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6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19:06:22
막간
커튼콜 전에 들른 여관
커튼은 내려갔다.
박수는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그 박수는 더 이상 무대를 흔들지 않았다.
조명은 천천히 낮아졌고, 객석의 윤곽도 부드럽게 흐려졌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세히스문도의 가면이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선택.
열한 단어를 품은 가면은, 푸리나의 손 안에서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마치 긴 꿈을 끝낸 뒤, 더 이상 자신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푸리나는 한동안 그 가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무대는 어둠 속으로 접혔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객석의 의자들이 하나둘 나무 의자로 바뀌었다.
무대 바닥은 낡은 마룻바닥이 되었고, 조명은 벽에 걸린 등불이 되었다.
커튼은 두꺼운 여관 커튼이 되었고, 배우들이 드나들던 문은 긴 여행자들이 들어오는 출입문이 되었다.
공연장의 공기 대신 따뜻한 차 냄새가 번졌다.
빵 굽는 냄새.
젖은 외투가 난롯가에서 마르는 냄새.
오래 걸은 사람의 신발 밑에 묻은 흙냄새.
그리고 막이 내린 뒤에야 나오는, 아주 깊은 한숨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이제 무대라기보다 여관에 가까웠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너무 오래 조명을 보고 있었을 뿐.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여관의 성좌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과장되지 않았다.
위압적인 신격이라기보다, 긴 밤을 지나온 손님에게 먼저 따뜻한 차를 권하는 여관지기 같았다.
여관좌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깐 쉬어 가시죠.”
푸리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보았다.
“쉬어도…… 되나요?”
여관좌는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가장 오래 서 있던 분일수록, 오래 쉬셔야 하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이상하게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묻지 않고 찻잔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기호하는 차가 있으신지요? 제 여관에는 대부분 구비되어 있으니까요.”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한 질문들.
아직 마음 안쪽에서 식지 않은 박수.
아직도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것 같은 어깨.
그녀는 작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따뜻한 거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긴 밤을 지나온 분께 드리는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찻잔에서 김이 올랐다.
푸리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뜨거웠다.
그래서 좋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손끝까지 차가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관 안쪽의 벽난로 위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여관좌가 그곳을 가리켰다.
“그 가면은 그곳에 두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보았다.
“여기에요?”
“물론입니다.”
여관좌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곳은 지나온 길에서 너무 무거워진 짐을 잠시 내려놓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푸리나는 가면을 벽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선택.
열한 단어가 불빛을 받아 낮게 빛났다.
그때 여관 안쪽에서 포도와 흙, 오래된 저녁빛의 향이 흘러나왔다.
타마르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면을 보고, 푸리나를 보고, 잔잔히 웃었다.
“잊기 위해 내려놓는 것과, 다시 들기 위해 쉬게 하는 것은 다르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잠시 쉬게 하는 것이겠지요.”
타마르는 찻잔을 들었다.
“꿈도, 너무 오래 손에 쥐고 있으면 손바닥에 자국이 남으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건 조금 무섭네요.”
“모든 좋은 꿈은 조금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깨어난 뒤에도 사람의 걸음걸이를 바꾸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관의 한쪽 테이블에서 장부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였다.
그녀는 어느새 푸리나의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장부와 펜, 접힌 종이 몇 장, 그리고 식지 않은 차가 놓여 있었다.
그레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대단원이 끝났으니 휴식 권고를 올리겠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공연 중에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 대단원이 끝난 직후에 그걸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대단원이 끝났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한 장을 넘겼다.
“오늘 사용한 조명, 무대 장치, 차, 식사, 객석 정리, 배우 휴식 시간, 그리고 폐하의 무리한 신술 운용에 따른 휴식 권고까지 포함한 정산입니다.”
푸리나가 찻잔을 들다 말고 굳었다.
“정산?”
옆자리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죠니였다.
그는 의자에 조금 비스듬히 기대앉아 잔을 들고 있었다.
말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여관 밖 어딘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답네.”
