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2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09:08:50
프롤로그
《인생은 꿈이라도》
― 꿈속의 왕관과 깨어 있는 배우들 ―
막이 오르기 전, 극장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객석은 가득 차 있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귀족들.
피난민들.
상인들.
장인들.
각국에서 찾아온 사절들.
갑옷을 벗지 못한 기사들.
기도문을 쥔 사제들.
왕관의 무게를 아는 군주들.
그리고 아직 왕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무대는, 이상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에는 탑이 하나 서 있었다.
높지도 않았다.
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검은 막과 나무기둥, 오래된 쇠고리, 별빛을 흉내 낸 작은 유리 조각들로 만든 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순간, 조금씩 조용해졌다.
그 탑은 너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감옥.
왕궁.
성벽.
기록 보관소.
요새.
장부.
갑주.
숲.
극장.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마음.
무대 위 천장에는 별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별자리는 그어져 있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배치를 보고 작게 웃었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으셨군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대 위의 별들이 아주 조금 흔들린 듯했다.
그의 곁에서 하융이 회색빛 창호를 닮은 무대 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 양옆에는 수많은 창이 있었다.
어떤 창은 불탄 성벽을 비추었다.
어떤 창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을 비추었다.
어떤 창은 웃는 아이를 비추었다.
어떤 창은 같은 아이의 비어 있는 의자를 비추었다.
하융의 눈동자에 그 빛들이 겹쳤다.
그는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꿈이라 하여, 모두 헛것은 아니오.”
잠시 뒤, 그는 다시 말했다.
“허나 꿈이라 믿는 순간, 사람은 너무 쉽게 손을 놓기도 하오. 그것이 두렵구려.”
죠니 죠스타는 무대 뒤편의 어둠을 흘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꿈이면 좋겠네.
넘어져도 덜 아플 테니까.”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작은 장부를 들고 있었다.
오늘 공연에 오르는 배우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였다.
왕.
성좌.
황제.
사제.
기사.
노예였던 자.
피난민.
장인.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자.
아직 죽지 않은 자.
그리고 아직 자기 배역을 모르는 자.
그레이는 그 이름들을 한 번씩 확인했다.
빠진 이름이 없는지.
틀리게 적힌 이름이 없는지.
누군가의 배역이 그 사람을 지워버리지는 않는지.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 뒤에 따라오는 발소리는 조금 느렸다.
푸리나 헤툼이 막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대신 배우의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푸른 리본이 달린 의상은 화려했지만, 오늘만큼은 어딘가 절제되어 있었다. 마치 지나치게 빛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명을 낮춘 별 같았다.
그녀는 객석을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오늘만큼은 신사도 숙녀도 아닌 분들까지!”
객석 곳곳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 웃어도 돼. 오늘의 극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전부 장례식처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무대 중앙의 탑을 돌아보았다.
“오늘 우리가 올릴 극의 이름은……”
잠시 침묵.
그 순간, 무대 위의 별빛이 하나씩 켜졌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인생은 꿈이라도》.”
그 말이 극장 안으로 천천히 번졌다.
인생은 꿈이라도.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불안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몽골의 말발굽이 다가오는 세상에서, 삶이 꿈이라는 말은 너무 가벼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불탄 고향을 떠난 피난민에게, 죽은 아이를 묻은 부모에게, 전장에서 팔을 잃은 병사에게, 꿈이라는 말은 잔혹한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웃지 않았다.
그녀는 객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오늘 나는 삶이 가볍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꿈이라면 사라져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꿈이니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배우가 있다면, 오늘 무대에서 내가 직접 끌어내릴 거야.”
죠니가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좀 보고 싶은데.”
그레이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오늘 우리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그녀는 손을 들어 탑을 가리켰다.
“만약 누군가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졌다고 한다면.
만약 별이, 기록이, 혈통이, 왕관이, 고통이, 복수가, 죄가, 혹은 신이 말하기를, ‘너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녀는 다시 객석을 보았다.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할까?”
극장 안은 조용했다.
푸리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만약 삶이 꿈처럼 흔들린다면.
오늘의 왕관이 내일 아침 사라지고, 오늘의 감옥이 어제의 악몽이었다고 말해진다면.
그 안에서 우리가 한 선택도 사라질까?”
무대 뒤편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카식은 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꿈도 기록할 수 있다는 듯이.
알토는 그의 옆에서 무표정하게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기록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푸리나는 말했다.
