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3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16:24:39
제9막

모든 이에게 평화를

닫힌 여관의 문 앞에 놓인 찻잔에서, 마지막 김이 올랐다.

그 김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어느새 행정실의 잉크 냄새와 먼지 냄새가 물러가고, 그 자리에 사람들의 숨결이 들어찼다.

처음에는 희미한 웅성거림이었다.

시장 바닥을 쓰는 소리.
항구의 밧줄이 삐걱이는 소리.
피난민 수용소의 솥에서 국물이 끓는 소리.
병사의 갑옷이 무겁게 흔들리는 소리.
장인이 활시위를 손끝으로 튕기는 소리.
교실에서 아이들이 같은 문장을 어긋난 박자로 따라 읽는 소리.

무대는 궁정이 아니었다.

보좌도 없었다.
황금 장식도 없었다.
자주빛 휘장은 저 멀리, 바람에 작게 흔들릴 뿐이었다.

그 대신 낮은 단상이 있었다.

너무 낮아, 황제가 올라서기에는 초라했다.
그러나 너무 낮았기 때문에, 아이도, 피난민도, 시장 상인도, 부상병도 그 위에 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그 단상 옆에 섰다.

가면에는 여덟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그리고 아홉 번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단상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어린 황제가 서 있었다.

요안나 4세 두카이나 라스카리나.

니케아의 공동황제.
마지막 라스카리스.
자주빛으로 태어난 아이.
그리고 너무 어린 목소리로, 너무 큰 꿈을 말하는 사람.

그녀는 작았다.

단상에 올라섰는데도, 몇몇 병사보다 훨씬 낮아 보였다.
궁정의 노련한 귀족들이 보기에는, 아직 손에 잡히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이상이 더 큰 아이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선 자리는 작지 않았다.

《니케아의 포르피로게니타》.

요안나의 등 뒤로 자주빛이 조용히 피어났다.

그 빛은 위압하지 않았다.
그저 부정할 수 없었다.

자주빛 방에서 태어난 아이.
라스카리스의 마지막 피.
니케아의 정통성 그 자체가, 아직 어린 어깨 위에 너무 무겁게 놓여 있었다.

귀족 하나가 낮게 웃었다.

“또 그 말을 하려는군.”

다른 귀족이 속삭였다.

“모든 이에게 평화라니. 피난민 수용소에서 말하기엔 좋겠지.”

세 번째 귀족이 입꼬리를 올렸다.

“정치가 아니라 동화다.”

요안나는 그 말을 들었다.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피난민 아이를 보았다.
팔에 붕대를 감은 병사를 보았다.
시장 상인을 보았다.
아직 로마 시민이 아닌 이방인을 보았다.
배급표를 들고 줄 선 노파를 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Εἰρήνη πᾶσιν.”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무대가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요안나는 다시, 이번에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웅성거림이 멈췄다.

평화.

그 말은 너무 쉬웠다.

그래서 모두가 의심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세금을 걷는 관리는 그 말을 계산하기 어려웠다.
국경의 귀족은 그 말을 위험하게 여겼다.
피난민은 그 말을 듣고 싶었지만, 너무 많이 속았기 때문에 바로 붙잡지 못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만인의 꿈.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꿈.

그러나 요안나의 평화는 무대 위에서 박수만 받기 위한 꿈이 아니었다.

그 꿈은 곧 배급표가 되어야 했다.
시민권 문서가 되어야 했다.
치료 명부가 되어야 했다.
성벽 위의 보초 교대표가 되어야 했다.
조약문이 되어야 했다.

푸리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독백이 아니야.”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이번엔 네가 먼저 맞는 말 했네.”

푸리나는 그를 흘끗 보았다.

“놀랐어?”

“조금. 보통은 내가 한 박자 먼저 말하거든.”

“그럼 오늘은 내가 이겼네.”

“아직 막 시작했어, 여왕님. 성급하게 승리 선언하면 뒤에서 누가 꼭 넘어뜨려.”

