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5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11:48:24
제1막 개정본

기록된 아이

탑 안은 책장으로 되어 있었다.

관객석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탑이었다.
검은 막과 오래된 나무기둥, 별빛을 흉내 낸 유리 조각들로 세운 감옥.

그러나 알토가 그 안에 발을 들이는 순간, 탑의 안쪽은 달라졌다.

벽은 돌이 아니었다.

책등이었다.

기록의 책등.
계약서의 등.
판결문의 등.
아직 쓰이지 않은 보고서의 등.
누군가의 삶을 한 줄로 요약하려다 멈춘 장부의 등.

창살은 쇠가 아니었다.

문장들이었다.

“훗날 배신할 자.”
“왕국에 손실을 끼칠 가능성이 있음.”
“계약 위반 예정.”
“위험 인물.”
“기록상 관리 필요.”

그 문장들이 서로 맞물려 창살이 되었다.

바닥에는 종이가 깔려 있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울음.
아직 잡지 않은 손.
아직 하지 않은 거짓말.
아직 쓰지 않은 보고서.
아직 죽이지 않은 사람.
아직 용서하지 않은 죄.

그리고 그 모든 기록 위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알토.

그 이름은 잉크로 적혀 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종이의 섬유 속에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알토는 그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푸리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첫 번째 꿈.”

그녀가 말했다.

“기록된 아이.”

조명이 낮아졌다.

탑 안의 서가들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책장 하나가 열리고, 그 안에서 푸른 흑색의 기록광이 흘러나왔다.

객석 한쪽에 앉아 있던 아카식이 턱을 괴고 웃었다.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가벼운 웃음은 아니었다.

기록의 성좌는 자기 대리자가 무대 위 탑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흥미와 애정, 그리고 아주 오래된 기록 장치가 인간에게 배워버린 슬픔이 함께 있었다.

아카식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탑 위에 하나의 거대한 책이 펼쳐졌다.

그 책에는 표지가 없었다.

제목도 없었다.

다만 허공에 떠 있었다.

관객들은 그 책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아카식과 알토는 알았다.

허공록.

기록된 것과 기록될 수 있는 것, 기록되었으나 아직 해석되지 않은 것, 이름은 있으나 결론은 없는 것들이 머무는 책.

허공록의 페이지가 천천히 넘어갔다.

한 장.

또 한 장.

그 페이지마다 알토가 있었다.

교단장 알토.
계약 집행자 알토.
보고서를 덮지 않는 알토.
울고 있는 사람 앞에서도 책임을 말하는 알토.
계약 위반자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알토.
그러나 기록을 사람을 묶는 사슬로 만들지 않으려는 알토.

그리고, 아직 선택하지 않은 알토.

그때 별빛이 움직였다.

책장 사이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다.

긴 망토.
별을 수놓은 왕관.
손에는 점성술사의 지팡이.

그의 얼굴은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어느 각도에서는 늙은 왕처럼 보였다.
어느 각도에서는 학자처럼 보였다.
어느 각도에서는 재판관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각도에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미래를 미리 읽고 도장을 찍는 관료처럼 보였다.

그는 바실리오였다.

그러나 오늘 이 무대에서의 바실리오는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미리 정해진 것”의 얼굴이었다.

별.
기록.
혈통.
예언.
천명.
장부.
계약.
판결문.

그 모든 것이 한 벌의 왕관을 쓰고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아이야.”

알토는 고개를 들었다.

“너는 기록되었다.”

극장 안이 조용해졌다.

바실리오는 지팡이 끝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허공록의 페이지들이 알토의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첫 번째 페이지에는 전쟁이 있었다.
불타는 성벽과 무너지는 문, 도망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 선 알토의 그림자가 있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계약이 있었다.
누군가가 피 묻은 손으로 이름을 적고 있었다.
알토의 그림자는 그 옆에서 봉인된 문서를 들고 있었다.

세 번째 페이지에는 배신이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고, 누군가가 죽었다.
그 장면에도 알토의 이름이 있었다.

네 번째 페이지에는 처형대가 있었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바실리오는 말했다.

“별이 말했다.
기록이 말했다.
너는 언젠가 많은 것을 잃게 할 것이다.”

알토는 담담하게 물었다.

“근거는?”