죠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박수보다 정산이 빠르다니.”
그레이는 조용히 답했다.
“박수는 폐하를 쉬게 하지 않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 그렇게 무리 안 했거든?”
그때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무리’의 정의부터 확인해볼까요?”
“레이튼까지?”
하융이 창가 쪽에서 낮게 웃었다.
그의 곁에는 닫힌 창호가 있었다.
오늘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느 창에서도, 이쯤 되면 쉬는 편이 낫더이다.”
푸리나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레이.
죠니.
레이튼.
하융.
자기 가신들.
자기 극장의 배우들이자, 자신의 무대를 붙잡아주는 사람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너희 지금 나를 몰아붙이는 거야?”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신 회의지.”
그는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꽤 평화로운 편이고.”
그 말에 푸리나는 결국 웃어버렸다.
웃음이 나오자, 조금 힘이 빠졌다.
무대 위에서는 끝까지 버티던 어깨가, 여관 의자에 앉자마자 조금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장부 한쪽에 조용히 무언가를 적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뭘 적는 거야?”
“폐하께서 웃으셨습니다.”
“그것도 기록해?”
“회복 징후입니다.”
죠니가 잔을 들었다.
“좋네. 그럼 오늘은 앙코르 금지야.”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앙코르 금지?”
“말도 사람도 쉬어야 오래 간다.”
죠니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좋은 극은 끝나고 나서 배우가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하지.”
푸리나는 벽난로 위의 가면을 보았다.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완벽한 극은 질문을 남기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 극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레이튼은 즉시 답했다.
푸리나가 조금 굳었다.
그러나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좋은 극이었습니다.”
“그건 무슨 답이야?”
“질문을 남겼으니까요.”
레이튼은 찻잔의 표면을 보았다.
“손님들이 각자 들고 갈 수 있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답을 강제로 쥐여주지 않았고요.”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더 화려했소.”
푸리나는 그쪽을 보았다.
“그럼 그게 더 좋은 거야?”
“아니오.”
하융은 닫힌 창호 위에 손을 얹었다.
“어느 창에서는 더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더 적은 사람이 쉬었소.”
그는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차를 마셨고, 누군가는 그냥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밤의 창은, 적어도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있었소.”
하융이 말했다.
“그 정도면 막간으로는 충분하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폐하.”
“응.”
“모두의 결말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폐하의 몸과 극장을 관리하는 일은, 저희가 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음보다 먼저 무언가가 목에 걸렸다.
“그레이, 그런 말은……”
“너무합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고마워서.”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기록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여관 안쪽의 다른 테이블에서도 작은 장면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알토는 한쪽 테이블에서 공연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카식은 그 맞은편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물었다.
“그래서, 이건 역사인가? 극인가?”
알토는 펜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둘 다 아니야. 아직 초고야.”
아카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하군. 초고는 고칠 수 있으니까.”
벽난로의 불빛이 그 기록 위에 닿았다.
아직이라는 단어가 가면 위에서 아주 작게 빛났다.
다른 테이블에는 미하일라와 요안나, 슈샤니크가 앉아 있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평화를 말하는 것보다, 차를 안 흘리고 마시는 게 더 어려울 때도 있네요.”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둘 다 손이 떨리면 어렵다.”
요안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슈샤니크는 냅킨을 조용히 밀어주었다.
“폐하, 컵 받침을 쓰십시오. 기록에 얼룩이 남습니다.”
요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슈샤니크, 지금도 기록이에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습관입니다.”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요안나는 보았다.
그리고 기뻐했다.
민다우가스는 여관의 구조를 보고 있었다.
탁자 배치, 출입구, 시야, 비상시 동선.
그 옆에서 아스테르다스는 빵을 뜯고 있었다.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효율적인 공간은 아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빵을 씹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오래 머물잖아.”
“그건 장점이자 위험이다.”
“대공.”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가끔은 위험한 게 살아 있다는 뜻일 때도 있어.”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았다.