푸리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단상 아래에서 레이튼이 앞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발밑에 [여관:문답의 서재]의 바닥이 얇게 펼쳐졌다.
낮은 단상 위로 작은 별들이 떠올랐다.

요안나가 말한 “평화” 위에 이름들이 달라붙으려 했다.

항복.
굴욕.
휴전.
기만.
이상.
제국주의.
시민권.
대의.
어린아이의 꿈.
정치적 함정.
구호품.
법률.
거짓 약속.

레이튼은 그 이름들을 보았다.

그리고 손끝을 들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이름들이 흐려졌다.

평화라는 별은 아직 어느 하나로 굳지 않았다.

레이튼은 요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물었다.

“평화라는 별은 아직 이름 붙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의 시선이 단상 아래의 사람들을 훑었다.

“누구에게, 어떤 평화입니까?”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질문은 요안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좋은 질문이에요.”

그녀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귀족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오는 것은 위엄을 버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안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자주빛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보좌 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로.

《가장 낮은 곳에 임할 자주빛》.

요안나는 피난민 아이 앞에 무릎을 굽혔다.

아이의 옷은 낡았고, 손은 차가웠다.

요안나는 물었다.

“네게 평화는 뭐야?”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한참 뒤에야, 작게 말했다.

“오늘 밤에…… 쫓겨나지 않는 거요.”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부상병에게 다가갔다.

“당신에게 평화는요?”

병사는 팔의 붕대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징집 명령이 오지 않는 것.”

시장 상인은 말했다.

“길이 열리는 것. 세금을 두 번 걷지 않는 것.”

이방인은 망설이다 말했다.

“제 아이가 ‘야만인’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리는 것.”

늙은 여인은 말했다.

“죽은 아들의 보상이 늦지 않는 것.”

요안나는 모두 들었다.

하나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그 평화를 적을게요.”

귀족이 웃었다.

“적는다고 평화가 옵니까?”

요안나는 그 귀족을 보았다.

어린 눈동자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적지 않으면, 누가 잊혔는지도 모르게 되니까요.”

그 말에 슈샤니크가 움직였다.

그녀는 8막에서처럼 닫힌 여관의 먼지를 두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잔향은 아직 그녀의 어깨에 남아 있었다.

손에는 장부가 있었다.

무거운 장부.

슈샤니크는 요안나 곁에 섰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평화는 비용이 듭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피난민을 등록해야 합니다. 임시 시민권을 발급해야 하고, 배급량을 조정해야 하며, 전후 보상 기준을 새로 세워야 합니다. 병역 면제와 세율 조정, 도시 자치권, 종교 공동체 보호 조항도 필요합니다.”

귀족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슈샤니크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누군가의 창고와 금고와 특권을 건드립니다.”

요안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못 하나요?”

슈샤니크는 장부를 펼쳤다.

펜촉이 촛불을 받았다.

“아니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한다면, 계산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보았다.

요안나가 평화를 말하자, 슈샤니크는 비웃지 않았다.

장부를 펼쳤다.

이상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서.

슈샤니크가 낮게 말했다.

“폐하의 평화는 제 장부를 망가뜨립니다.”

요안나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요.”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슈샤니크는 펜을 들었다.

“장부가 망가질 만큼의 평화라면, 적어볼 가치는 있겠지요.”

그 순간, 8막의 닫힌 여관 문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이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다.

김이 다시 올랐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러나 차는 식지 않았다.

요안나는 그것을 본 듯, 보지 못한 듯 작게 웃었다.

그때 또 다른 자주빛이 단상 뒤에 섰다.

미하일라.

니케아의 공동황제.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을 드는 자.

그녀는 요안나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자주빛은 같았으나, 그녀의 자주빛은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손에는 활이 있었다.

미하일라는 말없이 요안나의 뒤에 섰다.

그것만으로도 귀족들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

요안나가 손을 내밀었다.