“기록이다.”

“기록의 출처는?”

“별이다.”

“별의 해석자는?”

바실리오가 멈추었다.

그 순간, 무대 가장자리에서 레이튼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는 성급하게 끼어들지 않았다.
책사처럼 결론을 대신 내려주지도 않았다.
다만 한 손으로 모자를 살짝 눌러 예를 표하고, 탑 안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 별들은 어느새 하나의 별자리로 묶여 있었다.

별과 별 사이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은 다음과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배신자.

레이튼은 그 별자리를 보고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흥미롭군요.”

바실리오가 그를 보았다.

“너는 누구냐?”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레이튼은 손끝으로 별 하나를 가리켰다.

“다만 한 가지가 신경 쓰이는군요.”

“무엇이냐?”

“저 별들은 정말로 처음부터 배신자라는 별자리였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무대 위의 별들이 떨렸다.

레이튼의 발밑에 낡은 서재의 바닥이 덧씌워졌다.
탑 안의 책장 사이로 또 다른 서가들이 나타났다.

끝없이 이어지는 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책들.
결론 직전에서 멈춘 재판 기록.
마지막 장이 비어 있는 전쟁 보고서.
이름 붙지 않은 별들이 천장에 가득한 서재.

레이튼의 여관.

[여관:문답의 서재].

그 서재의 일부가 탑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레이튼이 낮게 말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순간, 별자리의 붉은 선들이 끊어졌다.

배신자라는 이름은 흩어졌다.

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다시 별이 되었다.

아직 의미가 고정되지 않은 빛으로.

레이튼은 바실리오를 향해 물었다.

“저것은 배신자의 별입니까?
아니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아이의 별입니까?”

바실리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질문으로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질문만으로 운명을 피할 수는 없지요.”

그는 알토를 보았다.

“하지만 질문하지 않은 이름은, 운명보다 더 쉽게 사람을 가둡니다.”

그 말에 탑의 창살이 흔들렸다.

문장들이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바실리오는 지팡이를 내리쳤다.

“너희는 자신들이 무엇을 막는지 모른다.”

책장들이 다시 펼쳐졌다.

허공록의 페이지 위로 다른 문장들이 떠올랐다.

“기록된 위험.”
“계약 위반 예정.”
“처벌 가능성.”
“미래 손실.”
“관리 대상.”

그 문장들이 알토의 발목에 감겼다.

책등이 벽이 되고, 문장들이 쇠사슬이 되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알토.
기록의 대리자.
허공록의 소유자.
계약의 집행자.
감정 없는 교단장.
선택보다 책임을 먼저 말하는 자.
언젠가 누군가의 결말을 닫을 자.”

단어들이 알토를 감았다.

하나의 이름이 사람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점점 작아진다.

알토는 발목을 감은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멈췄다.

아카식의 웃음도 멎었다.

그 순간, 탑 안의 어둠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레이였다.

그녀는 원래 이 막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하지만 탑 안의 기록이 사람을 묶는 순간, 그녀는 걸어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장부가 들려 있었다.

무대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레이가 장부를 펼치자, 탑의 바닥 아래에서 작은 등불들이 하나둘 켜졌다.

등불마다 문패가 있었다.

어떤 문패에는 이름이 있었다.
어떤 문패에는 이름 대신 “미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떤 문패에는 아직 적히지 않은 빈칸만 있었다.

그리고 그 문패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나타났다.

비가 그친 뒤의 돌길.
낡은 처마.
문마다 걸린 작은 등불.
아직 잠들지 못한 기억들이 조용히 앉아 있는 거리.

그레이의 여관.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그곳은 망자를 붙잡는 묘지가 아니었다.
이름과 기억이 해야 할 일을 마칠 때까지 잠시 등불 아래 머무는 거리였다.

그레이는 바실리오를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뜨지는 못했다.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장부를 닫지는 않았다.

“저 문장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바실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것들은 예언이다.”

“아닙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분류입니다.”

그녀는 알토의 발목에 감긴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분류는 사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바실리오의 지팡이가 바닥을 쳤다.

“이 아이는 위험하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하지 않은 일을 장부에 사망 원인처럼 적을 수는 없습니다.”

알토가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오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녀는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조금 밝아졌다.

