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0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15:09:04
제6막

죄를 입은 기사

검은 하늘과 새벽빛이 걷힌 뒤, 무대에는 눈이 내렸다.

처음에는 흰 꽃잎처럼 보였다.

스토얀카가 남기고 간 백화의 잔향인가 싶어, 몇몇 관객은 몸을 굳혔다.
하지만 그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눈이었다.

차갑고, 조용하고, 사소한 발자국까지 숨겨버리는 눈.

불가리아의 검은 먼지가 가라앉은 자리에, 프루센 변경의 겨울이 내려왔다.
무대의 바닥은 얼어붙은 흙이 되었고, 먼 곳에는 침엽수의 검은 윤곽이 서 있었다.
바람은 낮게 울었고, 그 바람 속에는 아주 먼 곳의 말발굽 소리가 섞여 있었다.

동쪽에서 오는 소리.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꿈을 밟고 있는 소리.

그 위로 또 다른 소리가 겹쳤다.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
마구의 사슬이 흔들리는 소리.
봉인된 명령서 위에 인장이 찍히는 소리.
책상 위에서 펜촉이 긁히는 소리.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피 냄새가 났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가면에는 다섯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그리고 여섯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눈 덮인 변경을 보며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막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죄를 입고도 땅을 지키는 기사.
자기 영혼의 안식을 포기하고 변경의 방패가 된 기사단장.
성스러운 이름 아래 더러운 일을 맡은 사람.

그것은 너무 쉽게 아름다운 비극이 된다.

푸리나는 그런 비극을 잘 만들 수 있었다.

조명을 낮추고, 눈을 내리고, 갑옷에 달빛을 묻히고, 고백 하나를 올리면 된다.
그러면 관객은 울 것이다.

그러나 5막에서 그녀는 고통을 왕관으로 만들지 않았다.
3막에서 그녀는 죽은 자의 침묵을 억지로 무대 위에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조심해야 했다.

죄는 장면이 되기 전에 먼저 죄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여섯 번째 꿈.”

눈발이 조금 거세졌다.

“죄를 입은 기사.”

그 말이 떨어지자, 무대의 어둠 속에서 금빛 눈 하나가 떴다.

아니, 두 눈이었다.

태양처럼 빛났으나 따뜻하지 않았다.
죽은 태양의 핵처럼 차갑고, 오래 식은 금속처럼 무거운 눈.

《천양금안》.

그 눈은 거짓을 태우지 않았다.

더 잔혹하게, 감추어진 것을 드러냈다.

눈 덮인 변경의 한가운데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호흐마이스터.

그녀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호칭으로 불렸다.

직책으로 불렸다.

튜튼 기사단의 총장.
프루센 란트마이스터.
성스러운 이름으로 죄를 짓고, 그 죄를 갑옷처럼 입어 변경을 지키는 기사단의 얼굴.

그녀는 검은 수도복 위에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갑옷은 아직 완전히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무겁게 보였다.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눈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그 발자국은 곧 눈에 덮였다.

마치 그녀 자신의 이름처럼.

호흐마이스터는 무대 중앙에 멈춰 섰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 목소리는 공손했다.

딱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손함은 친절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낮은 곳에 묶어두는 쇠사슬처럼 들렸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실리오가 눈발 속에서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관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고해사제처럼 보였다.
동시에 재판관처럼 보였다.
동시에 기사단의 서기처럼 보였다.

그의 손에는 왕관이 없었다.

대신 갑주 한 벌이 있었다.

철로 만든 갑주가 아니었다.

죄로 만든 갑주였다.

봉인된 편지.
잘려나간 인장.
피 묻지 않은 명령서.
축출문.
리보니아로 보낸 급한 편지.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죽인 조용한 서명.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접혀 갑주가 되어 있었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대는 죄를 안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죄를 다룰 자격이 있다.”

눈발이 그녀의 어깨에 쌓였다.

바실리오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는 깨끗하지 않다.
그대는 이미 더럽혀졌다.
그러니 더러운 일은 그대가 맡으면 된다.”

그 말은 유혹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호흐마이스터가 오래전부터 자기 자신에게 해온 말이기도 했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죄를 입은 자여.
죄를 다스려라.”

그 순간, 무대 뒤편에 어린아이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초원의 아이.

