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77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20:11:08
《한여름 밤의 군주들》
1장. 배역표를 받은 왕관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여름밤은 쉽게 식지 않았다.
바다에서 올라온 습한 바람은 성벽 위의 깃발을 천천히 밀었고, 항구 쪽에서는 아직 축제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상인들은 늦은 시간까지 포도주와 구운 고기를 팔았고, 아이들은 여관 앞 광장에서 종이 왕관을 쓰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왕궁 뒤편, 원래라면 외교 사절과 기사들이 예의를 차려 줄지어 섰을 넓은 마당에는, 지금 전혀 다른 것이 세워져 있었다.
무대였다.
그것도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수상한 무대였다.
푸른 천막과 금빛 끈.
나무로 만든 가짜 숲.
은색 종이로 접은 별들.
포도넝쿨처럼 얽힌 조명.
어디선가 빌려온 듯한 왕관 모형들.
그리고 무대 정중앙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
《한여름 밤의 군주들》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왕관은 잠시 객석에 맡겨주시길!
그 문구 앞에서 여러 왕과 군주와 황제들이 침묵했다.
침묵은 길었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푸리나 헤툼이었다.
“좋아!”
그녀는 이미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 손에는 배역표 뭉치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요정 날개처럼 생긴 이상한 장식이 들려 있었다.
“오늘 밤, 이곳은 킬리키아의 왕궁이 아니야. 외교 회담장도 아니고, 전쟁 전야의 작전실도 아니지.”
푸리나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이곳은 숲! 꿈! 착각! 사랑! 음모! 즉흥극! 그리고 아주 조금의 외교 사고가 허용되는 무대다!”
그레이가 무대 아래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외교 사고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폐하.”
“아주 조금도?”
“아주 조금도.”
“그럼 외교적 해프닝!”
“그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예술적 오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좋아! 그럼 오늘 밤은 예술적으로 안전한 오해만 허용한다!”
그 말에 몇몇 군주들이 서로를 보았다.
보헤미아의 라이자는 이미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장식에 매달린 은빛 꽃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이 꽃, 진짜 은으로 만들면 더 예쁠 텐데.”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종이 왕관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추어 보았다.
“종이 왕관이라. 가벼워서 좋군요. 진짜 왕관보다 넘어지기 쉽지만, 대신 다시 쓰기도 쉽겠어요.”
호흐마이스터는 무대 뒤편의 가짜 나무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저 나무 뒤에 세 명은 숨을 수 있겠군요. 퇴로는 두 개. 불을 지르면 남쪽 천막부터 무너집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좋아! 아주 훌륭한 감상평이야!”
“감상평이 아닙니다.”
“그럼 더 훌륭해!”
니케아의 공동황제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는 천천히 무대 전체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장식보다 기둥의 각도와 조명의 위치, 출입구의 배치에 더 오래 머물렀다.
“무대의 좌측이 약하다. 군중이 몰리면 무너질 수 있다.”
그레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보강 지시를 내렸습니다. 좌측 기둥에는 추가 지지대를 설치했고, 무대 아래에는 물통과 모래주머니를 배치했습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희극이라 해도 사람이 다치면 칙령의 대상이 된다.”
요안나 4세는 그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희극에도 평화가 필요하니까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잠시 보더니, 낮게 말했다.
“평화에는 기둥도 필요하다.”
요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요.”
그때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그 웃음은 컸다.
숲속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넓고, 성벽을 넘어가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
“하하! 좋다. 왕들을 모아놓고 왕관을 맡기라니, 킬리키아의 여왕은 담이 크군.”
그는 현수막을 올려다보다가 푸리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푸리나 헤툼, 왕관은 머리에서 벗긴다고 무게가 사라지지 않는다. 객석에 맡긴 왕관도 결국 누군가 지켜야 하지.”
푸리나는 씩 웃었다.
“그래서 초대했어. 왕관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민다우가스는 배역표가 놓인 탁자를 보았다.
“다만 배역이 나라의 체면을 손상한다면, 그 손상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걱정 마!”
푸리나는 엄지를 세웠다.
“이미 손상될 체면은 모두 공평하게 손상되도록 배분했어!”
“더 걱정되는군.”
아카식은 객석 한쪽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작은 기록장을 펼치고 있었다.
“훌륭해. 시작 전부터 이미 좋은 기록이야. ‘체면의 공평한 손상’이라니, 인간의 외교사는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많군.”
알토는 그 옆에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문장은 기록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사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이유네.”
타마르 여왕은 황혼빛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에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더 고요하게 웃었다.
“젊은 군주들이 참으로 분주하군요. 꿈을 꾸기 전부터 저토록 소란스러우니, 꿈속에서는 얼마나 떠들까요.”
벨라 4세는 무대 뒤로 세워진 가짜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손을 뻗어 그 얇은 나무판을 두드렸다.
“가볍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무대의 성벽도 무너지면 사람이 다친다. 헝가리에서는 그런 성벽을 다시 세웠다. 몇 번이고.”
