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91 [채팅] 어딘가의 초차원 오픈 잡담방 -332- (1001)
종료
작성자:에주
작성일:2025-12-07 (일) 01:30:35
갱신일:2025-12-16 (화) 13:03:52
#0에주(f7V5cvo9Tq)2025-12-07 (일) 01:30:35
위키: https://opentalkwiki.mycafe24.com/wiki.php/%EB%8C%80%EB%AC%B8
1:1 카톡방: >8525>
번개모임방: >5108>
웹박수: https://pushoong.com/ask/3894969769
[공지] 현실 차원에서의 접속이 확인됩니다. 재밌게 놉시다.
[공지] 방장 звездá즈베즈다는 항상 보고는 있음.
[규칙]
1. 떠날때에는 확실하게 떠날 것. 컴백 여지에 대한 발언은 허용. 작별은 서로 감정없이 한번정도만 언급하는걸로 깔끔하게 할것.
떠날때 미련가지는 발언 및 감정적 발언은 삼가. 떠날때 말은 지킬 것.
2. 어장이 오래되었다고 상대를 옹호하는 AT금지. 지적의 경우 그 지적의 어투나 커질 파장을 지적하지 않기. 지적이 들어오면 확실히 입장을 밝히고 해결할것.
3.다른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해서 방관은 금물. 이상하다고 싶으면 2번규칙에 따라,지적과 수용,해명과정을 거치자.
4. 문제가 생길때는 공과 사를 구분하자.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생각과 식구감싸기 식의 옹호를 버리자.
5. 아직 내지 않았거나, 어장에서 내린(혹은 데려오지 않은) 캐릭터의 이야기는 자제하자.
6. 모브캐가 비중 높게 독백에서 나올 경우, 위키 등재나 각주 설명을 사용해보자. 또한 모브캐의 암기를 강요하지 말자.
7. 픽크루를 올릴때 반드시 캐릭터명을 명시하도록 하자.
8. 유사시를 위해 0답글에 어장을 세운사람이 누군지 나메를 적어두자.
9. 타작품 언급시 스포일러라는 지적이 하나라도 들어올 시 마스크 처리된다.
10. 특정 작품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면 AT로 취급한다. 특히 단순한 감상이나 플레이 이야기가 주가되지 않도록 하자.
11. 특정 작품 기반 AU설정및 썰은 위키내 문서를 활용하자.
※오픈 톡방 컨셉의 상L 이름칸은 오픈 카톡에서 쓰는 닉네임이란 느낌
※오픈 톡방 컨셉이기에 앵커 안 달고 그냥 막 다시면 됩니다.
※세계관은 그냥 모든 차원이 겹치는 컨셉이기에 톡방 자체에 영향만 안 주면 뭐든지 okay (상황극판 룰에 걸리는 일 제외)
※1000 차면 캡틴이 아니어도 다음 어장 세워도 됨.
1:1 카톡방: >8525>
번개모임방: >5108>
웹박수: https://pushoong.com/ask/3894969769
[공지] 현실 차원에서의 접속이 확인됩니다. 재밌게 놉시다.
[공지] 방장 звездá즈베즈다는 항상 보고는 있음.
[규칙]
1. 떠날때에는 확실하게 떠날 것. 컴백 여지에 대한 발언은 허용. 작별은 서로 감정없이 한번정도만 언급하는걸로 깔끔하게 할것.
떠날때 미련가지는 발언 및 감정적 발언은 삼가. 떠날때 말은 지킬 것.
2. 어장이 오래되었다고 상대를 옹호하는 AT금지. 지적의 경우 그 지적의 어투나 커질 파장을 지적하지 않기. 지적이 들어오면 확실히 입장을 밝히고 해결할것.
3.다른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해서 방관은 금물. 이상하다고 싶으면 2번규칙에 따라,지적과 수용,해명과정을 거치자.
4. 문제가 생길때는 공과 사를 구분하자. 무조건 우리가 옳다는 생각과 식구감싸기 식의 옹호를 버리자.
5. 아직 내지 않았거나, 어장에서 내린(혹은 데려오지 않은) 캐릭터의 이야기는 자제하자.
6. 모브캐가 비중 높게 독백에서 나올 경우, 위키 등재나 각주 설명을 사용해보자. 또한 모브캐의 암기를 강요하지 말자.
7. 픽크루를 올릴때 반드시 캐릭터명을 명시하도록 하자.
8. 유사시를 위해 0답글에 어장을 세운사람이 누군지 나메를 적어두자.
9. 타작품 언급시 스포일러라는 지적이 하나라도 들어올 시 마스크 처리된다.
10. 특정 작품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면 AT로 취급한다. 특히 단순한 감상이나 플레이 이야기가 주가되지 않도록 하자.
11. 특정 작품 기반 AU설정및 썰은 위키내 문서를 활용하자.