몽골의 궁정 어딘가에서 죽었어야 했던 아이.
정치 숙청의 칼날 아래 사라졌어야 했던 마지막 씨앗.
그러나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

《기적의 체현자》.

눈 위에 피가 떨어졌다.

어린아이는 도망쳤다.

어떤 충성스러운 자가 그녀를 숨겼다.
어떤 기적이 칼날을 빗나가게 했다.
어떤 기사도 비슷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죽였어야 할 아이를 거두었다.

헤르만 폰 잘차의 그림자가 멀리 나타났다.

그는 아이에게 기사도를 가르쳤다.
기도문을 가르쳤다.
검을 쥐는 법을 가르쳤다.
의무라는 말의 무게를 가르쳤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호흐마이스터가 되었다.

기적은 축복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책임이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자라서, 자기 피와 닮은 이들을 막기 위해 죄를 입는 기사가 되었다.

동쪽의 말발굽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호흐마이스터의 눈이 금빛으로 흔들렸다.

갑옷 아래, 숨겨진 혈통이 반응했다.

이름 붙지 않은 혈통.

《■■■■》.

그녀가 미워하는 피.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피.

몽골 “위대한 왕”의 마지막 씨앗.

바실리오가 웃었다.

“보아라.
그대가 막으려는 자들과 그대는 닮았다.”

호흐마이스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천양금안》은 동쪽의 환영을 보았다.

초원의 군대.
말 위에서 태어난 듯한 기동.
도시를 숫자로 보는 눈.
항복한 자에게서도 다음 병참을 계산하는 냉정함.
위대한 왕의 피가 부르는 폭력.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단의 깃발 아래에서 성전의 이름으로 약탈하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포장하고, 죄를 기도로 덮는 서방의 얼굴도 보였다.

용은 동쪽에서만 오지 않았다.

용은 서쪽의 성당 그림자 아래에서도 자랐다.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압니다.”

바실리오가 물었다.

“무엇을?”

“제가 그들과 닮았다는 것을.”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공손했다.

“그러므로 막아야 합니다.”

바실리오의 웃음이 깊어졌다.

“그래. 그러니 입어라.”

그는 죄의 갑주를 내밀었다.

그러나 호흐마이스터가 손을 뻗기 전, 무대 위에 책상이 나타났다.

검은 책상.

눈 덮인 변경 한가운데, 이상할 만큼 정돈된 책상.

그 위에는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봉인된 편지.
열리지 않은 보고서.
잘차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재편 명령서.
급한 편지.
누군가를 속여 한 사람을 불러낸 서신.
기사단 내부 인사 명단.
숙청 명령.
요새 배치표.
후원자들에게 보낸 차가운 문장들.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책상 아래 눈은 붉었다.

호흐마이스터의 그림자가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었다.

서명했다.

《기사단의 주모자 Schreibtischtäter》.

검은 뽑히지 않았다.

창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편지 한 장이 리보니아를 흔들었다.
명령서 한 줄이 노기사의 충성을 부러뜨렸다.
봉인 하나가 어느 기사에게 죽을 장소를 정해주었다.
잘차의 이름이 문서 위에서 지워지지는 않았으나, 그 아래에 더 이상 명령권이 남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손은 깨끗했다.

책상 위에도 피는 없었다.

그러나 무대 아래에서 물소리가 났다.

깊고 낮은 물소리.

눈 덮인 변경 아래.
책상 아래.
명령서 아래.
피 묻지 않은 서명 아래.

그곳에서 검은 바다가 열렸다.

아레 마가트로이드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눈발 속에서도 젖지 않았다.

이미 더 낮은 곳에서 올라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레의 발밑에서 물이 퍼졌다.

물의 바다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끊어진 실.
돌아오지 못한 전령의 숨.
편지 한 장 아래 묻힌 기사들의 침묵.
정치공작의 결과로 사라진 충성.
살아남았으나 기도문을 잃은 병사의 빈자리.

그 모든 것이 가라앉은 심연.

《가장 낮은 바다》.

아레는 책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그대는 죄를 입었구나.”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예.”

아레는 책상 위의 문서들을 보았다.

“허나 죄는 갑주가 되기 전에, 먼저 누군가의 마지막 침묵이 된단다.”

호흐마이스터의 손이 아주 조금 멈췄다.