소피아가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벨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마당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푸리나는 그 무게를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세워지는 무대를 보자!”
그녀는 배역표를 높이 들었다.
“자, 군주 여러분! 이제 배역을 나눠줄 시간이야!”
그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고가 시작되는군요.”
죠니 죠스타는 무대 옆에서 의자 하나를 고치고 있었다. 그는 망치로 삐걱거리는 다리를 두 번 두드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이미 시작됐어. 우리가 아직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들은 듯했다.
“죠니!”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대체로 싫은 일이 생기더라.”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정답! 자네는 오늘 장인극단의 특별 조언자야!”
죠니는 망치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그게 뭔데.”
“무대 장치도 고치고, 배우들도 말리고, 필요하면 말도 타고, 마지막에는 박수도 쳐.”
“그건 그냥 잡일이잖아.”
“기사단장다운 잡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밥은?”
“공연 끝나면 연회!”
“그럼 해. 따뜻할 때 내 자리 남겨둬, 여왕님.”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협상 성공!”
알토가 조용히 기록장 쪽을 보았다.
“이것도 외교 협정입니까?”
아카식은 진지하게 말했다.
“따뜻한 식사와 잡일의 교환. 충분히 계약적이지.”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후대가 오해합니다.”
배역표가 돌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푸리나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 헤툼. 배역은 퍽!”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정 날개를 등에 달았다.
“완벽해!”
그레이가 말했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문제입니다.”
“그레이, 그런 말은 칭찬처럼 들려!”
“칭찬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렸어!”
레이튼은 배역표를 받아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해설자 겸 숲의 문지기군요. 흥미롭습니다. 배우들이 길을 잃었을 때 질문을 던지는 역할이라…….”
그는 모자를 살짝 고쳐 썼다.
“그렇다면 오늘 밤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이것이겠군요. 왕관을 벗은 왕은 여전히 왕인가?”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 대사 킵!”
민다우가스는 자신의 배역표를 펼쳤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몽상가 숲의 왕.”
침묵.
잠시 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 웃음은 정말로 호방했다.
마당 전체가 따라 흔들릴 만큼.
“나를 몽상가로 세운다고? 좋은 배치다. 적이 알면 유쾌해하겠군.”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평소와 정반대인 배역을 맡아야 희극이 되니까!”
민다우가스는 배역표를 접었다.
“아니, 푸리나 여왕. 완전히 반대는 아니다.”
그는 무대 뒤의 가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의 왕이라면 나쁘지 않다. 숲은 숨고, 기다리고, 사냥한다. 몽상가라면 더 좋지. 꿈을 꾸지 않는 왕은 지도를 넓히지 못한다.”
그는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다만 꿈은 병참을 먹고 자란다. 그걸 모르는 몽상가는 첫겨울에 죽는다.”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더 환하게 웃었다.
“역시 민다우가스! 배역표를 받자마자 국가 운영론으로 바꾸다니!”
“군주는 어디서든 국가를 본다.”
민다우가스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게 희극 무대라 해도 말이다.”
다음은 미하일라였다.
그녀는 배역표를 펼쳤고, 잠시 침묵했다.
“요정 여왕.”
요안나가 살짝 웃었다.
“잘 어울리세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요정 여왕은 어떤 권한을 갖지?”
푸리나가 대답했다.
“사랑의 숲을 다스리고, 꿈과 장난과 화해를 관장하지!”
미하일라는 다시 배역표를 내려다보았다.
“군권은?”
“없어!”
“칙령권은?”
“아마도 없어!”
“군사 지휘권은?”
“없다니까!”
미하일라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배역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요안나는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웃지 마라, 요안나. 군권 없는 통치권은 위험하다.”
요안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폐하, 오늘 밤은 통치하지 않아도 되는 밤일지도 몰라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배역이군.”
그 말은 작았지만, 묵직했다.
요안나는 자신의 배역표를 펼쳤다.
“저는…… 평화의 별을 든 숲의 아이네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는 숲속에서 싸우려는 사람들을 자꾸 손잡게 만드는 역할이야!”
요안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너에게 너무 쉬운 배역이다.”
요안나는 웃었다.
“쉬운 일이라면 세상이 벌써 평화로웠겠죠.”
그 말에 미하일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배역표를 보자마자 환호했다.
“은꽃 요정!”
그녀는 바로 머리에 은빛 꽃 장식을 얹었다.
“이거 너무 좋아! 그런데 꽃잎이 조금 약하네. 내가 진짜 은으로 다시 만들어도 돼?”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무대 장식의 무게가 증가하면 구조 계산을 다시 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주 얇은 은으로.”
“안 됩니다.”
“반만?”
“안 됩니다.”
“그럼 공연 끝나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공연 끝나고 전시용이라면 검토하겠습니다.”
라이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럼 살아 있는 동안 모두 한 번쯤 은꽃을 가져봐야지.”
호흐마이스터는 자신의 배역표를 받았다.
그녀는 종이를 오래 보았다.
“용살 기사.”
