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81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21:21:43
《한여름 밤의 군주들》
4장. 숲이 왕관에게 묻다
장인극단의 웃음이 지나간 뒤, 숲은 더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뭇잎은 여전히 흔들렸다.
은꽃들은 아이들의 손에서 작게 빛났다.
가짜 별들은 천막 위에서 반짝였고, 누군가가 넘어진 뒤 남긴 웃음은 아직 객석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
장례의 종.
활시위가 팽팽해지는 소리.
어린아이가 잠결에 부르는 노래.
장부가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전쟁이 숨을 고르는 소리.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음.”
죠니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그 ‘음’은 보통 좋은 뜻이 아니던데.”
“이상하네.”
“뭐가.”
“이제부터는 내가 준비한 장면이 아니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진짜 문제네.”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푸리나는 손에 든 붓을 내려다보았다.
붓끝의 물감은 거의 말라 있었다.
그러나 숲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레이튼은 조용히 모자를 고쳐 썼다.
“아무래도 무대가 질문을 이어받은 모양입니다.”
“무대가?”
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레이튼은 숲 깊은 곳을 보았다.
“처음에는 폐하께서 군주들을 무대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다음에는 군주들이 각자의 배역을 받아들였지요.
이제는 배역이 군주들에게 되묻는 차례입니다.”
하융은 회색빛 창호 장식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웃고 끝난 가능성도 있었소. 모두가 박수 치고, 왕관을 쓰고 돌아갔지. 나쁘지 않은 밤이었소.”
푸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그 가능성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소.”
하융의 목소리는 낮았다.
“웃음은 남았으나, 질문은 남지 않았소.”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조금 더 위험하고, 조금 더 유익하겠군요.”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위험하다는 말 앞에 ‘조금’이 붙으면 대체로 조금이 아닙니다.”
죠니는 무대 뒤편의 어둠을 보았다.
“그럼 가야지.”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가 먼저 그렇게 말하다니?”
“네가 어차피 갈 거잖아. 먼저 말하면 덜 끌려가는 기분이 들어.”
“좋아! 그럼 자발적 동행!”
“그렇게 말하니까 다시 끌려가는 기분인데.”
푸리나는 웃었다.
그때 숲 깊은 곳에서 첫 번째 길이 열렸다.
그 길은 늪과 달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저건 내 길이군.”
그는 하프를 내려놓고, 망토를 고쳐 걸쳤다.
푸리나는 물었다.
“혼자 갈 거야?”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하! 숲의 왕이 숲길을 두려워하면 그것부터 희극이지.”
그리고 그는 조금 낮게 덧붙였다.
“다만 누가 뒤에서 문을 닫는지는 보아야 한다. 꿈속에서도 퇴로는 필요하니까.”
그가 걸음을 옮기자, 숲은 리투아니아의 밤으로 바뀌었다.
나무들은 더 높아졌고, 뿌리는 늪 속으로 파고들었다.
달빛은 가지 사이로 얇게 찢겨 내려왔고, 멀리서는 늑대인지 사람인지 모를 울음이 들렸다.
민다우가스는 그곳에 서 있었다.
왕관은 없었다.
병사도 없었다.
깃발도 없었다.
그런데도 숲은 그를 알아보았다.
달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늪은 그의 발을 삼키지 않았다.
나무들은 침묵으로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숲 안쪽에서 아이들의 노래가 들렸다.
리투아니아어였다.
오래된 노래였다.
불타지 않은 마을의 노래였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멈췄다.
그 노래 앞에, 갑자기 검은 기사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무거운 갑옷.
십자가 문장.
타오르는 마을.
울부짖는 말.
숲은 그에게 물었다.
복수로 묶은 나라는, 복수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멀리서 그 질문을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숲속의 기사들을 보았다.
“좋은 질문이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넓었다.
호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끝은 칼처럼 얇았다.
“복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처음부터 복수는 필요 없었겠지.”
그는 달빛 아래에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복수만으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복수는 불이다. 겨울밤에는 사람을 살리지만, 집 안에 풀어놓으면 아이부터 탄다.”
나무들 사이에서 노래가 다시 들렸다.
민다우가스는 그 노래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적이 다시 오면 태워야 하니까.”
그리고 그는 그림자 기사들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 불로 밥도 지어야 한다. 아이들이 내일도 노래하려면.”
달빛이 그의 뒤로 흘렀다.
“리투아니아는 피해자가 아니다. 침략자를 사냥하는 나라다.”
그는 손을 내렸다.
“하지만 숲은 사냥만을 위해 자라지 않는다. 이 계산을 잊은 왕은 결국 자기 백성까지 사냥감으로 만든다.”
그 말이 끝나자, 그림자 기사들이 물러났다.
아이들의 노래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민다우가스는 뒤돌아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 여왕.”
“응?”
“그 하프, 버리지 마라.”
푸리나가 웃었다.
“연습하려고?”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하! 왕이 배울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면 손해는 아니지.”
그리고 날카롭게 덧붙였다.
“다만 내 연주를 외교석상에서 요구하면, 그것은 선전포고로 보겠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숲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길은 자주빛 별 아래로 열렸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일어났다.
요안나가 그녀를 보았다.
“가시겠어요?”
“짐을 부르는 길이다.”
미하일라는 잠시 멈추고, 요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함께 오겠나?”
요안나는 조금 놀란 듯했다.
미하일라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 밤은 숲의 희극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황제도 배역을 조금은 배워야 한다.”
요안나는 별등불을 들었다.
“그럼 같이 갈게요.”
두 사람은 자주빛 길로 들어섰다.