아레가 손을 내렸다.

가장 낮은 바다에서 실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실.

검은 실.
녹슨 실.
잘려나간 실.
끝이 불탄 실.
그리고 뜻밖에도, 끊어지지 않고 멀리 이어진 실.

《추도자》.

아레가 기억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었다.

이미 가라앉은 결말들이었다.

첫 번째 실이 떠올랐다.

잘차를 따르던 노기사의 침묵.

그는 호흐마이스터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사단의 명예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보느니, 스스로 입을 닫았다.

두 번째 실.

리보니아의 성전광 기사.

그는 죽었다.

그는 잔혹했고, 어리석었으며, 성전의 이름을 더럽혔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세 번째 실.

호흐마이스터의 공작 때문에 살아남은 마을의 아이.

그 아이는 기사단의 재편으로 폭주 부대가 사라졌기에, 불타지 않은 마을에서 자랐다.

네 번째 실.

급한 편지에 속아 리보니아로 온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았으나, 그 실 끝에는 금목서의 향기가 희미하게 났다.

다섯 번째 실.

호흐마이스터 자신.

어린 시절의 기적에서 현재의 죄악 갑주까지 이어진 실.

아레는 그 실들을 하나로 묶지 않았다.

죄인.
방패.
배신자.
구원자.

그 어떤 이름 하나로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뒤편에 더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정지.
침묵.
쇠퇴.
경계.

《암영과의 계약》.

아레의 그림자가 깊어졌다.

그녀는 죽은 자를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들을 증인석에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침묵이 미화와 단죄 사이에서 또다시 이용당하지 않도록, 가장 낮은 바다에 붙들었다.

“그대가 방패였다는 사실도 기억하마.”

아레가 말했다.

“그대의 편지 아래로 가라앉은 이름들도 기억하마.”

호흐마이스터는 말없이 들었다.

“어느 하나만 남기면, 그것은 애도가 아니라 변명이 되겠지.”

그 말에 그레이가 천천히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장부를 들고 있었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눈 덮인 변경 위에 하나둘 켜졌다.

이번에는 마을의 문패만이 아니었다.

기사단의 이름.
죽은 기사.
살아남은 아이.
쫓겨난 노병.
속아서 불려온 단장.
공작으로 목숨을 건진 피난민.
그리고 아직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호흐마이스터의 진짜 이름을 위한 빈칸.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죄만 적으면 단죄가 됩니다.”

그녀는 장부를 넘겼다.

“구한 사람만 적으면 미화가 됩니다.”

또 한 장.

“둘 다 적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레이를 보았다.

눈발이 그녀의 금빛 눈을 스쳤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공손히 말했다.

“부디, 미화하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 말은 그녀에게도 향한 것 같았다.

미화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조명을 조금 낮추었다.

그때, 눈발 사이로 금목서 향기가 퍼졌다.

프루센의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향기였다.

그러나 그 향기는 억지로 겨울을 몰아내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작고 분명하게 피었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호흐마이스터와는 달랐다.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는 죄가 식어 굳은 철이라면, 아스트리트의 몸은 생명이 균형을 찾아 세운 그릇 같았다.

몸.
정신.
영력.
검로.
호흡.

모든 것이 한 가지 리듬으로 맞물려 있었다.

《창성천강지체》.

그녀의 등 뒤에는 별빛이 있었다.

차갑지 않은 별.

살아 있는 별.

시원성좌의 가호.

《별의 간택자Chosen》.

아스트리트는 호흐마이스터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호흐마이스터.”

호흐마이스터도 고개를 숙였다.

“나흐트로제 단장.”

아스트리트의 표정에는 여전히 어딘가 억울함이 있었다.

처음 그 편지를 받았을 때의 황당함.

‘급한 일’이라더니, 와보니 기사단장이 되라고 한 그 장면.

아스트리트는 잠시 그 기억을 떠올린 듯 미간을 좁혔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그 편지 내용은 납득이 안 됩니다.”

객석 어딘가에서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건 납득하면 이상하지.”

푸리나가 살짝 웃을 뻔했다.

호흐마이스터는 흔들리지 않았다.

“속였습니다.”

아스트리트는 대답했다.

“예. 속이셨죠.”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게 덮지도 않았다.

