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1903 향림당 참치어장 지부 (145)

#0여관◆zAR16hM8he(75f5da9d)2026-05-08 (금) 01:04:16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에는, 군사 회의실보다 더 자주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대회의실도, 성벽 위도, 기사단 훈련장도 아니었다. 왕궁 뒤뜰의 작은 분수대였다.

“좋아!”

푸리나 헤툼은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 올라섰다.

그레이는 들고 있던 장부를 떨어뜨릴 뻔했다.

“군주님.”

“즉흥극!”

“군주님.”

“오늘의 주제는—”

“군주님.”

그레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마디에는 성벽의 쇠문이 닫히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멈췄다.

“왜?!”

“분수대는 무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잖아. 관객이 있어. 물도 있어. 햇빛도 완벽해. 그러면 무대지!”

“무대 하중 계산서가 없습니다.”

푸리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레이. 인류의 예술사는 하중 계산서보다 오래되었어.”

그레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무너진 무대 아래에 깔리는 사람은 보통 예술사가 아닙니다.”

분수대 아래에서 죠니 죠스타가 웃었다.

그는 말고삐를 한 손에 쥔 채, 성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은 분수대 옆에서 물 냄새를 맡고 있었고, 죠니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 말이 맞네. 떨어지면 아프긴 하지.”

“죠니!”

푸리나가 항의했다.

“너는 이 찬란한 순간을 이해해줄 줄 알았는데!”

죠니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해해. 지금 올라가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근데 떨어지는 것도 지금이야.”

푸리나는 입을 삐죽였다.

그때 레이튼이 뒤뜰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찻잔이 들려 있었고, 마치 전쟁 소식이 아니라 오후 산책을 들은 사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아주 흥미로운 문제로군요.”

그레이가 그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레이튼 님. 제발 수수께끼로 만들지 말아주십시오.”

“그레이 양, 모든 문제는 수수께끼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지요.”

레이튼은 푸리나와 분수대, 그레이의 장부, 죠니의 말, 그리고 지나가던 시종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군주님께서는 분수대를 무대라 부르십니다. 그레이 양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입니다. 무대란 무엇일까요?”

푸리나가 즉시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

죠니가 말했다.

“발 디딜 데.”

그레이가 말했다.

“안전 검사가 끝난 구조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세 답 모두 틀리지 않았군요.”

“결론은요?”

그레이가 물었다.

레이튼은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므로 이 분수대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별입니다.”

“레이튼 님.”

“아직 무대도 아니고, 무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올바른 질문은 이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이곳이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않는 무대가 될 수 있는가.’”

푸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그레이는 그 반짝임을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눈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뒤편 처마 밑에 서 있던 하융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융은 분수대 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물결에 부서지며 수십 개의 작은 창문처럼 흔들렸다.

“내 눈에는 방금 여러 가능성이 보였소. 군주님께서 분수대에서 미끄러지는 세계. 그레이 양이 그 전에 붙잡는 세계. 죠니 경이 웃다가 물을 뒤집어쓰는 세계. 레이튼 님이 그 상황조차 수수께끼로 만드는 세계.”

죠니가 말했다.

“마지막 건 가능성이 아니라 확정 같은데.”

레이튼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그중 하나가 조금 밝았소.”

푸리나는 분수대 위에서 몸을 낮췄다.

“어떤 가능성?”

“분수대 위가 아니라, 분수대 아래에 작은 무대를 놓는 가능성이오. 군주님은 그 위에 서고, 아이들은 물가에 앉고, 그레이 양은 기둥을 확인하고, 죠니 경은 말로 길을 막아 군중이 밀리지 않게 하고, 레이튼 님은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오.”

“그리고 나는?”

푸리나가 물었다.

하융은 잠시 생각했다.

“군주님은 웃고 있었소.”

푸리나는 그 말을 듣고 분수대 위에서 내려왔다.

그레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군주님?”

“좋아. 분수대 위는 포기.”

그레이는 아주 작게 안도했다.

“대신 분수대 아래에 무대를 만들자!”

“역시나.”

그레이는 장부를 다시 펼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작은 무대라면 가능합니다. 목재는 창고에 있고, 인부들은 오후에 쉴 예정이니 강제로 부르면 안 됩니다. 자원자를 모집하고, 관객 동선은 죠니 경께 부탁하고, 응급 인력은 두 명 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주님.”

