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4 [1:1/현대판타지/HL]피안화 물든 빛 - 18 (1001)
종료
작성자: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늘 기적처럼 아름다웠다
작성일:2026-02-10 (화) 16:15:05
갱신일:2026-03-10 (화) 16:20:39
#0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늘 기적처럼 아름다웠다(fayqpWvFPe)2026-02-10 (화) 16:15:05
처음에는 그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는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이 안심되었고 그러다 웃는 모습이 어떨까 그려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곁에서 환히 웃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언제나 진심을 전하고 싶었어.
당신의 곁에서 예전처럼 웃을 수 있었는데도 마음을 여는 것이 무서워서 어느센가 이 웃음마저 왠지 거짓말처럼 되어버려.
그래도 모른 척 내게 내밀어준 그 손이 너무나 따스해서, 그저 당신도 나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길 바라며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Я люблю тебя
愛してる
전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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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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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린과 나시네의 행방불명 - 화요일(4708e6ab)2026-03-07 (토) 11:53:45
그 날은 아무 일도 없었다. 따라다니는 것 같던 시선도 그 문자를 본 후 사라졌고 나시네와 그는 한가로히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돌아온 방은 뉘엿뉘엿 지는 해만 창으로 보이고 텅 비어있었다.
[어디에 계신건가요?]
옆의 1은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메시지 창에 뜬 린의 번호로 보낸 문자는 덩그러니 채팅창에 한 줄 남아있었다.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어?”
옆에서 위스키를 섞던 동료가 묻는다. 그는 말없이 시선을 깔고 빈 잔을 치우는데 집중했다.
“여자 문제야? 전에 온 일본 여자애 맞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동료가 한 번 씩 웃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장난스러운 눈빛이 전혀 그의 말을 납득한 것 같지 않아 알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학 근처의 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곳이며 더 붐빌 여름에 평소보다 조용했다.
“아, 알렌 지금 잭 다니엘 몇 병 남았더라?”
“어제 남은 게 5병 정도였어요. 왜요?”
“그게, 진열대에 없어.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려나 봐. 가져오는 동안 네가 좀 카운터를 봐줄 수 있어?”
“괜찮아요. 제가 갈게요.”
어 그래? 그럼 고마워. 그 말을 뒤로 동료는 한 눈에도 정신이 없어보이는 얼굴로 빠르게 남은 주문을 처리하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알렌은 뒤 편의 문을 열고서 건물 뒤의 골목과 연결된 창고로 들어갔다.
한 세 병 정도면 오늘은 충분할까. 상자에 담긴 병을 세어보고 고민에 빠졌을때였다. 얇은 벽을 사이로 다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서 든 병을 내려놓고 창고의 창을 바라봤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와 그 여자 앞에 선 몇 명의 남자가 보였다.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차림새와 분위기가 이 곳에 살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대학가와 인접하여 방학 중 사람이 적다는 얘기는 반대로 대학생의 수가 줄어 평소보다 항시 유흥가를 전전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뜻도 되었다. 알렌은 바로 급하게 창고의 뒷문으로 나갔다.
“뭐야?”
거칠고 걸걸한 한 마디. 걷어올린 소매와 아래에 빼곡히 아로새겨진 문신이 역시나 싶어 알렌의 이마에 저절로 주름이 졌다. 이미 몇 번 본 놈들이었다. 희미한 빛에 알렌의 얼굴이 드러나자 상대도 알아본 듯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오만상을 찌푸리며 탁, 가래침을 뱉는다.
“가자.”
상당히 거친 욕설과 함께. 여자를 둘러싸던 남자들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대고서 서있었다.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다가가 상체를 숙이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고 갸름한 턱선과 여린 체형이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야시시…아니 린 씨?”
그녀가 이 곳에 이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꼭 닮은 그의 룸메이트일 수밖에 없었다. 린이 고개를 내리고 얼굴을 가린 야구모자를 더 내리눌렀다. 골목이 어두워서일까, 희미하게 비치는 옆 얼굴이 위태해 보였다.
“옆에서 일하는 데 들어가 계실래요?”