“그런데 제가 도착한 뒤에 본 건, 무너진 기사단이었습니다.
성전의 이름으로 너무 오래 검을 휘두르다가, 생명의 이유를 잊어버린 기사들.”

아스트리트의 손이 검자루에 닿았다.

금목서 꽃잎이 그녀의 발밑에 흩어졌다.

《화유심법》.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쪽의 호흡은 정갈하게 단전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녀가 검을 뽑았다.

화려한 성검은 아니었다.

롱소드.

실용적이고, 곧고, 정확한 검.

금목서가 피었다.

꽃은 부드러웠지만, 가지는 강철보다 곧았다.

《만생개화검법》.

아스트리트는 검끝을 눈 위에 내렸다.

“시원성좌의 교리는 하나입니다.”

그녀가 말했다.

“생명을 긍정한다.”

그 말이 울리자, 눈 위에 작은 싹들이 돋았다.

겨울을 끝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 아래에도 뿌리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명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죽이는 이유가 생명을 잊어버리는 순간, 검은 더 이상 기사도의 도구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들었다.

아스트리트가 물었다.

“죄를 입은 기사는, 언젠가 그 갑주를 벗을 길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무대가 조용해졌다.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했다.

“벗을 수 있는 갑주라면, 제게 주어지지 않았겠지요.”

아스트리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단죄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음 기사에게는 벗을 방법을 남겨야 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그때, 바실리오가 웃었다.

“아름답군. 생명의 기사. 죄의 기사. 기록자. 추도자.”

그의 목소리가 눈발 속에서 굵어졌다.

“하지만 모두 잊고 있다.”

동쪽의 말발굽 소리가 커졌다.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하나둘 켜졌다.

바실리오의 그림자 뒤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용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 용의 비늘은 초원의 금빛과 성전의 흰색과 죄책감의 검은색으로 뒤섞여 있었다.

머리는 여러 개였다.

하나는 몽골의 황금혈통.
하나는 성전광의 기사단.
하나는 잘차를 밀어낸 죄책감.
하나는 자기혐오.
하나는 “더 큰 죄로 더 큰 죄를 막겠다”는 달콤한 논리.

용은 밖에서만 오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의 피 속에서도 울었다.
기사단의 깃발 아래에서도 꿈틀거렸다.
책상 아래에서도 자랐다.

바실리오가 말했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깥의 용만이 아니다.”

용이 입을 열었다.

동쪽의 말발굽.
서쪽의 성가.
책상 위의 펜촉.
아버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린 딸의 침묵.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호흐마이스터는 용을 보았다.

《천양금안》이 그 본질을 드러냈다.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대, 용이노라.”

그 말은 적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피에게.
자기 기사단에게.
자기 죄에게.
자기 안의 공포에게.

호흐마이스터가 손을 들어 갑주의 봉인을 풀었다.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래. 입어라.”

호흐마이스터는 낮게 말했다.

“《죄악의 갑주 Frevel Panzer》.”

갑주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빛나지 않았다.

성스러운 은도 아니었고, 영광의 금도 아니었다.

죄가 식어 굳은 철이었다.

편지와 명령서와 봉인과 배신과 방어선이 철판처럼 맞물렸다.
잘차를 무너뜨린 날의 침묵이 흉갑이 되었다.
리보니아를 흔든 급한 편지가 견갑이 되었다.
기사단 내부 숙청의 명단이 팔갑으로 감겼다.
살아남은 마을 아이들의 숨이 안쪽에서 작게 울렸다.

갑주는 호흐마이스터를 보호했다.

동시에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그것을 변명으로 입지 않았다.

방패로 입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갑주는 입는 거야.”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는 용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왕관처럼 머리에 올리면 목이 부러져.”

호흐마이스터는 그 말을 들은 듯,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실리오가 외쳤다.

“그 갑주로 다스려라!”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했다.

“아니요.”

그녀가 말을 몰았다.

눈 위로 검은 말이 나타났다.

서방의 중갑.
튜튼의 전열.
하지만 말의 박자는 이상했다.

무거운 중갑기병의 둔한 직선이 아니었다.

초원의 선회.

적의 호흡을 읽고, 도망치는 방향을 미리 막고, 말발굽의 박자로 거리를 삼키는 기동.

《대초원의 대기사》.

그녀의 갑주는 서방의 것이었다.

그러나 말의 박자는 초원의 것이었다.

