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1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15:49:02
제7막 개정본
떠밀린 왕관
눈이 녹지 않은 땅 위에, 금목서 향기가 번졌다.
프루센 변경의 겨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제6막에서 호흐마이스터가 밟아 눌렀던 용의 그림자는 무대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그 발자국은 여전히 눈 위에 남아 있었다.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왕관이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눈발 사이로 이번에는 다른 풍경이 솟았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진지.
반쯤 무너진 목책.
부러진 검.
피가 말라붙은 기도문.
성전 깃발은 찢긴 채 바람에 걸려 있었다.
어느 막사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투구가 굴러다녔고, 그 투구 안에는 눈이 고여 있었다.
기도소의 십자가는 아직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기도보다 오래된 고함과,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 땅의 침묵이 남아 있었다.
이곳은 패배한 기사단의 진지가 아니었다.
아직 패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사단의 진지였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가면에는 여섯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그리고 일곱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리보니아의 진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곱 번째 꿈.”
찢긴 성전 깃발이 바람에 울었다.
“떠밀린 왕관.”
그 말이 떨어지자, 진지 중앙에 의자가 하나 나타났다.
왕좌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했다.
그러나 보통 의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검우기사단장의 자리.
등받이에는 검 두 자루가 교차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래된 피와 기도문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 의자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단단하지만, 조금 당황한 발소리.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황금빛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푸른빛이 도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허리춤에 있었지만, 아직 뽑히지 않았다. 오른쪽 눈에는 안대가 없었다. 두 눈 모두 살아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보자마자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객석 일부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스트리트는 의자와 찢긴 깃발과 자기 앞으로 고개 숙인 기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검술 사사를 하러 온 거였지, 기사단장을 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요.”
진지 한쪽에서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건 아직도 납득 못 하는 게 정상이지.”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였으면?”
죠니가 무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의자부터 살폈겠지.”
“의자?”
“저런 의자는 대체로 앉는 순간 사람을 놓아주지 않거든. 게다가 저 바닥, 말이 달리기엔 최악이야.”
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말?”
“기사단장은 바닥부터 봐. 넘어지면 극적으로 보일 수는 있는데, 아프잖아.”
푸리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하지만 리보니아 진지의 공기가 웃음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검우기사들이 아스트리트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릎은 순종만을 뜻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불만을 삼키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녀를 꼭두각시로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성전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피로했고, 누군가는 그저 더 이상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라 무릎을 꿇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시선들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등 뒤에 별빛이 떴다.
차갑지 않은 별.
명령하는 별도, 심판하는 별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을 먼저 바라보는 별.
《별의 간택자Chosen》.
그 별빛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조용히 정렬되었다.
근력.
민첩.
내구.
지능.
영력.
정신.
어느 하나만 과하게 치솟지 않았다.
어느 하나만 뒤처지지도 않았다.
숨과 시선, 내공과 별빛, 검을 쥐는 손과 물러서지 않는 다리가 한 리듬으로 맞물렸다.
《창성천강지체蒼星天罡之體》.
아스트리트는 의자 앞에 섰다.
앉지 않았다.
그 순간,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도 아니고, 죄의 사제도 아니었다.
그는 서기처럼 보였다.
손에는 편지가 있었다.
아스트리트에게 도착했던 그 급한 편지.
‘리보니아에 와달라.’
‘상황이 위급하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와서 기사단장이 되어라.”
바실리오가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너는 속았다.”
아스트리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책임도 없다.”
아스트리트의 입술이 멈췄다.
바실리오는 웃었다.
“네가 원한 왕관이 아니다.
네가 세운 기사단도 아니다.
네가 저지른 성전광의 죄도 아니다.
너는 불려왔고, 떠밀렸고, 앉혀졌다.”
검우기사단장의 의자가 낮게 삐걱거렸다.
“그러니 실패해도 네 책임이 아니다.”
그 말은 달콤했다.
왜냐하면 사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리트는 정말 속았다.
그녀가 저지른 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기사단의 폭주가 아니었다.
그녀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불태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늦게 도착한 사람이었다.
이미 망가진 자리 위에 앉으라고 통보받은 사람.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러니 내려가라.
이 왕관은 네 것이 아니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보았다.
무거운 자리.
떠밀린 왕관.
그때 눈발 속에서 호흐마이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어깨에는 아직 《죄악의 갑주 Frevel Panzer》의 잔흔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전개된 갑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죄가 식어 굳은 철의 무게는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금빛 눈이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천양금안》.
그 눈은 아스트리트의 재능만 보지 않았다.
그녀의 당혹감.
억울함.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분노.
그럼에도 무릎 꿇은 기사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아스트리트가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
“나흐트로제 단장.”
“저는 아직도 그 편지가 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너무 쉽게 인정했다.
아스트리트는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속였습니다.”
“왜입니까?”
“깨끗한 사람을 찾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의 금빛 눈이 리보니아의 찢긴 깃발을 보았다.
“제가 더럽힌 자리 위에서도, 생명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스트리트는 주먹을 쥐었다.
“그 말로 정당화됩니까?”
“아니요.”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그러니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막은 제 막이 아닙니다. 저는 죄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 의자에 앉을지 말지는, 이제 당신의 문제입니다.”
그 말은 잔인했다.
그러나 정확했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다시 보았다.
바실리오가 웃었다.
“보아라. 그녀조차 인정했다. 너는 속았다. 그러니 내려가라.”
그때 무대 한쪽에서 검우기사 하나가 일어섰다.
그의 갑옷에는 오래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단장.”
그는 아스트리트를 향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우리는 성전을 위해 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명을 긍정하라 하십니까?”
다른 기사도 일어섰다.
“이교도 마을을 그냥 둔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기사.
“우리가 흘린 피는 무엇이 됩니까?”
성전 깃발이 흔들렸다.
아스트리트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괴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도문으로 자기 검을 씻으려는 사람들.
피로 더러워진 손을 신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사람들.
그러나 동시에, 버려지면 다시 폭주하거나 무너질 사람들.
아스트리트는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검을 내리십시오.”
첫 번째 기사가 웃었다.
“단장께서 우리를 베실 겁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그 순간 기사가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가 검을 뽑았다.
롱소드가 눈발을 갈랐다.
금목서 향기가 번졌다.
그녀의 호흡이 단전에 가라앉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쪽의 내공은 정갈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화유심법花遊心法》.
아스트리트는 기사의 검을 받아냈다.
강했다.
그러나 첫 번째 합은 완벽하지 않았다.
기사는 성전광으로 움직였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고, 검로는 거칠었으며, 죽어도 된다는 믿음으로 빈틈을 덮었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베지 않으려 했다.