숲은 곧 니케아의 밤이 되었다.
멀리에는 무너진 성벽이 있었고, 아직 되찾지 못한 도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늘에는 자주빛 혜성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채 멈춰 있었다.
미하일라는 그 한가운데 섰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없었다.
그런데도 손가락은 활시위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숲이 물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든 활은, 언제 내려놓는가?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숲은 다시 물었다.
누가 끝났다고 말하는가?
미하일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질문은 방금 전 레이튼과 아카식이 풍자극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웃음이 없었다.
자주빛 혜성 아래, 어린 황제의 장례식이 보였다.
애도의 천.
피.
닫힌 문.
유폐된 정통성.
권력을 잡기 위해 뻗은 손.
그리고 그 손에 묻은 죄.
요안나의 등불이 흔들렸다.
미하일라는 그 빛을 보았다.
“요안나.”
“네.”
“이 숲은 무례하군.”
“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네요.”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아팠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공적인 황제의 얼굴이 잠시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짐은 제국을 구하기 위해 피를 묻혔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은 변명이 될 수 있다. 기록될 수도 있다. 칙령의 언어로 포장될 수도 있다.”
자주빛 혜성이 흔들렸다.
“그러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녀의 옆에 섰다.
“저는 폐하를 용서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제가 평화를 말하는 이유가, 폐하의 죄를 지우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요안나는 별등불을 들어 올렸다.
“저는 더는 누구도 장례식에서 왕좌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해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가끔 가장 잔인한 말을 가장 평화롭게 하는구나.”
“배웠으니까요.”
“나에게서?”
“폐하에게서도요.”
미하일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쁜 스승이었군.”
“아니요.”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나쁜 시대였어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숲은 다시 물었다.
활을 내려놓은 황제는, 무엇으로 평화를 지키는가?
미하일라는 손을 내렸다.
“활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황제의 것이 되었다.
우아하고, 절제되고, 무거웠다.
“짐의 시대는 아직 그렇게 자비롭지 않다.”
그녀는 요안나의 등불을 보았다.
“그러나 활이 모든 답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자주빛 별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짐은 칙한다.
전쟁은 평화의 그림자 아래에 머물 것.
활은 등불을 가리지 말 것.
황제의 죄는 기록에서 지우지 말 것.”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칙령은 누구에게 내리는 건가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나에게.”
요안나는 등불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그럼 제가 기록할게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아카식이 들으면 기뻐하겠군.”
“알토도요.”
“그쪽은 표정 변화 없이 ‘근거를 보존하겠습니다’라고 하겠지.”
요안나는 웃었다.
미하일라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자주빛 길은 닫히지 않았다.
닫히는 대신, 두 사람의 뒤에 조용히 놓였다.
다음 길은 헝가리의 평원처럼 열렸다.
벨라 4세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벽돌 소품이 들려 있었다.
장인극단 때 그레이가 썼던 그 벽돌이었다.
벨라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숲속 길을 향해 걸었다.
그곳은 평원이었다.
끝없이 넓은 평원.
무너진 마을.
불탄 목책.
멀리 보이는 새 요새의 뼈대.
진흙 속에 박힌 수레바퀴.
벨라는 그 한가운데 섰다.
숲이 물었다.
요새는 누구를 위해 세우는가?
벨라는 대답했다.
“도망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벽돌을 내려놓았다.
땅이 잠시 빛났다.
왕관은 무엇을 물려주는가?
벨라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소피아가 있었다.
아직 어린 후계자.
언젠가 이 평원과 성벽과 왕관과, 그 모든 잔해를 받을 아이.
벨라는 짧게 말했다.
“왕좌가 아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평원을 가리켰다.
“이 땅이다.
무너진 곳.
다시 세운 곳.
다시 무너질 곳.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곳.”
소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라는 계속했다.
“왕관은 금이 아니다.
왕관은 살아남은 자들의 무게다.”
그녀는 벽돌 하나를 더 내려놓았다.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은 차가웠다기보다, 너무 무거웠다.
소피아가 작게 물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벨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평원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무서웠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그래서 성을 세웠다.”
세 번째 벽돌이 놓였다.
“무섭지 않은 자가 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무서움을 아는 자가 문을 만든다.”
그녀가 손을 들자, 무대의 가짜 숲과 헝가리의 평원이 겹쳐졌다.
작은 결계의 실이 바닥에 엮였고, 아이들이 앉은 관객석 아래로 아주 얇은 빛이 지나갔다.
그레이가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무대 지지대가 안정되고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연극 보다가 진짜 보강까지 하네.”
그레이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효율적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 지금 감동한 거야?”
“실무적으로 감동했습니다.”
벨라는 마지막 벽돌을 놓았다.
“헝가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소피아를 보았다.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쌓는다.”
그 길은 그렇게 닫혔다.
박수는 없었다.
하지만 객석의 헝가리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네 번째 길은 은꽃으로 열렸다.
라이자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려 했다.
그런데 호흐마이스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천천히.”
“괜찮아!”
“그 말은 대체로 괜찮지 않을 때 나옵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거 푸리나가 자주 듣는 말인데.”
“그러니 더 경계합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같이 갈래?”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은꽃이 꽂힌 자기 갑주를 보았다.
“제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같이 가면 안 돼?”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은꽃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라이자에게.
하나는 호흐마이스터에게.
라이자는 아쉬운 듯 웃었다.
“그럼 나중에 만나.”
“예.”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라이자의 길은 보헤미아의 꿈으로 이어졌다.
은의 정령들이 노래했고, 버려진 금속 조각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다친 것들, 망가진 것들, 버려진 것들이 모두 라이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숲이 물었다.
