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7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12:15:28
제3막 개정본
복수의 왕
숲이 무대 위로 자라났다.
처음에는 냄새였다.
축축한 흙.
젖은 나무껍질.
늪의 물기.
오래된 피.
불탄 집의 재가 비를 맞은 뒤에야 내는, 식어버린 냄새.
그리고 다음은 소리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진흙이 말굽을 붙잡는 소리.
어딘가에서 활시위가 낮게 당겨지는 소리.
누군가 숨을 죽이는 소리.
검은 탑의 벽은 천천히 갈라졌다.
제1막에서는 책장이 되었고, 제2막에서는 무너진 황궁이 되었던 탑.
이번에는 나무껍질이 되었다.
굵은 뿌리가 무대 바닥을 파고들었다.
검은 막은 숲의 그림자로 변했고, 탑의 창살은 뒤엉킨 나뭇가지가 되었다.
조명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극장의 조명처럼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었다.
창백하고 차갑고, 조금은 미친 듯한 달빛.
그 달빛 아래에서 숲은 숨을 쉬었다.
나무 사이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농부.
사냥꾼.
목동.
숲길을 아는 아이.
등에 아기를 업은 여자.
창 대신 낫을 든 노인.
그들은 군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보다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첫 번째 꿈은 기록된 아이의 꿈이었다.
두 번째 꿈은 천명을 믿은 황제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꿈이 시작되려 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세 번째 꿈.”
달빛이 숲 중앙으로 모였다.
“복수의 왕.”
그 말이 떨어지자, 숲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민다우가스.
리투아니아의 시조.
불탄 마을과 약탈당한 부족과 끌려간 아이들의 울음 위에서, 흩어진 숲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왕.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대신 늑대 가죽을 어깨에 걸쳤다.
손에는 피 묻은 창이 있었다.
그의 창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누가 마을을 불태웠는지.
누가 말을 몰고 왔는지.
누가 항복한 뒤에도 빼앗았는지.
누가 아이를 데려갔는지.
그 모든 것을 잊지 않는 창.
민다우가스는 숲 한가운데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숲 전체가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등 뒤로 다섯 개의 표식이 떠올랐다.
달.
숲.
죽음.
태양.
운명.
먼저, 창백한 달이 내려앉았다.
메눌리스의 달표식.
달빛이 숲에 깔리자 리투아니아인들의 몸이 사라졌다.
그들은 숨은 것이 아니었다.
밤이 그들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였다.
달빛은 침착했다.
그러나 그 침착함 아래에는 광기가 있었다.
침략받은 자가 오래 품은 분노.
너무 오래 울다 마침내 울음을 멈춘 눈동자.
다음으로, 숲이 깊어졌다.
메데이나의 숲표식.
나무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었다.
성벽이었다.
창살이었다.
피난로였다.
사냥터였다.
침입한 자의 길을 헷갈리게 하고, 도망치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주며, 리투아니아인의 발걸음에는 뿌리를 비켜주는 숲.
세 번째로, 땅 아래에서 죽음의 기운이 올라왔다.
파툴라스의 죽음표식.
그것은 화려한 저주가 아니었다.
적의 말발굽 아래 진흙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
갑옷 틈으로 스며드는 식은 기운.
기병의 호흡이 한 박자 늦어지는 것.
돌격의 속도가 조금씩 죽어가는 것.
네 번째로, 아주 희미한 태양이 숲속 사람들의 가슴에서 켜졌다.
사울레의 태양표식.
그 태양은 한낮처럼 밝지 않았다.
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태양은 농부와 사냥꾼과 목동과 아이를 하나의 전투형제로 묶었다.
그들은 명령을 받는 병사가 아니라, 같은 아침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실이 숲 전체를 엮었다.
라이마의 운명표식.
흩어진 소부대들이 서로의 위치를 알았다.
울음도 함성도 없이, 각자 정해진 자리에 섰다.
운명은 그들을 묶었지만, 그들의 발을 대신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섯 표식이 하나로 엮였다.
달은 숨기고.
숲은 삼키고.
죽음은 갑옷 틈에 스며들고.
태양은 백성을 전투형제로 묶고.
운명은 흩어진 숨을 하나의 전장으로 이었다.
민다우가스가 창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숲을 지나갔다.
“리투아니아는 평야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부터.
쿵.
쿵.
쿵.
“리투아니아는 성문 앞에서 명예를 논하지 않는다.”
말발굽은 가까워졌다.
“리투아니아는 침략자를 숲으로 부른다.”
검은 기병들이 무대 바깥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몽골처럼 보였다.
기사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약탈자였고, 때로는 세금 징수병이었고, 때로는 신의 이름을 단 군대였다.
그러나 오늘 그들의 깃발에는 아무 문장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침략자였다.
이름보다 먼저 발굽으로 오는 자들.
말하기 전에 불태우는 자들.
항복을 요구하고, 항복 뒤에도 빼앗는 자들.
그들이 숲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숲은 문을 닫았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말했다.
“《기사사냥꾼》.”
그 순간, 리투아니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말이 늪에 빠졌다.
기수는 고삐를 당겼지만 늦었다.
진흙은 말의 무릎을 삼켰고, 파툴라스의 죽음표식은 말의 힘줄을 식게 만들었다.
두 번째 기사가 구하러 다가왔다.
그 순간 나무 위에서 화살이 내려왔다.
화살은 목을 노리지 않았다.
갑옷과 갑옷 사이.
팔꿈치 안쪽.
안장끈.
투구 아래 시야.
기사의 명예를 상대하지 않는 화살이었다.
생존하기 위해 배운 화살.
세 번째 기병은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메데이나의 숲표식 아래 나무들이 길을 바꾸었다.
들어온 길은 사라지고, 나가야 할 길에는 뿌리가 솟았다.
네 번째 기병은 횃불을 들었다.
숲을 태우려 했다.
그 순간 메눌리스의 달표식이 그의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는 한순간 자신이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는지 잊었다.
횃불은 아군의 말꼬리에 닿았다.
혼란.
비명.
그리고 숲속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 사람이 창을 찔렀다.
다음 순간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 말의 다리를 베었다.
다음 순간 늪 뒤로 물러났다.
농부가 낫으로 기사의 허벅지를 베고, 목동이 돌팔매로 말의 눈을 맞추고, 사냥꾼이 나무 위에서 두 번째 화살을 준비했다.
사울레의 태양표식이 그들의 가슴에서 낮게 빛났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전투형제였다.
리투아니아의 숲은 기사에게 정정당당한 전장을 주지 않았다.
