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96여관◆zAR16hM8he(c14fec70)2026-05-13 (수) 10:41:29
《잘못 배달된 왕관의 편지》

4장.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봉투는 천천히 나왔다.

왕관 우편함의 작은 문틈에서, 마치 오래된 방 안쪽에 놓여 있던 편지가 누군가의 손에 밀려 나오는 것처럼.

수신자도 없었다.
발신자도 없었다.
봉랍도 없고, 문장도 거의 없었다.

다만 봉투 앞면에 한 줄.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그 문장을 본 순간, 무대 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아까까지의 편지들은 각자의 손으로 갔다.
민다우가스에게, 미하일라에게, 벨라와 소피아에게, 라이자와 호흐마이스터에게, 불가리아의 세 차르에게.

하지만 이 편지는 누구에게도 곧장 가지 않았다.

바닥 위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마치 어느 문 앞에 두어야 하는지 우편함도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푸리나는 종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종소리조차 너무 클 것 같았다.

죠니도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규칙문을 내려놓았다.

아카식은 기록장을 닫았다.

알토는 그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왕관 우편함은 아주 낮게 삐걱였다.

그리고 봉투는 천천히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것은 아레 마가트로이드 앞에서 멈췄다.

아레는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깊고, 검은 실처럼 조용했다.
놀라지도 않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올 줄 알았던 손님을 마주한 사람처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푸리나는 작게 말했다.

“아레.”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봉투를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열지 않았다.

손끝으로 봉투 가장자리를 한 번 쓸었다.

마치 그 안에 든 말이 너무 낡아, 함부로 열면 부서질까 조심하는 것처럼.

여관의 성좌가 낮게 말했다.

“문을 여는 것은 손님의 몫입니다.”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글씨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줄은 굵고, 어떤 줄은 희미했다.
어떤 문장은 끝까지 이어졌고, 어떤 문장은 중간에서 끊겼다.

아레는 편지를 읽었다.

소리 내지 않았다.

무대는 조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침묵 자체가 편지의 낭독처럼 느껴졌다.

푸리나는 편지 내용이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죠니가 옆에서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뜻 같았다.

그 작은 반응에 푸리나는 살짝 숨을 내쉬었다.

아레는 편지를 다 읽었다.

그리고 오래 침묵했다.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답장이 닿을 곳은 아니란다.”

그 말은 푸리나를 향한 것 같기도 했고, 편지를 향한 것 같기도 했다.

푸리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답장하지 않을 거야?”

아레는 편지를 접지 않은 채 들고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보내는 말은, 대개 돌아오지 못하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니 답장이라 부르기에는 어렵겠구나.”

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레는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읽어야지.”

그녀는 낮게 말했다.

“읽히지 못한 말도, 버려지면 두 번 죽는 법이니.”

그 말에 타마르 여왕이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플리카는 손을 모았다.

벨라는 짧게 시선을 내렸다.

미하일라는 얼굴을 바꾸지 않았지만, 손끝이 편지 한 장의 가장자리를 눌렀다.

아카식은 기록장을 손에 들고 있었으나, 열지 않았다.

알토가 작게 말했다.

“기록하지 않으십니까?”

아카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예.”

“저건 먼저 기록되기보다, 먼저 들려야 하는 말이야.”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아레는 펜을 들었다.

편지지 뒷면에 아주 천천히 답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씨는 고요했다.

흔들리지 않았지만, 차갑지도 않았다.

>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너희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돌아오라 부르지는 않겠다.

착각하지 말거라.
기억한다는 것은 너희를 다시 살아 있는 자처럼 부리는 일이 아니다.
잔향을 붙잡아 새 결말을 주겠다는 오만도 아니다.

다만 너희의 이름이 밥을 먹는 손들 사이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너희가 지나간 자리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도록,
남은 이들이 아주 천천히 숟가락을 들 수 있도록.

그 정도의 등을 밝히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레는 거기서 멈추었다.

푸리나는 그 문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아레의 손이 멈춘 순간, 이상하게도 무대 위의 모두가 알았다.

편지는 끝났다고.

아레는 답장을 접지 않았다.

왕관 우편함을 보았다.

푸리나가 물었다.

“넣을 거야?”

아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럼?”

“이 편지는 보내는 것이 아니란다.”