잠시 뒤,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은 계산에 넣어두겠다.”
“그럼 충분해.”
아스테르다스는 만족스럽게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라이자는 여관의 은식기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소피아는 찻잔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었다.
벨라는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소피아가 말했다.
“이 찻잔, 보온 구조가 꽤 좋아요.”
라이자가 눈을 빛냈다.
“성은으로 만들면 더 오래 따뜻할지도 몰라요.”
벨라가 짧게 말했다.
“차는 마시는 것이다.”
소피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전부 다요?”
벨라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전부다.”
라이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소피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차를 마셨다.
“음. 이것도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불가리아 테이블은 조금 더 시끄러웠다.
알렉산드리나는 차를 들고 있었고, 가브리엘라는 그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자기 잔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스토얀카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새벽을 향해 가는 길에도 막간은 필요하군.”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도 숨을 골라야 오래 이어집니다.”
레플리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도 쉬어도 되는 거야?”
스토얀카가 바로 대답했다.
“쉬는 것까지 허락받으려 하지 마. 그건 네 몸이야.”
레플리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자기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럼…… 쉴래.”
가브리엘라는 아무 말 없이 그 잔에 따뜻한 차를 더 부어주었다.
호흐마이스터와 아스트리트는 조금 떨어진 조용한 테이블에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여전히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스트리트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
“뜨겁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잔을 받아들었다.
“죄보다 뜨겁지는 않겠지요.”
아스트리트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혀는 델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아주 작게.
웃음에 가까운 것이 지나갔다.
아스트리트는 덧붙였다.
“책임은 식혀서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찻잔을 보았다.
“그렇다면 배워야겠군요.”
“천천히 드시면 됩니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서는 죄와 책임이 더 이상 갑옷과 왕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너무 뜨거운 차처럼, 조심히 들어야 하는 무게가 되어 있었다.
여관의 창가에는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푸리나의 가신단 테이블에 섞이지 않았다.
그녀의 자리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창밖에는 가장 낮은 바다가 보이는 듯했다.
아레는 그 바다를 보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었네.”
아레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잘 쉬거라.”
푸리나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또 누군가의 상처를 장면으로 만들어버릴까 봐.”
아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서워하는 한, 함부로 하지 않을 게다.”
“그걸로 충분해?”
“충분하지는 않지.”
아레는 여관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레이가 장부를 정리하고, 레이튼이 찻잔을 기울이고, 하융이 창을 닫고, 죠니가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곁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란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적고, 누군가는 질문하고, 누군가는 창을 닫고, 누군가는 네 발밑을 보지.”
“그리고 나는?”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는 불을 켜렴.”
잠시 뒤, 덧붙였다.
“너무 밝지 않게.”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잊으면 안 되잖아.”
“잊지 않는 것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르단다.”
아레는 창밖의 바다를 보았다.
“침묵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산 자의 눈이 젖어버리니.”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조금 쉴게.”
“그래.”
아레는 다시 차를 들었다.
“막간이란 그런 것이지.”
푸리나는 가신단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레이는 새 잔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푸리나가 앉자, 죠니가 말했다.
“돌아왔네.”
“응.”
“창가 쪽 바닥은 어때?”
푸리나는 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는 정말 바닥을 빼면 대화가 안 돼?”
“길 이야기잖아.”
죠니는 태연하게 답했다.
“바닥이 핵심이지.”
푸리나는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레이튼은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흥미롭군요. ‘바닥’이라는 단어가 죠니 경에게는 현실 검증의 은유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칭찬이야?”
“분석입니다.”
하융이 낮게 웃었다.
“어느 창에서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소.”
“그럼 칭찬으로 하지.”
죠니는 잔을 들었다.
“나쁘지 않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모두 차를 드십시오. 식기 전에.”
그 말에 네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잔을 들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누가 주인공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순간.
누가 박수를 받는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
그냥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내가 모두의 결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레이가 대답했다.
“네.”
레이튼이 말했다.