리투아니아는 침략자의 전장 규칙을 거부했다.
민다우가스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다.
복수의 쾌감도 없었다.
그보다 깊은 것이 있었다.
오래 불탄 자의 확신.
다시는 짓밟히지 않겠다는 맹세.
그때 숲의 다른 편에서 별빛 하나가 떨어졌다.
아스테르다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무대 위로 달려오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조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걸음은 낙하처럼 보였다.
별이 땅에 닿기 직전의 속도를 인간의 몸 안에 접어 넣은 것처럼.
아스테르다스는 민다우가스 곁에 섰다.
그는 먼저 전투를 보았다.
“잘 먹히고 있군.”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은 궤도를 잃었어. 말은 늪에 묶였고, 기사들은 달빛을 너무 쉽게 믿고 있어.”
그는 잠시 웃었다.
그 웃음은 밝았다.
그러나 그 밝음은 가벼운 햇빛이 아니라, 대기권을 지나며 타오르는 별빛에 가까웠다.
“민다우가스. 이 숲은 네가 만든 답이야.”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답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래. 생존이지.”
아스테르다스는 숲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생존이 너무 오래 칼 모양이면, 아이들은 글자를 칼끝으로만 배우게 돼.”
민다우가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나를 훈계하러 왔나.”
“아니.”
아스테르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 옆에 떨어지러 왔지. 늘 그랬듯이.”
그 말에 숲의 달빛이 아주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 순간, 숲의 가장 깊은 그림자 속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늙은 왕도, 별을 읽는 점성술사도, 제국의 망령도 아니었다.
그는 불탄 마을의 연기처럼 보였다.
또는 죽은 조상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또는 원한이 왕관을 쓴 모습처럼 보였다.
그가 민다우가스에게 속삭였다.
“저 말을 듣지 마라.”
아스테르다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바실리오는 민다우가스의 등 뒤에 섰다.
“복수를 멈추는 자는 죽은 자를 배신한다.”
숲속에서 낮은 울음이 들렸다.
아이의 울음.
여인의 울음.
말발굽에 짓밟힌 자의 숨.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본 사람의 목소리.
민다우가스의 손이 창대를 세게 쥐었다.
바실리오는 계속 말했다.
“네가 용서하는 순간, 침략자들은 돌아온다.
네가 칼을 내리는 순간, 그들은 네 아이들을 데려간다.
네가 복수 이후의 나라를 꿈꾸는 순간, 복수해야 할 이유를 잊는다.”
그림자는 다섯 표식을 가리켰다.
“달은 숨기라고 했다.
숲은 사냥하라고 했다.
죽음은 적의 발목에 스며들라고 했다.
태양은 모든 백성을 전투형제로 만들라고 했다.
운명은 네 손에 복수의 길을 묶었다.”
그 목소리는 점점 깊어졌다.
“그렇다면 왕이여.
너는 왜 멈추려 하는가?”
민다우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여러 장면이 펼쳐졌다.
불탄 마을.
끌려간 아이들.
사울레의 들판.
3000명의 기사를 도살했다는 전승.
리투아니아의 아이들이 숲에서 활을 배우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수를 가르치느라 웃는 법을 잊은 아이들의 모습.
민다우가스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네 막이 아니야.”
푸리나의 발이 멈췄다.
죠니는 무대를 바라본 채 말했다.
“저건 저 사람이 골라야 해.”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명을 들고 있는 사람은 어둠 속의 사람을 보면 조명을 비추고 싶어진다.
상처 입은 사람을 보면, 그 상처에도 이름을 붙이고 장면을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무대 위에 올리기 전에, 먼저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자기 손의 칼 무게를 느껴야 했다.
하융은 회색 창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창이 있었다.
복수로 나라가 살아남은 창.
복수를 잊어 다시 불탄 창.
복수가 나라를 집어삼킨 창.
복수를 칼로 남기고, 식탁과 축제를 되찾은 창.
하융은 아주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복수가 나라를 살렸소.”
그는 다른 창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복수를 잊은 탓에 다시 불탔소.”
또 다른 창.
“어느 창에서는 복수가 나라를 먹었소.”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여기서는?”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흔들리고 있소.”
그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왕의 손 안에서.”
바실리오는 민다우가스에게 속삭였다.
“복수는 네 왕좌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숲 한가운데에 왕좌가 나타났다.
그 왕좌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아니.
창대로 되어 있었다.
수많은 창.
부러진 화살.
죽은 침략자의 갑옷 조각.
리투아니아인의 피 묻은 맹세.
불탄 집의 기둥.
그것들이 얽혀 왕좌를 이루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앉아라.
그것이 네가 세운 나라다.”
민다우가스의 발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순간, 아스테르다스가 움직였다.
그는 민다우가스를 붙잡지 않았다.
말로 막지도 않았다.
한 걸음.
그가 내디딘 발은 무대의 바닥을 디뎠다.
그러나 모두가 느꼈다.
그것은 걸음이 아니라 낙하였다.
별이 궤도를 바꿔, 땅에 박히는 순간.
아스테르다스는 민다우가스의 창끝과 왕좌 사이, 그 아주 좁은 틈에 섰다.
별빛이 바닥에 둥근 흔적을 남겼다.
왕좌로 향하던 복수의 궤도가 아주 조금 비껴났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이 전장이 나라가 되면 안 돼.”
민다우가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비켜라.”
“비킬 거야.”
아스테르다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왕좌와 칼을 구분하면.”
바실리오가 비웃었다.
“별 하나가 숲의 원한을 막을 수 있느냐?”
아스테르다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막는 게 아니야.”
그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떨어지는 별은 길을 끊기도 하지만, 밤에 있는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주기도 하지.”
민다우가스는 침묵했다.
그때 바실리오가 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자들이 네 뒤에 있다.”
숲 아래에서 울음이 커졌다.
“불탄 마을이 네 뒤에 있다.
끌려간 아이들이 네 뒤에 있다.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이 네 뒤에 있다.”
그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겠느냐.
복수다.
그들이 네게 무엇을 요구하겠느냐.
복수다.
그러니 왕이여, 망설이지 마라.”
민다우가스의 손이 창대를 세게 쥐었다.
그 말은 전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 중에는 분명 복수를 바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기 집을 불태운 자의 목을.
자기 아이를 끌고 간 자의 피를.
자기 이름을 진흙에 짓밟은 자의 비명을.
그렇기에 바실리오의 말은 위험했다.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의 일부만을 왕좌에 앉히는 일이었다.
그때 무대 아래에서 검은 물소리가 들렸다.