주변의 공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 배역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누구나 그녀와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이려는 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아주 밝게 말했다.
“멋있지?”
호흐마이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용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숲속 어딘가!”
“크기와 습성은?”
“상징적이야!”
“상징은 때때로 실물보다 위험합니다.”
그녀는 종이를 접었다.
“그래도 맡겠습니다. 용이라면, 이름이 무엇이든 대비해야 하니까요.”
라이자가 옆에서 은꽃 하나를 들어 보였다.
“용살 기사한테 꽃 장식은 어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 꽃을 보았다.
“전투에는 방해됩니다.”
“그럼 안쪽에 꽂으면?”
“갑주 안쪽은 더 위험합니다.”
“그럼 마음속에!”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꽃을 버리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배역표를 펼쳤다.
“가짜 왕.”
누군가 숨을 삼켰다.
그 배역은 장난처럼 보였지만, 장난으로만 받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사생아.
흉내.
왕권.
결핍.
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적혀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좋군요.”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가짜 왕이라면 오히려 편해요.”
그녀는 종이 왕관을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가짜라면, 누구보다 왕답게 굴면 됩니다. 진짜는 대개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거든요.”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 대사도 킵!”
타마르는 배역표를 받았다.
“황혼의 여왕.”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늘 비슷한 자리에 앉게 되는군요.”
푸리나가 말했다.
“싫어?”
“아니요.”
타마르는 무대 뒤편의 보랏빛 조명을 보았다.
“황혼은 꿈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답니다. 한여름 밤이라면, 그런 자리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벨라 4세는 자신의 종이를 받았다.
“요새를 세우는 여왕.”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맞다.”
푸리나가 말했다.
“숲속에서도 요새를 세우는 역할이야!”
벨라는 무대의 가짜 숲을 보았다.
“숲에도 피난처가 필요하다. 길 잃은 아이와 패잔병은 같은 방식으로 떤다.”
그녀는 종이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성벽은 높이보다 약속이 먼저다. 무대라도 다르지 않다.”
그레이는 조용히 그 말을 기록했다.
민다우가스가 옆에서 웃었다.
“헝가리의 여왕다운 말이군. 숲에서도 성을 세우다니.”
벨라는 그를 보았다.
“리투아니아의 대공이라면 숲에서도 전쟁을 준비하겠지.”
“당연하다.”
민다우가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쟁이 아니라 희극이라 하니, 칼 대신 대사로 사냥해 보지.”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대사도 잘 쓰면 목을 친다.”
푸리나는 기뻐했다.
“좋아! 점점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어!”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아카식은 즐겁게 받아쳤다.
“그렇다면 더 귀한 기록이지.”
알토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 발언도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알토, 오늘 너무 많은 걸 기록하지 않는 거 아니야?”
“외교적 생존입니다.”
그 말에 죠니가 낮게 웃었다.
“쟤는 말이 짧은데 가끔 제일 웃기다니까.”
알토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칭찬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기록하네.”
“쓸모가 있습니다.”
배역표는 계속 돌았다.
불가리아의 레플리카는 “검은 하늘의 성녀”라는 배역을 받았다.
스토얀카는 “가시꽃 무희”라는 배역표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 가까이 있던 몇몇 사절이 한 걸음 물러났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길 잃은 기사단장”이라는 배역을 받아 들고 당황했다.
“잠깐만요. 저는 정말 길을 잃은 게 아니라 편지를 받고 온 건데요.”
죠니가 말했다.
“그게 길 잃은 거야.”
“아니, 편지에는 검술 시연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검술 시연도 할 거야. 숲속에서. 배역으로.”
아스트리트는 한참 푸리나를 보았다.
“혹시 이게 또 다른 임명장은 아니죠?”
주변의 몇몇 인물이 웃음을 참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리트가 그걸 보았다.
“잠깐, 왜 눈을 피하시죠?”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하게 말했다.
“무대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제 눈 피하셨잖아요!”
푸리나는 힘차게 손뼉을 쳤다.
“좋아! 리허설 시작 전부터 이미 희극적 긴장이 훌륭해!”
그레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살짝 덮었다.
“폐하, 적어도 군주분들께 대본을 먼저 읽을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레이.”
푸리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대체로 대본대로 되지 않아.”
“그것은 준비 부족을 정당화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멋있잖아.”
“그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됐어!”
“아닙니다.”
그러는 사이 무대 뒤편에서 시종들이 가짜 숲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천막 위의 조명들이 하나씩 켜졌고, 은빛 종이별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순간, 여관의 성좌가 나타났다.
누구도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어느새 무대 가장자리, 작은 여관 카운터처럼 꾸며진 소품 뒤에 서 있었다. 깨끗한 잔과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그의 미소는 손님을 맞는 여관지기처럼 공손했다.
“오늘 밤도 손님이 많군요.”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오셨군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공연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여관의 성좌는 현수막을 올려다보았다.
“왕관을 맡기는 밤이라. 좋은 발상입니다. 무거운 것은 가끔 내려놓아야, 다시 들 힘도 생기니까요.”