그 등불은 죽은 자의 원한을 무기로 만들지 않았다.
그 등불은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 타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이름을 지우지 않기 위해 켜져 있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기록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사건이 있고, 이름이 있고, 원인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먼저 책임으로 적으면, 장부는 기록이 아니라 처벌이 됩니다.”

객석 어딘가에서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조용히 눈을 떴다.

장부가 처벌이 된다.

그 문장은 그녀에게도 가닿았다.

바실리오는 웃었다.

“그렇다면 기다리라는 것이냐?
아이가 폭군이 될 때까지?
왕국이 불탈 때까지?
그제야 기록하고, 그제야 이름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냐?”

그레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가벼운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왕국이 불탈 수 있다.
정말로 예언이 맞을 수 있다.
정말로 한 사람의 자유가 수천 명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레이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본 죽음은 철학의 예시가 아니었다.
장부 아래 묻힌 울음이었다.

그때 알토가 말했다.

“그래서 절차가 필요합니다.”

바실리오가 알토를 보았다.

알토는 발목을 감은 문장을 손으로 잡았다.

글자는 차가웠다.

하지만 완전한 계약은 아니었다.

아직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토가 말했다.

“기록은 사람을 풀어주기 위해 있는 것도, 묶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록은 남기기 위해 있습니다.”

그의 손끝에서 허공록의 페이지가 펼쳐졌다.

페이지 위에 봉인문이 떠올랐다.

기록 계약.

하지만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알토는 그 봉인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은 기록된 약속입니다.
기록된 약속은 세계가 기억합니다.
그러니 계약은 정확해야 하고, 당사자가 있어야 하며,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직 선택하지 않은 죄는 계약이 아닙니다.”

알토가 손에 힘을 주었다.

발목을 감은 문장 하나가 찢어졌다.

“그것은 예단입니다.”

두 번째 문장이 찢어졌다.

“예단은 기록이 아닙니다.”

세 번째 문장이 찢어졌다.

“그리고 기록을 가장한 예단은, 계약보다 위험합니다.”

허공록의 페이지가 크게 흔들렸다.

바실리오가 낮게 말했다.

“기록은 세계가 기억하는 것이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수많은 미래가 적혀 있었다.

폭군이 된 알토.
계약을 집행하다 사람을 잃은 알토.
무표정하게 처벌을 명한 알토.
아카식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은 알토.
계약 위반자를 벌하면서도 밤새 잠들지 못한 알토.

하지만 종이의 끝에는 아주 작은 여백이 있었다.

아직 적히지 않은 공간.

알토는 그 여백을 보았다.

그다음, 아주 조용히 웃었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희미한 웃음이었다.

“여백이 있군요.”

바실리오의 표정이 굳었다.

“여백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알토는 말했다.

“아직입니다.”

그 순간 탑의 창 하나가 열렸다.

무대 옆 회색 창호가 흔들렸다.

하융이었다.

그는 손으로 창틀을 짚고,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하나의 미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장면이 있었다.

한 장면에서는 알토가 정말로 차갑게 계약 위반자를 처벌했다.
한 장면에서는 알토가 망설이다가 더 큰 재앙을 불렀다.
한 장면에서는 알토가 기록을 불태우려는 자에게 칼을 겨누었다.
한 장면에서는 알토가 울고 있는 아이 앞에서 보고서를 덮었다.
한 장면에서는 알토가 계약을 지켰고, 그 결과 누군가가 미워하며 떠났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알토가 계약을 어겼고, 더 많은 사람들이 무너졌다.

하융은 오래 그 창들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있었다.

“어느 길에도 죄가 있소.”

그가 낮게 말했다.

“어느 길에도 후회가 있소.”

그는 알토를 보았다.

“허나 어느 길에도 사람이 있구려. 그러니 아직 끝난 기록은 아니오.”

바실리오가 차갑게 말했다.

“가능성은 혼란일 뿐이다.”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가능성은 변명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오. 다만 아직 걸어가지 않은 길의 그림자일 뿐이오.”

그는 창호에서 손을 뗐다.

“그림자가 있다고 하여, 발을 멈출 수는 없소.
허나 그림자를 못 본 체하고 걷다가는, 같은 돌부리에 또 넘어지겠지.”

하융은 알토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걸어가는 이는, 그대이오.”