미하일라는 그 손 뒤에서 활시위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평화는 빈손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빈손이 찢기지 않도록, 누군가는 활을 들어야 한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요안나. 말해라.”

요안나가 돌아보았다.

미하일라의 눈은 엄했다.

그러나 그 안쪽에는 아주 조용한 다정함이 있었다.

“내가 그 말이 찢기지 않게 하겠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미하일라.”

“감사는 나중에 해라. 지금은 말해야 한다.”

“네.”

두 황제는 서로 달랐다.

하나는 평화를 말하는 아이.
하나는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활을 드는 전쟁황제.

그러나 같은 자주빛이었다.

그때 카를로타가 미하일라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큰 연설을 하지 않았다.

평화를 말하지도 않았다.

대신 미하일라의 활을 보았다.

활시위를 손끝으로 튕겼다.

팅.

아주 작지만 맑은 소리.

카를로타는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오늘은 너무 세게 당기시면 안 됩니다.”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이 상황에서?”

“이 상황이기 때문에요.”

카를로타는 활의 장력을 조심스럽게 조정했다.

“화살도 조약도, 장력이 지나치면 끊어집니다.”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카를로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평화를 연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는 화살이 빗나가지 않도록 손봤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기억했다.

꿈은 높은 곳에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꿈이 꺾이지 않게 만드는 손은 언제나 낮은 곳에서 일한다.

무대 한쪽에서는 게오르기아가 작은 교실을 열었다.

그 교실은 벽이 없었다.

시장 한복판에 놓인 긴 의자 몇 개, 낡은 판자 하나, 분필, 그리고 여러 언어가 뒤섞인 아이들.

게오르기아는 아이들 앞에 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듣게 되었다.

“따라 읽으세요.”

아이들이 입을 열었다.

“나는 법 앞에 이름을 가진 사람이다.”

어떤 아이는 발음이 틀렸다.

어떤 아이는 로마어를 잘 몰랐다.

어떤 아이는 자기 이름을 말하기 전에 출신 부족을 말하려 했다.

게오르기아는 혼내지 않았다.

다시 가르쳤다.

“먼저 이름입니다.”

아이가 망설였다.

“이름?”

“네. 그다음 시민. 그다음 출신. 순서는 바뀔 수 있지만, 이름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게오르기아의 교실에는 출생지 순서가 없었다.

먼저 온 자도, 나중에 온 자도, 모두 같은 문장을 배웠다.

로마 시민성이란, 과거의 대리석 기둥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를 법 앞에 이름 있는 사람으로 부르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게오르기아가 요안나를 향해 말했다.

“폐하. 평화는 감정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오르기아는 아이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시민으로 부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대 위로 길들이 열렸다.

먼지 낀 도로.
우편 마차.
상인의 수레.
사절의 말.
정보를 담은 작은 종이쪽지.
항구에서 시장으로, 시장에서 궁정으로, 궁정에서 국경으로 이어지는 길.

아스테리아 오르노비치가 그 길 위에 섰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늘 그렇듯 조금 느긋하고, 조금 장난스럽고, 그러나 눈 안쪽은 별빛처럼 위험했다.

“평화를 말하셨군요.”

아스테리아가 요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길이 필요하겠습니다.”

로고스테스 톤 드로무.

제국의 도로와 우편, 사절과 첩보망이 움직였다.

요안나의 말은 마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조약문은 길을 따라 도착해야 했다.

아스테리아가 손을 펼치자, 별빛 아래 세 갈래 실이 보였다.

하늘에 빌어 저변을 살피라.

하나는 전쟁.

국경의 작은 도발이 커지고, 귀족들이 평화를 약함으로 해석하며, 외국 사절이 니케아의 이상을 조롱하는 길.

하나는 휴전.

말은 멈추지만 상처는 덮이고, 사람들은 다시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길.

그리고 하나는 아직 이름 없는 협상.

약하고, 길고, 자주 끊길 것 같은 실.

아스테리아는 그 세 번째 실을 잡았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누가 평화를 두려워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녀의 주변으로 소문이 모였다.

