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6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11:49:52
제2막 개정본
천명을 믿은 황제
무대 뒤편에서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그 소리는 너무 길었다.
관객석의 누구도 처음에는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악기의 음이 아니었다.
새가 우는 소리도 아니었다.
바람이 탑의 틈을 긁는 소리도 아니었다.
활이었다.
너무 오래 당겨진 활.
놓지 않으면 손가락을 찢고, 놓으면 누군가를 꿰뚫을 활.
검은 탑의 벽이 천천히 열렸다.
제1막에서 책장으로 변했던 탑은, 이번에는 무너진 황궁으로 변했다.
대리석 기둥이 솟아났다.
그러나 절반은 금이 가 있었다.
모자이크 바닥에는 로마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으나, 그 위로 불탄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높은 천장은 없었다.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자주빛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수십, 수백의 자주빛 유성들이 하늘에 멈춰 있었다.
낙하하기 직전의 별.
여명을 찢기 직전의 혜성.
명령만 있으면 세계 위로 떨어질 칙령들.
무대 중앙에는 왕좌가 없었다.
대신 활을 걸어두는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 위에 놓인 활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타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았다.
단정한 궁정복을 입었으나, 손은 장인의 손이었다.
손가락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그녀는 제단 위의 활을 보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
“저 장력은 좋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무대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아무도 활을 잡지 않았는데?”
카를로타는 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활은 잡기 전부터 말합니다.”
그녀는 손끝으로 시위 근처의 공기를 살폈다.
“결이 너무 팽팽합니다.
장력이 오래 걸려 있습니다.
이 활은 황제의 칙령을 실을 수는 있어도, 황제의 침묵까지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 말이 단순한 도구 진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자주빛 별 하나가 낮게 흔들렸다.
그리고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왕관보다 먼저 보인 것은 활이었다.
등 뒤에 멘 활.
옷자락 아래 감춰지지 않는 전장의 상처.
손끝에 밴 굳은살.
걸음마다 흔들리는 자주빛 칙령의 그림자.
그녀는 배우처럼 보이지 않았다.
황제처럼 보였다.
아니, 황제라는 배역에서 한 번도 내려와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가면에는 제1막에서 새겨진 단어가 있었다.
아직.
푸리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두 번째 꿈.”
자주빛 하늘이 미하일라 위로 내려왔다.
“천명을 믿은 황제.”
그 순간, 미하일라의 등 뒤에서 자주빛 혜성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혈통의 빛이었다.
팔레올로기나의 장녀.
천 년 궁무의 정통.
비잔티움의 운명.
자주빛 산실의 이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혜성으로 그녀의 등에 맺혔다.
《자휘혜성》.
미하일라가 활 앞에 섰다.
활은 아직 그녀의 손에 있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를 알고 있는 듯 울었다.
끼이이익.
카를로타가 낮게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활을 들었다.
그 순간, 무대 위의 유성들이 모두 하나의 궤도로 정렬되었다.
자주빛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형식.
새벽을 가르기 위해 별을 쏘아 내리는 궁술.
팔레올로기스 가문의 천년 궁무.
《성추여명식星墜黎明式》.
그것은 단순한 활쏘기가 아니었다.
황제가 화살을 잡는 행위는 이미 정치였다.
시위를 당기는 행위는 이미 칙령이었다.
표적을 정하는 행위는 전쟁의 원인을 선고하는 일이었다.
그때, 무너진 황궁의 그림자 속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늙은 왕만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망령처럼 보였다.
무너진 성벽의 먼지를 두르고, 별점판과 칙령문을 함께 든 자.
두려움과 책임, 예언과 행정, 천명과 공포가 한 사람의 얼굴을 쓰고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활을 든 채 대답했다.
“말하라.”
“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동쪽에서 말발굽이 옵니다.
서쪽에서는 의심이 옵니다.
남쪽에서는 무너진 질서가 썩어갑니다.
제국은 하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탈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잡았다.
그 손놀림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무서웠다.
활과 몸, 정치와 무공, 명령과 살상이 하나의 결로 이어졌다.
무와 정이 갈라지지 않는 경지.
황제의 무공은 정치이고, 황제의 정치는 전장의 명령이 된다.
《천명天命》.
미하일라가 말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녀는 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필요하다면 내가 쏜다.
필요하다면 내가 죽인다.
필요하다면 내가 피를 짊어진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한 아이도?”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슨 뜻이지.”
무대 중앙에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직 얼굴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등 뒤에는 펼쳐지지 않은 깃발이 있었다.
하지만 그 깃발이 펼쳐지는 순간, 도시 하나가 불탈 것처럼 보였다.
바실리오는 말했다.
“한 아이가 훗날 반란의 깃발이 된다면?”
두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갑옷을 입은 장군.
그는 아직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능성 속에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한 장군이 훗날 배신한다면?”
세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도문을 쥔 사제.
“한 사제가 훗날 백성을 선동한다면?”
네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주빛 혈통의 윤곽을 가진 황족.
“한 황족이 훗날 제국을 둘로 찢는다면?”
바실리오는 미하일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재판은 늦습니다.
교육은 늦습니다.
외교는 늦습니다.
화살은 빠릅니다.”
그는 제단 위의 활을 가리켰다.
“전쟁을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의 원인을 먼저 꿰뚫는 것입니다.”
미하일라의 활 위에 자주빛 문장이 떠올랐다.
평화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끝내는 활.
전쟁의 원인 그 자체를 꿰뚫고, 부정을 인세에서 추방하는 황제의 전시궁.
《구평전시궁求平戰矢弓》.
활의 조준선이 네 그림자 위로 그어졌다.
아이.
장군.
사제.
황족.
그들은 아직 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이미 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객석이 숨을 멈췄다.
그때 카를로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폐하.”
미하일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카를로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은 물러섬이 아니었다.
“《성추여명식》을 실을 활은 제가 관리합니다.
폐하께서 천명을 말씀하시는 동안, 저는 시위의 장력과 활대의 휨을 봅니다.”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았다.
“장인이 황제의 천명에 끼어드는가?”
카를로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천명은 제가 모릅니다.”
그녀는 활을 보았다.
“하지만 저 시위가 이 장력을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압니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카를로타.”
“예, 폐하.”
“지금 문제는 활의 상태가 아니다.”
“항상 활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카를로타는 단호했다.
“황제의 활은 상징이지만, 동시에 물건입니다.
물건이 부러지면 상징도 무너집니다.
폐하의 손목이 찢어지면, 칙령도 흔들립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스스로를 활처럼 쓰신다면, 폐하도 부러집니다.”
