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작성자:여관◆zAR16hM8he
작성일:2026-05-08 (금) 01:04:15
갱신일:2026-05-13 (수) 19:12:03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83여관◆zAR16hM8he(ca47ad90)2026-05-12 (화) 22:24:42
《한여름 밤의 군주들》
막간. 왕관을 벗은 식탁
연회는 전쟁보다 어려웠다.
적어도 그레이에게는 그랬다.
전쟁에는 적과 아군이 있다.
성벽에는 안과 밖이 있다.
피난민 수용에는 명단과 배급표가 있고, 병자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으며, 무너진 무대에는 보강해야 할 기둥이 있다.
하지만 연회에는 군주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그레이는 연회장 입구에서 작은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동 동선표, 음식 배치도, 알레르기 및 금기 식품 목록, 종교별 식사 구분표, 술 제공 제한 명단, 비상시 대피 경로, 그리고 푸리나가 절대 보면 안 되는 “추가 즉흥극 금지 목록”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전쟁 준비 같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연회입니다.”
“내 눈에는 작전도 같아.”
“군주 열두 명 이상이 한 공간에서 식사합니다.”
그레이는 장부 한 장을 넘겼다.
“작전이 맞습니다.”
죠니는 납득했다.
“그건 그래.”
연회장은 원래 킬리키아 왕궁의 큰 식당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식당이라기보다 여관에 가까웠다.
높은 상석 하나를 두지 않았다.
대신 크고 작은 둥근 탁자가 여럿 놓였고, 각 탁자에는 서로 다른 나라의 빵과 수프, 고기, 과일, 치즈, 술, 차가 섞여 있었다.
왕관은 모두 머리 위에 있지 않았다.
어떤 왕관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어떤 것은 식탁 위의 포도주잔 옆에 놓여 있었고, 어떤 것은 주인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한여름 밤의 숲은 끝났다.
그러나 왕관의 무게는 식탁까지 따라왔다.
다만 지금은, 그 무게 위에 따뜻한 수프 냄새가 얹혀 있었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연회장을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다.
“좋아!”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
“응?”
“지금 ‘좋아’ 다음에 즉흥극, 추가 공연, 왕관 교환식, 식탁 위 독백, 또는 합동 합창을 제안하시려는 거라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하려고 했네.”
“합동 합창은 아니었어.”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식탁 위 독백……?”
그레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죠니가 말했다.
“걸렸네.”
“죠니, 배신자!”
“난 밥 먹으러 왔어. 무대 지키러 온 게 아니고.”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따뜻한 식사 앞에서 너무 현실적이야.”
“그게 따뜻한 식사의 장점이지.”
그레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폐하,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손님들이 식사하고 쉬게 두셔야 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연회장을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하프를 의자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벨라는 작은 벽돌을 식탁 한쪽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같은 빵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라이자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에 꽂힌 은꽃을 더 튼튼하게 고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같은 탁자에 앉지 않았지만, 서로가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들고 여관의 성좌가 따르는 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응. 알았어.”
그레이가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오늘은 무대보다 식탁이 필요하겠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야, 여왕님.”
“그럼 파이 하나 추가?”
“그건 더 좋은 판단이고.”
그레이가 말했다.
“파이 수량은 이미 배정되었습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역시 현실은 강하네.”
---
민다우가스는 하프를 내려놓고, 헝가리의 벨라 4세와 같은 탁자에 앉았다.
그 탁자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레이튼이 “재미있는 대화가 태어날 배치”라고 했고, 그레이가 “충돌 위험이 낮고 정치적 균형도 맞다”고 판단한 끝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냥 “재밌겠다!”고 했다.
민다우가스는 자기 앞에 놓인 고기 요리를 크게 잘랐다.
“하하! 킬리키아의 식탁은 넉넉하군. 왕들이 이만큼 모였는데도 고기가 줄지 않는다니.”
벨라는 짧게 답했다.
“준비한 자가 유능하다.”
“그레이 양 말인가?”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내정관은 성 하나를 맡겨도 되겠군.”
벨라는 식탁 끝의 그레이를 보았다.
“성 하나로는 부족하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멈추더니, 곧 크게 웃었다.
“하하하! 헝가리의 여왕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무겁군.”
벨라는 빵을 찢었다.
“가벼운 평가는 사람을 망친다.”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그는 옆에 둔 하프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나 더 평가해보겠나?”
벨라의 시선이 하프로 향했다.
“연주인가.”
“연주라기보다는 전략적 음향 실험이지.”
“해라.”
민다우가스는 하프 현을 튕겼다.
소리가 났다.
분명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민다우가스는 턱을 들었다.
“솔직한 평을 듣고 싶군.”
벨라는 짧게 말했다.
“성벽보다 먼저 다시 지어야 할 소리다.”
민다우가스는 한순간 굳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 정도인가?”
“그 정도다.”
“좋다. 명확한 보고는 좋은 선물이지.”
그는 하프를 내려놓았다.
“다만 이 소리가 적의 사기를 꺾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벨라는 아주 잠깐 생각했다.
“아군의 사기도 함께 꺾일 것이다.”
민다우가스는 더 크게 웃었다.
“공평하군! 그러면 아직 무기로 쓰기에는 위험하다.”
벨라는 빵을 수프에 적시며 말했다.
“연습해라.”
“왕에게 음악 수업이라.”
“왕도 못하는 것은 배운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벨라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평원이 있었다.