“대신 질문은 남기셔도 됩니다.”
하융이 덧붙였다.
“창을 전부 열지 않으셔도 되오.”
죠니가 말했다.
“그리고 가끔은 앙코르도 안 하면 돼.”
푸리나는 네 사람을 보았다.
“너희 정말 나를 쉬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죠니가 웃었다.
“가신 회의라니까.”
그레이가 정정했다.
“휴식 권고 회의입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제는 명확하군요.”
하융은 창호를 완전히 닫았다.
“결론도 이미 났소.”
푸리나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쉴게.”
그 순간 여관좌가 테이블 곁으로 다가왔다.
“좋은 결론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관좌님까지요?”
여관좌는 정중히 미소 지었다.
“여관지기는 손님이 무리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저도 손님이에요?”
“물론입니다.”
여관좌는 따뜻한 차를 한 번 더 따라주었다.
“오늘 밤은 모두가 배우였고, 모두가 손님이었습니다.”
타마르가 그 옆에서 말했다.
“좋은 꿈은 깨어난 뒤에 전부 설명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녀는 푸리나의 찻잔을 보았다.
“향이 남으면 충분한 밤도 있어요.”
푸리나는 차를 마셨다.
따뜻했다.
박수보다 조용하고, 조명보다 낮고, 대사보다 오래 남는 온기였다.
그때 그레이가 빈 잔 하나를 발견했다.
테이블 끝.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
잔은 깨끗했고, 아직 차가 따르지 않았다.
그레이가 물었다.
“이 잔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관좌는 그 잔을 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의 것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데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의 손님이지요.”
여관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내일의 손님.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사람.
아직 길 위에 있는 사람.
푸리나는 벽난로 위의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보았다.
열한 단어가 불빛 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그녀는 더 이상 그것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버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잠시 쉬게 해두었을 뿐.
푸리나는 빈 잔을 보며 말했다.
“그럼 조명은 꺼도 되겠네요.”
여관좌가 고개를 저었다.
“등불은 남겨두겠습니다.”
타마르가 웃었다.
“길 잃은 손님은 대개, 가장 낮은 불빛을 보고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빈 잔 옆에 작은 이름표를 놓았다.
아직 아무 이름도 적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빈 이름표군요.”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곧 채워질 것이오.”
죠니는 의자에 기대앉아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차나 더 마시자고.”
푸리나는 웃었다.
“정말 막간답네.”
“막간이니까.”
죠니가 답했다.
“주인공도 쉬는 시간이지.”
그 밤, 아무도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모두가 잠시 손님이면 충분했다.
여관의 등불은 무대의 조명보다 낮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더 오래 볼 수 있었다.
푸리나는 극장주도 여왕도 아닌 손님처럼 차를 마셨다.
그리고 가신들은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잔이 비지 않도록 곁에 있었다.
벽난로 위의 세히스문도의 가면은, 다음 아침까지 식지 않은 차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커튼콜 전에 들른 여관
커튼은 내려갔다.
박수는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그 박수는 더 이상 무대를 흔들지 않았다.
조명은 천천히 낮아졌고, 객석의 윤곽도 부드럽게 흐려졌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것은 세히스문도의 가면이었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선택.
열한 단어를 품은 가면은, 푸리나의 손 안에서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마치 긴 꿈을 끝낸 뒤, 더 이상 자신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푸리나는 한동안 그 가면을 내려놓지 못했다.
무대는 어둠 속으로 접혔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객석의 의자들이 하나둘 나무 의자로 바뀌었다.
무대 바닥은 낡은 마룻바닥이 되었고, 조명은 벽에 걸린 등불이 되었다.
커튼은 두꺼운 여관 커튼이 되었고, 배우들이 드나들던 문은 긴 여행자들이 들어오는 출입문이 되었다.
공연장의 공기 대신 따뜻한 차 냄새가 번졌다.
빵 굽는 냄새.
젖은 외투가 난롯가에서 마르는 냄새.