그 모습을 마냥 두고 보기도 그랬다. 나시네의 얼굴에 마치 과거의 그와 같은 표정을 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순히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하던 어린 시절의 파괴적인 반항성이 그녀에게 보였다면 반감이라도 들었을 텐데 그녀에게 보이는 감정은 무차별적인 부정과는 거리가 있어 더 미묘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는 않아?”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그를 옆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만일 지금 나를 도와준 것으로 당신에게 피해가 간다면?”
어제 낮에 만났던 여인의 얼굴을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여인보다는 아직은 소녀에 가까운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수줍게 웃는다. 그와 똑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앞에 선 여자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무심한듯 날 선 논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방금 전에 제 얼굴 보고 가버린 거 보셨잖아요. 저 본국에서 경호 전공이었어요.”
붉은 눈이 말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그의 벽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벽에 비치는 두 그림자의 거리가 잠시 가까워졌다.
“어쩜 이렇게.”
하, 한 번 숨을 뱉어내다 슬그며니 비웃음일지 한탄일지 뜻모를 미소를 희미하게 지은 린이 고개를 돌려 알렌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붉은 눈에 칙칙한 빛의 창고 외벽이 비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말대로 들어가는 게 낫겠어.”
먼저 발을 떼고 린이 망설임 없이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정문을 찾았다. 이 곳은 처음 아니었나? 알렌은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시네가 몇 번 찾아왔던 뒤로 단 한 번도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성을 주변에서 본 적은 없었다.
“오 남아있었구나. 다행이다.”
다시 창고로 들어가 잭 다니엘을 가져온 알렌을 본 동료가 반가운 기색으로 외친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지인을 만나서…”
“아 하야시타인가 그 여학생? 저기 있네.”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다른데? 신난 손놀림으로 동료가 재빨리 잔을 알렌에게 넘겨준다. 급한대로 잔을 받아 읊어주는 대로 일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이 급하게 움직이며 동료의 손짓을 따라가 가게 안을 살펴본다. 긴 검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녀가 모퉁이에 보였다. 린을 바라보기 무섭게 붉은 눈이 그를 마주 바라본다.
붉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슬며시 눈웃음을 짓던 여자가 놀리듯 시선을 살며시 동료쪽으로 옮긴다. 그리고서는 다시 알렌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 여학생 맞냐?”
잠시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알렌이 바라보던 쪽을 같이 바라보던 동료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그 여학생이라, 누굴 말씀하시는 걸까요?”
옆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조금 거리가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던 린이 앞에서 생글거리며 카운터 옆의 바 자리에 앉아있었다. 언제 모자를 벗었는지 긴 검은 머리가 허리께까지 내려와 살며시 흔들렸다.
“저는 알렌이 옆의 카페에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요. 찾아오느라 해멨네요.”
태연자약한 얼굴로 메뉴판을 넘기며 지인행세를 하는 린을 앞에 두고 알렌은 무어라 할 수도 없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보다도 앞에 앉은 그녀의 차림새가 나시네를 볼 때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 조금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골목과 걸친 가죽 점퍼에 잘 보이지 않던 탱크탑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차림이 바의 불빛에서 그대로 보였다.
‘야…하야뭐..가 맞아? 진짜로?’
동료가 입을 벙긋거리며 계속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머리가 어지러워 어떻게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 친구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건전하다 하더라도 주류와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할 줄은 몰랐거든요. 아 참, 마가리타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린 씨?”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내 주량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순간 나시네의 주량을 떠올린 알렌이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자 린이 까르르 웃으며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접고 내렸다.
“어, 그, 내가 만들 테니까 얘기하고 있어.”
옆에서 동료가 몇 걸음 물러나 빠르게 데킬라를 들어올려 선수를 쳤다. 알렌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뭘 하려고 하는 거에요?”
“날 지인으로 소개했으니 그에 맞춰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하야시시타와 동일하게 보여지는 게 달갑지 않아.”
“네? 아니, 그게 그 거리에서 들려…”
쉿,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가라앉은 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살며시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 시선을 따라 알렌이 옆을 바라보니 동료가 라임을 얹은 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마가리타 나왔습니다! 알렌의 친구…”
“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래도 되나요?”