바다는 없었다.
그러나 물소리가 났다.
깊고, 낮고, 차가운 물.
숲의 뿌리 아래.
늪의 바닥 아래.
말발굽에 짓밟힌 흙 아래.
그보다 더 아래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배우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조명을 받기 위해 걸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미 무대 아래에 있던 침묵이 사람의 형태를 얻어 올라온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 검은 바다가 열렸다.
물의 바다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끊어진 실.
돌아오지 못한 전령의 숨.
불탄 마을의 마지막 침묵.
승리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빈자리.
스러져간 이들이 남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결말들.
그 모든 것이 가라앉은 심연.
《가장 낮은 바다》.
숲의 달빛이 그 바다 위에 닿았다.
그러나 바다는 빛나지 않았다.
그저 더 깊어졌다.
아레가 말했다.
“그 말은 절반만 맞단다.”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았다.
“죽은 자를 부정하려는가?”
“아니.”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부정하고 있지.”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가장 낮은 바다 아래에서 실들이 떠올랐다.
수백.
수천.
아주 가느다란 실들.
각 실의 끝에는 이름이 있었다.
어떤 이름은 선명했다.
어떤 이름은 흐릿했다.
어떤 이름은 찢어진 천 조각처럼 겨우 남아 있었다.
어떤 이름은 아직 찾지 못해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아레의 눈이 깊어졌다.
《추도자》.
그것은 미래를 보는 힘이 아니었다.
아레가 기억하는 것은 앞으로 올 결말이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결말들이었다.
후대의 마가트로이드들이 겪고, 가라앉히고, 잊지 않은 수많은 전쟁.
끊어진 실.
침묵으로 내려앉은 이름들.
지휘관이 결코 “피해”라는 한 글자로 묶어서는 안 되는 결말들.
아레는 그 결말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합치지 않았다.
실 하나가 떠올랐다.
불탄 집 앞에서 죽은 사냥꾼의 기억이었다.
그는 복수를 바랐다.
실 하나가 더 떠올랐다.
끌려간 아이를 찾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또 다른 실.
늪에서 죽은 노인의 기억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봄 수확을 걱정했다.
또 다른 실.
칼을 쥔 채 죽은 젊은 전사의 기억이었다.
그는 침략자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 동생이 평생 칼만 쥐고 살지는 않기를 바랐다.
또 다른 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아이의 기억.
그 아이는 복수도 안식도 말하지 못했다.
그저 추웠다.
아레는 그 실들을 당기지 않았다.
명령하지도 않았다.
죽은 자를 다시 무대 위 배우로 세우지도 않았다.
병력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산 자의 분노를 장식하는 깃발로 만들지도 않았다.
다만 엉킨 실을 풀었다.
그 침묵이 한 가지 말만 하도록 강요받지 않게.
바실리오가 낮게 말했다.
“저들은 복수를 바란다.”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떤 이는 그렇겠지.”
“그럼 충분하다.”
“아니.”
아레의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녀의 뒤에 암영이 내려앉았다.
정지.
침묵.
쇠퇴.
경계.
죽은 자를 끌어올리는 대신, 그 침묵의 업을 대가로 삼는 계약의 기척.
《암영과의 계약》.
아레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복수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안식을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제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집의 난로가 다시 피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죽은 자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란다.”
민다우가스는 말을 잃었다.
아레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 왕이여.
죽은 자의 침묵을 하나의 명령으로 묶지 말거라.”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을 잊으라는 것이냐?”
아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잊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손끝에서 가장 낮은 바다의 실들이 천천히 정렬되었다.
그것은 군대를 움직이는 지휘계가 아니었다.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전열도 아니었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자기 분노의 깃발로만 쓰지 못하게 하는 정렬이었다.
아레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온당한 결말을 애도하는 것》.
그 순간, 바실리오가 만든 복수의 왕좌가 흔들렸다.
죽은 자의 침묵이 산 자의 왕좌로 도용되는 결말.
그 결말은 온당하지 않았다.
아레는 그것을 부수지 않았다.
그저 애도했다.
온당하지 않은 결말은 애도 앞에서 잠시 힘을 잃었다.
창대로 만들어진 왕좌의 일부가 무너졌다.
창이 다시 창으로 돌아갔다.
죽은 자의 이름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레가 말했다.
“이름으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들이 빼앗긴 삶으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들이 마시지 못한 술, 보지 못한 아이의 성장, 돌아가지 못한 집의 난로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복수는 기억의 한 형태일 수 있단다.
그러나 복수만 남으면, 죽은 이는 죽은 순간에 묶이고 말지.”
숲이 침묵했다.
민다우가스는 가장 낮은 바다를 보았다.
그 바다는 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과, 그가 복수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한 문장으로 묶어버릴 뻔한 침묵들이 있었다.
그는 창을 내려다보았다.
창은 여전히 필요했다.
침략자는 다시 올 것이다.
말발굽은 다시 숲 가장자리를 밟을 것이다.
기사와 약탈자와 세금 징수병과 신의 이름을 단 폭력은 다른 깃발을 달고도 돌아올 것이다.
그때 창이 없다면 리투아니아는 다시 불탈 것이다.
민다우가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창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창을 들고, 복수의 왕좌를 바라보았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앉아라.”
민다우가스가 대답했다.
“아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숲 전체가 들었다.
“복수는 왕좌가 아니다.”
그는 창을 땅에 꽂았다.
“복수는 칼이다.”
메눌리스의 달빛이 흔들렸다.
메데이나의 숲이 잎을 떨었다.
파툴라스의 죽음이 창끝에서 낮게 울었다.
사울레의 태양이 조금 더 따뜻하게 빛났다.
라이마의 운명표식은 빡빡하게 당겨져 있던 실을 아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민다우가스는 바실리오를 향해 말했다.
“칼은 쥐어야 한다.
침략자가 온다면, 나는 쥘 것이다.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려 한다면, 숲은 문을 닫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 말을 빼앗고 집을 태우려 한다면, 늪은 그들의 말발굽을 삼킬 것이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말은 무서웠다.
민다우가스는 복수의 피를 부정하지 않았다.
침략자를 사냥한 사실을 사과하지 않았다.
자기 나라가 피해자라는 말 속에만 머물 생각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침략자를 죽일 왕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칼 위에 앉지는 않는다.”
아스테르다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민다우가스는 숲속 사람들을 보았다.
“모든 마을에 활을 가르쳐라.”
숲속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길에 피난처를 만들고, 모든 늪길에 함정을 파라.
침략자가 온다면, 아이도 노인도 길을 알게 하라.