시장 말.
상인의 가격표.
수도원의 편지.
국경 소규모 충돌 보고.
귀족 가문의 혼담.
어느 항구에서 갑자기 오른 밀값.
누가 누구에게 술을 샀는지, 누가 누구의 이름을 일부러 부르지 않았는지.

아스테리아는 그 조각들을 맞췄다.

조각 모음.

왜곡된 정보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저 귀족은 평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평화가 오면 자기 사병을 줄여야 하니 두려워합니다.”

그녀는 다른 쪽을 가리켰다.

“저 상인은 전쟁을 싫어하지만, 전쟁 물자로 벌어온 돈을 잃을까 봐 조약을 늦추려 합니다.”

또 다른 쪽.

“저 사절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우리 시민권 정책이 자기 나라 변방민들을 흔들까 봐 겁내고 있습니다.”

아스테리아는 웃었다.

“평화도 꽤 시끄러운 물건이지요?”

죠니가 낮게 말했다.

“술자리 약속보다 복잡하네.”

푸리나가 물었다.

“술자리 약속도 복잡해?”

“중요하지. 다음 날 기억나는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야 하거든.”

“그럼 평화 조약은?”

죠니는 단상 아래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그건 술자리 약속보다 조금 더 튼튼해야지. 깨지면 숙취 정도로 안 끝나니까.”

푸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 사이로, 달빛이 내려왔다.

루나리아 아누아가 치료소 쪽에서 나타났다.

그녀가 손을 들자, 전장의 소음이 낮아졌다.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상자의 팔이 갑자기 낫지도 않았다.

그러나 달빛은 상처를 다시 사람의 몸으로 돌아오게 했다.

전쟁은 상처를 사건으로 만든다.
사람은 자기 몸에서 일어난 일을 뒤늦게야 받아들인다.

루나리아의 달빛은 그 늦은 귀환을 도왔다.

부상병은 자기 팔을 보았다.

울지 않던 아이가 울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안았다.

루나리아가 말했다.

“평화는 문서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제 사람들이 다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빛 아래, 서로 등을 돌리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동서 교회의 상처.
가문 간의 원한.
피난민과 원주민 사이의 불신.
병사와 시민 사이의 거리.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은, 평화가 제도가 된 뒤에도 계속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때 하늘이 낮게 울렸다.

천둥.

라플리, 혹은 라플리아가 마탑의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왔다.

그녀의 눈에는 불쾌함이 선명했다.

“평화, 평화, 평화.”

라플리가 귀족석을 보며 비웃었다.

“좋은 말이지. 그런데 저쪽 얼굴들 보니까 슬슬 장식품으로 만들 생각이 보이는데?”

한 귀족이 얼굴을 굳혔다.

“마탑주는 말을 삼가시오.”

라플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싫은데?”

그녀의 몸 안에서 천둥이 회로처럼 흘렀다.

《뇌천마력회로》.

마력은 단순히 번개처럼 튀지 않았다.

하늘의 법칙을 계산하는 회로를 따라 움직였다.

《천율학파》.

라플리는 손끝으로 허공에 식을 그렸다.

맹세.
조약.
증인.
가문 보증.
종교 보호 조항.

그중 몇 줄이 이상하게 휘어 있었다.

귀족들이 평화 조약 안에 숨겨둔 빠져나갈 구멍.
시민권을 미끼로 삼되, 실제 권리는 주지 않는 문구.
종교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특정 공동체를 예외로 빼려는 조항.

라플리의 눈이 차가워졌다.

“평화? 좋아.”

하늘이 갈라졌다.

《천상이변》.

천둥이 내려쳤다.

그러나 사람을 치지 않았다.

조약문 위의 거짓 문구를 태웠다.

“그런데 그걸 네 가문 면피용 리본으로 쓰면, 내가 그 리본부터 태워줄게.”

귀족들이 숨을 삼켰다.

요안나는 라플리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라플리는 잠시 어색한 얼굴이 되었다.