타마르가 잔을 살짝 들었다.
“끝의 여관 주인께서도 오늘은 관객이신가요?”
“관객이자 여관지기입니다.”
그는 차를 따랐다.
“길을 잃은 배우가 있으면 쉬어갈 자리를 내어드려야지요.”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럼 오늘 밤 이 무대는 여관인가, 숲인가?”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둘 다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으면 숲이고, 잠시 앉으면 여관이니까요.”
민다우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은 말이군. 동시에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숲을 여관이라 착각한 군대는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지.”
“그렇기에 문을 밝히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이도.”
“그 점은 군주들이 잘 아시겠지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역할을 확인하는 예의가 있었다.
푸리나는 다시 무대 중앙으로 뛰어올랐다.
“자, 모두 배역을 받았지?”
“받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누구?”
“저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그레이는 무표정했다.
“폐하.”
푸리나는 급히 배역표 뭉치를 뒤졌다.
“있어! 당연히 있지! 그레이는…….”
그녀는 종이를 펼쳤다.
“숲의 회계관!”
그레이는 한참 침묵했다.
“그건 배역입니까, 업무입니까?”
“둘 다!”
죠니가 말했다.
“최악이네.”
그레이는 종이를 받아 들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지출 내역은 통제할 수 있겠군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그레이야!”
“칭찬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일을 떠넘기신 겁니다.”
“하지만 아주 잘할 거잖아?”
그레이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라이자가 웃었다.
“그레이, 내가 은꽃 장식 비용은 따로 낼게.”
“공연 종료 후 정산하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건 배역이 아니야. 그냥 그레이 본인이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때때로 가장 어려운 연기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지요.”
하융은 무대 뒤 창문처럼 세워진 장식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아직 배역표를 펴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하융! 자네는?”
하융은 종이를 펼쳤다.
“비껴간 꿈의 고양이.”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지?”
하융은 천천히 무대 위의 별들을 보았다.
“고양이인지는 모르겠소. 허나 꿈이 비껴간다는 말은 알겠구려.”
“그럼 합격!”
“합격이라.”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불합격한 가능성의 내가 보이는군. 그쪽의 나는 고양이 귀를 썼소.”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쪽으로 가자. 난 그게 보고 싶은데.”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 가능성은 죽었소.”
“아깝네.”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더 쳤다.
“자, 이제 정말 시작하자!”
조명이 낮아졌다.
마당의 소음이 줄어들었다.
관객석에는 군주들의 가신과 사절, 기사, 성직자, 아이들, 상인들이 뒤섞여 앉았다.
오늘 밤만큼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그렇게 정했다.
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카식은 기록장을 펼쳤다.
알토는 그 옆에 앉았다.
여관의 성좌는 차를 따랐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천천히 돌렸다.
미하일라는 무대 좌측 지지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요안나는 그녀의 손을 아주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민다우가스는 왕관을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가 왕관에서 손을 떼는 순간,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왜 그러나, 푸리나 여왕.”
“정말 맡겨도 괜찮아?”
“왕관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는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지. 그러니 오늘 밤은 사람 쪽을 보겠다.”
그 말끝은 웃고 있었지만, 칼날처럼 얇았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군주와 가신, 기사와 사절, 살아 있는 자와 잠시 쉬어가는 모든 손님들!”
등불이 하나둘 꺼지고, 무대의 숲만이 푸르게 빛났다.
“오늘 밤, 왕관들은 숲으로 들어갑니다.
누군가는 길을 잃고, 누군가는 엉뚱한 이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자기 배역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지요.”
죠니가 무대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이미 그러고 있어.”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꿈은 원래 조금 우습고, 숲은 원래 조금 위험하며, 무대는 원래 조금 솔직하니까요.”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오늘 밤만큼은, 왕관을 잠시 내려놓고 들어오십시오.”
숲의 장식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은빛 종이별들이 흔들렸다.
그중 몇 개는 정말 별빛처럼 반짝였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막이 오릅니다.”
그 순간, 여관극장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한여름 밤의 숲이,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1장. 배역표를 받은 왕관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여름밤은 쉽게 식지 않았다.
바다에서 올라온 습한 바람은 성벽 위의 깃발을 천천히 밀었고, 항구 쪽에서는 아직 축제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상인들은 늦은 시간까지 포도주와 구운 고기를 팔았고, 아이들은 여관 앞 광장에서 종이 왕관을 쓰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왕궁 뒤편, 원래라면 외교 사절과 기사들이 예의를 차려 줄지어 섰을 넓은 마당에는, 지금 전혀 다른 것이 세워져 있었다.
무대였다.
그것도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수상한 무대였다.
푸른 천막과 금빛 끈.
나무로 만든 가짜 숲.
은색 종이로 접은 별들.
포도넝쿨처럼 얽힌 조명.
어디선가 빌려온 듯한 왕관 모형들.
그리고 무대 정중앙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
《한여름 밤의 군주들》
그 아래에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
왕관은 잠시 객석에 맡겨주시길!