※오픈 톡방 컨셉의 상L 이름칸은 오픈 카톡에서 쓰는 닉네임이란 느낌
※오픈 톡방 컨셉이기에 앵커 안 달고 그냥 막 다시면 됩니다.
※세계관은 그냥 모든 차원이 겹치는 컨셉이기에 톡방 자체에 영향만 안 주면 뭐든지 okay (상황극판 룰에 걸리는 일 제외)
※1000 차면 캡틴이 아니어도 다음 어장 세워도 됨.
#989희생양에 대한 이야기(OWGRb/z22S)2025-12-16 (화) 12:30:43

[ai일러스트입니다]
미나토 아야네의 시점
나기우라 마을의 장마는 지독하게 깁니다.
달력의 숫자가 6월을 넘기면, 하늘은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잿빛 비를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그 비는 여름이 다 지나도록 멈추지 않고, 마을 전체를 축축한 수조처럼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무겁고 습한 계절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먹혀버려, 마치 깊은 심해에 잠긴 듯 고요해지기 때문입니다.
"......"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경계 없이 뒤섞여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공을 쫓고 있더군요.
질퍽거리는 진흙 위를 뒹구는 아이들. 땀과 흙으로 얼룩진 그들의 무릎에는 반창고나 멍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는지, 멀리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옵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이것은 경멀이 아닐 겁니다. 그저, 저렇게 함부로 자신의 몸을 굴려도 되는 저들의 '평범함'이, 저와는 다른 차원의 일처럼 아득하고 생경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저는 책상 아래로 제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교실 안의 학생 서른 명이 모두 남색과 파란색의 실내화를 신고 있었지만, 오직 저만이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실내화를 신고 있습니다.
[특별 보호 대상: 미나토 아마네]
이것은 제가 이 마을을 수호하는 '무녀'로 선택받았다는 증표입니다.
어른들은 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네, 너의 육체는 신께 기도를 올려야 하는 성스러운 그릇이란다. 그러니 티끌 하나 없이 무구해야 해.’
그리하여 저는 청소 당번도, 격한 운동도, 심지어 무거운 책을 드는 일조차 면제받았습니다. 저의 일상은 유리 장식장 안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드르륵-
쉬는 시간, 앞자리의 남학생이 실수로 제 책상 근처에 샤프를 떨어뜨렸습니다. 톡, 하고 샤프가 제 하얀 실내화 끝에 닿았습니다.
"히익...!"
그 사소한 접촉에 교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남학생은 마치 불덩이에 닿은 것처럼 황급히 샤프를 주워 들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제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미, 미안해! 아마네님! 일부러 그런 게 아냐! 다친 곳은 없지?"
"아... 전 괜찮아요. 딱히 찔린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지만, 남학생은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나 제 발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고급 집기에 상처를 내버린 어린 아이처럼.
이런 과잉된 배려가, 저는 싫지 않았습니다. 고아로 자라 언제나 혼자인 제가, 이 마을에서만큼은 누구나 우러러보는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니까요.
딩동댕동-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의 목적지는 언제나 정해져 있습니다.
복도를 걷습니다. 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줍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의 마룻바닥이 끼익, 끼익,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공기를 헤치고 구관 건물의 가장 깊은 곳으로.
유일하게 쾌적하고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성역.
그곳은 이 학교에서, 아니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제가 '사람'으로서 만져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드르륵.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저를 감쌌습니다.
차가운 알코올, 마른 종이 냄새, 그리고... 씁쓸하고 매캐한 멘솔 담배 향기.
"......왔니, 아마네."
창가에 기대어 하얀 연기를 뱉어내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역광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늘 권태와 피로에 젖어있는 그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이 마을에서, 오직 한명. 나에게 닿을 수 있는 사람.
"선생님, 또 담배 피우셨나요?"
저는 코를 살짝 찡긋하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선생님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저는 얌전한 학생처럼 뒷짐을 지고 선생님 곁에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의 없는 아이를 싫어하실지도 모르니까요.
"냄새나? 싫으면 오지 말라니까."
선생님은 짐짓 쌀쌀맞게 대꾸하면서도, 피우던 담배를 황급히 재떨이에 비벼 끄셨습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늘 과로에 시달리시니까요.
"싫지 않아요. 그저... 선생님의 목이 상하면, 엄청 슬플 것 같으니까요."
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선생님의 하얀 가운 자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건드렸습니다. 그 옷자락에서 나는 어른의 냄새가 좋았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고맙네. 정기 검진 해야하니까 거기 앉아."
평범한 한마디가 마치 꼭 신탁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직 단 두명. 저를 평범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잘 대해줘야죠. 그럼. 저는 훈련받은 강아지처럼 보건실 침대 위에 얌전히 걸터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퀭한 눈동자가, 오직 저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실례할게."