“폐하한테 한 말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고마워요.”

“……그럼 뭐, 받아두시든가요.”

푸리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니케아는 황제의 칙령만으로 굴러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평화를 말하는 아이 황제.
그 꿈을 장부에 적는 재상.
그 말을 지키는 활.
그 활의 장력을 조정하는 조궁사.
시민성을 가르치는 스승.
길과 첩보를 여는 외교관.
상처를 돌보는 달빛의 사제.
위선을 찢는 마탑주.

너무 많은 손이 한 문장을 붙들고 있었다.

그때 바실리오가 나타났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귀족처럼 보였다.

값비싼 옷을 입고, 고운 손으로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

그는 요안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얼마나 사랑스러운 말인가.”

그 말투에는 독이 있었다.

“그러나 폐하. 꿈은 정치가 되지 못합니다.”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바실리오는 단상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단상 아래 귀족들 사이를 걸었다.

“정치는 비용이고, 협상이며, 배신이고, 피이며, 굴욕입니다. 평화는 이 중 가장 자주 팔리는 장식품이지요.”

그는 귀족들을 보았다.

“저 아이의 평화를 이용하십시오. 시민권을 미끼로 삼고, 조약을 족쇄로 바꾸십시오. 평화라는 말은 좋습니다. 누구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렵거든요.”

귀족 하나가 미소를 숨겼다.

바실리오는 요안나를 다시 보았다.

“폐하께서 꿈을 말하면, 어른들이 그 꿈을 쓸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입니다.”

요안나의 손이 살짝 떨렸다.

슈샤니크가 그 떨림을 보았다.

미하일라가 활시위를 조금 당겼다.

카를로타가 낮게 말했다.

“아직입니다, 폐하.”

미하일라는 시위를 멈췄다.

그때 하융의 창호가 열렸다.

[여관:비껴간 창].

회색빛 방의 창문 너머로 여러 가능성이 펼쳐졌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보시오.”

첫 번째 창.

평화는 조약문 안에서만 살았다.

귀족들은 웃으며 서명했고, 서명한 다음 날부터 예외 조항을 찾았다.
시민권은 종이에만 남았고, 피난민은 다시 줄 밖으로 밀려났다.

“어느 창에서는 평화가 조약문 안에서만 살았소.”

두 번째 창.

평화는 너무 순했다.

첫 칼에 찢겼다.

전쟁파는 요안나의 이상을 약함이라 조롱했고, 국경은 다시 불탔다.

“어느 창에서는 평화가 너무 순해, 첫 칼에 찢겼소.”

세 번째 창.

평화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

민중은 배신당했고, 조용한 분노가 다음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어느 창에서는 평화의 이름으로 너무 많은 이들이 입을 닫았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소.”

네 번째 창.

요안나가 말했다.

슈샤니크가 적었다.
미하일라가 지켰다.
게오르기아가 가르쳤다.
아스테리아가 길을 열었다.
루나리아가 상처를 돌보았다.
라플리가 거짓 조항을 태웠다.
카를로타가 활의 장력을 맞췄다.
그레이가 이름을 적었다.
푸리나가 군상극으로 펼쳤다.

여러 손이 한 문장을 붙들고 있었다.

하융이 말했다.

“허나 저 창에서는…… 여러 손이 한 문장을 붙들고 있구려.”

요안나는 그 창을 보았다.

그리고 자기 손을 보았다.

작은 손.

혼자서는 평화를 붙들 수 없는 손.

그러나 다른 손들을 붙잡을 수는 있는 손.

그때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조약문 아래에 작은 장부를 펼쳤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등불들이 조용히 켜졌다.

왕과 도시의 이름이 조약문 위쪽에 있었다.

그 아래, 그레이는 다른 이름들을 적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
국경에서 사라진 마을.
평화 조항에서 누락되기 쉬운 소수 공동체.
시민권을 받지 못한 아이.
전쟁 중 죽은 병사.
사망 보상이 밀린 유족.

