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8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13:59:24
제4막
만들어진 사람
숲의 냄새가 사라진 자리에, 은이 녹는 냄새가 남았다.
피와 젖은 나무와 데운 술의 냄새가 천천히 물러가고, 그 대신 따뜻한 금속의 숨결이 무대 위로 번졌다. 검은 탑의 나무껍질은 은빛으로 벗겨졌고, 갈라진 틈마다 작은 꽃무늬가 피어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장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알았다.
그 꽃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은꽃.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머리카락에 남아 있었다는, 어느 작은 약속의 증거.
탑의 바닥에는 둥근 연금진이 그려졌다.
풀무가 천천히 숨을 쉬었다.
작은 망치가 규칙적으로 금속을 두드렸다.
녹은 은은 도랑처럼 흐르다가, 다시 실처럼 가늘어지고, 다시 혈관처럼 나뉘었다.
무대의 천장에서는 은방울 같은 빛들이 내려왔다.
빛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공방 어딘가에서 작은 심장소리가 났다.
쿵.
쿵.
쿵.
그것은 인간의 심장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더 맑고, 더 금속적이며, 더 조심스러운 박동.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가면에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네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은빛 공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번째 꿈.”
조명이 따뜻한 은색으로 내려왔다.
“만들어진 사람.”
그 말과 함께, 무대 한가운데로 라이자가 걸어 나왔다.
라이자는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공방 전체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풀무의 숨이 부드러워졌다.
은빛 연금진이 낮게 빛났다.
흐르던 은이 발밑에서 길을 만들었다.
벽의 은꽃들이 하나씩 피어났다.
라이자의 머리카락에 꽂힌 작은 은꽃이 반짝였다.
그녀는 그 꽃을 잠시 만졌다.
오래전 꿈속에서 만난 은의 정령.
깨어난 뒤에도 남아 있던 작은 증거.
그리고 그 증거 하나 때문에, 꿈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사람.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꿈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짜로 만들고 싶었어.”
은빛 공방이 대답하듯 울렸다.
그녀의 가슴 근처에서 따뜻한 은빛 핵이 박동했다.
은의 심장.
그 심장은 단순한 동력로가 아니었다.
보헤미아가 받은 친절을 다음 사람에게 흘려보내려는 맹세.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과 있을 곳을 잃은 것들을 끌어안기 위한 따뜻한 핵.
라이자가 손을 펼치자, 녹은 은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은은 차갑지 않았다.
성스러웠고, 부드러웠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빛났다.
성은聖銀.
그 성은은 칼이 될 수 있었다.
방패가 될 수 있었다.
갑옷이 될 수 있었다.
군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것은 먼저 손이 되었다.
작은 손.
은빛 손가락이 공중에서 만들어졌다.
그다음 팔.
어깨.
가슴.
목.
얼굴.
은으로 만들어진 아이가 무대 중앙에 섰다.
아이는 완전히 은색이 아니었다.
피부 아래에는 은빛 혈관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작은 연금진이 깃든 듯했다. 심장 자리에는 은의 핵이 박동했다.
쿵.
쿵.
쿵.
그 아이의 몸속에서 성은의 혈맥이 열렸다.
성은의 혈맥.
그것은 단순한 회로가 아니었다.
지식.
기술.
심상각인.
보헤미아의 혈맥.
라이자가 꿈꾸었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의 가능성.
하지만 아이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는 작은 금속 표식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은인銀人 제1개체.
푸리나의 눈썹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레이는 벌써 장부를 펼쳤다.
레이튼은 그 표식을 보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낮게 말했다.
“시작부터 기분 나쁜 이름이네.”
그 말에 은인의 눈이 죠니를 향했다.
“기분 나쁜…… 이름인가요?”
첫 목소리였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은인의 목소리는 어색했다.
그러나 인형 같지는 않았다.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자기 목소리가 자기 것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느렸다.
죠니는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이름이라기보단 물건표 같잖아.”
은인은 자기 목의 표식을 만졌다.
“저는 물건인가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너무 곧았다.
그때 공방의 은빛 벽 뒤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도, 점성술사도, 제국의 망령도, 복수의 조상도 아니었다.
그는 장인처럼 보였다.
아니, 장인이라기보다는 회계사와 병참관과 마법공학자가 합쳐진 얼굴이었다.
손에는 설계도가 있었고, 허리에는 자와 칼이 걸려 있었으며, 눈에는 효율을 재는 차가운 빛이 있었다.
그가 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건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다.”
라이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바실리오는 계속 말했다.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다면, 쓰임이 있다.
쓰임이 있다면, 소유와 배치와 운용이 가능하다.”
그는 라이자를 보았다.
“너는 은으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훌륭한 꿈이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된 순간, 그것은 병참표 위에 올라간다.”
공방의 벽에 도표가 떠올랐다.
은인 한 명의 생산 비용.
전투 지속 시간.
갑옷 대체 가능성.
기사 열 명과의 전력 비교.
피로도.
회복 비용.
재생산 가능성.
전장 투입 기대값.
은인은 그 도표를 바라보았다.
자기 몸이 숫자로 분해되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은의 심장은 뛰겠지.
하지만 그 심장을 넣은 것은 너다.
성은의 혈맥은 흐르겠지.
하지만 그 혈맥을 설계한 것은 너다.
그러니 창조자여.”
그는 라이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목적을 정해도 된다.”
라이자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녀는 곧바로 부정하고 싶었다.
그건 아니라고.