“응?”

“분수대 위에는 올라가지 마십시오.”

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다시 말했다.

“군주님.”

“……알겠어.”

“‘아마도’는 안 됩니다.”

“알겠어!”

죠니가 말고삐를 잡아끌며 웃었다.

“그럼 난 길 막는 역할인가.”

“정확히는 군중 통제입니다.”

“뭐, 비슷하네. 말이 길을 막으면 사람들이 돌아가겠지. 멀리 돌아가는 길도 길이고.”

레이튼은 박수를 한 번 쳤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준비하지요. 첫 문제는 이겁니다. ‘왕이 분수대에 올라가지 않고도 모두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방법은?’”

푸리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왕이라서!”

“틀리지는 않지만, 더 우아한 답이 있습니다.”

“뭔데?”

레이튼은 웃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고개를 들 만큼 즐거운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푸리나는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바로 웃으며 다음 장난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분수대 주변을 보았다. 물을 길어 가던 하녀, 수레를 밀던 하인, 멀리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병사들, 창가에서 몰래 구경하던 아이들.

그들 모두가 조금씩 웃고 있었다.

아직 몽골의 군세는 동쪽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길은 불안했고, 사신들은 나쁜 소식을 가져왔으며, 성벽 위 병사들의 잠은 짧았다.

그래도 지금, 왕궁 뒤뜰의 분수대 앞에서,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푸리나는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좋아. 오늘 목표!”

그레이가 즉시 물었다.

“또 무엇입니까?”

푸리나는 활짝 웃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한 번씩 웃기!”

그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부 한쪽에 짧게 적었다.

뒤뜰 소규모 공연. 목적: 사기 진작. 안전 인력 배치 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망설이다가 한 줄을 더 적었다.

웃음도 필요함.

하융은 그 글자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잠시 다른 가능성들이 스쳤다. 웃지 않는 왕궁. 침묵하는 병사들. 장부에 사망자 수만 늘어나는 나라. 분수대가 말라붙은 세계.

그러나 그는 그 가능성들을 오래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이 현실에서는, 푸리나가 무대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레이는 기둥을 확인하고 있었다.
레이튼은 아이들에게 낼 수수께끼를 고르고 있었다.
죠니는 말에게 “오늘은 얌전히 있어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하융은 조용히 말했다.

“이 현실을 선택한 보람이 있구려.”

푸리나가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어?”

하융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죠니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못하네.”

레이튼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일 수도 있지요.”

그레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건 나중에 붙이셔도 됩니다. 우선 기둥부터 세워야 합니다.”

푸리나는 크게 웃었다.

“좋아! 그럼 막을 올리자!”

“아직 아닙니다.”

“왜?!”

“무대가 아직 없습니다.”

뒤뜰에 웃음이 퍼졌다.

그 웃음은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몽골의 정찰병에게 들리지도 않았고, 역사서에 적히지도 않았다.
어떤 성좌도 그 장면을 계시로 새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왕궁 뒤뜰에는 작은 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레이가 확인한 기둥 위에 서 있었고, 죠니가 지킨 길 옆에 놓였으며, 레이튼의 수수께끼와 하융의 조용한 시선 사이에서, 푸리나가 두 팔을 벌리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자, 그대들! 오늘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야!”

아이 하나가 물었다.

“그럼 누구예요?”

푸리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싶은 사람 전부!”

그레이는 뒤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97여관◆zAR16hM8he(c14fec70)2026-05-13 (수) 10:43:59
《잘못 배달된 왕관의 편지》

5장.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마지막 봉투가 왕관 우편함 안쪽으로 사라진 뒤, 무대는 한동안 조용했다.

그것은 끝난 뒤의 조용함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는데, 아무도 먼저 손대지 못하는 조용함이었다.

푸리나는 우편함을 바라보았다.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그 문장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봉투는 사라졌는데도, 이상하게 모두가 그 글자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죠니는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저건 좀 곤란하네.”

푸리나가 그를 보았다.

“왜?”

“다들 찔리잖아.”

그 말에 몇몇 사람이 아주 미세하게 반응했다.