무너진 성벽과 다시 쌓은 돌, 겁먹은 아이와 그 앞에 세운 문이 있었다.
민다우가스는 웃음을 조금 낮췄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끝에 날카롭게 붙였다.
“다만 나는 하프보다 늪과 숲을 먼저 배웠지. 그쪽이 더 빨리 나라를 살렸으니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는 다르다. 목적은 같다.”
“살아남는 것.”
“다시 세우는 것.”
두 군주는 잠시 서로를 보았다.
그 짧은 침묵은 합의도 동맹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게 된 침묵이었다.
민다우가스는 잔을 들었다.
“헝가리의 벽에.”
벨라도 잔을 들었다.
“리투아니아의 숲에.”
잔이 조용히 부딪혔다.
---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같은 빵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 식탁에는 슈샤니크도 멀지 않은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연회 음식을 먹는 것보다, 각국 군주의 배치와 대화 흐름, 잠재적 후속 협상 가능성을 더 많이 보고 있었다.
요안나는 바구니에서 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나누었다.
“폐하.”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왜 그러지?”
“빵 드실래요?”
미하일라는 잠시 빵을 보았다.
“그대가 먼저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깜빡였다.
“독이 있을까 봐요?”
“아니다.”
미하일라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가 너무 오래 남에게 먼저 권하는 습관을 들이면 곤란해서다.”
요안나는 빵을 든 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럼 반으로 나눠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편이 더 어렵군.”
“그래서 좋은 거 아닐까요?”
“좋은 것과 어려운 것은 자주 붙어 다니지.”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설득력이 있네요.”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빵을 반씩 나눠 들었다.
슈샤니크는 그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아주 살짝 눌렀다.
미하일라는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슈샤니크.”
“예, 폐하.”
“그 표정은 기록 중인 표정인가, 계산 중인 표정인가.”
슈샤니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둘 다입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무엇을요?”
“공동황제 두 분이 같은 빵을 나누어 드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오해를 낳을 수 있는지입니다.”
요안나는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기록하라. 단, 과장하지 마라.”
슈샤니크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빵을 드셨고, 요안나 폐하께서 웃으셨으며, 니케아는 아직 분열하지 않았다고 적겠습니다.”
미하일라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대의 농담은 장부처럼 건조하군.”
슈샤니크는 조용히 답했다.
“젖은 장부는 쓸 수 없습니다.”
요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하일라도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장례식의 피.
유폐된 궁정.
함께 들어 올린 왕관의 무게.
요안나는 빵을 조금 뜯어 접시에 내려놓았다.
“폐하.”
“말하라.”
“저는 오늘 밤을 잊지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만 기억하지도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의 손이 멈췄다.
요안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전의 일도, 그 뒤의 일도, 같이 기억할게요.”
미하일라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용서인가.”
“아니요.”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직 그 말을 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한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낮았다.
“쉽게 주어진 용서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덮을 뿐이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기억할게요.”
슈샤니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대화는 장부에 적기에는 너무 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미하일라는 빵 조각을 내려놓았다.
“요안나.”
“네.”
“그대의 평화는 짐을 편하게 하지 않는군.”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그럼 잘하고 있는 거네요.”
미하일라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라플리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대답이다.”
---
라이자는 호흐마이스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다른 자리에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라이자는 은꽃 고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호흐마이스터 옆에 와서 앉았고, 호흐마이스터는 그것을 “전술적 장비 점검”으로 해석해 허용했다.
그레이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건 장비 점검이 아닙니다.”
죠니가 말했다.
“놔둬. 평화로운 사고잖아.”
라이자는 작은 은실을 손끝에서 뽑아내듯 만들어,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에 꽂힌 은꽃 줄기를 고정했다.
“이제 안 빠질 거야.”
호흐마이스터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영구 고정입니까?”
“아니, 원하면 뺄 수 있어.”
“그렇다면 좋습니다.”
“빼려고?”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현재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든다.”
“군사적으로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응. 알아. 그래서 더 좋아.”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차를 바라보았다.
차는 따뜻했다.
잔은 작았고, 은꽃은 갑주 틈에서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밤, 그 어울리지 않음은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아까 안아도 된다고 했잖아.”
“사전 고지를 전제로 절차적 허가를 드린 겁니다.”
“그럼 지금 고지할게. 나중에 또 안아도 돼?”
호흐마이스터는 차를 내려놓았다.
“상황에 따라 판단하겠습니다.”
“엄청 긍정적으로 들리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오해입니다.”
“그럼 오해해도 돼?”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은 오해가 많이 허용되는 듯하군요.”
라이자는 환하게 웃었다.
“응!”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튜튼 기사단의 사절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총장 갑주에 꽂힌 은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저들의 보고서가 길어지겠군요.”
라이자는 속삭였다.
“보고서 제목은 ‘호흐마이스터와 꽃’ 어때?”
“부적절합니다.”
“그럼 ‘작전상 꽃’?”
“더 부적절합니다.”
“‘전술적 은꽃 고정 상태 보고서’?”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이자는 웃다가 거의 식탁에 엎드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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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서로 다른 식탁에 있었다.
레플리카는 가장 조용한 구석에 앉아 부상병과 수행 사제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 앞의 음식은 아직 많이 줄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먹는 것도 회복이다.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 삼킬 수 있는 만큼이면 된다.”