오래 걸은 사람의 신발 밑에 묻은 흙냄새.
그리고 막이 내린 뒤에야 나오는, 아주 깊은 한숨들.
푸리나의 [여관:극장]은 이제 무대라기보다 여관에 가까웠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너무 오래 조명을 보고 있었을 뿐.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푸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여관의 성좌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여전히 과장되지 않았다.
위압적인 신격이라기보다, 긴 밤을 지나온 손님에게 먼저 따뜻한 차를 권하는 여관지기 같았다.
여관좌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깐 쉬어 가시죠.”
푸리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보았다.
“쉬어도…… 되나요?”
여관좌는 아주 부드럽게 웃었다.
“가장 오래 서 있던 분일수록, 오래 쉬셔야 하지요.”
그 말에 푸리나는 이상하게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좌는 묻지 않고 찻잔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기호하는 차가 있으신지요? 제 여관에는 대부분 구비되어 있으니까요.”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손에서 놓지 못한 질문들.
아직 마음 안쪽에서 식지 않은 박수.
아직도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것 같은 어깨.
그녀는 작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따뜻한 거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긴 밤을 지나온 분께 드리는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찻잔에서 김이 올랐다.
푸리나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뜨거웠다.
그래서 좋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기가 손끝까지 차가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관 안쪽의 벽난로 위에는 빈 자리가 있었다.
여관좌가 그곳을 가리켰다.
“그 가면은 그곳에 두셔도 됩니다.”
푸리나는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보았다.
“여기에요?”
“물론입니다.”
여관좌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곳은 지나온 길에서 너무 무거워진 짐을 잠시 내려놓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푸리나는 가면을 벽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망설임.
칼.
이름.
새벽.
죄.
책임.
거울.
평화.
길.
선택.
열한 단어가 불빛을 받아 낮게 빛났다.
그때 여관 안쪽에서 포도와 흙, 오래된 저녁빛의 향이 흘러나왔다.
타마르가 그늘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가면을 보고, 푸리나를 보고, 잔잔히 웃었다.
“잊기 위해 내려놓는 것과, 다시 들기 위해 쉬게 하는 것은 다르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
“잠시 쉬게 하는 것이겠지요.”
타마르는 찻잔을 들었다.
“꿈도, 너무 오래 손에 쥐고 있으면 손바닥에 자국이 남으니까요.”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그건 조금 무섭네요.”
“모든 좋은 꿈은 조금 무섭답니다.”
타마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깨어난 뒤에도 사람의 걸음걸이를 바꾸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관의 한쪽 테이블에서 장부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리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였다.
그녀는 어느새 푸리나의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앞에는 장부와 펜, 접힌 종이 몇 장, 그리고 식지 않은 차가 놓여 있었다.
그레이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대단원이 끝났으니 휴식 권고를 올리겠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공연 중에는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레이, 대단원이 끝난 직후에 그걸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대단원이 끝났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레이는 한 장을 넘겼다.
“오늘 사용한 조명, 무대 장치, 차, 식사, 객석 정리, 배우 휴식 시간, 그리고 폐하의 무리한 신술 운용에 따른 휴식 권고까지 포함한 정산입니다.”
푸리나가 찻잔을 들다 말고 굳었다.
“정산?”
옆자리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죠니였다.
그는 의자에 조금 비스듬히 기대앉아 잔을 들고 있었다.
말은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여관 밖 어딘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레이답네.”
죠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박수보다 정산이 빠르다니.”
그레이는 조용히 답했다.
“박수는 폐하를 쉬게 하지 않습니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
푸리나는 조금 억울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나 그렇게 무리 안 했거든?”
그때 레이튼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은 질문입니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레이튼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무리’의 정의부터 확인해볼까요?”
“레이튼까지?”
하융이 창가 쪽에서 낮게 웃었다.
그의 곁에는 닫힌 창호가 있었다.
오늘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어느 창에서도, 이쯤 되면 쉬는 편이 낫더이다.”
