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스라카 재활시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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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0 【잡담】스라카 재활시설 20 (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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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3익명의 참치 씨(iJ5sh8pICS)2025-04-04 (금) 03:07:33
현실 세계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로서는 무척 버거운 일이다.

현실을 보고자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작고 한계가 있어 왜곡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적으로 현실을 보라고 하는 말들을 많이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진정으로 존재하는 실제가 아니라,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관을 투영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기준으로 현실을 해석한다.

지배적 가치는 하나의 궁극이자 진리로서 다른 가치들을 부수적인 것으로 전락시키고 종속시킨다.
루미네스 사회에서 그러한 지배적 가치는 테클리스의 사다리, 즉 위로 향하는 오직 상승의 길이다.
실제로 루미네스 사회에서는 테클리스의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사다리는 단 하나의 길일 뿐이며, 모든 것을 얻어다 주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관계나 감정적인 교류 같은 말랑하고 따뜻한 행복은 단순히 경지가 올라간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정, 사랑, 친애 같은 가치는 단순한 상승으로 획득할 수 없다.
게다가 사다리를 올라갈수록 처음 목표했던 지점에서 느꼈던 전능감은 휘발되고, 익숙함이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끝없이 더 높은 곳을 갈망한다. 하지만 갈증은 계속될 뿐이며, 끝없는 목마름에 고통받는다.

테클리스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행복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으며, 그 행복은 유효기간 또한 존재한다.
사람들은 경지만이 충분하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세상에는 불가역적인 것들이 존재하며, 개개인은 그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클리스의 사다리를 궁극적인 가치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야 루미네스 사회가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적 가치는 다른 가치들에 대한 관심을 자신에게 돌려야만 한다.
테클리스의 사다리만을 위해 경지를 오르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지가 상승하면서 얻어지는 혜택을 위해 사다리를 오른다.
그러나 결국 수단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버리며, 사다리를 위한 사다리가 되어버린다.
만약 사다리의 궁극성이 자신의 목적과 일치한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욕망이 다른 가치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부터 기존 세계관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갈등과 혼란이 시작된다.

테클리스의 사다리만이 오로지 진실이면 첨탑의 몰락은 왜 일어났겠는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지금까지 오르던 사다리는 자신의 욕망과는 무관했으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세상은 불가역적이다. 어떤 일은 돌이킬 수 없으며, 뒤늦게 깨달은 충족감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다.
테클리스의 사다리는 궁극적인 가치로 자리 잡아야만 했다.
그래야 모든 루미네스의 구성원이 그곳을 향해 나아갈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실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련과 새로운 갈증을 마주할 뿐이다.

지배적인 가치는 독재적이며, 자신 이외의 것들과 얼마든지 교환 가능하다고 포장한다.
그리고 그 포장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욕망과 의미를 유예하거나 아예 잊어버린다.
그것을 따르면 전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주체의 욕망은 현실 속에서 점점 더 흐릿해지고 모호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하여 불행을 피하려면 무엇을 해야하는가

빛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사물을 밝은 곳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게 파악된 것처럼 보인다.
지배적 가치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계관 속에서 너무도 명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러나 그 속에서 주체인 나 자신마저도 완벽하게 규명된 것처럼 느껴지며,
더 이상 탐구할 여지가 없어진다. 충만함의 외관이 형성되는 순간, 우리는 정체되기 시작한다.

세라폰의 석판에 새겨진 것처럼, 세상은 단순히 하나의 길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또 다른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은 어쩌면 어둠일지도 모른다.
빛이 사물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잊게 만든다면, 어둠은 감추어진 것들을 다시 상기시키고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빛과 어둠의 관계는 이성과 낭만과 동치할 수 있을 것이다.

별들은 낮이 되면 우리의 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별들 스스로가 물러나는 것이 아닌 찬란한 낮의 빛 속으로 삼켜질 뿐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비로소 어둠의 장막이 기꺼이 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빌려준다.

이처럼,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낮의 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시간이라면, 밤의 어둠은 모든 것을 흐릿하게 만들며 상상력의 여지를 남긴다.
밝음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어둠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둠 또한, 단순한 해방의 공간이 아니다. 어둠은 혼돈과 불확실성을 내포하며, 그 속에서 방향을 잃고 끝없는 방황에 빠질 수도 있다.
지배적 가치를 부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지배적 가치보다 더 무거운 허무와 맹신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어둠이 새로운 지배적 가치로 변질될 위험도 있다. 기존 체제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극단적 믿음이 탄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은 오로지 하나의 길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집합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무작위적인 선택이 아니라 신중한 탐색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빛이 모든 것을 삼킬 수도 있지만, 어둠 또한 우리를 길 잃게 할 수 있기에, 균형이 필요하다.

빛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 독선과 아집으로 이끈다면, 어둠은 우리를 맹신과 허무의 구렁텅이로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없는 고뇌 속에서 성찰해야 한다.

빛 또한 진리가 아니고 어둠또한 마찬가지라면 우리는 끝없는 혼란과의 줄다리기를 이어가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방황하고 최후의 순간에 그 대가를 치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은 아닐 것이며, 내일도 아니라고 강력히 소망한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며,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다. 사람은 희망이 없다면, 희망을 발명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불확실하더라도, 우리가 존재하는 한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빛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어둠이 끝없는 망각으로 우리를 끌어내리지 않도록, 우리는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낮과 밤이 교차하듯, 절대적인 진리의 신봉 대신 무수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가야 한다.
희망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끝없는 늪속에서도 별을 그려내는 상상력과 선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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