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4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17:25:26
제10막 개정본

개척되지 않은 길

평화의 낮은 단상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다.

요안나의 목소리는 아직 무대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모든 이에게 평화를.

그 말은 완성된 조약이 아니었다.
부러지지 않는 맹세도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은 손이 겨우 붙들고 있던 얇은 종이였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닫히고, 미하일라의 활시위가 낮게 쉬었다.
게오르기아의 교실은 아이들의 입모양만 남긴 채 희미해졌고, 아스테리아의 길 위로 떠났던 사절의 말발굽도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루나리아의 달빛은 마지막 붕대 위에서 부드럽게 잦아들었고, 라플리의 천둥은 조약문 위에 남은 그을음만을 남겼다.

그리고 무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고 한가운데에 섰다.

가면에는 아홉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그 단어들은 이제 가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목에, 호흡에, 조명 사이에, 극장의 바닥 아래에 남아 있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열 번째 꿈.”

어둠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여관:극장]이 펼쳐졌다.

늘 그렇듯 무대는 숨을 들이쉬었다.
막은 오르려 했고, 조명은 방향을 찾으려 했다.
객석은 조용히 어둠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경이 나타나지 않았다.

궁정도, 숲도, 공방도, 전장도, 행정실도, 시장도 없었다.

하얀 바닥만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지도.

그러나 그 지도에는 강도 없고, 산도 없고, 성벽도 없고, 국경도 없고, 길도 없었다.

푸리나는 조명을 비추었다.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비추었다.

하얀 바닥은 그대로였다.

푸리나의 눈썹이 조금 모였다.

“왜…… 길이 안 보여?”

그때, 바람이 불었다.

지도 위에 그려지지 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푸리나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가면 위의 단어들을 한 번씩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도 가장자리.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여백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성좌였다.

왕좌에 앉아 있지 않았다.

광배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오래된 개척자처럼, 혹은 장난기 많은 여교관처럼, 아직 그려지지 않은 지도의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손에는 펜이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 선도 긋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개척의 성좌.

그녀는 푸리나를 보고 웃었다.

“단어는 많이 모았구나.”

푸리나는 가면을 내려다보았다.

개척의 성좌는 하나씩 읽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그녀는 즐거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구나.”

푸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길은요?”

개척의 성좌는 펜끝으로 하얀 지도를 톡, 두드렸다.

“단어는 길이 아니란다.”

그녀는 빙긋 웃었다.

“걸어야 길이 되지.”

그 말이 떨어지자, 지도 위에 수많은 그림자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걷지 못한 발.
걷다가 쓰러진 사람.
지도에 그려지기 전에 잊힌 선.
너무 빨리 나아가다 뒤를 잃어버린 행렬.
너무 오래 머뭇거리다 출발하지 못한 사람들.

푸리나는 가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개척의 성좌가 말했다.

“한계에 부딪혔는가.”

무대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렇다면 비로소 나아갈 곳이 생겼음을 기뻐하라.”

그녀의 눈이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가볍기만 하지 않았다.

“부디 나의 눈을 넘어서 보렴.”

그 순간 레이튼이 앞으로 나왔다.

[여관:문답의 서재]의 별빛이 하얀 지도 위에 내려앉았다.

길이라는 말 위에 이름들이 붙으려 했다.

개척.
침략.
귀환.
도피.
사명.
운명.
정복.
순례.
개간.
유배.
전진.
탈출.

레이튼은 그 이름들을 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끝을 들었다.

《별들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다》.

그 이름들이 흐려졌다.

레이튼은 개척의 성좌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좌께 묻겠습니다.”

개척의 성좌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물어보렴.”

레이튼은 하얀 지도를 보았다.

“이것은 개척입니까, 침략입니까, 귀환입니까, 도피입니까, 아니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첫 걸음입니까?”

개척의 성좌는 웃음을 터뜨렸다.

“좋구나.”

그녀는 지도 가장자리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펜끝으로 흰 여백을 두드렸다.