무대의 공기가 흔들렸다.
그 말은 무례했다.
그러나 충성이었다.
루나리아 아누아가 달빛을 밟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자주빛 하늘 아래 희미한 은월이 떴다.
달빛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그림자 가장자리에서 식지 않는 열을 알아볼 만큼은 충분했다.
루나리아는 미하일라의 손을 보았다.
시위에 닿은 손가락.
굳은 손목.
숨을 지나치게 얕게 들이쉬는 가슴.
“폐하.”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말하라.”
“호흡이 짧습니다.”
“전투 중이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작되었다.”
루나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반박하지 않았다.
미하일라의 세계에서 전투는 정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군대가 움직이기 전부터.
화살이 날기 전부터.
칙령이 쓰이기 전부터.
황제는 언제나 전쟁의 첫날에 살고 있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한 번도 잠들지 못하셨겠군요.”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활시위가 울었다.
팅.
카를로타가 즉시 말했다.
“폐하.”
루나리아의 달빛이 미하일라의 손목에 닿았다.
치유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달빛은 먼저 물었다.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얼마나 오래 아프지 않은 척했는지.
얼마나 오래 황제라는 이름으로 몸을 전장처럼 썼는지.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쏘십시오.
망설임은 전쟁을 길게 만들 뿐입니다.”
네 그림자의 등 뒤에서 참상이 선명해졌다.
도시가 불탔다.
성벽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죽었다.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능한 미래였다.
하융은 무대 옆의 회색 창호 너머로 그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이는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창호빛 속에서 낮게 말했다.
“저 화살을 쏘지 않아 불타는 성이 있소.
저 화살을 쏘아 꺼지는 생도 있소.
어느 창도 가볍지 않구려.”
죠니가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인데?”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내가 정할 수는 없소.”
그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창을 보는 자가 활을 쏘는 것은 아니오.
활을 든 이가, 자기 손으로 선택해야 하오.”
레이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낡은 바닥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탑 전체가 서재로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미하일라의 활과 네 그림자 사이, 조준선 위에 떠 있던 별들의 이름이 잠시 흐려졌다.
레이튼의 A랭크 신술.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폐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당긴 채 말했다.
“짧게 하라.”
“폐하께서는 전쟁의 원인을 쏘려 하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저들이 원인입니까, 가능성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바실리오가 불쾌한 얼굴로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별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이 떨어질 자리를 우리가 먼저 파내면, 그것은 예언입니까, 공사입니까?”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네 그림자를 보았다.
“저 아이가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면, 질문은 ‘죽일 것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 아이를 배신하게 만드는가.
저 장군이 성문을 열게 되는 밤에, 성 안에는 어떤 명령이 있었는가.
저 사제가 군중을 움직이기 전, 누가 그들의 기도를 빼앗았는가.
저 황족이 제국을 찢기 전, 제국은 그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가.”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이 질문들을 묻기 전에는, 원인을 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질문은 도시를 구하지 못한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질문만으로는 도시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질문은 도시를 불태울 수 있습니다.”
미하일라의 눈동자에 자주빛 혜성이 비쳤다.
그녀는 전쟁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활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녀는 위험했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쏠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가능성을 미리 죽일 수 있는가.
황제는 어디까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내일을 가져갈 수 있는가.
그때 객석에서 작은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 무대에 오를 차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라스카리스.
어린 황제.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는, 너무 어린 이상.
요안나는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걸음은 미하일라처럼 무겁지 않았다.
활을 든 황제의 걸음도 아니었고, 장부를 든 재상의 걸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걸음 내딛자, 객석 곳곳에서 작은 빛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지지.
아이의 믿음.
병사의 작은 환호.
시장 상인의 고개 끄덕임.
어부와 길거리 아이들이 언젠가 그녀에게 건넸던 신뢰.
티켓처럼 작은 빛들.
요안나의 권능.
[지지 티켓].
그 빛들이 그녀의 발밑에 모이자, 무대 위에 희미한 로마의 문장이 떠올랐다.
왕관과 칼의 로마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활하는 로마.
《부활하는 로마의 문장》.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강했다.
황제의 활을 든 사람은 무서웠다.
그리고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라가 틀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그녀는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요안나는 두 손을 꼭 쥐었다.
“망설이지 않는 황제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지지 티켓들이 그 목소리를 객석 끝까지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한 번도 망설이지 않는 황제가 다스리는 평화 속에서,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있을까요?”
극장 안의 어른들 중 누구도 쉽게 웃지 못했다.
바실리오가 차갑게 말했다.
“아이의 이상이군.”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네. 아이의 이상이에요.”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발밑에 자주빛 빛이 낮게 깔렸다.
높은 보좌의 자주빛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 내려오는 자주빛.
《가장 낮은 곳에 임할 자주빛》.
요안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탑에 가두었으니까, 가끔은 아이가 이상을 말해야 해요.”
미하일라는 조용히 물었다.
“요안나. 너는 내가 망설이다 제국을 잃어도 된다고 말하는가.”
“아니요.”
“그러면?”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말했다.
“Εἰρήνη πᾶσιν.”
그 말은 주문처럼 울리지 않았다.
구호처럼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오래 붙들고 온 아이의 꿈처럼 들렸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이 울리자, 지지 티켓들이 하나씩 더 빛났다.
“저는 폐하께서 망설인 흔적을 제국에 남겨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요안나는 말했다.
“폐하께서 쏘신 화살은 칙령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알게 해야 해요.
황제가 쉽게 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 하나를 가능성만으로 죽이는 일이, 평화의 이름으로도 당연해지지 않게 해야 해요.”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무대 옆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이때까지 조용했다.
하지만 요안나의 말은 그녀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망설임의 기록.
칙령의 절차.
황제의 화살이 장부에 어떻게 남는가.
슈샤니크는 청록빛 장부를 펼쳤다.
그녀의 주변으로 까마귀 깃털 같은 문서 조각들이 떠올랐다.
로마의 시민권 명부.
군량 보고서.
전시 행정령.
피난민 등록부.
소산드라 이후 재편된 권한 목록.
라스카리스와 팔레올로기나의 공동황제 체제를 가까스로 묶어두는 기록들.
닫은 여관의 주인이 장부로 사람을 살리는 방식.
슈샤니크는 낮게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재상.”
“가능성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칙령은, 행정적으로도 위험합니다.”
바실리오가 비웃듯 말했다.
“행정?”
슈샤니크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예. 행정입니다.”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 아래에는 닫힌 여관의 재가 남아 있었다.