그레이가 말했다.

“평화 조약에는 왕과 도시의 이름이 먼저 적힙니다.”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저는 그 아래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겠습니다.”

요안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탁할게요.”

그레이는 대답했다.

“적겠습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한 손이 올라왔다.

피난민 아이의 손이었다.

그 손에는 작은 종이 조각이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배급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지 티켓.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푸리나의 극장이 무대 소품처럼 준비해둔 것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요안나의 이상이 사람들 마음속에서 저절로 만든 표식일 수도 있었다.

아이의 손이 떨렸다.

“저는…… 오늘 밤 쫓겨나지 않는 평화에.”

요안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종이를 내밀었다.

요안나가 받았다.

그러자 다른 손이 올라왔다.

부상병.

“다시 징집 명령이 오지 않는 평화에.”

시장 상인.

“길이 열리는 평화에.”

이방인.

“내 아이가 이름으로 불리는 평화에.”

성직자.

“상처 입은 교회가 서로의 장례를 방해하지 않는 평화에.”

장인.

“활이 전쟁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아도 되는 평화에.”

낮은 귀족.

“가문보다 도시가 먼저 숨 쉬는 평화에.”

병사.

“칼집이 녹슬어도 부끄럽지 않은 평화에.”

손들이 올라왔다.

하나씩.

요안나는 그 표를 받았다.

그녀 혼자 만든 기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불가능한 말에 자기 작은 필요와 이름을 얹었다.

지지 티켓들이 요안나의 주변에 모였다.

바실리오의 미소가 조금 굳었다.

“감동적인 장면이군요. 하지만 표가 군대를 막습니까?”

미하일라가 활을 들었다.

“필요하다면, 군대는 내가 막는다.”

카를로타가 속삭였다.

“장력.”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안다.”

그녀의 화살은 날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 위에 놓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요안나의 빈손이 찢기지 않도록 하는 화살.

슈샤니크의 장부가 지지 티켓들을 항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아의 교실은 그 지지의 언어를 시민성으로 가르쳤다.

아스테리아의 길은 그것을 사절과 조약으로 실어 날랐다.

루나리아의 달빛은 그 평화를 받아들일 몸을 돌보았다.

라플리의 천둥은 거짓 조항을 태웠다.

그레이의 장부는 누락된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요안나는 그 모든 손들 가운데 섰다.

백색의 보좌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 위에 앉지 않았다.

그 보좌는 명령하지 않았다.

옆에는 금빛 서책이 펼쳐졌다.

《백색의 보좌와 금빛 서책》.

서책은 물었다.

누가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누구의 손을 아직 잡지 못했는가.
누구의 평화가 빠졌는가.
누구의 이름이 조약 아래에 눌려 있는가.

요안나는 서책에 손을 올렸다.

무너진 성벽 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 위에 문장이 떠올랐다.

서로의 손을 잡은 사람들 사이로 로마의 문장이 다시 피어났다.

《부활하는 로마의 문장》.

그 문장은 칼이 아니었다.

성벽도 아니었다.

시민권.

상호 인정.

함께 법 앞에 이름을 갖는다는 약속.

귀족 하나가 소리쳤다.

“로마 시민권을 이렇게 쉽게 나눠줄 셈입니까?”

요안나는 그를 보았다.

“쉽게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손을 잡는 일은 쉽지 않아요.”

요안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나 손을 잡지 않으면, 로마는 보좌 위에서만 남아요. 저는 그런 로마를 원하지 않아요.”

귀족이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그 말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요안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자주빛이 깊어졌다.

《마지막 라스카리스》.

마지막이라는 말은 약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어지면 돌아오지 않는 문장이라는 뜻이었다.

요안나는 작았다.

그러나 그녀의 뒤에는 끊기 직전의 혈통과,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로마가 함께 서 있었다.

“맞아요.”

요안나는 말했다.

“저는 어립니다.”

귀족이 순간 승리한 듯 웃었다.

