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위 실레시아 『기록자』아카식 레코드

#2096 대공위 실레시아 『기록자』아카식 레코드 (68)

#0기록자의 개인적 저장소(아카식 레코드)(4oQwT7PwhK)2025-03-07 (금) 12:09:50
<시조였던 농부 피아스트의 아들이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세례를 받고>
<그 아들이 이후 폴란드의 고공이 되었으니>
<그것이 왕가의 시작이 되었다>
<세례받은 아들의 자손은 이후 폴란드를 지배했습니다>
<영광스러운 나날이었으나 동쪽에서 재앙이 가문에 닥쳤습니다>
<동쪽에서 닥친 몽골의 군세가 레그니차에서 고공 헨리크2세를 죽였습니다>
<공국의 중흥을 일구어가던 그의 죽음은 가문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었고...>
 <가문의 중심지인 실레시아는 불타고 황폐화되었으니...>
<기사와 가신들도 흩어져 무너진 성에는 적막만이 감돕니다>

<우리의 알토는 고공 헨리크2세의 장남의 위치로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전사하고 가문의 근거지인 실레시아는 황폐화되었으며>
<젊어보이지만 대공위시점에서 어느덧 40세에 다다른 완숙한 영주입니다>


<할아버지 헨리1세와 아버지 헨리2세의 치세동안 쌓아올린 실레시아의 번영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가문과 폴란드를 가호하던 기록의 성역은 무너졌습니다>
<이제 그의 해야할 일은 명백합니다>
<황폐화된 실레시아를 재건하고 무너진 성역을 다시 세워>
<가문을 다시 일으켜야만합니다>


<피아스트 왕가 가문유산 [무너진 기록의 성역]>
 -피아스트왕가의 시조를 축복하고 세례한 손님이 아카식이라는 배경설정을 통해 만들어진 가문유산입니다.
 -피아스트왕가와 아카식교단은 오랫동안 함꼐 폴란드를 다스렸고, 그리하여 가문의 영지는 곧 기록의 지상성역이었습니다.
 -몽골의 침공에 가문과 교단은 패배하고 성역은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무너졌다해도 성역입니다.

[무너진 기록의 성역]
-피아스트 가문의 영지에서는 알토의 소환 이외에 아카식분령이 복수존재할 수 있습니다.
-존재가능한 분령의 숫자는 영지의 숫자에 따라서 늘어납니다. (영지당1체)
-성역속에서 아카식분령은 알토의 영향없이 단독으로 존재합니다.
-이들은 정예 중상이며 죽어도 다음턴에 다시 스폰됩니다.
-성역내에서 기록의 신술의 소모가 감소하고 보정을 얻습니다.
#67『기록자』 아카식 레코드◆x0ZHn58Zau(3d0e9fc0)2026-05-10 (일) 10:59:18
단편
황혼 아래, 기록은 문을 두드린다
— 아르파드 소피아 베아트리체 1인칭

나는 왕관을 버린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벨라 4세의 장녀.
아르파드의 피.
언젠가는 왕관을 계승받을 예정이었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나는 오늘도, 냄비를 젓고 있었다.

구리 냄비 안에서는 달빛버섯과 회색민들레의 수액이 끓고 있었다. 거품은 세 번 올라오고, 네 번째에 꺼진다. 그 타이밍에 소금을 넣으면 감기약이 되고, 설탕을 넣으면 수면제가 되며, 모래를 넣으면—
음.
모래를 넣으면 왜인지 창문이 녹는다.

그건 두 번 실험해 보았다.
한 번은 실수였고, 두 번째는 검증이었다.
세 번째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지성이고, 네 번째를 고민하는 것이 나의 연금술사로서의 품격이다.

“좋아. 이번에는 창문을 녹이지 않았어.”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냄비 아래 불을 줄였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왕태녀의 점포치고는 초라하고, 연금술사의 공방치고는 정리가 되어 있었으며, 시골 약방치고는 지나치게 위험한 냄새가 나는 장소.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소피아의 연금술점.
포션, 약, 향초, 가끔은 기적.
왕권 관련 상담 사절.