“한 번 가능성만으로 처형이 허락되면, 귀족들은 자기 정적을 ‘미래의 반역자’라 부를 것입니다.
군부는 불편한 사제를 ‘훗날 선동가’라 부를 것입니다.
지방관은 세금을 내지 못한 마을을 ‘잠재적 반란지’라 부를 것입니다.”
그녀는 장부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장부는 피로 빨리 채워지겠지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폐하의 화살은 정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화살을 흉내 내는 자들은 정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슈샤니크는 시선을 낮추었다.
“그러므로 쏘시려면, 기준을 남기십시오.
절차를 남기십시오.
망설임을 남기십시오.
폐하의 화살이 칙령이라면, 그 칙령은 폐하가 사라진 뒤에도 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낮아졌다.
“저는 이미 닫힌 여관의 값을 압니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장부에 가두는 일도, 구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팔아넘기는 일도, 아주 쉽게 시작됩니다.”
순간,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려는 자.
닫은 여관을 장부로 대신해온 자.
사람을 사랑했으나, 한때 사람을 숫자로 굴릴 수밖에 없었던 자.
그녀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 조언이 아니었다.
고백에 가까웠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불쾌하게 흔들렸다.
“평화는 그런 느린 장부로 오지 않는다.”
그때 천둥이 쳤다.
쾅.
라플리/라플리아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 끝에 뇌광이 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 진짜.”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왔다.”
라플리는 바실리오를 노려보았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하잖아.”
바실리오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라플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늘 팔아먹는 말장난 싫어하는 마탑주.”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자주빛 하늘 위로 번개 궤적이 그려졌다.
천상현상.
뇌광.
마법학.
귀족적 수사와 신성한 핑계를 찢는 불온한 마녀의 계산.
라플리의 마법진이 별들의 궤도를 해부했다.
“좋아. 별이 떨어질 수는 있어.
궤도도 계산돼.
천문도 틀릴 수 있고, 맞을 수도 있지.”
그녀는 번개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그런데 별이 떨어진다고 해서, 네가 애 머리 위에 돌을 올려놔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바실리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무례하구나.”
“네. 저는 원래 무례합니다.”
라플리는 요안나 쪽을 한 번 보고, 미하일라를 향해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저쪽한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바실리오를 보았다.
“애 하나 가둬놓고 별이 말했다.
쏴 죽이고 나서 천명이다.
장부에 적고 나면 책임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귀족들은 참 편하겠어.”
번개가 별자리 사이를 찢었다.
“천문은 핑계가 아니고, 예언은 면죄부가 아니야.
그걸 구분 못 하는 놈들이 꼭 하늘을 팔아먹더라.”
라플리의 뇌광이 네 그림자의 등 뒤에 있던 가능성들을 비추었다.
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참상 위에 붙은 이름들이 흔들렸다.
필연.
천명.
제거 대상.
그 이름들이 번개에 그을렸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라플리. 그만.”
라플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는 참지 못했다.
“……저런 식으로 폐하의 활을 이용하게 두지 마십시오.”
그 말은 거칠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웠다.
이번에는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가 조용히 무대 위로 나왔다.
그녀의 발밑에는 도로가 생겼다.
돌로 포장된 로마 가도.
편지와 인장과 상인들의 소문과 북방의 별빛이 얽힌 길.
그녀가 손을 들자 세 개의 실이 하늘에 떠올랐다.
하나는 아이가 처형되는 미래.
하나는 아이가 방치되어 배신하는 미래.
하나는 아이가 이름을 불리고도, 여전히 문 앞에서 흔들리는 미래.
아스테리아는 그 세 실을 바라보았다.
보가트리의 후손이 별과 마법의 궤적을 읽는 눈.
미래는 단 하나로 말하지 않았다.
세 갈래로 속삭였다.
아스테리아가 말했다.
“폐하. 세 갈래 모두 위험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쏘면 적 하나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길을 타고 퍼집니다.
‘니케아의 황제는 가능성만으로 아이를 죽인다.’
그 말은 북방 시장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적국의 외교문서에서 아주 쓸 만한 칼이 됩니다.”
그녀는 두 번째 실을 보았다.
“쏘지 않고 방치하면, 정말로 성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실.
“그러나 감시와 교육, 시민권과 길을 주면…… 문 앞에서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문을 열기 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미래가 생깁니다.”
아스테리아는 미소 지었다.
“저라면 세 번째 실에 투자하겠습니다. 외교적으로도 가장 손해가 적습니다.”
라플리가 작게 말했다.
“말을 참 장사꾼처럼 하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때 게오르기아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왕관도 활도 장부도 들지 않았다.
책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은 답이 적힌 교과서가 아니라, 로마를 가르치기 위한 문법서에 가까웠다.
게오르기아는 네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미하일라에게 말했다.
“폐하. 세히스문도가 묻습니다.”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왕인가, 죄수인가.”
잠시 침묵.
“하지만 그 질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게오르기아는 책을 덮었다.
“왕도 죄수도 신분입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신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그녀는 아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저 아이가 훗날 반역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니케아는 그 아이에게 먼저 무엇을 가르칠 것입니까.”
장군.
“저 장군이 훗날 성문을 열 가능성이 있다면, 니케아는 그 장군에게 어떤 충성을 요구할 것입니까.”
사제.
“저 사제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니케아는 그 군중에게 어떤 로마를 약속할 것입니까.”
황족.
“저 황족이 제국을 찢을 수 있다면, 니케아는 황족이라는 이름과 시민이라는 이름 중 무엇을 더 크게 가르칠 것입니까.”
게오르기아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교육은 화살보다 느립니다.
그러나 화살이 끝낸 전쟁 뒤에 남을 사람을 만드는 일은, 교육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자주빛 혜성이 그녀의 눈꺼풀 위에 흔들렸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활의 장인을 가진 황제.
달빛의 사제를 가진 황제.
평화의 공동황제를 가진 황제.
장부를 든 재상을 가진 황제.
천둥 같은 마탑주를 가진 황제.
길과 소문을 읽는 외교관을 가진 황제.
로마를 가르치는 스승을 가진 황제.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더 이상 바실리오의 속삭임에만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미하일라가 눈을 떴다.
활시위는 여전히 팽팽했다.
**《구평전시궁》**의 조준선은 여전히 네 그림자를 겨누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활을 내렸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굳었다.
“폐하?”
미하일라가 말했다.
“나는 쏘지 않는다.”
무대 위 네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이.
장군.
사제.
황족.