모든 것을 안아주는 자는, 자신은 누구에게 안기는가?
라이자는 처음에는 웃으려 했다.
늘 그랬듯이.
“나는 괜찮아!”
그러나 은꽃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인형이 그녀에게 안겼다.
부서진 검이 그녀의 팔에 기대었다.
피난민의 작은 그릇, 찢어진 깃발, 이름 없는 은의 조각들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그녀의 팔은 점점 무거워졌다.
라이자는 웃었다.
“괜찮아. 조금 무거울 뿐이야.”
더 많은 것들이 왔다.
“괜찮아.”
또 더 많이.
“괜찮……”
그녀의 무릎이 흔들렸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것은 허그와 보상의 성좌였을 수도 있고, 보헤미아의 은빛 꿈이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오래전 꿈에서 만난 은의 정령이었을 수도 있다.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따뜻했다.
라이자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지 않은 손을 내려놓았다.
“아.”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나도 안겨도 되는구나.”
은꽃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길은 부드럽게 닫혔다.
반대쪽에서 호흐마이스터의 길이 열렸다.
그곳은 숲이 아니었다.
눈 덮인 변경.
검은 갑주.
멀리서 들리는 몽골의 말발굽.
그리고 더 멀리, 자신과 닮은 황금빛 눈.
호흐마이스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숲이 물었다.
안쪽의 용을 베면, 무엇이 남는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질문이 왔다.
죄를 갑옷처럼 입은 자는, 갑옷을 벗을 수 있는가?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자기 가슴에 올렸다.
갑주 틈에는 아직 라이자의 은꽃이 꽂혀 있었다.
그 꽃은 말도 안 되게 작았다.
방어력도 없고, 위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전술적 의미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빼지 않았다.
“저는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눈보라 속에서 말했다.
“다만 이 땅이 내일도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황금빛 눈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몽골의 피.
위대한 왕의 씨앗.
두려운 혈육.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것과 자신 안에 남아 있는 것.
호흐마이스터는 검을 뽑았다.
“내 혈육인 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압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그러나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피 그 자체가 아닙니다.
피를 이유로 제가 무엇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용의 그림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검끝을 겨누었다.
“그러니 저는 안쪽의 용을 죽이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이어 말했다.
“감시합니다.
묶어둡니다.
필요할 때마다 이름을 부릅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검을 내렸다.
“죄악의 갑주는 벗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 꽃 하나를 꽂는 것까지 금지되어 있지는 않겠지요.”
은꽃이 작게 빛났다.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돌아섰다.
라이자가 길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 안 뺐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그 말 진짜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
“전술적으로는……”
“응응, 전술적으로.”
호흐마이스터는 결국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번째 길은 불가리아의 새벽과 검은 하늘로 갈라졌다.
레플리카, 알렉산드리나, 스토얀카가 동시에 그 길을 보았다.
세 사람의 차르.
세 개의 불가리아.
푸리나는 순간적으로 그 길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그 길은 장난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길이었다.
먼저 레플리카의 길에 검은 먼지가 내려앉았다.
비명은 낮아졌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찢기 전에, 조금 무뎌졌다.
숲이 물었다.
고통을 줄이는 왕은, 고통으로 성장한 자들의 왕이 될 수 있는가?
레플리카는 검은 팔을 들어 올렸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았다.
“고통은 스승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검은 먼지가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견딘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견디지 못한 자에게 채찍을 들이대며 성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스토얀카가 웃었다.
“무르네.”
레플리카는 그녀를 보았다.
“무른 것이 아니라, 찢어지기 전에 감싸는 겁니다.”
스토얀카의 길은 가시꽃으로 열렸다.
척추 같은 가지들이 하늘로 솟았다.
꽃은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은 위험했다.
숲이 물었다.
해체를 꽃이라 부르면, 고통은 구원받는가?
스토얀카는 웃었다.
“아니.”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빨랐다.
“고통은 구원받지 않아. 고통은 피고, 터지고, 흩어지지.”
그녀는 가시꽃 사이를 걸었다.
“구원은 너무 얌전한 말이야.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스토얀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맞아.”
그녀는 웃었다.
“그래서 내가 왕이 되면 불가리아는 아름답게 망가질 거야.”
그 말에 숲이 붉게 흔들렸다.
하지만 세 번째 길,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이 그 사이를 갈랐다.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쓴 채 앞으로 나왔다.
숲이 물었다.
흉내낸 왕도는 언제 진짜가 되는가?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그걸 묻는 자들은 대개 이미 진짜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나무 홀을 바닥에 짚었다.
“저는 흉내냈습니다.
시메온 대제를.
왕도를.
차르의 목소리를.
진짜들이 태어나면서 받았다는 것을.”
새벽빛이 그녀의 등 뒤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흉내는 얕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매일 같은 자세로 서고,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매일 같은 책임을 짊어지면……”
그녀는 종이 왕관을 벗었다.
“언젠가 몸이 먼저 압니다.
이것이 연기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레플리카는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도 웃음을 멈추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다시 썼다.
“가짜 왕은 진짜 왕보다 더 왕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안심하고 짓밟을 테니까요.”
새벽빛은 검은 하늘과 가시꽃 사이를 갈랐다.
세 길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를 지워버리지도 않았다.
불가리아의 숲은 그렇게 잠시, 세 개의 왕관을 모두 비추었다.
그다음 길은 황혼이었다.
타마르 여왕은 웃으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 차례군요.”
그녀의 걸음은 느긋했다.
황혼의 포도나무가 숲을 감쌌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걷는 능선.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기억과 업.