내가 직접 쓴 문구다.
마지막 줄 때문에 손님이 줄었지만, 귀찮은 손님도 줄었으니 전체적으로는 흑자라고 볼 수 있다. 장부상으로는 적자지만, 정신 건강상으로는 흑자다. 장사기초가 D랭크인 사람에게는 꽤 훌륭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주걱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폴란드 쪽에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묘했다.
겨울의 차가움이 아니고, 봄의 축축함도 아니며, 여름의 먼지도 아니다.
말하자면—
책장을 넘길 때 손끝에 닿는 얇은 종이의 감촉.
잉크가 마르기 전의 냄새.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문장의 체온.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바람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은, 다소 귀찮게도 보통 사람이 보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본다.

황금의 눈.

누가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다지 황금을 좋아하지 않는다. 황금은 연성이 까다롭고, 보관도 귀찮고,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보면 눈빛이 변한다. 금속은 나쁘지 않다. 다만 인간이 문제다.

그런데도 이 눈은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

비실체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현상의 골자.
성질의 껍질.
그리고, 세계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접어둔 여백.

그런 것들이 보인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오늘 내 가게에 오는 손님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괴물도 아니다.
마물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며, 성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

“성좌?”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나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는 성좌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 얇고, 가볍고, 인간에 가깝게 깎여 내려온 것.

분령.

본체라는 거대한 책에서 찢겨나온 한 페이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한 페이지는 책 전체보다 더 자유로워 보였다.

딸랑.

문 위의 작은 종이 울렸다.

“안녕, 아가씨. 여기가 소피아의 연금술점 맞지?”

그는 그렇게 들어왔다.

첫인상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성좌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늘을 떠올린다.
거대한 옥좌.
천둥 같은 목소리.
인간을 내려다보는 눈.
혹은 신전 깊숙한 곳에서 향냄새와 피냄새를 섞어가며 부르는 이름.

하지만 내 앞에 선 그는 달랐다.

여행자의 망토를 걸치고, 소년처럼 웃고, 별빛보다는 오후 햇살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은 깊었다.
너무 깊어서, 오히려 얕은 척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폴란드에서 놀러 왔어. 기록자 아카식 레코드. 뭐, 오늘은 그렇게 거창하게 부르지 않아도 돼. 그냥 아카식이라고 불러줘.”

나는 그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표면 아래를 보았다.

이상했다.

그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기록 장치가 아니었다.
그는 신이었다.
그러나 옥좌가 아니었다.
그는 계약이었다.
그러나 족쇄가 아니었다.

한때는 무기질적인 관측자였을 무언가가, 인간의 희망과 절망을 지나, 마침내 “살아가는 것”을 흉내 내는 데 성공한 형태.

그런 것을 보고, 나는 아주 잠깐 숨을 잊었다.

내 황금의 눈은 성질을 읽는다.
소재의 본질을 파악한다.
구조를 이해한다.
무엇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떻게 분해되고, 어떻게 다시 조립될 수 있는지 본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눈은 아주 불쾌할 정도로 솔직한 결론을 내렸다.

이건 연성할 수 없다.

아니, 할 수야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다른 것으로 바뀐다. 납이 금이 되고, 흙이 약이 되고, 재료가 작품이 되듯.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저 존재를 조제법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의 완성품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는 이야기였다.

“……어서 오세요. 포션을 사러 오셨나요?”

그래서 나는 장사꾼답게 물었다.

성좌에게도 손님 응대는 필요하다.
그리고 손님이 성좌라 해도 물건값은 받아야 한다.
가게 운영이란 그런 것이다.

아카식은 내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좋네. 보통은 내가 이름을 말하면 무릎부터 꿇거나, 도망치거나, 칼을 뽑거나, 기도를 시작하거든.”

“저희 가게는 선불입니다.”

“무릎보다 선불이라. 훌륭해. 인간 문명은 아직 희망이 있구나.”

“성좌님이라도 외상은 곤란합니다.”

“아카식.”

“네?”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은 아카식. 성좌님이라고 부르면 내가 괜히 멋있는 척해야 하잖아. 쉬는 날에 그건 좀 피곤해.”