숲은 우리의 성벽이고, 밤은 우리의 문이다.”
바실리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민다우가스의 다음 말에 그 미소는 멈췄다.
“그리고 모든 축제를 되살려라.”
숲이 흔들렸다.
“복수를 맹세한 자리에서만 모이지 마라.
아이의 이름을 지은 날에도 모여라.
첫 수확에도 모여라.
누군가가 먼 길에서 돌아온 날에도 모여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밤에는, 그가 좋아하던 술도 함께 따르라.”
가장 낮은 바다의 실 하나가 조용히 빛났다.
“아이들에게 침략자를 죽이는 법만 가르치지 마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가르쳐라.”
그 순간, 사울레의 태양표식이 뚜렷하게 밝아졌다.
밤은 끝나지 않았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숲속 사람들의 가슴에 켜진 작은 태양들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백성은 무기가 아니었다.
백성은 아침이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뒷걸음질쳤다.
“네가 약해졌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는 숲속에서 쓰러진 침략자의 갑옷을 보았다.
“나는 여전히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숲속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죽이는 것만으로 다스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복수의 칼을 왕좌 아래에 둘 수 있겠느냐?”
민다우가스는 대답했다.
“매일 다시 놓아야겠지.”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현실적이었다.
“칼은 손으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원한은 왕좌 위로 기어오르려 할 것이다.
침략자가 다시 오면, 숲은 다시 피를 먹을 것이다.”
그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그러니 내 옆에 떨어져라.”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민다우가스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네 별은 시끄럽다.”
“살아 있다는 뜻이지.”
“가끔은 너무 살아 있다.”
“그건 칭찬으로 들을게.”
그 짧은 농담이 숲속을 지나갔다.
그것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침략자를 없애지도 않았다.
복수의 역사를 지워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이 있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전쟁터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치지 않았다.
이 막은 박수칠 때가 아니었다.
아레의 가장 낮은 바다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바다를 보았다.
무대 위에 올리지 않는 것도 기억일 수 있다.
배우로 세우지 않는 것도 존중일 수 있다.
모든 침묵에 대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침묵은 침묵으로 지켜주는 것.
그것도 극장주가 배워야 할 일이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참았네.”
푸리나는 작게 대답했다.
“응.”
“잘했어.”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지금 칭찬이야?”
“그래.”
“너무 짧지 않아?”
“그게 칭찬이니까.”
푸리나는 잠시 웃을 뻔했다.
그러나 무대 중앙의 민다우가스를 보고, 웃음을 조용히 삼켰다.
그녀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숲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푸리나는 가면을 보았다.
가면에는 두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그리고 세 번째 단어가 천천히 새겨졌다.
칼.
푸리나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세 번째 꿈은 복수였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복수는 왕좌가 아니었지.”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꿈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왕이 돼.
기록의 왕.
전쟁의 왕.
복수의 왕.”
그녀는 가면을 천천히 돌렸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야 하는 것이, 정말 왕 자신인지 묻지 않으면 안 돼.
때로 왕좌에 남아야 하는 것은, 왕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내일일지도 모르니까.”
죠니가 팔짱을 낀 채 낮게 말했다.
“오늘은 좀 덜 과장했네.”
푸리나는 힐끗 보았다.
“고마워?”
“이번엔 칭찬 맞아.”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세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복수의 왕.
그리고 그 아래.
칼은 왕좌가 아니다.
아레의 가장 낮은 바다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실들은 다시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죽은 자들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
병력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엉킨 복수의 함성이 아니라, 각자의 침묵으로 남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수많은 창이 있었다.
복수로 나라가 살아남은 창.
복수를 잊어 다시 불탄 창.
복수가 나라를 집어삼킨 창.
복수를 칼로 남기고, 식탁과 축제를 되찾은 창.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아졌다.
그 창에서는 숲속 마을에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활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활을 내려놓은 뒤에는 빵을 먹었다.
늙은 여인은 죽은 아들의 이름으로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술잔 옆에는 빈 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는 손자도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비껴섰소.”
푸리나가 물었다.
“좋은 쪽으로?”
하융은 오래 생각했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소.
복수의 칼은 밤마다 손을 부르니.”
그는 민다우가스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허나 칼을 놓을 식탁이 생겼다면, 그 또한 길이겠지.”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숲을 보았다.
그리고 숲속에서, 아이들이 활을 내려놓고 빵을 먹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뒤, 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 길을 지켜라.”
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숲에게.
아스테르다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리투아니아의 아이들에게.
달빛이 천천히 걷혔다.
메눌리스의 달표식이 흐려졌다.
메데이나의 숲표식이 무대 뒤로 물러났다.
파툴라스의 죽음표식이 창끝에서 가라앉았다.
사울레의 태양표식은 마지막까지 작게 남아 있다가, 마을의 등불처럼 흩어졌다.
라이마의 운명표식은 끊어지지 않은 채, 다만 조금 느슨해졌다.
숲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막 뒤로 물러났다.
무대에는 흙냄새가 조금 남았다.
피와 젖은 나무와, 막 데운 술의 냄새가 함께.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탑 앞에 내려놓았다.
가면에는 이제 세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네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바깥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교회의 종처럼 들렸다.
그러나 곧 다른 소리로 변했다.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은이 녹는 소리.
풀무가 숨을 쉬는 소리.
작은 망치가 정교하게 두드리는 소리.
숲의 냄새가 사라진 자리에 따뜻한 금속 냄새가 퍼졌다.
검은 탑의 벽에 은빛 꽃무늬가 피어났다.
바닥에는 둥근 연금진이 그려졌다.
천장에서는 작은 은방울 같은 빛들이 내려왔다.
객석 어딘가에서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힌 작은 은꽃이 희미하게 빛났다.
푸리나는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따뜻해졌다.
“만들어진 사람.”
복수의 왕
숲이 무대 위로 자라났다.
처음에는 냄새였다.
축축한 흙.
젖은 나무껍질.
늪의 물기.
오래된 피.
불탄 집의 재가 비를 맞은 뒤에야 내는, 식어버린 냄새.
그리고 다음은 소리였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진흙이 말굽을 붙잡는 소리.
어딘가에서 활시위가 낮게 당겨지는 소리.
누군가 숨을 죽이는 소리.
검은 탑의 벽은 천천히 갈라졌다.
제1막에서는 책장이 되었고, 제2막에서는 무너진 황궁이 되었던 탑.
이번에는 나무껍질이 되었다.
굵은 뿌리가 무대 바닥을 파고들었다.
