었다.
옆에 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여관 주인은 묻지 않았다.
“이 고통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그는 그저 물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만인은 눈을 떴다.
“있소?”
“예.”
“비 오는 골짜기에도?”
“예.”
“정말 여관 주인은 이상한 직업이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작은 찻잔을 내밀었다.
차는 따뜻했다.
만인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쌌다.
그 온기는 시장에서 빵을 건넨 손의 온기와 닮았고, 집 앞에서 놓은 손의 온기와도 닮았고, 사르키스가 아이에게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말의 온기와도 닮았다.
그는 차를 마셨다.
비는 멎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조금 덜 떨렸다.
객석의 타마르 여왕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좋은 찻잔이군요.”
그녀는 자신의 잔을 들었다.
“짐의 포도밭에도 비가 옵니다. 비가 너무 적으면 포도가 마르고, 너무 많으면 썩지요. 고통도 비와 같답니다. 삶의 깊이를 더할 때도 있지만, 넘치면 뿌리를 질식시킵니다.”
그녀는 만인을 보았다.
“그러니 농부는 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배수로를 파고, 포도나무를 돌보지요.”
그 말에 레플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좋은 비유입니다.”
타마르는 웃었다.
“농원 주인다운 말이지요.”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대본 여백에 적었다.
> 고통은 거래가 아니다.
고통은 신전이 아니다.
그러나 비를 맞은 길도 궤적이다.
필요한 것은 의미 강요가 아니라, 의자와 우산과 차와 창문.
그리고 함께 앉아줄 사람.
레이튼은 그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극이 답을 강요하지 않고 있군요.”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나도 이제 그런 극을 조금은 알 것 같아.”
무대 위 만인은 차를 마신 뒤 다시 일어났다.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외투는 여전히 젖어 있었다.
발은 진흙에 묻어 있었다.
골짜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 걸을 수 있었다.
젖은 외투의 배우가 만인을 보았다.
“나를 봐달라.”
만인은 그에게 말했다.
“보았소.”
검은 천의 배우가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만인은 말했다.
“비는 왔소.”
쇠막대기의 배우가 외쳤다.
“견뎌라.”
만인은 말했다.
“쉬고 나서 걷겠소.”
하얀 꽃의 배우가 속삭였다.
“고통은 아름답다.”
만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름답지 않아도 내 길에 남을 수 있소.”
마지막 배우가 말했다.
“나는 왜 아픈지도 모르겠다.”
만인은 한참 그를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걸 모르는 채로도, 의자에는 앉을 수 있소.”
그 배우는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여관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골짜기 끝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비는 점점 옅어졌다.
완전히 멎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멀리, 골짜기 끝에 언덕이 보였다.
언덕 위에는 하늘이 있었다.
구름 사이로 별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만인은 그것을 보았다.
“별이군.”
여관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예.”
“비 오는 밤에도 별이 보이오?”
“가끔은요.”
“저 별까지 가는 것이오?”
여관 주인은 답했다.
“아닙니다.”
만인은 실망했다.
“또 그런 대답이오?”
“별은 대체로 닿기 어렵습니다.”
“그럼 왜 보이는 거요?”
여관 주인은 부드럽게 말했다.
“걷는 방향을 잃지 않도록.”
만인은 별을 보았다.
이룰 수 없는 꿈.
닿을 수 없는 빛.
하지만 비 오는 골짜기 끝에서 그 별은, 그저 거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객석의 알렉산드리나가 그 별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걸렸다.
“새벽은 아직 아닙니다.”
가브리엘라가 말했다.
“하지만 별은 있군요.”
레플리카는 조용히 말했다.
“고통이 전부가 아니게 하는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스토얀카는 별을 보며 중얼거렸다.
“꺾을 수 없는 꽃이라.”
레플리카가 다시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엔 꽃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습니까? 손대지 않을 테니까요.”
레플리카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만인은 여관 주인과 함께 골짜기 끝으로 걸었다.
막이 내려오기 직전, 여관 주인은 비 오는 골짜기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앉아 있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우산을 받았다.
어떤 이는 의자에 앉았다.
어떤 이는 창문을 보았다.
어떤 이는 아직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관 주인은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낮게 말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비 소리 사이로 그 말이 내려앉았다.
“비가 멎지 않아도, 잠깐 쉬어 가시죠.”
그리고 막이 천천히 내려왔다.
8막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