“길이라는 이름조차 의심하는구나. 그래야 진짜 길을 만들 수 있지.”

레이튼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너무 빠르면, 길은 쉽게 폭력이 됩니다.”

“그렇지.”

개척의 성좌는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름이 너무 늦으면, 사람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쓰러지지.”

레이튼의 눈이 조금 깊어졌다.

“그렇다면 묻고 걸어야겠군요.”

“그래.”

그녀는 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단다.”

그러나 그때, 하얀 지도 위에 검은 선 하나가 그어졌다.

누군가가 펜을 빼앗아 그은 듯한 선.

빠르고, 곧고, 망설임 없는 선.

그 선의 끝에 바실리오가 서 있었다.

이번의 바실리오는 탐험가처럼 보였다.

가죽 장화, 긴 외투, 손에는 나침반.
그러나 그의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강한 자가 서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바실리오는 웃었다.

“이렇게 하면 된다.”

그는 선을 더 길게 그었다.

“길이 없다면, 강한 자가 길이다.”

검은 선은 하얀 지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아래에서 작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깔렸다.

“뒤처진 자를 기다리지 마라. 한계를 넘으려면 가벼워야 한다. 짐을 버리고, 약자를 버리고, 돌아보는 마음을 버려라.”

바실리오는 개척의 성좌를 보았다.

“이것이 개척이지 않습니까?”

개척의 성좌는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푸리나와 다른 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 말도 하나의 길이지.”

푸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개척의 성좌가 물었다.

“너희는 그것을 길이라 부를 것인가?”

그때 하융의 창호가 열렸다.

회색빛 방이 하얀 지도 위에 얇게 겹쳤다.

[여관:비껴간 창].

하융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보았다.

“보아야겠소.”

그가 하오체로 낮게 말했다.

“길을 말하려면, 그 길이 끝난 자리를 보아야 하오.”

창이 열렸다.

첫 번째 창.

바실리오가 그은 것과 같은 검은 직선이 있었다.

그 길은 빠르게 나라를 살렸다.
군대는 늦지 않았고, 성은 함락되기 전에 구원되었으며, 왕은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융이 말했다.

“어느 창에서는 그 길이 나라를 살렸소.”

두 번째 창.

같은 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뒤처진 피난민들이 버려졌다.
빠른 군대는 승리했지만, 길가에는 늙은 사람과 아이와 다친 병사가 남았다.
그들은 적에게 잡히거나, 추위에 죽거나, 이름 없이 사라졌다.

“어느 창에서는 같은 길이 모두를 죽였소.”

세 번째 창.

멀리 돌아간 길이었다.

너무 늦었다.

도착했을 때 성은 이미 불타 있었다.

“어느 창에서는 멀리 돌아간 까닭에, 구할 수 있던 것을 잃었소.”

네 번째 창.

역시 멀리 돌아간 길.

이번에는 그 길이 사람들을 살렸다.
느리지만, 뒤따르는 사람이 있었고, 부상자가 실려 왔으며, 아이가 울며 걸어왔다.
그 길은 늦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창에서는 멀리 돌아간 길이, 되레 오래 남았소.”

다섯 번째 창.

화려한 개척의 깃발 아래, 수많은 무덤이 도로의 기초가 되어 있었다.

그 길은 지도에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러나 길 아래에 묻힌 이름들은 아무도 읽지 않았다.

하융은 창을 닫지 않고 말했다.

“이 창들은 답이 아니오.”

그는 푸리나를 보았다.

“다만 그대들이 눈을 감지 않게 하는 거울일 뿐이오.”

창밖으로 선택되지 않은 행군이 지나갔다.

《선택되지 않은 행군》.

가보지 못한 사람들.
가려다 실패한 사람들.
가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사람들.
갔기에 무엇인가를 남긴 사람들.

그들의 발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하얀 지도 위에 잠시 발자국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미 죽어버린 세계를 잠시 겹치다》.