그들의 등 뒤에 있던 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았다.
미하일라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두지 않는다.
장군을 처형하지 않는다.
사제를 입막음하지 않는다.
황족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그러면 제국이 불타면?”
미하일라는 활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그녀는 활을 수직으로 세웠다.
마치 칙령을 세우듯.
“감시한다.
교육한다.
토론하게 한다.
시민권을 준다.
장부에 남긴다.
길을 열어둔다.”
요안나의 지지 티켓들이 작게 빛났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페이지를 넘겼다.
아스테리아의 세 번째 실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게오르기아의 책장이 스스로 열렸다.
미하일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문을 열어 적을 들인다면.”
자주빛 혜성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 쏜다.”
무대 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미하일라는 계속 말했다.
“나는 황제다.
전쟁의 가능성을 못 본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성만으로 인간을 끝내지도 않는다.”
그녀는 바실리오를 보았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들겠다.
하지만 평화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을 미리 죽이지는 않겠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약함이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이것은 내가 활을 부러뜨리지 않기 위한 절제다.”
카를로타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루나리아의 달빛이 미하일라의 손목을 감쌌다.
이번에는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드는 빛이 아니었다.
황제가 자기 몸을 제국의 부품처럼 쓰지 않도록, 아픔의 위치를 다시 알려주는 빛이었다.
미하일라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항복이었다.
루나리아는 그 손을 받았다.
요안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폐하.”
“말하라.”
“그 아이들이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나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슈샤니크가 고개를 들었다.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스테리아는 세 번째 실을 바라보았다.
미하일라는 답했다.
“그들이 로마를 찢지 않는다면.”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말했다.
“그들이 로마를 찢지 않게 하려면, 먼저 로마가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해요.”
그 말과 함께 요안나의 발밑에 있던 빛들이 원형으로 퍼졌다.
시민의 권고.
원로원의 이름.
군중의 지지.
아직 어린 황제가 만들어내는 대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권고》.
네 그림자의 발밑에 작은 문장이 새겨졌다.
civis Romanus futurus.
미래의 로마 시민.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행정적으로는, 매우 번거로운 문장입니다.”
요안나가 살짝 웃었다.
“그래도 가능하죠?”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제 일입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니케아였다.
활과 평화.
장부와 길.
교실과 달빛.
천둥과 조궁.
아이의 이상과 황제의 전쟁.
서로 다르고,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서로를 멈춰 세우면서도, 겨우 한 제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
미하일라는 네 그림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아직 죄인이 아니다.”
아이의 그림자가 희미해졌다.
“그러나 책임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장군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너희를 지켜볼 것이다.”
사제의 손에서 기도문이 흔들렸다.
“그리고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 것이다.”
황족의 그림자는 오래 남아 있었다.
미하일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선택으로 제국을 찢는다면, 그때는 내 화살이 간다.”
황족의 그림자가 천천히 사라졌다.
바실리오의 그림자는 거의 흩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폐하께서는 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깨어난 뒤에는, 다시 선택한다.”
그것은 완전한 승리 선언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내일, 그녀는 쏘아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녀는 정말로 전쟁의 원인을 꿰뚫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의 손은 피로 물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
오늘 그녀는 가능성만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활을 보았다.
그리고 그 활을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떨리지 않기 위해 너무 오래 단련된 손이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두 번째 꿈은, 아직 쏘지 않은 화살이었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이 빛났다.
첫 번째 글자 아래에 두 번째 글자가 새겨졌다.
아직.
망설임.
푸리나는 그 글자를 보았다.
“망설임은 약함이 아닐 수도 있어.”
그녀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어쩌면, 인간을 아직 인간으로 남겨두는 마지막 시위일지도 모르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말은 예쁜데, 이번엔 맞는 것 같네.”
푸리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고마워?”
“칭찬은 아니었어.”
“그럼 뭐였는데?”
“기록.”
아카식이 객석에서 웃었다.
알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에 두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천명을 믿은 황제.
그리고 그 아래.
오늘은 쏘지 않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불타는 도시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다른 창이 생겼다.
그 창에서는 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밖에는 적이 있었다.
문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누군가는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로마 시민이라 부르려 애쓰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문 앞에 이름 하나가 놓였구려.”
푸리나가 물었다.
“좋은 가능성이야?”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좋다 말하기는 이르오.
허나 사람이 문을 열기 전,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다면…… 비껴설 길은 생기오.”
그 말에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라는 활을 내려놓았다.
카를로타가 다가와 활의 시위를 살폈다.
“무리는 갔습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수리할 수 있나.”
“활은 가능합니다.”
카를로타는 잠시 멈추었다.
“폐하의 손목은 루나리아 님께 맡기십시오.”
루나리아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내밀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닫았다.
아스테리아는 세 개의 실 중 세 번째 실에 작은 매듭을 지었다.
게오르기아는 책의 빈 페이지에 첫 문장을 적었다.
라플리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바실리오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하늘 팔면 진짜 벼락 맞힐 겁니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말했다.
“라플리.”
“예, 폐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자주빛 하늘이 천천히 걷혔다.
대신 무대 뒤쪽에서 숲의 냄새가 밀려왔다.
축축한 흙.
부러진 나뭇가지.
늪의 물기.
달빛.
그리고 피.
탑의 벽은 나무껍질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에서 늑대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사람들의 낮은 함성이었다.
침략받은 자들의 숨소리.
복수를 맹세한 숲의 속삭임.
아스테르다스가 객석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무대 위 숲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 위에는 이제 두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그리고 세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선언했다.
“세 번째 꿈.”
달빛이 숲을 비추었다.
“복수의 왕.”
천명을 믿은 황제
무대 뒤편에서 활시위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그 소리는 너무 길었다.
관객석의 누구도 처음에는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악기의 음이 아니었다.
새가 우는 소리도 아니었다.
바람이 탑의 틈을 긁는 소리도 아니었다.
활이었다.
너무 오래 당겨진 활.
놓지 않으면 손가락을 찢고, 놓으면 누군가를 꿰뚫을 활.
검은 탑의 벽이 천천히 열렸다.
제1막에서 책장으로 변했던 탑은, 이번에는 무너진 황궁으로 변했다.
대리석 기둥이 솟아났다.
그러나 절반은 금이 가 있었다.
모자이크 바닥에는 로마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으나, 그 위로 불탄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높은 천장은 없었다.
천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자주빛 하늘이 있었다.
그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수십, 수백의 자주빛 유성들이 하늘에 멈춰 있었다.
낙하하기 직전의 별.
여명을 찢기 직전의 혜성.