그 망설임 때문에, 두 번째 기사의 방패가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쾅.
아스트리트가 한 걸음 밀렸다.
객석이 술렁였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보아라. 너는 이 자리에 맞지 않는다.”
아스트리트는 숨을 삼켰다.
어깨가 아팠다.
자존심도 조금 아팠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검을 들기 전,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별똥별처럼 보였다.
리보니아의 흐린 밤하늘을 가르고, 청흑빛 불꽃이 낮은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았다.
옆으로 떨어졌다.
비껴 떨어졌다.
아스트리트가 밀려난 발자국과 기사단장의 의자 사이, 바로 그 애매한 틈으로 떨어졌다.
낙하.
그러나 추락은 아니었다.
《유성천칙流星天則》.
청흑빛 유성이 무대 위에 발을 디뎠다.
대지가 울렸다.
부서진 것은 땅이 아니라, 바실리오가 만들어낸 “떠밀렸으니 끝났다”는 결론이었다.
아스테르다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
민다우가스의 망치.
그러나 누구의 톱니바퀴도 아닌 자.
그는 갑옷인지 별의 껍질인지 모를 청흑빛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전신의 선은 운철처럼 무거웠고, 그 주위에는 대기와 부딪힌 유성의 푸른 빛줄기가 짧게 타올랐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스테르다스 공?”
아스테르다스는 그녀가 밀려난 발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밀렸네.”
아스트리트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
“……보고 계셨습니까?”
“응.”
그는 너무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주 정확하게 밀렸어.”
“위로입니까?”
“아니. 관측.”
죠니가 멀리서 낮게 말했다.
“리투아니아식 위로는 꽤 딱딱하네.”
푸리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아?”
“나는 적어도 바닥 평가는 같이 해줘.”
아스테르다스는 두 사람의 농담을 흘려듣고, 눈 위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하지만 밀렸다는 건, 네 발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아스트리트는 숨을 골랐다.
아스테르다스의 등 뒤에서 별하늘 같은 심상이 아주 짧게 열렸다.
고고히 박힌 별.
그리고 그중 하나가 흐르기를 택하는 장면.
《흐르는 별이라 하여》.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하늘은 이미 그 안에 있었다.
“흐르는 별이라 하여, 길을 잃는 건 아니야.”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남이 정한 곳에 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한 걸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도 아래도 없었다.
그가 정한 방향이 아래였다.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아스테르다스는 아스트리트와 기사단장의 의자 사이에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낙하를 고정한 것처럼 보였다.
“너는 떠밀려 떨어졌어.”
아스테르다스는 말했다.
“그건 사실이지. 편지에 속았고, 의자 앞에 밀려왔어.”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책임도 없다.”
아스테르다스는 바실리오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떨어졌다는 것과, 어디에 닿을지를 포기했다는 건 달라.”
아스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발밑의 눈을 가볍게 밟았다.
하지만 그가 밟은 것은 눈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기사들이 휘두른 검로.
아스트리트가 놓친 간격.
의자가 끌어당기는 무게.
바실리오가 말한 책임 없음의 궤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낙점이 되었다.
《발을 디디다》.
“나는 누구의 톱니바퀴도 아니야.”
아스테르다스가 담백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떨어질 곳은, 내 자유로 정했다.”
청흑빛 불꽃이 짧게 일렁였다.
“너도 정해. 저 의자에 앉을지, 그 앞에 설지, 아니면 부숴버릴지.”
그가 아스트리트를 똑바로 보았다.
“그걸 네가 정하는 순간부터, 저 왕관은 너를 쓰지 못해.”
아스트리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위로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을 돌려주는 말이었다.
떠밀렸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억울함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다음 낙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스테르다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봐.”
“무엇을 말입니까?”
“네 발자국. 네 검로. 네가 막으려던 생명.”
그의 청흑빛 눈이 의자와 기사들과 피난민 환영을 차례로 훑었다.
“그 셋이 어긋난 곳부터.”
아스트리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 검로의 불균형을 보았다.
너무 살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막지 못한 검.
상처 내지 않으려 한 나머지, 더 큰 상처를 허락할 뻔한 순간.
떠밀려 온 자리에 대한 분노 때문에, 지금 눈앞의 생명을 보는 호흡이 한 박자 늦어진 자신.
아스트리트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호흡을 다시 내렸다.
《노력하는 자》.
그 특성은 실패를 지우지 않았다.
실패를 기록했다.
불균형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 검로를 고쳤다.
“다시.”
아스트리트가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눈 위에 금목서 씨앗처럼 작은 발자국이 남았다.
《서화瑞花》.
한 걸음.
그녀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씨앗이 땅을 가르듯, 검로 사이로 들어갔다.
두 걸음.
기사가 휘두른 검의 중심을 비켜냈다.
세 걸음.
방패를 든 기사의 무게중심을 꺾었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피지 않았다.
피워졌다.
금목서가 피었다.
꽃은 부드러웠지만, 가지는 강철보다 곧았다.
《만생개화검법滿生開花劍法》.
그녀의 검은 기사의 목을 치지 않았다.
손목을 눌렀다.
검자루를 비틀어 떨어뜨렸다.
무릎 뒤를 가볍게 쳐 꿇렸다.
갑옷 틈으로 치명상을 넣을 수 있었지만, 넣지 않았다.
대신 움직임을 멈췄다.
한 기사.
두 기사.
세 기사.
아스테르다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청흑빛 유성은 이미 낙점을 보여주었다.
이제 떨어져야 할 것은 아스트리트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리보니아의 진지는 작지 않았다.
성전광은 한 사람의 검으로 모두 멈출 수 없었다.
기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로가 흩어졌다.
누군가는 아스트리트를 향했고, 누군가는 무대 뒤편의 피난민 환영을 향했다.
그 순간 레이튼이 한 걸음 나왔다.
[여관:문답의 서재]의 별빛이 리보니아의 밤 위에 얇게 펼쳐졌다.
아스트리트 위에 여러 이름이 붙으려 했다.
속은 사람.
꼭두각시 단장.
성전 기사단장.
별의 간택자.
개혁자.
실패한 기사단의 얼굴.
레이튼이 손끝을 들어 올렸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이름들이 잠시 흐려졌다.
레이튼이 물었다.
“그대는 속아 올라온 단장입니까, 생명을 긍정하기로 선택한 기사입니까, 아니면 아직 그 이름들이 모두 끝나지 않은 별입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대답할 때가 아니었다.
하융의 창호가 열렸다.
회색빛 창 너머로 여러 리보니아가 보였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도망쳤소.”