푸리나는 그 발자국들을 보았다.

길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았다.

길은 누군가가 걸었기 때문에 생겼고,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에 경고가 되었으며, 누군가가 돌아왔기 때문에 다음 사람이 걸을 수 있었다.

그때 죠니가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그는 바실리오가 그은 검은 직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끝으로 그 선을 건드렸다.

“길이라는 건 멋진 말인데.”

죠니가 말했다.

“결국 움직임이야.”

그의 시야가 바뀌었다.

《황금의 동경》.

죠니의 눈에 길은 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회전이었다.

생과 사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든 動.
앞으로 가려는 발.
돌아오려는 발.
뒤처진 이를 붙잡는 손.
너무 빨라 부서지는 돌진.
너무 늦어 썩어버리는 망설임.

그 모든 흐름은 무한한 윤회의 회전 속에서 겹치고, 어긋나고, 때로는 정합했다.

죠니는 그 회전 속에서 황금빛 시간을 찾았다.

찰나를 향한 궤적.

그 무한한 회전 속에서, 사람은 황금빛 시간을 찾아 헤맨다.

바실리오가 그은 직선은 빠르게 뻗어 있었다.

그러나 죠니의 눈에는, 그것이 제대로 돌지 않는 회전처럼 보였다.

앞선 자의 발은 닿는다.

그러나 뒤따르는 자의 발은 첫 바퀴에서 부서진다.

“이 직선은 빨라.”

죠니가 말했다.

바실리오가 미소 지었다.

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회전이 안 맞아. 앞사람은 닿아도, 뒤따르는 사람은 첫 바퀴에서 죽어.”

바실리오가 물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나?”

“아니.”

죠니는 즉시 대답했다.

“죽음은 문제의 전부가 아니야.”

그의 발밑에서 생과 사의 회전이 한 번 더 돌았다.

《생과 사를 반복하여 기지의 결과를 보다》.

죠니는 미래를 예언하지 않았다.

다만 생과 사가 반복되는 회전 속에서, 이미 알려진 결과를 몸으로 확인했다.

“죽을 수 있는 길이라고 전부 틀린 길은 아니야.”

그는 바실리오를 보았다.

“다만 죽는 줄도 모르고 걷게 만들면, 그건 개척이 아니라 사기야.”

개척의 성좌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

“죽는 길이라 하여 모두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구나.”

죠니가 대답했다.

“죽음을 피하자는 말이 아니야. 죽는 줄도 모르고 떠밀리는 게 문제라는 거지.”

개척의 성좌는 즐겁게 웃었다.

“좋구나. 죽음을 기억하고도 걷는 발과, 죽음을 모르고 떠밀리는 발은 다르지.”

그 순간, 무대의 시간이 길어졌다.

발이 땅에 닿기 전.

선택이 아직 선택으로 남아 있는 한순간.

찰나가 영원처럼 늘어났다.

《영원한 찰나》.

그 찰나 안에서 죠니는 보았다.

곧장 가는 길.

빠른 길.

뒤처진 사람을 보지 않는 길.

돌아갈 집을 태워버리는 길.

그리고 멀리 돌아가는 길.

느리지만, 뒤따르는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길.

돌아오지 못한 이름이라도 되돌아올 수 있는 길.

죠니의 발밑에서 길 하나가 생겼다.

직선이 아니었다.

나선처럼 돌아가고,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잃어버린 이름을 주우러 되돌아갔다.

빠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뒤따르는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멀리 돌아가는 길》.

죠니가 말했다.

“개척이라고 다 앞으로만 가는 건 아니야.”

그는 하얀 지도 위에 생긴 나선형 길을 보았다.

“멀리 돌아가도, 사람을 데리고 돌아올 수 있다면 그쪽이 길이지.”

바실리오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느린 길은 패배한다.”

“빠른 길도 자주 죽어.”

죠니는 짧게 답했다.