명령만 있으면 세계 위로 떨어질 칙령들.
무대 중앙에는 왕좌가 없었다.
대신 활을 걸어두는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 위에 놓인 활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카를로타가 가장 먼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화려하지 않았다.
단정한 궁정복을 입었으나, 손은 장인의 손이었다.
손가락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고,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그녀는 제단 위의 활을 보자마자 눈썹을 찌푸렸다.
“저 장력은 좋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무대 가장자리에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아무도 활을 잡지 않았는데?”
카를로타는 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활은 잡기 전부터 말합니다.”
그녀는 손끝으로 시위 근처의 공기를 살폈다.
“결이 너무 팽팽합니다.
장력이 오래 걸려 있습니다.
이 활은 황제의 칙령을 실을 수는 있어도, 황제의 침묵까지 오래 버티지는 못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 말이 단순한 도구 진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자주빛 별 하나가 낮게 흔들렸다.
그리고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왕관보다 먼저 보인 것은 활이었다.
등 뒤에 멘 활.
옷자락 아래 감춰지지 않는 전장의 상처.
손끝에 밴 굳은살.
걸음마다 흔들리는 자주빛 칙령의 그림자.
그녀는 배우처럼 보이지 않았다.
황제처럼 보였다.
아니, 황제라는 배역에서 한 번도 내려와본 적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어 올렸다.
가면에는 제1막에서 새겨진 단어가 있었다.
아직.
푸리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두 번째 꿈.”
자주빛 하늘이 미하일라 위로 내려왔다.
“천명을 믿은 황제.”
그 순간, 미하일라의 등 뒤에서 자주빛 혜성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혈통의 빛이었다.
팔레올로기나의 장녀.
천 년 궁무의 정통.
비잔티움의 운명.
자주빛 산실의 이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혜성으로 그녀의 등에 맺혔다.
《자휘혜성》.
미하일라가 활 앞에 섰다.
활은 아직 그녀의 손에 있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를 알고 있는 듯 울었다.
끼이이익.
카를로타가 낮게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활을 들었다.
그 순간, 무대 위의 유성들이 모두 하나의 궤도로 정렬되었다.
자주빛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형식.
새벽을 가르기 위해 별을 쏘아 내리는 궁술.
팔레올로기스 가문의 천년 궁무.
《성추여명식星墜黎明式》.
그것은 단순한 활쏘기가 아니었다.
황제가 화살을 잡는 행위는 이미 정치였다.
시위를 당기는 행위는 이미 칙령이었다.
표적을 정하는 행위는 전쟁의 원인을 선고하는 일이었다.
그때, 무너진 황궁의 그림자 속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늙은 왕만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망령처럼 보였다.
무너진 성벽의 먼지를 두르고, 별점판과 칙령문을 함께 든 자.
두려움과 책임, 예언과 행정, 천명과 공포가 한 사람의 얼굴을 쓰고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활을 든 채 대답했다.
“말하라.”
“별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동쪽에서 말발굽이 옵니다.
서쪽에서는 의심이 옵니다.
남쪽에서는 무너진 질서가 썩어갑니다.
제국은 하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불탈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잡았다.
그 손놀림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무서웠다.
활과 몸, 정치와 무공, 명령과 살상이 하나의 결로 이어졌다.
무와 정이 갈라지지 않는 경지.
황제의 무공은 정치이고, 황제의 정치는 전장의 명령이 된다.
《천명天命》.
미하일라가 말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녀는 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필요하다면 내가 쏜다.
필요하다면 내가 죽인다.
필요하다면 내가 피를 짊어진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한 아이도?”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멈췄다.
“무슨 뜻이지.”
무대 중앙에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직 얼굴이 없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등 뒤에는 펼쳐지지 않은 깃발이 있었다.
하지만 그 깃발이 펼쳐지는 순간, 도시 하나가 불탈 것처럼 보였다.
바실리오는 말했다.
“한 아이가 훗날 반란의 깃발이 된다면?”
두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갑옷을 입은 장군.
그는 아직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능성 속에서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한 장군이 훗날 배신한다면?”
세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도문을 쥔 사제.
“한 사제가 훗날 백성을 선동한다면?”
네 번째 그림자가 나타났다.
자주빛 혈통의 윤곽을 가진 황족.
“한 황족이 훗날 제국을 둘로 찢는다면?”
바실리오는 미하일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재판은 늦습니다.
교육은 늦습니다.
외교는 늦습니다.
화살은 빠릅니다.”
그는 제단 위의 활을 가리켰다.
“전쟁을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쟁의 원인을 먼저 꿰뚫는 것입니다.”
미하일라의 활 위에 자주빛 문장이 떠올랐다.
평화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끝내는 활.
전쟁의 원인 그 자체를 꿰뚫고, 부정을 인세에서 추방하는 황제의 전시궁.
《구평전시궁求平戰矢弓》.
활의 조준선이 네 그림자 위로 그어졌다.
아이.
장군.
사제.
황족.
그들은 아직 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능성은 이미 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객석이 숨을 멈췄다.
그때 카를로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폐하.”
미하일라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
카를로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은 물러섬이 아니었다.
“《성추여명식》을 실을 활은 제가 관리합니다.
폐하께서 천명을 말씀하시는 동안, 저는 시위의 장력과 활대의 휨을 봅니다.”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았다.
“장인이 황제의 천명에 끼어드는가?”
카를로타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천명은 제가 모릅니다.”
그녀는 활을 보았다.
“하지만 저 시위가 이 장력을 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압니다.”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카를로타.”
“예, 폐하.”
“지금 문제는 활의 상태가 아니다.”
“항상 활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카를로타는 단호했다.
“황제의 활은 상징이지만, 동시에 물건입니다.
물건이 부러지면 상징도 무너집니다.
폐하의 손목이 찢어지면, 칙령도 흔들립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폐하께서 스스로를 활처럼 쓰신다면, 폐하도 부러집니다.”
무대의 공기가 흔들렸다.
그 말은 무례했다.
그러나 충성이었다.
루나리아 아누아가 달빛을 밟고 무대에 올랐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자주빛 하늘 아래 희미한 은월이 떴다.
달빛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그림자 가장자리에서 식지 않는 열을 알아볼 만큼은 충분했다.
루나리아는 미하일라의 손을 보았다.
시위에 닿은 손가락.
굳은 손목.
숨을 지나치게 얕게 들이쉬는 가슴.
“폐하.”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말하라.”
“호흡이 짧습니다.”
“전투 중이다.”
“아직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시작되었다.”