검은 막은 숲의 그림자로 변했고, 탑의 창살은 뒤엉킨 나뭇가지가 되었다.
조명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극장의 조명처럼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었다.
창백하고 차갑고, 조금은 미친 듯한 달빛.
그 달빛 아래에서 숲은 숨을 쉬었다.
나무 사이로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농부.
사냥꾼.
목동.
숲길을 아는 아이.
등에 아기를 업은 여자.
창 대신 낫을 든 노인.
그들은 군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보다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두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첫 번째 꿈은 기록된 아이의 꿈이었다.
두 번째 꿈은 천명을 믿은 황제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꿈이 시작되려 했다.
푸리나는 조용히 선언했다.
“세 번째 꿈.”
달빛이 숲 중앙으로 모였다.
“복수의 왕.”
그 말이 떨어지자, 숲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민다우가스.
리투아니아의 시조.
불탄 마을과 약탈당한 부족과 끌려간 아이들의 울음 위에서, 흩어진 숲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은 왕.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대신 늑대 가죽을 어깨에 걸쳤다.
손에는 피 묻은 창이 있었다.
그의 창은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었다.
누가 마을을 불태웠는지.
누가 말을 몰고 왔는지.
누가 항복한 뒤에도 빼앗았는지.
누가 아이를 데려갔는지.
그 모든 것을 잊지 않는 창.
민다우가스는 숲 한가운데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만으로도 숲 전체가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의 등 뒤로 다섯 개의 표식이 떠올랐다.
달.
숲.
죽음.
태양.
운명.
먼저, 창백한 달이 내려앉았다.
메눌리스의 달표식.
달빛이 숲에 깔리자 리투아니아인들의 몸이 사라졌다.
그들은 숨은 것이 아니었다.
밤이 그들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였다.
달빛은 침착했다.
그러나 그 침착함 아래에는 광기가 있었다.
침략받은 자가 오래 품은 분노.
너무 오래 울다 마침내 울음을 멈춘 눈동자.
다음으로, 숲이 깊어졌다.
메데이나의 숲표식.
나무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었다.
성벽이었다.
창살이었다.
피난로였다.
사냥터였다.
침입한 자의 길을 헷갈리게 하고, 도망치는 자에게는 길을 열어주며, 리투아니아인의 발걸음에는 뿌리를 비켜주는 숲.
세 번째로, 땅 아래에서 죽음의 기운이 올라왔다.
파툴라스의 죽음표식.
그것은 화려한 저주가 아니었다.
적의 말발굽 아래 진흙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
갑옷 틈으로 스며드는 식은 기운.
기병의 호흡이 한 박자 늦어지는 것.
돌격의 속도가 조금씩 죽어가는 것.
네 번째로, 아주 희미한 태양이 숲속 사람들의 가슴에서 켜졌다.
사울레의 태양표식.
그 태양은 한낮처럼 밝지 않았다.
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태양은 농부와 사냥꾼과 목동과 아이를 하나의 전투형제로 묶었다.
그들은 명령을 받는 병사가 아니라, 같은 아침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실이 숲 전체를 엮었다.
라이마의 운명표식.
흩어진 소부대들이 서로의 위치를 알았다.
울음도 함성도 없이, 각자 정해진 자리에 섰다.
운명은 그들을 묶었지만, 그들의 발을 대신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섯 표식이 하나로 엮였다.
달은 숨기고.
숲은 삼키고.
죽음은 갑옷 틈에 스며들고.
태양은 백성을 전투형제로 묶고.
운명은 흩어진 숨을 하나의 전장으로 이었다.
민다우가스가 창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숲을 지나갔다.
“리투아니아는 평야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부터.
쿵.
쿵.
쿵.
“리투아니아는 성문 앞에서 명예를 논하지 않는다.”
말발굽은 가까워졌다.
“리투아니아는 침략자를 숲으로 부른다.”
검은 기병들이 무대 바깥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몽골처럼 보였다.
기사단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약탈자였고, 때로는 세금 징수병이었고, 때로는 신의 이름을 단 군대였다.
그러나 오늘 그들의 깃발에는 아무 문장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침략자였다.
이름보다 먼저 발굽으로 오는 자들.
말하기 전에 불태우는 자들.
항복을 요구하고, 항복 뒤에도 빼앗는 자들.
그들이 숲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숲은 문을 닫았다.
민다우가스가 낮게 말했다.
“《기사사냥꾼》.”
그 순간, 리투아니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말이 늪에 빠졌다.
기수는 고삐를 당겼지만 늦었다.
진흙은 말의 무릎을 삼켰고, 파툴라스의 죽음표식은 말의 힘줄을 식게 만들었다.
두 번째 기사가 구하러 다가왔다.
그 순간 나무 위에서 화살이 내려왔다.
화살은 목을 노리지 않았다.
갑옷과 갑옷 사이.
팔꿈치 안쪽.
안장끈.
투구 아래 시야.
기사의 명예를 상대하지 않는 화살이었다.
생존하기 위해 배운 화살.
세 번째 기병은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메데이나의 숲표식 아래 나무들이 길을 바꾸었다.
들어온 길은 사라지고, 나가야 할 길에는 뿌리가 솟았다.
네 번째 기병은 횃불을 들었다.
숲을 태우려 했다.
그 순간 메눌리스의 달표식이 그의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는 한순간 자신이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는지 잊었다.
횃불은 아군의 말꼬리에 닿았다.
혼란.
비명.
그리고 숲속에서 리투아니아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 사람이 창을 찔렀다.
다음 순간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 말의 다리를 베었다.
다음 순간 늪 뒤로 물러났다.
농부가 낫으로 기사의 허벅지를 베고, 목동이 돌팔매로 말의 눈을 맞추고, 사냥꾼이 나무 위에서 두 번째 화살을 준비했다.
사울레의 태양표식이 그들의 가슴에서 낮게 빛났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었다.
전투형제였다.
리투아니아의 숲은 기사에게 정정당당한 전장을 주지 않았다.
리투아니아는 침략자의 전장 규칙을 거부했다.
민다우가스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다.
복수의 쾌감도 없었다.
그보다 깊은 것이 있었다.
오래 불탄 자의 확신.
다시는 짓밟히지 않겠다는 맹세.
그때 숲의 다른 편에서 별빛 하나가 떨어졌다.
아스테르다스가 걸어 나왔다.
그는 무대 위로 달려오지 않았다.
그의 걸음은 조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걸음은 낙하처럼 보였다.
별이 땅에 닿기 직전의 속도를 인간의 몸 안에 접어 넣은 것처럼.