선생님의 서늘한 손가락이 제 블라우스 단추를 조금 풀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저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청진기가 가슴 중앙에 닿았습니다.
"심박수 정상. 폐 잡음 없음. 체온... 36.5도."
청진기를 떼어낸 선생님의 손이 제 팔을 잡고 소매를 걷어 올리셨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팔뚝과 손목,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하게 훑어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제 턱을 들어 올려 입안을, 치아 상태를, 귓바퀴 뒤쪽을 살피셨습니다.
마치 명품 도자기의 미세한 흠집을 찾아내는 감정사처럼, 그 눈빛은 더없이 진지하고 날카로웠습니다.
선생님의 손이 제 목덜미를 감싸 쥐었습니다. 가장 취약하고 여린 부위. 선생님이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그곳을, 선생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셨습니다.
"깨끗하네."
"당연하죠. 선생님께서 당분간은 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학우분들도 항상 과보호 해주시기도 하구요."
제가 해맑게 대답하자, 선생님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습니다.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슬픔인지 연민인지 모를 깊은 눈으로 제 눈을 빤히 응시하셨습니다.
"착한 아이네. 아마네는. ...정말 착해."
선생님의 엄지손가락이 제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지그시 눌렀다 떼어냈습니다. 니코틴 냄새가 밴 그 손길이 다정하여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정말 아껴주시는구나, 하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자, 아 - 해봐."
선생님이 가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까서 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혀끝에서 달콤하고 몽롱한 맛이 퍼져나갔습니다.
"이거 먹고 교실로 돌아가. 얌전히, 인형처럼 있어야 한다."
"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선생님."
저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보건실을 나섰습니다.
선생님께서 챙겨주신 사탕은 언제나 기분 좋은 나른함을 가져다줍니다. 머릿속이 솜사탕처럼 하얗게 변하고, 불안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마법의 사탕.
오늘도 선생님을 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은 하루입니다.
하자마 사요코의 이야기
드르륵. 탁.
문이 닫히고, 복도 저편으로 아마네의 가벼운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명치끝이 꽉 막힌 듯 답답한 통증이 위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우윽."
나는 입을 틀어막고 세면대로 달려갔다. 올라오는 위액을 가까스로 삼키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네의 살결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그 맹목적인 신뢰가 내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이 상하면, 엄청 슬플 것 같으니까요.‘
구역질이 났다.
나를 걱정하는 그 순진한 눈망울이. 살인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피해자의 다정함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담배갑을 다시 꺼냈다. 손가락 끝이 심하게 경련하고 있어 라이터를 켜는 데만 세 번을 실패했다.
치익.
독한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뇌를 갉아먹는 죄책감이 아주 조금 희석되었다. 니코틴이 혈관을 타고 돌며 미쳐 날뛰던 신경을 강제로 눌러주었다.
아마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지금 행한 것이 의료 행위가 아니라 품질 관리(QC)라는 것을.
자신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한 이유가, 흠집 난 제물은 신에게 바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스르륵-
그때, 보건실 안쪽 깊숙한 곳, 샤워실 커튼이 소리 없이 걷혔다.
어둠 속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 마을의 촌장이자, 카미사비 신사를 관리하는 나의 아버지, 하자마 겐조였다.
그는 아마네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곳에 숨죽이고 있었다.
"......아마네님은 어떠시더냐."
아버지는 건조한 눈으로 아마네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던 침대 시트의 주름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도축장에 끌려갈 소의 육질을 묻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최대한 감정을 죽인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우 양호합니다. 피부질환, 충치, 골절 모두 없습니다. 심리 상태도 안정적이고요."
"그래, 아마네님이 널 친언니처럼 따르더구나. 좋은 가족이 있는 것 만으로 인간은 상당히 안정되지."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 길구나. 바다 신께서 많이 굶주리신 게야. 17년 전보다 더 큰 제물을 원하고 계셔."
"...아직 아이입니다. 뼈대가 얇아요. 지금 보내면 신께서도 만족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 뱀 같은 눈빛에 담긴 서늘한 살기에 내 말문이 턱 막혔다.
"사요코."
아버지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축축하고 무거운 압박감.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끔찍한 협박이었다.
"너는 '관리자'다. 상품에 정을 주어서는 안 돼. ...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어머니.
17년 전, 제물을 바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버린, 나의 나약한 어머니.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고등학교를 졸업 하실 때 까지는 너의 교육방침에 참견하지 않으마. 그야 아마네님은 해신의 아내 되실 분 아니더냐.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가셔야지."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보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감옥의 철창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빗소리만이 내 고막을 때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다가가, 아마네를 만졌던 손을 거칠게 씻어냈다. 비누칠을 하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하지만 손끝에 닿았던 그 아이의 따뜻한 맥박은 지워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내가 아마네에게 준 것과 똑같은 사탕 봉지가 놓여 있었다.