창 하나에서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걷어차고 떠났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다시 피를 찾아 달렸다.
“그리하여 검우기사단은 다시 피를 찾아 달렸소.”
두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의자에 앉았지만, 얼굴마담이 되었다. 기사들은 그녀의 별빛을 성전광의 새 장식으로 삼았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왕관을 썼으나, 왕관이 그대를 썼소.”
세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죄책감과 부담에 무너졌다.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다, 더 많은 사람을 막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착한 마음이 검을 늦추어, 늦은 검이 더 많은 피를 불렀소.”
그리고 네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매일 실패했다.
매일 고쳤다.
한 기사를 설득하고, 두 기사를 처벌하고, 세 기사를 잃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사는 검을 내려놓았다.
다섯 번째 기사는 피난민을 호위했다.
여섯 번째 기사는 성전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자기 검을 보았다.
하융이 그 창을 오래 보았다.
“허나 저 창에서는…… 날마다 검로를 고치는 자가 있구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들었다.
날마다 검로를 고치는 자.
그 말이 그녀에게 닿았다.
완성된 단장.
완성된 구원자.
완성된 별의 간택자.
그런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고치는 자.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덧붙였다.
“좋은 낙점은 한 번에 잡히는 게 아니야.”
그는 무대 바닥에 남은 자기 청흑빛 궤적을 보았다.
“가끔은 몇 번이고 발을 디뎌봐야 하지.”
아스트리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나왔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리보니아 진지 곳곳에 켜졌다.
죽은 자의 이름.
죄지은 자의 이름.
살아남은 자의 이름.
다시 배워야 할 자의 이름.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사단 전체를 하나의 죄목으로 적지는 않겠습니다.”
검우기사들이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죄목이 없는 것처럼 적지도 않겠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펜을 댔다.
“누가 죽였고, 누가 살렸는지.
누가 광신에 취했고, 누가 검을 내려놓았는지.
누가 다시 배울 수 있는지.
누가 더 이상 검을 들면 안 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각각 적겠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듣고 검을 바로잡았다.
“각각.”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검우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성전이라는 단어 뒤에 숨지 마십시오.”
금목서 꽃잎이 눈발 사이에서 흩날렸다.
“지금 그대가 한 일은 약자를 짓밟은 것입니다.”
한 기사가 분노해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갑옷 주위에 금빛 꽃무늬가 번졌다.
《금상첨화錦上添花》.
기사의 검이 그녀의 어깨를 노렸지만, 금목서 심상의 호신강기가 검끝을 흘렸다.
아스트리트는 그 빈틈으로 들어갔다.
베지 않았다.
꺾었다.
검을 떨어뜨리고, 숨을 막지 않을 정도로만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살리기 위해서라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춰야 했다.
기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세웠다.
금목서 잎들이 그녀의 등 뒤에서 흩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각 잎이 하나의 검로를 품었다.
흩어진 잎들이 전장 곳곳에 자리 잡았다.
잎은 바람을 따르지 않았다.
모든 잎은 하나의 나무, 아스트리트의 호흡을 따랐다.
《계수성림桂樹成林》.
금목서의 숲이 리보니아 진지 위에 펼쳐졌다.
각 잎은 작은 검사처럼 움직였다.
어떤 잎은 기사들의 검끝을 눌렀다.
어떤 잎은 피난민 환영 앞에 방패처럼 섰다.
어떤 잎은 성전 깃발에 얽힌 피 묻은 천을 잘라냈다.
어떤 잎은 무릎 꿇은 기사의 투구 위에 내려앉아, 그가 다시 검을 들기 전 한 호흡을 벌어주었다.
기사들이 당황했다.
그들은 살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혔다.
그들의 검은 피를 향하지 못했다.
그들의 성전은 더 이상 돌진하지 못했다.
아스트리트는 계수성림의 중심에 섰다.
그녀의 숨은 거칠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바실리오가 외쳤다.
“너는 속았다! 이 책임은 네 것이 아니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보았다.
“맞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처음 이 왕관은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기사단장의 의자가 그녀 뒤에서 낮게 울었다.
“이 자리는 제게 떠밀렸습니다.
저는 속았고, 당황했고, 솔직히 지금도 화가 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스트리트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금목서의 잎들이 더 선명하게 빛났다.
“이 왕관 아래의 생명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제 선택입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좋은 낙점이네.”
아스트리트가 그를 보았다.
“낙점입니까?”
“응.”
청흑빛 유성은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떨어진 자리가 아니라, 네가 다시 닿기로 고른 자리.”
그 순간, 무대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좌의 목소리.
명령이 아니었다.
심판도 아니었다.
기준점이었다.
“생명을 긍정한다.”
시원성좌의 한 문장.
아스트리트의 등 뒤 별빛이 크게 흔들렸다.
《별의 간택자Chosen》의 빛이 그녀를 덮었다.
그녀는 기사단장의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앉아라. 그러면 네가 왕관을 쓴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검을 그 앞에 세웠다.
“아니요.”
바실리오가 멈췄다.
“나는 이 의자에 잡아먹히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신 의자 앞에 섰다.
“처음 받은 것은 강요였을지라도, 지금부터의 명령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금목서의 숲이 조금 더 넓어졌다.
아스트리트의 검 끝에서 작은 열매 같은 빛이 맺혔다.
그녀는 나흐트로제의 검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검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았다.
망가진 기사단 안에서.
속아서 맡은 자리 안에서.
실패와 수정의 반복 안에서.
검은 새 결실을 맺었다.
《결실을 맺는 자》.
한 기사단원이 검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기사는 주저하다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는 이를 갈며 물러섰다.
누군가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했다.
모두가 하루 만에 바뀌지는 않았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한 번의 선언으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가지가 바로잡혔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떠밀린 배역.
원하지 않은 무대.
속아서 올라온 배우.
그럼에도 그 배우가 자기 발로 다시 서서, 대사를 고쳐 쓰는 순간.
푸리나는 아주 낮게 말했다.
“배우가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죠니가 그녀 옆에서 물었다.
“또 대사 떠올랐어?”
푸리나는 그를 흘끗 보았다.
“방해하지 마. 좋은 순간이었거든.”
죠니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계속해. 오늘은 꽤 괜찮은 장면이야. 말 한 필 들어갈 자리도 없을 만큼 복잡하긴 한데.”
“그게 칭찬이야?”
“칭찬이지. 좋은 무대는 대체로 말이 싫어하거든. 너무 섬세해서.”
푸리나는 피식 웃었다.
“너는 꼭 감상을 기병 평가처럼 하더라.”
“내가 아는 전문 분야니까.”