십자가 모양으로 뻗은 가지.
숲이 물었다.
죽은 왕은 언제 왕위에서 쉬는가?
타마르는 포도나무 아래에 섰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숲은 기다렸다.
타마르는 마침내 말했다.
“왕은 죽었다고 곧장 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특히 죽은 자들이 아직 길을 잃고 있다면요.”
황혼 너머에서 조지아의 망자들이 걸었다.
어떤 이는 죄를 품었고, 어떤 이는 기도를 품었고, 어떤 이는 아직 자기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마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짐은 끝난 길의 주인이랍니다. 황혼에 닿은 이들이 헤매지 않도록, 포도나무 아래에서 기다릴 뿐이지요.”
숲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대의 길은 언제 끝나는가?
타마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쓸쓸했다.
“그 질문은 제법 잔인하군요.”
그녀는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다.
“아마도, 산 자들이 죽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붙잡지 않게 되는 날이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는 산 자를 무대 위로 올리지요.”
“응.”
“좋은 일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타마르는 황혼빛 미소를 지었다.
“다만 언젠가 막이 닫힌 자에게는, 객석이 아니라 방을 내어주어야 한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타마르는 더 묻지 않았다.
그 길은 포도향과 함께 닫혔다.
마지막으로, 숲은 푸리나 앞에 길을 열었다.
그 길은 무대였다.
끝없는 객석.
끝없는 조명.
끝없는 박수.
그리고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리나 혼자였다.
죠니가 곧장 말했다.
“같이 갈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아.”
“그 말도 보통 좋은 뜻이 아니던데.”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내 배역이야.”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럼 끝나고 밥.”
“응. 따뜻하게.”
“약속했다.”
푸리나는 무대 길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관객이 많았다.
아이들.
피난민.
병사.
죽은 자의 그림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능성.
웃었던 사람.
웃지 못했던 사람.
무대에 올라온 사람.
끝내 객석에 앉아 있고 싶었던 사람.
그들은 모두 푸리나를 보고 있었다.
숲이 물었다.
모두를 무대에 올리는 자는, 누구의 무대에 서는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은 계속되었다.
조명을 켜는 자는, 누가 쉬게 하는가?
푸리나는 붓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밝은 사람이다.
축제를 사랑한다.
즉흥극을 사랑한다.
사람들이 웃는 순간을 사랑한다.
망가진 하루 끝에 누군가가 다시 “내일”을 말하는 장면을 사랑한다.
그러나 조명은 따뜻하지만, 오래 쥐고 있으면 손이 탄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객석의 맨 앞줄에서 그레이가 보였다.
그레이는 말없이 작은 장부를 닫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하융은 회색 창문 너머에서 푸리나가 쉬지 못한 가능성들을 보고 있었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무대에 서기 싫으면 내려와도 돼.”
푸리나는 웃었다.
“그건 좀 너무 건조한 위로 아니야?”
“내가 원래 그래.”
“그래도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밥으로 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숲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모두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작았다.
“하지만 모두가 지금 당장 무대에 서고 싶은 건 아니겠지.
누군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누군가는 객석이 더 편하고, 누군가는 커튼 뒤에서 울 시간이 필요할 거야.”
조명이 그녀를 비추었다.
푸리나는 붓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나는 기다릴게.”
그 말에 객석이 조용해졌다.
“무대는 도망가지 않아.
막도 내가 잡아둘 수 있어.
조명도 너무 눈부시지 않게 낮출 수 있어.”
그녀는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럽기만 한 웃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언젠가, 그 사람이 자기 발로 올라오고 싶어지면.”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장엄해졌다.
군주이자 극장주.
여관좌의 휴식의 별.
어둠을 알면서도 조명을 끄지 않는 사람.
“그때 나는 말할 거야.”
그녀는 무대 전체를 향해 선언했다.
“그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고.
그대는 관객만이 아니었다고.
그대가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숲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언제 쉬는가?
푸리나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그건…….”
그때 여관의 성좌가 무대 가장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차를 따르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잠깐 쉬어 가시죠. 무대는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푸리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여관의 성좌는 찻잔을 내밀었다.
“여관지기는 배우에게도 방을 내어드리는 법입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받았다.
그 순간, 끝없는 객석의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무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실패가 아니었다.
휴식이었다.
그리고 숲은 마침내, 모든 군주에게 길을 돌려주었다.
한여름 밤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처음과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4장. 숲이 왕관에게 묻다
장인극단의 웃음이 지나간 뒤, 숲은 더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뭇잎은 여전히 흔들렸다.
은꽃들은 아이들의 손에서 작게 빛났다.
가짜 별들은 천막 위에서 반짝였고, 누군가가 넘어진 뒤 남긴 웃음은 아직 객석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
장례의 종.
활시위가 팽팽해지는 소리.
어린아이가 잠결에 부르는 노래.
장부가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전쟁이 숨을 고르는 소리.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음.”
죠니가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그 ‘음’은 보통 좋은 뜻이 아니던데.”
“이상하네.”
“뭐가.”
“이제부터는 내가 준비한 장면이 아니야.”
죠니는 잠시 침묵했다.
“그럼 진짜 문제네.”
그레이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폐하?”
푸리나는 손에 든 붓을 내려다보았다.
붓끝의 물감은 거의 말라 있었다.
그러나 숲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레이튼은 조용히 모자를 고쳐 썼다.
“아무래도 무대가 질문을 이어받은 모양입니다.”
“무대가?”
푸리나가 눈을 깜빡였다.
레이튼은 숲 깊은 곳을 보았다.
“처음에는 폐하께서 군주들을 무대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다음에는 군주들이 각자의 배역을 받아들였지요.