은인은 병기가 아니라고.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지만 바실리오의 말은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다.
성은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은인은 병사가 될 수 있다.
보헤미아가 전쟁 속에 있다면, 라이자는 자기 손으로 태어나게 한 은인들에게 싸움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라 해서 전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을 무엇으로 부르느냐였다.
그때 벨라 4세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공방 바닥 일부가 헝가리의 평원처럼 변했다. 먼 곳에 요새의 그림자가 하나, 둘, 셋 떠올랐다. 그리고 그 요새들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방어망을 이루었다.
벨라의 등 뒤로 왕관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하늘.
대지.
사람.
세 주권이 왕관 하나에 걸려 있었다.
《성 이슈트반의 왕관》.
그녀가 서자 무대의 공기가 달라졌다.
공방은 여전히 공방이었지만, 동시에 왕국의 방어 회의실이 되었다.
벨라는 라이자를 보았다.
“보이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넓고 낮았다.
“전쟁은 물어보지 않고 온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뒤편에 일백요새의 희미한 윤곽이 떠올랐다.
헝가리 전체를 권역으로 삼는 재건 군주의 기척.
《마자르의 여왕》.
벨라는 은인을 보았다.
“저 아이가 사람이라면, 지켜야 한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싸울 수 있다면, 물어야 한다.
전쟁이 올 때, 저 힘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
라이자는 입술을 다물었다.
벨라의 말은 잔혹했다.
하지만 군주의 말이었다.
피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하는 자.
내일 올 기병을 막아야 하는 자.
백성의 생존을 계산해야 하는 자의 말.
“은인 하나가 병사 열을 대신할 수 있다면.”
벨라가 말했다.
“성벽 하나를 하루 더 버티게 할 수 있다면.
피난민 백 명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때도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무대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천천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아름다웠다.
은으로 만들어졌으나, 떨리고 있었다.
“저는……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나요?”
바실리오가 즉시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그렇다.”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하지만 그 부정은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벨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싸우지 못하게 할 것이냐?”
라이자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벨라는 차갑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왕국의 무게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 말은 아름다운 상속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벽의 균열, 불탄 곡창, 피난민의 배급, 무너진 요새의 돌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벨라의 시선이 은인에게 향했다.
“사람이라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책임도 있다.”
그 말은 이번 막의 첫 번째 칼이었다.
라이자를 향한 칼.
그리고 은인을 향한 칼.
그때 소피아 베아트리체가 공방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왕국의 무게를 들고 오지 않았다.
대신 작은 공방 앞치마를 입고, 손에는 이상한 렌즈와 황금빛 작은 도구를 들고 있었다.
“잠깐만요.”
벨라가 그녀를 보았다.
“소피아.”
“어머니, 이건 조금 더 봐야 해요.”
소피아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황금의 눈》.
그 눈은 성은의 표면만 보지 않았다.
구성.
결.
회로.
혈맥.
핵.
심상각인.
은의 박동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과 기술을 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단순히 “병기 운용 구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소피아가 은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분해하나요?”
소피아가 눈을 크게 떴다.
“네? 아니요!”
그녀는 손을 저었다.
“분해할 수 있다는 것과 분해해도 된다는 건 다르잖아요.”
그 말에 라이자가 소피아를 보았다.
소피아는 은인의 가슴 가까이에 렌즈를 가져갔다.
은의 심장이 박동했다.
쿵.
쿵.
쿵.
소피아가 조용히 말했다.
“만들어진 방식은 설명할 수 있어요.”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황금빛 연금진이 떠올랐다.
세계의 만상을 구성요소로 보고, 다시 정의하는 아이의 재능.
《그대 만상을 재정의하는 자》.
은인의 몸 주변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재료.
신성회로.
코어.
성은.
기술각인.
병기 후보.
인조 생명.
은의 병사.
창조물.
소피아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 맞는 말일 수도 있어요.”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
“그런데 전부 부족해요.”
바실리오의 미소가 멈췄다.
소피아는 은인의 심장 쪽을 가리켰다.
“이건 조제물이 아니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조제물이기도 한데…… 그걸로 끝나지 않아요.
만들어진 방식은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살아갈 이유까지 설명해주지는 않아요.”
은인이 소피아를 보았다.
소피아가 웃었다.
“재료로 볼 수 있다고 해서, 재료로만 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은 작았지만, 공방 전체를 흔들었다.
레이튼이 그때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바닥이 얇게 깔렸다.
천장에는 은빛 별들이 떠 있었다.
그러나 그 별들은 너무 빨리 이름 붙고 있었다.
병기.
창조물.
인형.
은의 병사.
제1개체.
레이튼은 그 별들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너무 빠르군요.”
그가 손끝을 들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은인 위에 붙어 있던 이름들이 흔들렸다.
병기라는 이름이 흐려졌다.
인형이라는 이름이 지워졌다.
제1개체라는 표식이 갈라졌다.
그러나 “은인”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도구의 이름이 아니라, 태어난 방식과 공동체의 약속을 함께 담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레이튼이 물었다.
“저 존재는 병기입니까, 자식입니까, 시민입니까,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입니까?”
바실리오가 말했다.
“질문으로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질문만으로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는 은인을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이름은 본질이 말하기 전에 입을 막습니다.”
은인은 자기 목을 만졌다.
목에 걸려 있던 표식은 이제 비어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물었다.
“그럼…… 저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도.
벨라도.
소피아도.
푸리나도.