푸리나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배우가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대본을 받지 않았던 척하는 순간이 아니야.”
그녀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받은 대본 위에 자기 손으로 다음 줄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이지.”
죠니가 말했다.
“이번 건 괜찮네.”
“칭찬이야?”
“응. 이번엔 확실히.”
“그러면 출연료는?”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가 그 말을 하려던 참인데?”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이 정도로 조언역을 했으면 슬슬 출연료를 청구해야지. 현물도 받는다.”
“현물?”
“술. 좋은 안장. 아니면 말이 미끄러지지 않는 무대 바닥.”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마지막 건 내가 진지하게 고려해볼게.”
“좋아. 내 말이 처음으로 네 극장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그때 바실리오가 마지막으로 아스트리트에게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책임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
아스트리트는 대답했다.
“매일 다시 선택하겠습니다.”
그녀는 검을 내려, 무릎 꿇은 기사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매일 실패할 겁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매일 틀린 검로를 고치고, 매일 잘못된 명령을 바로잡고, 매일 성전이라는 말 뒤에 숨은 폭력을 끌어낼 겁니다.”
아스트리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이 왕관을 다시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어리석군. 왕관을 쓰지 않고 왕관을 책임지려 하다니.”
아스트리트는 말했다.
“그게 기사단장이라면, 해보겠습니다.”
바실리오는 사라졌다.
기사단장의 의자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스트리트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누군가가 앉는 자리라기보다 누군가가 책임 앞에 서는 자리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일곱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떠밀린 왕관.
그리고 그 아래.
처음은 강요였으나, 다음은 선택이었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여러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
리보니아가 다시 폭주하는 창.
아스트리트가 지쳐 무너지는 창.
기사단이 생명성의 이름을 새 장식으로 삼는 창.
그러나 다른 창에서는, 한 기사씩 검로를 고치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아직 멀구려.”
푸리나가 물었다.
“그래도?”
하융은 창 너머의 금목서 숲을 보았다.
“허나 날마다 고치는 자가 있소. 그런 자의 길은, 느려도 쉽게 끊어지지 않겠지.”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름이 하나 더해졌군요.”
아스트리트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속은 사람도, 단장도, 개혁자도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책임을 다시 선택한 사람.”
아스트리트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레이튼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훌륭한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죄악의 갑주는 여전히 어깨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잎 하나가 눈 위에 내려앉자,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눈을 감았다.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부디, 그 길이 저보다 오래가기를.”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들으며 리보니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하늘에 박힌 별이 아니었다.
흘러 떨어지는 별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부수기 위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낙점을 다시 고를 수 있도록, 그 틈에 떨어졌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나는 그냥 내가 떨어질 곳을 정했을 뿐이지.”
“그 낙점이 저였습니까?”
“정확히는 네가 밀려난 자리와, 다시 디딜 자리 사이.”
아스트리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럼 저도 언젠가, 그런 식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넌 유성이 아니잖아.”
아스트리트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아스테르다스는 이어 말했다.
“대신 나무지. 금목서.”
그는 계수성림의 잎 하나를 보았다.
“별은 떨어져 닿고, 나무는 뿌리내려 버틴다.
방식이 다른 거야.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응. 그러니까 네 방식으로 해.”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여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금목서 향기와 청흑빛 별의 잔광 사이에서 일곱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책임.
푸리나는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일곱 번째 꿈은 떠밀린 왕관이었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 받은 배역은 폭력이었을지도 몰라.
속임수였을지도 몰라.
누군가가 던진 짐이었을지도 몰라.”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배역 아래 있는 생명들을 보고, 스스로 다음 줄을 쓰기 시작한다면.”
푸리나는 가면을 낮추었다.
“그때부터 그 배역은 감옥이 아니라 책임이 될 수 있겠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책임도 가끔 감옥 같긴 해.”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문이 있는 감옥이면 좀 낫지. 나갈 수 있는데도 남아 있는 거니까.”
푸리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그거 좋은데?”
“쓰려면 사용료 받아.”
“술? 안장? 미끄럽지 않은 무대 바닥?”
죠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협상력이 생겼네, 여왕님.”
푸리나는 이번에는 웃었다.
금목서 향기가 리보니아의 눈 속에서 아주 천천히 퍼졌다.
청흑빛 유성의 잔광도 잠시 그 위를 스쳤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기사단의 죄는 남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의 공작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스트리트의 억울함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성전광은 하루 만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바뀌었다.
떠밀린 왕관은 더 이상 아스트리트를 삼키지 못했다.
그녀는 왕관을 머리에 쓰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자리를, 스스로 다시 골랐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무대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진지의 목책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금목서 잎들은 바닥에 남아 있다가, 작은 씨앗처럼 사라졌다.
청흑빛 유성의 궤적은 밤하늘에 아주 짧게 남았다가, 스스로 정한 낙점을 마친 별처럼 사라졌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일곱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그리고 여덟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 조용한 행정실의 등불이 켜졌다.
휘장도, 왕좌도, 검도 아닌 빛.
종이 냄새.
오래된 잉크.
닫힌 여관의 먼지.
그리고 붉은 꽃이 만개한 곳을 끝내 잊지 못한 사람의 침묵.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푸리나를 향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조명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것을 느꼈다.
다음 꿈은 웃고 있는 극장을 향해 걸어오는, 닫힌 여관의 재상이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닫힌 여관의 재상.”
떠밀린 왕관
눈이 녹지 않은 땅 위에, 금목서 향기가 번졌다.
프루센 변경의 겨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제6막에서 호흐마이스터가 밟아 눌렀던 용의 그림자는 무대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그 발자국은 여전히 눈 위에 남아 있었다.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왕관이 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눈발 사이로 이번에는 다른 풍경이 솟았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진지.
반쯤 무너진 목책.
부러진 검.
피가 말라붙은 기도문.
성전 깃발은 찢긴 채 바람에 걸려 있었다.
어느 막사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투구가 굴러다녔고, 그 투구 안에는 눈이 고여 있었다.
기도소의 십자가는 아직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기도보다 오래된 고함과,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 땅의 침묵이 남아 있었다.
이곳은 패배한 기사단의 진지가 아니었다.
아직 패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사단의 진지였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무대 가장자리에 섰다.
가면에는 여섯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그리고 일곱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리보니아의 진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곱 번째 꿈.”
찢긴 성전 깃발이 바람에 울었다.
“떠밀린 왕관.”
그 말이 떨어지자, 진지 중앙에 의자가 하나 나타났다.
왕좌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했다.
그러나 보통 의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검우기사단장의 자리.
등받이에는 검 두 자루가 교차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오래된 피와 기도문이 엉겨 붙어 있었다.