이제는 배역이 군주들에게 되묻는 차례입니다.”
하융은 회색빛 창호 장식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웃고 끝난 가능성도 있었소. 모두가 박수 치고, 왕관을 쓰고 돌아갔지. 나쁘지 않은 밤이었소.”
푸리나가 물었다.
“그런데?”
“그 가능성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소.”
하융의 목소리는 낮았다.
“웃음은 남았으나, 질문은 남지 않았소.”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 길은 조금 더 위험하고, 조금 더 유익하겠군요.”
그레이가 아주 작게 말했다.
“위험하다는 말 앞에 ‘조금’이 붙으면 대체로 조금이 아닙니다.”
죠니는 무대 뒤편의 어둠을 보았다.
“그럼 가야지.”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죠니가 먼저 그렇게 말하다니?”
“네가 어차피 갈 거잖아. 먼저 말하면 덜 끌려가는 기분이 들어.”
“좋아! 그럼 자발적 동행!”
“그렇게 말하니까 다시 끌려가는 기분인데.”
푸리나는 웃었다.
그때 숲 깊은 곳에서 첫 번째 길이 열렸다.
그 길은 늪과 달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민다우가스가 고개를 들었다.
“저건 내 길이군.”
그는 하프를 내려놓고, 망토를 고쳐 걸쳤다.
푸리나는 물었다.
“혼자 갈 거야?”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하! 숲의 왕이 숲길을 두려워하면 그것부터 희극이지.”
그리고 그는 조금 낮게 덧붙였다.
“다만 누가 뒤에서 문을 닫는지는 보아야 한다. 꿈속에서도 퇴로는 필요하니까.”
그가 걸음을 옮기자, 숲은 리투아니아의 밤으로 바뀌었다.
나무들은 더 높아졌고, 뿌리는 늪 속으로 파고들었다.
달빛은 가지 사이로 얇게 찢겨 내려왔고, 멀리서는 늑대인지 사람인지 모를 울음이 들렸다.
민다우가스는 그곳에 서 있었다.
왕관은 없었다.
병사도 없었다.
깃발도 없었다.
그런데도 숲은 그를 알아보았다.
달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늪은 그의 발을 삼키지 않았다.
나무들은 침묵으로 길을 내주었다.
그리고 숲 안쪽에서 아이들의 노래가 들렸다.
리투아니아어였다.
오래된 노래였다.
불타지 않은 마을의 노래였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멈췄다.
그 노래 앞에, 갑자기 검은 기사의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무거운 갑옷.
십자가 문장.
타오르는 마을.
울부짖는 말.
숲은 그에게 물었다.
복수로 묶은 나라는, 복수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푸리나는 멀리서 그 질문을 들었다.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숲속의 기사들을 보았다.
“좋은 질문이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넓었다.
호방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끝은 칼처럼 얇았다.
“복수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처음부터 복수는 필요 없었겠지.”
그는 달빛 아래에서 손을 들었다.
“하지만 복수만으로 나라를 세울 수는 없다. 복수는 불이다. 겨울밤에는 사람을 살리지만, 집 안에 풀어놓으면 아이부터 탄다.”
나무들 사이에서 노래가 다시 들렸다.
민다우가스는 그 노래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불을 꺼뜨리지 않는다. 적이 다시 오면 태워야 하니까.”
그리고 그는 그림자 기사들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그 불로 밥도 지어야 한다. 아이들이 내일도 노래하려면.”
달빛이 그의 뒤로 흘렀다.
“리투아니아는 피해자가 아니다. 침략자를 사냥하는 나라다.”
그는 손을 내렸다.
“하지만 숲은 사냥만을 위해 자라지 않는다. 이 계산을 잊은 왕은 결국 자기 백성까지 사냥감으로 만든다.”
그 말이 끝나자, 그림자 기사들이 물러났다.
아이들의 노래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민다우가스는 뒤돌아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 여왕.”
“응?”
“그 하프, 버리지 마라.”
푸리나가 웃었다.
“연습하려고?”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었다.
“하하! 왕이 배울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면 손해는 아니지.”
그리고 날카롭게 덧붙였다.
“다만 내 연주를 외교석상에서 요구하면, 그것은 선전포고로 보겠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풀렸다.
그러나 숲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길은 자주빛 별 아래로 열렸다.
미하일라가 조용히 일어났다.
요안나가 그녀를 보았다.
“가시겠어요?”
“짐을 부르는 길이다.”
미하일라는 잠시 멈추고, 요안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함께 오겠나?”
요안나는 조금 놀란 듯했다.
미하일라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 밤은 숲의 희극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황제도 배역을 조금은 배워야 한다.”
요안나는 별등불을 들었다.
“그럼 같이 갈게요.”
두 사람은 자주빛 길로 들어섰다.
숲은 곧 니케아의 밤이 되었다.
멀리에는 무너진 성벽이 있었고, 아직 되찾지 못한 도시의 그림자가 있었다.
하늘에는 자주빛 혜성이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채 멈춰 있었다.
미하일라는 그 한가운데 섰다.
그녀의 손에는 활이 없었다.
그런데도 손가락은 활시위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숲이 물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든 활은, 언제 내려놓는가?
요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하일라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숲은 다시 물었다.
누가 끝났다고 말하는가?
미하일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질문은 방금 전 레이튼과 아카식이 풍자극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웃음이 없었다.
자주빛 혜성 아래, 어린 황제의 장례식이 보였다.
애도의 천.
피.
닫힌 문.
유폐된 정통성.
권력을 잡기 위해 뻗은 손.