“알렌과 친하면 어차피 저와도 친해질 테니까요. 미리 이름으로 부르세요.”
린은 피식 웃으며 바로 다가올 때 보였던 장난치는 듯한 미소로 잔을 받아들었다. 그 미소를 보고서 동료가 괜히 머리를 긁적이다 아하하 웃는다.
“좋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린. 그나저나 정말 한국어 잘하시네요.”
나시네는 영어 혹은 일본어와 다르게 아직 한국어로 회화를 하기엔 어눌한 부분이 있었다. 린은 처음부터 알렌에게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알렌은 지금껏 알아채지 못한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다.
하야시시타와 동일하게 보여지고 싶지 않다는 말은 반대로 린 자신이 하야시시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맑게 웃던 하야시시타와 앞에 앉은 진심이 한치도 보이지 않는 여자가 번갈아 머릿속에 오갔다.
“마가리타의 유래가 매우 다양한데 그 중 일본에서는 바텐더가 떠난 연인을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딴 술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던데요?”
“어머, 정말 잘 아시네요. 저도 그 얘기 들어보았어요.”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알렌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낭만적이지 않나요? 원래 일화는 좀 재미가…알렌 뭐해?”
“괜찮아요 형.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걱정스러운 눈을 하던 동료가 알렌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 번 등을 툭 치며 웃었다.
“얘가 이렇다니까요.”
“알렌이 좀 진지하잖아요. 평소에 정신을 놓으면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한 적도 있지 않나요?”
“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근데 -한적은 없긴 해요.”
“어머…”
하하 웃으며 즐겁게 얘기하는 동료, 살며시 단아하게도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띠운 린, 하지만 알렌은 순간 그녀의 붉은 눈에 스치는 위화감을 보았다.
“예전과는 달라진 모양이네. 그렇지 알렌?”
투명한 빛의 음료가 한 모금 그녀의 입술로 넘어갔다. 슬픔? 아니면 혼란? 혹은, 알렌이 위화감의 정체를 제대로 정의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붉은빛 시선이 어두운 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동안 학업 때문에 연락하지 않고 지냈으니까요. 이제는 가까이서 얘기할 수 있을 테니 노력해볼까 해요.”
한국에서 제가 가진 하나밖에 없는 인맥이라서요.
금새 방긋 웃으며 동료를 바라보고 웃는 여자가 알렌의 눈에는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간절함. 붉은 눈에서 순간 혼란과 간절함이 보였다.
[어디에 계신건가요?]
옆의 1은 계속 사라지지 않았다. 메시지 창에 뜬 린의 번호로 보낸 문자는 덩그러니 채팅창에 한 줄 남아있었다.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어?”
옆에서 위스키를 섞던 동료가 묻는다. 그는 말없이 시선을 깔고 빈 잔을 치우는데 집중했다.
“여자 문제야? 전에 온 일본 여자애 맞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동료가 한 번 씩 웃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장난스러운 눈빛이 전혀 그의 말을 납득한 것 같지 않아 알렌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학 근처의 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곳이며 더 붐빌 여름에 평소보다 조용했다.
“아, 알렌 지금 잭 다니엘 몇 병 남았더라?”
“어제 남은 게 5병 정도였어요. 왜요?”
“그게, 진열대에 없어.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려나 봐. 가져오는 동안 네가 좀 카운터를 봐줄 수 있어?”
“괜찮아요. 제가 갈게요.”
어 그래? 그럼 고마워. 그 말을 뒤로 동료는 한 눈에도 정신이 없어보이는 얼굴로 빠르게 남은 주문을 처리하고 카운터로 달려갔다. 알렌은 뒤 편의 문을 열고서 건물 뒤의 골목과 연결된 창고로 들어갔다.
한 세 병 정도면 오늘은 충분할까. 상자에 담긴 병을 세어보고 고민에 빠졌을때였다. 얇은 벽을 사이로 다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서 든 병을 내려놓고 창고의 창을 바라봤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여자와 그 여자 앞에 선 몇 명의 남자가 보였다.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차림새와 분위기가 이 곳에 살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대학가와 인접하여 방학 중 사람이 적다는 얘기는 반대로 대학생의 수가 줄어 평소보다 항시 유흥가를 전전하는 비율이 늘었다는 뜻도 되었다. 알렌은 바로 급하게 창고의 뒷문으로 나갔다.