그 말은 전장에서의 명령보다 부드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거역하기 어려웠다.
멀리서 알렉산드리나는 식사 예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종이 왕관은 아직 그녀의 옆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 장난으로 만든 왕관을, 그녀는 함부로 구기지 않았다.
가브리엘라가 그녀의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전하, 왕관을 접어두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보았다.
“아니요. 아직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가벼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어요. 진짜 왕관보다 쉽게 찢어질 것 같아서.”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진 종이도 붙일 수 있습니다.”
“왕관도요?”
“왕도도 그렇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새벽은 한 번에 오지 않습니다. 매일 어둠 끝에서 다시 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잔을 들었다.
“그러니 내일도 흉내내야겠군요.”
“아니요.”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웃었다.
“내일도 걸으셔야 합니다.”
한편 스토얀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포도주잔 옆에 가시꽃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연회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을 보았다.
레플리카의 검은 하늘.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
그리고 자기 손끝의 가시꽃.
스토얀카는 웃었다.
“다들 착하지.”
그녀의 곁에 있던 백화문 제자가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착한 사람들은 자기가 막아야 할 것을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재밌어.”
그녀는 가시꽃을 손끝으로 돌렸다.
“검은 아이는 고통을 줄이려 하고, 가짜 왕은 고통을 딛고 서려고 하지.”
제자는 조용히 물었다.
“문주님께서는요?”
스토얀카는 웃었다.
“나는 피울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그들이 막으려는 것.”
그리고 그녀는 레플리카 쪽을 보았다.
레플리카도 그 시선을 느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레플리카는 조용히 말했다.
“막겠습니다.”
거리가 있었지만, 스토얀카는 읽은 듯 웃었다.
“해봐.”
알렉산드리나는 그 둘 사이의 공기를 느꼈다.
그녀는 종이 왕관을 손끝으로 눌렀다.
연회장은 따뜻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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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 여왕은 여관의 성좌와 같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여관의 성좌가 차를 따르고 있었고,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한쪽은 끝의 여관과 닿은 신적 여관지기.
다른 한쪽은 지상명계의 안식농원과 하나가 된 죽은 여왕.
그런데 대화는 뜻밖에 평온했다.
“차도 좋군요.”
타마르가 말했다.
“포도주도 좋아 보입니다.”
여관의 성좌가 답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망자에게는 어느 쪽이 더 어울릴까요?”
“그분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쪽이겠지요.”
“좋은 답이랍니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천천히 돌렸다.
“죽은 자들은 가끔 산 자들이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것을 대신 정해버린다고 불평하지요.”
여관의 성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자들은 사랑해서 그러고, 죽은 자들은 사랑받아서 곤란해하지요.”
타마르는 웃었다.
“참으로 여관지기다운 말씀이군요.”
“여왕께서는 오늘 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미 죽은 몸이라 피로의 정의가 조금 다르답니다.”
“그렇다 해도 쉬어가실 수는 있습니다.”
타마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포도주잔 너머로 연회장을 보았다.
푸리나가 그레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죠니가 접시를 지키고 있었다.
레이튼은 누군가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있었고, 하융은 그것이 실패하는 가능성을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산 자들의 연회는 소란스럽군요.”
“그 소란이 그분들의 숨소리입니다.”
“그렇지요.”
타마르는 잔을 들었다.
“그래서 아직은 좋답니다.”
여관의 성좌는 그녀의 잔에 조용히 차 대신 따뜻한 물을 하나 더 놓았다.
“포도주 사이에 물도 필요합니다.”
타마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짐을 보살피려 하시는 건가요?”
“손님이시니까요.”
타마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잠시 손님이 되어볼까요.”
---
푸리나는 결국 식탁 위 독백을 포기했다.
대신 식탁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떤 탁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은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어떤 탁자에서는 부상병에게 “오늘의 관객상”이라며 작은 리본을 달아주었다.
어떤 탁자에서는 레이튼이 낸 수수께끼를 맞히려다 세 번 틀렸다.
“왜 답이 양파야?!”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겹겹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억울해!”
“수수께끼는 때때로 그렇습니다.”
하융은 옆에서 말했다.
“다른 가능성의 폐하는 감자를 답으로 제출했소.”
“그쪽의 나는 더 틀렸네!”
“그렇소.”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신들이 앉은 작은 탁자에 돌아왔다.
그레이, 죠니, 레이튼, 하융.
이상하게도 이 탁자에는 왕관이 없었다.
대신 장부, 빈 접시, 수수께끼 카드, 회색빛 창호 조각, 그리고 죠니가 확보한 고기파이가 있었다.
푸리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힘들어!”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쉬십시오.”
“말하자마자?”
“예.”
죠니는 파이를 반으로 잘랐다.
“먹어.”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나눠주는 거야?”
“네가 쓰러지면 다음 사고는 누가 수습해.”
“걱정이구나!”
“업무 리스크 관리야.”
“그것도 걱정이지!”
죠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파이를 받아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그레이는 작게 안도했다.
레이튼은 차를 들었다.
“오늘 밤의 질문은 꽤 많았습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죽지 않은 가능성도 많았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좋은 거야?”
“그렇소.”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오. 그러나 오늘 밤은 조금 덜 차갑구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폐하.”
“응?”
“정산 보고입니다.”
푸리나가 굳었다.
죠니가 파이를 먹으며 말했다.
“올 게 왔네.”
그레이는 읽기 시작했다.