“오늘의 극에는 한 명의 주인공이 없어.”
객석이 조금 술렁였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많아.”
그녀는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푸리나다운 웃음이었다.
“왕도 올라올 거야.
황제도 올라올 거야.
기사단장도, 재상도, 사제도, 장인도, 가신도, 광대도,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자도, 꿈을 안아주는 자도, 꿈에서 깨우는 자도 올라올 거야.”
그녀는 탑 앞에 놓인 하얀 가면을 집어 들었다.
그 가면에는 아무 얼굴도 없었다.
왕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죄수의 얼굴도 아니었다.
폭군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비어 있었다.
“이것은 세히스문도의 가면.”
푸리나가 말했다.
“탑에 갇힌 자의 가면.
예언 때문에 괴물이라 불린 자의 가면.
왕관을 쓰고도 그것이 꿈이었다고 들은 자의 가면.
그리고 마침내 묻는 자의 가면.”
그녀는 가면을 객석 쪽으로 들어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꿈속에 있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순간 무대 중앙의 탑 안에서 쇠사슬 소리가 났다.
일부 관객이 숨을 삼켰다.
탑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창문들에는 이미 수많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자주빛 활을 든 황제.
장부를 든 청록빛 까마귀.
황금빛 죄악의 갑주를 입은 기사.
숲과 달 아래 선 왕.
검은 하늘 아래 서 있는 차르.
새벽을 흉내 내다 진짜 새벽을 향해 걷는 사생아.
백화가 피어나는 악몽.
급한 편지에 속아 왕관을 떠맡은 기사단장.
은의 꽃을 품은 성인.
작은 공방에서 꿈을 재료로 삼는 아이.
그들은 아직 무대 위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무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융은 그 창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느 창에도 사람이 있소. 어느 창에도 죽음이 있고, 어느 창에도 살아남은 손이 있소.”
그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허나 오늘 우리가 딛는 바닥은 하나뿐이구려. 그러니 꿈이라 하여 함부로 밟아서는 아니 되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진지해졌다.
“응. 맞아.”
그녀는 가면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오늘 우리는 꿈을 꾸겠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이유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조명이 바뀌었다.
탑 위의 별빛이 흔들리고, 창문마다 다른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죽은 가능성들.
살아남았을 가능성들.
조금 더 나은 가능성들.
차갑게 실패한 가능성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간신히 내일로 이어진 가능성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첫 질문은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뭔데?”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꿈이라 부른 것은 누구입니까?”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러다가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첫 막부터 관객을 괴롭히기 딱 좋은 질문이야.”
죠니가 팔짱을 꼈다.
“관객만 괴롭히면 다행이지.”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배우들이 다치지 않게만 해주세요.”
푸리나는 그레이를 향해 돌아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물론!”
그레이는 푸리나를 가만히 보았다.
“아마도, 라는 말은 붙이지 말아주세요.”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물론.”
작은 웃음이 무대 뒤에서 퍼졌다.
그 웃음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웃음 덕분에 극장은 완전히 무겁지만은 않았다.
그때, 객석 가장 뒤편의 어둠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가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아는 자들은 알고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 문간에 가까운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꿈이었는지 삶이었는지는, 막이 내린 뒤에 천천히 이야기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여관에는 밤새 식지 않는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잠시, 정말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군주의 얼굴이었다.
아니, 극장주의 얼굴이었다.
혹은 자기 자신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깊게 인사했다.
“자, 그럼 시작하자.”
막 뒤편에서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둥.
탑의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선언했다.
“첫 번째 꿈.”
조명이 탑 안으로 떨어졌다.
“기록된 아이.”
무대 위에 알토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책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책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이 적힌 기록.
아직 선택하지 않은 죄.
아직 저지르지 않은 배신.
아직 흘리지 않은 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별빛.
알토는 탑 안에 섰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녀의 눈빛은 밝았지만, 이번에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탑 안의 아이가 처음으로 말했다.
“기록은 선택을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막의 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인생은 꿈이라도》
― 꿈속의 왕관과 깨어 있는 배우들 ―
막이 오르기 전, 극장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관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객석은 가득 차 있었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귀족들.
피난민들.
상인들.
장인들.
각국에서 찾아온 사절들.
갑옷을 벗지 못한 기사들.
기도문을 쥔 사제들.
왕관의 무게를 아는 군주들.
그리고 아직 왕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의 무대는, 이상했기 때문이다.