“뭐야?”
거칠고 걸걸한 한 마디. 걷어올린 소매와 아래에 빼곡히 아로새겨진 문신이 역시나 싶어 알렌의 이마에 저절로 주름이 졌다. 이미 몇 번 본 놈들이었다. 희미한 빛에 알렌의 얼굴이 드러나자 상대도 알아본 듯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오만상을 찌푸리며 탁, 가래침을 뱉는다.
“가자.”
상당히 거친 욕설과 함께. 여자를 둘러싸던 남자들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여자는 여전히 벽에 등을 기대고서 서있었다.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다가가 상체를 숙이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고 갸름한 턱선과 여린 체형이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여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야시시…아니 린 씨?”
그녀가 이 곳에 이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꼭 닮은 그의 룸메이트일 수밖에 없었다. 린이 고개를 내리고 얼굴을 가린 야구모자를 더 내리눌렀다. 골목이 어두워서일까, 희미하게 비치는 옆 얼굴이 위태해 보였다.
“옆에서 일하는 데 들어가 계실래요?”
그 모습을 마냥 두고 보기도 그랬다. 나시네의 얼굴에 마치 과거의 그와 같은 표정을 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순히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고 싶어하던 어린 시절의 파괴적인 반항성이 그녀에게 보였다면 반감이라도 들었을 텐데 그녀에게 보이는 감정은 무차별적인 부정과는 거리가 있어 더 미묘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는 않아?”
그녀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그를 옆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읽을 수 없는 차가운 표정이었다.
“만일 지금 나를 도와준 것으로 당신에게 피해가 간다면?”
어제 낮에 만났던 여인의 얼굴을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여인보다는 아직은 소녀에 가까운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재잘거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며 수줍게 웃는다. 그와 똑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앞에 선 여자는 똑바로 그를 바라보며 무심한듯 날 선 논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방금 전에 제 얼굴 보고 가버린 거 보셨잖아요. 저 본국에서 경호 전공이었어요.”
붉은 눈이 말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그의 벽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벽에 비치는 두 그림자의 거리가 잠시 가까워졌다.
“어쩜 이렇게.”
하, 한 번 숨을 뱉어내다 슬그며니 비웃음일지 한탄일지 뜻모를 미소를 희미하게 지은 린이 고개를 돌려 알렌에게서 시선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짙은 붉은 눈에 칙칙한 빛의 창고 외벽이 비쳤다.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 말대로 들어가는 게 낫겠어.”
먼저 발을 떼고 린이 망설임 없이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정문을 찾았다. 이 곳은 처음 아니었나? 알렌은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시네가 몇 번 찾아왔던 뒤로 단 한 번도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을 가진 여성을 주변에서 본 적은 없었다.
“오 남아있었구나. 다행이다.”
다시 창고로 들어가 잭 다니엘을 가져온 알렌을 본 동료가 반가운 기색으로 외친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지인을 만나서…”
“아 하야시타인가 그 여학생? 저기 있네.”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다른데? 신난 손놀림으로 동료가 재빨리 잔을 알렌에게 넘겨준다. 급한대로 잔을 받아 읊어주는 대로 일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이 급하게 움직이며 동료의 손짓을 따라가 가게 안을 살펴본다. 긴 검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녀가 모퉁이에 보였다. 린을 바라보기 무섭게 붉은 눈이 그를 마주 바라본다.
붉은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슬며시 눈웃음을 짓던 여자가 놀리듯 시선을 살며시 동료쪽으로 옮긴다. 그리고서는 다시 알렌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 여학생 맞냐?”
잠시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알렌이 바라보던 쪽을 같이 바라보던 동료가 놀란 얼굴로 묻는다.
“그 여학생이라, 누굴 말씀하시는 걸까요?”
옆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분명 조금 거리가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던 린이 앞에서 생글거리며 카운터 옆의 바 자리에 앉아있었다. 언제 모자를 벗었는지 긴 검은 머리가 허리께까지 내려와 살며시 흔들렸다.