그 문구 앞에서 여러 왕과 군주와 황제들이 침묵했다.
침묵은 길었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푸리나 헤툼이었다.
“좋아!”
그녀는 이미 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한 손에는 배역표 뭉치가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요정 날개처럼 생긴 이상한 장식이 들려 있었다.
“오늘 밤, 이곳은 킬리키아의 왕궁이 아니야. 외교 회담장도 아니고, 전쟁 전야의 작전실도 아니지.”
푸리나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이곳은 숲! 꿈! 착각! 사랑! 음모! 즉흥극! 그리고 아주 조금의 외교 사고가 허용되는 무대다!”
그레이가 무대 아래에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외교 사고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폐하.”
“아주 조금도?”
“아주 조금도.”
“그럼 외교적 해프닝!”
“그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예술적 오해?”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푸리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좋아! 그럼 오늘 밤은 예술적으로 안전한 오해만 허용한다!”
그 말에 몇몇 군주들이 서로를 보았다.
보헤미아의 라이자는 이미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장식에 매달린 은빛 꽃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이 꽃, 진짜 은으로 만들면 더 예쁠 텐데.”
알렉산드리나 아센은 종이 왕관 하나를 들어 빛에 비추어 보았다.
“종이 왕관이라. 가벼워서 좋군요. 진짜 왕관보다 넘어지기 쉽지만, 대신 다시 쓰기도 쉽겠어요.”
호흐마이스터는 무대 뒤편의 가짜 나무들을 보며 낮게 말했다.
“저 나무 뒤에 세 명은 숨을 수 있겠군요. 퇴로는 두 개. 불을 지르면 남쪽 천막부터 무너집니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좋아! 아주 훌륭한 감상평이야!”
“감상평이 아닙니다.”
“그럼 더 훌륭해!”
니케아의 공동황제 미하일라 두케나 안겔리나 콤니니 팔레올로기나는 천천히 무대 전체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장식보다 기둥의 각도와 조명의 위치, 출입구의 배치에 더 오래 머물렀다.
“무대의 좌측이 약하다. 군중이 몰리면 무너질 수 있다.”
그레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보강 지시를 내렸습니다. 좌측 기둥에는 추가 지지대를 설치했고, 무대 아래에는 물통과 모래주머니를 배치했습니다.”
미하일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희극이라 해도 사람이 다치면 칙령의 대상이 된다.”
요안나 4세는 그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희극에도 평화가 필요하니까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잠시 보더니, 낮게 말했다.
“평화에는 기둥도 필요하다.”
요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아요.”
그때 리투아니아의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그 웃음은 컸다.
숲속에서 울리는 북소리처럼 넓고, 성벽을 넘어가는 바람처럼 거침없었다.
“하하! 좋다. 왕들을 모아놓고 왕관을 맡기라니, 킬리키아의 여왕은 담이 크군.”
그는 현수막을 올려다보다가 푸리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푸리나 헤툼, 왕관은 머리에서 벗긴다고 무게가 사라지지 않는다. 객석에 맡긴 왕관도 결국 누군가 지켜야 하지.”
푸리나는 씩 웃었다.
“그래서 초대했어. 왕관을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
민다우가스는 배역표가 놓인 탁자를 보았다.
“다만 배역이 나라의 체면을 손상한다면, 그 손상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걱정 마!”
푸리나는 엄지를 세웠다.
“이미 손상될 체면은 모두 공평하게 손상되도록 배분했어!”
“더 걱정되는군.”
아카식은 객석 한쪽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작은 기록장을 펼치고 있었다.
“훌륭해. 시작 전부터 이미 좋은 기록이야. ‘체면의 공평한 손상’이라니, 인간의 외교사는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많군.”
알토는 그 옆에서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 문장은 기록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
“사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좋은 이유네.”
타마르 여왕은 황혼빛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에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더 고요하게 웃었다.
“젊은 군주들이 참으로 분주하군요. 꿈을 꾸기 전부터 저토록 소란스러우니, 꿈속에서는 얼마나 떠들까요.”
벨라 4세는 무대 뒤로 세워진 가짜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시 손을 뻗어 그 얇은 나무판을 두드렸다.
“가볍다.”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하지만 무대의 성벽도 무너지면 사람이 다친다. 헝가리에서는 그런 성벽을 다시 세웠다. 몇 번이고.”
소피아가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벨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마당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푸리나는 그 무게를 보았다.
그리고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아니라, 무너져도 다시 세워지는 무대를 보자!”
그녀는 배역표를 높이 들었다.
“자, 군주 여러분! 이제 배역을 나눠줄 시간이야!”
그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고가 시작되는군요.”
죠니 죠스타는 무대 옆에서 의자 하나를 고치고 있었다. 그는 망치로 삐걱거리는 다리를 두 번 두드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이미 시작됐어. 우리가 아직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푸리나는 그 말을 들은 듯했다.
“죠니!”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네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대체로 싫은 일이 생기더라.”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정답! 자네는 오늘 장인극단의 특별 조언자야!”