그때 죠니가 벽에 기대어 말했다.
“아프냐?”
은인이 그를 보았다.
“네?”
죠니는 손가락으로 은인의 가슴을 가리켰다.
“거기. 무섭거나, 답답하거나, 뭐 그런 거 있냐고.”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있어요.”
“그럼 그건 진짜야.”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맞으면 아프고, 무서우면 무서운 거야.
네가 은으로 만들어졌든, 꿈에서 나왔든, 그 아픔부터는 네 거야.”
은인은 조용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죠니는 덧붙였다.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정해.”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너, 가끔 정말 배우 같아.”
죠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욕이야?”
“칭찬인데?”
“그럼 더 기분 이상하네.”
공방 한쪽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바실리오는 웃지 않았다.
그는 라이자를 향해 다가왔다.
“창조자여.”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그대의 주변 인물들은 아름다운 말을 한다.
그러나 공방은 아름다운 말로 돌아가지 않는다.
은은 캐내야 하고, 제련해야 하며, 심장은 넣어야 한다.
혈맥은 설계해야 한다.
기억은 각인해야 한다.”
그는 은인을 가리켰다.
“그 아이가 자기 이름을 말한다 해도, 그 이름을 말할 혀를 만든 것은 너다.
그 아이가 선택한다 해도, 선택할 수 있는 회로를 넣은 것은 너다.”
라이자의 은의 심장이 무겁게 박동했다.
쿵.
쿵.
쿵.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러니 인정하라.
그 아이는 네 꿈의 산물이다.
네 선의의 결과다.
네 책임이고, 네 소유다.”
마지막 단어가 공방 전체를 차갑게 만들었다.
소유.
은인은 그 단어를 들었다.
그리고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성은을 빚었다.
이 손으로 은의 심장을 만들었다.
이 손으로 은인을 태어나게 했다.
이 손으로 가족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말 가족이었다면.
왜 목에는 번호가 걸려 있었을까.
왜 전쟁이 오면, 이 아이가 몇 명의 병사를 대신할 수 있는지 계산하게 될까.
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이렇게 쉽게 “내 것”이라는 말로 미끄러지는가.
라이자는 은인에게 다가갔다.
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 거리.
그 아주 작은 거리가, 라이자에게는 어떤 전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라이자가 말했다.
“나는…… 너를 꿈에서 시작했어.”
은인은 듣고 있었다.
“은의 정령이 말했어.
은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그때는 그 말이 너무 아름다웠어.
꿈에서 깨어났는데, 머리에 은꽃이 남아 있었고…… 나는 그걸 증거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의 은꽃을 만졌다.
“그래서 현실로 만들고 싶었어.
꿈속에서 들은 친절한 이야기를, 진짜로 만들고 싶었어.”
은인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저를 만들었나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대답은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어.”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라이자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말은, 네가 내 것이라는 뜻이 아니야.”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야.”
그 순간, 라이자의 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쿵.
공방의 성은이 일제히 빛났다.
쿵.
은인의 성은의 혈맥이 응답했다.
쿵.
무대 위에 떠 있던 성은들이 하나의 둥근 빛으로 모였다.
라이자가 손을 뻗었다.
성은은 칼이 되지 않았다.
방패가 되지 않았다.
군단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문이 되었다.
은빛 문.
태어나는 자가 지나가는 문.
라이자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나는 병기를 만든 게 아니야.”
성은의 문이 열렸다.
“나는 가족이 태어날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
성은의 혈맥이 은인의 몸속에서 더 깊게 흐르기 시작했다.
은의 심장이 단순한 코어가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는 박동으로 바뀌었다.
라이자가 선언했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그 순간 은인의 몸에서 은빛이 폭발하듯 퍼지지 않았다.
군단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병력이 늘지도 않았다.
전장의 숫자가 바뀌지도 않았다.
대신, 은인의 발밑에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사람의 그림자.
그는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온전히 섰다.
은으로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목적을 부여받은 병기가 아니라.
라이자의 꿈에서 태어났지만, 그 꿈을 넘어서 자기 삶을 가져야 할 한 사람으로.
공방의 은꽃들이 하나씩 피었다.
그때 무대 위에 따뜻한 빛이 내려왔다.
그 빛은 성은의 빛과 닮았지만, 조금 더 부드러웠다.
품처럼 넓고, 손처럼 따뜻했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
그녀는 거창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무대 위에 왕좌를 만들지도 않았고, 판결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은인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아팠구나?”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조심스럽게 팔을 벌렸다.
“만들어졌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조심히 안아야겠네.”
은인은 망설였다.
그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면.”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였다.
네가 원하면.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그를 안았다.
그 순간 공방의 성은들이 따뜻하게 울렸다.
보상은 거래가 아니었다.
포옹은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너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
그 말은 대사로 들리지 않았다.
품으로 들렸다.
바실리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상이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은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감상이 필요하단다.”
바실리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그의 논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훗날 전장을 거부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면?
보헤미아가 불타는데도, 자기 삶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도 라이자를 보았다.
벨라의 시선도 그들을 향해 있었다.
군주의 현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은인이 싸울 수 있다면, 싸우지 않을 권리도 있는가.
가족이라면, 국가가 불탈 때도 전장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있다.
라이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물어볼 거야.”
바실리오가 멈췄다.
“무엇을?”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네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리고 정말 싸우겠다면, 병기로 보내지 않을 거야.
스스로 선택한 사람으로 보낼 거야.”
벨라가 라이자를 오래 보았다.