[성분명: 고농도 진정제 및 환각 유도제]
아마네는 지금쯤 교실에서 몽롱한 행복감에 젖어 있겠지. 그것이 자신의 공포심을 거세하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독약인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준 귀한 선물이라며 아껴 먹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웃는 얼굴로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도살자(屠殺者)의 얼굴이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아마네의 해맑은 미소가 아른거렸다.
부디 아마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모르기를.
네가 가장 행복한 꿈을 꿀 때, 내 손으로 너를 저 차가운 바다 밑바닥에 잠재워 줄 테니까.
[카지와라 이부키에 대하여, 미나토 아마네의 관점]
보건실에서 돌아온 뒤, 5교시는 자습 시간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급하게 뛰어오셔서 칠판에 '자습'이라는 두 글자만 휘갈겨 쓰고는 교무실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비 오는 오후의 교실은 선생님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권태로움인 모양입니다.
교실 안은 금세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주말에 있을 할인 행사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그 소란스러운 일상의 한가운데, 마치 투명한 유리벽이 쳐진 듯 고요한 섬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제 자리입니다.
저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창문에 맺히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참고서와, 사요코 선생님이 주신 사탕 껍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드르륵-
그때, 앞자리의 빈 의자가 뒤로 주욱 밀려났습니다.
누군가 등받이를 앞으로 하고 거꾸로 걸터앉았습니다.
"......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포니테일이 눈앞에서 찰랑거렸습니다. 헐렁한 체육복 저지를 걸친, 날카로운 눈매의 소녀.
카지와라 이부키 양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제게 '아마네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거친 바람 같은 아이.
"안녕하세요, 이부키 양. ...수업 시간인데요."
"자습이잖아. 선생님도 도망갔는데 뭘."
이부키 양은 턱을 의자 등받이에 괴고 저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에게서 비릿한 빗물 냄새와 옅은 땀 냄새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는 정반대인, 뜨겁고 생생한 '삶'의 냄새였습니다.
"너, 머리카락."
이부키 양이 불쑥 손을 뻗어 제 앞머리를 건드렸습니다.
"비라도 맞았어? 축축하잖아."
"아, 창문을 잠깐 열어뒀더니..."
"가만히 있어 봐."
이부키 양은 자신이 입고 있던 체육복 소매를 길게 끌어당겨, 제 젖은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습니다. 사요코 선생님의 섬세한 터치와는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 투박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너 몸도 약한 주제에."
"괜찮아요. 그런 일이 있으면 선생님이 간호해주실 테니까.."
제가 주머니 속의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웃자, 이부키 양의 손이 딱 멈췄습니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예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을 뿐입니다.
"......넌, 그 여자가 주는 거라면 독이라도 받아먹겠지."
"네? 독이라뇨. 평범한 영양제인걸요."
"됐다. 말해 뭐하냐."
이부키 양은 체념한 듯 머리를 털어주던 손을 거두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딸기 우유였습니다.
"자. 마셔."
"어? 저는 괜찮..."
"먹어. 그 사탕만 빨고 있지 말고. 너 점심도 거의 안 먹었잖아."
그녀는 제 책상 위에 우유를 퉁명스럽게 올려놓고는, 빨대까지 꽂아주었습니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는 그 강압적인 친절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우유를 받아들었습니다.
한 모금 마시자, 인공적인 딸기 향과 달콤한 우유 맛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사요코 선생님의 사탕이 몽롱한 단맛이라면, 이부키 양이 준 우유는 현실적인 단맛이었습니다.
"맛있어요. 고마워요, 이부키 양."
"......쳇."
이부키 양은 제 인사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힐끔거리며 제 하얀 실내화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발, 안 시려?"
"네?"
"바닥에서 냉기 올라오잖아. 그 실내화, 밑창도 얇아 빠져가지고."
이부키 양은 자신의 발을 뻗어 제 발 옆에 툭, 대보았습니다.
진흙이 묻고 여기저기 닳은 그녀의 낡은 운동화. 그리고 티끌 하나 없이 하얀 제 실내화. 두 개의 발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습니다.
"양말도 얇은 거 신고 다니고... 진짜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라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두꺼운 양말은 모양이 안 예쁘다고 선생님이..."
"또 그놈의 선생님."
이부키 양이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제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거 봐."
"이게 뭐예요?"
화면 속에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거리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 높게 솟은 빌딩, 그리고 알록달록한 간판들.
"도쿄야.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사람이 엄청 많네요. 머리 아플 것 같아요."
"안 그래. 실제로 가면 시끄러운데, 그게 꽤 기분 좋아. 아무도 남한테 신경 안 쓰고, 다들 자기 갈 길만 가거든."
이부키 양은 화면을 옆으로 넘겼습니다. 예쁜 케이크가 있는 카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공원, 거대한 서점...