그 의자는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단단하지만, 조금 당황한 발소리.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황금빛 머리칼을 단정히 묶고, 푸른빛이 도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허리춤에 있었지만, 아직 뽑히지 않았다. 오른쪽 눈에는 안대가 없었다. 두 눈 모두 살아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보자마자 멈춰 섰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객석 일부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스트리트는 의자와 찢긴 깃발과 자기 앞으로 고개 숙인 기사들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검술 사사를 하러 온 거였지, 기사단장을 하러 온 게 아니었는데요.”
진지 한쪽에서 죠니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건 아직도 납득 못 하는 게 정상이지.”
푸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였으면?”
죠니가 무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의자부터 살폈겠지.”
“의자?”
“저런 의자는 대체로 앉는 순간 사람을 놓아주지 않거든. 게다가 저 바닥, 말이 달리기엔 최악이야.”
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말?”
“기사단장은 바닥부터 봐. 넘어지면 극적으로 보일 수는 있는데, 아프잖아.”
푸리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하지만 리보니아 진지의 공기가 웃음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검우기사들이 아스트리트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릎은 순종만을 뜻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불만을 삼키고 있었다.
어떤 이는 그녀를 꼭두각시로 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성전의 권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피로했고, 누군가는 그저 더 이상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라 무릎을 꿇었다.
아스트리트는 그 시선들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등 뒤에 별빛이 떴다.
차갑지 않은 별.
명령하는 별도, 심판하는 별도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을 먼저 바라보는 별.
《별의 간택자Chosen》.
그 별빛 아래에서 그녀의 몸이 조용히 정렬되었다.
근력.
민첩.
내구.
지능.
영력.
정신.
어느 하나만 과하게 치솟지 않았다.
어느 하나만 뒤처지지도 않았다.
숨과 시선, 내공과 별빛, 검을 쥐는 손과 물러서지 않는 다리가 한 리듬으로 맞물렸다.
《창성천강지체蒼星天罡之體》.
아스트리트는 의자 앞에 섰다.
앉지 않았다.
그 순간,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왕도 아니고, 죄의 사제도 아니었다.
그는 서기처럼 보였다.
손에는 편지가 있었다.
아스트리트에게 도착했던 그 급한 편지.
‘리보니아에 와달라.’
‘상황이 위급하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와서 기사단장이 되어라.”
바실리오가 편지를 흔들며 말했다.
“너는 속았다.”
아스트리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맞습니다.”
“그렇다면 책임도 없다.”
아스트리트의 입술이 멈췄다.
바실리오는 웃었다.
“네가 원한 왕관이 아니다.
네가 세운 기사단도 아니다.
네가 저지른 성전광의 죄도 아니다.
너는 불려왔고, 떠밀렸고, 앉혀졌다.”
검우기사단장의 의자가 낮게 삐걱거렸다.
“그러니 실패해도 네 책임이 아니다.”
그 말은 달콤했다.
왜냐하면 사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리트는 정말 속았다.
그녀가 저지른 죄가 아니었다.
그녀가 만든 기사단의 폭주가 아니었다.
그녀가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을 불태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늦게 도착한 사람이었다.
이미 망가진 자리 위에 앉으라고 통보받은 사람.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러니 내려가라.
이 왕관은 네 것이 아니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보았다.
무거운 자리.
떠밀린 왕관.
그때 눈발 속에서 호흐마이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어깨에는 아직 《죄악의 갑주 Frevel Panzer》의 잔흔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전개된 갑주는 아니었다. 그러나 죄가 식어 굳은 철의 무게는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금빛 눈이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천양금안》.
그 눈은 아스트리트의 재능만 보지 않았다.
그녀의 당혹감.
억울함.
아직 정리되지 않은 분노.
그럼에도 무릎 꿇은 기사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아스트리트가 호흐마이스터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
“나흐트로제 단장.”
“저는 아직도 그 편지가 사기였다고 생각합니다.”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너무 쉽게 인정했다.
아스트리트는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호흐마이스터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을 속였습니다.”
“왜입니까?”
“깨끗한 사람을 찾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호흐마이스터의 금빛 눈이 리보니아의 찢긴 깃발을 보았다.
“제가 더럽힌 자리 위에서도, 생명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아스트리트는 주먹을 쥐었다.
“그 말로 정당화됩니까?”
“아니요.”
호흐마이스터는 즉시 대답했다.
“그러니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막은 제 막이 아닙니다. 저는 죄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 의자에 앉을지 말지는, 이제 당신의 문제입니다.”
그 말은 잔인했다.
그러나 정확했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다시 보았다.
바실리오가 웃었다.
“보아라. 그녀조차 인정했다. 너는 속았다. 그러니 내려가라.”
그때 무대 한쪽에서 검우기사 하나가 일어섰다.
그의 갑옷에는 오래된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단장.”
그는 아스트리트를 향해 무릎을 꿇지 않았다.
“우리는 성전을 위해 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명을 긍정하라 하십니까?”
다른 기사도 일어섰다.
“이교도 마을을 그냥 둔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기사.
“우리가 흘린 피는 무엇이 됩니까?”
성전 깃발이 흔들렸다.
아스트리트는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괴물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기도문으로 자기 검을 씻으려는 사람들.
피로 더러워진 손을 신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사람들.
그러나 동시에, 버려지면 다시 폭주하거나 무너질 사람들.
아스트리트는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검을 내리십시오.”
첫 번째 기사가 웃었다.
“단장께서 우리를 베실 겁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그 순간 기사가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가 검을 뽑았다.
롱소드가 눈발을 갈랐다.
금목서 향기가 번졌다.
그녀의 호흡이 단전에 가라앉았다.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쪽의 내공은 정갈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화유심법花遊心法》.
아스트리트는 기사의 검을 받아냈다.
강했다.
그러나 첫 번째 합은 완벽하지 않았다.
기사는 성전광으로 움직였다.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고, 검로는 거칠었으며, 죽어도 된다는 믿음으로 빈틈을 덮었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베지 않으려 했다.
그 망설임 때문에, 두 번째 기사의 방패가 그녀의 어깨를 밀쳤다.
쾅.
아스트리트가 한 걸음 밀렸다.
객석이 술렁였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보아라. 너는 이 자리에 맞지 않는다.”
아스트리트는 숨을 삼켰다.
어깨가 아팠다.
자존심도 조금 아팠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검을 들기 전,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처음에는 별똥별처럼 보였다.
리보니아의 흐린 밤하늘을 가르고, 청흑빛 불꽃이 낮은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았다.
옆으로 떨어졌다.