“은꽃 장식 일부가 영구 변성되었습니다. 무대 바닥 보수 필요. 좌측 통로는 벨라 폐하의 임시 결계로 강화되었으나, 원래 구조와 달라져 재점검 필요. 하프 소품 1개는 민다우가스 대공이 반출 예정입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건 선물이야!”
“그러면 선물 항목으로 재분류하겠습니다.”
“응!”
“호흐마이스터의 갑주에 장식된 은꽃은 외교 선물인지, 의상 소품인지, 개인 장비인지 분류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전술적 꽃.”
그레이는 멈췄다.
“그 항목명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매우 정확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 경까지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하융이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작전상 은꽃’으로 기록되었소.”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쪽이 조금 낫습니다.”
푸리나는 웃느라 파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레이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
“폐하께서 중간에 사용하신 무대용 물감의 정식 명칭이 없습니다.”
“아.”
“정식 명칭이 없으면 다음에 금지하거나 허가하기 어렵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금지하면 되잖아.”
푸리나가 외쳤다.
“죠니!”
“왜. 현실적인 의견이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사랑의 묘약은 부적절하고, 착각의 물감도 오해가 있겠군요.”
하융은 창밖을 보듯 말했다.
“왕관의 그림자를 비추는 빛.”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멋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시적입니다. 행정 문서에 부적합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럼 ‘위험한 물감’.”
“너무 포괄적입니다.”
레이튼이 손가락을 들었다.
“‘자기 역할 인식 보조용 무대 물감’은 어떻습니까?”
그레이는 잠시 적어보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시무룩해졌다.
“너무 재미없어.”
그레이는 단호했다.
“행정명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무대명은 네가 따로 붙여.”
푸리나가 바로 살아났다.
“좋아! 무대명은 《반짝반짝 왕관 뒤집기 물감》!”
그레이는 침묵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참았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미 그 이름 때문에 실패한 가능성이 셋 보이오.”
죠니는 파이를 씹으며 말했다.
“그럼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역시 죠니!”
“칭찬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들렸어!”
그레이는 장부에 결국 이렇게 적었다.
행정명: 자기 역할 인식 보조용 무대 물감.
폐하 임의명: 반짝반짝 왕관 뒤집기 물감.
사용 제한: 강력 권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강력 권고” 앞에 “매우”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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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깊어지자, 군주들의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왕관은 여전히 곁에 있었다.
하지만 식탁 위의 손들은 잔을 들고, 빵을 찢고, 수프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왕관을 쓴 손도 왕관을 벗은 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는 연회장 한쪽에서 조용히 말했다.
“왕관을 쓴 손님도, 왕관을 벗은 손님도, 식사가 식기 전에는 모두 같은 손님이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좋은 말이네.”
죠니가 말했다.
“저 말은 네가 훔쳐 쓰지 마.”
“왜?”
“너무 많이 쓰면 또 무대 선언이 돼.”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모두를 보았다.
“내 가신들이 너무 강해졌어.”
레이튼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좋은 군주에게는 좋은 제동장치가 필요하지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동하지 못한 가능성은 대체로 오래가지 못하오.”
죠니는 마지막 파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먹어. 쉬는 것도 네 역할이라며.”
푸리나는 파이 조각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한입 베어 물었다.
따뜻했다.
무대 위의 조명도, 왕관의 금속도, 숲의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음식이었다.
푸리나는 문득, 오늘 밤 가장 어려운 배역이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받아먹는 것.
쉬는 것.
그녀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무엇이 좋으십니까?”
푸리나는 파이를 들고 말했다.
“이번엔 그냥 맛이 좋아.”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
그 순간, 연회장 전체에 작은 웃음이 퍼졌다.
큰 박수도, 장엄한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식탁 사이를 건너가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한여름 밤의 끝에 아주 잘 어울렸다.
막간. 왕관을 벗은 식탁
연회는 전쟁보다 어려웠다.
적어도 그레이에게는 그랬다.
전쟁에는 적과 아군이 있다.
성벽에는 안과 밖이 있다.
피난민 수용에는 명단과 배급표가 있고, 병자에게는 우선순위가 있으며, 무너진 무대에는 보강해야 할 기둥이 있다.
하지만 연회에는 군주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았다.
그레이는 연회장 입구에서 작은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동 동선표, 음식 배치도, 알레르기 및 금기 식품 목록, 종교별 식사 구분표, 술 제공 제한 명단, 비상시 대피 경로, 그리고 푸리나가 절대 보면 안 되는 “추가 즉흥극 금지 목록”이 놓여 있었다.
죠니가 그걸 보고 말했다.
“전쟁 준비 같네.”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연회입니다.”
“내 눈에는 작전도 같아.”
“군주 열두 명 이상이 한 공간에서 식사합니다.”
그레이는 장부 한 장을 넘겼다.
“작전이 맞습니다.”
죠니는 납득했다.
“그건 그래.”
연회장은 원래 킬리키아 왕궁의 큰 식당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식당이라기보다 여관에 가까웠다.
높은 상석 하나를 두지 않았다.
대신 크고 작은 둥근 탁자가 여럿 놓였고, 각 탁자에는 서로 다른 나라의 빵과 수프, 고기, 과일, 치즈, 술, 차가 섞여 있었다.
왕관은 모두 머리 위에 있지 않았다.