무대 중앙에는 탑이 하나 서 있었다.
높지도 않았다.
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검은 막과 나무기둥, 오래된 쇠고리, 별빛을 흉내 낸 작은 유리 조각들로 만든 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순간, 조금씩 조용해졌다.
그 탑은 너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감옥.
왕궁.
성벽.
기록 보관소.
요새.
장부.
갑주.
숲.
극장.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마음.
무대 위 천장에는 별들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별자리는 그어져 있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 배치를 보고 작게 웃었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으셨군요.”
그 말은 조용했지만, 무대 위의 별들이 아주 조금 흔들린 듯했다.
그의 곁에서 하융이 회색빛 창호를 닮은 무대 장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 양옆에는 수많은 창이 있었다.
어떤 창은 불탄 성벽을 비추었다.
어떤 창은 무너지지 않은 성벽을 비추었다.
어떤 창은 웃는 아이를 비추었다.
어떤 창은 같은 아이의 비어 있는 의자를 비추었다.
하융의 눈동자에 그 빛들이 겹쳤다.
그는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꿈이라 하여, 모두 헛것은 아니오.”
잠시 뒤, 그는 다시 말했다.
“허나 꿈이라 믿는 순간, 사람은 너무 쉽게 손을 놓기도 하오. 그것이 두렵구려.”
죠니 죠스타는 무대 뒤편의 어둠을 흘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꿈이면 좋겠네.
넘어져도 덜 아플 테니까.”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작은 장부를 들고 있었다.
오늘 공연에 오르는 배우들의 이름이 적힌 장부였다.
왕.
성좌.
황제.
사제.
기사.
노예였던 자.
피난민.
장인.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자.
아직 죽지 않은 자.
그리고 아직 자기 배역을 모르는 자.
그레이는 그 이름들을 한 번씩 확인했다.
빠진 이름이 없는지.
틀리게 적힌 이름이 없는지.
누군가의 배역이 그 사람을 지워버리지는 않는지.
무대 뒤에서 푸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아!”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한마디 뒤에 따라오는 발소리는 조금 느렸다.
푸리나 헤툼이 막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대신 배우의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푸른 리본이 달린 의상은 화려했지만, 오늘만큼은 어딘가 절제되어 있었다. 마치 지나치게 빛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명을 낮춘 별 같았다.
그녀는 객석을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오늘만큼은 신사도 숙녀도 아닌 분들까지!”
객석 곳곳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렀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좋아. 웃어도 돼. 오늘의 극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전부 장례식처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무대 중앙의 탑을 돌아보았다.
“오늘 우리가 올릴 극의 이름은……”
잠시 침묵.
그 순간, 무대 위의 별빛이 하나씩 켜졌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인생은 꿈이라도》.”
그 말이 극장 안으로 천천히 번졌다.
인생은 꿈이라도.
누군가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는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불안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몽골의 말발굽이 다가오는 세상에서, 삶이 꿈이라는 말은 너무 가벼운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불탄 고향을 떠난 피난민에게, 죽은 아이를 묻은 부모에게, 전장에서 팔을 잃은 병사에게, 꿈이라는 말은 잔혹한 조롱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웃지 않았다.
그녀는 객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오늘 나는 삶이 가볍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꿈이라면 사라져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꿈이니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배우가 있다면, 오늘 무대에서 내가 직접 끌어내릴 거야.”
죠니가 뒤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좀 보고 싶은데.”
그레이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오늘 우리가 묻고 싶은 건 하나야.”
그녀는 손을 들어 탑을 가리켰다.
“만약 누군가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졌다고 한다면.
만약 별이, 기록이, 혈통이, 왕관이, 고통이, 복수가, 죄가, 혹은 신이 말하기를, ‘너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녀는 다시 객석을 보았다.
“그 사람은 정말 그렇게 되어야 할까?”
극장 안은 조용했다.
푸리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만약 삶이 꿈처럼 흔들린다면.
오늘의 왕관이 내일 아침 사라지고, 오늘의 감옥이 어제의 악몽이었다고 말해진다면.
그 안에서 우리가 한 선택도 사라질까?”
무대 뒤편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카식은 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꿈도 기록할 수 있다는 듯이.
알토는 그의 옆에서 무표정하게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손가락은 무릎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기록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푸리나는 말했다.
“오늘의 극에는 한 명의 주인공이 없어.”
객석이 조금 술렁였다.
“정확히 말하면, 너무 많아.”