“그리고 죽은 길을 승리라고 부르면, 다음 사람도 거기서 죽어.”

푸리나는 죠니를 보았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죠니의 대답보다, 다른 이들의 발걸음을 들어야 할 때였다.

그레이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작은 등불을 들고 있었다.

하얀 지도 위, 아직 시작되지 않은 길의 입구에 그 등불을 세웠다.

[여관:기억이 잠드는 거리]의 작은 거리들이 길 입구에 얇게 겹쳤다.

문패.

등불.

이름.

떠나는 자를 위한 축복이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한 자가 이름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놓는 불빛이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새 길을 적겠습니다.”

그녀는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그 길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도 같이 적겠습니다.”

바실리오가 비웃었다.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은 자의 이름을 준비하나?”

그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무대 아래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아레가 나타났다.

그녀의 발밑에서 검은 바다가 열렸다.

《가장 낮은 바다》.

바다 밑에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길들은 모두 누군가의 무덤 위에 놓여 있었다.

아름다운 개척의 깃발.
돌아오지 않은 정찰대.
미완성의 다리 아래 휩쓸린 사람들.
지도 위에는 선으로 남았지만, 실제로는 이름 없는 시신들로 이어진 길.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개척의 성좌도 보았다.

“새 길을 만들거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다만 그 길 아래 가라앉은 이들을 길의 포장재라 부르지는 말거라.”

그레이가 아레를 보았다.

“이름은 돌아오는 배가 될 수 있습니까?”

아레는 가장 낮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때로는.”

“배가 닿을 항구가 없다면요?”

아레는 길 입구에 놓인 등불을 보았다.

“그럼 등불을 놓아두어야지.”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가 조용히 덧붙였다.

“바다 밑에 가라앉은 이들이, 적어도 길의 포장재라 불리지 않도록.”

개척의 성좌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이 마음에 든 듯했다.

“좋구나. 개척을 의심하는 자가 있어야 개척이 깊어진다.”

바실리오는 코웃음을 쳤다.

“의심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

그때 벨라 4세가 하얀 지도 위로 걸어 나왔다.

그녀가 나타나자, 무대에 불탄 평원이 겹쳤다.

모히 이후의 헝가리.

재가 된 마을.
무너진 다리.
버려진 수레.
아이를 안고 달아나는 어머니.
돌아갈 곳을 잃은 병사.

벨라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깊고 무겁게 말했다.

“보이느냐.”

그 말은 소피아에게 향해 있었다.

소피아 베아트리체는 어머니의 옆에서 하얀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가 손을 들었다.

《마자르의 여왕》.

불탄 평원 위에 요새의 그림자가 하나씩 섰다.

첫 번째 요새.

도망칠 곳.

두 번째 요새.

다시 모일 곳.

세 번째 요새.

아이를 숨길 곳.

네 번째 요새.

불길이 지나간 뒤 돌아올 표식.

길은 먼저 지도에 그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도망칠 곳과 버틸 곳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벨라의 머리 위에 왕관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성 이슈트반의 왕관》.

그 왕관은 화려하지 않았다.

무거웠다.

하늘과 대지와 사람의 주권을 다시 묶는 무게.

벨라가 말했다.

“왕관은 머리에 쓰는 물건이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무너진 땅과 흩어진 사람을 다시 묶는 무게다.”

하얀 지도 위에 요새들이 이어졌다.

길이 되었다.

일백요새는 영광의 탑이 아니었다.

다시 도망칠 수 있는 길.
다시 숨을 곳.
다시 돌아올 표식.

벨라는 소피아를 보았다.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다.”

소피아는 작게 움찔했다.

“전부 다요?”

“전부다.”

소피아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어머니. 저는 아마…… 왕관보다 공방 쪽이 더 편합니다.”

벨라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보아라.”

그녀는 불탄 길과 흩어진 사람들을 가리켰다.

“길은 왕이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돌아올 곳을 세우면, 그들이 걸어오며 길이 된다.”