“그 대답은 비효율적이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왕국은 때로 효율을 요구한다.”
“알아요.”
“그래도?”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그래도.”
벨라의 눈이 깊어졌다.
잠시 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지킬 성벽도 준비해야겠구나.”
그 말은 허락도, 비난도 아니었다.
군주의 인정에 가까웠다.
소피아가 작게 웃었다.
“어머니답네요.”
벨라는 소피아를 보았다.
“너는 네 공방을 정리해라.”
“방금 감동적인 장면이었는데요?”
“감동과 정리는 별개다.”
소피아는 입을 삐죽였다.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 웃음 덕분에 무대 위의 공기가 조금 풀렸다.
그때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그녀의 발밑에 아주 작게 켜졌다.
이번에는 망자의 문패가 아니었다.
빈 문패 하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패.
그레이는 은인 앞에 섰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은인은 자기 목을 만졌다.
거기에는 더 이상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병기 번호가 아니라요?”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름입니다.”
은인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는…… 아직 이름이 없어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빈칸으로 두겠습니다.”
은인이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이름은 대신 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비워둘 수는 있습니다.”
그 말에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병기 목록이 아니었다.
거주자 명부였다.
보헤미아의 은인으로 태어난 자.
자기 이름을 아직 찾지 못한 사람.
임시명 없음.
소속: 병기고 아님.
거주: 공방 옆 작은 방.
비고: 본인이 이름을 정할 때까지 문패 보류.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문패는 준비해두겠습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빈 문패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자리는 있었다.
은인은 그 빈 문패를 오래 보았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그를 놓아주었다.
라이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렸다.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따뜻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너는 그들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이자는 대답했다.
“매일 배워야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가볍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다는 마음은, 자꾸 내 것이라는 말로 바뀌려고 할 테니까.”
그녀는 은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매일 다시 물을 거야.
네 이름은 무엇인지.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것은 비효율이다.”
라이자는 웃었다.
“가족은 원래 비효율적이야.”
그 말에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보상이네.”
바실리오의 그림자는 은빛 꽃잎처럼 흩어졌다.
푸리나는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막 자신도 배운 것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세운다는 것.
배역을 준다는 것.
조명을 비춘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때로 선의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하기 전에 배역을 주면, 그것은 또 다른 번호표가 될 수도 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세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단어가 은빛으로 새겨졌다.
이름.
푸리나는 그 글자를 오래 보았다.
“네 번째 꿈은 만들어진 사람이었어.”
그녀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만들어진 사람은, 만들어진 목적만으로 끝나지 않았어.”
은인은 빈 문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이름을 말할 자리가 생기는 순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배우가 되기 시작했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배우라는 말은 꼭 넣어야 했냐?”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그건 내 버릇이야.”
“고치긴 글렀네.”
“대신 오늘은 조금 기다렸잖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건 인정.”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레이튼은 별들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소피아는 은인의 심장 쪽을 아직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라이자의 시선을 받고 황급히 렌즈를 내렸다.
벨라는 은인을 보며 말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면, 싸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라이자가 말했다.
“알아요.”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려운 일을 하겠구나.”
라이자는 미소 지었다.
“네.”
허그와 보상의 성좌의 품은 천천히 빛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공방에 남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능성이 있었다.
은인들이 병기로 정렬된 보헤미아.
은인을 만들지 못해 수많은 사람이 죽은 보헤미아.
은인들이 사람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자유 때문에 전쟁에서 갈등하는 보헤미아.
은인들이 자기 이름을 갖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공방을 떠나고, 때로는 돌아와 식탁에 앉는 보헤미아.
하융은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도 쉬운 길은 없소.”
푸리나가 물었다.
“그래도?”
하융은 빈 문패를 보았다.
“허나 빈칸이 있구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칸은 두려운 것이나, 길이기도 하오.
누군가 대신 적지 않는다면 말이오.”
푸리나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이제 가면에는 네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그리고 다섯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은빛 공방의 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풀무의 숨이 잦아들었다.
은꽃들은 닫히지 않았다.
그저 밤을 맞는 꽃처럼 조용히 빛을 줄였다.
그때, 무대의 다른 편에서 검은 먼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 아니었다.
고통을 무디게 하는 검은 먼지.
멀리서 검은 하늘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 하늘 한가운데, 작은 달이 떠올랐다.
푸리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통의 왕관.”
만들어진 사람
숲의 냄새가 사라진 자리에, 은이 녹는 냄새가 남았다.
피와 젖은 나무와 데운 술의 냄새가 천천히 물러가고, 그 대신 따뜻한 금속의 숨결이 무대 위로 번졌다. 검은 탑의 나무껍질은 은빛으로 벗겨졌고, 갈라진 틈마다 작은 꽃무늬가 피어났다.
처음에는 그것이 장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사람들은 알았다.
그 꽃들은 장식이 아니었다.
은꽃.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머리카락에 남아 있었다는, 어느 작은 약속의 증거.
탑의 바닥에는 둥근 연금진이 그려졌다.
풀무가 천천히 숨을 쉬었다.
작은 망치가 규칙적으로 금속을 두드렸다.
녹은 은은 도랑처럼 흐르다가, 다시 실처럼 가늘어지고, 다시 혈관처럼 나뉘었다.
무대의 천장에서는 은방울 같은 빛들이 내려왔다.
빛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공방 어딘가에서 작은 심장소리가 났다.
쿵.
쿵.
쿵.
