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69여관◆zAR16hM8he(61fdb885)2026-05-12 (화) 14:49:16
제5막
고통의 왕관
은빛 공방의 불이 꺼지자, 검은 먼지가 내려왔다.
처음에는 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타고 남은 것이 아니었다.
끝난 것의 잔해도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 더 이상 사람을 찢지 않도록 가라앉힌 먼지였다.
검은 먼지는 무대 바닥을 덮었다.
은꽃이 피어 있던 공방의 벽은 천천히 어두워졌고, 연금진은 흐릿하게 지워졌다.
그 자리에 부서진 성당의 기둥과 갈라진 왕좌, 피 묻은 천 조각, 흰 꽃잎, 그리고 검은 하늘이 내려앉았다.
무대의 천장에는 별도, 달도, 태양도 없었다.
다만 검은 하늘이 있었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다.
부상병.
피난민.
고문당한 자.
척추를 움켜쥔 채 쓰러진 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울지 못하는 자.
차르의 이름을 외치다 목이 쉰 자.
신을 부르다 신의 침묵을 들은 자.
불가리아였다.
왕국이 아니라, 상처로 갈라진 세 개의 불가리아.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네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그리고 다섯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조명을 올리고 싶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고 싶었다.
그들을 무대 위에 세우고, “그대는 아직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비극도 장면이 될 수 있다고, 아픔도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조명을 바로 올리지 않았다.
3막에서 아레가 보여준 가장 낮은 바다.
4막에서 은인이 자기 이름을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렸던 빈 문패.
그 두 장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고통은 장면이 되기 전에 먼저 아프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낮게 선언했다.
“다섯 번째 꿈.”
검은 먼지가 무대 위를 한 번 더 덮었다.
“고통의 왕관.”
그 말과 함께, 검은 하늘 아래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레플리카.
불가리아의 세 차르 중 하나.
가장 정통에 가까운 자.
고통교의 성직자이자 전사.
검은 팔을 지닌, 칠흑의 영웅.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왕관은 빛나지 않았다.
왕관이라기보다, 붕대와 쇠고리와 기도문으로 엮은 무게처럼 보였다.
그녀의 오른팔, 괴이의 흑완은 검은 먼지와 함께 낮게 울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무대 중앙에 멈춰 섰다.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허락이었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순간 검은 먼지가 천천히 퍼졌다.
《흑진黒塵》.
검은 먼지가 부상자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뼈가 붙은 것도 아니고, 피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비명은 조금 낮아졌다.
칼날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고통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그 한 박자 동안 병사는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피난민은 아이의 손을 더 세게 잡을 수 있었다.
무릎 꿇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다.
레플리카의 검은 성법은 비명을 키우지 않았다.
오히려 비명이 사람을 찢기 전에, 그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를 깎아냈다.
《니그룸 돌로로사》.
그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힘이 아니었다.
고통을 이해하고, 견디고, 줄이며, 사람이 고통 때문에 산산이 부서지지 않게 하는 정통 고통교의 성법이었다.
레플리카가 손을 들었다.
검은 하늘이 더 낮게 내려왔다.
하지만 그 하늘은 사람을 짓누르지 않았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
거믄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강해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덜 아팠다.
그리고 그 정도면, 다시 방패를 들 수 있었다.
검은 하늘 한가운데에는 작은 달이 떠올랐다.
빛나지 않는 듯 빛나는 달.
《흑천명월》.
고통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작은 기준점.
레플리카는 그 달 아래에 서 있었다.
고통을 없애겠다는 오만도 없이.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잔혹함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사람이 덜 무너지게 하겠다는 성직자의 표정으로.
그때 검은 하늘의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그 틈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관을 들고 있었다.
그 왕관은 금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가시.
붕대.
하얀 뼈.
피 묻은 기도문.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
그것들로 엮인 왕관이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고통받았느냐.”
그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렇다면 너는 왕관을 쓸 자격이 있다.”
무대 위 신음들이 흔들렸다.
바실리오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너는 버려졌다.
실험체로 태어났다.
실패작으로 취급받았다.
아픔을 모르도록, 혹은 아픔을 너무 오래 견디도록 고쳐졌다.”
레플리카의 흑완이 낮게 울었다.
“그러나 너는 살아남았다.
고통 속에서 자랐다.
고통교의 신앙 안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러니 쓰라.”
그는 왕관을 들어 올렸다.
“고통의 왕관을.”
레플리카는 그 왕관을 바라보았다.
바실리오는 속삭였다.
“고통은 네 정통성이다.
네가 누구보다 아팠으니, 누구보다 다스릴 자격이 있다.
고통받은 자만이 고통받는 자들을 지배할 수 있다.”
그 말은 위험했다.
고통받은 자에게 고통은 증거가 된다.
버텨낸 자에게 상처는 훈장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봐주지 않은 아픔을 누군가 왕관이라 불러주면, 그 말은 달콤하다.
레플리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괴이의 흑완이 왕관 가까이 다가갔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레플리카가 말했다.
“아니다.”
그녀는 왕관을 받지 않았다.
괴이의 흑완이 왕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붙잡기 위해서였다.
《괴이의 흑완》.
그 검은 팔은 사람을 찢기 위해 자란 것이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그것으로, 다른 이에게 닿기 직전의 고통을 붙잡았다.
가시 왕관이 흑완 안에서 삐걱거렸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은 왕관이 아니다.”
왕관의 가시가 흑완에 박혔다.
검은 피가 흘렀다.
레플리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고통은 누군가가 벗겨주어야 할 무게다.”
바실리오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네가 견딘 것은 무엇이냐?”
“상처다.”
“그 상처가 너를 만들었다.”