소피아는 그 말을 듣고 하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황금의 눈》.

소피아는 지도를 보지 않았다.

재료를 보았다.

강.
바람.
버려진 마차 바퀴.
옛 우물.
성벽의 잔해.
피난민의 기억.
별자리.
곡식 저장고.
부서진 철문.
버려진 연금 재료.

길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길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소피아가 중얼거렸다.

“그럼 요새도 길의 재료네요.”

벨라가 그녀를 보았다.

“재료?”

“네.”

소피아는 손끝으로 하얀 지도 위의 재료들을 하나씩 연결했다.

《그대 만상을 재정의하는 자》.

우물은 쉼터가 되었다.

버려진 마차 바퀴는 이동식 수레의 축이 되었다.

성벽의 잔해는 다리의 받침이 되었다.

피난민의 기억은 위험 지역 표시가 되었다.

별자리는 야간 이동의 표지가 되었다.

요새는 목적지가 아니라, 길을 이어주는 매듭이 되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피아는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직 길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들을 다시 조합하면 돼요.”

벨라의 눈빛이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소피아는 작은 부품 하나를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음. 이것도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개척의 성좌가 즐거운 듯 웃었다.

“좋구나. 재료로 세계를 다시 보는 아이인가.”

그 순간, 요안나가 조용히 앞으로 나왔다.

9막에서 평화를 말했던 아이 황제는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하얀 지도와, 벨라의 요새와, 소피아의 재료들을 보았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저는 평화를 말했어요.”

개척의 성좌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안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평화 뒤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을 듣고 몇몇 사람이 숨을 삼켰다.

황제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했다.

슈샤니크가 장부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요안나는 그녀를 보았다.

“황제가 그래도 되나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뒤편에는 아직도 닫힌 여관의 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문 앞에 놓였던 찻잔의 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슈샤니크가 말했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폐하.”

요안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정말요?”

“황제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 신하들은 거짓말을 제도로 만들어야 합니다.”

요안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슈샤니크는 장부를 펼쳤다.

“그러니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녀의 펜끝이 빈 페이지 위에 닿았다.

“그러면 저희는 길을 찾는 장부부터 만들 수 있습니다.”

요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모릅니다.”

슈샤니크가 대답했다.

“기록하겠습니다.”

개척의 성좌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아주 좋아. 꿈을 말한 뒤에 길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아이는, 아직 자랄 수 있단다.”

요안나는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러면 배우겠습니다.”

그때 하얀 지도 위로 청흑빛 선 하나가 떨어졌다.

아스테르다스였다.

이번에는 7막처럼 극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어느 틈에 지도 위의 허공을 밟고 있었다.

발판이 있어서 밟은 것이 아니었다.

밟았기 때문에 그곳이 낙점이 되었다.

《발을 디디다》.

아스테르다스는 허공 위에 선 채 아래를 보았다.

“길?”

그는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내가 가기로 한 방향이 길이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아스테르다스는 하얀 지도 위의 빈 공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위도 아래도 없었다.

그가 정한 방향이 아래였다.

《낙하하는 별이라 하여》.

“내가 움직이는 것이 낙하고, 도착한 곳이 낙하지점이라면.”

청흑빛 불꽃이 짧게 타올랐다.

“길은 원래 발밑에 있는 게 아니라, 도착하기로 정한 곳까지 생기는 거야.”

아스트리트가 그의 청흑빛 궤적을 보다가, 자기 발밑의 금목서 잎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그렇게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알아.”

“아십니까?”

“넌 나무잖아.”

아스트리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뿌리내리겠습니다.”

그녀의 금목서 잎들이 하얀 지도 위에 흩어졌다.

《만생개화검법》.

잎들은 길을 가리키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서로를 베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틈을 만들었다.

곧 잎들이 하나의 숲처럼 자리 잡았다.

《계수성림》.

아스트리트는 말했다.

“길이 모두에게 같은 폭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금목서 잎 사이의 좁은 틈을 보았다.