아레는 편지를 양손으로 들었다.

“맡기는 것이지.”

여관의 성좌가 고개를 숙였다.

“여관에 맡기시겠습니까?”

“그래.”

아레는 말했다.

“길이 끝난 이들의 말은, 더는 길을 갈 필요가 없을 때도 있으니.”

여관의 성좌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왕관 우편함 옆에 작은 서랍이 열렸다.

그 안은 어둡지 않았다.

여관의 가장 조용한 방처럼, 희미하고 따뜻했다.

아레는 편지를 그 안에 넣었다.

서랍은 닫히지 않았다.

그냥 편지가 쉴 수 있도록, 조금 열린 채로 남았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그녀는 예전이었다면, 이 장면을 극의 절정으로 만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조명을 낮추고, 음악을 깔고, 아레가 편지를 읽게 하고, 관객들이 숨을 멈추게 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종을 치지 않았다.
박수를 유도하지도 않았다.
대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했다.

“이 편지는…… 여기까지.”

그레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좋은 판단이네.”

푸리나는 이번에는 장난스럽게 웃지 않았다.

“응.”

아레는 푸리나를 보았다.

“좋은 생각이구나.”

그 한마디에 푸리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

왕관 우편함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다른 봉투가 아주 부드럽게 나왔다.

색은 황혼빛이었다.

봉투에는 포도나무 잎과 작은 십자가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글씨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 짐작했다.

봉투는 타마르 여왕의 앞에 멈췄다.

타마르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짐인가요.”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타마르는 봉투를 들었다.

그녀의 손짓은 느렸다.
마치 잠든 아이의 이불을 걷지 않으려 조심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가 아니라, 작은 빈 종이가 들어 있었다.

완전히 비어 있었다.

푸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

타마르는 빈 종이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없지는 않답니다.”

“글씨가 없는데?”

“이름을 부르지 못한 이의 편지는, 때로 이렇게 오지요.”

타마르는 빈 종이를 잔 옆에 놓았다.

“쓸 수 없는 이름.
아직 입술에 닿지 못한 이름.
부르면 무너질 것 같아, 오늘은 차마 부르지 못한 이름.”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이름들은 빈 종이로도 방을 얻는답니다.”

푸리나는 아레가 맡긴 편지가 들어간 작은 서랍을 보았다.

그리고 타마르의 빈 종이를 보았다.

두 사람은 닮았지만 같지 않았다.

아레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말을 여관에 맡겼다.
타마르는 아직 이름을 부르지 못한 이에게 빈 방을 내어주었다.

푸리나는 그 차이를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타마르는 펜을 들었다.

그러나 빈 종이에 글자를 쓰지 않았다.

대신 종이 아래쪽에 작은 선 하나를 그었다.

마치 이름을 적을 자리처럼.

“이만하면 충분하겠지요.”

요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젠가는 이름을 적으실 건가요?”

타마르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마도요.”

“언제가 될까요?”

“입술이 떨리지 않아도 되는 날일까요. 아니면 떨리더라도 부를 수 있는 날일까요.”

그녀는 요안나를 보며 웃었다.

“어느 쪽이든, 오늘은 아니랍니다.”

미하일라는 낮게 말했다.

“미루는 것인가?”

타마르는 그녀를 보았다.

“아닙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 아주 오래된 판결처럼 울렸다.

“기다리는 것이지요.”

미하일라는 더 묻지 않았다.

타마르는 빈 종이를 접지 않았다.

그녀는 왕관 우편함 옆에 있는 작은 서랍을 보았다.

“이 아이도 방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여관의 성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타마르는 빈 종이를 서랍 안에 넣었다.

아레의 편지 옆에.

글자가 가득한 편지와,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편지가 나란히 놓였다.

아카식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기록장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

“알토.”

“예.”

“저걸 기록하면, 빈 종이라고밖에 못 써.”

알토는 조용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빈 종이가 아닌 것 같아.”

“그 역시 그렇습니다.”

아카식은 웃지 않았다.

드물게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기록이 못 닿는 부분이 있네.”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기록이 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 기다려야 하는 부분일 겁니다.”

아카식은 그를 보았다.

“너 오늘도 좋은 말 하네.”

“오늘은 필요한 말이 많습니다.”

“응.”

아카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겠네.”

알토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예.”