아스테르다스는 민다우가스 곁에 섰다.
그는 먼저 전투를 보았다.
“잘 먹히고 있군.”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아스테르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은 궤도를 잃었어. 말은 늪에 묶였고, 기사들은 달빛을 너무 쉽게 믿고 있어.”
그는 잠시 웃었다.
그 웃음은 밝았다.
그러나 그 밝음은 가벼운 햇빛이 아니라, 대기권을 지나며 타오르는 별빛에 가까웠다.
“민다우가스. 이 숲은 네가 만든 답이야.”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답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래. 생존이지.”
아스테르다스는 숲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생존이 너무 오래 칼 모양이면, 아이들은 글자를 칼끝으로만 배우게 돼.”
민다우가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나를 훈계하러 왔나.”
“아니.”
아스테르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네 옆에 떨어지러 왔지. 늘 그랬듯이.”
그 말에 숲의 달빛이 아주 잠시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 순간, 숲의 가장 깊은 그림자 속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늙은 왕도, 별을 읽는 점성술사도, 제국의 망령도 아니었다.
그는 불탄 마을의 연기처럼 보였다.
또는 죽은 조상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또는 원한이 왕관을 쓴 모습처럼 보였다.
그가 민다우가스에게 속삭였다.
“저 말을 듣지 마라.”
아스테르다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바실리오는 민다우가스의 등 뒤에 섰다.
“복수를 멈추는 자는 죽은 자를 배신한다.”
숲속에서 낮은 울음이 들렸다.
아이의 울음.
여인의 울음.
말발굽에 짓밟힌 자의 숨.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본 사람의 목소리.
민다우가스의 손이 창대를 세게 쥐었다.
바실리오는 계속 말했다.
“네가 용서하는 순간, 침략자들은 돌아온다.
네가 칼을 내리는 순간, 그들은 네 아이들을 데려간다.
네가 복수 이후의 나라를 꿈꾸는 순간, 복수해야 할 이유를 잊는다.”
그림자는 다섯 표식을 가리켰다.
“달은 숨기라고 했다.
숲은 사냥하라고 했다.
죽음은 적의 발목에 스며들라고 했다.
태양은 모든 백성을 전투형제로 만들라고 했다.
운명은 네 손에 복수의 길을 묶었다.”
그 목소리는 점점 깊어졌다.
“그렇다면 왕이여.
너는 왜 멈추려 하는가?”
민다우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여러 장면이 펼쳐졌다.
불탄 마을.
끌려간 아이들.
사울레의 들판.
3000명의 기사를 도살했다는 전승.
리투아니아의 아이들이 숲에서 활을 배우는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수를 가르치느라 웃는 법을 잊은 아이들의 모습.
민다우가스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 눈을 멈추었다.
푸리나는 무대 가장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 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지금은 네 막이 아니야.”
푸리나의 발이 멈췄다.
죠니는 무대를 바라본 채 말했다.
“저건 저 사람이 골라야 해.”
푸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명을 들고 있는 사람은 어둠 속의 사람을 보면 조명을 비추고 싶어진다.
상처 입은 사람을 보면, 그 상처에도 이름을 붙이고 장면을 주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무대 위에 올리기 전에, 먼저 그 상처를 가진 사람이 자기 손의 칼 무게를 느껴야 했다.
하융은 회색 창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창이 있었다.
복수로 나라가 살아남은 창.
복수를 잊어 다시 불탄 창.
복수가 나라를 집어삼킨 창.
복수를 칼로 남기고, 식탁과 축제를 되찾은 창.
하융은 아주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복수가 나라를 살렸소.”
그는 다른 창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복수를 잊은 탓에 다시 불탔소.”
또 다른 창.
“어느 창에서는 복수가 나라를 먹었소.”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여기서는?”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흔들리고 있소.”
그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왕의 손 안에서.”
바실리오는 민다우가스에게 속삭였다.
“복수는 네 왕좌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숲 한가운데에 왕좌가 나타났다.
그 왕좌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아니.
창대로 되어 있었다.
수많은 창.
부러진 화살.
죽은 침략자의 갑옷 조각.
리투아니아인의 피 묻은 맹세.
불탄 집의 기둥.
그것들이 얽혀 왕좌를 이루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앉아라.
그것이 네가 세운 나라다.”
민다우가스의 발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순간, 아스테르다스가 움직였다.
그는 민다우가스를 붙잡지 않았다.
말로 막지도 않았다.
한 걸음.
그가 내디딘 발은 무대의 바닥을 디뎠다.
그러나 모두가 느꼈다.
그것은 걸음이 아니라 낙하였다.
별이 궤도를 바꿔, 땅에 박히는 순간.
아스테르다스는 민다우가스의 창끝과 왕좌 사이, 그 아주 좁은 틈에 섰다.
별빛이 바닥에 둥근 흔적을 남겼다.
왕좌로 향하던 복수의 궤도가 아주 조금 비껴났다.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이 전장이 나라가 되면 안 돼.”
민다우가스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비켜라.”
“비킬 거야.”
아스테르다스는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왕좌와 칼을 구분하면.”
바실리오가 비웃었다.
“별 하나가 숲의 원한을 막을 수 있느냐?”
아스테르다스는 그를 보지 않았다.
“막는 게 아니야.”
그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떨어지는 별은 길을 끊기도 하지만, 밤에 있는 사람에게 방향을 보여주기도 하지.”
민다우가스는 침묵했다.
그때 바실리오가 더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은 자들이 네 뒤에 있다.”
숲 아래에서 울음이 커졌다.
“불탄 마을이 네 뒤에 있다.
끌려간 아이들이 네 뒤에 있다.
돌아오지 못한 형제들이 네 뒤에 있다.”
그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겠느냐.
복수다.
그들이 네게 무엇을 요구하겠느냐.
복수다.
그러니 왕이여, 망설이지 마라.”
민다우가스의 손이 창대를 세게 쥐었다.
그 말은 전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죽은 자들 중에는 분명 복수를 바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기 집을 불태운 자의 목을.
자기 아이를 끌고 간 자의 피를.
자기 이름을 진흙에 짓밟은 자의 비명을.
그렇기에 바실리오의 말은 위험했다.
거짓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진실의 일부만을 왕좌에 앉히는 일이었다.
그때 무대 아래에서 검은 물소리가 들렸다.
바다는 없었다.
그러나 물소리가 났다.
깊고, 낮고, 차가운 물.
숲의 뿌리 아래.
늪의 바닥 아래.
말발굽에 짓밟힌 흙 아래.