어떤 왕관은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어떤 것은 식탁 위의 포도주잔 옆에 놓여 있었고, 어떤 것은 주인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한여름 밤의 숲은 끝났다.
그러나 왕관의 무게는 식탁까지 따라왔다.
다만 지금은, 그 무게 위에 따뜻한 수프 냄새가 얹혀 있었다.
푸리나는 입구에서 연회장을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다.
“좋아!”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폐하.”
“응?”
“지금 ‘좋아’ 다음에 즉흥극, 추가 공연, 왕관 교환식, 식탁 위 독백, 또는 합동 합창을 제안하시려는 거라면 안 됩니다.”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죠니가 그녀를 보았다.
“하려고 했네.”
“합동 합창은 아니었어.”
그레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푸리나는 시선을 피했다.
“식탁 위 독백……?”
그레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죠니가 말했다.
“걸렸네.”
“죠니, 배신자!”
“난 밥 먹으러 왔어. 무대 지키러 온 게 아니고.”
푸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따뜻한 식사 앞에서 너무 현실적이야.”
“그게 따뜻한 식사의 장점이지.”
그레이는 차분하게 말했다.
“폐하, 오늘 밤은 이미 충분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제 손님들이 식사하고 쉬게 두셔야 합니다.”
푸리나는 잠시 연회장을 보았다.
민다우가스는 하프를 의자 옆에 내려놓고 있었다.
벨라는 작은 벽돌을 식탁 한쪽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같은 빵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라이자는 호흐마이스터의 갑주에 꽂힌 은꽃을 더 튼튼하게 고정하려고 하고 있었다.
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같은 탁자에 앉지 않았지만, 서로가 보이는 자리에 있었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들고 여관의 성좌가 따르는 차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리나는 숨을 작게 내쉬었다.
“응. 알았어.”
그레이가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웃었다.
“오늘은 무대보다 식탁이 필요하겠네.”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판단이야, 여왕님.”
“그럼 파이 하나 추가?”
“그건 더 좋은 판단이고.”
그레이가 말했다.
“파이 수량은 이미 배정되었습니다.”
죠니는 그레이를 보았다.
“역시 현실은 강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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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다우가스는 하프를 내려놓고, 헝가리의 벨라 4세와 같은 탁자에 앉았다.
그 탁자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레이튼이 “재미있는 대화가 태어날 배치”라고 했고, 그레이가 “충돌 위험이 낮고 정치적 균형도 맞다”고 판단한 끝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푸리나는 그냥 “재밌겠다!”고 했다.
민다우가스는 자기 앞에 놓인 고기 요리를 크게 잘랐다.
“하하! 킬리키아의 식탁은 넉넉하군. 왕들이 이만큼 모였는데도 고기가 줄지 않는다니.”
벨라는 짧게 답했다.
“준비한 자가 유능하다.”
“그레이 양 말인가?”
“그렇다.”
민다우가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 내정관은 성 하나를 맡겨도 되겠군.”
벨라는 식탁 끝의 그레이를 보았다.
“성 하나로는 부족하다.”
민다우가스는 잠시 멈추더니, 곧 크게 웃었다.
“하하하! 헝가리의 여왕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은 무겁군.”
벨라는 빵을 찢었다.
“가벼운 평가는 사람을 망친다.”
민다우가스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다.
그는 옆에 둔 하프를 바라보았다.
“그럼 하나 더 평가해보겠나?”
벨라의 시선이 하프로 향했다.
“연주인가.”
“연주라기보다는 전략적 음향 실험이지.”
“해라.”
민다우가스는 하프 현을 튕겼다.
소리가 났다.
분명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것이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민다우가스는 턱을 들었다.
“솔직한 평을 듣고 싶군.”
벨라는 짧게 말했다.
“성벽보다 먼저 다시 지어야 할 소리다.”
민다우가스는 한순간 굳었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 정도인가?”
“그 정도다.”
“좋다. 명확한 보고는 좋은 선물이지.”
그는 하프를 내려놓았다.
“다만 이 소리가 적의 사기를 꺾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나?”
벨라는 아주 잠깐 생각했다.
“아군의 사기도 함께 꺾일 것이다.”
민다우가스는 더 크게 웃었다.
“공평하군! 그러면 아직 무기로 쓰기에는 위험하다.”
벨라는 빵을 수프에 적시며 말했다.
“연습해라.”
“왕에게 음악 수업이라.”
“왕도 못하는 것은 배운다.”
민다우가스는 그녀를 보았다.
벨라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 평원이 있었다.
무너진 성벽과 다시 쌓은 돌, 겁먹은 아이와 그 앞에 세운 문이 있었다.
민다우가스는 웃음을 조금 낮췄다.
“옳은 말이다.”
그리고 끝에 날카롭게 붙였다.
“다만 나는 하프보다 늪과 숲을 먼저 배웠지. 그쪽이 더 빨리 나라를 살렸으니까.”
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는 다르다. 목적은 같다.”
“살아남는 것.”
“다시 세우는 것.”
두 군주는 잠시 서로를 보았다.
그 짧은 침묵은 합의도 동맹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가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게 된 침묵이었다.
민다우가스는 잔을 들었다.
“헝가리의 벽에.”
벨라도 잔을 들었다.
“리투아니아의 숲에.”
잔이 조용히 부딪혔다.
---
미하일라와 요안나는 같은 빵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 식탁에는 슈샤니크도 멀지 않은 자리에 있었다.