그리고 그 손에 묻은 죄.
요안나의 등불이 흔들렸다.
미하일라는 그 빛을 보았다.
“요안나.”
“네.”
“이 숲은 무례하군.”
“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틀리지는 않네요.”
그 말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 아팠다.
미하일라는 눈을 감았다.
공적인 황제의 얼굴이 잠시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짐은 제국을 구하기 위해 피를 묻혔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 말은 변명이 될 수 있다. 기록될 수도 있다. 칙령의 언어로 포장될 수도 있다.”
자주빛 혜성이 흔들렸다.
“그러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요안나는 그녀의 옆에 섰다.
“저는 폐하를 용서한다고 쉽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제가 평화를 말하는 이유가, 폐하의 죄를 지우기 위해서도 아니에요.”
요안나는 별등불을 들어 올렸다.
“저는 더는 누구도 장례식에서 왕좌를 빼앗기지 않았으면 해요.”
미하일라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가끔 가장 잔인한 말을 가장 평화롭게 하는구나.”
“배웠으니까요.”
“나에게서?”
“폐하에게서도요.”
미하일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나쁜 스승이었군.”
“아니요.”
요안나는 미하일라를 보았다.
“나쁜 시대였어요.”
둘 사이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숲은 다시 물었다.
활을 내려놓은 황제는, 무엇으로 평화를 지키는가?
미하일라는 손을 내렸다.
“활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황제의 것이 되었다.
우아하고, 절제되고, 무거웠다.
“짐의 시대는 아직 그렇게 자비롭지 않다.”
그녀는 요안나의 등불을 보았다.
“그러나 활이 모든 답이 되어서도 안 된다.”
자주빛 별들이 하나씩 낮아졌다.
“짐은 칙한다.
전쟁은 평화의 그림자 아래에 머물 것.
활은 등불을 가리지 말 것.
황제의 죄는 기록에서 지우지 말 것.”
요안나가 조용히 물었다.
“그 칙령은 누구에게 내리는 건가요?”
미하일라는 잠시 침묵했다.
“나에게.”
요안나는 등불을 조금 더 높이 들었다.
“그럼 제가 기록할게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아카식이 들으면 기뻐하겠군.”
“알토도요.”
“그쪽은 표정 변화 없이 ‘근거를 보존하겠습니다’라고 하겠지.”
요안나는 웃었다.
미하일라도 아주 작게 웃었다.
그 웃음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자주빛 길은 닫히지 않았다.
닫히는 대신, 두 사람의 뒤에 조용히 놓였다.
다음 길은 헝가리의 평원처럼 열렸다.
벨라 4세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벽돌 소품이 들려 있었다.
장인극단 때 그레이가 썼던 그 벽돌이었다.
벨라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숲속 길을 향해 걸었다.
그곳은 평원이었다.
끝없이 넓은 평원.
무너진 마을.
불탄 목책.
멀리 보이는 새 요새의 뼈대.
진흙 속에 박힌 수레바퀴.
벨라는 그 한가운데 섰다.
숲이 물었다.
요새는 누구를 위해 세우는가?
벨라는 대답했다.
“도망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벽돌을 내려놓았다.
땅이 잠시 빛났다.
왕관은 무엇을 물려주는가?
벨라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소피아가 있었다.
아직 어린 후계자.
언젠가 이 평원과 성벽과 왕관과, 그 모든 잔해를 받을 아이.
벨라는 짧게 말했다.
“왕좌가 아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평원을 가리켰다.
“이 땅이다.
무너진 곳.
다시 세운 곳.
다시 무너질 곳.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곳.”
소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라는 계속했다.
“왕관은 금이 아니다.
왕관은 살아남은 자들의 무게다.”
그녀는 벽돌 하나를 더 내려놓았다.
“언젠가 네 것이 될 것이다.”
그 말은 차가웠다기보다, 너무 무거웠다.
소피아가 작게 물었다.
“무섭지 않으셨어요?”
벨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평원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무서웠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그래서 성을 세웠다.”
세 번째 벽돌이 놓였다.
“무섭지 않은 자가 성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무서움을 아는 자가 문을 만든다.”
그녀가 손을 들자, 무대의 가짜 숲과 헝가리의 평원이 겹쳐졌다.
작은 결계의 실이 바닥에 엮였고, 아이들이 앉은 관객석 아래로 아주 얇은 빛이 지나갔다.
그레이가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무대 지지대가 안정되고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연극 보다가 진짜 보강까지 하네.”
그레이는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효율적입니다.”
푸리나는 웃었다.
“그레이, 지금 감동한 거야?”
“실무적으로 감동했습니다.”
벨라는 마지막 벽돌을 놓았다.
“헝가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소피아를 보았다.
“끝나지 않았으니, 다시 쌓는다.”
그 길은 그렇게 닫혔다.
박수는 없었다.
하지만 객석의 헝가리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네 번째 길은 은꽃으로 열렸다.
라이자는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려 했다.
그런데 호흐마이스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천천히.”
“괜찮아!”
“그 말은 대체로 괜찮지 않을 때 나옵니다.”
라이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거 푸리나가 자주 듣는 말인데.”
“그러니 더 경계합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같이 갈래?”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은꽃이 꽂힌 자기 갑주를 보았다.
“제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같이 가면 안 돼?”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은꽃 길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라이자에게.
하나는 호흐마이스터에게.
라이자는 아쉬운 듯 웃었다.
“그럼 나중에 만나.”
“예.”
호흐마이스터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라이자의 길은 보헤미아의 꿈으로 이어졌다.