비껴 떨어졌다.
아스트리트가 밀려난 발자국과 기사단장의 의자 사이, 바로 그 애매한 틈으로 떨어졌다.
낙하.
그러나 추락은 아니었다.
《유성천칙流星天則》.
청흑빛 유성이 무대 위에 발을 디뎠다.
대지가 울렸다.
부서진 것은 땅이 아니라, 바실리오가 만들어낸 “떠밀렸으니 끝났다”는 결론이었다.
아스테르다스.
리투아니아의 청흑빛 유성.
민다우가스의 망치.
그러나 누구의 톱니바퀴도 아닌 자.
그는 갑옷인지 별의 껍질인지 모를 청흑빛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전신의 선은 운철처럼 무거웠고, 그 주위에는 대기와 부딪힌 유성의 푸른 빛줄기가 짧게 타올랐다.
아스트리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스테르다스 공?”
아스테르다스는 그녀가 밀려난 발자국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밀렸네.”
아스트리트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
“……보고 계셨습니까?”
“응.”
그는 너무 담백하게 대답했다.
“아주 정확하게 밀렸어.”
“위로입니까?”
“아니. 관측.”
죠니가 멀리서 낮게 말했다.
“리투아니아식 위로는 꽤 딱딱하네.”
푸리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아?”
“나는 적어도 바닥 평가는 같이 해줘.”
아스테르다스는 두 사람의 농담을 흘려듣고, 눈 위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하지만 밀렸다는 건, 네 발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아스트리트는 숨을 골랐다.
아스테르다스의 등 뒤에서 별하늘 같은 심상이 아주 짧게 열렸다.
고고히 박힌 별.
그리고 그중 하나가 흐르기를 택하는 장면.
《흐르는 별이라 하여》.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하늘은 이미 그 안에 있었다.
“흐르는 별이라 하여, 길을 잃는 건 아니야.”
아스테르다스가 말했다.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남이 정한 곳에 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한 걸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도 아래도 없었다.
그가 정한 방향이 아래였다.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아스테르다스는 아스트리트와 기사단장의 의자 사이에서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낙하를 고정한 것처럼 보였다.
“너는 떠밀려 떨어졌어.”
아스테르다스는 말했다.
“그건 사실이지. 편지에 속았고, 의자 앞에 밀려왔어.”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다면 책임도 없다.”
아스테르다스는 바실리오를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떨어졌다는 것과, 어디에 닿을지를 포기했다는 건 달라.”
아스트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스테르다스가 발밑의 눈을 가볍게 밟았다.
하지만 그가 밟은 것은 눈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기사들이 휘두른 검로.
아스트리트가 놓친 간격.
의자가 끌어당기는 무게.
바실리오가 말한 책임 없음의 궤도.
그 모든 것이 하나의 낙점이 되었다.
《발을 디디다》.
“나는 누구의 톱니바퀴도 아니야.”
아스테르다스가 담백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떨어질 곳은, 내 자유로 정했다.”
청흑빛 불꽃이 짧게 일렁였다.
“너도 정해. 저 의자에 앉을지, 그 앞에 설지, 아니면 부숴버릴지.”
그가 아스트리트를 똑바로 보았다.
“그걸 네가 정하는 순간부터, 저 왕관은 너를 쓰지 못해.”
아스트리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명령이 아니었다.
위로도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을 돌려주는 말이었다.
떠밀렸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억울함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다음 낙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스테르다스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봐.”
“무엇을 말입니까?”
“네 발자국. 네 검로. 네가 막으려던 생명.”
그의 청흑빛 눈이 의자와 기사들과 피난민 환영을 차례로 훑었다.
“그 셋이 어긋난 곳부터.”
아스트리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는 패배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 검로의 불균형을 보았다.
너무 살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막지 못한 검.
상처 내지 않으려 한 나머지, 더 큰 상처를 허락할 뻔한 순간.
떠밀려 온 자리에 대한 분노 때문에, 지금 눈앞의 생명을 보는 호흡이 한 박자 늦어진 자신.
아스트리트는 이를 악물지 않았다.
호흡을 다시 내렸다.
《노력하는 자》.
그 특성은 실패를 지우지 않았다.
실패를 기록했다.
불균형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음 검로를 고쳤다.
“다시.”
아스트리트가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눈 위에 금목서 씨앗처럼 작은 발자국이 남았다.
《서화瑞花》.
한 걸음.
그녀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씨앗이 땅을 가르듯, 검로 사이로 들어갔다.
두 걸음.
기사가 휘두른 검의 중심을 비켜냈다.
세 걸음.
방패를 든 기사의 무게중심을 꺾었다.
아스트리트의 검이 피지 않았다.
피워졌다.
금목서가 피었다.
꽃은 부드러웠지만, 가지는 강철보다 곧았다.
《만생개화검법滿生開花劍法》.
그녀의 검은 기사의 목을 치지 않았다.
손목을 눌렀다.
검자루를 비틀어 떨어뜨렸다.
무릎 뒤를 가볍게 쳐 꿇렸다.
갑옷 틈으로 치명상을 넣을 수 있었지만, 넣지 않았다.
대신 움직임을 멈췄다.
한 기사.
두 기사.
세 기사.
아스테르다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끼어들지 않았다.
청흑빛 유성은 이미 낙점을 보여주었다.
이제 떨어져야 할 것은 아스트리트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리보니아의 진지는 작지 않았다.
성전광은 한 사람의 검으로 모두 멈출 수 없었다.
기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검로가 흩어졌다.
누군가는 아스트리트를 향했고, 누군가는 무대 뒤편의 피난민 환영을 향했다.
그 순간 레이튼이 한 걸음 나왔다.
[여관:문답의 서재]의 별빛이 리보니아의 밤 위에 얇게 펼쳐졌다.
아스트리트 위에 여러 이름이 붙으려 했다.
속은 사람.
꼭두각시 단장.
성전 기사단장.
별의 간택자.
개혁자.
실패한 기사단의 얼굴.
레이튼이 손끝을 들어 올렸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이름들이 잠시 흐려졌다.
레이튼이 물었다.
“그대는 속아 올라온 단장입니까, 생명을 긍정하기로 선택한 기사입니까, 아니면 아직 그 이름들이 모두 끝나지 않은 별입니까?”
아스트리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대답할 때가 아니었다.
하융의 창호가 열렸다.
회색빛 창 너머로 여러 리보니아가 보였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도망쳤소.”
창 하나에서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걷어차고 떠났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다시 피를 찾아 달렸다.
“그리하여 검우기사단은 다시 피를 찾아 달렸소.”