몽골의 피로 몽골을 막는 튜튼 기사.

그 모순이 그녀의 몸에서 전술이 되었다.

아스트리트가 옆에서 검을 세웠다.

금목서 꽃잎들이 눈 위에 퍼졌다.

그 꽃잎들은 하나씩 검로가 되었다.

폭주하던 기사들의 흐트러진 검로가, 생명의 숲처럼 다시 정렬되었다.

《계수성림》.

호흐마이스터의 죄악 갑주가 전열의 방패가 되고, 아스트리트의 계수성림이 그 뒤에서 검로를 살렸다.

죄와 생명.

방패와 개화.

서로 섞이지는 않았으나, 같은 용을 향했다.

호흐마이스터가 창을 들었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에 희미하게 섰다.

그러나 그것은 성인의 영광이라기보다, 용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의무의 자세였다.

《용을 짓밟는 성인》.

호흐마이스터는 용을 곧장 베지 않았다.

먼저 밟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자기 안의 용까지 함께.

말굽이 용의 목을 눌렀다.

용이 포효했다.

몽골의 머리가 울부짖었다.
성전광의 머리가 성가를 외쳤다.
죄책감의 머리가 잘차의 이름을 속삭였다.
자기혐오의 머리가 “너도 그들과 같다”고 중얼거렸다.

호흐마이스터의 《신心》이 흔들렸다.

그 마음은 강철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금이 많았다.

그러나 그 금 사이로 무너지지 않았다.

스스로를 죄의 형틀에 묶어두는 방식의 절제.

그녀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공손한 얼굴 그대로, 용의 목을 밟았다.

《망望》이 그녀의 눈 안쪽에서 타올랐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자기 영혼의 구원이 아니었다.

프루센의 내일.

눈 덮인 마을의 아침.

기사단이 죄를 짓지 않아도 되는 다음 세대.

아스트리트가 말했던, 갑주를 벗을 길.

호흐마이스터가 말했다.

“저는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의 창끝이 용의 이마를 겨누었다.

“제 죄를 미화하지도 마십시오.”

아레의 가장 낮은 바다가 용의 그림자 아래에 퍼졌다.

그레이의 장부가 펼쳐졌다.

하융의 창호가 흔들렸다.

레이튼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여관:문답의 서재]의 별들이 눈발 속에 떠올랐다.

호흐마이스터 위에 수많은 이름이 붙으려 했다.

몽골의 피.
튜튼의 기사.
배신자.
잘차의 딸이 아니었던 딸.
주모자.
죄인.
방패.
성인.

레이튼이 말했다.

“그대는 죄인입니까, 방패입니까, 배신자입니까, 딸입니까, 아니면 아직 그 모든 이름을 짊어진 채 답하지 않은 사람입니까?”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이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로 굳지도 않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모두입니다.”

그녀의 창이 내려왔다.

“그래서 제 이름은 필요 없습니다.”

용의 머리 하나가 땅에 박혔다.

“직책이면 충분합니다.”

창이 용의 이마를 꿰뚫었다.

용은 사라지지 않았다.

완전히 죽지도 않았다.

그것은 인간 한 명이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몽골의 폭력도, 성전광도, 죄책감도, 자기혐오도, 더 큰 죄로 죄를 막겠다는 유혹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용은 밟혀 있었다.

도망치지 못했다.

왕좌가 되지도 못했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호흐마이스터가 죄를 부정했고, 기사단은 다시 성전광으로 폭주했다.

어느 창에서는 죄를 아름다운 갑주라 부르다, 갑주가 왕좌가 되었다.

어느 창에서는 죄책감이 그녀를 부러뜨렸고, 기사단은 머리 없는 짐승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한 창.

호흐마이스터는 갑주를 입었다.
그러나 그 밖에 추도자가 있었다.
장부가 있었다.
생명을 긍정하는 다음 기사단장이 있었다.
질문자가 있었다.
창문지기가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죄를 부정하여 더 큰 죄가 되었소.”

그는 다른 창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죄를 갑주라 부르다, 갑주가 왕좌가 되었소.”

그리고 마지막 창.

“허나 저 창에서는…… 갑주 바깥에 기록자와 장부가 있구려.”

푸리나가 물었다.