그보다 더 아래에서.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배우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조명을 받기 위해 걸어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미 무대 아래에 있던 침묵이 사람의 형태를 얻어 올라온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 검은 바다가 열렸다.
물의 바다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끊어진 실.
돌아오지 못한 전령의 숨.
불탄 마을의 마지막 침묵.
승리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빈자리.
스러져간 이들이 남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결말들.
그 모든 것이 가라앉은 심연.
《가장 낮은 바다》.
숲의 달빛이 그 바다 위에 닿았다.
그러나 바다는 빛나지 않았다.
그저 더 깊어졌다.
아레가 말했다.
“그 말은 절반만 맞단다.”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았다.
“죽은 자를 부정하려는가?”
“아니.”
아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부정하고 있지.”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가장 낮은 바다 아래에서 실들이 떠올랐다.
수백.
수천.
아주 가느다란 실들.
각 실의 끝에는 이름이 있었다.
어떤 이름은 선명했다.
어떤 이름은 흐릿했다.
어떤 이름은 찢어진 천 조각처럼 겨우 남아 있었다.
어떤 이름은 아직 찾지 못해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아레의 눈이 깊어졌다.
《추도자》.
그것은 미래를 보는 힘이 아니었다.
아레가 기억하는 것은 앞으로 올 결말이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결말들이었다.
후대의 마가트로이드들이 겪고, 가라앉히고, 잊지 않은 수많은 전쟁.
끊어진 실.
침묵으로 내려앉은 이름들.
지휘관이 결코 “피해”라는 한 글자로 묶어서는 안 되는 결말들.
아레는 그 결말들을 하나의 목소리로 합치지 않았다.
실 하나가 떠올랐다.
불탄 집 앞에서 죽은 사냥꾼의 기억이었다.
그는 복수를 바랐다.
실 하나가 더 떠올랐다.
끌려간 아이를 찾지 못하고 죽은 어머니의 기억이었다.
그녀는 자기 아이가 살아 있기를 바랐다.
또 다른 실.
늪에서 죽은 노인의 기억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봄 수확을 걱정했다.
또 다른 실.
칼을 쥔 채 죽은 젊은 전사의 기억이었다.
그는 침략자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기 동생이 평생 칼만 쥐고 살지는 않기를 바랐다.
또 다른 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아이의 기억.
그 아이는 복수도 안식도 말하지 못했다.
그저 추웠다.
아레는 그 실들을 당기지 않았다.
명령하지도 않았다.
죽은 자를 다시 무대 위 배우로 세우지도 않았다.
병력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산 자의 분노를 장식하는 깃발로 만들지도 않았다.
다만 엉킨 실을 풀었다.
그 침묵이 한 가지 말만 하도록 강요받지 않게.
바실리오가 낮게 말했다.
“저들은 복수를 바란다.”
아레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떤 이는 그렇겠지.”
“그럼 충분하다.”
“아니.”
아레의 그림자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녀의 뒤에 암영이 내려앉았다.
정지.
침묵.
쇠퇴.
경계.
죽은 자를 끌어올리는 대신, 그 침묵의 업을 대가로 삼는 계약의 기척.
《암영과의 계약》.
아레의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복수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안식을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제 아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집의 난로가 다시 피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민다우가스를 보았다.
“죽은 자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란다.”
민다우가스는 말을 잃었다.
아레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 왕이여.
죽은 자의 침묵을 하나의 명령으로 묶지 말거라.”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죽은 자들을 잊으라는 것이냐?”
아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잊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손끝에서 가장 낮은 바다의 실들이 천천히 정렬되었다.
그것은 군대를 움직이는 지휘계가 아니었다.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전열도 아니었다.
산 자들이 죽은 자의 이름을 자기 분노의 깃발로만 쓰지 못하게 하는 정렬이었다.
아레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온당한 결말을 애도하는 것》.
그 순간, 바실리오가 만든 복수의 왕좌가 흔들렸다.
죽은 자의 침묵이 산 자의 왕좌로 도용되는 결말.
그 결말은 온당하지 않았다.
아레는 그것을 부수지 않았다.
그저 애도했다.
온당하지 않은 결말은 애도 앞에서 잠시 힘을 잃었다.
창대로 만들어진 왕좌의 일부가 무너졌다.
창이 다시 창으로 돌아갔다.
죽은 자의 이름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레가 말했다.
“이름으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들이 빼앗긴 삶으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들이 마시지 못한 술, 보지 못한 아이의 성장, 돌아가지 못한 집의 난로로 기억하라는 뜻이란다.”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복수는 기억의 한 형태일 수 있단다.
그러나 복수만 남으면, 죽은 이는 죽은 순간에 묶이고 말지.”
숲이 침묵했다.
민다우가스는 가장 낮은 바다를 보았다.
그 바다는 그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가 지키지 못한 사람들과, 그가 복수의 이름으로 너무 쉽게 한 문장으로 묶어버릴 뻔한 침묵들이 있었다.
그는 창을 내려다보았다.
창은 여전히 필요했다.
침략자는 다시 올 것이다.
말발굽은 다시 숲 가장자리를 밟을 것이다.
기사와 약탈자와 세금 징수병과 신의 이름을 단 폭력은 다른 깃발을 달고도 돌아올 것이다.
그때 창이 없다면 리투아니아는 다시 불탈 것이다.
민다우가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창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창을 들고, 복수의 왕좌를 바라보았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앉아라.”
민다우가스가 대답했다.
“아니다.”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숲 전체가 들었다.
“복수는 왕좌가 아니다.”
그는 창을 땅에 꽂았다.
“복수는 칼이다.”
메눌리스의 달빛이 흔들렸다.
메데이나의 숲이 잎을 떨었다.
파툴라스의 죽음이 창끝에서 낮게 울었다.
사울레의 태양이 조금 더 따뜻하게 빛났다.
라이마의 운명표식은 빡빡하게 당겨져 있던 실을 아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민다우가스는 바실리오를 향해 말했다.
“칼은 쥐어야 한다.
침략자가 온다면, 나는 쥘 것이다.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데려가려 한다면, 숲은 문을 닫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 말을 빼앗고 집을 태우려 한다면, 늪은 그들의 말발굽을 삼킬 것이다.”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말은 무서웠다.
민다우가스는 복수의 피를 부정하지 않았다.
침략자를 사냥한 사실을 사과하지 않았다.
자기 나라가 피해자라는 말 속에만 머물 생각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침략자를 죽일 왕이었다.
하지만 다음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칼 위에 앉지는 않는다.”