미하일라는 편지를 손끝으로 눌렀다.
요안나는 자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벨라는 소피아가 쓴 답장을 떠올리는 듯 눈을 낮췄다.
민다우가스는 웃지 않았다.
호흐마이스터는 보고서처럼 접힌 자기 편지를 조금 더 단단히 쥐었다.
라이자는 은꽃 장식이 붙은 봉투를 양손으로 감쌌다.
레플리카는 고개를 숙였고, 알렉산드리나는 조금 먼 곳을 보았다.
스토얀카는 입가에 웃음을 걸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평소보다 얇았다.
아레는 조용했다.
타마르는 잔을 돌리지 않았다.
아스트리트는 등을 곧게 세웠다.

그레이는 규칙문을 보다가 천천히 덮었다.

“이 편지는 특정 수신자가 없으므로, 현재 상태에서는 개봉하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레이는 조금 놀란 듯했다.

푸리나가 바로 덧붙였다.

“왜 그렇게 봐?”

“폐하께서 즉시 열어보자고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도 배운다니까!”

죠니는 낮게 웃었다.

“오늘은 꽤 많이 배웠네.”

푸리나는 살짝 우쭐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우편함을 보았다.

“그런데…… 그러면 저 편지는 어떻게 해?”

여관의 성좌는 왕관 우편함 옆에 서 있었다.

“머물게 하면 됩니다.”

“계속?”

“답장을 쓰지 못한 이가, 언젠가 쓸 수 있을 때까지요.”

레이튼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 이 우편함은 무대 장치가 아니라 보관소가 되는군요.”

여관의 성좌는 미소 지었다.

“여관의 우편함이니까요. 보내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가끔은 맡아두기도 하지요.”

아카식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기울였다.

“편지를 기록하지 않고 맡아둔다라.”

알토가 말했다.

“기록과 보관은 다릅니다.”

“응. 오늘 좀 많이 배워.”

“좋은 일입니다.”

아카식은 우편함을 보며 말했다.

“나 같으면 남기려고 했겠지. 언제 누가 썼고, 어디로 가야 했고, 왜 가지 못했는지.”

알토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아카식은 손에 쥔 빈 편지지를 만지작거렸다.

“근데 저건 아직 그런 문장이 아니네. 아직 문장이 되기 전의 무언가야.”

알토는 낮게 답했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아카식은 살짝 웃었다.

“알토가 계속 기다리라고 하네.”

“오늘은 기다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맞아.”

아카식은 기록장을 덮었다.

“그럼 기다릴게.”

그 말에 알토는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

푸리나는 종을 들었다.

편지극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닫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지막에 모두가 편지를 하나씩 읽고, 우편함이 빛나고, 관객이 박수를 치고, 푸리나가 멋진 대사를 하고 끝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레의 편지는 서랍에 맡겨졌다.
타마르의 빈 종이는 이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트리트의 답장은 앞으로 걸어가기 위한 말이 되었고, 푸리나의 편지는 품 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봉투는 열리지 않은 채 우편함 안에 남았다.

닫아야 하지만, 끝내서는 안 되는 밤이었다.

푸리나는 종을 보다가 내려놓았다.

죠니가 그걸 보았다.

“안 쳐?”

“응.”

“왜?”

“종소리가 너무 클 것 같아.”

죠니는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치지 마.”

푸리나는 작게 웃었다.

“죠니가 안 하라고 해서 안 하는 건 아니야.”

“알아.”

“정말?”

“응. 네가 스스로 판단한 거잖아.”

푸리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더니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렇지! 내가 판단한 거지!”

죠니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옆에서 차분히 말했다.

“폐하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현재 분위기상 과도한 종소리나 박수 유도는 부적절합니다.”

푸리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레이도?”

“예.”

“그럼 나 진짜 잘한 거네?”

“이번 판단은 그렇습니다.”

“이번은?”

“모든 판단을 일괄 승인할 수는 없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그레이답네.”

푸리나는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녀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늘의 편지극은…… 여기서 닫을게.”

사람들이 그녀를 보았다.

푸리나는 이번에는 국자도, 왕관도, 종도 들지 않았다.

빈손이었다.

“처음에는 소동극으로 만들 생각이었어. 잘못 간 편지 때문에 다들 당황하고, 웃고, 조금 창피해지고, 마지막엔 ‘그래도 재미있었네!’ 하고 끝내려고 했거든.”

스토얀카가 웃었다.

“그쪽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푸리나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라졌어.”

그녀는 왕관 우편함을 보았다.

“편지는 받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더 이상 무대 소품이 아니더라.”