“저는 알렌이 옆의 카페에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요. 찾아오느라 해멨네요.”
태연자약한 얼굴로 메뉴판을 넘기며 지인행세를 하는 린을 앞에 두고 알렌은 무어라 할 수도 없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의 행동보다도 앞에 앉은 그녀의 차림새가 나시네를 볼 때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 조금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골목과 걸친 가죽 점퍼에 잘 보이지 않던 탱크탑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차림이 바의 불빛에서 그대로 보였다.
‘야…하야뭐..가 맞아? 진짜로?’
동료가 입을 벙긋거리며 계속 알렌을 불렀다. 알렌은 머리가 어지러워 어떻게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 친구지만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건전하다 하더라도 주류와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할 줄은 몰랐거든요. 아 참, 마가리타 한 잔 주실 수 있나요?”
“린 씨?”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내 주량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순간 나시네의 주량을 떠올린 알렌이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보자 린이 까르르 웃으며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접고 내렸다.
“어, 그, 내가 만들 테니까 얘기하고 있어.”
옆에서 동료가 몇 걸음 물러나 빠르게 데킬라를 들어올려 선수를 쳤다. 알렌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뭘 하려고 하는 거에요?”
“날 지인으로 소개했으니 그에 맞춰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하야시시타와 동일하게 보여지는 게 달갑지 않아.”
“네? 아니, 그게 그 거리에서 들려…”
쉿,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가라앉은 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살며시 옆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 시선을 따라 알렌이 옆을 바라보니 동료가 라임을 얹은 잔을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마가리타 나왔습니다! 알렌의 친구…”
“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래도 되나요?”
“알렌과 친하면 어차피 저와도 친해질 테니까요. 미리 이름으로 부르세요.”
린은 피식 웃으며 바로 다가올 때 보였던 장난치는 듯한 미소로 잔을 받아들었다. 그 미소를 보고서 동료가 괜히 머리를 긁적이다 아하하 웃는다.
“좋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린. 그나저나 정말 한국어 잘하시네요.”
나시네는 영어 혹은 일본어와 다르게 아직 한국어로 회화를 하기엔 어눌한 부분이 있었다. 린은 처음부터 알렌에게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알렌은 지금껏 알아채지 못한 사실에 가슴 한 켠이 싸늘해졌다.
하야시시타와 동일하게 보여지고 싶지 않다는 말은 반대로 린 자신이 하야시시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맑게 웃던 하야시시타와 앞에 앉은 진심이 한치도 보이지 않는 여자가 번갈아 머릿속에 오갔다.
“마가리타의 유래가 매우 다양한데 그 중 일본에서는 바텐더가 떠난 연인을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딴 술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던데요?”
“어머, 정말 잘 아시네요. 저도 그 얘기 들어보았어요.”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알렌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낭만적이지 않나요? 원래 일화는 좀 재미가…알렌 뭐해?”
“괜찮아요 형.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요.”
걱정스러운 눈을 하던 동료가 알렌을 힐끗 바라보고는 한 번 등을 툭 치며 웃었다.
“얘가 이렇다니까요.”
“알렌이 좀 진지하잖아요. 평소에 정신을 놓으면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한 적도 있지 않나요?”
“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근데 -한적은 없긴 해요.”
“어머…”
하하 웃으며 즐겁게 얘기하는 동료, 살며시 단아하게도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띠운 린, 하지만 알렌은 순간 그녀의 붉은 눈에 스치는 위화감을 보았다.
“예전과는 달라진 모양이네. 그렇지 알렌?”
투명한 빛의 음료가 한 모금 그녀의 입술로 넘어갔다. 슬픔? 아니면 혼란? 혹은, 알렌이 위화감의 정체를 제대로 정의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붉은빛 시선이 어두운 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동안 학업 때문에 연락하지 않고 지냈으니까요. 이제는 가까이서 얘기할 수 있을 테니 노력해볼까 해요.”
한국에서 제가 가진 하나밖에 없는 인맥이라서요.
금새 방긋 웃으며 동료를 바라보고 웃는 여자가 알렌의 눈에는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간절함. 붉은 눈에서 순간 혼란과 간절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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