죠니는 망치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
“그게 뭔데.”
“무대 장치도 고치고, 배우들도 말리고, 필요하면 말도 타고, 마지막에는 박수도 쳐.”
“그건 그냥 잡일이잖아.”
“기사단장다운 잡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밥은?”
“공연 끝나면 연회!”
“그럼 해. 따뜻할 때 내 자리 남겨둬, 여왕님.”
푸리나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협상 성공!”
알토가 조용히 기록장 쪽을 보았다.
“이것도 외교 협정입니까?”
아카식은 진지하게 말했다.
“따뜻한 식사와 잡일의 교환. 충분히 계약적이지.”
알토는 고개를 저었다.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후대가 오해합니다.”
배역표가 돌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푸리나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펼쳤다.
“푸리나 헤툼. 배역은 퍽!”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요정 날개를 등에 달았다.
“완벽해!”
그레이가 말했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문제입니다.”
“그레이, 그런 말은 칭찬처럼 들려!”
“칭찬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들렸어!”
레이튼은 배역표를 받아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저는 해설자 겸 숲의 문지기군요. 흥미롭습니다. 배우들이 길을 잃었을 때 질문을 던지는 역할이라…….”
그는 모자를 살짝 고쳐 썼다.
“그렇다면 오늘 밤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는 이것이겠군요. 왕관을 벗은 왕은 여전히 왕인가?”
푸리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그 대사 킵!”
민다우가스는 자신의 배역표를 펼쳤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몽상가 숲의 왕.”
침묵.
잠시 뒤 민다우가스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그 웃음은 정말로 호방했다.
마당 전체가 따라 흔들릴 만큼.
“나를 몽상가로 세운다고? 좋은 배치다. 적이 알면 유쾌해하겠군.”
푸리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평소와 정반대인 배역을 맡아야 희극이 되니까!”
민다우가스는 배역표를 접었다.
“아니, 푸리나 여왕. 완전히 반대는 아니다.”
그는 무대 뒤의 가짜 숲을 바라보았다.
“숲의 왕이라면 나쁘지 않다. 숲은 숨고, 기다리고, 사냥한다. 몽상가라면 더 좋지. 꿈을 꾸지 않는 왕은 지도를 넓히지 못한다.”
그는 다시 푸리나를 보았다.
“다만 꿈은 병참을 먹고 자란다. 그걸 모르는 몽상가는 첫겨울에 죽는다.”
푸리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더 환하게 웃었다.
“역시 민다우가스! 배역표를 받자마자 국가 운영론으로 바꾸다니!”
“군주는 어디서든 국가를 본다.”
민다우가스는 여유롭게 말했다.
“그게 희극 무대라 해도 말이다.”
다음은 미하일라였다.
그녀는 배역표를 펼쳤고, 잠시 침묵했다.
“요정 여왕.”
요안나가 살짝 웃었다.
“잘 어울리세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요정 여왕은 어떤 권한을 갖지?”
푸리나가 대답했다.
“사랑의 숲을 다스리고, 꿈과 장난과 화해를 관장하지!”
미하일라는 다시 배역표를 내려다보았다.
“군권은?”
“없어!”
“칙령권은?”
“아마도 없어!”
“군사 지휘권은?”
“없다니까!”
미하일라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 배역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요안나는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는 듯했다.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웃지 마라, 요안나. 군권 없는 통치권은 위험하다.”
요안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폐하, 오늘 밤은 통치하지 않아도 되는 밤일지도 몰라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가장 어려운 배역이군.”
그 말은 작았지만, 묵직했다.
요안나는 자신의 배역표를 펼쳤다.
“저는…… 평화의 별을 든 숲의 아이네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나는 숲속에서 싸우려는 사람들을 자꾸 손잡게 만드는 역할이야!”
요안나는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미하일라는 짧게 말했다.
“너에게 너무 쉬운 배역이다.”
요안나는 웃었다.
“쉬운 일이라면 세상이 벌써 평화로웠겠죠.”
그 말에 미하일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라이자는 배역표를 보자마자 환호했다.
“은꽃 요정!”
그녀는 바로 머리에 은빛 꽃 장식을 얹었다.
“이거 너무 좋아! 그런데 꽃잎이 조금 약하네. 내가 진짜 은으로 다시 만들어도 돼?”
그레이가 즉시 대답했다.
“무대 장식의 무게가 증가하면 구조 계산을 다시 해야 합니다.”
라이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아주 얇은 은으로.”
“안 됩니다.”
“반만?”
“안 됩니다.”
“그럼 공연 끝나고?”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공연 끝나고 전시용이라면 검토하겠습니다.”
라이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럼 살아 있는 동안 모두 한 번쯤 은꽃을 가져봐야지.”
호흐마이스터는 자신의 배역표를 받았다.
그녀는 종이를 오래 보았다.
“용살 기사.”
주변의 공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 배역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누구나 그녀와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이려는 용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쉽게 말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아주 밝게 말했다.
“멋있지?”