아카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푸리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읽힌 편지도 있고, 읽히지 않은 편지도 있고, 답장한 편지도 있고, 맡겨진 편지도 있어. 그리고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편지도 있고.”

그녀는 우편함 안쪽을 보았다.

“그 편지는 열지 않을게.”

조용한 동의가 무대에 퍼졌다.

미하일라가 낮게 말했다.

“좋은 결정이다.”

푸리나는 놀라 그녀를 보았다.

“미하일라가 칭찬했어.”

미하일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그 말은 취소하고 싶어지는군.”

요안나가 웃음을 참았다.

죠니가 낮게 말했다.

“칭찬 받으면 그냥 받으라니까.”

푸리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미하일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

여관의 성좌가 앞으로 나왔다.

왕관 우편함 위에 손을 얹자, 우편함의 작은 왕관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빛은 점점 작아졌다.

권능이 거두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무 상자는 그대로 남았다.

다만 아까까지 편지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던 길의 감각이 사라지고, 이제는 평범한 우편함처럼 보였다.

아니, 완전히 평범하지는 않았다.

여관에 오래 있던 물건처럼, 어딘가 따뜻했다.

여관의 성좌는 말했다.

“오늘 밤 이 우편함은 길을 잃은 편지를 잠시 안내했습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편지는 손님과 같습니다. 방 앞까지 안내할 수는 있어도, 문을 여는 것은 손님의 몫이지요.”

아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마르는 잔을 들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여관의 성좌는 말을 이었다.

“어떤 편지는 읽혔습니다.
어떤 편지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어떤 편지는 여관에 맡겨졌고,
어떤 편지는 아직 열리지 않은 채 남았습니다.”

그는 우편함의 옆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모든 것이 실패는 아닙니다.”

푸리나는 그 말을 오래 들었다.

“말이 길을 잃었다고 해서, 언제나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말은 길을 잃은 덕분에, 오래 닫혀 있던 문 앞에 도착하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 우편함 안에서 아주 작게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딸랑.

푸리나가 치지 않은 종소리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정확했다.

커튼콜을 알리기에는 충분하고, 침묵을 깨기에는 너무 크지 않은 소리.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여관의 성좌는 웃었다.

“우편함도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무대 소품치고는 예의 바르네.”

그레이는 정정하려다가 멈췄다.

소품이 아니었으니까.

푸리나는 우편함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우편함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이 아주 작게 한 번 흔들렸다.


---

커튼콜은 없었다.

적어도 평소처럼 배우들이 줄지어 서고, 관객이 박수를 치고, 푸리나가 과장되게 인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대신 사람들은 각자 자기 편지를 챙겼다.

민다우가스는 자기 품에 넣은 편지를 한 번 더 눌렀다.

아스테르다스가 물었다.

“증거 보관?”

민다우가스는 웃었다.

“그렇다.”

“두 번째로 읽을 거지?”

“증거는 재검토해야 하니까.”

아스테르다스는 웃었다.

“그것도 좋은 말이네.”

미하일라는 사과문을 접어 작은 봉투에 넣었다.

요안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하일라가 먼저 말했다.

“짐은 이 편지를 판단하지 않았다.”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류했을 뿐이다.”

“보류도 때로는 시작이에요.”

미하일라는 그녀를 보았다.

“그대는 오늘 그 말을 두 번 했다.”

요안나는 웃었다.

“중요하니까요.”

미하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편지를 버리지 않았다.

벨라는 소피아의 답장이 우편함에 사라진 자리를 보았다.

소피아는 작게 물었다.

“도착했을까요?”

벨라는 짧게 말했다.

“도착하지 않아도 된다.”

소피아는 놀라 그녀를 보았다.

벨라는 이어 말했다.

“쓴 손이 배웠다.”

소피아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편지는…….”

“언젠가 닿으면 좋다. 하지만 쓰는 동안 네가 알게 된 것도 있다.”

소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자는 은꽃 편지를 가슴에 꼭 안고 있었다.

호흐마이스터는 자기 보급 검토 편지를 반듯하게 접었다.

라이자가 물었다.

“보존?”

“예.”

“내 편지도?”

호흐마이스터는 아주 잠시 망설였다.

“함께 보존하겠습니다.”

라이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건 진짜 고백 같은데.”

호흐마이스터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분류가 어렵습니다.”

죠니가 지나가며 말했다.