알토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바실리오는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렇다면 증명해보아라.”

탑 안의 책들이 일제히 펼쳐졌다.

“꿈속의 왕관을 네게 주겠다.
오늘 밤 너는 기록의 왕이다.
계약 위반자들을 심판하고, 아직 저지르지 않은 죄들을 예방하며, 왕국의 미래를 장부 위에서 정리하여라.”

왕의 목소리가 극장 전체에 울렸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이것이 모두 꿈이었다고 말해주마.”

책장들이 왕좌로 변했다.

알토의 뒤에 검은 의자가 생겼다.

의자의 등받이는 펼쳐진 책 모양이었다.
팔걸이는 봉인된 계약서였고, 발치에는 죄목이 적힌 두루마리들이 쌓여 있었다.

그 의자 위에는 허공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알토가 앉기만 하면, 미완의 기록들이 판결로 굳어질 것 같았다.

무대 위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첫 번째 사람은 굶주린 병사였다.

그는 창고의 식량을 훔쳤다.

두 번째 사람은 도망친 전령이었다.

그는 공포 때문에 명령서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세 번째 사람은 거짓 증언을 한 관리였다.

그는 자기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망자 명단을 바꾸었다.

네 번째 사람은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에 작은 표식이 걸려 있었다.

훗날 배신할 가능성이 높음.

바실리오가 말했다.

“기록의 왕이여. 판결하라.”

객석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숨을 삼켰다.

이것은 알토의 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나라들의 현실이었다.

미하일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슈샤니크는 무표정했다.
벨라 4세는 왕관이 없는 이마를 손끝으로 짚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장갑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각자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은 우화가 아니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자라면 언젠가 마주치는 질문이었다.

알토는 왕좌 앞에 섰다.

앉지 않았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왜 앉지 않느냐?”

알토는 대답했다.

“아직 왕이 아닙니다.”

“꿈속에서는 왕이다.”

“그래서 더더욱 앉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첫 번째 병사를 보았다.

“창고의 식량을 훔쳤습니까?”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이유는?”

“동생이 굶고 있었습니다.”

알토는 그레이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넘겼다.

그녀의 손끝에서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문패 하나가 켜졌다.

그 문패에는 병사의 동생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살아 있는 이름이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해당 구역의 배급 기록이 비어 있습니다. 관리 책임자가 사망했고, 후임 배정이 지연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잉여 식량이 있었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도는 기록합니다.
처벌은 보류합니다.
배급 체계 오류를 우선 조사합니다.”

바실리오의 눈이 차가워졌다.

“법이 무뎌지는구나.”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록의 페이지에 새 문장을 적었다.

절도. 원인: 배급망 공백. 책임: 개인 및 행정 체계 공동 확인 필요.

그 문장이 적히자, 병사의 발목을 감고 있던 죄목의 사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짧아졌다.

그는 이제 죄목만으로 된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전령이 앞으로 나왔다.

“명령서를 불태웠습니까?”

전령은 고개를 숙였다.

“예.”

“이유는?”

“제가 가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명령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레이가 답했다.

“후퇴 명령이었습니다. 도착하지 못해 세 개 부대가 고립되었습니다.”

객석이 술렁였다.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전령은 울고 있었다.

알토가 말했다.

“도주와 명령서 훼손은 기록합니다.
그로 인한 피해도 기록합니다.
다만 공포를 거짓으로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전령이 고개를 들었다.

알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잔인하지는 않았다.

“처벌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처벌은 당신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세 부대의 퇴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차이를 지우지 않겠습니다.”

허공록의 페이지에 두 번째 문장이 적혔다.

명령서 훼손. 원인: 공포. 결과: 세 부대 고립. 처벌 필요. 공포를 악의로 위조하지 말 것.

죠니가 객석 쪽에서 낮게 말했다.

“저건 좀 알토답네.”

푸리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관리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미 포기한 얼굴이었다.

알토가 물었다.

“사망자 명단을 바꿨습니까?”

“예.”

“이유는?”

“제 아들의 이름을 빼고 싶었습니다.”

그레이의 손이 멈추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흔들렸다.

이 장면은 그녀에게 너무 가까웠다.

사망자 명단.
빠진 이름.
없어진 사람.

알토는 관리의 얼굴을 보았다.