그것은 인간의 심장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조금 달랐다.
더 맑고, 더 금속적이며, 더 조심스러운 박동.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가면에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네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은빛 공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번째 꿈.”
조명이 따뜻한 은색으로 내려왔다.
“만들어진 사람.”
그 말과 함께, 무대 한가운데로 라이자가 걸어 나왔다.
라이자는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오는 순간, 공방 전체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풀무의 숨이 부드러워졌다.
은빛 연금진이 낮게 빛났다.
흐르던 은이 발밑에서 길을 만들었다.
벽의 은꽃들이 하나씩 피어났다.
라이자의 머리카락에 꽂힌 작은 은꽃이 반짝였다.
그녀는 그 꽃을 잠시 만졌다.
오래전 꿈속에서 만난 은의 정령.
깨어난 뒤에도 남아 있던 작은 증거.
그리고 그 증거 하나 때문에, 꿈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사람.
라이자가 낮게 말했다.
“꿈에서 들은 이야기를, 진짜로 만들고 싶었어.”
은빛 공방이 대답하듯 울렸다.
그녀의 가슴 근처에서 따뜻한 은빛 핵이 박동했다.
은의 심장.
그 심장은 단순한 동력로가 아니었다.
보헤미아가 받은 친절을 다음 사람에게 흘려보내려는 맹세.
버려진 것과 태어나지 못한 것과 있을 곳을 잃은 것들을 끌어안기 위한 따뜻한 핵.
라이자가 손을 펼치자, 녹은 은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은은 차갑지 않았다.
성스러웠고, 부드러웠으며, 아주 조심스럽게 빛났다.
성은聖銀.
그 성은은 칼이 될 수 있었다.
방패가 될 수 있었다.
갑옷이 될 수 있었다.
군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것은 먼저 손이 되었다.
작은 손.
은빛 손가락이 공중에서 만들어졌다.
그다음 팔.
어깨.
가슴.
목.
얼굴.
은으로 만들어진 아이가 무대 중앙에 섰다.
아이는 완전히 은색이 아니었다.
피부 아래에는 은빛 혈관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작은 연금진이 깃든 듯했다. 심장 자리에는 은의 핵이 박동했다.
쿵.
쿵.
쿵.
그 아이의 몸속에서 성은의 혈맥이 열렸다.
성은의 혈맥.
그것은 단순한 회로가 아니었다.
지식.
기술.
심상각인.
보헤미아의 혈맥.
라이자가 꿈꾸었던 “사람이 될 수 있는 은”의 가능성.
하지만 아이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에는 작은 금속 표식이 걸려 있었다.
거기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은인銀人 제1개체.
푸리나의 눈썹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그레이는 벌써 장부를 펼쳤다.
레이튼은 그 표식을 보고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낮게 말했다.
“시작부터 기분 나쁜 이름이네.”
그 말에 은인의 눈이 죠니를 향했다.
“기분 나쁜…… 이름인가요?”
첫 목소리였다.
객석이 조용해졌다.
은인의 목소리는 어색했다.
그러나 인형 같지는 않았다.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자기 목소리가 자기 것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느렸다.
죠니는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이름이라기보단 물건표 같잖아.”
은인은 자기 목의 표식을 만졌다.
“저는 물건인가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너무 곧았다.
그때 공방의 은빛 벽 뒤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도, 점성술사도, 제국의 망령도, 복수의 조상도 아니었다.
그는 장인처럼 보였다.
아니, 장인이라기보다는 회계사와 병참관과 마법공학자가 합쳐진 얼굴이었다.
손에는 설계도가 있었고, 허리에는 자와 칼이 걸려 있었으며, 눈에는 효율을 재는 차가운 빛이 있었다.
그가 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건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다.”
라이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바실리오는 계속 말했다.
“만들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목적이 있다.
목적이 있다면, 쓰임이 있다.
쓰임이 있다면, 소유와 배치와 운용이 가능하다.”
그는 라이자를 보았다.
“너는 은으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훌륭한 꿈이다.
하지만 꿈이 현실이 된 순간, 그것은 병참표 위에 올라간다.”
공방의 벽에 도표가 떠올랐다.
은인 한 명의 생산 비용.
전투 지속 시간.
갑옷 대체 가능성.
기사 열 명과의 전력 비교.
피로도.
회복 비용.
재생산 가능성.
전장 투입 기대값.
은인은 그 도표를 바라보았다.
자기 몸이 숫자로 분해되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은의 심장은 뛰겠지.
하지만 그 심장을 넣은 것은 너다.
성은의 혈맥은 흐르겠지.
하지만 그 혈맥을 설계한 것은 너다.
그러니 창조자여.”
그는 라이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목적을 정해도 된다.”
라이자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녀는 곧바로 부정하고 싶었다.
그건 아니라고.
은인은 병기가 아니라고.
나는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지만 바실리오의 말은 완전히 거짓이 아니었다.
성은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은인은 병사가 될 수 있다.
보헤미아가 전쟁 속에 있다면, 라이자는 자기 손으로 태어나게 한 은인들에게 싸움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
가족이라 해서 전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을 무엇으로 부르느냐였다.
그때 벨라 4세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공방 바닥 일부가 헝가리의 평원처럼 변했다. 먼 곳에 요새의 그림자가 하나, 둘, 셋 떠올랐다. 그리고 그 요새들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방어망을 이루었다.
벨라의 등 뒤로 왕관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하늘.
대지.
사람.