“그 상처만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검은 먼지 속의 사람들을 보았다.
“나를 주운 사람들.
나를 가르친 사람들.
내가 친구라 부른 사람들.
내가 지키기로 한 사람들.”
그녀는 왕관을 부수지 않았다.
다만 땅에 내려놓았다.
“고통은 지나온 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밤을 왕좌 위에 올려놓으면, 모두가 평생 밤을 숭배하게 된다.”
그 순간, 무대 한쪽에서 흰 꽃잎이 떨어졌다.
한 장.
두 장.
처음에는 아름다웠다.
눈처럼 희고, 기도문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꽃잎이 바닥에 닿자, 뼈가 울었다.
으득.
사람들의 척추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흰 꽃잎 사이로 스토얀카 아센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스토얀카는 세 차르 중 하나.
척추교와 백화문의 이단적 고통 해석을 짊어진 자.
고통과 해체를 신성한 의례로 삼는 차르.
그녀는 레플리카가 내려놓은 왕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깝잖아.”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
스토얀카는 흰 꽃잎을 손바닥 위에 받았다.
“고통을 낮춘다니.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도 전에?”
흰 꽃잎들이 그녀의 등 뒤에서 문처럼 열렸다.
백화문.
그것은 꽃의 문이었다.
하지만 생명을 피우는 문이 아니었다.
고통을 피워 올리는 문.
뼈의 중심, 사람의 기둥, 척추를 통해 인간의 가장 안쪽을 드러내려는 이단의 문.
스토얀카가 손을 펼쳤다.
꽃잎이 한 병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레플리카의 흑진이 즉시 그를 감쌌다.
비명은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찢어발기기 전에 한 박자 늦어졌다.
스토얀카는 아쉬운 듯 말했다.
“왜 막아?
아픔이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야, 그 사람이 무엇으로 서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픈 건 그냥 아픈 거야.”
스토얀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거기에 꽃 이름 붙인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
스토얀카가 미소 지었다.
“덜 아프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거야.”
죠니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검은 하늘 아래에서는 충분히 무거웠다.
스토얀카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너는 고통교의 차르라면서 고통을 무디게 해.
그건 신앙을 희석하는 거 아니야?”
레플리카는 조용히 대답했다.
“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진짜가 돼.”
“아니다.”
레플리카의 흑천이 깊어졌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진짜일 뿐이다.
고통이 사람을 진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흰 꽃잎과 검은 먼지가 무대 위에서 맞부딪쳤다.
꽃잎은 고통을 피워 올리려 했다.
흑진은 그 고통이 사람을 찢기 전에 늦추었다.
검은 하늘과 백화의 문.
정통 고통교와 척추교의 이단.
그 사이에서 무대는 떨렸다.
그때, 무대 뒤쪽에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반복해 배운 걸음.
처음에는 남의 걸음이었으나, 너무 오래 반복되어 이제 자기 몸에 새겨진 걸음.
알렉산드리나 아센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왕관은 완전하지 않았다.
틈이 있었다.
부족함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진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왕관의 흠처럼 남아 있었다.
사생아.
부족한 정통성.
증명해야 하는 왕.
그녀의 등 뒤에는 오래된 황금빛 그림자가 서 있었다.
시메온 대제의 이상화된 그림자.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가짜 왕이 왔구나.”
알렉산드리나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가짜다.”
무대가 조용해졌다.
알렉산드리나는 한 걸음 더 걸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위대한 이를 흉내내다》.
그녀는 왕의 걸음을 흉내 냈다.
왕의 말투를 흉내 냈다.
왕의 전술과 칙령과 침묵까지 흉내 냈다.
처음에는 연기였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연기는 어느 날 수행이 되었다.
알렉산드리나가 손을 들자, 그녀의 뒤에 선 대제의 그림자가 더 선명해졌다.
《대제를 흉내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그녀를 대신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가 시메온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림자를 빌려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자 앞에서 자기 걸음을 시험받고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흉내는 흉내일 뿐이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럼 왕관을 내려놓아라.”
“싫다.”
“무슨 자격으로?”
알렉산드리나는 검은 하늘 아래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사생아.
낮은 자.
소외된 지휘관.
야만인이라 불린 쿠만 용병.
버림받은 마녀 계파의 잔재.
고통받았지만 정통이라고 불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알렉산드리나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파벌은 완전한 자들의 군대가 아니었다.
결핍을 아는 자들의 군대였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왕의 혈통을 완전히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바실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산드리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매일 왕도를 배워야 했다.
매일 흉내 내야 했다.
매일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순간 가브리엘라 둘로스크룸이 그녀의 곁으로 걸어 나왔다.
가브리엘라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고통에게 꿇은 것이 아니었다.
왕관에게도 아니었다.
그녀는 동쪽이 밝아오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향해.
《우리의 새벽을 향한 기도》.
가브리엘라는 기도했다.
“고통이여, 우리는 그대를 신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검은 하늘 아래, 아주 먼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빛이 번졌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무릎 꿇지 않은 이들의 걸음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빛은 레플리카의 거믄하늘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장자리를 밝혔다.
밤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보였다.
가브리엘라가 일어섰다.
그녀의 발밑에 들판이 펼쳐졌다.
완성된 정오의 들판이 아니었다.
차갑고 푸른 새벽의 들판.
그곳에 사생아와 낮은 자와 이방인과 결핍을 가진 자들이 섰다.
《새벽의 들판》.
가브리엘라는 알렉산드리나에게 말했다.
“왕의 혈통을 타고난 것이 왕이 아닙니다.”
그 말은 이미 한 번 그녀의 삶을 바꾼 말이었다.