쉬는 날.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성좌도 쉬는 날이 있구나.
아니, 정확히는 성좌가 쉬는 날을 갖기로 선택했구나.

그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선반 위의 포션.
천장에 매달린 약초.
정리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기준인지 알 수 없는 서랍들.
그리고 작업대 위에 놓인, 방금 완성한 감기약.

아카식은 냄비 근처로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흐음. 달빛버섯, 회색민들레, 아주 약간의 은가루. 거기에…… 응? 마지막에 넣은 건 뭐야?”

“비밀입니다.”

“설탕?”

“비밀입니다.”

“사랑?”

“그건 원가가 너무 높습니다.”

그가 웃었다.

소리는 가볍다.
하지만 그 웃음이 방 안을 채우는 방식은 가볍지 않았다.

마치 낡은 책장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먼지를 일으키지 않고 냄새만 깨우는 것처럼.
그 웃음은 오래된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 다만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떠올리게 했다.

“소피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세계에 고정된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동안,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다.
왕태녀도 아니고, 가출한 공주도 아니며, 권력욕 없는 실패작도 아니고, 그저 소피아.

작은 마을의 연금술사.
가게 주인.
직원 한 명.
점포 확장 계획 없음.
아르바이트생은 가끔 모집 중.

그 정도의 나.

“네.”

“너는 왜 여기 있어?”

질문은 가벼웠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묻고 있었다.

왜 왕궁이 아닌가.
왜 왕관이 아닌가.
왜 군대도, 귀족도, 의전도, 역사도 아닌가.
왜 작은 마을의 점포에서, 냄비를 젓고, 약초를 말리고, 가끔 실패해서 창문을 녹이는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대답은 많았다.

권력에 흥미가 없어서.
왕관이 무거워서.
연금술이 재미있어서.
정치적 인간관계가 너무 귀찮아서.
누군가의 위에서 내려다보기보다, 누군가의 감기약을 만들어 주는 쪽이 나에게 맞아서.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정확한 답은 아니었다.

“……여기 있으면요.”

나는 말했다.

“제가 만든 게, 누구에게 닿는지 볼 수 있어요.”

아카식은 말없이 나를 보았다.

“왕궁에서는 명령을 내리면 결과가 숫자로 돌아와요. 세금, 병력, 곡물, 영지, 사망자, 출생자. 전부 표가 되죠. 물론 중요한 일이에요. 누군가는 해야 하고, 누군가는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아요.”

나는 냄비 안의 약을 작은 병에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병 안에서 옅은 금빛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든 약을 마신 아이가 다음 날 기침을 덜 하는 걸 보는 쪽이 좋아요. 다리가 아픈 노인이 다시 밭에 나가는 걸 보는 쪽이 좋아요. 실패한 향초 때문에 손님이 재채기를 열 번 하는 걸 보고, 다음에는 아홉 번으로 줄이는 게 좋아요.”

“흐응.”

“왕관은 세계를 움직이지만, 저는 세계의 작은 부분을 바꾸고 싶어요. 손이 닿는 만큼. 실패하면 고칠 수 있는 만큼. 다시 시도할 수 있는 만큼.”

말하고 나니, 조금 부끄러웠다.

너무 진지했다.
쉬는 날에 놀러 온 성좌에게 하기에는, 조금 무거운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카식은 웃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선반 하나를 손끝으로 쓸었다.
먼지가 묻어나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청소했기 때문이다. 왕태녀의 긍지는 잃었을지 몰라도, 가게 주인의 위생 관념은 지키고 있다.

“좋아.”

그가 말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해.”

“기록자라서요?”

“아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취향이라서.”

그 대답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기록자이기 때문에 기록한다.
신이기 때문에 긍정한다.
성좌이기 때문에 내려다본다.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좋아서.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보고 싶어서.

그는 자신의 신성을 이유로 삼지 않았다.
자신의 취향을 이유로 삼았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아카식 씨.”

“응.”

“정말로 뭘 사러 오신 건가요?”

“음.”