그녀는 연회 음식을 먹는 것보다, 각국 군주의 배치와 대화 흐름, 잠재적 후속 협상 가능성을 더 많이 보고 있었다.
요안나는 바구니에서 빵 하나를 집어 반으로 나누었다.
“폐하.”
미하일라가 그녀를 보았다.
“왜 그러지?”
“빵 드실래요?”
미하일라는 잠시 빵을 보았다.
“그대가 먼저 들어라.”
요안나는 눈을 깜빡였다.
“독이 있을까 봐요?”
“아니다.”
미하일라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대가 너무 오래 남에게 먼저 권하는 습관을 들이면 곤란해서다.”
요안나는 빵을 든 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그럼 반으로 나눠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 편이 더 어렵군.”
“그래서 좋은 거 아닐까요?”
“좋은 것과 어려운 것은 자주 붙어 다니지.”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설득력이 있네요.”
미하일라는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빵을 반씩 나눠 들었다.
슈샤니크는 그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장부 모서리를 아주 살짝 눌렀다.
미하일라는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슈샤니크.”
“예, 폐하.”
“그 표정은 기록 중인 표정인가, 계산 중인 표정인가.”
슈샤니크는 담담하게 말했다.
“둘 다입니다.”
요안나가 물었다.
“무엇을요?”
“공동황제 두 분이 같은 빵을 나누어 드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오해를 낳을 수 있는지입니다.”
요안나는 조금 난처하게 웃었다.
미하일라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
“기록하라. 단, 과장하지 마라.”
슈샤니크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빵을 드셨고, 요안나 폐하께서 웃으셨으며, 니케아는 아직 분열하지 않았다고 적겠습니다.”
미하일라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대의 농담은 장부처럼 건조하군.”
슈샤니크는 조용히 답했다.
“젖은 장부는 쓸 수 없습니다.”
요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하일라도 아주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장례식의 피.
유폐된 궁정.
함께 들어 올린 왕관의 무게.
요안나는 빵을 조금 뜯어 접시에 내려놓았다.
“폐하.”
“말하라.”
“저는 오늘 밤을 잊지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만 기억하지도 않을 거예요.”
미하일라의 손이 멈췄다.
요안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 전의 일도, 그 뒤의 일도, 같이 기억할게요.”
미하일라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용서인가.”
“아니요.”
요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직 그 말을 할 수는 없어요.”
“그래야 한다.”
미하일라의 목소리는 낮았다.
“쉽게 주어진 용서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덮을 뿐이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기억할게요.”
슈샤니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대화는 장부에 적기에는 너무 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미래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미하일라는 빵 조각을 내려놓았다.
“요안나.”
“네.”
“그대의 평화는 짐을 편하게 하지 않는군.”
요안나는 살짝 웃었다.
“그럼 잘하고 있는 거네요.”
미하일라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아주 작게 웃었다.
“라플리가 들었으면 좋아했을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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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자는 호흐마이스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다른 자리에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라이자는 은꽃 고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호흐마이스터 옆에 와서 앉았고, 호흐마이스터는 그것을 “전술적 장비 점검”으로 해석해 허용했다.
그레이는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중얼거렸다.
“저건 장비 점검이 아닙니다.”
죠니가 말했다.
“놔둬. 평화로운 사고잖아.”
라이자는 작은 은실을 손끝에서 뽑아내듯 만들어, 호흐마이스터의 갑주 틈에 꽂힌 은꽃 줄기를 고정했다.
“이제 안 빠질 거야.”
호흐마이스터는 꽃을 내려다보았다.
“영구 고정입니까?”
“아니, 원하면 뺄 수 있어.”
“그렇다면 좋습니다.”
“빼려고?”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침묵했다.
“현재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라이자는 활짝 웃었다.
“그 말 마음에 든다.”
“군사적으로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응. 알아. 그래서 더 좋아.”
호흐마이스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차를 바라보았다.
차는 따뜻했다.
잔은 작았고, 은꽃은 갑주 틈에서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밤, 그 어울리지 않음은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라이자가 물었다.
“아까 안아도 된다고 했잖아.”
“사전 고지를 전제로 절차적 허가를 드린 겁니다.”
“그럼 지금 고지할게. 나중에 또 안아도 돼?”
호흐마이스터는 차를 내려놓았다.
“상황에 따라 판단하겠습니다.”
“엄청 긍정적으로 들리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오해입니다.”
“그럼 오해해도 돼?”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은 오해가 많이 허용되는 듯하군요.”
라이자는 환하게 웃었다.
“응!”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튜튼 기사단의 사절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총장 갑주에 꽂힌 은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저들의 보고서가 길어지겠군요.”
라이자는 속삭였다.
“보고서 제목은 ‘호흐마이스터와 꽃’ 어때?”
“부적절합니다.”
“그럼 ‘작전상 꽃’?”
“더 부적절합니다.”
“‘전술적 은꽃 고정 상태 보고서’?”
호흐마이스터는 잠시 생각했다.
“그건 가능성이 있습니다.”
라이자는 웃다가 거의 식탁에 엎드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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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서로 다른 식탁에 있었다.
레플리카는 가장 조용한 구석에 앉아 부상병과 수행 사제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 앞의 음식은 아직 많이 줄지 않았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한 젊은 병사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먹는 것도 회복이다.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 삼킬 수 있는 만큼이면 된다.”
그 말은 전장에서의 명령보다 부드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거역하기 어려웠다.