저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텔레비전 속에서나 존재하는 풍경들이었습니다.
"졸업하면 갈 거야. 이 지긋지긋한 비 냄새 나는 동네 떠나서."
"좋겠네요, 이부키 양은. 달리기도 잘하니까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부키 양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보는 눈빛이 물기를 머금은 듯 애틋해졌습니다.
"......너도 갈 수 있어."
"네?"
"너만 마음먹으면, 갈 수 있다고. 기차 한 번만 타면 돼."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부키 양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남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였습니다.
"미나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네."
"그, 뭐냐. 기도가 끝나고 나서도 네가 여기 있기 싫어지면, 그때 나한테 말해."
"......?"
"내가 업고라도 데려가 줄게."
이부키 양의 눈은 진지했습니다.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불타는 듯한 눈동자.
저는 그 눈빛이 조금 무서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습니다. 왜 이부키 양은 저런 슬픈 표정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후후, 저는 마을을 떠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선생님도 여기 계시고."
"하아..."
이부키 양은 깊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헝클어뜨렸습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저를 몰아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끼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빼서 제 귀에 꽂아주었습니다.
"듣기나 해."
"네?"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빗소리도, 교실의 소음도 아닌, 쿵쿵거리는 강한 비트의 락 음악.
제 심장 박동보다 빠른 리듬이 고막을 때렸습니다.
"시끄러운 게 싫으면, 차라리 이런 걸 들어. 빗소리 말고."
이부키 양은 나머지 한쪽 이어폰을 자기 귀에 꽂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어폰 줄 하나로 연결된 채, 말없이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제 귀에서는 낯선 가수가 '자유'에 대해 소리 지르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딸기 우유가 놓여 있었고, 젖은 제 머리카락에서는 이부키 양의 체육복 냄새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품이 차갑고 고요한 물속 같다면.
이부키 양의 곁은... 마치 불이 켜진 난로 같았습니다. 조금 뜨겁고, 시끄럽지만,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그런 온도.
저는 빨대를 입에 물고, 엎드린 이부키 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목덜미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미나토 아야네의 시점
나기우라 마을의 장마는 지독하게 깁니다.
달력의 숫자가 6월을 넘기면, 하늘은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잿빛 비를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그 비는 여름이 다 지나도록 멈추지 않고, 마을 전체를 축축한 수조처럼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무겁고 습한 계절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먹혀버려, 마치 깊은 심해에 잠긴 듯 고요해지기 때문입니다.
"......"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습니다.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과 검푸른 바다가 경계 없이 뒤섞여 엉겨 붙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는 체육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흙탕물을 튀기며 공을 쫓고 있더군요.
질퍽거리는 진흙 위를 뒹구는 아이들. 땀과 흙으로 얼룩진 그들의 무릎에는 반창고나 멍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넘어져 무릎이 까졌는지, 멀리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려옵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탄식이 새어 나왔습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이것은 경멀이 아닐 겁니다. 그저, 저렇게 함부로 자신의 몸을 굴려도 되는 저들의 '평범함'이, 저와는 다른 차원의 일처럼 아득하고 생경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저는 책상 아래로 제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교실 안의 학생 서른 명이 모두 남색과 파란색의 실내화를 신고 있었지만, 오직 저만이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실내화를 신고 있습니다.
[특별 보호 대상: 미나토 아마네]
이것은 제가 이 마을을 수호하는 '무녀'로 선택받았다는 증표입니다.
어른들은 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네, 너의 육체는 신께 기도를 올려야 하는 성스러운 그릇이란다. 그러니 티끌 하나 없이 무구해야 해.’
그리하여 저는 청소 당번도, 격한 운동도, 심지어 무거운 책을 드는 일조차 면제받았습니다. 저의 일상은 유리 장식장 안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드르륵-
쉬는 시간, 앞자리의 남학생이 실수로 제 책상 근처에 샤프를 떨어뜨렸습니다. 톡, 하고 샤프가 제 하얀 실내화 끝에 닿았습니다.
"히익...!"
그 사소한 접촉에 교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남학생은 마치 불덩이에 닿은 것처럼 황급히 샤프를 주워 들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제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미, 미안해! 아마네님! 일부러 그런 게 아냐! 다친 곳은 없지?"
"아... 전 괜찮아요. 딱히 찔린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지만, 남학생은 안절부절못하며 몇 번이나 제 발을 확인했습니다. 마치 고급 집기에 상처를 내버린 어린 아이처럼.
이런 과잉된 배려가, 저는 싫지 않았습니다. 고아로 자라 언제나 혼자인 제가, 이 마을에서만큼은 누구나 우러러보는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니까요.
딩동댕동-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의 목적지는 언제나 정해져 있습니다.
복도를 걷습니다. 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양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줍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의 마룻바닥이 끼익, 끼익, 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공기를 헤치고 구관 건물의 가장 깊은 곳으로.