세 주권이 왕관 하나에 걸려 있었다.
《성 이슈트반의 왕관》.
그녀가 서자 무대의 공기가 달라졌다.
공방은 여전히 공방이었지만, 동시에 왕국의 방어 회의실이 되었다.
벨라는 라이자를 보았다.
“보이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넓고 낮았다.
“전쟁은 물어보지 않고 온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뒤편에 일백요새의 희미한 윤곽이 떠올랐다.
헝가리 전체를 권역으로 삼는 재건 군주의 기척.
《마자르의 여왕》.
벨라는 은인을 보았다.
“저 아이가 사람이라면, 지켜야 한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저 아이가 싸울 수 있다면, 물어야 한다.
전쟁이 올 때, 저 힘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
라이자는 입술을 다물었다.
벨라의 말은 잔혹했다.
하지만 군주의 말이었다.
피난민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하는 자.
내일 올 기병을 막아야 하는 자.
백성의 생존을 계산해야 하는 자의 말.
“은인 하나가 병사 열을 대신할 수 있다면.”
벨라가 말했다.
“성벽 하나를 하루 더 버티게 할 수 있다면.
피난민 백 명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때도 그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무대가 조용해졌다.
은인은 천천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아름다웠다.
은으로 만들어졌으나, 떨리고 있었다.
“저는……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나요?”
바실리오가 즉시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그렇다.”
라이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
하지만 그 부정은 너무 빠른 대답이었다.
벨라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싸우지 못하게 할 것이냐?”
라이자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벨라는 차갑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왕국의 무게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딸에게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 말은 아름다운 상속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벽의 균열, 불탄 곡창, 피난민의 배급, 무너진 요새의 돌까지 물려받는다는 뜻이다.”
벨라의 시선이 은인에게 향했다.
“사람이라면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책임도 있다.”
그 말은 이번 막의 첫 번째 칼이었다.
라이자를 향한 칼.
그리고 은인을 향한 칼.
그때 소피아 베아트리체가 공방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왕국의 무게를 들고 오지 않았다.
대신 작은 공방 앞치마를 입고, 손에는 이상한 렌즈와 황금빛 작은 도구를 들고 있었다.
“잠깐만요.”
벨라가 그녀를 보았다.
“소피아.”
“어머니, 이건 조금 더 봐야 해요.”
소피아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황금의 눈》.
그 눈은 성은의 표면만 보지 않았다.
구성.
결.
회로.
혈맥.
핵.
심상각인.
은의 박동이 어떤 방식으로 기억과 기술을 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단순히 “병기 운용 구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보았다.
소피아가 은인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은인은 조금 긴장했다.
“분해하나요?”
소피아가 눈을 크게 떴다.
“네? 아니요!”
그녀는 손을 저었다.
“분해할 수 있다는 것과 분해해도 된다는 건 다르잖아요.”
그 말에 라이자가 소피아를 보았다.
소피아는 은인의 가슴 가까이에 렌즈를 가져갔다.
은의 심장이 박동했다.
쿵.
쿵.
쿵.
소피아가 조용히 말했다.
“만들어진 방식은 설명할 수 있어요.”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황금빛 연금진이 떠올랐다.
세계의 만상을 구성요소로 보고, 다시 정의하는 아이의 재능.
《그대 만상을 재정의하는 자》.
은인의 몸 주변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재료.
신성회로.
코어.
성은.
기술각인.
병기 후보.
인조 생명.
은의 병사.
창조물.
소피아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읽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다 맞는 말일 수도 있어요.”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렇다.”
“그런데 전부 부족해요.”
바실리오의 미소가 멈췄다.
소피아는 은인의 심장 쪽을 가리켰다.
“이건 조제물이 아니에요.”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조제물이기도 한데…… 그걸로 끝나지 않아요.
만들어진 방식은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살아갈 이유까지 설명해주지는 않아요.”
은인이 소피아를 보았다.
소피아가 웃었다.
“재료로 볼 수 있다고 해서, 재료로만 대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은 작았지만, 공방 전체를 흔들었다.
레이튼이 그때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바닥이 얇게 깔렸다.
천장에는 은빛 별들이 떠 있었다.
그러나 그 별들은 너무 빨리 이름 붙고 있었다.
병기.
창조물.
인형.
은의 병사.
제1개체.
레이튼은 그 별들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너무 빠르군요.”
그가 손끝을 들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은인 위에 붙어 있던 이름들이 흔들렸다.
병기라는 이름이 흐려졌다.
인형이라는 이름이 지워졌다.
제1개체라는 표식이 갈라졌다.
그러나 “은인”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도구의 이름이 아니라, 태어난 방식과 공동체의 약속을 함께 담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레이튼이 물었다.
“저 존재는 병기입니까, 자식입니까, 시민입니까,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별입니까?”
바실리오가 말했다.
“질문으로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질문만으로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는 은인을 보았다.
“하지만 잘못된 이름은 본질이 말하기 전에 입을 막습니다.”
은인은 자기 목을 만졌다.
목에 걸려 있던 표식은 이제 비어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물었다.
“그럼…… 저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나요?”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라이자도.
벨라도.
소피아도.
푸리나도.
그때 죠니가 벽에 기대어 말했다.
“아프냐?”
은인이 그를 보았다.
“네?”
죠니는 손가락으로 은인의 가슴을 가리켰다.
“거기. 무섭거나, 답답하거나, 뭐 그런 거 있냐고.”
은인은 잠시 생각했다.