두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의자에 앉았지만, 얼굴마담이 되었다. 기사들은 그녀의 별빛을 성전광의 새 장식으로 삼았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왕관을 썼으나, 왕관이 그대를 썼소.”
세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죄책감과 부담에 무너졌다. 아무도 죽이지 않으려다, 더 많은 사람을 막지 못했다.
“어느 창에서는 착한 마음이 검을 늦추어, 늦은 검이 더 많은 피를 불렀소.”
그리고 네 번째 창.
아스트리트는 매일 실패했다.
매일 고쳤다.
한 기사를 설득하고, 두 기사를 처벌하고, 세 기사를 잃었다.
그러나 네 번째 기사는 검을 내려놓았다.
다섯 번째 기사는 피난민을 호위했다.
여섯 번째 기사는 성전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 자기 검을 보았다.
하융이 그 창을 오래 보았다.
“허나 저 창에서는…… 날마다 검로를 고치는 자가 있구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들었다.
날마다 검로를 고치는 자.
그 말이 그녀에게 닿았다.
완성된 단장.
완성된 구원자.
완성된 별의 간택자.
그런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고치는 자.
아스테르다스가 낮게 덧붙였다.
“좋은 낙점은 한 번에 잡히는 게 아니야.”
그는 무대 바닥에 남은 자기 청흑빛 궤적을 보았다.
“가끔은 몇 번이고 발을 디뎌봐야 하지.”
아스트리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그레이가 장부를 들고 나왔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리보니아 진지 곳곳에 켜졌다.
죽은 자의 이름.
죄지은 자의 이름.
살아남은 자의 이름.
다시 배워야 할 자의 이름.
그레이는 조용히 말했다.
“기사단 전체를 하나의 죄목으로 적지는 않겠습니다.”
검우기사들이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죄목이 없는 것처럼 적지도 않겠습니다.”
그레이는 장부에 펜을 댔다.
“누가 죽였고, 누가 살렸는지.
누가 광신에 취했고, 누가 검을 내려놓았는지.
누가 다시 배울 수 있는지.
누가 더 이상 검을 들면 안 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각각 적겠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듣고 검을 바로잡았다.
“각각.”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검우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성전이라는 단어 뒤에 숨지 마십시오.”
금목서 꽃잎이 눈발 사이에서 흩날렸다.
“지금 그대가 한 일은 약자를 짓밟은 것입니다.”
한 기사가 분노해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갑옷 주위에 금빛 꽃무늬가 번졌다.
《금상첨화錦上添花》.
기사의 검이 그녀의 어깨를 노렸지만, 금목서 심상의 호신강기가 검끝을 흘렸다.
아스트리트는 그 빈틈으로 들어갔다.
베지 않았다.
꺾었다.
검을 떨어뜨리고, 숨을 막지 않을 정도로만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살리기 위해서라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춰야 했다.
기사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아스트리트는 검을 세웠다.
금목서 잎들이 그녀의 등 뒤에서 흩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잎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각 잎이 하나의 검로를 품었다.
흩어진 잎들이 전장 곳곳에 자리 잡았다.
잎은 바람을 따르지 않았다.
모든 잎은 하나의 나무, 아스트리트의 호흡을 따랐다.
《계수성림桂樹成林》.
금목서의 숲이 리보니아 진지 위에 펼쳐졌다.
각 잎은 작은 검사처럼 움직였다.
어떤 잎은 기사들의 검끝을 눌렀다.
어떤 잎은 피난민 환영 앞에 방패처럼 섰다.
어떤 잎은 성전 깃발에 얽힌 피 묻은 천을 잘라냈다.
어떤 잎은 무릎 꿇은 기사의 투구 위에 내려앉아, 그가 다시 검을 들기 전 한 호흡을 벌어주었다.
기사들이 당황했다.
그들은 살해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혔다.
그들의 검은 피를 향하지 못했다.
그들의 성전은 더 이상 돌진하지 못했다.
아스트리트는 계수성림의 중심에 섰다.
그녀의 숨은 거칠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바실리오가 외쳤다.
“너는 속았다! 이 책임은 네 것이 아니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보았다.
“맞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처음 이 왕관은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기사단장의 의자가 그녀 뒤에서 낮게 울었다.
“이 자리는 제게 떠밀렸습니다.
저는 속았고, 당황했고, 솔직히 지금도 화가 납니다.”
호흐마이스터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스트리트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지금.”
금목서의 잎들이 더 선명하게 빛났다.
“이 왕관 아래의 생명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제 선택입니다.”
아스테르다스가 아주 작게 웃었다.
“좋은 낙점이네.”
아스트리트가 그를 보았다.
“낙점입니까?”
“응.”
청흑빛 유성은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떨어진 자리가 아니라, 네가 다시 닿기로 고른 자리.”
그 순간, 무대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좌의 목소리.
명령이 아니었다.
심판도 아니었다.
기준점이었다.
“생명을 긍정한다.”
시원성좌의 한 문장.
아스트리트의 등 뒤 별빛이 크게 흔들렸다.
《별의 간택자Chosen》의 빛이 그녀를 덮었다.
그녀는 기사단장의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바실리오가 속삭였다.
“앉아라. 그러면 네가 왕관을 쓴다.”
아스트리트는 의자를 보았다.
그리고 검을 그 앞에 세웠다.
“아니요.”
바실리오가 멈췄다.
“나는 이 의자에 잡아먹히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대신 의자 앞에 섰다.
“처음 받은 것은 강요였을지라도, 지금부터의 명령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금목서의 숲이 조금 더 넓어졌다.
아스트리트의 검 끝에서 작은 열매 같은 빛이 맺혔다.
그녀는 나흐트로제의 검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검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았다.
망가진 기사단 안에서.
속아서 맡은 자리 안에서.
실패와 수정의 반복 안에서.
검은 새 결실을 맺었다.
《결실을 맺는 자》.
한 기사단원이 검을 내려놓았다.
또 다른 기사는 주저하다 무릎을 꿇었다.
누군가는 이를 갈며 물러섰다.
누군가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했다.
모두가 하루 만에 바뀌지는 않았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은 한 번의 선언으로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첫 번째 가지가 바로잡혔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떠밀린 배역.
원하지 않은 무대.
속아서 올라온 배우.
그럼에도 그 배우가 자기 발로 다시 서서, 대사를 고쳐 쓰는 순간.
푸리나는 아주 낮게 말했다.
“배우가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죠니가 그녀 옆에서 물었다.
“또 대사 떠올랐어?”
푸리나는 그를 흘끗 보았다.
“방해하지 마. 좋은 순간이었거든.”