멀리서 알렉산드리나는 식사 예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었다.
종이 왕관은 아직 그녀의 옆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 장난으로 만든 왕관을, 그녀는 함부로 구기지 않았다.
가브리엘라가 그녀의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전하, 왕관을 접어두시겠습니까?”
알렉산드리나는 종이 왕관을 보았다.
“아니요. 아직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가벼웠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웃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어요. 진짜 왕관보다 쉽게 찢어질 것 같아서.”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찢어진 종이도 붙일 수 있습니다.”
“왕관도요?”
“왕도도 그렇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브리엘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새벽은 한 번에 오지 않습니다. 매일 어둠 끝에서 다시 옵니다.”
알렉산드리나는 잔을 들었다.
“그러니 내일도 흉내내야겠군요.”
“아니요.”
가브리엘라는 조용히 웃었다.
“내일도 걸으셔야 합니다.”
한편 스토얀카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포도주잔 옆에 가시꽃을 놓고 있었다.
그녀는 연회 음식을 별로 먹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을 보았다.
레플리카의 검은 하늘.
알렉산드리나의 새벽빛.
그리고 자기 손끝의 가시꽃.
스토얀카는 웃었다.
“다들 착하지.”
그녀의 곁에 있던 백화문 제자가 고개를 숙였다.
“문주님.”
“착한 사람들은 자기가 막아야 할 것을 너무 잘 알아. 그래서 재밌어.”
그녀는 가시꽃을 손끝으로 돌렸다.
“검은 아이는 고통을 줄이려 하고, 가짜 왕은 고통을 딛고 서려고 하지.”
제자는 조용히 물었다.
“문주님께서는요?”
스토얀카는 웃었다.
“나는 피울 거야.”
“무엇을 말입니까?”
“그들이 막으려는 것.”
그리고 그녀는 레플리카 쪽을 보았다.
레플리카도 그 시선을 느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레플리카는 조용히 말했다.
“막겠습니다.”
거리가 있었지만, 스토얀카는 읽은 듯 웃었다.
“해봐.”
알렉산드리나는 그 둘 사이의 공기를 느꼈다.
그녀는 종이 왕관을 손끝으로 눌렀다.
연회장은 따뜻했다.
하지만 불가리아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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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르 여왕은 여관의 성좌와 같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여관의 성좌가 차를 따르고 있었고,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한쪽은 끝의 여관과 닿은 신적 여관지기.
다른 한쪽은 지상명계의 안식농원과 하나가 된 죽은 여왕.
그런데 대화는 뜻밖에 평온했다.
“차도 좋군요.”
타마르가 말했다.
“포도주도 좋아 보입니다.”
여관의 성좌가 답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웃었다.
“망자에게는 어느 쪽이 더 어울릴까요?”
“그분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쪽이겠지요.”
“좋은 답이랍니다.”
타마르는 포도주잔을 천천히 돌렸다.
“죽은 자들은 가끔 산 자들이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것을 대신 정해버린다고 불평하지요.”
여관의 성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 자들은 사랑해서 그러고, 죽은 자들은 사랑받아서 곤란해하지요.”
타마르는 웃었다.
“참으로 여관지기다운 말씀이군요.”
“여왕께서는 오늘 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미 죽은 몸이라 피로의 정의가 조금 다르답니다.”
“그렇다 해도 쉬어가실 수는 있습니다.”
타마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포도주잔 너머로 연회장을 보았다.
푸리나가 그레이에게 혼나고 있었다.
죠니가 접시를 지키고 있었다.
레이튼은 누군가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있었고, 하융은 그것이 실패하는 가능성을 보며 작게 웃고 있었다.
타마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산 자들의 연회는 소란스럽군요.”
“그 소란이 그분들의 숨소리입니다.”
“그렇지요.”
타마르는 잔을 들었다.
“그래서 아직은 좋답니다.”
여관의 성좌는 그녀의 잔에 조용히 차 대신 따뜻한 물을 하나 더 놓았다.
“포도주 사이에 물도 필요합니다.”
타마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짐을 보살피려 하시는 건가요?”
“손님이시니까요.”
타마르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잠시 손님이 되어볼까요.”
---
푸리나는 결국 식탁 위 독백을 포기했다.
대신 식탁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떤 탁자에서는 아이들에게 은꽃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어떤 탁자에서는 부상병에게 “오늘의 관객상”이라며 작은 리본을 달아주었다.
어떤 탁자에서는 레이튼이 낸 수수께끼를 맞히려다 세 번 틀렸다.
“왜 답이 양파야?!”
레이튼은 온화하게 말했다.
“겹겹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억울해!”
“수수께끼는 때때로 그렇습니다.”
하융은 옆에서 말했다.
“다른 가능성의 폐하는 감자를 답으로 제출했소.”
“그쪽의 나는 더 틀렸네!”
“그렇소.”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가신들이 앉은 작은 탁자에 돌아왔다.
그레이, 죠니, 레이튼, 하융.
이상하게도 이 탁자에는 왕관이 없었다.
대신 장부, 빈 접시, 수수께끼 카드, 회색빛 창호 조각, 그리고 죠니가 확보한 고기파이가 있었다.
푸리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힘들어!”
그레이가 바로 말했다.
“쉬십시오.”
“말하자마자?”
“예.”
죠니는 파이를 반으로 잘랐다.