유일하게 쾌적하고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오는 성역.
그곳은 이 학교에서, 아니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제가 '사람'으로서 만져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드르륵.
조심스럽게 미닫이문을 열자 익숙한 공기가 저를 감쌌습니다.
차가운 알코올, 마른 종이 냄새, 그리고... 씁쓸하고 매캐한 멘솔 담배 향기.
"......왔니, 아마네."
창가에 기대어 하얀 연기를 뱉어내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역광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늘 권태와 피로에 젖어있는 그 낮게 잠긴 목소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이 마을에서, 오직 한명. 나에게 닿을 수 있는 사람.
"선생님, 또 담배 피우셨나요?"
저는 코를 살짝 찡긋하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선생님에게 달려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저는 얌전한 학생처럼 뒷짐을 지고 선생님 곁에 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의 없는 아이를 싫어하실지도 모르니까요.
"냄새나? 싫으면 오지 말라니까."
선생님은 짐짓 쌀쌀맞게 대꾸하면서도, 피우던 담배를 황급히 재떨이에 비벼 끄셨습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늘 과로에 시달리시니까요.
"싫지 않아요. 그저... 선생님의 목이 상하면, 엄청 슬플 것 같으니까요."
저는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선생님의 하얀 가운 자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건드렸습니다. 그 옷자락에서 나는 어른의 냄새가 좋았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고맙네. 정기 검진 해야하니까 거기 앉아."
평범한 한마디가 마치 꼭 신탁처럼 느껴졌습니다. 오직 단 두명. 저를 평범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 잘 대해줘야죠. 그럼. 저는 훈련받은 강아지처럼 보건실 침대 위에 얌전히 걸터앉았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퀭한 눈동자가, 오직 저만을 담고 있었습니다.
"실례할게."
선생님의 서늘한 손가락이 제 블라우스 단추를 조금 풀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자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저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청진기가 가슴 중앙에 닿았습니다.
"심박수 정상. 폐 잡음 없음. 체온... 36.5도."
청진기를 떼어낸 선생님의 손이 제 팔을 잡고 소매를 걷어 올리셨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팔뚝과 손목,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하게 훑어 내렸습니다. 그러고는 제 턱을 들어 올려 입안을, 치아 상태를, 귓바퀴 뒤쪽을 살피셨습니다.
마치 명품 도자기의 미세한 흠집을 찾아내는 감정사처럼, 그 눈빛은 더없이 진지하고 날카로웠습니다.
선생님의 손이 제 목덜미를 감싸 쥐었습니다. 가장 취약하고 여린 부위. 선생님이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그곳을, 선생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셨습니다.
"깨끗하네."
"당연하죠. 선생님께서 당분간은 뛰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학우분들도 항상 과보호 해주시기도 하구요."
제가 해맑게 대답하자, 선생님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습니다.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슬픔인지 연민인지 모를 깊은 눈으로 제 눈을 빤히 응시하셨습니다.
"착한 아이네. 아마네는. ...정말 착해."
선생님의 엄지손가락이 제 입술을 무의식적으로 지그시 눌렀다 떼어냈습니다. 니코틴 냄새가 밴 그 손길이 다정하여 가슴 안쪽이 간질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정말 아껴주시는구나, 하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자, 아 - 해봐."
선생님이 가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까서 제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혀끝에서 달콤하고 몽롱한 맛이 퍼져나갔습니다.
"이거 먹고 교실로 돌아가. 얌전히, 인형처럼 있어야 한다."
"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선생님."
저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보건실을 나섰습니다.
선생님께서 챙겨주신 사탕은 언제나 기분 좋은 나른함을 가져다줍니다. 머릿속이 솜사탕처럼 하얗게 변하고, 불안이나 두려움이 사라지는 마법의 사탕.
오늘도 선생님을 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은 하루입니다.
하자마 사요코의 이야기
드르륵. 탁.
문이 닫히고, 복도 저편으로 아마네의 가벼운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명치끝이 꽉 막힌 듯 답답한 통증이 위장을 쥐어짜는 듯했다.
"......우윽."
나는 입을 틀어막고 세면대로 달려갔다. 올라오는 위액을 가까스로 삼키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네의 살결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그 맹목적인 신뢰가 내 피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의 목이 상하면, 엄청 슬플 것 같으니까요.‘
구역질이 났다.
나를 걱정하는 그 순진한 눈망울이. 살인자의 건강을 염려하는 피해자의 다정함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구겨진 담배갑을 다시 꺼냈다. 손가락 끝이 심하게 경련하고 있어 라이터를 켜는 데만 세 번을 실패했다.
치익.
독한 연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뇌를 갉아먹는 죄책감이 아주 조금 희석되었다. 니코틴이 혈관을 타고 돌며 미쳐 날뛰던 신경을 강제로 눌러주었다.