그는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사실은 인사하러 왔어.”

“저한테요?”

“응. 아르파드 소피아 베아트리체. 벨라 4세의 장녀. 왕관과 거리가 먼 왕태녀. 작은 마을의 연금술사. 실패해도 다시 냄비를 올리는 사람.”

“……마지막은 조금 창피한데요.”

“중요한 부분이야. 기록에서 제일 빛나는 건 성공보다, 다시 하는 쪽이거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내 안쪽 어딘가에 닿았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를 잘한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사실이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뒤에도 다시 손을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
연금술은 그런 학문이다.

넣고, 끓이고, 망하고, 적고, 다시 넣고, 다시 끓인다.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재정의된다.

아카식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보았을 것이다.
기록자로서가 아니라, 사람을 오래 바라본 존재로서.

“계약하러 오신 건가요?”

내가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그렇게 수상해 보여?”

“성좌가 직접 찾아오면 보통은 계약, 계시, 시험, 저주, 축복, 납치 중 하나 아닌가요?”

“납치는 너무하지 않아?”

“가끔 있더라고요.”

“세상 무섭네.”

“성좌님들이 그렇게 만들었겠죠.”

“아카식이라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계약은, 네가 원하면. 원하지 않으면 안 해. 믿지 않아도 되고, 다른 신을 믿어도 되고,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도 돼. 나는 삶을 묶으러 온 게 아니라, 네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 보러 온 거니까.”

그 말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나는 그를 보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황금의 눈은 그의 말에서 강제력을 보지 못했다.
계약의 성좌가 계약을 들이밀지 않는다는 것은, 묘한 모순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계약은 강요가 아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럼 왜 하필 저죠?”

“재밌으니까.”

“그건 너무 가벼운 이유예요.”

“하지만 가벼운 이유로 시작한 일이 오래가는 경우도 많아. 무거운 이유로 시작한 일은, 무게 때문에 부서지기도 하거든.”

그는 선반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건?”

“수면 보조제입니다. 악몽을 줄여주는 쪽으로 조제했어요.”

“효과는?”

“괜찮아요. 대신 꿈에서 고양이가 세금 징수원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건 악몽이잖아.”

“그래서 아직 개량 중입니다.”

아카식은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득,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도 악몽을 꿔.”

나는 손을 멈췄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의 뒤편에, 아주 오래된 밤이 있었다.

기록의 성좌.
인간을 배운 기록.
계약의 기록자.

그런 이름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름이 꼭 가벼운 역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기질적인 존재가 인간성을 배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희망을 배운다는 것은 절망을 배운다는 뜻이고,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상실을 배운다는 뜻이며,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멀리 망가질 수 있는지도 안다는 뜻이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는 신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신 같았다.

“필요하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악몽을 줄여주는 약.”

아카식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분령한테 그런 게 들을까?”

“글쎄요. 해보지 않았으니까 모릅니다.”

“연금술사다운 대답이네.”

“실험 대상이 되어주신다면, 할인해 드릴게요.”

“공짜는?”

“선불입니다.”

그는 크게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볍게 웃었다.
공방 안의 긴장이 사라지고, 창문 밖의 바람이 다시 평범한 바람이 되었다.

아카식은 주머니에서 작은 동전을 꺼냈다.
동전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했다.
금도 은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다.
그것은 얇은 책갈피처럼 생긴 금속 조각이었다. 표면에는 글자가 없는데,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쓰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로 될까?”

“화폐 가치가 불명확합니다.”

“기록교 쪽에서는 꽤 비싸게 쳐줄걸.”

“여긴 제 가게입니다.”

“엄격하네.”

“장사기초 D랭크의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 좀 귀엽다.”

나는 병을 하나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그 말은 추가 요금입니다.”

“얼마?”

“다음에 오실 때, 폴란드 쪽 약초를 가져오세요.”

아카식은 눈을 깜박였다.

“그걸로 돼?”

“네. 가능하면 흔하지 않은 걸로요. 너무 위험한 건 안 됩니다. 저번에 독성 담쟁이를 잘못 들였다가 선반이 사람 말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그거 흥미로운데?”