은의 정령들이 노래했고, 버려진 금속 조각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다친 것들, 망가진 것들, 버려진 것들이 모두 라이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숲이 물었다.
모든 것을 안아주는 자는, 자신은 누구에게 안기는가?
라이자는 처음에는 웃으려 했다.
늘 그랬듯이.
“나는 괜찮아!”
그러나 은꽃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의 인형이 그녀에게 안겼다.
부서진 검이 그녀의 팔에 기대었다.
피난민의 작은 그릇, 찢어진 깃발, 이름 없는 은의 조각들이 그녀에게 모여들었다.
그녀의 팔은 점점 무거워졌다.
라이자는 웃었다.
“괜찮아. 조금 무거울 뿐이야.”
더 많은 것들이 왔다.
“괜찮아.”
또 더 많이.
“괜찮……”
그녀의 무릎이 흔들렸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그것은 허그와 보상의 성좌였을 수도 있고, 보헤미아의 은빛 꿈이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오래전 꿈에서 만난 은의 정령이었을 수도 있다.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따뜻했다.
라이자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지 않은 손을 내려놓았다.
“아.”
그녀는 아주 작게 말했다.
“나도 안겨도 되는구나.”
은꽃들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 길은 부드럽게 닫혔다.
반대쪽에서 호흐마이스터의 길이 열렸다.
그곳은 숲이 아니었다.
눈 덮인 변경.
검은 갑주.
멀리서 들리는 몽골의 말발굽.
그리고 더 멀리, 자신과 닮은 황금빛 눈.
호흐마이스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숲이 물었다.
안쪽의 용을 베면, 무엇이 남는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질문이 왔다.
죄를 갑옷처럼 입은 자는, 갑옷을 벗을 수 있는가?
호흐마이스터는 손을 자기 가슴에 올렸다.
갑주 틈에는 아직 라이자의 은꽃이 꽂혀 있었다.
그 꽃은 말도 안 되게 작았다.
방어력도 없고, 위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전술적 의미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을 빼지 않았다.
“저는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눈보라 속에서 말했다.
“다만 이 땅이 내일도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황금빛 눈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몽골의 피.
위대한 왕의 씨앗.
두려운 혈육.
자신이 죽이고자 하는 것과 자신 안에 남아 있는 것.
호흐마이스터는 검을 뽑았다.
“내 혈육인 저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압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정중했다.
그래서 더 서늘했다.
“그러나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피 그 자체가 아닙니다.
피를 이유로 제가 무엇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순간입니다.”
용의 그림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검끝을 겨누었다.
“그러니 저는 안쪽의 용을 죽이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호흐마이스터는 이어 말했다.
“감시합니다.
묶어둡니다.
필요할 때마다 이름을 부릅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
그녀는 검을 내렸다.
“죄악의 갑주는 벗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에 꽃 하나를 꽂는 것까지 금지되어 있지는 않겠지요.”
은꽃이 작게 빛났다.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호흐마이스터는 돌아섰다.
라이자가 길 끝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 안 뺐네.”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시야를 가리지 않습니다.”
라이자는 웃었다.
“그 말 진짜 마음에 든다는 뜻이지?”
“전술적으로는……”
“응응, 전술적으로.”
호흐마이스터는 결국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번째 길은 불가리아의 새벽과 검은 하늘로 갈라졌다.
레플리카, 알렉산드리나, 스토얀카가 동시에 그 길을 보았다.
세 사람의 차르.
세 개의 불가리아.
푸리나는 순간적으로 그 길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그 길은 장난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길이었다.
먼저 레플리카의 길에 검은 먼지가 내려앉았다.
비명은 낮아졌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찢기 전에, 조금 무뎌졌다.
숲이 물었다.
고통을 줄이는 왕은, 고통으로 성장한 자들의 왕이 될 수 있는가?
레플리카는 검은 팔을 들어 올렸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았다.
“고통은 스승일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이 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검은 먼지가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견딘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견디지 못한 자에게 채찍을 들이대며 성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스토얀카가 웃었다.
“무르네.”
레플리카는 그녀를 보았다.
“무른 것이 아니라, 찢어지기 전에 감싸는 겁니다.”
스토얀카의 길은 가시꽃으로 열렸다.
척추 같은 가지들이 하늘로 솟았다.
꽃은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은 위험했다.
숲이 물었다.
해체를 꽃이라 부르면, 고통은 구원받는가?
스토얀카는 웃었다.
“아니.”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빨랐다.
“고통은 구원받지 않아. 고통은 피고, 터지고, 흩어지지.”
그녀는 가시꽃 사이를 걸었다.
“구원은 너무 얌전한 말이야. 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아.”
레플리카가 낮게 말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스토얀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맞아.”
그녀는 웃었다.
“그래서 내가 왕이 되면 불가리아는 아름답게 망가질 거야.”
그 말에 숲이 붉게 흔들렸다.
하지만 세 번째 길,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이 그 사이를 갈랐다.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쓴 채 앞으로 나왔다.
숲이 물었다.
흉내낸 왕도는 언제 진짜가 되는가?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그걸 묻는 자들은 대개 이미 진짜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나무 홀을 바닥에 짚었다.
“저는 흉내냈습니다.
시메온 대제를.
왕도를.
차르의 목소리를.
진짜들이 태어나면서 받았다는 것을.”
새벽빛이 그녀의 등 뒤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흉내는 얕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매일 같은 자세로 서고, 매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매일 같은 책임을 짊어지면……”
그녀는 종이 왕관을 벗었다.
“언젠가 몸이 먼저 압니다.
이것이 연기가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레플리카는 그녀를 보았다.