---

푸리나는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대본 없는 편지극은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동이 될 줄 알았다.

민다우가스가 사랑 편지를 전략문서처럼 분석하고, 호흐마이스터가 감정 편지를 보고서로 분류하고, 스토얀카가 꽃 편지로 위험한 농담을 하는 정도의 소동.

그런데 왕관 우편함은 장난스럽지만 잔인하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필요한 문 앞에 편지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 문을 열지 말지는 받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푸리나는 작은 종을 만지작거렸다.

죠니가 옆으로 다가왔다.

“어렵지?”

푸리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연 극인데 네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것도 있고.”

그녀는 우편함을 보았다.

“내가 무대에 올리면 다들 조금은 괜찮아질 줄 알았거든. 박수도 받고, 웃기도 하고, 말 못 한 것도 말하고.”

죠니는 말없이 들었다.

푸리나는 조용히 말했다.

“근데 어떤 말은 무대에 올리면 안 되는 것 같아.”

죠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면 꽤 많이 배운 거지.”

푸리나는 그를 보았다.

“죠니가 오늘은 진짜 친절하네.”

“놀리지 마. 진심이야.”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나도 알아.”

그레이가 다가왔다.

“폐하.”

“응?”

“현재까지 행사 진행은 안정적입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예. 편지 공개 규칙도 대체로 지켜지고 있고, 즉흥 결투와 외교 분쟁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스토얀카 전하께서 한 차례 가능성을 언급하셨습니다만,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성공이지?”

그레이는 잠시 생각했다.

“예.”

푸리나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레이는 덧붙였다.

“다만 아직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푸리나의 웃음이 살짝 굳었다.

“그런 말은 꼭 해야 해?”

“필요합니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답네.”


---

왕관 우편함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가벼운 소리였다.

사각.

사각.

조금 망설이다가,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그 봉투는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새 종이처럼 보였다.

봉투에는 정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갑자기 맡겨진 자리에서도, 생명을 긍정할 수 있습니까?

봉투는 아스트리트 나흐트로제 앞에서 멈췄다.

아스트리트는 눈을 크게 떴다.

“저입니까?”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우편함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아스트리트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그레이를 보았다.

“이 편지는 행사 내용에 포함된 것입니까?”

죠니가 낮게 말했다.

“끝까지 확인하네.”

그레이는 진지하게 답했다.

“예. 왕관 우편함 권능에 의한 편지 전달은 행사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스트리트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읽겠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편지는 짧았다.

> 갑자기 맡겨진 자리에서도, 생명을 긍정할 수 있습니까?

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꽃을 다치지 않게 들 수 있습니까?
명령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 언젠가 명령을 내려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겠지요.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까?



아스트리트는 편지를 읽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리보니아 검우기사단의 신임 단장.

급한 편지에 속아 불려왔다가, 갑작스레 지휘관이 된 사람.
시원성좌의 별의 간택자.
강하지만, 그 자리의 무게까지 갑자기 강해진 것은 아닌 사람.

그녀는 작게 말했다.

“이건…… 제게 온 편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답할 수는 있겠지요.”

아스트리트는 그를 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가 있었다.

푸리나는 이번에도 재촉하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잠시 뒤, 천천히 대답했다.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 말은 솔직했다.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기사단장다운 대답이었다.

“갑자기 맡겨진 자리에 서서, 제가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요.”

그녀는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생명을 긍정한다는 말이 검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저는 배워야겠지요.”

아스트리트는 펜을 들었다.

답장은 단정했다.

>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이, 멈추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검으로 지키는 생명과, 차로 진정시키는 생명과, 편지를 열지 말지 기다려주는 생명은 다르지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 서툽니다.
하지만 한 걸음 나아가겠습니다.

갑자기 맡겨진 자리라 해도, 오늘 제가 서 있는 곳에서 생명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스트리트는 답장을 접었다.

그런데 우편함에 넣기 전, 푸리나를 보았다.

“푸리나 폐하.”

“응?”

“다음 초대장에도 행사 내용을 정확히 적어주십시오.”

푸리나는 순간 굳었다.

죠니가 웃음을 참았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트는 진지했다.

“갑자기 맡겨진 자리에서도 나아가겠다고 했지만, 갑자기 변경된 행사 내용까지 긍정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푸리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꼭 정확히 쓸게!”