“저는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선반이 월급을 요구했어요.”

“하하.”

그는 약병을 받아 들었다.

그 손끝이 내 손끝에 아주 잠깐 닿았다.

정말로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책.

아니, 책이 아니다.
세계 하나를 종이로 접어 만든 숲.
그 숲의 모든 나뭇잎에는 누군가의 삶이 쓰여 있다.
태어난 날.
처음 울었던 순간.
거짓말을 배운 오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밤.
잘못된 선택.
구원받지 못한 기도.
그럼에도 다시 손을 뻗은 아침.

그리고 그 숲 한가운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록하면서도, 모든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보면서도, 모든 것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래서 웃는 법을 배웠다.
웃지 않으면,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자신을 찢어버릴 테니까.

나는 숨을 삼켰다.

아카식은 내 반응을 눈치챘다.

“봤어?”

“조금요.”

“아팠어?”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어지러웠어요.”

“미안. 내가 가끔 너무 많이 보여.”

“괜찮아요. 저도 가끔 너무 많이 봅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장난기 없는 눈이었다.

“그렇구나.”

그 말은 짧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정했다.

나는 알았다.

이 사람— 아니, 이 존재는 상대의 결핍을 쉽게 읽는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그것이 유혹일 수도 있고, 위로일 수도 있고, 위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나를 흔들기 위해 말하지 않았다.

그저 확인한 것이다.

너도 그런가.
너도 너무 많이 보는가.
너도 세계의 껍질 아래를 보느라, 가끔 평범한 풍경을 그리워하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찻잔을 꺼냈다.

“차 드실래요?”

“좋아. 독은 없지?”

“아마요.”

“아마?”

“연금술사는 가능성을 닫지 않습니다.”

“멋진 말처럼 들리는데 무섭네.”

나는 물을 올렸다.

찻잎은 얼마 전에 말려둔 것이었다. 향은 순했고, 효과는 안정. 약간의 집중력 향상. 부작용은 특별히 없다. 다만 너무 오래 우려내면 손톱이 반짝인다. 그건 부작용이라기보다 장식 효과에 가깝다.

아카식은 작업대 옆 의자에 앉았다.

성좌의 분령이 내 가게의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장면이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소피아.”

“네.”

“너는 왕관이 싫어?”

나는 물을 따르다 멈췄다.

싫다.

그렇게 말하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왕관이 싫은 게 아니다.
왕관이 상징하는 책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왕관을 쓴 사람들이 모두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단지, 그것이 나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 검은 삶의 형식이다.
어떤 사람에게 방패는 맹세의 형태다.
어떤 사람에게 가면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다.
어떤 사람에게 기록은 사랑의 언어다.

그렇다면 내게 왕관은 무엇인가.

아마, 너무 큰 냄비다.

재료를 넣으면 너무 많은 사람이 끓어버리는 냄비.
불 조절을 잘못하면 나라가 탄다.
성공해도 맛을 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실패하면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친다.

나는 그 냄비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냄비보다 작은 냄비를 사랑했다.

“싫지는 않아요.”

나는 말했다.

“다만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이 가게는?”

“제 것이에요.”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나는 그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아카식은 찻잔을 받으며 웃었다.

“좋은 대답이야.”

“기록하시나요?”

“아니.”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기억해둘게.”

그 차이는 무엇일까.

기록과 기억.

그는 기록의 성좌다.
세상의 모든 흔적을 사랑하는 존재다.
그러나 지금 그는 기록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게 그가 인간을 배웠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기 위한 장치다.
기억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안에 두는 행위다.

영원한 존재가 덧없는 방식을 선택한다.

나는 그 모순이 마음에 들었다.

“맛은 어때요?”

“좋아. 조금 반짝이는 맛이 나.”

“손톱 보세요.”

아카식은 자기 손톱을 보았다.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

“너무 오래 우려냈네요.”

“마음에 드는데?”

“그럼 다음부터는 반짝임 추가 요금을 받겠습니다.”

“소피아는 생각보다 장사에 소질이 있어.”

“그건 칭찬인가요, 조롱인가요?”