“왕도를 걷는 이가 왕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그녀의 흉내는 더 이상 남의 그림자를 따라 하는 손짓만이 아니었다.
걸음이었다.
왕도였다.
《흉내내어 드높은 왕도》.
부족한 자들이 서로의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길.
가짜라는 말을 들은 자들이, 그렇기에 더 엄격하게 자기 걸음을 고르는 길.
새벽을 향해 걷는 불가리아.
알렉산드리나가 바실리오에게 말했다.
“나는 고통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의 들판 전체가 들었다.
“하지만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삶을 보장하겠다.”
가브리엘라가 그 뒤에 섰다.
“새벽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녀의 성역이 펼쳐졌다.
《성역구현-회극서광전》.
검은 하늘의 가장자리에서 새벽빛이 번졌다.
그것은 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밤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부정했다.
레플리카의 거믄하늘과 가브리엘라의 서광전이 겹쳤다.
하나는 사람을 덜 아프게 했다.
하나는 사람이 어디로 걸어야 할지 보여주었다.
그 사이에서 알렉산드리나의 왕도가 길이 되었다.
스토얀카는 그 빛을 보며 웃었다.
“예쁘네.”
그녀는 흰 꽃잎을 한 장 집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빨라.
상처 아래를 아직 보지 않았잖아.
척추를 열면, 더 깊은 게 보여.”
레플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스토얀카의 눈이 휘었다.
“싫다면?”
레플리카의 흑천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이 칼끝에 맺혔다.
가브리엘라의 기도가 들판을 감쌌다.
그러나 그때 레이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낡은 바닥이 얇게 깔렸다.
무대 위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성스러운 고통.
왕관.
성장.
자격.
꽃.
상처.
밤.
레이튼은 그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너무 빠르군요.”
그는 손끝으로 별 하나를 가리켰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고통 위에 붙은 이름들이 흔들렸다.
성스러운 고통이라는 이름이 흐려졌다.
왕관이라는 이름이 갈라졌다.
성장이라는 이름도 잠시 멈췄다.
상처라는 이름만이 남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답으로 굳지는 않았다.
레이튼이 물었다.
“이것은 성스러운 고통입니까, 치료받지 못한 상처입니까?”
스토얀카의 미소가 조금 멈췄다.
레이튼은 이어 물었다.
“이것은 성장의 시련입니까, 누군가가 방치한 폭력입니까?”
그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이것은 반드시 없애야 할 오염입니까, 아니면 이해해야 할 밤입니까?”
그리고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이것은 왕도를 만드는 결핍입니까, 아니면 왕도가 이용해서는 안 될 사람의 아픔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답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게 했다.
그때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그녀의 발밑에 켜졌다.
이번에는 망자의 이름만을 위한 등불이 아니었다.
부상자 명부.
치료 우선순위.
유족 보상.
피난민 배급.
재발 방지 기록.
고통을 “잘 견딘 사람”이라는 말로 덮어버리지 않기 위한 장부.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견딘 사람이라고 해서, 더 견디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 한 줄을 펼쳤다.
“부상자는 성자가 아닙니다. 치료 대상입니다.
유족은 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보상 대상입니다.
고통받은 사람은 왕관의 재료가 아닙니다.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토얀카가 미소 지었다.
“장부는 꽃을 이해 못 해.”
그레이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장부는 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누가 꽃 아래에서 죽었는지는 기록할 수 있습니다.”
순간 흰 꽃잎 몇 장이 바닥에 떨어져 검은 먼지에 묻혔다.
하융은 회색 창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불가리아가 있었다.
어느 창에서는 레플리카의 흑진 아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너무 오래 보호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걷는 법을 잊고 있었다.
어느 창에서는 스토얀카의 백화가 왕국 전체에 피었다.
사람들은 고통을 왕관이라 불렀고, 끝내 누구도 왕관을 벗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알렉산드리나가 새벽을 외쳤지만,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뒤처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도 새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창.
검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잠시 쉬고 있었다.
그 가장자리에는 새벽빛이 있었다.
누군가는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일어나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직 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걷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고통을 낮추어 사람들이 살았소.”
그는 다른 창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고통을 왕관이라 불러, 모두가 무릎 꿇었소.”
또 다른 창.
“어느 창에서는 새벽을 향해 걷다가, 뒤처진 이들의 울음이 길가에 남았소.”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여기서는?”
하융은 검은 하늘과 새벽빛이 만나는 곳을 보았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
그는 하오체 특유의 낮고 오래된 어조로 말했다.
“허나 저 창에서는…… 서로 다른 속도로 걷는 자들이 있구려. 그것이 길일 수도 있겠소.”
그 말이 떨어졌을 때, 바실리오가 다시 고통의 왕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레플리카, 알렉산드리나, 스토얀카를 차례로 보았다.
“너희는 모두 고통받았다.”
왕관의 가시가 빛났다.
“그러니 왕관을 써라.”
그는 레플리카에게 말했다.
“너는 고통받았으니, 고통받는 자를 다스려라.”
알렉산드리나에게 말했다.
“너는 결핍되었으니, 결핍된 자들을 이끌어라.”
스토얀카에게 말했다.
“너는 고통의 안쪽을 보려 하니, 가장 깊은 왕관을 써라.”
세 차르 앞에 각각 왕관이 나타났다.
검은 왕관.
새벽빛 왕관.
하얀 꽃의 왕관.
레플리카는 검은 왕관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고통에 무너진 사람들.
“나는 고통받은 자를 다스리기 위해 서 있지 않다.”
그녀는 말했다.
“함께 덜 아프기 위해 서 있다.”
검은 왕관이 흔들렸다.
알렉산드리나는 새벽빛 왕관을 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위험했다.