아마네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지금 행한 것이 의료 행위가 아니라 품질 관리(QC)라는 것을.
자신의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한 이유가, 흠집 난 제물은 신에게 바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스르륵-
그때, 보건실 안쪽 깊숙한 곳, 샤워실 커튼이 소리 없이 걷혔다.
어둠 속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 마을의 촌장이자, 카미사비 신사를 관리하는 나의 아버지, 하자마 겐조였다.
그는 아마네가 들어오기 전부터 그곳에 숨죽이고 있었다.
"......아마네님은 어떠시더냐."
아버지는 건조한 눈으로 아마네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던 침대 시트의 주름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도축장에 끌려갈 소의 육질을 묻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최대한 감정을 죽인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우 양호합니다. 피부질환, 충치, 골절 모두 없습니다. 심리 상태도 안정적이고요."
"그래, 아마네님이 널 친언니처럼 따르더구나. 좋은 가족이 있는 것 만으로 인간은 상당히 안정되지."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올해 장마는 유난히 길구나. 바다 신께서 많이 굶주리신 게야. 17년 전보다 더 큰 제물을 원하고 계셔."
"...아직 아이입니다. 뼈대가 얇아요. 지금 보내면 신께서도 만족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았다. 그 뱀 같은 눈빛에 담긴 서늘한 살기에 내 말문이 턱 막혔다.
"사요코."
아버지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축축하고 무거운 압박감.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끔찍한 협박이었다.
"너는 '관리자'다. 상품에 정을 주어서는 안 돼. ...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어머니.
17년 전, 제물을 바치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버린, 나의 나약한 어머니.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고등학교를 졸업 하실 때 까지는 너의 교육방침에 참견하지 않으마. 그야 아마네님은 해신의 아내 되실 분 아니더냐.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가셔야지."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보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마치 감옥의 철창이 닫히는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빗소리만이 내 고막을 때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다가가, 아마네를 만졌던 손을 거칠게 씻어냈다. 비누칠을 하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하지만 손끝에 닿았던 그 아이의 따뜻한 맥박은 지워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내가 아마네에게 준 것과 똑같은 사탕 봉지가 놓여 있었다.
[성분명: 고농도 진정제 및 환각 유도제]
아마네는 지금쯤 교실에서 몽롱한 행복감에 젖어 있겠지. 그것이 자신의 공포심을 거세하고 사고를 마비시키는 독약인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준 귀한 선물이라며 아껴 먹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여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웃는 얼굴로 아이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도살자(屠殺者)의 얼굴이었다.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아마네의 해맑은 미소가 아른거렸다.
부디 아마네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것도 모르기를.
네가 가장 행복한 꿈을 꿀 때, 내 손으로 너를 저 차가운 바다 밑바닥에 잠재워 줄 테니까.
[카지와라 이부키에 대하여, 미나토 아마네의 관점]
보건실에서 돌아온 뒤, 5교시는 자습 시간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급하게 뛰어오셔서 칠판에 '자습'이라는 두 글자만 휘갈겨 쓰고는 교무실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비 오는 오후의 교실은 선생님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권태로움인 모양입니다.
교실 안은 금세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스마트폰 게임을 하거나, 주말에 있을 할인 행사에 대해 떠들었습니다.
그 소란스러운 일상의 한가운데, 마치 투명한 유리벽이 쳐진 듯 고요한 섬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제 자리입니다.
저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창문에 맺히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참고서와, 사요코 선생님이 주신 사탕 껍질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드르륵-
그때, 앞자리의 빈 의자가 뒤로 주욱 밀려났습니다.
누군가 등받이를 앞으로 하고 거꾸로 걸터앉았습니다.
"......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고개를 들자,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포니테일이 눈앞에서 찰랑거렸습니다. 헐렁한 체육복 저지를 걸친, 날카로운 눈매의 소녀.
카지와라 이부키 양이었습니다.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제게 '아마네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 거친 바람 같은 아이.
"안녕하세요, 이부키 양. ...수업 시간인데요."
"자습이잖아. 선생님도 도망갔는데 뭘."
이부키 양은 턱을 의자 등받이에 괴고 저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에게서 비릿한 빗물 냄새와 옅은 땀 냄새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는 정반대인, 뜨겁고 생생한 '삶'의 냄새였습니다.
"너, 머리카락."
이부키 양이 불쑥 손을 뻗어 제 앞머리를 건드렸습니다.
"비라도 맞았어? 축축하잖아."
"아, 창문을 잠깐 열어뒀더니..."
"가만히 있어 봐."
이부키 양은 자신이 입고 있던 체육복 소매를 길게 끌어당겨, 제 젖은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손길이었습니다. 사요코 선생님의 섬세한 터치와는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그 투박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너 몸도 약한 주제에."