호흐마이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용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숲속 어딘가!”
“크기와 습성은?”
“상징적이야!”
“상징은 때때로 실물보다 위험합니다.”
그녀는 종이를 접었다.
“그래도 맡겠습니다. 용이라면, 이름이 무엇이든 대비해야 하니까요.”
라이자가 옆에서 은꽃 하나를 들어 보였다.
“용살 기사한테 꽃 장식은 어때?”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그 꽃을 보았다.
“전투에는 방해됩니다.”
“그럼 안쪽에 꽂으면?”
“갑주 안쪽은 더 위험합니다.”
“그럼 마음속에!”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꽃을 버리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나는 배역표를 펼쳤다.
“가짜 왕.”
누군가 숨을 삼켰다.
그 배역은 장난처럼 보였지만, 장난으로만 받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사생아.
흉내.
왕권.
결핍.
그 모든 것이 종이 한 장에 적혀 있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좋군요.”
푸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괜찮습니다. 가짜 왕이라면 오히려 편해요.”
그녀는 종이 왕관을 자기 머리 위에 얹었다.
“가짜라면, 누구보다 왕답게 굴면 됩니다. 진짜는 대개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거든요.”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그 대사도 킵!”
타마르는 배역표를 받았다.
“황혼의 여왕.”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늘 비슷한 자리에 앉게 되는군요.”
푸리나가 말했다.
“싫어?”
“아니요.”
타마르는 무대 뒤편의 보랏빛 조명을 보았다.
“황혼은 꿈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답니다. 한여름 밤이라면, 그런 자리 하나쯤은 필요하겠지요.”
벨라 4세는 자신의 종이를 받았다.
“요새를 세우는 여왕.”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맞다.”
푸리나가 말했다.
“숲속에서도 요새를 세우는 역할이야!”
벨라는 무대의 가짜 숲을 보았다.
“숲에도 피난처가 필요하다. 길 잃은 아이와 패잔병은 같은 방식으로 떤다.”
그녀는 종이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성벽은 높이보다 약속이 먼저다. 무대라도 다르지 않다.”
그레이는 조용히 그 말을 기록했다.
민다우가스가 옆에서 웃었다.
“헝가리의 여왕다운 말이군. 숲에서도 성을 세우다니.”
벨라는 그를 보았다.
“리투아니아의 대공이라면 숲에서도 전쟁을 준비하겠지.”
“당연하다.”
민다우가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오늘은 전쟁이 아니라 희극이라 하니, 칼 대신 대사로 사냥해 보지.”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대사도 잘 쓰면 목을 친다.”
푸리나는 기뻐했다.
“좋아! 점점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어!”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알토가 말했다.
아카식은 즐겁게 받아쳤다.
“그렇다면 더 귀한 기록이지.”
알토는 그를 보지 않고 말했다.
“그 발언도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알토, 오늘 너무 많은 걸 기록하지 않는 거 아니야?”
“외교적 생존입니다.”
그 말에 죠니가 낮게 웃었다.
“쟤는 말이 짧은데 가끔 제일 웃기다니까.”
알토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칭찬으로 기록하겠습니다.”
“그건 기록하네.”
“쓸모가 있습니다.”
배역표는 계속 돌았다.
불가리아의 레플리카는 “검은 하늘의 성녀”라는 배역을 받았다.
스토얀카는 “가시꽃 무희”라는 배역표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웃음에 가까이 있던 몇몇 사절이 한 걸음 물러났다.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는 “길 잃은 기사단장”이라는 배역을 받아 들고 당황했다.
“잠깐만요. 저는 정말 길을 잃은 게 아니라 편지를 받고 온 건데요.”
죠니가 말했다.
“그게 길 잃은 거야.”
“아니, 편지에는 검술 시연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검술 시연도 할 거야. 숲속에서. 배역으로.”
아스트리트는 한참 푸리나를 보았다.
“혹시 이게 또 다른 임명장은 아니죠?”
주변의 몇몇 인물이 웃음을 참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트리트가 그걸 보았다.
“잠깐, 왜 눈을 피하시죠?”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하게 말했다.
“무대 안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제 눈 피하셨잖아요!”
푸리나는 힘차게 손뼉을 쳤다.
“좋아! 리허설 시작 전부터 이미 희극적 긴장이 훌륭해!”
그레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살짝 덮었다.
“폐하, 적어도 군주분들께 대본을 먼저 읽을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그레이.”
푸리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여름 밤의 꿈은 대체로 대본대로 되지 않아.”
“그것은 준비 부족을 정당화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멋있잖아.”
“그 점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됐어!”
“아닙니다.”
그러는 사이 무대 뒤편에서 시종들이 가짜 숲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천막 위의 조명들이 하나씩 켜졌고, 은빛 종이별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순간, 여관의 성좌가 나타났다.
누구도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어느새 무대 가장자리, 작은 여관 카운터처럼 꾸며진 소품 뒤에 서 있었다. 깨끗한 잔과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고, 그의 미소는 손님을 맞는 여관지기처럼 공손했다.