아스테르다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민다우가스는 숲속 사람들을 보았다.
“모든 마을에 활을 가르쳐라.”
숲속의 리투아니아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모든 길에 피난처를 만들고, 모든 늪길에 함정을 파라.
침략자가 온다면, 아이도 노인도 길을 알게 하라.
숲은 우리의 성벽이고, 밤은 우리의 문이다.”
바실리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민다우가스의 다음 말에 그 미소는 멈췄다.
“그리고 모든 축제를 되살려라.”
숲이 흔들렸다.
“복수를 맹세한 자리에서만 모이지 마라.
아이의 이름을 지은 날에도 모여라.
첫 수확에도 모여라.
누군가가 먼 길에서 돌아온 날에도 모여라.”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밤에는, 그가 좋아하던 술도 함께 따르라.”
가장 낮은 바다의 실 하나가 조용히 빛났다.
“아이들에게 침략자를 죽이는 법만 가르치지 마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가르쳐라.”
그 순간, 사울레의 태양표식이 뚜렷하게 밝아졌다.
밤은 끝나지 않았다.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숲속 사람들의 가슴에 켜진 작은 태양들이 서로를 알아보았다.
백성은 무기가 아니었다.
백성은 아침이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뒷걸음질쳤다.
“네가 약해졌다.”
민다우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는 숲속에서 쓰러진 침략자의 갑옷을 보았다.
“나는 여전히 죽일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숲속 사람들을 보았다.
“그러나 죽이는 것만으로 다스리지는 않을 것이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복수의 칼을 왕좌 아래에 둘 수 있겠느냐?”
민다우가스는 대답했다.
“매일 다시 놓아야겠지.”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현실적이었다.
“칼은 손으로 돌아오려 할 것이다.
원한은 왕좌 위로 기어오르려 할 것이다.
침략자가 다시 오면, 숲은 다시 피를 먹을 것이다.”
그는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그러니 내 옆에 떨어져라.”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어.”
민다우가스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네 별은 시끄럽다.”
“살아 있다는 뜻이지.”
“가끔은 너무 살아 있다.”
“그건 칭찬으로 들을게.”
그 짧은 농담이 숲속을 지나갔다.
그것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침략자를 없애지도 않았다.
복수의 역사를 지워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웃음이 있었기 때문에, 리투아니아는 전쟁터만은 아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박수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치지 않았다.
이 막은 박수칠 때가 아니었다.
아레의 가장 낮은 바다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푸리나는 그 바다를 보았다.
무대 위에 올리지 않는 것도 기억일 수 있다.
배우로 세우지 않는 것도 존중일 수 있다.
모든 침묵에 대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침묵은 침묵으로 지켜주는 것.
그것도 극장주가 배워야 할 일이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참았네.”
푸리나는 작게 대답했다.
“응.”
“잘했어.”
푸리나가 죠니를 보았다.
“지금 칭찬이야?”
“그래.”
“너무 짧지 않아?”
“그게 칭찬이니까.”
푸리나는 잠시 웃을 뻔했다.
그러나 무대 중앙의 민다우가스를 보고, 웃음을 조용히 삼켰다.
그녀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숲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푸리나는 가면을 보았다.
가면에는 두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그리고 세 번째 단어가 천천히 새겨졌다.
칼.
푸리나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세 번째 꿈은 복수였어.”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복수는 왕좌가 아니었지.”
민다우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꿈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왕이 돼.
기록의 왕.
전쟁의 왕.
복수의 왕.”
그녀는 가면을 천천히 돌렸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야 하는 것이, 정말 왕 자신인지 묻지 않으면 안 돼.
때로 왕좌에 남아야 하는 것은, 왕이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내일일지도 모르니까.”
죠니가 팔짱을 낀 채 낮게 말했다.
“오늘은 좀 덜 과장했네.”
푸리나는 힐끗 보았다.
“고마워?”
“이번엔 칭찬 맞아.”
푸리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세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복수의 왕.
그리고 그 아래.
칼은 왕좌가 아니다.
아레의 가장 낮은 바다는 천천히 가라앉았다.
실들은 다시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죽은 자들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
병력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엉킨 복수의 함성이 아니라, 각자의 침묵으로 남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수많은 창이 있었다.
복수로 나라가 살아남은 창.
복수를 잊어 다시 불탄 창.
복수가 나라를 집어삼킨 창.
복수를 칼로 남기고, 식탁과 축제를 되찾은 창.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아졌다.
그 창에서는 숲속 마을에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활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활을 내려놓은 뒤에는 빵을 먹었다.
늙은 여인은 죽은 아들의 이름으로 술을 따랐다.
그리고 그 술잔 옆에는 빈 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는 손자도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비껴섰소.”
푸리나가 물었다.
“좋은 쪽으로?”
하융은 오래 생각했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소.
복수의 칼은 밤마다 손을 부르니.”
그는 민다우가스와 아스테르다스를 보았다.
“허나 칼을 놓을 식탁이 생겼다면, 그 또한 길이겠지.”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숲을 보았다.
그리고 숲속에서, 아이들이 활을 내려놓고 빵을 먹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뒤, 그는 아주 낮게 말했다.
“그 길을 지켜라.”
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숲에게.
아스테르다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리투아니아의 아이들에게.
달빛이 천천히 걷혔다.
메눌리스의 달표식이 흐려졌다.
메데이나의 숲표식이 무대 뒤로 물러났다.
파툴라스의 죽음표식이 창끝에서 가라앉았다.
사울레의 태양표식은 마지막까지 작게 남아 있다가, 마을의 등불처럼 흩어졌다.
라이마의 운명표식은 끊어지지 않은 채, 다만 조금 느슨해졌다.
숲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막 뒤로 물러났다.
무대에는 흙냄새가 조금 남았다.
피와 젖은 나무와, 막 데운 술의 냄새가 함께.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탑 앞에 내려놓았다.
가면에는 이제 세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네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바깥에서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교회의 종처럼 들렸다.
그러나 곧 다른 소리로 변했다.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은이 녹는 소리.
풀무가 숨을 쉬는 소리.
작은 망치가 정교하게 두드리는 소리.
숲의 냄새가 사라진 자리에 따뜻한 금속 냄새가 퍼졌다.
검은 탑의 벽에 은빛 꽃무늬가 피어났다.
바닥에는 둥근 연금진이 그려졌다.
천장에서는 작은 은방울 같은 빛들이 내려왔다.
객석 어딘가에서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힌 작은 은꽃이 희미하게 빛났다.
푸리나는 그 빛을 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따뜻해졌다.
“만들어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