죠니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계속해. 오늘은 꽤 괜찮은 장면이야. 말 한 필 들어갈 자리도 없을 만큼 복잡하긴 한데.”
“그게 칭찬이야?”
“칭찬이지. 좋은 무대는 대체로 말이 싫어하거든. 너무 섬세해서.”
푸리나는 피식 웃었다.
“너는 꼭 감상을 기병 평가처럼 하더라.”
“내가 아는 전문 분야니까.”
푸리나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배우가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대본을 받지 않았던 척하는 순간이 아니야.”
그녀는 아스트리트를 보았다.
“받은 대본 위에 자기 손으로 다음 줄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이지.”
죠니가 말했다.
“이번 건 괜찮네.”
“칭찬이야?”
“응. 이번엔 확실히.”
“그러면 출연료는?”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내가 그 말을 하려던 참인데?”
푸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이 정도로 조언역을 했으면 슬슬 출연료를 청구해야지. 현물도 받는다.”
“현물?”
“술. 좋은 안장. 아니면 말이 미끄러지지 않는 무대 바닥.”
푸리나는 결국 웃었다.
“마지막 건 내가 진지하게 고려해볼게.”
“좋아. 내 말이 처음으로 네 극장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그때 바실리오가 마지막으로 아스트리트에게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책임을 선택할 수 있겠느냐?”
아스트리트는 대답했다.
“매일 다시 선택하겠습니다.”
그녀는 검을 내려, 무릎 꿇은 기사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매일 실패할 겁니다.”
기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매일 틀린 검로를 고치고, 매일 잘못된 명령을 바로잡고, 매일 성전이라는 말 뒤에 숨은 폭력을 끌어낼 겁니다.”
아스트리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이 왕관을 다시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바실리오의 그림자가 흐려졌다.
“어리석군. 왕관을 쓰지 않고 왕관을 책임지려 하다니.”
아스트리트는 말했다.
“그게 기사단장이라면, 해보겠습니다.”
바실리오는 사라졌다.
기사단장의 의자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스트리트를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누군가가 앉는 자리라기보다 누군가가 책임 앞에 서는 자리처럼 보였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일곱 번째 막의 이름을 적었다.
떠밀린 왕관.
그리고 그 아래.
처음은 강요였으나, 다음은 선택이었다.
하융은 창호 너머를 보았다.
여러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었다.
리보니아가 다시 폭주하는 창.
아스트리트가 지쳐 무너지는 창.
기사단이 생명성의 이름을 새 장식으로 삼는 창.
그러나 다른 창에서는, 한 기사씩 검로를 고치고 있었다.
하융이 낮게 말했다.
“아직 멀구려.”
푸리나가 물었다.
“그래도?”
하융은 창 너머의 금목서 숲을 보았다.
“허나 날마다 고치는 자가 있소. 그런 자의 길은, 느려도 쉽게 끊어지지 않겠지.”
레이튼은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렸다.
“이름이 하나 더해졌군요.”
아스트리트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속은 사람도, 단장도, 개혁자도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책임을 다시 선택한 사람.”
아스트리트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레이튼의 미소가 조금 깊어졌다.
“훌륭한 답입니다.”
호흐마이스터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죄악의 갑주는 여전히 어깨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잎 하나가 눈 위에 내려앉자,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눈을 감았다.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부디, 그 길이 저보다 오래가기를.”
아스테르다스는 그 말을 들으며 리보니아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하늘에 박힌 별이 아니었다.
흘러 떨어지는 별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부수기 위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낙점을 다시 고를 수 있도록, 그 틈에 떨어졌다.
아스트리트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나는 그냥 내가 떨어질 곳을 정했을 뿐이지.”
“그 낙점이 저였습니까?”
“정확히는 네가 밀려난 자리와, 다시 디딜 자리 사이.”
아스트리트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럼 저도 언젠가, 그런 식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넌 유성이 아니잖아.”
아스트리트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아스테르다스는 이어 말했다.
“대신 나무지. 금목서.”
그는 계수성림의 잎 하나를 보았다.
“별은 떨어져 닿고, 나무는 뿌리내려 버틴다.
방식이 다른 거야.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아스트리트는 그 말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렇군요.”
“응. 그러니까 네 방식으로 해.”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가면에는 여섯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금목서 향기와 청흑빛 별의 잔광 사이에서 일곱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책임.
푸리나는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일곱 번째 꿈은 떠밀린 왕관이었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 받은 배역은 폭력이었을지도 몰라.
속임수였을지도 몰라.
누군가가 던진 짐이었을지도 몰라.”
아스트리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배역 아래 있는 생명들을 보고, 스스로 다음 줄을 쓰기 시작한다면.”
푸리나는 가면을 낮추었다.
“그때부터 그 배역은 감옥이 아니라 책임이 될 수 있겠지.”
죠니가 낮게 말했다.
“책임도 가끔 감옥 같긴 해.”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피식 웃었다.
“그래도 문이 있는 감옥이면 좀 낫지. 나갈 수 있는데도 남아 있는 거니까.”
푸리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그거 좋은데?”
“쓰려면 사용료 받아.”
“술? 안장? 미끄럽지 않은 무대 바닥?”
죠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협상력이 생겼네, 여왕님.”
푸리나는 이번에는 웃었다.
금목서 향기가 리보니아의 눈 속에서 아주 천천히 퍼졌다.
청흑빛 유성의 잔광도 잠시 그 위를 스쳤다.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기사단의 죄는 남아 있었다.
호흐마이스터의 공작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스트리트의 억울함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성전광은 하루 만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바뀌었다.
떠밀린 왕관은 더 이상 아스트리트를 삼키지 못했다.
그녀는 왕관을 머리에 쓰지 않았다.
대신 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자리를, 스스로 다시 골랐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무대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진지의 목책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금목서 잎들은 바닥에 남아 있다가, 작은 씨앗처럼 사라졌다.
청흑빛 유성의 궤적은 밤하늘에 아주 짧게 남았다가, 스스로 정한 낙점을 마친 별처럼 사라졌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일곱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그리고 여덟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 조용한 행정실의 등불이 켜졌다.
휘장도, 왕좌도, 검도 아닌 빛.
종이 냄새.
오래된 잉크.
닫힌 여관의 먼지.
그리고 붉은 꽃이 만개한 곳을 끝내 잊지 못한 사람의 침묵.
슈샤니크 파흘라부니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푸리나를 향해 있었다.
푸리나는 그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조명이 자기 자신을 비추는 것을 느꼈다.
다음 꿈은 웃고 있는 극장을 향해 걸어오는, 닫힌 여관의 재상이었다.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다음 꿈.”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닫힌 여관의 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