“분류가 어려우면 대체로 맞아.”

호흐마이스터는 진지하게 물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죠니는 대답하지 않고 지나갔다.

라이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각자 편지를 챙겼다.

레플리카의 답장은 이미 돌아갔다.
알렉산드리나의 질문은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았다.
스토얀카는 자기 답장을 보내놓고도 묘하게 즐거운 얼굴이었다.

레플리카가 말했다.

“오늘은 잘 참았습니다.”

스토얀카가 웃었다.

“칭찬이야?”

“예.”

스토얀카는 잠시 멈췄다.

“너한테 칭찬 들으니까 좀 이상하네.”

알렉산드리나는 말했다.

“오늘은 이상한 밤입니다. 받아들이시죠.”

스토얀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오늘은 받아들여줄게.”

아레는 여관의 작은 서랍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돌아오지 못한 이들에게 맡겨진 편지가 있었다.

타마르의 빈 종이도 함께 있었다.

타마르는 아레에게 말했다.

“나란히 두어도 괜찮겠지요?”

아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글자가 있는 침묵과, 아직 글자가 되지 못한 침묵이니.”

타마르는 느긋하게 웃었다.

“좋은 표현이랍니다.”

아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거절이 아니었다.

아스트리트는 자기 답장이 사라진 우편함을 보고 있었다.

푸리나가 옆에서 물었다.

“괜찮아?”

“예.”

아스트리트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만 다음 행사에서도 초대장 정확성은 유지해주십시오.”

푸리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레이가 뒤에서 말했다.

“제가 검수하겠습니다.”

아스트리트는 깊이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

아카식은 끝까지 기록장을 열지 않았다.

푸리나는 그게 조금 신기했다.

“아카식, 오늘 별로 안 적었네.”

아카식은 웃었다.

“그렇지?”

“괜찮아?”

“응. 이상하게 괜찮아.”

그는 우편함을 보았다.

“편지라는 건 재밌네. 기록하고 싶게 만들지만, 동시에 기록하면 안 될 것 같게 만들어.”

알토는 옆에서 말했다.

“그건 편지가 가진 사적 성격 때문입니다.”

아카식은 알토를 보았다.

“알토.”

“예.”

“가끔 네 설명은 맞는데 재미없어.”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근데 오늘은 그게 좋아.”

알토는 잠시 침묵했다.

아카식은 말했다.

“재미없는 설명이 사람을 지켜줄 때도 있네.”

알토는 낮게 답했다.

“기록교단에는 그런 설명이 많습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구나.”

알토는 그 말을 바로 받지 못했다.

드물게, 아주 드물게.

그는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아카식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손에 쥔 작은 편지를 알토에게 내밀었다.

알토는 그것을 보았다.

“저에게 쓴 편지입니까?”

“응.”

“지금 읽어도 됩니까?”

아카식은 잠시 생각했다.

“읽고 싶으면.”

알토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열지 않았다.

아카식이 눈을 깜빡였다.

“안 읽어?”

알토는 편지를 품에 넣었다.

“나중에 읽겠습니다.”

“왜?”

“받은 편지는 제 것이니까요.”

아카식은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웃었다.

“와. 알토가 이겼다.”

“승부가 아닙니다.”

“응. 그래서 더 졌어.”

알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아주 희미한 웃음이 있었다.

푸리나는 그 장면을 보며 속삭였다.

“저건 기록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죠니가 옆에서 말했다.

“하지 마.”

“응.”

푸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알토 거니까.”

죠니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진짜 배웠네.”

푸리나는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었다.


---

그레이는 마지막으로 행사 종료 보고를 했다.

“편지극 종료. 즉흥 결투 없음. 외교 분쟁 없음. 즉흥 약혼 없음. 즉흥 개전 없음. 즉흥 종교개혁 없음. 위험 꽃 반입 없음. 번개 조리 없음.”

라플리가 투덜거렸다.

“마지막은 왜 또 들어가?”

“확인 사항입니다.”

스토얀카가 말했다.

“위험 꽃도 너무 자주 언급되네.”

“확인 사항입니다.”

푸리나는 박수를 쳤다.

“대성공이네!”

그레이는 장부를 보았다.

“부분적으로는 예.”

“부분적으로?”

“왕관 우편함이 행사 내용을 다소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여관의 성좌가 공손히 말했다.

“송구합니다.”