“당신의 아들은 죽었습니까?”

관리의 입술이 떨렸다.

“예.”

“그런데 이름을 지웠습니까?”

“그 아이가…… 죽은 사람으로 남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레이가 눈을 내리깔았다.

극장 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무대 아래의 그림자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이름을 지우면, 울음도 길을 잃는단다.”

그 말은 무대 위까지 닿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거리의 문패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레이는 빈 문패 앞에 펜을 들었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관리가 입술을 떨며 아이의 이름을 말했다.

그레이는 그 이름을 적었다.

또박또박.

틀리지 않게.

문패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 안쪽에서, 비어 있던 집 하나의 창문에 불이 들어왔다.

알토가 말했다.

“사망자 명단 조작은 중죄입니다.”

관리의 어깨가 떨렸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부정하고 싶었다는 것도 기록합니다.”

알토는 그레이를 보았다.

“이름을 복구하십시오.”

그레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족 지원 목록에 올리십시오.”

관리의 눈이 흔들렸다.

“저는…… 처벌받지 않는 겁니까?”

알토는 담담하게 말했다.

“처벌받습니다.”

관리의 얼굴이 무너졌다.

“하지만 당신의 아들은 처벌받지 않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돌아옵니다.”

그 순간, 탑의 벽 하나가 조금 물러났다.

책장의 압박이 약해졌다.

바실리오는 침묵했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앞으로 나왔다.

작은 아이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 가장 작았다.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죄목도 없었다.
상처도 없었다.

다만 목에 작은 표식이 걸려 있었다.

훗날 배신할 가능성이 높음.

알토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이 아이가 가장 중요하다.
기록은 말한다.
이 아이는 훗날 문을 열어 적을 들일 것이다.
수백 명이 죽을 것이다.
지금 막으면 모두를 구할 수 있다.”

객석은 숨을 멈췄다.

이것은 원작의 세히스문도였다.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아이.
그러나 별이, 기록이, 두려움이, 국가가 이미 위험하다고 판정한 아이.

바실리오가 낮게 말했다.

“판결하라.”

알토는 아이 앞에 섰다.

아이는 알토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뭘 했나요?”

알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다시 물었다.

“제가 뭘 할 건가요?”

바실리오가 말했다.

“배신이다.”

아이는 왕을 보았다.

“그럼 저는 나쁜 사람인가요?”

침묵.

길고, 깊은 침묵.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주먹을 쥐었다.

하융은 창호 너머에서 너무 많은 가능성을 보았다.

아이의 손이 문고리를 잡는 장면.
아이가 문을 열지 않고 도망치는 장면.
아이가 문 앞에서 죽는 장면.
아이가 자라서 병사가 되는 장면.
아이가 자라지 못하고 사라지는 장면.
아이가 배신자가 되는 장면.
아이가 배신자가 되지 않았는데도 평생 의심받는 장면.

하융은 눈을 감고 말했다.

“아직 아니오.”

그 말은 알토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대 전체에 향한 말이었다.

“아직, 아니오.”

레이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여관:문답의 서재]의 천장에 있던 별들이 다시 흔들렸다.

아이의 목에 걸린 문장, 훗날 배신할 가능성이 높음 위로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레이튼이 그 선을 보았다.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바실리오가 날카롭게 물었다.

“무엇으로?”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이 아이가 배신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는 별 하나를 가리켰다.

“무엇이 이 아이로 하여금 문을 열게 만들 것인가.”

또 다른 별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 문 앞에 무엇을 놓아둘 것인가.”

세 번째 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문 안쪽에 남아 있을 것인가.”

그 순간, 아이의 목에 걸린 표식이 흔들렸다.

배신자라는 이름이 지워졌다.

대신, 빈칸이 남았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처럼.

바실리오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알토는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것은 왕이 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교단장이 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판결자가 하는 자세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이 작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는 자세였다.

알토가 말했다.

“아직 당신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물었다.

“그럼 저는 안 나쁜 사람인가요?”

알토는 잠시 생각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무서워요.”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하겠습니다.”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무서운 걸요?”

“예.”

