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다이스/앵커] 카이저라이히 조선
Back to Anchor

[AA/다이스/앵커] 카이저라이히 조선

Author:조선◆4U30xj4fjg
Responses:8
Created:2020-04-13 (월) 12:20
Updated:2020-04-13 (월) 13:49
#2조선◆4U30xj4fjg(8136023E+6)2020-04-13 (월) 12:34

직하 앵커

#3이름 없음(8105053E+6)2020-04-13 (월) 12:53
흥선군 천주교로 개종한다
#4조선◆4U30xj4fjg(8136023E+6)2020-04-13 (월) 12:53

3번 흥선군 없음

#5조선◆4U30xj4fjg(8136023E+6)2020-04-13 (월) 13:04

1번 사이트 공지에 들어가면 나와 있음

#6조선◆4U30xj4fjg(8136023E+6)2020-04-13 (월) 13:25

그럼 직하 앵커

#7조선◆4U30xj4fjg(8136023E+6)2020-04-13 (월) 13:49

카라 세계관은 현실 역사에서 대충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1915.05.07)부터 갈라지게 되었는데, 1919년 초가 되면 이미 전황이 독일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게 됨.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전역에서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일어난 대규모 반전+독립시위(1919.03.03)는 독일령 동아시아쪽을 견제해야 하는 데다가 영일동맹 결속이 서서히 약해지면서 군자금도 바닥난 상태라 시위대 진압을 위한 사단 파견 같은 건 불가능한 상태인 일본한테 부담을 줬고, 결국에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1919.10.04) 영국의 지원이 끊겨버리는 1920년 즈음에 일본판 대타협이 일어나서 옛 대한제국의 융희황제이자 창덕궁 이왕이었던 순종을 일본제국 치하 조선 왕국의 국가원수 자리에 세운다. 물론 순종이 조선의 왕위를 이어봤자 정치적 영향력이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무엇보다도 태생부터 몸이 병약했기에 골수 친일파인 영선군 이준용과 대조선 유화파 정치인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전권을 분담하는 식이 된다.
물론 일본 입장에선 이런 형태의 타협이 최선책이라 여겼겠지만, 문제는 조선 민중들은 무거운 과세나 전근대적인 계급제에 대한 반발을, 정치인들 및 혁명가들은 가장 중요한 '조선인 주도의 정국 참여'를 위한 의회 설립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안게 되었고, 결국에 이는 일본이 트란스아무르를 지원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하는 등 1922년에서 1926년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군사 행동을 위해 식민지인 조선과 타이완에 지나친 과세를 부과하게 되면서 폭발하게 된다. 이미 1925년이 되면 브리튼 혁명 때문에 대영제국 동양함대랑 조계지 주둔군이 호주로 철수하면서 상하이와 홍콩을 비롯한 주요 조계도시들이 그나마 구 영일동맹 관계 때문에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이나마 했던 대영제국에서 일본의 사실상 적국이었던 독일한테로 넘어가면서 비타협파 독립운동가들 및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연정으로 구성된 임정이 티르피츠 수상의 주도로 더 많은 국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쪽에선 안창호가 이끄는(안창호 같은 경우엔 1머전이 21년도에 종전하면서 원래는 19년도에 상하이로 향해야 하는 걸 타이밍을 못 잡고 그대로 미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참고로 실제 역사에서 안창호가 떠난 뒤의 미 서부 한인사회는 이승만 휘하의 정치깡패들이 난장판을 벌이면서 붕괴 위기를 겪는다) 흥사단이 리더쉽의 부재 없이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떨치게 된다. 뿐만아니라 봉천 정부는 의열단이 만주에서 한반도를 오가면서 암약하는 걸 눈감아주고 있었고, 일본의 연해주 기반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 토벌 시도 또한 수 차례 좌절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함.
이런 불안정의 폭발은 순종의 장례식 때 일어난 전국구급 폭동(1926.06.10)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현실의 6.10 학생운동과는 다르게 카라 세계관의 6.10 폭동은 철저한 유혈사태로 번졌고, 그 배후에는 조봉암, 박헌영, 이동휘 등등 프랑스 코뮌/볼셰비키 러시아에서 유학했거나 그런 유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은 콤그룹 거물들이 존재한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졌다. 이를 군으로 진압하려 해도 1926년 초에 미국발 불황으로 인해 타이완 금융계에서부터 촉발된 일본판 대공황과 해군에 투입된 지나치게 많은 자원(세계대전 이후 해군력의 역사 및 군함 개발사 문서 참조) 때문에 더 이상 군을 동원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고, 정권은 4월부터 시작된 헌정회(이후 민정당)-입헌정우회의 제2차 호헌운동으로 인해서 온건책을 선호하는 민간정부로 이양된 상태였다. 결국 폭동 발생 후 한 달여 만에 일본 본토의 정부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상하이에 위치한 임정 세력이 협상을 위해 귀국하게 된다. 협상에선 급진적 사회주의자 진영이 완전히 배제되었고, 하라 타카시 계열의 민간정부 인사들이 여운형을 국가수반으로 삼는 것을 강력히 지지했지만 결국엔 군부를 달래기 위해서 임정 대통령인 이승만이 수상에, 한국민주당의 김규식이 중추원 참의에 오르면서 조선의 첫 번째 민정내각이 들어선다. 물론, 민정내각은 철저히 일본 군부의 감시 하에 있었고 일본인에 한해서 치외법권이 적용되며 자체적인 군사력을 갖출 권리와 독자적인 외교권이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독자적인 행정권/사법권/입법권이 주어졌다는 점만으로도 한국인들에게는 굉장한 고무가 되었다. 하지만, 김구나 신채호 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매국노나 다름없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내각에선 막대한 정치력을 영향력을 고려해서 관직을 주겠다고 설득도 해봤지만 무위로 돌아간다.

#8이름 없음(3237698E+6)2020-07-05 (일) 22:54
오이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