그녀는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푸리나다운 웃음이었다.
“왕도 올라올 거야.
황제도 올라올 거야.
기사단장도, 재상도, 사제도, 장인도, 가신도, 광대도,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자도, 꿈을 안아주는 자도, 꿈에서 깨우는 자도 올라올 거야.”
그녀는 탑 앞에 놓인 하얀 가면을 집어 들었다.
그 가면에는 아무 얼굴도 없었다.
왕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죄수의 얼굴도 아니었다.
폭군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비어 있었다.
“이것은 세히스문도의 가면.”
푸리나가 말했다.
“탑에 갇힌 자의 가면.
예언 때문에 괴물이라 불린 자의 가면.
왕관을 쓰고도 그것이 꿈이었다고 들은 자의 가면.
그리고 마침내 묻는 자의 가면.”
그녀는 가면을 객석 쪽으로 들어 보였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꿈속에 있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 순간 무대 중앙의 탑 안에서 쇠사슬 소리가 났다.
일부 관객이 숨을 삼켰다.
탑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창문들에는 이미 수많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자주빛 활을 든 황제.
장부를 든 청록빛 까마귀.
황금빛 죄악의 갑주를 입은 기사.
숲과 달 아래 선 왕.
검은 하늘 아래 서 있는 차르.
새벽을 흉내 내다 진짜 새벽을 향해 걷는 사생아.
백화가 피어나는 악몽.
급한 편지에 속아 왕관을 떠맡은 기사단장.
은의 꽃을 품은 성인.
작은 공방에서 꿈을 재료로 삼는 아이.
그들은 아직 무대 위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무대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융은 그 창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어느 창에도 사람이 있소. 어느 창에도 죽음이 있고, 어느 창에도 살아남은 손이 있소.”
그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허나 오늘 우리가 딛는 바닥은 하나뿐이구려. 그러니 꿈이라 하여 함부로 밟아서는 아니 되오.”
푸리나는 하융을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 진지해졌다.
“응. 맞아.”
그녀는 가면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오늘 우리는 꿈을 꾸겠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꿈이라는 이유로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조명이 바뀌었다.
탑 위의 별빛이 흔들리고, 창문마다 다른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죽은 가능성들.
살아남았을 가능성들.
조금 더 나은 가능성들.
차갑게 실패한 가능성들.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간신히 내일로 이어진 가능성들.
레이튼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첫 질문은 정해졌군요.”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뭔데?”
레이튼은 미소를 지었다.
“꿈이라 부른 것은 누구입니까?”
그 말에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그러다가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첫 막부터 관객을 괴롭히기 딱 좋은 질문이야.”
죠니가 팔짱을 꼈다.
“관객만 괴롭히면 다행이지.”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배우들이 다치지 않게만 해주세요.”
푸리나는 그레이를 향해 돌아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물론!”
그레이는 푸리나를 가만히 보았다.
“아마도, 라는 말은 붙이지 말아주세요.”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물론.”
작은 웃음이 무대 뒤에서 퍼졌다.
그 웃음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웃음 덕분에 극장은 완전히 무겁지만은 않았다.
그때, 객석 가장 뒤편의 어둠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가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목소리를 아는 자들은 알고 있었다.
여관의 성좌는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 문간에 가까운 곳에 조용히 서 있었다.
손에는 찻잔이 있었다.
“꿈이었는지 삶이었는지는, 막이 내린 뒤에 천천히 이야기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여관에는 밤새 식지 않는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 말에 푸리나는 아주 잠시, 정말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그녀는 이제 완전히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군주의 얼굴이었다.
아니, 극장주의 얼굴이었다.
혹은 자기 자신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푸리나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객석을 향해 깊게 인사했다.
“자, 그럼 시작하자.”
막 뒤편에서 북소리가 한 번 울렸다.
둥.
탑의 문이 열렸다.
푸리나가 선언했다.
“첫 번째 꿈.”
조명이 탑 안으로 떨어졌다.
“기록된 아이.”
무대 위에 알토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책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책장이 펼쳐져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이 적힌 기록.
아직 선택하지 않은 죄.
아직 저지르지 않은 배신.
아직 흘리지 않은 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별빛.
알토는 탑 안에 섰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그녀의 눈빛은 밝았지만, 이번에는 장난스럽지 않았다.
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탑 안의 아이가 처음으로 말했다.
“기록은 선택을 묶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막의 꿈이,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