“오늘 밤도 손님이 많군요.”
푸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오셨군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공연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여관의 성좌는 현수막을 올려다보았다.
“왕관을 맡기는 밤이라. 좋은 발상입니다. 무거운 것은 가끔 내려놓아야, 다시 들 힘도 생기니까요.”
타마르가 잔을 살짝 들었다.
“끝의 여관 주인께서도 오늘은 관객이신가요?”
“관객이자 여관지기입니다.”
그는 차를 따랐다.
“길을 잃은 배우가 있으면 쉬어갈 자리를 내어드려야지요.”
민다우가스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럼 오늘 밤 이 무대는 여관인가, 숲인가?”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둘 다일 수 있습니다. 길을 잃으면 숲이고, 잠시 앉으면 여관이니까요.”
민다우가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은 말이군. 동시에 위험한 말이기도 하다. 숲을 여관이라 착각한 군대는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지.”
“그렇기에 문을 밝히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문을 지키는 이도.”
“그 점은 군주들이 잘 아시겠지요.”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서로의 역할을 확인하는 예의가 있었다.
푸리나는 다시 무대 중앙으로 뛰어올랐다.
“자, 모두 배역을 받았지?”
“받지 않은 자도 있습니다.”
그레이가 말했다.
“누구?”
“저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
그레이는 무표정했다.
“폐하.”
푸리나는 급히 배역표 뭉치를 뒤졌다.
“있어! 당연히 있지! 그레이는…….”
그녀는 종이를 펼쳤다.
“숲의 회계관!”
그레이는 한참 침묵했다.
“그건 배역입니까, 업무입니까?”
“둘 다!”
죠니가 말했다.
“최악이네.”
그레이는 종이를 받아 들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적어도 지출 내역은 통제할 수 있겠군요.”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그레이야!”
“칭찬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일을 떠넘기신 겁니다.”
“하지만 아주 잘할 거잖아?”
그레이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라이자가 웃었다.
“그레이, 내가 은꽃 장식 비용은 따로 낼게.”
“공연 종료 후 정산하겠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죠니가 낮게 말했다.
“저건 배역이 아니야. 그냥 그레이 본인이네.”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때때로 가장 어려운 연기는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지요.”
하융은 무대 뒤 창문처럼 세워진 장식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아직 배역표를 펴지 않았다.
푸리나가 그를 불렀다.
“하융! 자네는?”
하융은 종이를 펼쳤다.
“비껴간 꿈의 고양이.”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지?”
하융은 천천히 무대 위의 별들을 보았다.
“고양이인지는 모르겠소. 허나 꿈이 비껴간다는 말은 알겠구려.”
“그럼 합격!”
“합격이라.”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불합격한 가능성의 내가 보이는군. 그쪽의 나는 고양이 귀를 썼소.”
죠니가 바로 말했다.
“그쪽으로 가자. 난 그게 보고 싶은데.”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 가능성은 죽었소.”
“아깝네.”
푸리나는 손뼉을 한 번 더 쳤다.
“자, 이제 정말 시작하자!”
조명이 낮아졌다.
마당의 소음이 줄어들었다.
관객석에는 군주들의 가신과 사절, 기사, 성직자, 아이들, 상인들이 뒤섞여 앉았다.
오늘 밤만큼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정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그렇게 정했다.
분쟁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카식은 기록장을 펼쳤다.
알토는 그 옆에 앉았다.
여관의 성좌는 차를 따랐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천천히 돌렸다.
미하일라는 무대 좌측 지지대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했다.
요안나는 그녀의 손을 아주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민다우가스는 왕관을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가 왕관에서 손을 떼는 순간, 푸리나는 잠시 그를 보았다.
민다우가스가 웃었다.
“왜 그러나, 푸리나 여왕.”
“정말 맡겨도 괜찮아?”
“왕관은 도망가지 않는다.”
그는 무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망가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지. 그러니 오늘 밤은 사람 쪽을 보겠다.”
그 말끝은 웃고 있었지만, 칼날처럼 얇았다.
푸리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그녀는 무대 중앙에 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군주와 가신, 기사와 사절, 살아 있는 자와 잠시 쉬어가는 모든 손님들!”
등불이 하나둘 꺼지고, 무대의 숲만이 푸르게 빛났다.
“오늘 밤, 왕관들은 숲으로 들어갑니다.
누군가는 길을 잃고, 누군가는 엉뚱한 이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자기 배역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지요.”
죠니가 무대 아래에서 중얼거렸다.
“이미 그러고 있어.”
푸리나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꿈은 원래 조금 우습고, 숲은 원래 조금 위험하며, 무대는 원래 조금 솔직하니까요.”
그녀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오늘 밤만큼은, 왕관을 잠시 내려놓고 들어오십시오.”
숲의 장식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은빛 종이별들이 흔들렸다.
그중 몇 개는 정말 별빛처럼 반짝였다.
푸리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막이 오릅니다.”
그 순간, 여관극장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고 한여름 밤의 숲이,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