“있어요.”
“그럼 그건 진짜야.”
죠니는 건조하게 말했다.
“맞으면 아프고, 무서우면 무서운 거야.
네가 은으로 만들어졌든, 꿈에서 나왔든, 그 아픔부터는 네 거야.”
은인은 조용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죠니는 덧붙였다.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정해.”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너, 가끔 정말 배우 같아.”
죠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욕이야?”
“칭찬인데?”
“그럼 더 기분 이상하네.”
공방 한쪽에서 작은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바실리오는 웃지 않았다.
그는 라이자를 향해 다가왔다.
“창조자여.”
그의 목소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그대의 주변 인물들은 아름다운 말을 한다.
그러나 공방은 아름다운 말로 돌아가지 않는다.
은은 캐내야 하고, 제련해야 하며, 심장은 넣어야 한다.
혈맥은 설계해야 한다.
기억은 각인해야 한다.”
그는 은인을 가리켰다.
“그 아이가 자기 이름을 말한다 해도, 그 이름을 말할 혀를 만든 것은 너다.
그 아이가 선택한다 해도, 선택할 수 있는 회로를 넣은 것은 너다.”
라이자의 은의 심장이 무겁게 박동했다.
쿵.
쿵.
쿵.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러니 인정하라.
그 아이는 네 꿈의 산물이다.
네 선의의 결과다.
네 책임이고, 네 소유다.”
마지막 단어가 공방 전체를 차갑게 만들었다.
소유.
은인은 그 단어를 들었다.
그리고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성은을 빚었다.
이 손으로 은의 심장을 만들었다.
이 손으로 은인을 태어나게 했다.
이 손으로 가족을 만들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말 가족이었다면.
왜 목에는 번호가 걸려 있었을까.
왜 전쟁이 오면, 이 아이가 몇 명의 병사를 대신할 수 있는지 계산하게 될까.
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이렇게 쉽게 “내 것”이라는 말로 미끄러지는가.
라이자는 은인에게 다가갔다.
은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 거리.
그 아주 작은 거리가, 라이자에게는 어떤 전쟁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라이자가 말했다.
“나는…… 너를 꿈에서 시작했어.”
은인은 듣고 있었다.
“은의 정령이 말했어.
은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그때는 그 말이 너무 아름다웠어.
꿈에서 깨어났는데, 머리에 은꽃이 남아 있었고…… 나는 그걸 증거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자기 머리카락의 은꽃을 만졌다.
“그래서 현실로 만들고 싶었어.
꿈속에서 들은 친절한 이야기를, 진짜로 만들고 싶었어.”
은인은 조용히 물었다.
“그래서 저를 만들었나요?”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대답은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어.”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라이자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말은, 네가 내 것이라는 뜻이 아니야.”
은인의 눈이 흔들렸다.
라이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
“내가 너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야.”
그 순간, 라이자의 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쿵.
공방의 성은이 일제히 빛났다.
쿵.
은인의 성은의 혈맥이 응답했다.
쿵.
무대 위에 떠 있던 성은들이 하나의 둥근 빛으로 모였다.
라이자가 손을 뻗었다.
성은은 칼이 되지 않았다.
방패가 되지 않았다.
군단이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문이 되었다.
은빛 문.
태어나는 자가 지나가는 문.
라이자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나는 병기를 만든 게 아니야.”
성은의 문이 열렸다.
“나는 가족이 태어날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
성은의 혈맥이 은인의 몸속에서 더 깊게 흐르기 시작했다.
은의 심장이 단순한 코어가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는 박동으로 바뀌었다.
라이자가 선언했다.
“《성은聖銀의 성인聖人》.”
그 순간 은인의 몸에서 은빛이 폭발하듯 퍼지지 않았다.
군단이 생겨나지도 않았다.
병력이 늘지도 않았다.
전장의 숫자가 바뀌지도 않았다.
대신, 은인의 발밑에 작은 그림자가 생겼다.
사람의 그림자.
그는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온전히 섰다.
은으로 만든 창조물이 아니라.
목적을 부여받은 병기가 아니라.
라이자의 꿈에서 태어났지만, 그 꿈을 넘어서 자기 삶을 가져야 할 한 사람으로.
공방의 은꽃들이 하나씩 피었다.
그때 무대 위에 따뜻한 빛이 내려왔다.
그 빛은 성은의 빛과 닮았지만, 조금 더 부드러웠다.
품처럼 넓고, 손처럼 따뜻했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
그녀는 거창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무대 위에 왕좌를 만들지도 않았고, 판결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은인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아팠구나?”
은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조심스럽게 팔을 벌렸다.
“만들어졌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조심히 안아야겠네.”
은인은 망설였다.
그는 라이자를 보았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면.”
그 말은 작았다.
하지만 이번 막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였다.
네가 원하면.
은인은 한 걸음 내디뎠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그를 안았다.
그 순간 공방의 성은들이 따뜻하게 울렸다.
보상은 거래가 아니었다.
포옹은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선언이었다.
“너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
그 말은 대사로 들리지 않았다.
품으로 들렸다.
바실리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상이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그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은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사람에게는 감상이 필요하단다.”
바실리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그의 논리는 끝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훗날 전장을 거부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면?
보헤미아가 불타는데도, 자기 삶을 선택하겠다고 한다면?”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은인도 라이자를 보았다.
벨라의 시선도 그들을 향해 있었다.
군주의 현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은인이 싸울 수 있다면, 싸우지 않을 권리도 있는가.