“먹어.”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죠니가 나눠주는 거야?”
“네가 쓰러지면 다음 사고는 누가 수습해.”
“걱정이구나!”
“업무 리스크 관리야.”
“그것도 걱정이지!”
죠니는 부정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파이를 받아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그레이는 작게 안도했다.
레이튼은 차를 들었다.
“오늘 밤의 질문은 꽤 많았습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죽지 않은 가능성도 많았소.”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좋은 거야?”
“그렇소.”
하융은 천천히 말했다.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피곤한 일이오. 그러나 오늘 밤은 조금 덜 차갑구려.”
푸리나는 미소 지었다.
“그럼 다행이네.”
그레이는 장부를 펼쳤다.
“폐하.”
“응?”
“정산 보고입니다.”
푸리나가 굳었다.
죠니가 파이를 먹으며 말했다.
“올 게 왔네.”
그레이는 읽기 시작했다.
“은꽃 장식 일부가 영구 변성되었습니다. 무대 바닥 보수 필요. 좌측 통로는 벨라 폐하의 임시 결계로 강화되었으나, 원래 구조와 달라져 재점검 필요. 하프 소품 1개는 민다우가스 대공이 반출 예정입니다.”
푸리나가 말했다.
“그건 선물이야!”
“그러면 선물 항목으로 재분류하겠습니다.”
“응!”
“호흐마이스터의 갑주에 장식된 은꽃은 외교 선물인지, 의상 소품인지, 개인 장비인지 분류가 필요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전술적 꽃.”
그레이는 멈췄다.
“그 항목명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매우 정확한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레이튼 경까지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하융이 말했다.
“다른 가능성에서는 ‘작전상 은꽃’으로 기록되었소.”
그레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쪽이 조금 낫습니다.”
푸리나는 웃느라 파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레이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
“폐하께서 중간에 사용하신 무대용 물감의 정식 명칭이 없습니다.”
“아.”
“정식 명칭이 없으면 다음에 금지하거나 허가하기 어렵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금지하면 되잖아.”
푸리나가 외쳤다.
“죠니!”
“왜. 현실적인 의견이야.”
레이튼은 미소 지었다.
“사랑의 묘약은 부적절하고, 착각의 물감도 오해가 있겠군요.”
하융은 창밖을 보듯 말했다.
“왕관의 그림자를 비추는 빛.”
푸리나는 눈을 반짝였다.
“멋있어!”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시적입니다. 행정 문서에 부적합합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럼 ‘위험한 물감’.”
“너무 포괄적입니다.”
레이튼이 손가락을 들었다.
“‘자기 역할 인식 보조용 무대 물감’은 어떻습니까?”
그레이는 잠시 적어보았다.
“나쁘지 않습니다.”
푸리나는 시무룩해졌다.
“너무 재미없어.”
그레이는 단호했다.
“행정명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무대명은 네가 따로 붙여.”
푸리나가 바로 살아났다.
“좋아! 무대명은 《반짝반짝 왕관 뒤집기 물감》!”
그레이는 침묵했다.
레이튼은 웃음을 참았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미 그 이름 때문에 실패한 가능성이 셋 보이오.”
죠니는 파이를 씹으며 말했다.
“그럼 성공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푸리나는 손뼉을 쳤다.
“역시 죠니!”
“칭찬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들렸어!”
그레이는 장부에 결국 이렇게 적었다.
행정명: 자기 역할 인식 보조용 무대 물감.
폐하 임의명: 반짝반짝 왕관 뒤집기 물감.
사용 제한: 강력 권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강력 권고” 앞에 “매우”를 덧붙였다.
---
연회가 깊어지자, 군주들의 목소리도 조금 낮아졌다.
왕관은 여전히 곁에 있었다.
하지만 식탁 위의 손들은 잔을 들고, 빵을 찢고, 수프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왕관을 쓴 손도 왕관을 벗은 손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는 연회장 한쪽에서 조용히 말했다.
“왕관을 쓴 손님도, 왕관을 벗은 손님도, 식사가 식기 전에는 모두 같은 손님이지요.”
푸리나는 그 말을 들었다.
“좋은 말이네.”
죠니가 말했다.
“저 말은 네가 훔쳐 쓰지 마.”
“왜?”
“너무 많이 쓰면 또 무대 선언이 돼.”
푸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레이가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푸리나는 억울한 얼굴로 모두를 보았다.
“내 가신들이 너무 강해졌어.”
레이튼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좋은 군주에게는 좋은 제동장치가 필요하지요.”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동하지 못한 가능성은 대체로 오래가지 못하오.”
죠니는 마지막 파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먹어. 쉬는 것도 네 역할이라며.”
푸리나는 파이 조각을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한입 베어 물었다.
따뜻했다.
무대 위의 조명도, 왕관의 금속도, 숲의 질문도 아니었다.
그저 따뜻한 음식이었다.
푸리나는 문득, 오늘 밤 가장 어려운 배역이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받아먹는 것.
쉬는 것.
그녀는 작게 웃었다.
“좋아.”
그레이가 바로 물었다.
“무엇이 좋으십니까?”
푸리나는 파이를 들고 말했다.
“이번엔 그냥 맛이 좋아.”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인정.”
그 순간, 연회장 전체에 작은 웃음이 퍼졌다.
큰 박수도, 장엄한 선언도 아니었다.
그저 식탁 사이를 건너가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 한여름 밤의 끝에 아주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