새벽이라는 말은 때로 뒤처진 이들의 울음을 덮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나는 왕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쓰지 않았다.
대신 그 왕관을 들어, 뒤에 선 사람들에게 보였다.
“나는 완성된 정오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직 차가운 새벽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새벽으로 가는 길에서, 넘어지는 자를 버리지 않는 왕도를 약속한다.”
새벽빛 왕관은 왕관이 아니라 길표식으로 변했다.
스토얀카는 하얀 꽃의 왕관을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레플리카가 긴장했다.
알렉산드리나가 검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스토얀카는 곧장 쓰지 않았다.
그녀는 왕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그 꽃잎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예쁘네.”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닌가 봐.”
레플리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러나는 건가.”
스토얀카는 웃었다.
“설득당한 건 아니야.”
그녀의 뒤에서 백화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다만 오늘 이 무대에서는, 내 꽃이 너무 일찍 피는 것 같아서.”
그 말은 평화가 아니었다.
휴전도 아니었다.
위험이 물러난 것에 가까웠다.
스토얀카는 마지막으로 레플리카를 보았다.
“너는 고통을 너무 아껴.”
레플리카가 대답했다.
“너는 사람을 너무 쉽게 연다.”
스토얀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말은 기억해둘게.”
그리고 흰 꽃잎 속으로 사라졌다.
백화문이 닫혔다.
하지만 흰 꽃잎 몇 장은 검은 먼지 위에 남아 있었다.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불가리아 내전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고통의 왕관은 누구의 머리에도 완전히 씌워지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흑진을 더 낮게 깔았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번에는 그 말이 피난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에게도.
그녀의 결핍된 군대에게도.
가브리엘라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알렉산드리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두 차르의 길은 달랐다.
레플리카는 고통을 낮추려 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통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 길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적을 보았다.
고통을 왕관으로 삼는 자.
고통을 꽃으로 피워 사람을 해체하려는 자.
고통을 이용해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자.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나는 고통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겠다.”
레플리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삶을 보장하겠다.”
가브리엘라가 그 옆에 섰다.
“새벽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녀의 기도가 검은 하늘과 새벽빛 사이를 잇듯 울렸다.
“그것을 우리는 약속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그제야 조명을 조금 올렸다.
아주 조금만.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통을 견딘 사람에게 박수를 강요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만.
검은 하늘 아래에서 레플리카의 흑천명월이 빛났다.
새벽의 들판에서 알렉산드리나의 왕도가 이어졌다.
회극서광전의 빛은 밤을 지우지 않고, 밤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짓말만을 걷어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거기에는 네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검은 하늘과 새벽빛 사이에서 다섯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새벽.
푸리나는 그 단어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꿈은 고통이었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고통은 왕관이 아니었지.”
검은 왕관은 무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부서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누구의 머리에도 쓰이지 않았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고통은 사람을 왕으로 만들지 않아.
고통은 신도 아니고, 자격증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강요할 것도 아니야.”
그녀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때로는 덜 아프게 해야 해.”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때로는 무릎 꿇지 않고 걸어야 해.”
가브리엘라를 보았다.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믿어야 해.”
그리고 스토얀카가 사라진 흰 꽃잎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을 아름답게 피우려는 손을 멈춰 세워야 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번엔 꽤 맞는 말 했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칭찬이지?”
“그래.”
“짧아.”
“칭찬을 길게 하면 수상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곧 다시 무대 위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다섯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고통의 왕관.
그리고 그 아래.
고통은 왕관이 아니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한 번 더 보았다.
검은 하늘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창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레플리카의 거믄하늘 아래 쉬었다.
누군가는 알렉산드리나의 길표식을 보고 걸었다.
누군가는 가브리엘라의 기도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는 아직 주저앉아 있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좋은 길이라 하기에는 아직 멀구려.”
그는 잠시 멈추었다.
“허나 모두에게 같은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오래 갈 수도 있겠소.”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검은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거믄하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장자리에는 새벽빛이 남았다.
그리고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다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여섯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낮은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종도 아니고, 장례의 종도 아니었다.
금속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
마구의 사슬이 흔들리는 소리.
눈 덮인 변경에서 말이 숨을 내쉬는 소리.
먼 동쪽에서 몰려오는 말발굽을 듣고, 서쪽의 기사들이 죄악의 갑옷을 조이는 소리.
어둠 속에서 금빛 눈 하나가 떴다.
그 눈은 태양처럼 빛났지만, 이상하게도 죽은 별의 핵처럼 차가웠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이번에는 공방도, 숲도, 검은 하늘도 아니었다.
죄를 갑옷처럼 입은 기사단의 막이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다음 꿈.”
무대의 어둠 속에서 죄악의 철갑이 울렸다.
“죄를 입은 기사.”
고통의 왕관
은빛 공방의 불이 꺼지자, 검은 먼지가 내려왔다.
처음에는 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타고 남은 것이 아니었다.
끝난 것의 잔해도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이, 더 이상 사람을 찢지 않도록 가라앉힌 먼지였다.
검은 먼지는 무대 바닥을 덮었다.
은꽃이 피어 있던 공방의 벽은 천천히 어두워졌고, 연금진은 흐릿하게 지워졌다.
그 자리에 부서진 성당의 기둥과 갈라진 왕좌, 피 묻은 천 조각, 흰 꽃잎, 그리고 검은 하늘이 내려앉았다.
무대의 천장에는 별도, 달도, 태양도 없었다.
다만 검은 하늘이 있었다.
그 아래에서 사람들의 신음이 들렸다.
부상병.
피난민.
고문당한 자.
척추를 움켜쥔 채 쓰러진 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울지 못하는 자.