“기록상으로는 칭찬.”

“기록하지 않는다면서요.”

“기억상으로도 칭찬.”

나는 피식 웃었다.

이상했다.

성좌와 차를 마시고 있는데, 분위기는 옆집 여행자와 잡담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여행자는 내 손끝만 스쳐도 세계의 책장을 보여주는 존재이고, 계약을 어기면 어떤 이유로도 대가를 요구하는 신이며, 폴란드에서 교단을 세우고도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바람 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그는 손님이었다.

내 가게에 들어와 인사했고, 약을 샀고, 차를 마셨다.

그러니 관계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시도 아니고, 맹세도 아니며, 운명적인 선언도 아니다.

문이 열리고, 종이 울리고, 누군가가 말한다.

안녕.

그 한마디로 충분한 관계도 있다.

“다음에 또 와도 돼?”

아카식이 물었다.

나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 점이 다시 마음에 들었다.

“손님으로요?”

“응.”

“선불이면요.”

“친구로는?”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친구.

그 단어는 왕궁에서 별로 쓸 일이 없었다.
귀족에게는 동맹이 있고, 신하가 있고, 후원자가 있고, 감시자가 있고, 약혼자가 있고, 경쟁자가 있다.
친구라는 말은 너무 가볍고, 그래서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이 가게에서는 다르다.

나는 왕태녀가 아니고, 그는 오늘 성좌님이 아니다.

작은 마을의 연금술사와, 폴란드에서 놀러 온 분령.

그 정도라면.

“친구면,”

나는 말했다.

“가끔 청소도 도와주셔야 해요.”

아카식은 눈을 깜박이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성좌의 분령을 청소 아르바이트로 쓰겠다고?”

“아르바이트생은 가끔 모집 중이라서요.”

“급여는?”

“차와 실패작 시식권.”

“실패작은 빼줘.”

“그럼 고용 조건이 맞지 않네요.”

“너 꽤 만만치 않구나.”

“왕관을 피해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합니다.”

그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폴란드에서 온 바람인지, 헝가리의 들판에서 맴돌던 바람인지,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록의 여백인지 알 수 없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성좌와 계약하지 않았다.
신앙을 맹세하지도 않았다.
위대한 운명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고, 세계를 바꿀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손님 하나를 맞았다.
약을 팔았다.
차를 냈다.
손톱이 반짝이는 부작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친구라는 단어의 견적을 냈다.

그 정도의 사건.

하지만 연금술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흙을 약으로 바꾸고, 납을 금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록으로 바꾸고,
가벼운 인사를 관계로 바꾼다.

세계는 언제나 거대한 의식으로 변하지 않는다.
때로는 작은 가게의 낡은 문종 하나로도 충분하다.

딸랑.

아카식이 나가며 문이 울렸다.

“다음에는 폴란드 약초 가져올게.”

“위험하지 않은 걸로요.”

“선반이 말하지 않는 걸로?”

“월급을 요구하지 않는 걸로요.”

“알겠어, 소피아.”

그는 손을 흔들었다.

“또 올게.”

문이 닫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방 안에는 여전히 약초 냄새가 났고, 냄비는 식어가고 있었으며, 찻잔 하나에는 별빛처럼 얕은 빛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찻잔을 바라보다가, 장부를 펼쳤다.

오늘의 매상.

감기약 한 병.
대금 미수.
대신 폴란드 약초 약속.

비고란에는 이렇게 적었다.

손님: 아카식.
성좌의 분령.
손톱 반짝임 반응 양호.
다음 방문 시 청소 가능 여부 확인.
친구 후보.

거기까지 쓰고, 나는 펜을 멈췄다.

조금 고민하다가 마지막 줄을 덧붙였다.

나쁘지 않음.

그리고 장부를 닫았다.

창밖의 황혼은 이미 깊어지고 있었다.
하늘은 청명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순풍이 불 것 같은 색이었다.

나는 다시 냄비 앞에 섰다.

왕관은 멀다.
세계는 넓다.
기록은 어딘가에서 웃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내 손이 닿는 만큼의 세계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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