스토얀카도 웃음을 멈추었다.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다시 썼다.
“가짜 왕은 진짜 왕보다 더 왕다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안심하고 짓밟을 테니까요.”
새벽빛은 검은 하늘과 가시꽃 사이를 갈랐다.
세 길은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를 지워버리지도 않았다.
불가리아의 숲은 그렇게 잠시, 세 개의 왕관을 모두 비추었다.
그다음 길은 황혼이었다.
타마르 여왕은 웃으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제 차례군요.”
그녀의 걸음은 느긋했다.
황혼의 포도나무가 숲을 감쌌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가 함께 걷는 능선.
포도송이처럼 매달린 기억과 업.
십자가 모양으로 뻗은 가지.
숲이 물었다.
죽은 왕은 언제 왕위에서 쉬는가?
타마르는 포도나무 아래에 섰다.
그녀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숲은 기다렸다.
타마르는 마침내 말했다.
“왕은 죽었다고 곧장 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특히 죽은 자들이 아직 길을 잃고 있다면요.”
황혼 너머에서 조지아의 망자들이 걸었다.
어떤 이는 죄를 품었고, 어떤 이는 기도를 품었고, 어떤 이는 아직 자기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타마르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짐은 끝난 길의 주인이랍니다. 황혼에 닿은 이들이 헤매지 않도록, 포도나무 아래에서 기다릴 뿐이지요.”
숲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대의 길은 언제 끝나는가?
타마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쓸쓸했다.
“그 질문은 제법 잔인하군요.”
그녀는 포도주잔을 들어 올렸다.
“아마도, 산 자들이 죽은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붙잡지 않게 되는 날이겠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 헤툼.”
“응.”
“그대는 산 자를 무대 위로 올리지요.”
“응.”
“좋은 일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이지요.”
타마르는 황혼빛 미소를 지었다.
“다만 언젠가 막이 닫힌 자에게는, 객석이 아니라 방을 내어주어야 한답니다.”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타마르는 더 묻지 않았다.
그 길은 포도향과 함께 닫혔다.
마지막으로, 숲은 푸리나 앞에 길을 열었다.
그 길은 무대였다.
끝없는 객석.
끝없는 조명.
끝없는 박수.
그리고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푸리나 혼자였다.
죠니가 곧장 말했다.
“같이 갈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나 혼자 가야 할 것 같아.”
“그 말도 보통 좋은 뜻이 아니던데.”
“알아.”
푸리나는 웃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은 내 배역이야.”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럼 끝나고 밥.”
“응. 따뜻하게.”
“약속했다.”
푸리나는 무대 길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관객이 많았다.
아이들.
피난민.
병사.
죽은 자의 그림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능성.
웃었던 사람.
웃지 못했던 사람.
무대에 올라온 사람.
끝내 객석에 앉아 있고 싶었던 사람.
그들은 모두 푸리나를 보고 있었다.
숲이 물었다.
모두를 무대에 올리는 자는, 누구의 무대에 서는가?
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은 계속되었다.
조명을 켜는 자는, 누가 쉬게 하는가?
푸리나는 붓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밝은 사람이다.
축제를 사랑한다.
즉흥극을 사랑한다.
사람들이 웃는 순간을 사랑한다.
망가진 하루 끝에 누군가가 다시 “내일”을 말하는 장면을 사랑한다.
그러나 조명은 따뜻하지만, 오래 쥐고 있으면 손이 탄다.
푸리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객석의 맨 앞줄에서 그레이가 보였다.
그레이는 말없이 작은 장부를 닫았다.
레이튼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하융은 회색 창문 너머에서 푸리나가 쉬지 못한 가능성들을 보고 있었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무대에 서기 싫으면 내려와도 돼.”
푸리나는 웃었다.
“그건 좀 너무 건조한 위로 아니야?”
“내가 원래 그래.”
“그래도 고마워.”
“고맙다는 말은 밥으로 해.”
푸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숲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푸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나는 모두를 무대에 올리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작았다.
“하지만 모두가 지금 당장 무대에 서고 싶은 건 아니겠지.
누군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고, 누군가는 객석이 더 편하고, 누군가는 커튼 뒤에서 울 시간이 필요할 거야.”
조명이 그녀를 비추었다.
푸리나는 붓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나는 기다릴게.”
그 말에 객석이 조용해졌다.
“무대는 도망가지 않아.
막도 내가 잡아둘 수 있어.
조명도 너무 눈부시지 않게 낮출 수 있어.”
그녀는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럽기만 한 웃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언젠가, 그 사람이 자기 발로 올라오고 싶어지면.”
푸리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장엄해졌다.
군주이자 극장주.
여관좌의 휴식의 별.
어둠을 알면서도 조명을 끄지 않는 사람.
“그때 나는 말할 거야.”
그녀는 무대 전체를 향해 선언했다.
“그대의 막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고.
그대는 관객만이 아니었다고.
그대가 원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고.”
숲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언제 쉬는가?
푸리나는 대답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그건…….”
그때 여관의 성좌가 무대 가장자리에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차를 따르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잠깐 쉬어 가시죠. 무대는 제가 보고 있겠습니다.”
푸리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도 돼?”
“물론입니다.”
여관의 성좌는 찻잔을 내밀었다.
“여관지기는 배우에게도 방을 내어드리는 법입니다.”
푸리나는 찻잔을 받았다.
그 순간, 끝없는 객석의 조명이 조금 낮아졌다.
무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조금 조용해졌다.
푸리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실패가 아니었다.
휴식이었다.
그리고 숲은 마침내, 모든 군주에게 길을 돌려주었다.
한여름 밤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처음과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