루나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반박하지 않았다.
미하일라의 세계에서 전투는 정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군대가 움직이기 전부터.
화살이 날기 전부터.
칙령이 쓰이기 전부터.
황제는 언제나 전쟁의 첫날에 살고 있었다.
루나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한 번도 잠들지 못하셨겠군요.”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활시위가 울었다.
팅.
카를로타가 즉시 말했다.
“폐하.”
루나리아의 달빛이 미하일라의 손목에 닿았다.
치유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달빛은 먼저 물었다.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얼마나 오래 아프지 않은 척했는지.
얼마나 오래 황제라는 이름으로 몸을 전장처럼 썼는지.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쏘십시오.
망설임은 전쟁을 길게 만들 뿐입니다.”
네 그림자의 등 뒤에서 참상이 선명해졌다.
도시가 불탔다.
성벽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죽었다.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가능한 미래였다.
하융은 무대 옆의 회색 창호 너머로 그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이는구려.”
푸리나가 하융을 보았다.
하융은 창호빛 속에서 낮게 말했다.
“저 화살을 쏘지 않아 불타는 성이 있소.
저 화살을 쏘아 꺼지는 생도 있소.
어느 창도 가볍지 않구려.”
죠니가 물었다.
“그래서 어느 쪽인데?”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내가 정할 수는 없소.”
그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창을 보는 자가 활을 쏘는 것은 아니오.
활을 든 이가, 자기 손으로 선택해야 하오.”
레이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낡은 바닥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탑 전체가 서재로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미하일라의 활과 네 그림자 사이, 조준선 위에 떠 있던 별들의 이름이 잠시 흐려졌다.
레이튼의 A랭크 신술.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가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폐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미하일라는 활시위를 당긴 채 말했다.
“짧게 하라.”
“폐하께서는 전쟁의 원인을 쏘려 하십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저들이 원인입니까, 가능성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바실리오가 불쾌한 얼굴로 레이튼을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별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별이 떨어질 자리를 우리가 먼저 파내면, 그것은 예언입니까, 공사입니까?”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튼은 네 그림자를 보았다.
“저 아이가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면, 질문은 ‘죽일 것인가’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 아이를 배신하게 만드는가.
저 장군이 성문을 열게 되는 밤에, 성 안에는 어떤 명령이 있었는가.
저 사제가 군중을 움직이기 전, 누가 그들의 기도를 빼앗았는가.
저 황족이 제국을 찢기 전, 제국은 그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가.”
그의 목소리는 온화했다.
“이 질문들을 묻기 전에는, 원인을 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질문은 도시를 구하지 못한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질문만으로는 도시를 구하지 못합니다.”
그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질문은 도시를 불태울 수 있습니다.”
미하일라의 눈동자에 자주빛 혜성이 비쳤다.
그녀는 전쟁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화를 원했다.
그래서 활을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녀는 위험했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쏠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누구의 가능성을 미리 죽일 수 있는가.
황제는 어디까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내일을 가져갈 수 있는가.
그때 객석에서 작은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직 무대에 오를 차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라스카리스.
어린 황제.
모든 이에게 평화를 말하는, 너무 어린 이상.
요안나는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의 걸음은 미하일라처럼 무겁지 않았다.
활을 든 황제의 걸음도 아니었고, 장부를 든 재상의 걸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한 걸음 내딛자, 객석 곳곳에서 작은 빛들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지지.
아이의 믿음.
병사의 작은 환호.
시장 상인의 고개 끄덕임.
어부와 길거리 아이들이 언젠가 그녀에게 건넸던 신뢰.
티켓처럼 작은 빛들.
요안나의 권능.
[지지 티켓].
그 빛들이 그녀의 발밑에 모이자, 무대 위에 희미한 로마의 문장이 떠올랐다.
왕관과 칼의 로마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활하는 로마.
《부활하는 로마의 문장》.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강했다.
황제의 활을 든 사람은 무서웠다.
그리고 요안나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라가 틀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그녀는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의 시선이 요안나에게 향했다.
요안나는 두 손을 꼭 쥐었다.
“망설이지 않는 황제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지지 티켓들이 그 목소리를 객석 끝까지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한 번도 망설이지 않는 황제가 다스리는 평화 속에서,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있을까요?”
극장 안의 어른들 중 누구도 쉽게 웃지 못했다.
바실리오가 차갑게 말했다.
“아이의 이상이군.”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네. 아이의 이상이에요.”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 발밑에 자주빛 빛이 낮게 깔렸다.
높은 보좌의 자주빛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 내려오는 자주빛.
《가장 낮은 곳에 임할 자주빛》.
요안나는 말했다.
“하지만 어른들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탑에 가두었으니까, 가끔은 아이가 이상을 말해야 해요.”
미하일라는 조용히 물었다.
“요안나. 너는 내가 망설이다 제국을 잃어도 된다고 말하는가.”
“아니요.”
“그러면?”
요안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리스어로 말했다.
“Εἰρήνη πᾶσιν.”
그 말은 주문처럼 울리지 않았다.
구호처럼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 오래 붙들고 온 아이의 꿈처럼 들렸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이 울리자, 지지 티켓들이 하나씩 더 빛났다.
“저는 폐하께서 망설인 흔적을 제국에 남겨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요안나는 말했다.
“폐하께서 쏘신 화살은 칙령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알게 해야 해요.
황제가 쉽게 쏘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 하나를 가능성만으로 죽이는 일이, 평화의 이름으로도 당연해지지 않게 해야 해요.”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무대 옆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이때까지 조용했다.
하지만 요안나의 말은 그녀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망설임의 기록.
칙령의 절차.
황제의 화살이 장부에 어떻게 남는가.
슈샤니크는 청록빛 장부를 펼쳤다.
그녀의 주변으로 까마귀 깃털 같은 문서 조각들이 떠올랐다.
로마의 시민권 명부.
군량 보고서.
전시 행정령.
피난민 등록부.
소산드라 이후 재편된 권한 목록.
라스카리스와 팔레올로기나의 공동황제 체제를 가까스로 묶어두는 기록들.
닫은 여관의 주인이 장부로 사람을 살리는 방식.
슈샤니크는 낮게 말했다.
“폐하.”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재상.”
“가능성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칙령은, 행정적으로도 위험합니다.”
바실리오가 비웃듯 말했다.
“행정?”
슈샤니크는 그를 보지 않았다.
“예. 행정입니다.”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 아래에는 닫힌 여관의 재가 남아 있었다.