푸리나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레이.
죠니.
레이튼.
하융.
자기 가신들.
자기 극장의 배우들이자, 자신의 무대를 붙잡아주는 사람들.
푸리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너희 지금 나를 몰아붙이는 거야?”
죠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신 회의지.”
그는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꽤 평화로운 편이고.”
그 말에 푸리나는 결국 웃어버렸다.
웃음이 나오자, 조금 힘이 빠졌다.
무대 위에서는 끝까지 버티던 어깨가, 여관 의자에 앉자마자 조금 내려앉았다.
그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장부 한쪽에 조용히 무언가를 적었다.
푸리나가 물었다.
“또 뭘 적는 거야?”
“폐하께서 웃으셨습니다.”
“그것도 기록해?”
“회복 징후입니다.”
죠니가 잔을 들었다.
“좋네. 그럼 오늘은 앙코르 금지야.”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앙코르 금지?”
“말도 사람도 쉬어야 오래 간다.”
죠니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좋은 극은 끝나고 나서 배우가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하지.”
푸리나는 벽난로 위의 가면을 보았다.
“걸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레이튼이 부드럽게 말했다.
“완벽한 극은 질문을 남기지 않습니다.”
푸리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오늘 극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레이튼은 즉시 답했다.
푸리나가 조금 굳었다.
그러나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좋은 극이었습니다.”
“그건 무슨 답이야?”
“질문을 남겼으니까요.”
레이튼은 찻잔의 표면을 보았다.
“손님들이 각자 들고 갈 수 있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답을 강제로 쥐여주지 않았고요.”
하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창에서는 그대가 더 화려했소.”
푸리나는 그쪽을 보았다.
“그럼 그게 더 좋은 거야?”
“아니오.”
하융은 닫힌 창호 위에 손을 얹었다.
“어느 창에서는 더 많은 박수를 받았으나, 더 적은 사람이 쉬었소.”
그는 여관 안을 둘러보았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차를 마셨고, 누군가는 그냥 두 손으로 잔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밤의 창은, 적어도 사람들이 앉을 자리가 있었소.”
하융이 말했다.
“그 정도면 막간으로는 충분하오.”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레이가 조용히 장부를 덮었다.
“폐하.”
“응.”
“모두의 결말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레이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폐하의 몸과 극장을 관리하는 일은, 저희가 해야 합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으려 했다.
하지만 웃음보다 먼저 무언가가 목에 걸렸다.
“그레이, 그런 말은……”
“너무합니까?”
“아니.”
푸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고마워서.”
그레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럼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기록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레이는 이미 적고 있었다.
죠니가 낮게 웃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여관 안쪽의 다른 테이블에서도 작은 장면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알토는 한쪽 테이블에서 공연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카식은 그 맞은편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물었다.
“그래서, 이건 역사인가? 극인가?”
알토는 펜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둘 다 아니야. 아직 초고야.”
아카식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하군. 초고는 고칠 수 있으니까.”
벽난로의 불빛이 그 기록 위에 닿았다.
아직이라는 단어가 가면 위에서 아주 작게 빛났다.
다른 테이블에는 미하일라와 요안나, 슈샤니크가 앉아 있었다.
요안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평화를 말하는 것보다, 차를 안 흘리고 마시는 게 더 어려울 때도 있네요.”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둘 다 손이 떨리면 어렵다.”
요안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슈샤니크는 냅킨을 조용히 밀어주었다.
“폐하, 컵 받침을 쓰십시오. 기록에 얼룩이 남습니다.”
요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슈샤니크, 지금도 기록이에요?”
슈샤니크는 잠시 침묵했다.
“습관입니다.”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요안나는 보았다.
그리고 기뻐했다.
민다우가스는 여관의 구조를 보고 있었다.
탁자 배치, 출입구, 시야, 비상시 동선.
그 옆에서 아스테르다스는 빵을 뜯고 있었다.
민다우가스가 말했다.
“효율적인 공간은 아니다.”