"괜찮아요. 그런 일이 있으면 선생님이 간호해주실 테니까.."
제가 주머니 속의 사탕을 만지작거리며 웃자, 이부키 양의 손이 딱 멈췄습니다.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예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아주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을 뿐입니다.
"......넌, 그 여자가 주는 거라면 독이라도 받아먹겠지."
"네? 독이라뇨. 평범한 영양제인걸요."
"됐다. 말해 뭐하냐."
이부키 양은 체념한 듯 머리를 털어주던 손을 거두고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딸기 우유였습니다.
"자. 마셔."
"어? 저는 괜찮..."
"먹어. 그 사탕만 빨고 있지 말고. 너 점심도 거의 안 먹었잖아."
그녀는 제 책상 위에 우유를 퉁명스럽게 올려놓고는, 빨대까지 꽂아주었습니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는 그 강압적인 친절에 저는 어쩔 수 없이 우유를 받아들었습니다.
한 모금 마시자, 인공적인 딸기 향과 달콤한 우유 맛이 입안에 퍼졌습니다. 사요코 선생님의 사탕이 몽롱한 단맛이라면, 이부키 양이 준 우유는 현실적인 단맛이었습니다.
"맛있어요. 고마워요, 이부키 양."
"......쳇."
이부키 양은 제 인사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힐끔거리며 제 하얀 실내화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발, 안 시려?"
"네?"
"바닥에서 냉기 올라오잖아. 그 실내화, 밑창도 얇아 빠져가지고."
이부키 양은 자신의 발을 뻗어 제 발 옆에 툭, 대보았습니다.
진흙이 묻고 여기저기 닳은 그녀의 낡은 운동화. 그리고 티끌 하나 없이 하얀 제 실내화. 두 개의 발은 마치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았습니다.
"양말도 얇은 거 신고 다니고... 진짜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라니까."
"죄송해요. 하지만 두꺼운 양말은 모양이 안 예쁘다고 선생님이..."
"또 그놈의 선생님."
이부키 양이 낮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녀는 잠시 무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제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거 봐."
"이게 뭐예요?"
화면 속에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거리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 높게 솟은 빌딩, 그리고 알록달록한 간판들.
"도쿄야.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사람이 엄청 많네요. 머리 아플 것 같아요."
"안 그래. 실제로 가면 시끄러운데, 그게 꽤 기분 좋아. 아무도 남한테 신경 안 쓰고, 다들 자기 갈 길만 가거든."
이부키 양은 화면을 옆으로 넘겼습니다. 예쁜 케이크가 있는 카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공원, 거대한 서점...
저에게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텔레비전 속에서나 존재하는 풍경들이었습니다.
"졸업하면 갈 거야. 이 지긋지긋한 비 냄새 나는 동네 떠나서."
"좋겠네요, 이부키 양은. 달리기도 잘하니까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부키 양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보는 눈빛이 물기를 머금은 듯 애틋해졌습니다.
"......너도 갈 수 있어."
"네?"
"너만 마음먹으면, 갈 수 있다고. 기차 한 번만 타면 돼."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부키 양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남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였습니다.
"미나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네."
"그, 뭐냐. 기도가 끝나고 나서도 네가 여기 있기 싫어지면, 그때 나한테 말해."
"......?"
"내가 업고라도 데려가 줄게."
이부키 양의 눈은 진지했습니다.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불타는 듯한 눈동자.
저는 그 눈빛이 조금 무서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습니다. 왜 이부키 양은 저런 슬픈 표정으로 미래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후후, 저는 마을을 떠날 수 없는 거 아시잖아요. 선생님도 여기 계시고."
"하아..."
이부키 양은 깊은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헝클어뜨렸습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저를 몰아세우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끼고 있던 이어폰 한쪽을 빼서 제 귀에 꽂아주었습니다.
"듣기나 해."
"네?"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빗소리도, 교실의 소음도 아닌, 쿵쿵거리는 강한 비트의 락 음악.
제 심장 박동보다 빠른 리듬이 고막을 때렸습니다.
"시끄러운 게 싫으면, 차라리 이런 걸 들어. 빗소리 말고."
이부키 양은 나머지 한쪽 이어폰을 자기 귀에 꽂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어폰 줄 하나로 연결된 채, 말없이 창밖의 비를 바라보았습니다.
제 귀에서는 낯선 가수가 '자유'에 대해 소리 지르고 있었고, 책상 위에는 딸기 우유가 놓여 있었고, 젖은 제 머리카락에서는 이부키 양의 체육복 냄새가 났습니다.
선생님의 품이 차갑고 고요한 물속 같다면.
이부키 양의 곁은... 마치 불이 켜진 난로 같았습니다. 조금 뜨겁고, 시끄럽지만,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그런 온도.
저는 빨대를 입에 물고, 엎드린 이부키 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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