“한 번 가능성만으로 처형이 허락되면, 귀족들은 자기 정적을 ‘미래의 반역자’라 부를 것입니다.
군부는 불편한 사제를 ‘훗날 선동가’라 부를 것입니다.
지방관은 세금을 내지 못한 마을을 ‘잠재적 반란지’라 부를 것입니다.”
그녀는 장부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장부는 피로 빨리 채워지겠지요.”
미하일라는 침묵했다.
슈샤니크는 계속 말했다.
“폐하의 화살은 정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의 화살을 흉내 내는 자들은 정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에 미하일라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슈샤니크는 시선을 낮추었다.
“그러므로 쏘시려면, 기준을 남기십시오.
절차를 남기십시오.
망설임을 남기십시오.
폐하의 화살이 칙령이라면, 그 칙령은 폐하가 사라진 뒤에도 남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낮아졌다.
“저는 이미 닫힌 여관의 값을 압니다.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장부에 가두는 일도, 구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팔아넘기는 일도, 아주 쉽게 시작됩니다.”
순간, 푸리나는 슈샤니크를 보았다.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려는 자.
닫은 여관을 장부로 대신해온 자.
사람을 사랑했으나, 한때 사람을 숫자로 굴릴 수밖에 없었던 자.
그녀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 조언이 아니었다.
고백에 가까웠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불쾌하게 흔들렸다.
“평화는 그런 느린 장부로 오지 않는다.”
그때 천둥이 쳤다.
쾅.
라플리/라플리아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 끝에 뇌광이 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 진짜.”
푸리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왔다.”
라플리는 바실리오를 노려보았다.
“말을 너무 예쁘게 하잖아.”
바실리오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라플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늘 팔아먹는 말장난 싫어하는 마탑주.”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자주빛 하늘 위로 번개 궤적이 그려졌다.
천상현상.
뇌광.
마법학.
귀족적 수사와 신성한 핑계를 찢는 불온한 마녀의 계산.
라플리의 마법진이 별들의 궤도를 해부했다.
“좋아. 별이 떨어질 수는 있어.
궤도도 계산돼.
천문도 틀릴 수 있고, 맞을 수도 있지.”
그녀는 번개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그런데 별이 떨어진다고 해서, 네가 애 머리 위에 돌을 올려놔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바실리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무례하구나.”
“네. 저는 원래 무례합니다.”
라플리는 요안나 쪽을 한 번 보고, 미하일라를 향해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저쪽한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바실리오를 보았다.
“애 하나 가둬놓고 별이 말했다.
쏴 죽이고 나서 천명이다.
장부에 적고 나면 책임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귀족들은 참 편하겠어.”
번개가 별자리 사이를 찢었다.
“천문은 핑계가 아니고, 예언은 면죄부가 아니야.
그걸 구분 못 하는 놈들이 꼭 하늘을 팔아먹더라.”
라플리의 뇌광이 네 그림자의 등 뒤에 있던 가능성들을 비추었다.
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참상 위에 붙은 이름들이 흔들렸다.
필연.
천명.
제거 대상.
그 이름들이 번개에 그을렸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라플리. 그만.”
라플리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지막 한마디는 참지 못했다.
“……저런 식으로 폐하의 활을 이용하게 두지 마십시오.”
그 말은 거칠었다.
그러나 충성스러웠다.
이번에는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가 조용히 무대 위로 나왔다.
그녀의 발밑에는 도로가 생겼다.
돌로 포장된 로마 가도.
편지와 인장과 상인들의 소문과 북방의 별빛이 얽힌 길.
그녀가 손을 들자 세 개의 실이 하늘에 떠올랐다.
하나는 아이가 처형되는 미래.
하나는 아이가 방치되어 배신하는 미래.
하나는 아이가 이름을 불리고도, 여전히 문 앞에서 흔들리는 미래.
아스테리아는 그 세 실을 바라보았다.
보가트리의 후손이 별과 마법의 궤적을 읽는 눈.
미래는 단 하나로 말하지 않았다.
세 갈래로 속삭였다.
아스테리아가 말했다.
“폐하. 세 갈래 모두 위험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쏘면 적 하나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소문은 길을 타고 퍼집니다.
‘니케아의 황제는 가능성만으로 아이를 죽인다.’
그 말은 북방 시장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적국의 외교문서에서 아주 쓸 만한 칼이 됩니다.”
그녀는 두 번째 실을 보았다.
“쏘지 않고 방치하면, 정말로 성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실.
“그러나 감시와 교육, 시민권과 길을 주면…… 문 앞에서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문을 열기 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미래가 생깁니다.”
아스테리아는 미소 지었다.
“저라면 세 번째 실에 투자하겠습니다. 외교적으로도 가장 손해가 적습니다.”
라플리가 작게 말했다.
“말을 참 장사꾼처럼 하네.”
아스테리아가 웃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때 게오르기아가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왕관도 활도 장부도 들지 않았다.
책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책은 답이 적힌 교과서가 아니라, 로마를 가르치기 위한 문법서에 가까웠다.
게오르기아는 네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미하일라에게 말했다.
“폐하. 세히스문도가 묻습니다.”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게오르기아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왕인가, 죄수인가.”
잠시 침묵.
“하지만 그 질문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게오르기아는 책을 덮었다.
“왕도 죄수도 신분입니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 신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그녀는 아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저 아이가 훗날 반역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니케아는 그 아이에게 먼저 무엇을 가르칠 것입니까.”
장군.
“저 장군이 훗날 성문을 열 가능성이 있다면, 니케아는 그 장군에게 어떤 충성을 요구할 것입니까.”
사제.
“저 사제가 군중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니케아는 그 군중에게 어떤 로마를 약속할 것입니까.”
황족.
“저 황족이 제국을 찢을 수 있다면, 니케아는 황족이라는 이름과 시민이라는 이름 중 무엇을 더 크게 가르칠 것입니까.”
게오르기아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교육은 화살보다 느립니다.
그러나 화살이 끝낸 전쟁 뒤에 남을 사람을 만드는 일은, 교육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자주빛 혜성이 그녀의 눈꺼풀 위에 흔들렸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활의 장인을 가진 황제.
달빛의 사제를 가진 황제.
평화의 공동황제를 가진 황제.
장부를 든 재상을 가진 황제.
천둥 같은 마탑주를 가진 황제.
길과 소문을 읽는 외교관을 가진 황제.
로마를 가르치는 스승을 가진 황제.
그리고 그렇기에, 그녀는 더 이상 바실리오의 속삭임에만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미하일라가 눈을 떴다.
활시위는 여전히 팽팽했다.