차르의 이름을 외치다 목이 쉰 자.
신을 부르다 신의 침묵을 들은 자.
불가리아였다.
왕국이 아니라, 상처로 갈라진 세 개의 불가리아.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네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그리고 다섯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잠시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조명을 올리고 싶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고 싶었다.
그들을 무대 위에 세우고, “그대는 아직 주인공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비극도 장면이 될 수 있다고, 아픔도 다음 막으로 넘어가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조명을 바로 올리지 않았다.
3막에서 아레가 보여준 가장 낮은 바다.
4막에서 은인이 자기 이름을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렸던 빈 문패.
그 두 장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고통은 장면이 되기 전에 먼저 아프다.
푸리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낮게 선언했다.
“다섯 번째 꿈.”
검은 먼지가 무대 위를 한 번 더 덮었다.
“고통의 왕관.”
그 말과 함께, 검은 하늘 아래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레플리카.
불가리아의 세 차르 중 하나.
가장 정통에 가까운 자.
고통교의 성직자이자 전사.
검은 팔을 지닌, 칠흑의 영웅.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왕관은 빛나지 않았다.
왕관이라기보다, 붕대와 쇠고리와 기도문으로 엮은 무게처럼 보였다.
그녀의 오른팔, 괴이의 흑완은 검은 먼지와 함께 낮게 울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무대 중앙에 멈춰 섰다.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허락이었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 순간 검은 먼지가 천천히 퍼졌다.
《흑진黒塵》.
검은 먼지가 부상자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뼈가 붙은 것도 아니고, 피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비명은 조금 낮아졌다.
칼날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고통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그 한 박자 동안 병사는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피난민은 아이의 손을 더 세게 잡을 수 있었다.
무릎 꿇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었다.
레플리카의 검은 성법은 비명을 키우지 않았다.
오히려 비명이 사람을 찢기 전에, 그 가장 날카로운 모서리를 깎아냈다.
《니그룸 돌로로사》.
그것은 고통을 숭배하는 힘이 아니었다.
고통을 이해하고, 견디고, 줄이며, 사람이 고통 때문에 산산이 부서지지 않게 하는 정통 고통교의 성법이었다.
레플리카가 손을 들었다.
검은 하늘이 더 낮게 내려왔다.
하지만 그 하늘은 사람을 짓누르지 않았다.
《고통의 성역 - 거믄하늘》.
거믄하늘 아래에서 사람들은 강해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덜 아팠다.
그리고 그 정도면, 다시 방패를 들 수 있었다.
검은 하늘 한가운데에는 작은 달이 떠올랐다.
빛나지 않는 듯 빛나는 달.
《흑천명월》.
고통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하는 작은 기준점.
레플리카는 그 달 아래에 서 있었다.
고통을 없애겠다는 오만도 없이.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겠다는 잔혹함도 없이.
그저, 지금 이 사람이 덜 무너지게 하겠다는 성직자의 표정으로.
그때 검은 하늘의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그 틈에서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관을 들고 있었다.
그 왕관은 금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가시.
붕대.
하얀 뼈.
피 묻은 기도문.
그리고 누군가의 비명.
그것들로 엮인 왕관이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고통받았느냐.”
그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렇다면 너는 왕관을 쓸 자격이 있다.”
무대 위 신음들이 흔들렸다.
바실리오는 레플리카에게 다가갔다.
“너는 버려졌다.
실험체로 태어났다.
실패작으로 취급받았다.
아픔을 모르도록, 혹은 아픔을 너무 오래 견디도록 고쳐졌다.”
레플리카의 흑완이 낮게 울었다.
“그러나 너는 살아남았다.
고통 속에서 자랐다.
고통교의 신앙 안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러니 쓰라.”
그는 왕관을 들어 올렸다.
“고통의 왕관을.”
레플리카는 그 왕관을 바라보았다.
바실리오는 속삭였다.
“고통은 네 정통성이다.
네가 누구보다 아팠으니, 누구보다 다스릴 자격이 있다.
고통받은 자만이 고통받는 자들을 지배할 수 있다.”
그 말은 위험했다.
고통받은 자에게 고통은 증거가 된다.
버텨낸 자에게 상처는 훈장이 될 수 있다.
아무도 봐주지 않은 아픔을 누군가 왕관이라 불러주면, 그 말은 달콤하다.
레플리카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괴이의 흑완이 왕관 가까이 다가갔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레플리카가 말했다.
“아니다.”
그녀는 왕관을 받지 않았다.
괴이의 흑완이 왕관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붙잡기 위해서였다.
《괴이의 흑완》.
그 검은 팔은 사람을 찢기 위해 자란 것이 아니었다.
레플리카는 그것으로, 다른 이에게 닿기 직전의 고통을 붙잡았다.
가시 왕관이 흑완 안에서 삐걱거렸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고통은 왕관이 아니다.”
왕관의 가시가 흑완에 박혔다.
검은 피가 흘렀다.
레플리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고통은 누군가가 벗겨주어야 할 무게다.”
바실리오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네가 견딘 것은 무엇이냐?”
“상처다.”
“그 상처가 너를 만들었다.”
“그 상처만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니다.”
레플리카는 검은 먼지 속의 사람들을 보았다.
“나를 주운 사람들.
나를 가르친 사람들.
내가 친구라 부른 사람들.
내가 지키기로 한 사람들.”
그녀는 왕관을 부수지 않았다.
다만 땅에 내려놓았다.
“고통은 지나온 밤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밤을 왕좌 위에 올려놓으면, 모두가 평생 밤을 숭배하게 된다.”
그 순간, 무대 한쪽에서 흰 꽃잎이 떨어졌다.
한 장.
두 장.
