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백합] 안녕이라는 말대신 안녕

#12223 [1:1/백합] 안녕이라는 말대신 안녕 (86)

#0◆HqtdN5ly7S(d9319d04)2026-05-24 (일) 02:11:45
헤어질 때의 안녕과 다시 만날 때의 안녕 사이.

그 긴 공백을 채운 건 무성한 소문도, 화려한 경력도 아닌 너를 향해 앓았던 낮은 열기뿐이었다.

안녕이란 말 대신,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진심에 관하여.
#50◆lHp/w/X9b.(19fa19c7)2026-05-28 (목) 13:27:23
테이블 위로 밀려든 잔에는 갓 씻어낸 거품이 얇게 가라앉아 있었다.

술기운을 쫓으려 온더락 잔의 얼음만 애꿎게 녹이고 있던 히요리는, 제 몫의 잔을 가져가 버린 아키호의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독한 사케 향이 옅게 배어있을 잔을 망설임 없이 입가로 가져가는 모습에 입안이 바짝 말라붙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해 밍기적거리는 주량을 눈치채고 제멋대로 잔을 바꿔주는 손길. 예전 학교 건물 복도나 동아리방에서, 히요리가 난처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툭 던지듯 건네던 아키호만의 서툰 배려가 지금의 능숙해진 손길 위로 겹쳐 흘렀다.

"아사히나 선배는 많이 변했어요. 정장이 잘 어울리는 어른이 돼서 못 알아봤는걸요."

뒤이어 마주친 시선은 아주 짧았지만, 히요리의 말문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2년 만에 제대로 마주한 아키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투명해서, 오히려 그 속에 비친 제 단정한 정장 차림이 어색한 가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2년 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사라졌던 아키호였다. 한마디 양해도 없이 제 세계에서 홀연히 가버렸던 공백이 무색하게, 눈앞의 아이는 여전히 자유로운 청춘의 향취를 간직한 채 훌쩍 나타나 고작 이런 대외적인 문장으로 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만 그 갑작스러운 이별을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며 낯선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겨우 이 정도 거리감을 두려고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걸까 하는 야속함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변했다는 말에 어떤 대답을 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키호가 고개를 돌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고 나서야, 히요리는 간신히 작게 숨을 내쉬었다.

"......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여요."

뒤늦게 날아든 무감한 안부는 아키호가 방금 비워낸 일본주의 알코올 향을 타고 전해졌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 한마디가 히요리의 가슴 한구석을 기어이 건드리고야 만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면, 네가 연락을 끊은 그 긴 시간 동안 나 역시 매일 덤덤하게 출근을 했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까딱이는 너를 보며 이렇게 마음이 술렁이지는 않았을 텐데.

히요리는 아키호가 새로 채워준 맥주잔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얼음잔보다 훨씬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번졌다.

"응. 밥 거르지 않고, 제시간에 출근하고, 남들 하는 만큼은 지내고 있어."

아키호가 원했을 법한 건조한 대답을 내놓으며, 히요리는 맥주를 가볍게 한 모금 삼켰다. 사케보다 훨씬 부드럽게 넘어가는 목 넘김이 역설적으로 아키호의 다정함을 상기시켜서 심술궂은 서운함이 번졌다.

"너야말로...... 여전히 다정하네. 모른 척 지나쳐버려도 좋았을 텐데."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게 깔리는 선술집의 소음 속으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히요리는 뺨에 닿는 이자카야의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아키호가 마시고 있을 제 옛 온더락 잔의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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