**《구평전시궁》**의 조준선은 여전히 네 그림자를 겨누고 있었다.
미하일라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활을 내렸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굳었다.
“폐하?”
미하일라가 말했다.
“나는 쏘지 않는다.”
무대 위 네 그림자가 흔들렸다.
아이.
장군.
사제.
황족.
그들의 등 뒤에 있던 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았다.
미하일라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이를 가두지 않는다.
장군을 처형하지 않는다.
사제를 입막음하지 않는다.
황족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그러면 제국이 불타면?”
미하일라는 활을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시위를 당기지 않았다.
그녀는 활을 수직으로 세웠다.
마치 칙령을 세우듯.
“감시한다.
교육한다.
토론하게 한다.
시민권을 준다.
장부에 남긴다.
길을 열어둔다.”
요안나의 지지 티켓들이 작게 빛났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페이지를 넘겼다.
아스테리아의 세 번째 실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게오르기아의 책장이 스스로 열렸다.
미하일라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문을 열어 적을 들인다면.”
자주빛 혜성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 쏜다.”
무대 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미하일라는 계속 말했다.
“나는 황제다.
전쟁의 가능성을 못 본 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능성만으로 인간을 끝내지도 않는다.”
그녀는 바실리오를 보았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들겠다.
하지만 평화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을 미리 죽이지는 않겠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약함이다.”
미하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녀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이것은 내가 활을 부러뜨리지 않기 위한 절제다.”
카를로타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루나리아의 달빛이 미하일라의 손목을 감쌌다.
이번에는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드는 빛이 아니었다.
황제가 자기 몸을 제국의 부품처럼 쓰지 않도록, 아픔의 위치를 다시 알려주는 빛이었다.
미하일라는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은 항복이었다.
루나리아는 그 손을 받았다.
요안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폐하.”
“말하라.”
“그 아이들이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나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슈샤니크가 고개를 들었다.
게오르기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스테리아는 세 번째 실을 바라보았다.
미하일라는 답했다.
“그들이 로마를 찢지 않는다면.”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미하일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요안나는 말했다.
“그들이 로마를 찢지 않게 하려면, 먼저 로마가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해요.”
그 말과 함께 요안나의 발밑에 있던 빛들이 원형으로 퍼졌다.
시민의 권고.
원로원의 이름.
군중의 지지.
아직 어린 황제가 만들어내는 대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권고》.
네 그림자의 발밑에 작은 문장이 새겨졌다.
civis Romanus futurus.
미래의 로마 시민.
슈샤니크는 그 문장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행정적으로는, 매우 번거로운 문장입니다.”
요안나가 살짝 웃었다.
“그래도 가능하죠?”
슈샤니크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제 일입니다.”
그 말에 푸리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니케아였다.
활과 평화.
장부와 길.
교실과 달빛.
천둥과 조궁.
아이의 이상과 황제의 전쟁.
서로 다르고,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서로를 멈춰 세우면서도, 겨우 한 제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
미하일라는 네 그림자에게 말했다.
“너희는 아직 죄인이 아니다.”
아이의 그림자가 희미해졌다.
“그러나 책임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다.”
장군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너희를 지켜볼 것이다.”
사제의 손에서 기도문이 흔들렸다.
“그리고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제국을 만들 것이다.”
황족의 그림자는 오래 남아 있었다.
미하일라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 선택으로 제국을 찢는다면, 그때는 내 화살이 간다.”
황족의 그림자가 천천히 사라졌다.
바실리오의 그림자는 거의 흩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물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폐하께서는 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하일라는 대답했다.
“깨어난 뒤에는, 다시 선택한다.”
그것은 완전한 승리 선언이 아니었다.
미하일라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내일, 그녀는 쏘아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녀는 정말로 전쟁의 원인을 꿰뚫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의 손은 피로 물들 것이다.
하지만 오늘.
오늘 그녀는 가능성만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
꿈속에서라도.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푸리나가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미하일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활을 보았다.
그리고 그 활을 잡았던 손을 보았다.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떨리지 않기 위해 너무 오래 단련된 손이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두 번째 꿈은, 아직 쏘지 않은 화살이었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이 빛났다.
첫 번째 글자 아래에 두 번째 글자가 새겨졌다.
아직.
망설임.
푸리나는 그 글자를 보았다.
“망설임은 약함이 아닐 수도 있어.”
그녀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어쩌면, 인간을 아직 인간으로 남겨두는 마지막 시위일지도 모르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말은 예쁜데, 이번엔 맞는 것 같네.”
푸리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고마워?”
“칭찬은 아니었어.”
“그럼 뭐였는데?”
“기록.”
아카식이 객석에서 웃었다.
알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에 두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천명을 믿은 황제.
그리고 그 아래.
오늘은 쏘지 않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불타는 도시의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옆에 다른 창이 생겼다.
그 창에서는 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문밖에는 적이 있었다.
문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누군가는 아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로마 시민이라 부르려 애쓰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문 앞에 이름 하나가 놓였구려.”
푸리나가 물었다.
“좋은 가능성이야?”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좋다 말하기는 이르오.
허나 사람이 문을 열기 전,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다면…… 비껴설 길은 생기오.”
그 말에 푸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라는 활을 내려놓았다.
카를로타가 다가와 활의 시위를 살폈다.
“무리는 갔습니다.”
미하일라가 말했다.
“수리할 수 있나.”
“활은 가능합니다.”
카를로타는 잠시 멈추었다.
“폐하의 손목은 루나리아 님께 맡기십시오.”
루나리아가 미소 지었다.
“물론입니다.”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내밀었다.
요안나는 그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닫았다.
아스테리아는 세 개의 실 중 세 번째 실에 작은 매듭을 지었다.
게오르기아는 책의 빈 페이지에 첫 문장을 적었다.
라플리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바실리오가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하늘 팔면 진짜 벼락 맞힐 겁니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말했다.
“라플리.”
“예, 폐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자주빛 하늘이 천천히 걷혔다.
대신 무대 뒤쪽에서 숲의 냄새가 밀려왔다.
축축한 흙.
부러진 나뭇가지.
늪의 물기.
달빛.
그리고 피.
탑의 벽은 나무껍질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에서 늑대 울음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사람들의 낮은 함성이었다.
침략받은 자들의 숨소리.
복수를 맹세한 숲의 속삭임.
아스테르다스가 객석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무대 위 숲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 위에는 이제 두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그리고 세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낮게 선언했다.
“세 번째 꿈.”
달빛이 숲을 비추었다.
“복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