처음에는 아름다웠다.
눈처럼 희고, 기도문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꽃잎이 바닥에 닿자, 뼈가 울었다.
으득.
사람들의 척추가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흰 꽃잎 사이로 스토얀카 아센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미소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스토얀카는 세 차르 중 하나.
척추교와 백화문의 이단적 고통 해석을 짊어진 자.
고통과 해체를 신성한 의례로 삼는 차르.
그녀는 레플리카가 내려놓은 왕관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깝잖아.”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
스토얀카는 흰 꽃잎을 손바닥 위에 받았다.
“고통을 낮춘다니.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도 전에?”
흰 꽃잎들이 그녀의 등 뒤에서 문처럼 열렸다.
백화문.
그것은 꽃의 문이었다.
하지만 생명을 피우는 문이 아니었다.
고통을 피워 올리는 문.
뼈의 중심, 사람의 기둥, 척추를 통해 인간의 가장 안쪽을 드러내려는 이단의 문.
스토얀카가 손을 펼쳤다.
꽃잎이 한 병사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병사가 비명을 질렀다.
레플리카의 흑진이 즉시 그를 감쌌다.
비명은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찢어발기기 전에 한 박자 늦어졌다.
스토얀카는 아쉬운 듯 말했다.
“왜 막아?
아픔이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야, 그 사람이 무엇으로 서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죠니가 낮게 말했다.
“아픈 건 그냥 아픈 거야.”
스토얀카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거기에 꽃 이름 붙인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
스토얀카가 미소 지었다.
“덜 아프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더 문제라는 거야.”
죠니의 대답은 짧았다.
그러나 검은 하늘 아래에서는 충분히 무거웠다.
스토얀카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너는 고통교의 차르라면서 고통을 무디게 해.
그건 신앙을 희석하는 거 아니야?”
레플리카는 조용히 대답했다.
“신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진짜가 돼.”
“아니다.”
레플리카의 흑천이 깊어졌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도 진짜일 뿐이다.
고통이 사람을 진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흰 꽃잎과 검은 먼지가 무대 위에서 맞부딪쳤다.
꽃잎은 고통을 피워 올리려 했다.
흑진은 그 고통이 사람을 찢기 전에 늦추었다.
검은 하늘과 백화의 문.
정통 고통교와 척추교의 이단.
그 사이에서 무대는 떨렸다.
그때, 무대 뒤쪽에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
반복해 배운 걸음.
처음에는 남의 걸음이었으나, 너무 오래 반복되어 이제 자기 몸에 새겨진 걸음.
알렉산드리나 아센이 걸어 나왔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왕관은 완전하지 않았다.
틈이 있었다.
부족함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진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왕관의 흠처럼 남아 있었다.
사생아.
부족한 정통성.
증명해야 하는 왕.
그녀의 등 뒤에는 오래된 황금빛 그림자가 서 있었다.
시메온 대제의 이상화된 그림자.
바실리오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가짜 왕이 왔구나.”
알렉산드리나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녀가 말했다.
“가짜다.”
무대가 조용해졌다.
알렉산드리나는 한 걸음 더 걸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녀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위대한 이를 흉내내다》.
그녀는 왕의 걸음을 흉내 냈다.
왕의 말투를 흉내 냈다.
왕의 전술과 칙령과 침묵까지 흉내 냈다.
처음에는 연기였다.
그러나 매일 반복된 연기는 어느 날 수행이 되었다.
알렉산드리나가 손을 들자, 그녀의 뒤에 선 대제의 그림자가 더 선명해졌다.
《대제를 흉내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그녀를 대신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나가 시메온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림자를 빌려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그림자 앞에서 자기 걸음을 시험받고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흉내는 흉내일 뿐이다.”
알렉산드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럼 왕관을 내려놓아라.”
“싫다.”
“무슨 자격으로?”
알렉산드리나는 검은 하늘 아래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사생아.
낮은 자.
소외된 지휘관.
야만인이라 불린 쿠만 용병.
버림받은 마녀 계파의 잔재.
고통받았지만 정통이라고 불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알렉산드리나의 뒤에 서 있었다.
그녀의 파벌은 완전한 자들의 군대가 아니었다.
결핍을 아는 자들의 군대였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왕의 혈통을 완전히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바실리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알렉산드리나는 계속 말했다.
“나는 매일 왕도를 배워야 했다.
매일 흉내 내야 했다.
매일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다.
“가짜이기에 누구보다 왕다워야 한다.”
그 순간 가브리엘라 둘로스크룸이 그녀의 곁으로 걸어 나왔다.
가브리엘라는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고통에게 꿇은 것이 아니었다.
왕관에게도 아니었다.
그녀는 동쪽이 밝아오는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향해.
《우리의 새벽을 향한 기도》.
가브리엘라는 기도했다.
“고통이여, 우리는 그대를 신으로 삼지 않겠습니다.”
검은 하늘 아래, 아주 먼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빛이 번졌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무릎 꿇지 않은 이들의 걸음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 빛은 레플리카의 거믄하늘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장자리를 밝혔다.
밤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이 보였다.
가브리엘라가 일어섰다.
그녀의 발밑에 들판이 펼쳐졌다.
완성된 정오의 들판이 아니었다.
차갑고 푸른 새벽의 들판.
그곳에 사생아와 낮은 자와 이방인과 결핍을 가진 자들이 섰다.
《새벽의 들판》.
가브리엘라는 알렉산드리나에게 말했다.
“왕의 혈통을 타고난 것이 왕이 아닙니다.”
그 말은 이미 한 번 그녀의 삶을 바꾼 말이었다.
“왕도를 걷는 이가 왕입니다.”