요안나는 이어 말했다.

“그래서 아직 믿을 수 있어요.”

웃음이 멈췄다.

“어른들이 이미 포기한 말을, 아직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혼자 믿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지지 티켓들을 들어 올렸다.

“이 사람들이 같이 붙들어줄 테니까요.”

그 순간, 귀족의 칼보다 먼저 시민의 손이 올라갔다.

병사의 표보다 먼저 피난민의 이름이 불렸다.

시장 상인의 계산보다 먼저 아이의 잠자리가 적혔다.

요안나의 말은 더 이상 아이의 소원만이 아니었다.

정치적 대의가 되었다.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권고》.

보이지 않는 원로원의 그림자와 시민들의 손이 겹쳤다.

그것은 칙령도 아니고 폭력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시하기 어려운 압력이었다.

비웃던 귀족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낡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안나를 비웃는 것은, 피난민의 잠자리를 비웃는 일이 되었다.
그녀의 평화를 조롱하는 것은, 부상병의 퇴역과 이방인 아이의 이름과 시장의 길과 교실의 문장을 함께 조롱하는 일이 되었다.

그 순간 요안나의 어린 이상은 정치가 되었다.

바실리오가 이를 드러냈다.

“정치는 감동으로 오래가지 않는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럼?”

“그래서 장부가 있고, 활이 있고, 길이 있고, 교실이 있고, 치료소가 있고, 천둥이 있고, 이름이 있어요.”

그녀는 다시 말했다.

“저 혼자서는 못 해요.”

그 고백은 약점이 아니었다.

정치였다.

“평화가 아직 꿈이라면, 오늘은 그 꿈에 이름을 적어주세요.”

요안나가 말했다.

“내일은 법으로, 모레는 길로, 그다음 날은 서로의 손으로 지키면 됩니다.”

침묵.

그리고 천천히 박수가 일어났다.

푸리나는 그 박수를 들었다.

이번 박수는 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요안나에게만 향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 황제의 꿈을 붙든 사람들 모두에게 향한 박수였다.

푸리나의 [여관:극장]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독백을 위한 무대가 아니었다.

시장.
교실.
치료소.
조약장.
병영.
항구.
행정실.

여러 장소가 동시에 무대가 되었다.

푸리나는 알았다.

저 아이는 아직 완성된 황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부름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신은 적절히 준비된 자를 부른다》.

요안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완성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대사를 이미 품고 있었기 때문에.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이번 무대는 독백이 아니야.”

죠니가 옆에서 물었다.

“그럼?”

“한 아이가 말한 꿈을, 너무 많은 사람이 찢어지지 않게 붙드는 합창이지.”

죠니는 잠시 요안나와 사람들을 보았다.

“평화는 좋은 말이지.”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문제는 보통 그 말이 제일 먼저 찢어진다는 거고.”

“그럼 안 믿어?”

죠니는 피식 웃었다.

“믿지. 안 믿으면 여기 서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는 미하일라의 활과 카를로타의 손을 보았다.

“다만 좋은 말일수록, 시위가 끊어지지 않게 봐야 한다는 거야.”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농담 안 해?”

“했잖아. 술자리 약속.”

“그건 농담이었어?”

“반쯤. 나머지 반은 인생의 진실이지.”

푸리나는 웃었다.

박수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푸리나는 그 박수가 너무 오래 요안나 한 사람에게 쏠리지 않게 조명을 나누었다.

슈샤니크의 장부 위로.
미하일라의 활 위로.
카를로타의 손끝 위로.
게오르기아의 교실 위로.
아스테리아의 길 위로.
루나리아의 달빛 위로.
라플리의 천둥 위로.
그레이의 이름 위로.
하융의 창 너머, 겨우 찢어지지 않은 가능성 위로.

그것은 군상극이었다.

아르메니아의 노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푸리나는 잠시, 자기 안의 극장이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꿈은 혼자 부르면 독창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자기 삶으로 받쳐 부르면, 그것은 합창이 된다.