“좋은 창이야?”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좋다 말하기 어렵소.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

그는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허나 죄가 홀로 자기 이름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이들이 있다면, 비껴설 길은 있겠소.”

호흐마이스터는 용을 밟은 채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웠다.

눈 속의 검은 갑주.
금빛 눈.
죄를 입고도 방패가 된 기사.

푸리나의 손이 조명을 향해 움직였다.

그 순간 아레가 조용히 말했다.

“아름답게 끝나기에는, 아직 울지 못한 이름들이 많구나.”

아레의 손끝에서 가장 낮은 바다가 다시 흔들렸다.

《온당한 결말을 애도하는 것》.

무대 위의 빛이 조금 낮아졌다.

호흐마이스터의 갑주는 여전히 거기 있었지만, 더 이상 성화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 속의 기사들은 다시 피곤한 사람으로 보였다.
책상 위의 편지는 다시 차가운 문서로 보였다.
용을 밟은 발밑에는 여전히 진흙과 피가 있었다.

푸리나는 손을 멈추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건 고백이지, 커튼콜은 아니야.”

푸리나는 눈을 감았다.

“응.”

그녀는 조명을 더 올리지 않았다.

대신 무대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호흐마이스터는 용에서 내려왔다.

용은 바닥 아래로 가라앉았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봉인된 것처럼.

아스트리트는 검을 내렸다.

금목서 꽃잎들은 눈 속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는 장부에 여섯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죄를 입은 기사.

그리고 그 아래.

죄는 왕관이 아니다.

잠시 뒤, 그레이는 한 줄을 더 적었다.

방패였던 순간도 기록한다.

아레가 덧붙였다.

“그 아래 가라앉은 침묵도.”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적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두 사람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부디, 제가 지운 이름이 있다면 찾아주십시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찾겠습니다.”

아레는 말했다.

“가라앉은 것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란다.”

호흐마이스터의 금빛 눈이 아주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아스트리트가 그녀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

“말씀하십시오.”

“저는 갑주를 벗을 길을 찾겠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그 길이 있다면.”

아스트리트는 단호하게 말했다.

“있게 만들겠습니다.”

그 말은 순진했다.

그래서 필요했다.

시원성좌의 교리는 단 하나.

생명을 긍정한다.

생명은 때로 너무 순진한 말로만 다음 길을 만든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저는, 그 길이 생길 때까지 막겠습니다.”

그것이 두 기사단장의 대답이었다.

죄를 입은 기사와, 생명을 긍정하는 기사.

같은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방향을 보려는 시도였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다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눈발 속에서 여섯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죄.

푸리나는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여섯 번째 꿈은 죄였어.”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죄는 훈장이 아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갑주가 될 수는 있었어.
방패가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왕관이 되어서는 안 되었지.”

푸리나는 객석을 보았다.

“죄를 안다는 건 깨끗해진다는 뜻이 아니야.
죄를 입었다는 건 더러운 일을 해도 된다는 허가도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다만 도망치지 않고, 미화하지 않고, 기록하게 하고, 그 무게로 누군가의 앞에 서겠다는 맹세일 수는 있겠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이번엔 길게 했는데도 맞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드디어 내 대사가 길어도 인정해주는 거야?”

“가끔은.”

“가끔이라니 너무 짜다.”

“따뜻한 식사 준비해두면 다음엔 조금 더 후하게 해줄게.”

푸리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짧은 웃음이 눈 덮인 변경에 작게 울렸다.

아카식은 객석 어딘가에서 중얼거렸다.

“기록하기 싫은 장면이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지우면, 더 싫은 장면이 되겠지.”

그 말은 아무도 크게 받아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의 장부와 아레의 바다와 푸리나의 가면은 모두 그것을 들었다.

눈발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프루센의 변경은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호흐마이스터의 죄악의 갑주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남았다.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꽃잎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눈 아래 작은 싹처럼 남았다.

용은 가라앉았지만, 죽지 않았다.

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죄는 왕관이 되지 못했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여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그리고 일곱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검은 바다의 물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깨끗한 샘물 소리.
금목서의 향도, 눈의 냄새도 아닌, 처음 비가 흙에 닿을 때의 냄새.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생명을 긍정한다.”

아스트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푸리나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죄의 무게 뒤에 오는, 아주 조심스러운 숨처럼.

“떠밀린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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