“하지만 적어도 서로 베지 않고 지나갈 틈은 있어야 합니다.”

아스테르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길이지.”

아스트리트는 아주 조금 미소 지었다.

“유성에게 인정받으니 이상하군요.”

“나도 나무한테 인정받을 생각은 별로 없었어.”

그 짧은 농담은 무겁지 않았다.

다만 두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떨어지는 길.

뿌리내리는 길.

둘 다 길이었다.

푸리나는 이 모든 장면을 보았다.

길 없는 지도.

여성형 개척의 성좌의 질문.

바실리오의 직선.

하융의 창.

죠니의 황금빛 찰나.

벨라의 요새.

소피아의 재정의.

요안나의 모름.

슈샤니크의 장부.

아스테르다스의 낙점.

아스트리트의 숲.

그레이의 등불.

아레의 바다.

레이튼의 질문.

그리고 자신의 극장.

푸리나는 알았다.

극장은 길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조명으로 길을 그으면, 그것은 푸리나의 길이 된다.

배우의 길이 아니다.

하지만 동경은 너무 쉽게 흩어진다.

허무한 윤회의 회전 속에서, 사람이 붙잡는 황금빛 시간은 너무 짧다.

그 찰나를 아무도 보지 못하면, 발걸음은 사라진다.

푸리나는 손을 들었다.

[여관:극장]의 조명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길을 비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밑을 비추었다.

각자의 첫 발.

망설이는 발.
떨리는 발.
돌아보는 발.
낙점을 정한 발.
요새를 향하는 발.
등불 옆에 머무는 발.
금목서 숲의 틈을 지나는 발.
아직 모른다고 인정한 뒤 배우러 나아가는 발.

푸리나의 안쪽에서 특성이 열렸다.

《신은 적절히 준비된 자를 부른다》.

이번에 준비된 것은 완성된 답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길을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마음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동경과, 그래도 한 발을 디딜 이유를 품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대 위에 올라와 길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자기 동경이 향하는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푸리나는 말했다.

“동경은 길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극장 전체가 들었다.

“하지만 길은 동경 없이 생기지 않아.”

개척의 성좌가 조용히 웃었다.

푸리나는 가면을 들었다.

“누군가 돌아가고 싶다고 바랐기 때문에 길이 생겼고, 누군가 잊히고 싶지 않다고 바랐기 때문에 이름이 길가에 남았고, 누군가 내일도 살고 싶다고 바랐기 때문에 첫 발이 떨어졌어.”

그녀의 조명이 사람들의 발밑에 머물렀다.

“내가 길을 그리지는 않을게.”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그대들이 발을 디디는 순간, 그 찰나가 사라지지 않게 비출게.”

바실리오가 검은 직선을 다시 그으려 했다.

“그런 조명은 길을 늦출 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직선이 오래 가지 못했다.

죠니의 멀리 돌아가는 길이 그 직선을 휘어지게 했다.

벨라의 요새가 그 길에 쉼터를 만들었다.

소피아의 재정의가 버려진 재료들을 다리로 바꾸었다.

아스테르다스의 낙점이 허공에 발판을 만들었다.

아스트리트의 금목서 숲이 서로 베지 않는 틈을 만들었다.

그레이의 등불이 길 입구에 이름을 세웠다.

아레의 바다가 길 아래 묻힌 자들을 드러냈다.

하융의 창이 실패한 가능성들을 숨기지 않았다.

레이튼의 질문이 그 길을 너무 빨리 개척이라 부르지 못하게 했다.

요안나의 모름이 배울 수 있는 자리를 남겼다.

슈샤니크의 장부가 모름을 제도로 바꿀 빈칸을 만들었다.

그리고 푸리나의 조명은 길이 아니라 발을 비추었다.

하얀 지도 위에 첫 번째 길이 생겼다.

완성된 길이 아니었다.