요안나는 단상 위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혼자 올라서지 않았다.

피난민 아이가 옆에 있었다.
부상병이 뒤에 있었다.
슈샤니크가 장부를 들고 섰다.
미하일라가 활을 낮게 들었다.

요안나는 다시 말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이번에는 처음과 달랐다.

그 말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귀족들은 완전히 설득되지 않았다.
국경은 여전히 불안했다.
조약은 언제든 찢어질 수 있었다.
평화는 여전히 멀고, 덧없고, 머나먼 이상향이었다.

《덧없이 머나먼 이상향》.

그러나 그 멀리 있음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사사로운 이익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너무 멀었기에, 모두가 자기 작은 손을 조금씩 뻗어야 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거기에는 여덟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사람들의 지지 티켓이 빛으로 흩어졌다.

그 빛은 금빛 서책의 글자가 되고, 슈샤니크의 장부 한 줄이 되고, 게오르기아의 교실 문장이 되고, 아스테리아의 길 위 편지가 되고, 루나리아의 달빛 아래 붕대가 되고, 라플리의 천둥이 태운 거짓 조항의 빈칸이 되고, 카를로타가 조율한 활시위의 진동이 되었다.

그리고 아홉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평화.

푸리나는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아홉 번째 꿈은 평화였어.”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평화는 완성된 꿈이 아니었지.”

요안나는 조용히 들었다.

푸리나는 계속했다.

“그것은 너무 많은 손이 붙들어야 겨우 찢어지지 않는 얇은 종이였어.”

슈샤니크가 장부를 닫았다.

미하일라가 활을 내렸다.

카를로타가 시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게오르기아의 아이들이 다시 문장을 따라 읽었다.

아스테리아의 길 위로 사절이 출발했다.

루나리아의 달빛 아래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

라플리는 아직도 귀족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마지막 이름 하나를 적었다.

하융은 창호 너머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푸리나는 가면을 낮추었다.

“그래서, 정치가 되었어.”

바실리오는 사라져 있었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평화를 이용하려는 자는 언제나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말이 혼자 있지 않았다.

요안나는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녀는 슈샤니크에게 다가갔다.

“장부에 적었나요?”

슈샤니크는 장부를 보여주었다.

아주 작은 글씨였다.

모든 이에게 평화.

그 아래에는 비용 항목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요안나는 작게 웃었다.

“엄청 길어졌네요.”

슈샤니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평화는 비용이 듭니다.”

“그래도 적어줬네요.”

“폐하께서 부탁하셨으니까요.”

요안나는 손을 내밀었다.

슈샤니크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았다.

아주 짧게.

하지만 잡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조명으로 크게 키우지 않았다.

그냥 그만큼만 비추었다.

죠니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오늘은 조명 조절이 꽤 좋아졌네.”

푸리나가 웃었다.

“그것도 출연료 청구 항목이야?”

“아니. 이건 무료 칭찬.”

“귀한데?”

“그러니까 아껴 들어.”

푸리나는 작은 웃음을 삼켰다.

무대 위의 낮은 단상은 천천히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시장과 항구와 교실과 치료소와 조약장은 하나씩 희미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내일 다시 열릴 장소들처럼.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아홉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그리고 열 번째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때 무대 뒤편에서 바람이 불었다.

궁정의 바람도, 시장의 바람도 아니었다.

먼 변경의 바람.

아직 길이 없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

초원과 숲과 산맥과 사막과 바다 끝을 지나온 바람.

그 바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장난스럽고, 가볍고, 그러나 어딘가 잔혹할 만큼 기대에 찬 목소리.

“한계에 부딪혔는가.”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비로소 나아갈 곳이 생겼음을 기뻐하라.”

요안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깜빡였다.

하융의 창호가 흔들렸다.

죠니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또 길인가.”

푸리나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다음 꿈은 아직 지도에 없는 곳에서 오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다음 꿈.”

바람은 더 강해졌다.

“개척되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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