알렉산드리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그녀의 흉내는 더 이상 남의 그림자를 따라 하는 손짓만이 아니었다.
걸음이었다.
왕도였다.
《흉내내어 드높은 왕도》.
부족한 자들이 서로의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길.
가짜라는 말을 들은 자들이, 그렇기에 더 엄격하게 자기 걸음을 고르는 길.
새벽을 향해 걷는 불가리아.
알렉산드리나가 바실리오에게 말했다.
“나는 고통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벽의 들판 전체가 들었다.
“하지만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삶을 보장하겠다.”
가브리엘라가 그 뒤에 섰다.
“새벽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녀의 성역이 펼쳐졌다.
《성역구현-회극서광전》.
검은 하늘의 가장자리에서 새벽빛이 번졌다.
그것은 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밤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부정했다.
레플리카의 거믄하늘과 가브리엘라의 서광전이 겹쳤다.
하나는 사람을 덜 아프게 했다.
하나는 사람이 어디로 걸어야 할지 보여주었다.
그 사이에서 알렉산드리나의 왕도가 길이 되었다.
스토얀카는 그 빛을 보며 웃었다.
“예쁘네.”
그녀는 흰 꽃잎을 한 장 집어 들었다.
“하지만 너무 빨라.
상처 아래를 아직 보지 않았잖아.
척추를 열면, 더 깊은 게 보여.”
레플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그만.”
스토얀카의 눈이 휘었다.
“싫다면?”
레플리카의 흑천이 일어났다.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이 칼끝에 맺혔다.
가브리엘라의 기도가 들판을 감쌌다.
그러나 그때 레이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낡은 바닥이 얇게 깔렸다.
무대 위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
성스러운 고통.
왕관.
성장.
자격.
꽃.
상처.
밤.
레이튼은 그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이름이 너무 빠르군요.”
그는 손끝으로 별 하나를 가리켰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고통 위에 붙은 이름들이 흔들렸다.
성스러운 고통이라는 이름이 흐려졌다.
왕관이라는 이름이 갈라졌다.
성장이라는 이름도 잠시 멈췄다.
상처라는 이름만이 남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답으로 굳지는 않았다.
레이튼이 물었다.
“이것은 성스러운 고통입니까, 치료받지 못한 상처입니까?”
스토얀카의 미소가 조금 멈췄다.
레이튼은 이어 물었다.
“이것은 성장의 시련입니까, 누군가가 방치한 폭력입니까?”
그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이것은 반드시 없애야 할 오염입니까, 아니면 이해해야 할 밤입니까?”
그리고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이것은 왕도를 만드는 결핍입니까, 아니면 왕도가 이용해서는 안 될 사람의 아픔입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레이튼은 답을 주지 않았다.
대신 답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게 했다.
그때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이 그녀의 발밑에 켜졌다.
이번에는 망자의 이름만을 위한 등불이 아니었다.
부상자 명부.
치료 우선순위.
유족 보상.
피난민 배급.
재발 방지 기록.
고통을 “잘 견딘 사람”이라는 말로 덮어버리지 않기 위한 장부.
그레이는 아주 조용히 말했다.
“견딘 사람이라고 해서, 더 견디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레플리카가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 한 줄을 펼쳤다.
“부상자는 성자가 아닙니다. 치료 대상입니다.
유족은 신앙의 증거가 아닙니다. 보상 대상입니다.
고통받은 사람은 왕관의 재료가 아닙니다. 이름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토얀카가 미소 지었다.
“장부는 꽃을 이해 못 해.”
그레이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장부는 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누가 꽃 아래에서 죽었는지는 기록할 수 있습니다.”
순간 흰 꽃잎 몇 장이 바닥에 떨어져 검은 먼지에 묻혔다.
하융은 회색 창호 너머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불가리아가 있었다.
어느 창에서는 레플리카의 흑진 아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너무 오래 보호받은 사람들은 스스로 걷는 법을 잊고 있었다.
어느 창에서는 스토얀카의 백화가 왕국 전체에 피었다.
사람들은 고통을 왕관이라 불렀고, 끝내 누구도 왕관을 벗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알렉산드리나가 새벽을 외쳤지만,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뒤처졌다.
또 다른 창에서는 고통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도 새 길을 걷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창.
검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잠시 쉬고 있었다.
그 가장자리에는 새벽빛이 있었다.
누군가는 누워 있었고, 누군가는 일어나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직 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걷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고통을 낮추어 사람들이 살았소.”
그는 다른 창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고통을 왕관이라 불러, 모두가 무릎 꿇었소.”
또 다른 창.
“어느 창에서는 새벽을 향해 걷다가, 뒤처진 이들의 울음이 길가에 남았소.”
푸리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여기서는?”
하융은 검은 하늘과 새벽빛이 만나는 곳을 보았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
그는 하오체 특유의 낮고 오래된 어조로 말했다.
“허나 저 창에서는…… 서로 다른 속도로 걷는 자들이 있구려. 그것이 길일 수도 있겠소.”
그 말이 떨어졌을 때, 바실리오가 다시 고통의 왕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레플리카, 알렉산드리나, 스토얀카를 차례로 보았다.
“너희는 모두 고통받았다.”
왕관의 가시가 빛났다.
“그러니 왕관을 써라.”
그는 레플리카에게 말했다.
“너는 고통받았으니, 고통받는 자를 다스려라.”
알렉산드리나에게 말했다.
“너는 결핍되었으니, 결핍된 자들을 이끌어라.”
스토얀카에게 말했다.
“너는 고통의 안쪽을 보려 하니, 가장 깊은 왕관을 써라.”
세 차르 앞에 각각 왕관이 나타났다.
검은 왕관.
새벽빛 왕관.