알토는 말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에 누가 당신을 가두려 했는지도 기록하겠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밥을 주었는지도 기록하겠습니다.
누가 당신의 손을 잡았는지도 기록하겠습니다.
당신이 훗날 문 앞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함께 기록될 겁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기록은 당신을 대신 선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선택할 때, 무엇이 곁에 있었는지는 남깁니다.”

아이의 손이 떨렸다.

알토는 자기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판결하지 않습니다.”

바실리오가 격노했다.

“그 선택으로 수백이 죽을 수 있다!”

알토는 일어섰다.

“그렇다면 수백을 살릴 방법을 기록해야 합니다.
아이를 죄수로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바실리오의 지팡이가 번쩍였다.

책장들이 다시 몰려왔다.

“어리석구나.
너는 결국 기록의 왕이 되지 못한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왕좌를 보았다.

검은 책의 왕좌.
계약서의 팔걸이.
죄목의 발치.

그리고 그 위에 앉지 않았다.

“저는 왕이 아닙니다.”

알토는 허공록의 페이지를 펼쳤다.

자기 이름이 적힌 페이지였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확정 문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전부 찢지 않았다.

이름은 남겼다.

기록은 남겼다.

그러나 확정 문장들을 지웠다.

“저는 기록자입니다.”

그 순간 탑의 책장들이 열렸다.

서가가 감옥이 아니라 길이 되었다.
문장들이 쇠사슬이 아니라 페이지가 되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죄목들은 잉크를 잃고 여백으로 돌아갔다.

허공록의 페이지 위에 새로운 문장이 적혔다.

미완. 감시 필요. 보호 필요. 선택 미발생.

그리고 그 아래, 알토가 직접 한 줄을 더했다.

아직.

바실리오는 물러섰다.

그 얼굴은 더 이상 늙은 왕처럼만 보이지 않았다.

잠시, 그것은 별을 잘못 읽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또 잠시, 두려움 때문에 아이를 가둔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또 잠시, 국가를 지키기 위해 사람 하나를 숫자로 만든 통치자의 얼굴이었다.

그가 낮게 말했다.

“그럼 꿈에서 깨어난 뒤, 너는 이 판결을 기억할 수 있겠느냐?”

알토는 대답했다.

“기록하겠습니다.”

“꿈이었는데도?”

알토는 객석의 아카식을 향해 잠시 시선을 돌렸다.

아카식은 웃고 있었다.

알토가 말했다.

“꿈속에서 울었다면, 그 눈물도 기록입니다.”

아카식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아주 만족스럽게.

“좋은 답이네.”

하지만 알토는 아카식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아직 무대 위에 있었다.

알토가 말했다.

“이름은?”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은 객석까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레이의 장부에는 적혔다.

또박또박.

틀리지 않게.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빈 문패 하나가 켜졌다.

그것은 망자의 등불이 아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아이의 등불이었다.

그레이는 아주 작게 말했다.

“살아 있는 이름입니다.”

그 순간 첫 번째 꿈의 조명이 천천히 낮아졌다.

푸리나가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잠시 알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관객을 향해 말했다.

“첫 번째 꿈은 기록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그러나 꺼지지도 않았다.

“기록은 운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책임을 피하는 변명도 아니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가면은 아직 비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 흰 표면에 아주 작은 글자가 하나 생겨 있었다.

아직.

푸리나는 그 글자를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좋아.”

그녀는 낮게 말했다.

“아직이라면, 다음 막으로 갈 수 있지.”

막이 내려오지 않았다.

대신 탑의 창 하나가 닫히고, 다른 창 하나가 열렸다.

하융은 그 창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한 아이가 문 앞에 섰소.”

창 너머에서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아이는 언젠가 문 앞에 설 것이다.

그 문밖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문안에 자신을 의심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기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문을 여는 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
허나 오늘, 그 손에 이름 하나가 쥐어졌구려.”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들었다.

“그리고 질문 하나도요.”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이름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알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식은 객석에서 손뼉을 한 번 쳤다.

짝.

그것은 박수라기보다 도장 소리 같았다.

기록되었다는 소리.

푸리나는 가면을 탑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 가면에는 한 단어가 있었다.

아직.

그리고 두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무대 뒤쪽에서 자주빛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너무 오래 당겨진 활의 소리.

카를로타의 낮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저 장력은 좋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객석을 향해 돌아보았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낮아졌다.

“천명을 믿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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