그레이는 순간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통제 불가능한 위험 요소라기보다는…….”

죠니가 낮게 말했다.

“그레이가 성좌한테 행정 피드백을 하려다 멈췄네.”

푸리나는 웃음을 참았다.

그레이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결론적으로, 우편함 권능은 행사 목적에 부합했습니다. 다만 향후 유사 행사에서는 편지 보관 절차와 비공개 편지 처리 기준을 사전에 더 명확히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관의 성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입니다.”

그레이는 조금 뿌듯해 보였다.

푸리나는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레이, 성좌한테 칭찬받았어.”

“업무상 피드백입니다.”

죠니가 말했다.

“기뻤네.”

“아닙니다.”

하융은 창호를 보고 말했다.

“기뻐한 가능성은 여럿 있소.”

그레이는 조용히 하융을 보았다.

“하융 경.”

“예.”

“그 가능성은 비공개로 부탁드립니다.”

하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

마지막으로 푸리나는 왕관 우편함 앞에 섰다.

우편함은 이제 평범한 나무 상자처럼 조용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 봉투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푸리나는 작은 종이를 가져왔다.

그레이가 살짝 경계했다.

“폐하, 어떤 문구입니까?”

“안내문.”

“검토하겠습니다.”

푸리나는 종이에 천천히 썼다.

답장을 쓰지 못했다면,
오늘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레이는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합니다.”

푸리나는 조금 더 썼다.

다만 언젠가 쓰고 싶어지면,
이 우편함은 밤마다 열려 있습니다.

죠니가 말했다.

“좋네.”

여관의 성좌도 미소 지었다.

“좋은 안내문입니다.”

푸리나는 마지막 줄을 적었다.

편지는 직원에게 맡겨주세요.
무대 위에서 읽을지는, 당신이 정합니다.

그레이는 한참 그 문구를 보았다.

“수정할 부분 없습니다.”

푸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예.”

“진짜로?”

“예.”

“하나도?”

그레이는 아주 잠시 생각했다.

“쉼표 정도는 조정할 수 있지만, 의미상 수정은 필요 없습니다.”

푸리나는 환하게 웃었다.

“됐다!”

죠니가 말했다.

“축하해, 여왕님. 드디어 안내문을 통과했네.”

“그거 엄청 기쁜데 조금 이상해!”

아스트리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확한 안내문은 중요합니다.”

라플리도 중얼거렸다.

“번개 조리 없음 같은 쓸데없는 안내문보다 낫네.”

그레이가 즉시 말했다.

“그 안내문도 필요합니다.”

라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리나는 안내문을 우편함 옆에 붙였다.

여관의 성좌는 작은 등불 하나를 그 옆에 걸었다.

그 등불은 무대 조명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편지를 쓰려는 사람이 밤에 길을 잃지 않을 만큼은 밝았다.

푸리나는 그 등불을 보며 말했다.

“이제 진짜 끝.”

죠니가 물었다.

“아쉬워?”

“응.”

“그럼 좋은 끝이네.”

푸리나는 여관의 성좌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웃었다.

“그렇지.”

그녀는 무대를 내려왔다.

아무도 박수를 강요받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손이 조용히 맞닿았다.

짝.
짝.
짝.

작은 박수였다.

아레는 박수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였다.
타마르는 잔을 들었다.
미하일라는 아주 절제된 박수를 보냈고, 요안나는 그 옆에서 조금 더 밝게 손뼉을 쳤다.
민다우가스는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고, 벨라는 짧고 단단하게 박수를 쳤다.
라이자는 환하게 박수쳤고, 호흐마이스터는 정확한 간격으로 박수를 쳤다.
불가리아의 세 차르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박수를 쳤다.
아스트리트는 조금 늦게, 그러나 정중하게 박수를 보냈다.

아카식은 박수치지 않았다.

대신 알토를 보았다.

알토도 그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손끝을 한 번 마주쳤다.

그것도 박수였다.

그 밤, 왕관 우편함은 무대 소품에서 여관의 작은 가구가 되었다.

어떤 편지는 도착했고,
어떤 편지는 돌아갔고,
어떤 편지는 맡겨졌고,
어떤 편지는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편지는 아직 남았다.

아직 답장을 쓰지 못한 이에게.

그 봉투는 어둠 속에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여관의 밤은 길었고,
답장은 언제나 오늘 써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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