끊어지고, 돌아가고, 흔들리고, 중간에 등불이 서 있고, 숲을 지나고, 요새에 기대고, 허공의 낙점을 딛고, 다시 멀리 돌아오는 길.

그러나 길이었다.

개척의 성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하얀 지도 위에 새겨진 선을 보았다.

그 선은 그녀가 그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미리 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기쁜 얼굴이 되었다.

“좋구나.”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내가 보지 못한 선을 그었구나.”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개척의 성좌는 아이처럼, 혹은 아주 오래된 별처럼 웃었다.

“그래야 나도 따라가 볼 수 있지.”

바실리오는 물러났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길이라는 말이 있는 곳마다, 그는 다시 올 것이다.

빠른 길.
강한 길.
뒤처진 자를 버리는 길.
동경을 관성으로 바꾸는 길.

그러나 오늘 그 길은 선택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은.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들었다.

거기에는 아홉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가면 위로 첫 번째 길의 빛이 흘렀다.

그 빛은 곧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열 번째 단어가 새겨졌다.

길.

푸리나는 그 단어를 오래 보았다.

“열 번째 꿈은 길이었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었지.”

그녀는 하얀 지도 위의 불완전한 선을 보았다.

“누군가가 동경하고, 두려워하고, 그래도 발을 디딘 뒤.”

그레이의 등불.

아레의 바다.

죠니의 나선.

벨라의 요새.

소피아의 재료.

요안나의 모름.

슈샤니크의 장부.

아스테르다스의 낙점.

아스트리트의 숲.

하융의 창.

레이튼의 질문.

“뒤따르는 사람이 그 자리를 기억할 때, 길이 생겼어.”

죠니는 하얀 지도 위의 길을 보았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멀리 돌아왔네.”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길 같아.”

그걸로 충분했다.

이번에는 더 묻지 않았다.

개척의 성좌가 푸리나에게 다가왔다.

“극장주.”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네.”

“너는 길을 그리지 않았구나.”

“그리면 제 길이 되니까요.”

개척의 성좌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겠구나.”

푸리나는 가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질문?”

개척의 성좌는 가면 위의 단어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너는 많은 이들의 꿈을 보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네 꿈은 무엇이지?”

무대가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기 손에 든 가면이 너무 무겁다고 느꼈다.

세히스문도의 가면.

꿈속의 왕자.
탑에 갇힌 자.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묻는 자.

푸리나는 지금까지 모두의 탑을 보았다.

알토의 기록.
미하일라의 천명.
민다우가스의 복수.
라이자의 이름.
불가리아의 고통.
호흐마이스터의 죄.
아스트리트의 책임.
슈샤니크의 거울.
요안나의 평화.
개척되지 않은 길.

그러나 푸리나 자신의 탑은?

극장.

조명.

박수.

대본.

무대.

그녀는 정말로 모두를 주인공으로 세웠는가.

아니면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 조명을 비추었는가.

그 물음이, 아직 단어가 새겨지지 않은 마지막 빈자리처럼 가면 위에 남았다.

개척의 성좌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흰 지도 가장자리로 돌아갔다.

“다음은 네 막이겠구나.”

푸리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개척의 성좌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부디 나의 눈도, 네 극장의 조명도, 모두 넘어서 보렴.”

바람이 불었다.

하얀 지도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접혔다.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무대 아래, 다음 막을 기다리듯 잠시 숨어들었다.

세히스문도의 가면에는 이제 열 단어가 있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그리고 마지막 글자가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무대 뒤편에서 막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끝의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지막 막이 오르기 직전, 극장이 숨을 고르는 소리였다.

푸리나는 가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다음 꿈.”

이번에는 아무 예고도 없었다.

어떤 성좌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떤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저 조명이 천천히 푸리나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그녀는 이해했다.

다음 꿈은 다른 누군가의 탑이 아니었다.

자신의 극장.

자신의 조명.

자신의 대본.

푸리나가 낮게 말했다.

“마지막 세히스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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