하얀 꽃의 왕관.
레플리카는 검은 왕관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보았다.
고통에 무너진 사람들.
“나는 고통받은 자를 다스리기 위해 서 있지 않다.”
그녀는 말했다.
“함께 덜 아프기 위해 서 있다.”
검은 왕관이 흔들렸다.
알렉산드리나는 새벽빛 왕관을 보았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위험했다.
새벽이라는 말은 때로 뒤처진 이들의 울음을 덮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나는 왕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쓰지 않았다.
대신 그 왕관을 들어, 뒤에 선 사람들에게 보였다.
“나는 완성된 정오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직 차가운 새벽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새벽으로 가는 길에서, 넘어지는 자를 버리지 않는 왕도를 약속한다.”
새벽빛 왕관은 왕관이 아니라 길표식으로 변했다.
스토얀카는 하얀 꽃의 왕관을 보았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레플리카가 긴장했다.
알렉산드리나가 검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스토얀카는 곧장 쓰지 않았다.
그녀는 왕관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그 꽃잎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예쁘네.”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닌가 봐.”
레플리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물러나는 건가.”
스토얀카는 웃었다.
“설득당한 건 아니야.”
그녀의 뒤에서 백화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다만 오늘 이 무대에서는, 내 꽃이 너무 일찍 피는 것 같아서.”
그 말은 평화가 아니었다.
휴전도 아니었다.
위험이 물러난 것에 가까웠다.
스토얀카는 마지막으로 레플리카를 보았다.
“너는 고통을 너무 아껴.”
레플리카가 대답했다.
“너는 사람을 너무 쉽게 연다.”
스토얀카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말은 기억해둘게.”
그리고 흰 꽃잎 속으로 사라졌다.
백화문이 닫혔다.
하지만 흰 꽃잎 몇 장은 검은 먼지 위에 남아 있었다.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불가리아 내전도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고통의 왕관은 누구의 머리에도 완전히 씌워지지 않았다.
레플리카는 흑진을 더 낮게 깔았다.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
이번에는 그 말이 피난민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리나에게도.
그녀의 결핍된 군대에게도.
가브리엘라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알렉산드리나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두 차르의 길은 달랐다.
레플리카는 고통을 낮추려 했다.
알렉산드리나는 고통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 길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적을 보았다.
고통을 왕관으로 삼는 자.
고통을 꽃으로 피워 사람을 해체하려는 자.
고통을 이용해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자.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나는 고통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겠다.”
레플리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리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고통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삶을 보장하겠다.”
가브리엘라가 그 옆에 섰다.
“새벽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녀의 기도가 검은 하늘과 새벽빛 사이를 잇듯 울렸다.
“그것을 우리는 약속하겠습니다.”
푸리나는 그제야 조명을 조금 올렸다.
아주 조금만.
고통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통을 견딘 사람에게 박수를 강요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만.
검은 하늘 아래에서 레플리카의 흑천명월이 빛났다.
새벽의 들판에서 알렉산드리나의 왕도가 이어졌다.
회극서광전의 빛은 밤을 지우지 않고, 밤이 끝나지 않는다는 거짓말만을 걷어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거기에는 네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검은 하늘과 새벽빛 사이에서 다섯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새벽.
푸리나는 그 단어를 바라보았다.
“다섯 번째 꿈은 고통이었어.”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고통은 왕관이 아니었지.”
검은 왕관은 무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부서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누구의 머리에도 쓰이지 않았다.
푸리나는 객석을 향해 말했다.
“고통은 사람을 왕으로 만들지 않아.
고통은 신도 아니고, 자격증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강요할 것도 아니야.”
그녀는 레플리카를 보았다.
“때로는 덜 아프게 해야 해.”
알렉산드리나를 보았다.
“때로는 무릎 꿇지 않고 걸어야 해.”
가브리엘라를 보았다.
“때로는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믿어야 해.”
그리고 스토얀카가 사라진 흰 꽃잎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을 아름답게 피우려는 손을 멈춰 세워야 해.”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번엔 꽤 맞는 말 했네.”
푸리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칭찬이지?”
“그래.”
“짧아.”
“칭찬을 길게 하면 수상해.”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곧 다시 무대 위를 보았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다섯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고통의 왕관.
그리고 그 아래.
고통은 왕관이 아니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한 번 더 보았다.
검은 하늘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창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속도로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레플리카의 거믄하늘 아래 쉬었다.
누군가는 알렉산드리나의 길표식을 보고 걸었다.
누군가는 가브리엘라의 기도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는 아직 주저앉아 있었다.
하융은 낮게 말했다.
“좋은 길이라 하기에는 아직 멀구려.”
그는 잠시 멈추었다.
“허나 모두에게 같은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오래 갈 수도 있겠소.”
푸리나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검은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거믄하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장자리에는 새벽빛이 남았다.
그리고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다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여섯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낮은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종도 아니고, 장례의 종도 아니었다.
금속 갑옷이 움직이는 소리.
마구의 사슬이 흔들리는 소리.
눈 덮인 변경에서 말이 숨을 내쉬는 소리.
먼 동쪽에서 몰려오는 말발굽을 듣고, 서쪽의 기사들이 죄악의 갑옷을 조이는 소리.
어둠 속에서 금빛 눈 하나가 떴다.
그 눈은 태양처럼 빛났지만, 이상하게도 죽은 별의 핵처럼 차가웠다.
푸리나는 숨을 삼켰다.
이번에는 공방도, 숲도, 검은 하늘도 아니었다.
죄를 갑옷처럼 입은 기사단의 막이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다음 꿈.”
무대의 어둠 속에서 죄악의 철갑이 울렸다.
“죄를 입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