아스테르다스는 빵을 씹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오래 머물잖아.”
“그건 장점이자 위험이다.”
“대공.”
아스테르다스가 웃었다.
“가끔은 위험한 게 살아 있다는 뜻일 때도 있어.”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았다.
잠시 뒤,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은 계산에 넣어두겠다.”
“그럼 충분해.”
아스테르다스는 만족스럽게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라이자는 여관의 은식기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소피아는 찻잔의 구조를 분석하고 있었다.
벨라는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소피아가 말했다.
“이 찻잔, 보온 구조가 꽤 좋아요.”
라이자가 눈을 빛냈다.
“성은으로 만들면 더 오래 따뜻할지도 몰라요.”
벨라가 짧게 말했다.
“차는 마시는 것이다.”
소피아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전부 다요?”
벨라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전부다.”
라이자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소피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차를 마셨다.
“음. 이것도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불가리아 테이블은 조금 더 시끄러웠다.
알렉산드리나는 차를 들고 있었고, 가브리엘라는 그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자기 잔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스토얀카는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알렉산드리나가 말했다.
“새벽을 향해 가는 길에도 막간은 필요하군.”
가브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도도 숨을 골라야 오래 이어집니다.”
레플리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도 쉬어도 되는 거야?”
스토얀카가 바로 대답했다.
“쉬는 것까지 허락받으려 하지 마. 그건 네 몸이야.”
레플리카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자기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럼…… 쉴래.”
가브리엘라는 아무 말 없이 그 잔에 따뜻한 차를 더 부어주었다.
호흐마이스터와 아스트리트는 조금 떨어진 조용한 테이블에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여전히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스트리트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
“뜨겁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잔을 받아들었다.
“죄보다 뜨겁지는 않겠지요.”
아스트리트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혀는 델 수 있습니다.”
호흐마이스터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아주 작게.
웃음에 가까운 것이 지나갔다.
아스트리트는 덧붙였다.
“책임은 식혀서 마시는 편이 좋습니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찻잔을 보았다.
“그렇다면 배워야겠군요.”
“천천히 드시면 됩니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서는 죄와 책임이 더 이상 갑옷과 왕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너무 뜨거운 차처럼, 조심히 들어야 하는 무게가 되어 있었다.
여관의 창가에는 아레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푸리나의 가신단 테이블에 섞이지 않았다.
그녀의 자리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창밖에는 가장 낮은 바다가 보이는 듯했다.
아레는 그 바다를 보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푸리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었네.”
아레는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잘 쉬거라.”
푸리나는 창밖의 어둠을 보았다.
“나는 아직도 무서워. 또 누군가의 상처를 장면으로 만들어버릴까 봐.”
아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서워하는 한, 함부로 하지 않을 게다.”
“그걸로 충분해?”
“충분하지는 않지.”
아레는 여관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레이가 장부를 정리하고, 레이튼이 찻잔을 기울이고, 하융이 창을 닫고, 죠니가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곁에 사람들이 있는 것이란다.”
푸리나는 조용히 들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적고, 누군가는 질문하고, 누군가는 창을 닫고, 누군가는 네 발밑을 보지.”
“그리고 나는?”
아레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는 불을 켜렴.”
잠시 뒤, 덧붙였다.
“너무 밝지 않게.”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품었다.
“잊으면 안 되잖아.”
“잊지 않는 것과,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르단다.”
아레는 창밖의 바다를 보았다.
“침묵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산 자의 눈이 젖어버리니.”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조금 쉴게.”
“그래.”
아레는 다시 차를 들었다.
“막간이란 그런 것이지.”
푸리나는 가신단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레이는 새 잔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푸리나가 앉자, 죠니가 말했다.
“돌아왔네.”
“응.”
“창가 쪽 바닥은 어때?”
푸리나는 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너는 정말 바닥을 빼면 대화가 안 돼?”
“길 이야기잖아.”
죠니는 태연하게 답했다.
“바닥이 핵심이지.”
