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ew!
신카마 타워 앞. 한 가운데에 단정한 듯 단정하지 않은 복장으로 고개를 치켜들어 어딘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멍한 눈으로 좇아 고개까지 꺾어가면서 그녀와 대형 스크린을 번갈아 훑어보는 인간들이 빠르게 지나쳐 간다.
깜박이는 홍빛 눈동자엔 깜빡거리며 화면이 전환되는 네모난 스크린이 한가득 담긴다. 그 안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추모식이 한창이다. 위인도 아니고, 누군가에겐 제 한 목숨 죽도록 바쳐도 복수의 발 끝 조차 맛보지 못했을 극악무도한 범죄자 였었을 텐데. 그러했던 사실이 자랑거리라도 되는 마냥 저렇게 대문짝만한 TV에서 뉴스로 박제되어 나온다는 게.. 그 얼마나, 어찌나
....낭만적인지.
부풀어 오르는 마음에 사뿐하게 두 손을 맞잡고 사르륵 녹아 천진하게 웃는 모습에 주변 행인들이 흠칫하며 그녀를 흘깃거린다. 비아냥의 실소인지 동경의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유사는 갈색의 연초를 입술 사이에 밀어 넣어 제 라이터로 불을 붙히며 정해진 약속이라도 있는 양 어딘가로 빠르게 사라졌다.
/
그녀의 도각거리는 발걸음이 멈춘 곳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키리야마의 라운지 앞이었다. 집 앞으로까지 찾아와서 못살게 구는 허접들을 버리고 급하게 야반도주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마냥 무작정 도망쳐 나오긴 했는데, 생각보다 도쿄의 물가가 이렇게나 배로 차이가 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저래 평소 사용하던 대로 습관처럼 지불하다보니 결국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20,000엔. 푹신하고 청결한 숙소에서 하루 자고 일어나면 없어질 푼돈. 실용성 하나 없이 작고 우아한 핸드백이 가여워 야만적으로 현금을 쑤셔 박고 싶지 않았고, 이제껏 물처럼 긁어대었던 카드들은 죄다 헤어진지 한 세월임에도 카드를 정지하지 않고 내역으로 제 근황을 훔쳐보던 전남친들의 것이었지 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에게 값을 매겨 돈을 모으는 성격이었다면 이런 곳에 발 들이지 않았어도 될 터. 하지만 어차피 돈은 받아 쓰는 거잖아? 어여쁜 그녀에게 그런 노골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무런 상관도 가치도 없는 것이다.
라운지 옆 골목에서 담배를 비벼 끈 유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매무새를 정돈했다. 입장제한이 있든 없든 그녀는 겪어 본 적 없는 이야기. 한 눈에도 고급진 라운지 안으로 곧장 들어서 충실한 꽃밭의 청순한 얼굴을 하고서 느긋한 걸음걸이로 바 테이블에 착석한다. 소란한 뉴스 때문인가 라운지 안은 생각보다 북적이는 듯했다. 곧이어 테이블 바 자리도 어느새 만석이 될 테지. 단연 그녀 때문만은 아닐 테다.
“안녕, 헤네시 온더락으로 줘요.”
묶은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리며 품에서 왠지 모를 단내음의 살냄새를 풍기던 유사는 바텐더에게 넌지시 부스스한 웃음을 흘린다. 낮은 연산의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게 얼마나 유감스러운 지.
>>200 진행
유사는 가벼운 웃음으로 바텐더에게 인사를 대신하고 능숙하게 잔을 들어 차가운 얼음과 미지근한 브랜디의 마찰을 위해 한 바퀴 두 바퀴 잔을 빙글거렸다. 달그락 소리가 나쁘지 않다. 모두들 값진 옷을 입고 있지만 갑작스럽게 은퇴해 버린 악당의 파장이 크긴 한 듯 대부분이 부산스럽다.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곳에서 이방인이나 다름 없는 유사는 정보가 몹시도 부족하니.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무던하게 주위를 훑었을 때 도움이 될 만해 보이는 테이블이 두 개. 한 쪽은 소란스러웠고 한 쪽은 소근거리기 바빴다. 당장 직관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것은 시끄러운 쪽이겠다. 유사는 브랜디를 입에 머금고 혀를 굴리다 목구멍으로 넘겼다. 밤은 길고 급할 건 없으니 느긋하게 마시자고.
유사는 진지한 분위기의 테이블 근처로 잔을 들고 고상하게 걸어가 근방에 가장 화려한 장식을 감상하는 척 태연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런 고급진 라운지에서 외로워보이는 여자 하나 서성거린다 한들 누가 신경쓰겠나. 그러니 이 번잡한 공간 속 얼굴과 머리가 똑같이 청순해 보이는 저를 신경 쓸 정도로 별 거 없는 대화일까, ..아니면 저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는 긴박하고 은밀한 대화일까. 유사는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장식을 감상한다. 차가운 브랜디가 흐르는 목구멍이 뜨겁다. 노랫소리가 인간들 사이 빈 공간을 메어 온다.
무직 백수로 사회에 하등 도움되지 않고 있는 유사와 달리 힘겹게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시간이 되어 바쁘게 퇴장하는 직장인이 가득한 저녁시간. 작업치기 적당한 늦은 시간까지는 아직 이르다. 빈 속에 술을 부을 순 없으니 그전에 간단하게 끼니를 떼우면 좋겠다. 그러나 유사는 입이 짧아 여러가지를 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좋아했지, 한 가지만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은 어려워 했다. 같이 나눠 먹거나 사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이례적인 일이다. 데이팅 앱에 셀카 한 장과 ‘유유쨩, 외로워ㅠ_ㅠ’ 정도만 올려도 비싸게 끼니를 떼울 수도 있겠지만-..
저녁만은 조용한 곳에서 쉬어가고 싶었으므로 번화가가 아닌 주택가 근처 상인들이 밀집해 있는 조용한 골목을 찾아 아담한 이자카야를 골라 들어갔다. 사실 더 이상 걷고 싶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젊은이보단 나이가 찬 소수가 자리에 앉아 퇴근 후 소소한 맥주와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유사도 어렵지 않게 구석 자리에 착석하여 -옆엔 짧은 스포츠 머리가 눈에 띄는 사나운 인상의 남성이 이미 자리해 있었다- 진저 하이볼과 가지 구이, 버섯구이, 은행 정도를 주문해두고 가게 밖 골목으로 빠져나와 갈색 연초에 불을 붙혔다. 화려한 번화가와 정반대의 소소한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불씨를 빨아들인다. 지나가는 천진한 중고등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어렴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