아스트리트는 만족한 듯 답장을 우편함에 넣었다.

왕관 우편함은 편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작은 소리를 냈다.

딸깍.

그 소리는 어딘가 문이 잠기기보다, 문이 제자리에 맞게 닫힌 소리에 가까웠다.


---

푸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여기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

죠니가 말했다.

“지금 그런 말 하면 보통 하나 더 나오지 않아?”

“죠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편함이 다시 움직였다.

푸리나는 죠니를 노려보았다.

“봐! 네가 말해서!”

“내 탓으로 돌리지 마.”

이번 봉투는 이상했다.

아주 평범한 갈색 봉투였다.

장식도 없었다.
왕관 문양도 없었다.
향도 없었다.

그런데 봉투는 누구에게도 곧장 가지 않고, 무대 중앙에 멈췄다.

푸리나 앞에서.

푸리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

봉투 겉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극을 여는 이에게.

그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폐하께 온 것으로 보입니다.”

죠니는 팔짱을 꼈다.

“읽을 거야?”

푸리나는 봉투를 들었다.

손 안에서 가볍지만,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녀는 모두를 보았다.

“읽어도 될까?”

그레이는 말했다.

“폐하 본인에게 도착한 편지입니다. 개봉 여부는 폐하의 판단입니다.”

죠니는 말했다.

“읽기 싫으면 안 읽어도 돼.”

푸리나는 봉투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읽을게.”

그녀는 봉투를 열었다.

편지 안에는 짧은 문장들이 있었다.

> 극을 여는 이에게.

모든 손님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말이 박수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침묵이 실패한 대사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무대를 여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조명 아래에서야 웃을 수 있고,
누군가는 객석에 앉아 있어도 무대가 열렸다는 사실만으로 숨을 쉽니다.

그러니 계속 여십시오.
다만 문을 열었다면, 들어오지 않는 손님도 기다리십시오.



푸리나는 편지를 다 읽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죠니도, 그레이도, 여관의 성좌도 기다렸다.

푸리나는 편지를 접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조금 웃었다.

“누가 쓴 건지 모르겠네.”

죠니가 말했다.

“네가 필요한 말이었겠지.”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녀는 편지를 품에 넣었다.

그레이가 물었다.

“보관하시겠습니까?”

“응.”

푸리나는 말했다.

“이건 내가 보관할게.”

아카식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기록하지 않았다.

알토가 물었다.

“이번 것도 기다립니까?”

아카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건 이미 도착했어.”

“그럼 기록합니까?”

“아니.”

아카식은 작게 웃었다.

“도착한 편지는 받은 사람이 들고 있으면 돼.”

알토는 고개를 숙였다.

“동의합니다.”

왕관 우편함은 아주 조용해졌다.

정말로 끝난 것처럼.

하지만 여관의 성좌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우편함 위에 손을 얹었다.

“마지막 편지가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푸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또?”

죠니가 낮게 말했다.

“마지막이라잖아.”

그레이는 규칙문을 다시 확인했다.

하융은 창호를 열었다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이 가능성은…… 조금 이상하오.”

푸리나가 물었다.

“나쁜 거야?”

하융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다만 받는 이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소.”

왕관 우편함이 열렸다.

마지막 봉투가 나왔다.

그 봉투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다만 앞면에 한 문장.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봉투는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다.

모두가 그 봉투를 보았다.

미하일라가 말없이 편지를 보았다.

요안나도.

민다우가스도.

벨라도.

라이자와 호흐마이스터도.

불가리아의 세 차르도.

아레와 타마르도.

아스트리트도.

푸리나도.

죠니도.

그레이도.

아카식도.

알토도.

그 편지는 누구에게나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다.

여관의 성좌는 조용히 말했다.

“이 편지는 오늘 밤, 이곳에 머물러야겠군요.”

푸리나는 봉투를 보았다.

“분실물 보관소에?”

“아니요.”

여관의 성좌는 부드럽게 웃었다.

“편지라면 우편함에 남겨두는 편이 좋겠지요.”

왕관 우편함의 옆에 작은 틈이 열렸다.

마지막 봉투는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기 전, 푸리나는 봉투의 문장을 한 번 더 보았다.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그리고 문은 닫혔다.

편지극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알았다.

모든 편지가 오늘 도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최대 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