푸리나는 이번에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레이튼은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흥미롭군요. ‘바닥’이라는 단어가 죠니 경에게는 현실 검증의 은유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죠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칭찬이야?”
“분석입니다.”
하융이 낮게 웃었다.
“어느 창에서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소.”
“그럼 칭찬으로 하지.”
죠니는 잔을 들었다.
“나쁘지 않네.”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모두 차를 드십시오. 식기 전에.”
그 말에 네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잔을 들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았다.
누가 주인공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순간.
누가 박수를 받는지 중요하지 않은 자리.
그냥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푸리나는 낮게 말했다.
“내가 모두의 결말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레이가 대답했다.
“네.”
레이튼이 말했다.
“대신 질문은 남기셔도 됩니다.”
하융이 덧붙였다.
“창을 전부 열지 않으셔도 되오.”
죠니가 말했다.
“그리고 가끔은 앙코르도 안 하면 돼.”
푸리나는 네 사람을 보았다.
“너희 정말 나를 쉬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죠니가 웃었다.
“가신 회의라니까.”
그레이가 정정했다.
“휴식 권고 회의입니다.”
레이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제는 명확하군요.”
하융은 창호를 완전히 닫았다.
“결론도 이미 났소.”
푸리나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쉴게.”
그 순간 여관좌가 테이블 곁으로 다가왔다.
“좋은 결론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관좌님까지요?”
여관좌는 정중히 미소 지었다.
“여관지기는 손님이 무리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저도 손님이에요?”
“물론입니다.”
여관좌는 따뜻한 차를 한 번 더 따라주었다.
“오늘 밤은 모두가 배우였고, 모두가 손님이었습니다.”
타마르가 그 옆에서 말했다.
“좋은 꿈은 깨어난 뒤에 전부 설명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녀는 푸리나의 찻잔을 보았다.
“향이 남으면 충분한 밤도 있어요.”
푸리나는 차를 마셨다.
따뜻했다.
박수보다 조용하고, 조명보다 낮고, 대사보다 오래 남는 온기였다.
그때 그레이가 빈 잔 하나를 발견했다.
테이블 끝.
아무도 앉지 않은 자리.
잔은 깨끗했고, 아직 차가 따르지 않았다.
그레이가 물었다.
“이 잔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관좌는 그 잔을 보았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분의 것입니다.”
푸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데요?”
여관좌는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의 손님이지요.”
여관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내일의 손님.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사람.
아직 이름을 말하지 않은 사람.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사람.
아직 길 위에 있는 사람.
푸리나는 벽난로 위의 세히스문도의 가면을 보았다.
열한 단어가 불빛 속에서 조용히 빛났다.
그녀는 더 이상 그것을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버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잠시 쉬게 해두었을 뿐.
푸리나는 빈 잔을 보며 말했다.
“그럼 조명은 꺼도 되겠네요.”
여관좌가 고개를 저었다.
“등불은 남겨두겠습니다.”
타마르가 웃었다.
“길 잃은 손님은 대개, 가장 낮은 불빛을 보고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빈 잔 옆에 작은 이름표를 놓았다.
아직 아무 이름도 적지 않았다.
레이튼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빈 이름표군요.”
하융은 창밖을 보았다.
“어느 창에서는, 곧 채워질 것이오.”
죠니는 의자에 기대앉아 말했다.
“그럼 그때까지 차나 더 마시자고.”
푸리나는 웃었다.
“정말 막간답네.”
“막간이니까.”
죠니가 답했다.
“주인공도 쉬는 시간이지.”
그 밤, 아무도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모두가 잠시 손님이면 충분했다.
여관의 등불은 무대의 조명보다 낮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더 오래 볼 수 있었다.
푸리나는 극장주도 여왕도 아닌 손님처럼 차를 마셨다.
그리고 가신들은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잔이 비지 않도록 곁에 있었다.
벽난로 위의 세히스문도의 가면은, 다음 아침까지 식지 않은 차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