가족이라면, 국가가 불탈 때도 전장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있다.
라이자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물어볼 거야.”
바실리오가 멈췄다.
“무엇을?”
라이자는 은인을 보았다.
“네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리고 정말 싸우겠다면, 병기로 보내지 않을 거야.
스스로 선택한 사람으로 보낼 거야.”
벨라가 라이자를 오래 보았다.
“그 대답은 비효율적이다.”
라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왕국은 때로 효율을 요구한다.”
“알아요.”
“그래도?”
라이자는 은인의 손을 보았다.
“그래도.”
벨라의 눈이 깊어졌다.
잠시 뒤, 그녀는 낮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지킬 성벽도 준비해야겠구나.”
그 말은 허락도, 비난도 아니었다.
군주의 인정에 가까웠다.
소피아가 작게 웃었다.
“어머니답네요.”
벨라는 소피아를 보았다.
“너는 네 공방을 정리해라.”
“방금 감동적인 장면이었는데요?”
“감동과 정리는 별개다.”
소피아는 입을 삐죽였다.
푸리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그 웃음 덕분에 무대 위의 공기가 조금 풀렸다.
그때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그녀의 발밑에 아주 작게 켜졌다.
이번에는 망자의 문패가 아니었다.
빈 문패 하나.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패.
그레이는 은인 앞에 섰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은인은 자기 목을 만졌다.
거기에는 더 이상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병기 번호가 아니라요?”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름입니다.”
은인은 입술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는…… 아직 이름이 없어요.”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빈칸으로 두겠습니다.”
은인이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이름은 대신 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비워둘 수는 있습니다.”
그 말에 라이자의 눈이 흔들렸다.
그레이는 펜을 들었다.
병기 목록이 아니었다.
거주자 명부였다.
보헤미아의 은인으로 태어난 자.
자기 이름을 아직 찾지 못한 사람.
임시명 없음.
소속: 병기고 아님.
거주: 공방 옆 작은 방.
비고: 본인이 이름을 정할 때까지 문패 보류.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문패는 준비해두겠습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빈 문패에 작은 등불이 켜졌다.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자리는 있었다.
은인은 그 빈 문패를 오래 보았다.
허그와 보상의 성좌는 그를 놓아주었다.
라이자는 그에게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다렸다.
은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라이자는 그 손을 잡았다.
그 손은 따뜻했다.
은으로 만들어졌지만, 따뜻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너는 그들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이자는 대답했다.
“매일 배워야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가볍지 않았다.
“내가 만들었다는 마음은, 자꾸 내 것이라는 말로 바뀌려고 할 테니까.”
그녀는 은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니까 매일 다시 물을 거야.
네 이름은 무엇인지.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것은 비효율이다.”
라이자는 웃었다.
“가족은 원래 비효율적이야.”
그 말에 허그와 보상의 성좌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보상이네.”
바실리오의 그림자는 은빛 꽃잎처럼 흩어졌다.
푸리나는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방금 막 자신도 배운 것을 알고 있었다.
무대에 세운다는 것.
배역을 준다는 것.
조명을 비춘다는 것.
그 모든 것은 때로 선의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이름을 말하기 전에 배역을 주면, 그것은 또 다른 번호표가 될 수도 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세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그리고 이제 네 번째 단어가 은빛으로 새겨졌다.
이름.
푸리나는 그 글자를 오래 보았다.
“네 번째 꿈은 만들어진 사람이었어.”
그녀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만들어진 사람은, 만들어진 목적만으로 끝나지 않았어.”
은인은 빈 문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이름을 말할 자리가 생기는 순간, 그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삶의 배우가 되기 시작했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배우라는 말은 꼭 넣어야 했냐?”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응. 그건 내 버릇이야.”
“고치긴 글렀네.”
“대신 오늘은 조금 기다렸잖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건 인정.”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닫았다.
레이튼은 별들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소피아는 은인의 심장 쪽을 아직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가, 라이자의 시선을 받고 황급히 렌즈를 내렸다.
벨라는 은인을 보며 말했다.
“싸우고 싶지 않다면, 싸우지 않아도 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라이자가 말했다.
“알아요.”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려운 일을 하겠구나.”
라이자는 미소 지었다.
“네.”
허그와 보상의 성좌의 품은 천천히 빛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공방에 남았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능성이 있었다.
은인들이 병기로 정렬된 보헤미아.
은인을 만들지 못해 수많은 사람이 죽은 보헤미아.
은인들이 사람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자유 때문에 전쟁에서 갈등하는 보헤미아.
은인들이 자기 이름을 갖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공방을 떠나고, 때로는 돌아와 식탁에 앉는 보헤미아.
하융은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도 쉬운 길은 없소.”
푸리나가 물었다.
“그래도?”
하융은 빈 문패를 보았다.
“허나 빈칸이 있구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칸은 두려운 것이나, 길이기도 하오.
누군가 대신 적지 않는다면 말이오.”
푸리나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이제 가면에는 네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그리고 다섯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은빛 공방의 불이 천천히 낮아졌다.
풀무의 숨이 잦아들었다.
은꽃들은 닫히지 않았다.
그저 밤을 맞는 꽃처럼 조용히 빛을 줄였다.
그때, 무대의 다른 편에서 검은 먼지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가 아니었다.
고통을 무디게 하는 검은 먼지.
멀리서 검은 하늘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 하늘 한가운데, 작은 달이 떠올랐다.
푸리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고통의 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